인간 연습
조정래 지음 / 실천문학사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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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오래된 연습

작품의 제목이 썩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사실 너무 친절했다. 『인간연습』이 아니고 ’인간’이거나 ’연습’이었다면 작품앞에서 조금은 덜 주춤거렸을지 모르겠다. 그런데 ’인간연습’이라고 하시니 나는 반사적으로 그렇다면 ’인간’앞에 형용될 그 ’어떤’ 인간에 물음이 닿았던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여기서 말하는 ’인간’ 이라는 의미가 철학적인 근원을 바탕으로 한 보편적인 성찰의 존재체라기 보다는 역사적인 배경위에 자리하는 한국적인 조건부의 개념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인 듯하다. 작가는 이 작품으로 분단문제를 마무리하고 싶었다고 했기에 식민의 해방과 역사, 분단과 전쟁의 역사에 천착해온 긴 여정의 길이 어떻게든 종착역에 이르렀음을 우리에게 알리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 사실은 독자인 나로 하여금 그토록 긴 여정의 마침표에 그저 관객으로서 웃으며 박수만 치게 할 것 같지는 않았음이다. 그래서 인지 작품의 양적인 두께에 비해서 사고를 확장케 하는 질적인 아젠다가 조금은 힘겨웠다. 마치 42.195 km를 쉬지 않고 달려온 마라톤 주자를 결승점에서 맞이하면서 내가 목격하고 만 것은 고작 발걸음을 멈추는 일뿐이었음을 알게 된 순간이거나 그 순간 밀려드는 알게 된 것에 대한 일종의 허탈감...그것도 두려웠음을 부인치 않겠다. 『인간연습』이 실은, 연습과정을 따라가면서 소정의 결과를 제시 할 것이 분명했기에(어쩌면 연습의 목표까지도...)나는 약삭빠르게 이 사실을 눈치 채고 선뜻 작품을 열어보지 못했던 독자였음을 고백한다.

나는 ’사회주의’자도 아니고 ’자본주의’자도 아니지만 돌이켜보면 ’반공주의’자임에는 틀림없었다. 우리 세대들은 당시 ’인간연습’보다는 ’반공연습’으로 오랫동안 길들여졌고 관리되어 왔다. 북한을 지칭할 때 ’괴뢰군’이나 ’괴수’라는 명사를 집요하게 강요하면서 ’무찌르자’, ’때려잡자’라는 원색적인 동사로 적개심을 선동하지 않았던가. 학교친구들과 동네에서 고무줄 놀이를 할 때 불렀던 노래의 첫 구절은 ’무찌르자 공산당’이거나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아니면 ’아아 잊으랴 어찌 우리 그날을’ 이 세곡이 전부였다. 어쩌다가 삐라를 주워 온 친구가 있으면 그날은 금방 전쟁이라도 일어 날 것처럼 공포에 떨었던 기억, 민방위 훈련 날에 울리던 싸이렌 소리, 간혹 가다 발견되던 남침용 땅굴 소식, 교과서에 흐릿한 사진으로 기록된 도끼 만행사건 등등...그 당시 세상의 온갖 잘못을 저지르는 사람들은 모두 공산당이었고, 세상에 모든 피해를 입힌 원흉 역시 공산당이었다. 당시 철없던 우리에게 각인된 반공사상은 그것이 선인지 악인지를 논하기 이전에 이미 남한인으로서의 인간 자격을 획득하는 하나의 통과의례였다고 생각된다. 그런데 우리가 반공연습에 매달리던 그때 북한에서도 마찬가지의 인민연습이 처절하게 시행되고 있었으리라. ’인간’이라는 것을 어떠한 주의나 종교를 배제한 본연의 고결한 존엄적 존재라고 가정한다면 어쩌면 북한이나 남한이나 인간이 아닌 엉뚱한 것을 연습해온 것은 아니었을까. 우리는 그동안 ’북한은 비인간적’, ’남한은 인간적’이라는 경험적 사실에 입각해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소련과 미국을 이분법적으로 구분짓는 국가에서 가장 기억력이 민첩할 시기에 그 이분법의 잣대를 획일적인 교육으로 받고 자랐다. 나는 이 사실을 깨달은 지는 오래되었지만 깨달았다고 해서 오랫동안 자리한 사고의 체계가 바뀌거나 부러 바꾸어야 할 필요를 느끼지는 못하며 살아왔다. 그래서 『인간연습』과 같은 문학작품을 마주할 때마다 늘 스스로 놀라고 그렇게 놀라는 내 자신이 적잖이 당황스럽다. 그리고 누군가에게 몹시 미안하며 알 수 없는 누군가가 많이도 미워진다. 작가의 분단여정 종착역에서 마음껏 박수치지는 못하지 싶은 마음 한구석에 아마 슬며시 외면하고픈 죄책감이나 부끄러움이 숨어 있었기에 선뜻 고개를 들지 못했는지도 모르겠다.

 
인간이라는 불행

소설의 시작은 낙엽이 흩날리는 공원에서였다. 가을 찬바람에 못 이겨 떨어지고 마는 한 잎 낙엽에서 잎잎이 친구의 죽음을 회상하며 누구나 허망한 죽음과 그보다 더 공허했던 친구의 삶을 기억하고 싶어 했다. 친구는 사회주의 사상의 이념적 동지였던 박동건, 자신은 병마에 휩쓸려 억지로 전향서에 도장을 찍고만 윤혁이라는 분단시대 가장 불행한 인간들이 주인공이었다. 그런데 윤혁이라는 인물의 시선으로 바라본 친구의 죽음은 생각보다 냉철했다. 평생을 좇기고 짓밟히며 살아온 친구의 한스런 죽음앞에서 겹쳐지는 자신의 눈물이 아마도 앞으로 살아가야 할 자신의 삶으로 귀결될 것임을 진즉에 알고 있었기 때문인지 그와는 일란성 쌍생아라고 하던 윤혁의 시선이 한때 혁명에 순혈을 바쳐온 동지라고 하기엔 비교적 담담해 보였음이다. 그런데 그것은 어쩌면 윤혁이라는 인물에 대한 내 나름의 편견이거나 거리감일 수도 있었다. 아니 작가가 감정을 절제한 시각으로 인물을 그렸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장례식장에서 박동건의 막내아들을 통해 밝혀지는 ’버려지고 외로웠던 박동건의 삶’은 분명 가슴 아픈 사연임에 틀림없었지만 나는 아직 그때까지만 해도 ’소설적 진실’보다 ’낭만적 거짓’에 더 갸우뚱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렇게 작품 초반에 등장하는 박동건의 삶과 죽음이 내게는 반갑지 않았음이고 공감은 커녕 어쩌면 내심 화를 품었던 건 아닐까 생각된다. 연좌제로 고생한 어머니와 사회에서 외면당한 큰형, 자살한 누나의 가족사를 막내에게 듣고 있던 내 심정은 분명 윤혁과는 달랐고 급기야 그 불편함은 ’하나의 신념을 저토록 오랜 세월 변함없이 지켜온 사람이야 말로 가장 순수하고 숭고한 그래서 비인간적인 사람들일 것이다’는 다소 자조적이고 냉소적인 사유로 흘러들었다. 어떤 것이 ’인간적’ 인 것인지 작품에 등장하는 윤혁의 어지럼증만큼이나 혼란스러웠다. 어지럼증을 극복하고 마침내 환청이나 망상에서 벗어난 윤혁처럼 박동건이라는 인간에 대한 어지럼증을 탈출하고자 나는 윤혁에게 은연중 무언가를 요구하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서로 마음을 의지하고 부축했던 유일한 대상인 박동건의 죽음은 사상의 변절자요, 혁명의 패배자가 되어버린 윤혁의 죄책감을 더욱 수면위로 떠오르게 하는 계기가 되었고 그 방어기제로 윤혁은 그동안 역사의 피해자에서 역사의 기록자로서 역할이동을 하게 된다. 물론, 그 변화과정이 깊고도 외로운 사유의 결과로 이루어진 것이기에 쉽지만은 않았다. 윤혁이 박동건과 같이 의미없는 ’수동적 죽음’을 맞이 하지 않고 의미있는 ’능동적 죽음’으로 다가가기 위한 일련의 행보가 썩 논리적으로 다가오진 않았지만 그것은 희망의 종착역을 향한 우리 모두의 바램을 반절 섞은 순수한 불순물로 충분히 이해될 만한(이해하고 싶은)개연성이었다. 윤혁마저 친구처럼 아니 친구보다 더 고독하게 죽음을 맞이 하게 된다면 비록 소설이지만 그 좌절감이 인간성을 상실한 것만큼 큰 상처가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인간이라는 행운

불행한 인간이었던 윤혁의 행운은 죽음을 준비하고 그것을 맞이하는 길에 우연히 만난 ’인간’들이었다. 죽음을 잘 준비하게 된 것이 결국 인간적인 삶의 한 부분이었다. 첫 번째 인간은 파릇파릇 새싹이 돋듯 온몸에 생기를 불어 넣는 두 송이 꽃의 기준과 경희였다. 기준과 경희는 주의나 이념에 자유로운 인간적인 정으로만 관계할 수 있는 어린 생명들로서 그들은 북에 두고 온 아내의 남쪽 그림자를 상징한다 할 것이다. 윤혁은 생명을 위협하는 것과 같은 아주 극적인 순간에 항상 아내의 얼굴이 떠올라 그 순간 ’깃발’이나 ’동지’가 떠오르지 않았던 자신에 인간으로서의 의아함과 사회주의자로서의 죄책감을 동시에 함의하고 있던 본능적 인간이었다. 여고생의 몸으로 후퇴하는 인민군을 따라 북행길을 마다하지 않았던 아내가 만약 임신을 하여 자신의 아이를 낳았다면 그 아이의 자식은 분명 기준과 경희처럼 꽃보다 어여쁜 손주였을 것이다. 윤혁은 두 아이들과 피도 이념도 나누지 않았지만 ’인간’으로서 ’인간’됨을 나누었기에 추후 피치 못할 헤어질 상황에서도 끝내 아이들을 버리지 않음으로써 자신이 ’인간’임을 지키려 했다고 볼 수 있다.

두 번째 행운은 감옥에서 사회주의라는 이념을 나눔으로써 인간적인 신뢰가 형성된 강민규라는 젊은이였다. 일본어를 번역하고 지식인으로서 문학적 소질이 내재되어 있던 윤혁에게 소련붕괴 후 바깥세상의 흐름과 변화에 대해 지속적으로 소식을 전달하던 강민규는 모든 관계가 단절된 전향자 윤혁으로선 유일한 사회적 네트워크이자 인적 경쟁력을 암시한다 할 수 있다. 사회주의 신봉자였던 강민규가 윤혁에게 공산주의의 붕괴원인을 다각도로 브리핑할 때는 마치 사회 선생님이 교단에 서서 학생을 가르치는 듯한 느낌을 받은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윤혁이 자신이 떠나올 당시엔 인민을 위한 당원의 희생이 더 중요했던 북한의 초심을 회상하며 몰락한 현실을 여전히 실감하지 못하는 장면 역시 상당히 억누르는 듯한 작가적 객관성을 느꼈기에 강민규의 설득과 윤혁의 고뇌가 소설적으로 공평하게 표현되었다고 생각한다.

친구 박동건에겐 이렇듯 생의 활기를 선사하던 아이들도 굳어진 사고를 말랑말랑하게 어루만져줄 젊은이도 없었기에 그토록 쓸쓸하게 삶을 마감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어쩌면 자신앞을 지나치던 그 모든 인간들을 그저 스쳐 보내지 않고 자신의 인생앞에 등장한 살아있는 인간으로서 그들을 받아들인 윤혁의 열린 마음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윤혁은 보호감찰자로서 늘 그를 감시하고 간섭하는 인간도 만나지만 그를 그저 공무수행의 역할자로서 받아 들이며 싸움을 거는 쪽을 인정하며 오히려 무색케 하는 전략을 구사하여 전향자로서 비교적 편한 생활을 유지해 나간다. 이 부분 역시 더 이상 자신의 과거를 갉아먹은 신념보다는 앞으로 남은 인생에 대한 가치를 보다 더 중요하게 인식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신념을 지키면서 인간이길 바라던 친구를 뛰어 넘어 인간을 지키면서 인간답게 살기를 바라게 되었던 것은 아닐까.

마지막 행운은 강민규의 부탁으로 집필하게 된 전향수기를 보고 자신을 찾아온 최선숙 보육원 원장이었다. 전쟁당시 대학병원 간호부시절 사병을 먼저 치료하라던 인민군 장교의 희생에 감명받아 사회주의를 지지하게 된 과거를 지닌 최원장이었다. 그녀에게 ’윤혁’이라는 전향자는 비록 인민군 장교와 동명이인이긴 하지만 최초 정신만은 순수했던 그 시절 아무도 모르게 간직하고 싶었던 ’윤혁’이라는 인간성의 순수 귀향지를 상징한다. 최원장은 그때 그 마음을 잃지 않고 윤혁과 두 아이들을 받아 들여 자신들이 꿈꾸는 인간의 꽃밭에 함께 머물러 줄 것을 부탁한다. 그 순간 나도 모르게 윤혁이 몸서리치던 독방에서 자살을 결심했을 때, 그리고 둘도 없던 친구에게 배신 당한 일들이 스쳐 지나가며 벅찬 눈물이 그렁거렸다. 연로하신 아버님과 어머니, 형수님까지 옥중에서 부고를 들으며 자신을 자책하던 윤혁에게도 더 살아가야 할 이유는 분명 있었던 것이었다. 나는 요즘 소설에서 마저 더 할 수 없이 비극적인 결말로 현실을 깨우치는 작품들을 많이 접했기에 오히려 이러한 미래적인 결말이 새삼 놀랍고 눈물겨웠다. 기약도 없이 오랫동안 기차를 타고 내려 보니 꼭 저 멀리서 하얀 옷을 입고 마중 나와 계신 어머니라도 발견 한 듯 기쁘고도 아릿했다. 그리고...그래서 이것이 소설임이 비로소 슬펐다. 윤혁에게 행복하냐고 물어 보고 싶었던 강민규가 끝내 말을 삼키고 그를 알고서 가장 행복해 보이는 모습을 간직하면서 막을 내리는 마지막이 소설이라는 것이, 그것이 우리의 현실은 아니라는 것이 아프게 느껴졌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는 말을 되짚으며 남쪽 하늘로 마음만 띄워 보낸다는 강민규의 담담한 목소리가 꼭 북에서 남을 향한, 남에서 북을 향한 그리운 넋두리 같았고 소설 밖으로 나온 나는 한참을 멍하니 남쪽 하늘을 바라보았다.


공평한 연습

이 작품은 ’사회주의’나 ’자본주의’ 할 거 없이 공통으로 우선시 되어야 할 것은 주의를 만들고 실천하는 것도 주의를 발전시키고 몰락시킨 것도 결국은 인간이었고 그러하기에 그 어떤 주의보다는 단한명의 인간이 더 우선시 되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었다. 더욱 인간적으로 살기 위해 비인간적이 될 수 있는 것도 인간이고 비인간적인 삶을 택했기에 어쩔 수 없이 인간적일 수밖에 없었던 것도 인간이라는 사실, 하지만 살아있는 한은 그러한 시행착오와 잔인한 역사속에서도 절대 우리가 인간임을 잃지 말고 끝까지 인간으로서 인감됨을 향해야 한다는 것을 정중하게 알려주었다. 그리고 그 인간됨을 향하는 발걸음은 그 어떤 인간에게도 필요한 인간연습의 과정임을 숙연하게 내비친다. 인간은 어쩌면 그러한 인간연습의 모든 과정이 끝나는 그 순간 인간으로서 생을 다할지 모른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인간성 보다 훨씬 더 높은 수치의 절대적 인간을 목표로 생을 끊임없이 다그친다고 믿기 때문이다. 하지만 작가는 그러한 과정이야 말로 누구나 아름다운 것이라고 격려하고 있다. 그 사실이 못내 고맙다. 목표치가 높았건 결과치가 형편없었건 누구나 인간으로서 인간다워짐을 노력하고 인간적인 삶을 살고자 하는 그 과정이 공평하게 아름다울 수 있다면 우리는 혹시 인간이 되지 못할지라도 그 연습만은 중단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반공주의에 깊게 물들여진 시각에서 벗어나 사회주의자로서의 인간적 고뇌를 논리적으로 만나볼 수 있어 뜻 깊었고 책을 덮고 난 지금 결국 분단과 전쟁에 관한 소설의 종착지에서 그를 환영하는 인파에 속할 수 있어 독자로서 무척이나 기쁘다. 다음의 작품에선 대기업 비리와 자본주의의 문제를 파헤치는 굵직한 서사를 특유의 필체로 그려내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언제나 우리 민족의 역사와 당면한 현실 앞에서 국민으로서의 진지한 성찰을 요구해온 작가의 저력에 고개 숙인다. 그를 기다리는 마음이 늘 편한 것만은 아니나 그것은 이 시대의 문학적 운명이며 그의 숙명이듯이 우리 독자들의 순명일 것이다. 나는 끝까지 그 운명에 동참하는 독자가 되고 싶은 밤이다. 남쪽 하늘은 아직 밝고도 아름다운 것 같다. 같은 하늘이기에 같은 인간임을 바래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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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짐승
헤르타 뮐러 지음, 박경희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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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 잠시멈춤

나는 이제 그녀가 어쩐지 우리와 아주 가까운 곳에 위치한 일본 오사카나 중국 상해쯤에 살고 있는 것으로 느껴진다. 피를 나눈 한 민족이거나 재외동포까지는 아니더라도 문학이라는 '마음기록'으로 기존의 심정적 거리는 물론 물리적 거리감까지 좁혀주었다는 생각이다. 그녀의 조국인 루마니아의 독재자  차우세스쿠가 오랜 기간 김일성을 추종해왔다는 사실은 두말할 나위도 없거니와 인생에서 가장 빛나야 할 시기에 비밀경찰의 감시로부터 자유롭지 못했으며 같은 시기에 우정을 나누던 친구들을 그들로부터 잃었다는 경험은 마치 북한 지식인으로서 탈북자라는 증언자가 되어 우리와 같은 언어로 우리의 비극을 노래하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의 온전한 공감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대학에서 루마니아 문학은 물론이고 영문학, 독문학까지 전공하고 번역가로서 활동한 그녀가 당시 체제에 협조해 달라는 요구를 거부하지 않고 세련된 방법으로 적당히 타협하며 살았다고 해도 한반도의 정세가 변함에 따라 친일과 친미를 넘나들었던 우리 지식인들을 떠올려 보면 그녀의 문학성과는 별도로 그마저도 충분히 용납할 수 있는, 그 마음 헤아릴만 한 우리의 가슴이 아니던가.

그녀의 실제 경험을 바탕으로 한 '청춘일기'라 했다. 실제 청춘이었을 당시 『상실의 시대』를 거쳐 온 나의 두 번째 청춘엔 마치 내 청춘의 씻김굿처럼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를 무사히 치러내었기에 이제는 보다 의젓하게 '청춘'을 관망할 수 있을 줄 알았다. 억압된 현실과 그녀의 환부가 더 지독할 것임을 알면서도 상처에의 두려움보단 진실에의 호기심이 앞서던 나였다. 비록 우리에겐 뒤늦게 소개된 작품이었지만 『숨그네』 이후 그토록 검었던 그녀만의 '낱말상자'를 다시 열어 내 숨결을 뛰게 하고 싶었고 낱말을 오리고 잘라 붙여가며 그려낸 그녀의 작품을 또 한번 내 가슴걸이에 걸어보고 싶었다. '독재'와 '청춘'이라는 진부하지만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소재에 그녀는 소설적 증언과 시적인 생기를 불어넣어 재차 낯선 행복의 기쁨을 선사하리라 굳게 믿었다.

그런데 달뜬 기대와 달리 이번엔 『숨그네』와 『저지대』때 만큼 가슴이 아프진 않았다. 어쩌면 그때만큼 충분히 슬프지는 않았다고 해야 맞을지 모르겠다. 내 슬픔은 어느 한 시기, 어느 한 지점에서 그만 발걸음을 멈추어 버린 듯했다. 그리고 다음은...자기 외면과 반목의 수순을 밟으며 누군가를 향해 마음껏 원망하고 비난하고 싶어졌다. 그것은 누구라도 모질게 청춘을 짓밟은 대상이 아닌 그렇게 짓밟힌 당사자도 아닌, 짓밟고 짓밟히는 그 모든 것을 바로 곁에서 묵묵히 목격해낸 같은 시대의 또래 청춘들이었다. 바로 가해자와 피해자 그들 사이에 우리와, 내가 부자연스럽게 서 있었고 그녀의 작품에서 비로소 내 자리가 또렷이 발견되던 극명한 위치인식은 슬픔을 가로막는 미안함, 미안함이 지나친 화에 가까웠기에 결코 내가 원하던 좌표는 아니었던 것이다. 그녀의 『마음짐승』은 ...그렇게 잊어버린 내 '마음짐승'을 지긋이 자극하고 있었다.

그녀는 어쩌면 그 서슬퍼런 독재와 비극적인 청춘을 기어이 살아냄으로써 오늘날 당당한 증언의 기회를 부여 받은 것은 아닐까. 아니, 그 모든 진실을 증언하고자 했기에 끝내 청춘을 견뎌온 것은 아닐까. 살려고 몸부림치며 붙들어온 문학이 이제는 그녀를 살아가게 하고 있는 듯하다. 그리고 마침내 지나간 상처를 보란듯이 문학으로 살려내었다. 문학은 그녀를 살렸고 그녀는 문학을 살린 것이다. 그러므로 그녀의 청춘도 영원히 죽은 것은 아니었다. 오랜 세월을 묵묵히 견딘다는 것...문학의 고통이 자신의 유일한 기쁨이었을 그녀에게 이 '견딤의 미학'(미학이라 칭하는 것에 무례를 용서바란다)은 한번뿐인 청춘이라는 빛나는 보석을 가장 안전하고도 정당하게 끌어안는 적극적인 삶의 방식으로 보였고 그 방식은 다시 그녀를 빛나게 하고 있었다. 그녀가 1987년 독일로 망명하기 전까지 차우세스쿠 독재정권에서 억압받은 생의 기간은 이십년이 넘었으며 그 시간은 정확히 그녀의 생물학적 청춘과 일치한다. 그녀는 이 시기에 문학을 공부했고 젊은 작가들과 언론 자유운동을 펼쳤고 기계공장에서 번역사로 근무하며 정보원이 되어 달라는 비밀경찰의 요구를 받았다. 같은 시기 그녀의 문단 데뷔작인 단편집 『저지대』는 금서조치 되었다. 『저지대』를 읽고는 그녀의 어린 시절, 가족과 마을 풍경에 이르는 소용돌이치는 원색적 묘사에 당시 그녀가 무사할 리가 없었을 거라는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녀는 서른 네 해 까지 불같던 청춘을 차갑게 견뎌낸 후에서야 비로소 도주가 아닌 선택적 망명을 감행했다. 그녀가 걷고, 먹고, 자고, 보고, 듣고 겪은 그 모든 것을 견뎌온 세월 앞에 나는 구경꾼으로서의 청춘을 지내온 한 사람으로서 그저 말없이 고개 숙여야 했기에 육체만 빼고 모든 정신을 죽임으로써 살아가야 했던 그녀의 긴긴 시간들을 정중히 애도하고자 한다.


네모, 보석상자

그녀의 청춘이 잠시 머물렀던 공간은 '네모'라는 기숙사였다. 그녀의 작품에선 '네모'라는 도형적 표식이 개인과 사회의 절망을 상징하는 그녀만의 미학적 관용어로 자리잡은 듯하다. 그녀는 『저지대』를 통해 전쟁으로 폐허가 된 자신의 고향을 '상자같은 마을'이라는 네모로 표현한 바 있다. 그때의 상자는 씻을 수 없는 가해자로서의 아버지의 관을 암시한다고 느껴졌다.『숨그네』에서는 레오가 5년 동안 살아낸 수용소를 '검은색 상자'라는 네모로 자주 서술하였다. 이 작품에서도 주인공이 기거했던 네모난 방에 달린 네모난 창과 네모난 침대, 그 밑의 네모난 트렁크, 문 옆의 네모난 벽장, 출구위에 달린 네모난 스피커는 모두 독재정권의 억압과 감시, 폭력과 불신을 상징한다 할 것이다. 그녀에게 있어 '네모'가 꿈을 상실한 어둡고 컴컴한 죽음의 공간을 의미하게 된 것은 아마도 오래전부터 일 것이다. 유년시절 소수의 독일인들이 모여 살았던 슈바벤마을에서의 음울한 기억, 어린아이의 시각으로 바라본 어른들의 거짓과 무관심, 폭언과 폭력에 시달린 가족관계가 시작된 절망의 장소가 바로 네모난 자신의 집, 자신의 방이었기 때문이 아니었을지. 하지만 슬픔이나 절망조차 도식화, 규격화되어야 했던 네모난 상처를 눌러 박은 그녀는 작품 속에서는 네모를 원망하다가도 정작 자신의 현실에서는 기어이 죽음의 공포를 삶의 욕구로 치환하는 감동적 반전을 보여준다. 네모난 상처에 자라난 짐승도 마음은 있었던 것이리라.

그녀는 서독으로 이주하기 위해 네모난 트럭에 몸을 싣고 자신이 견뎌낸 모든 청춘을 네모난 트렁크박스에 담아 그녀만의 네모난 낱말상자로 창조해 낸다. 이 작품에서도 룸메이트인 롤라가 네모난 벽장에서 숨을 거두고 오랜 친구인 게오르크는 네모난 창문으로 뛰어 내리지만, 그녀, 자신만은 죽음(관)이라는 네모에 갇히지 않고 그 안에서 문학이라는 삶을 생산해 내고 만 것이다. 이는 죽음의 블랙박스에서 탄생한 기적의 보물상자였다고 믿고싶다. 롤라가 죽으면서 유품으로 남긴 자신의 상념을 기록한 공책을 끝내 문학이라는 숭고한 기록으로 살려내는 그녀만의 저력이 거기 있었다. 질식해 숨이 끊어 질 듯한 마지막 순간까지 내몰리면서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은 그녀의 청춘은 네모로 사방이 막힌 거대한 장벽이 아니라 자신만이 진실을 조형해 낼 비밀의 마법상자로 변신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주어진 네모에 영원히 갇히지 않고 그 네모 속에서 희망을 건져 낸 그녀를 보면서 결국 문학은 네모난 세상도 끝이 없는 바다로 재생될 수 있음을 그리고 그 바다가 네모날 지언정 그 속에서 탄생하는 보석은 살아있는 창조물이 될 수 있다는 막연한 믿음을 실체로 확인하는 듯했다. 나는 이번에도 역시 네모라는 비밀상자에 담겨진 가슴저린 선물들에 눈이 휘둥그레질 뿐이었다.


절망, 악세사리

작품 속에서 화자는 자신과 가장 가까이서 우정을 나누었던 친구들 네 명의 죽음을 온몸으로 마주한다. 그런데 이들 죽음을 목도한 화자는 '어떤 죽음이든 자루나 다름없다고, 생각해보면 죽은 사람들은 저마다 낱말이 든 자루를 남겨 놓고 가는 것 같다'고 마지막 회상을 고백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친구들 네 명의 죽음을 가만히 따라가 보면 그들의 죽음은 결국 독재정권하에서 불안과 공포로 스러져간 청춘군상을 상징하고 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황폐하고 음산했던 도시에서 불안으로 공황상태에 빠져있거나, 감시로부터 고통 받았으며 질병으로 인해 수척해졌거나 타자로 인한 두려움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던 그 시절의 가여운 청춘이었다. 작가는 그들이 떠나면서 남긴 자루에 들어 있던 낱말을 자신의 비밀상자에 담아 우리에게 보석같이 전달해 준 것이다. 그녀는 그들의 상처받은 내면과 죽음을 연결하는 그들의 일상적 소품을 고이 간직해  시적 메타포로 포장하였다. 나는 그녀의 비밀상자에서 그들을 정신적 육체적으로 옥죄고 벼랑끝으로 내몰았던 허리띠, 창문, 노끈, 호두라는 귀한 유품을 발견할 수 있었다. 궁핍과 결핍의 지독한 핍진장치이기도 했던 각자의 소품들은 표면상으로 살인의 직접적 매개체였지만 그 이면에는 그들을 통제해온 권력과 그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 가장 위협적인 상황이 내포되어 있었다.

...진실의 목걸이

친구들 중에서도 따돌림을 당하던 롤라는 벽장안에서 화자의 머리띠로 목을 맨 채 발견되었다. 화자의 '원피스 허리띠'는 유년시절 어머니의 학대를 상징하는 억압과 폭력의 소품이었다. 어머니는 화자의 행동을 제재하기 위해 의자에 원피스 허리띠로 몸을 묶고는 할아버지에게 거짓말을 하였을 것이다. 화자는 이때 진실을 목구멍으로 삼키면 말이 되지 않고 거짓말이 되는 위선을 최초로 경험한다. 자신을 억압하던 원피스 허리띠로 목을 졸라 맨 롤라에게 그녀가 해줄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진실을 그대로 삼키지 않고 오늘처럼 세상에 내뱉는 일이 아니었을까. 롤라의 허리띠는 그녀에게 진실의 목걸이가 되어 잔인하게 돌아왔음이다. 롤라는 스타킹의 올이 가장 많이 풀려있었으며 벽장에 옷이 가장 적었고 밤이면 전차를 타러나가는 것 외엔 외견상 친구들에게 피해를 준 것도 없었지만 화자를 포함한 친구들은 롤라를 맹목적으로 증오하고 멸시 하는 것으로 자신들의 불안을 이겨내고자 했다. 그녀가 죽은 뒤 대강당에 모여 학생들이 그녀의 죽음을 비난하며 오래 박수치던 장면은 악마의 환청처럼 소스라치게 등골이 오싹해지던 순간이었다. 눈물이 날 것 같아서...누군가에게 무언가를 들켜버릴 것 같아서...누구도 쉽게 멈출 수 없었던 그들만의 박수는 이미 죽은 롤라의 영혼마저 처참하게 짓밟은 2차적 살인행위로 느껴졌고 자신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가해자가 되어야 했던 학생들에게도 평생토록 지우지 못할 죄책감을 안겨주는 계획된 집단행위였을 것이다. 야만적 집단성이 연대어린 공동체의식으로 미화, 승격되기 위에 필수적인 과정으로 자리잡았을 집단행위, 내가 아는 공산주의의 실체를 피부로 체감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시인의 칼

한편 게오르크는 조국땅을 떠나 그토록 어렵게 도착한 프랑크 푸르트 임시숙소 육층 창문에서 뛰어 내려 도보에서 발견된 것으로 알려진다. 그의 죽음이 객사인지, 살인에 의한 추락인지, 투신인지는 밝혀지지 않았으나 누구보다도 삶의 의지가 강하리라 믿었던 게오르크였기에 그의 죽음은 다소 예견된 롤라의 죽음보다 충격적이었다. 스스로 강한 결심에 의해서 계속 이어지는 미행과 가택수사, 심문을 견디지 못하고 피폐된 청춘의 모습으로 창문을 뛰어 넘었다기 보다 순간적인 환청이나 망상의 일환으로 보고 싶었다. 게오르크에게 있어 조국의 창문은 미래나 꿈을 소망하는 능동적 통로가 아닌 사생활과 자유가 없는 감시로서의 수동적 올가미였을 것이다. 흡사 조선시대 죄인의 목에 씌우던 프레임으로서 네모난 칼이 연상되었다. 그가 창을 통해 표적으로서의 과녁이 되지 않는 유일한 방법은 그 창을 통과하는 수 밖에 없었던 것일까. 오로지 출국 허가증을 받아 조국을 떠나는 것이 온 희망이었던 그가 임시숙소라는 경계지대를 넘지 못한 것은 앞날에 대한 두려움보다는 고독화된 절망을 향한 최고치의 자기연민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는 열편이 안 되는 시를 남겼고 우리는 그것을 유작시라 이름한다. 절망을 노래하는 것이 유일한 희망인 사람에게는 노래하지 못하는 것이 절망보다 더 큰 죽음의 이유가 되고도 남음이다. 모든 죽어간 시인이 위대한 이유는 그들이 남긴 시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남기지 못한 시 때문이 아니겠는가.

헤르타 뮐러의 소설들은 단락 하나 하나가 한편의 서사시, 서정시를 연상시킨다. 『숨그네』의 실제 주인공이자 그녀에게 소재를 제공했던 오스카 파스티오르도 시인이었고 그녀의 주변엔, 특히 청춘을 나눈 그 시기엔 시인들이 많았으리라 생각된다. 친구들이 심문을 받게 된 최초 계기 역시 '시' 때문이었는데 시인은 시적화자와 좀처럼 분리되기 힘들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의 김지하, 고은 역시 군부독재하에서 투항하던 대표적 시인이었다. 정작 시인이기도 했던 그녀가 시의 숨결과 시의 핏줄을 가지고 소설로 뼈와 살을 만들어 영광의 꽃을 피운 이유는 그녀가 시인의 유전자를 가진 소설가였기 때문일까. 소설에선 얼마든지 자신이 원하는 별의별 인물을 창조하여 그들의 자리만 마련해 주고 슬그머니 빠져나와 사태를 관망할 수 있다. 그녀는 시로써 자신을 말하고 싶었겠지만 억압된 현실은 소설로 타자를 말하게 하는 입장을 고수하도록 종용했을지 모르겠다. 이는 그녀가 조국 루마니아를 버리고 독일이라는 타국의 망명지를 선택하여 이방인으로 살아가는 행로와 무척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행로는 독일과 루마니아 두 문화 어디에도 완전히 속하지 못했던 경계인으로서의 아픔을 루마니아의 속담이나 노래에서 연상되는 낱말(의미)과 독일어로 쓰거나 읽을 때 나타나는 낱말(표음)을 결합해 '마음짐승'과 같은 독창적인 조어로 잉태해 내는 결정적 배경이 되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그래서 나는 그녀의 작품이 시인과 시와 연관성을 가질 때, 그 곳에서 시인과 시가 죽었을 때 아주 많이 슬프다. 그녀로서는 그녀의 부모나 자식이 사망하는 것과 같은 아픔일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시인의 핏줄로 소설을 탄생시킨 그녀였을 테니까. 시인인 청춘으로서 게오르크의 죽음이 더욱 내 가슴을 짓눌렀던 이유이기도 하다.

...선물의 끈

또 한명의 친구 쿠르트는 자신보다 타자에게 발생한 사실로 인한 간접공포가 그를 죽음으로 이끌었다. 집단에서의 이탈이나 낙오를 두려워하던 쿠르트는 같은 장소에서 일하는 동료의 행동과 심리에 지배당하는 경향을 보인다. 쿠르크는 자신이 어떤 사람으로 변해 가는지 인식 하지 못한 채 '마음짐승'에 굴복당한다. 쿠르트를 포함한 남자친구들의 어머니는 공교롭게도 재단사라는 직업적 공통점과 질병을 가진 약자로 소개된다. 그중 쿠르트의 어머니는 위경련을 앓고 있었는데 같은 유전자를 지닌 그가 최초 심문시 받은 고문은 시가 쓰여진 종이를 먹음으로써 속을 토하게 된 일이었다. 하지만 잔인하게도 도축장에서 기술자로 일하며 하루 종일 피 냄새를 맡을 수 밖에 없는 역겹고 비루한 노동으로 청춘을 견뎌야 했다. 그는 내장과 골이 난무한 일터에서 일꾼들이 마시는 짐승의 피에 구역질을 느끼는 목격자였지만 나중엔 자신도 같은 행위를 자행하는 공범자가 되고 만다. 반복되는 타인의 불행만큼이 자신의 절망의 높이가 되어버린 그에게 친구 게오르크의 죽음은 돌이킬 수 없는 죽음의 프로포즈와도 같았을 것이다. 결국 그는 수락의 의미로 그들이 책과 편지를 포장하던 노끈을 가지고 자신의 심장을 동여맴으로써 청춘을 모질게 절단한다. 쿠르트의 노끈은 결국 죽음이라는 선물을 포장 한 것이었다. 쿠르크처럼 심성이 유약한 성향을 지닌 젊음이 더 이상 모질 수 없도록 자신을 파멸시키고 마는 청춘의 표상이 되어 강철같은 나약함을 증명하곤 할 때...어쩌면 살아 있다는 것이 가장 약하다는 것의 증거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은 죽지 않고 살아낸 강인함이나 죽지 못해 살아온 나약함이나 동일한 무게일 수 있다는 것이 놀라웠고 그런 의미에서 죽음을 택한 청춘이야 말로 그 순간 가장 강한 젊음이 아니었을까 하는 동정심도 들었음이다. 실제로 작가도 자신이 특별히 강인한 성품이어서가 아니라 근근히 친구들처럼 끝내 죽지 못하는 자신의 나약한 심정을 오히려 투박하게 비하하는 대목을 여러군데 접할 수 있었다. 어떤 청춘이 더 강인한 것이고, 또 어느 청춘이 더 바람직 했는 지를 논하기 전에 퍼뜩 지금 살아 있어 마주한 오늘이 세상 누구의 청춘보다도 감사하다는 이기심이 자리잡는 순간이었다. 그때 나약했어도 훗날 다행이라는 내 심정을 쿠르크는 알지 못할 것이다. 그가 묶어버린 것이 계속해서 책이나 편지였으면 좋았을 아쉬운 죽음이었다. 

...불운의 부적

아름답게 추했던 테레자는 악의는 없었지만 진지하지 못했다. 그녀는 지배층과 연결된 아버지를 둔 덕에 경제적 궁핍에서는 벗어날 수 있었지만 주체적이지 못한 말과 행동은 그녀 자신에게 혹처럼 자라나던 병마만큼이나 위험스런 청춘의 미성숙을 상징했다. 그녀는 새롭게 사귀게 된 친구인 화자를 진심으로 사랑했지만 자신보다 더 높은 위치에서 지시 혹은 강요하는 권력에는 별다른 주저없이 순순히 응하는 발걸음을 선보인다. 이러한 성향은 화자가 테레자와 같이 찾게 된 네잎클로버를 대하는 그들의 대화에서도 작가의 숨은 뜻을 엿볼 수 있었다. 테레자는 행운을 좇는 네잎클로버의 형식인 네 잎에 주목했지만 행운이 필요치 않은 화자는 '물클로버'라는 자신이 만든 식물의 이름이 더 중요했기에 테레자에게 네잎클로버를 건네 버린다. 눈에 보이는 실체보다는 그것이 의미하는 개념이 더 중요했던 화자는 실체로서의 육체가 병들어버린 나약한 정신의 소유자인 친구의 죽음엔 그다지 슬퍼하지 않는 면모를 보여주기도 했다. 친구라는 존재의 죽음에 대한 상실감보다는 배신이나 증오의 감정이 화자를 혼란스럽게 만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테레자는 결국 아버지의 염탐지시를 큰 거부 없이 받아 들이며 화자와 감시반, 우정반의 심정으로 다시 재회하지만 그녀의 가슴에 호두처럼 자라던 혹을 경고하던 화자의 걱정이 무색하도록 허무한 죽음을 맞이한다. 여기서 나는 테레사의 혹을 호두알로 묘사한 부분이 의미심장하면서도 인상깊었다. 호두는 외양은 거칠고 볼품없지만 속에는 영양과 실속이 가득한 건강식품이 아니던가. 겉모습에 너무 가치를 두거나 혹은 반대로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 밖으로 나오지 못하는 사람에게 교훈을 줄 수 있다는 점에서 테레자의 호두알 크기의 혹은 세상이 청춘에 경고하던 메시지 였을 것이다. 테레자가 그 경고를 알아차렸다면 호두는 그녀를 지키는 부적이 될 수 있었겠지만 안타깝게도 끝까지 죽음의 혹으로만 성장했다.

'이유없는 반항'이 무조건 청춘을 정당화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주체성이 상실된 청춘은 결코 미래를 보장받을 수 없다는 교훈이 담긴 죽음이었다. 어떠한 굳건한 생각을 고집하는 것 만큼이나 아무런 생각이 없다는 것 역시 소름끼치게 다가왔던 무고한 청춘의 죽음이기도 했다.


초록, 멜로디

작가는 불안과 공포에 시달리는 친구들 외에도 주변 인물들을 통해 전체주의 사회의 실상을 이면에서 고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대표적 조연으로 자리 잡은 그들은 헤르타 뮐러의 작품에서 자주 등장하는 여자 재단사와 남자 이발사가 그 주인공이라 할 것이다. 나는 이들이 직업성을 십분 활용해 당시의 상황을 연주해 내는 멜로디가 특히나 인상적이었다. 비밀의 상자 뚜껑을 열어 은근하고도 천천히 울려 퍼지는 오르골 음악이 어쩐지 구슬프면서도 음산스러웠기 때문이다. 특히나 작품 속 재단사 중에는 에드가, 쿠르트, 게오르크의 어머니들(비중은 적었지만)이 모두 쓸개, 위, 비장이 나빠 하나씩 속병이라는 질병을 가진 병자로 소개된다. 어딘가 한 두 군데씩 정상이 아닌 사람들(속이 나쁜 사람들)이 모두 자신의 악기를 끌고 와 넋이 빠진 모습으로 속마음을 힘겹게 연주하는 장면이 그려져 듣는 내내 귀가 편치 않았음이다.

이들은 자본주의 사회라면 마땅히 깔끔하고 단정한 외모를 가꾸어 줌으로써 개인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서비스업으로 분류될 수 있겠지만 작가는 바늘과 가위라는 도구를 사용하는 이들 직업의 특수성을 내세워 '규격'의 외피와 '획일'의 정신을 부르짖는 전체주의의 폭력성을 고발하려 했던 것 같다. 그들이 바늘과 실로 꿰매어낸 천조각과 가위로 깍아 내버린 머리털, 잘려나간 손톱들은 바로 무고한 시민들이 토해내는 내면의 상처조각이라 느껴졌기에 유난히도 가위질이 예리하고도 섬뜩하게 체감되었다. 그런가하면 재단사와 이발사가 위치한 공간은 혹독한 노동에 지친 사람들이 타자에 대한 소식을 전해들을 수 있고 자신의 불안한 미래를 예견할 수도 있었던 소통의 공간이기도 했지만 반대로 숨겨야 할 비밀을 보관할 수 있는 은폐의 장소로도 그려지고 있어 그 양면성이 흥미로왔다. 독재체제하에서 소식은 곧 비밀과도 같은 동의어였을까. 이들에겐 타인의 상처나 불행을 끊임없이 확인하고 서로가 공유하는 것이 익숙함이 되어 오히려 그 두려움이 그들을 살게 하였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었고, 외려 아무런 두려움이 존재치 않음이 또 다른 두려움이 되었다는 화자의 독백이 비로소 겹쳐지는 대목이었다. 두려움이나 공포도 습관이 되어 인간을 편안하게 해줄 수 있다는 사실이 무섭도록 인정하기 싫었지만 한편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들이 선사하는 멜로디는 분명 절망의 악기로 연주한 죽음의 협주곡이었음에 틀림없다. 친구들이 모여 소중한 기억을 나눈 여름별장으로부터 우리들은 각자 네모난 초록색 보석상자를 선물받았지만 그로부터 흘러나오는 오르골의 멜로디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눈을 감으면 이들과 중첩되는 시각적 이미지로 자꾸 빛바랜 초록의 사진이 연상되었다. 이상했다. 초록은 생명과 자연의 색으로 싱그러운 젊음을 상징하는 것이 보편적인 상식 아니던가. 그런데 이 작품에서 초록은 따먹으면 생명을 위협한다는 '초록자두'나, 롤라의 목숨을 끊어 놓은 '초록색 허리띠'이거나 혹은 죽은 롤라의 트렁크와 옷장에 뿌려지는 '청록색 가루'처럼 하나같이 죽음을 암시하는 전혀 반대의 양상을 보이고 있었다. 『그때 이미 여우는 사냥꾼 이었다』 에서도 거리의 초록색 나무들은 생명을 위협하는 초록색 칼로 묘사되고 있었다. 흡사 피부가 초록색인 냉혈동물 파충류의 그것처럼 핏기 없는 얼굴이거나 지구를 침략하는 외계인의 혐오스런 이미지를 떠올린다면 이해 못할 것도 없었지만 작품 전반에 흐르던 초록의 기운은 처음부터 바로 이해되진 않았다. 하지만 헤르타 뮐러가 뽑아내는 마법의 카드엔 두 개 이상의 감각을 이용한 공감각적인 묘사가 일상적이었기에 나는 내 임의로 청각(음악소리)을 시각(초록색)화 하면서 감각의 전환효과로 받아들였다.

초록은 생각보다 훨씬 더 뿌리 깊었다. 게오르크가 화자에게 선물한 '닭괴롭히기' 놀잇감 역시 초록색 나무판이었으며 쿠르트의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만들어주신 재킷 역시 초록색 재킷이었다. 세 명의 친구들과 담소를 나눌 때 즐겨 마신 맥주 역시 초록의 액체였다. 작품 속에서 주로 화자가 중심이 되는 서사를 줄기로 삼다가 자주 아이의 시점으로 바라본 도시와 어른들은 애초부터 아이들의 초록빛 희망을 차단하며 그것은 절망이자 죽음이라고 세뇌시키는 것으로 느껴졌다. 그들은 초록의 희망을 지운 그 자리에 그대로 절망을 끼워 넣어야 비로소 희망적으로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초록자두를 먹으면 죽는다고 한 어른들이 원망스러워 그것을 마구 먹어대던 아이가 어른거린다. 음산하게 흐르던 멜로디에 이 초록빛이 비추어 오면 나는 그들의 이미지가 서서히 정지됨을 감지하고는 했다. 초록빛 스틸 컷에서는 식물을 곡괭이질 하던 아버지가, 시계태엽을 감던 어머니가, 체스말로 전쟁놀이를 하던 할아버지가, 뜻모를 노래를 하던 할머니가 자신들의 습관화된 동작을 서서히 멈추어 버리는 듯했기 때문이다. 그래, 결국 초록은 '침묵의 빛'이었던 것이다. 과외와 인민선동과 창녀짓이라는 억울한 죄목을 짊어진 화자(작가)에게 자신의 청춘은 희망을 삼켜버린 절망의 초록이었다고 그래서 나는 生이 아닌 死의 초록으로 청춘을 견뎌왔고 그럼으로 자신은 청춘을 살아온 것이 아닌, 죽어왔다는 그녀만의 도저한 항변과도 다름 아니었다. 그녀의 뼈를 뚫고 지나간 바느질은 이렇게 우리 앞에 초록의 박음질로 새로 돋아난 것이다. 그러니 한땀 한땀 그 돋을 새김이 힘겹지 않았다면 우리는 그녀의 마음을 읽지 못했던 것이리라.


그리움, 자장가

이렇듯 화자는 롤라로부터 시작된 연이은 친구들의 죽음과 육체와 정신을 옥죄는 감시로 인해 청춘을 살아 내었다기 보다는 죽어지낸 것으로 느껴진다. 모든 감각과 감정을 죽이고 내가 아니어야 하는 나이거나 내가 아니고 싶은 나로 온전한 '나'를 저만치 유체이탈시켜 두고 껍데기로서의 '나'만 여기 빌려와 生의 의미를 전혀 느낄 수 없는 상태로 존재해야만 숨을 쉴 수 있었던 것이라 생각된다. 자신의 실체가 부재되어야만 존재할 수 있었던 화자가 친구들처럼 죽지 않고 삶을 지켜낸 방식, 그 견딤의 미학의 근원에는 이처럼 '부재에 대한 신념'이 오랫동안 버티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작가도 실제 현실에서는 자신이 없음을 견디는 방법을 오랫동안 고민하고 연마하여 결국 그녀만의 생존전략으로 승화시키지 않았던가.  '나의 언어는 비속한 창녀다. 그러나 나는 이 창녀를 처녀로 바꾼다.'고 말했던 어느 작가가 생각난다. 청춘은 지나온 입장에서는 아무런 꾸밈없이도 그 자체로 빛을 발한다 하겠지만 내가 청춘인 지금 입장에서는 더 화려하고 더 아름답게 어쩌면 인생의 시간에서 가장 화려하게 자신을 드러내고 싶은 욕구가 절정일 때 일 것이다. 이러한 본능적인 욕구가 억압당한 것은 물론 사고나 재해가 아닌 자신과 똑같은 고통을 당하던 친구가 자신도 위협을 받던 그 이유 때문에 목숨을 잃었다는 사실은 평생토록 짊어지고 가야할  형벌이었을지도 모른다. 작가는 자신의 부재했어야 할 과거를 딛고 오늘날 자신이 존재했어야 할 이유를 가장 감동적으로 세상에 알린 것이다. 유난히도 작품의 무게가 버거웠던 이유는 바로 살아남은 그녀의 숭고한 존재감에서 비롯되었는지 모른다.

비극의 옷을 입은 시, 시의 옷을 입은 소설, 소설의 옷을 입은 그녀의 문학은 늘 검은색의 옷을 입고 검은색의 구두끈을 매는 그녀를 떠올리게 한다. 나는 그녀가 작가로서 철저히 작가답게 삶을 살아왔고 자신의 작품을 위해서만 온전한 시간을 쏟는 것으로 생각된다. 마치 그러지 않고서는 生을 지속시킬 수 없는 것처럼 그것은 글쓰기가 곧 숨쉬기와 같았던 그녀만의 생존방법이자 자유를 얻는 유일한 탈출구였음에 틀림없다. 이유는 달랐을지 모르지만 한 가지 색의 옷을 고집한 어느 디자이너도 자연스레 겹쳐진다. 그녀의 한 가지 색은 아버지 사후 남은 평생 검은색 옷만 입겠다던 어머니의 뜻을 이어 받는 의미였던 것일까. 긴 시간 독재와 맞서 견뎌온 그녀만의 제복일지 모르겠다. 검은 상자같던 마을에 살고 있던 동물과 식물들에 대한 향수일까. 독재치하에서 먼저 세상을 떠난 두 친구 롤프와 롤란트에 대한 영원한 애도일까. 아...순간 이 모든 것에 끄덕이면서도 나는 그녀의 한 가지 색이 그녀가 부재하면서 존재했던 시간, 死해버린 청춘에 대한 애절한 그리움과 연민의 상복이었음을 이제야 알겠다. 그녀 스스로 부활하기 위해 그녀가 버리고 죽인 것들에 대한 용서의 상징임을 깨닫겠다. 이 작품은 그녀 자신을 포함해 그녀의 친구들처럼 독재로 희생된 꽃다운 청춘을 위한 '弔歌(조가)' 였던 것이다. 그녀의 숙연한 작가정신에 다 지나간 청춘이 뒤늦게 반성으로 사로잡힌 꼼짝 못할 시간이었다면, 실은 내 청춘은 행운이었으며 독재에 스러진 청춘에 빚진 내 청춘을 스스로 검열해 보는 시간이었다 고백한다면 그녀가 이제라도 마법의 얼음을 풀어 줄수 있을까.

돌이켜보면 나는 쉽게 살아남은 청춘, 운이 좋은 청년이었음에 틀림없다. 진실하지 않고자 거짓을 택한 적은 없으나 침묵하며 진실을 외면한 적이 있으니 롤라의 룸메이트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우리식으로 말하자면 '행동하는 양심'은 아니었던 비겁한 청춘이었다. 혹시나 나에게 불똥이라도 튈까봐 시위에 연루된 친구들을 비난하는데 동조한 적도 있으니 강당에서 롤라의 죽음에 눈물을 참으며 박수를 쳐대던 집단들과 하등 다를 바 없지 않은가. 낙오되지 않기 위해 적당히 진실하며 적당히 박수치던 내 청춘이 지켜 내온 것은 무엇이었을까. 이 책을 읽으면서 나와 같이 7,80년대 군부독재아래 억압받던 문인들을 떠올린 독자들도 있을까. 시대를 거스르지 않고 진실을 말하는 것이 자신의 순명이라 믿었던 우리 시대 문인들은 루마니아처럼 표면적으로 공산주의 체제를 지향하지도 않으면서 민주주의라는 위선의 허울 속에서 저항시인, 민족작가로 자동분류, 삭제될 뻔 하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우리가 알고 있는 진실은 누군가의 청춘이 비참하게 상실되었기 때문에 비로소 소실되지 않고 여실히 살아서 증명된 것일 터, 우리는 그들의 상실에 엄청난 빚을 지고 있는 것이리라. 그녀는 세상을 향해 우리들이 빚진 것들을 조곤조곤 읊어주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이제 그녀의 마음에 깃든 짐승을 어루만져 본다. '마음짐승'은 작가가 만든 조어로서 자신의 할머니에게서 들었던 자장가의 한 구절에서 시작되었다. '배고픈 천사'와 '감자인간', '심장삽'을 기억하는 우리는 '마음짐승'이 누구보다 순수했던 어린마음이 상처를 받아 누군가를 잡아 먹고 할퀴는 짐승처럼 자신과 타인에게 폭력적으로 변할 수 있는 내안의 숨겨진 자아일 것임을 떠올릴 수 있었다. 우리에게도 비슷한 고사성어로 인면수심人面獸心이라는 말이 있다. 얼굴은 사람의 모습을 하였으나 마음은 짐승과 같다는 뜻으로 오늘날, 남의 은혜를 모르는 배은망덕(背恩忘德)한 인간이나 마음이 몹시 흉악하여 인간으로서 몹쓸짓을 하는 사람에 비유하고는 한다. 그녀의 '마음짐승'이 자신의 내부를 향해 자아를 파괴하는 것이라면 우리네 '인면수심'은 다분히 타자를 향한 공격을 의미한다 할 것이다. 어쨋거나 마음이라고는 없어 보이는 짐승같은 마음을 먹는다는 것은 자신과 타자 모두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로 기억될 것이다. 우리는 흔히들 마음을 먹는다고 표현하니 하물며 짐승같은 마음을 먹는 것은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인가. 짐승에게 몸과 마음을 먹히는 것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나와 같은 마음을 먹었을 짐승같은 상대에게도 먹혀버린 내 마음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가장 빛나야 할 시기에 짐승같은 마음을 먹고 또 짐승같이 친구의 마음을 먹고, 그러한 친구들에게 짐승같이 먹혀온 마음을 고스란히 달래가며 우리 앞에 꺼내들었다. 그리고 그것은 내 청춘의 짐승과 우연히도 일치했기에 사뭇 그 발견이 죄스러웠노라 고백하겠다.

헤르타 뮐러의 작품은 문학이 가지는 기록이자 증언으로서의 가치위에 독특한 그녀만의 독창적인 조어를 합체시켜 이루어낸 거대한 진실의 창고였다. 이 책은 '독창적인 작가는 누구도 모방하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누구도 모방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진리를 우리에게 다시한번 깨우쳐 주는 작품이었다. 더불어 그녀의 상실과 지금의 진실과 그리고 그들의 청춘에 나는 살아있는 그날까지 고개 숙여야 할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비록 청춘에 물러선지 얼마되지 않았지만 우리는 우리가 잊고 있었던 청춘의 짐승을 다음의 청춘에게 이야기 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고백도 추억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청춘을 상실한 그들을 향한 예의이자 그리고 우리를 향한 용서이자 다음 청춘을 향한 뼈아픈 충고이자  배려일 것이다. 어느 한 시기, 어느 한 지점에서 멈추어 버린 발걸음을 이제야 힘겹게 떼어본다. 진실을 삼키며 짐승을 길러낸 마음이 아닌, 진실을 꺼내어 인간을 껴안는 누군가의 발걸음이 되고 싶다. 저만치 걸어가는 뒷모습이 분명 우리의 걸음이고 싶다. 어떤가, 마음짐승을 어루만져 주는 할머니의 자장가가 그리운 이 밤, 잘못하고 돌아온 우리네 가슴에 짐승도 잠들게 할 그녀의 노래가 더욱 따스하게 들려오지 않는가.  


..."생각해보면 죽은 사람들은 저마다 낱말이 든 자루를 남겨놓고 가는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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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라 2010-11-02 19: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한사람 님! 추천 꾸욱^^

2011-01-15 11: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1-15 13: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쥘과의 하루
디아너 브룩호번 지음, 이진영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4월
평점 :
절판



커피 한잔을 마시며 딱 책의 무게만큼만 머리를 식히고 싶었다. 바보. 그렇게 친다면 차라리 시 한편을 읽어야 했다. 헤어짐은 짧을수록 좋다고 했는데...머리의 온도가 내려가는 데는 참혹하게 실패한 것이다. 짧지만 강렬했고 이별했지만 다시 만났기 때문이다.

"얇은 책인데 별일 아닌 듯 시작되는데 다 읽고 나면 마음이 젖은 솜처럼 되어있어. 독서의 즐거움은 그렇게 요지부동인 듯한 내 마음이 흔들릴 때야" 이렇게 말한 사람은 이 책을 덮고 난 신경숙작가였다. 내가 주목한 것은 '요지부동인 듯한 내 마음'의 요지부동이었다. 요지부동한 마음의 근거는 아마도 익히 잘 알고 있음에 대한 자신감일 터이다. 예를 들면 사랑을 해본자의 첫사랑에 대한 끄덕임 혹은 결혼을 해본자의 첫날밤에 대한 미소...그런 심정들. 나 역시 이 작품에 대한 평가와 호기심이 몇 개월 머릿속에 잘 보관되 있었는지 대수롭지 않게(실은 브레이크 타임 용으로..)책을 집어 들었기에 내려놓음의 무게가 한층 버거웠다고나 할까. 독서란 책 집어 들 때와 책 내려놓을 때가 상반되는 경우가 많다는 걸 알면서도 매번 당하는 이 우매함 때문에 또 다음 책을 집어드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쥘과의 하루>는 그냥 누워서 다른 생각을 좀 해보고 싶었던 나를 도저히 그냥 넘어가지 못하게 만들었다. '누군가의 하루를 이해한다면 그것은 세상을 모두 아는 것이다.'라는 문구를 기억한다. 최근 어느 소설집, 박성원 작가의 <하루>라는 작품에 등장하는 달리는 버스광고판에 적힌 화제의 신간 헤드카피였다. 그 신간이 혹시 <쥘과의 하루>는 아니었을까하는 맘가는 대로 생각을 해본다. 쥘과의 하루를 보낸 아내 알리사의 하루를 이해했으니 나라는 사람 그만 세상을 모두 알아버린 것 같으니 말이다. 세상을 안다는 것...그일 참 무엇보다 슬픈 일 아닌가. 세상을 안다는 게 슬픈 일이라면 어쩌면 사람들은 그러한 세상을 알고 싶어 하지 않았을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럴 것이다. 미우나 고우나 50년을 같이 살 맞대고 살아온 배우자의 죽음 같은 건 굳이 언제인지, 왜, 어떻게 인지 알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꼭 알아야 한다면 그것은 그의 배우자인 내가 아니라 나의 배우자인 그였으면 했을 것이다. 그렇다. 내 경운 배우자 보다 내가 먼저 죽길 바란다. 내 마지막을 곁에서 지켜주고 그리하여 내 죽음을 잘 마무리 해주길 바란다. 이것은 내가 부모님을 떠나 보낸 후 배우자에게 억지스럽게 받아낸 약속이었다. 살아생전에 다시는 다른 가족 구성원의 죽음을 마주하는 형벌을 감당하기 싫었기 때문이다. 퍽이나 이기적이었지만 약속대로 조건들이 이행될 리 없음을 잘 알고는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다짐으로 매우 든든한 내 미래를 보장받은 것 같은 안도감을 느낄 수 있었다. 거기엔 내 배우자의 죽음을 확인하며 겪어야 할 온전한 내 절망과 죽음의 절차가 가져오는 부수적인 추억들, 상실로 생겨나는 先경험자의 상처 기득권을 전혀 확보하고 싶지 않은 방어기제가 알차게 숨어 있었으리라.

그런데 작품속의 알리사는 쥘의 죽음을 목도한 그날 아침, 쉽게 절망하지 않았다. 아침에 눈을 떠 자궁속에서 꿈틀거리며 새날을 향해 요동치는 기분을 꽤 오래 유지해가며 쥘의 기분과 마음을 시시각각 헤아려 주는 것이다. 몇 분이 흘렀던 것일까. 십분...십오분...기껏해야 삼십분을 넘지 않은 남편의 사체가 소파에 그대로인 알리사의 아침은 그렇게 그 전날과 똑같이 시작되었음이다. 이들 부부는 자식을 결혼시키고 은퇴 후의 삶을 깨가 쏟아지듯 행복하게 살았을까...? 결혼 생활 50년에 작은 임대아파트에서의 하루하루 일상은 오래된 시계와도 같았을 것이다. 아침에 일어나 일과를 시작하는 서로의 규칙들이 서로만이 인정하는 서로의 습관들이 生의 안도와 평화를 유지하는 밑거름이었을 것이다. 부스스하지 않은 차림으로 신문을 가지러 가고 먼저 일어난 사람이 커피와 식사를 준비하고 누군가 신문의 기사를 읽어주고 시간이 되면 산책을 하고 이웃과 이야기를 나누고, 식사메뉴를 떠올리곤 시장을 다녀올 것이다. 자식의 안부전화, 지인과의 수다, 친척의 부고...같이 산다는 건 같은 공간에서 같은 시간을 나누는 것...매일 주어지는 시간과 같은 공간에 어느 날 어느 순간부터 한사람이 사라진다면 그전에 그 사람과 같이 하던 모든 것들도 사라지는 것일까.

제일 낭만적인 설정은 쥘이 눈오는 날 아침 침대나 욕실에서 죽지 않고 소파에 앉아 죽었다는 상황이었다. 그의 죽음은 진행형이었고 잠시 휴식이었고 삶의 전이상태였던 것이다. 쥘은 눈오는 창밖을 바라보며 무슨 생각에 잠긴 것일까. 눈이 온다고 알리사에게 알려주려 했던 것일까. 쥘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던 것일까. 알리사는 소파에 쥘을 그대로 두고 식사를 준비하고 목욕을 한다. 열시면 어김없이 쥘과 체스를 두러 방문하는 자폐아 소년 다비드를 맞이한다. 알리사의 마지막 의식과도 같은 이 작업은 그녀가 쥘의 죽음을 인정하지 못하여 벌이는 통곡과 아쉬움의 향연이 아니었다. 그녀는 쥘의 죽음을 누구보다 인정하고 받아들이려 했기 때문에 세상과 타자로부터 그 시간만큼은 방해받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알리사가 쥘의 부고를 최대한 늦추려는 마음이 지극히도 현실적으로 다가왔음이다. 현실에서 우리는 어떠한가. 가족의 죽음을 맨 처음 목격한 사람은 혼자 그 광경을 감당하지 않으려 하지 않았던가. 놀라움이든 두려움이든 그 다음은 순서대로 죽음의 절차는 내 의지와 상관없이 진행되기 마련이다. 시간에 떠밀려 결혼식을 치루어 내듯 죽음의 의식도 마찬가지 인 것이다. 그렇다고 알리사가 쥘과의 마지막 이별의식을 특별하게 치루어 낸것도 아니었다. 그녀는 쥘이 죽음에 직면하기 전의 모습 그대로, 그들이 살았던 어제와 똑같이 하루를 살아낸다. 그러면서 흐르는 시간과 함께 조금씩 변해가는 남편의 모습을 확인하고 부지런히 그와의 시간들을 마음에 쌓게 된다.

죽은 남편을 앞에 두고 그와의 생생한 추억을 불러내어 대화하는 알리스의 아픔은 남편의 외도를 알고 있었다는 고백부분에 이르러 흔들리던 가슴을 세차게 짓누른다. 언젠가 자신과 떠났던 휴양지에서 그 사실을 알게 된 알리사는 그날 밤을 떠올리며 오열한다. 잡지에 꾹꾹 눌러쓴 남편의 글씨 자국만으로도 다른 여자의 이름과 사랑의 정도를 알 수 있었던 그녀였기에 얼마나 두 사람을 증오하고 있었는지 그러면서도 몰라야 했고 모른 척했던 자신의 사랑이 얼마나 더 깊었는지...그것은 생의 마지막에도 꺼낼 수 없었던 말이었을 것이다. 알리사는 두 사람이 신혼 초 실수로 놓쳐버린 자신들의 소중한 생명에 대한 상처도 처음으로 꺼내놓으며 무덤까지 가지고 가야했을 자신들만의 비밀에 눈물의 용서를 구한다. 핏기가 사라져 점점 푸른 반점이 생겨나던 남편의 손은 아버지의 손을 떠올리게 했다. 알리사에게 한평생 죄의식을 갖게 했던 아버지의 손은 어린 시절 매맞던 기억의 손이었지만 남편의 푸른 손을 보고는 자전거사고로 심하게 다친 자신의 다리를 침착하게 치료해주던 아버지의 멍든 보라색 손을 떠올리게 되면서 비로소 아버지와의 소중한 추억으로 재생된다. 남편의 손은 죽음을 인정하는 나의 상처이겠지만 그 상처로 환기되는 아버지의 상처는 사랑이었다. 죽음의 힘이란 그런 것일까. 알리사는 다하지 못한 말이 있어 소파에서 죽음을 맞이한 남편에게 자신이 평생 용서하지 못했던 비밀들을 털어 내며 그 응어리를 토해내었다. 죽은 남편이 용서해주어야 할 비밀들이 아니었음에도 알리사는 '죽음'이라는 시간과 공간을 향해 자신의 지나온 잘못과 상처를 열어 보였다. 마치 쥘이라는 구원자가 다 짊어지고 가 줄 것 처럼. 아팠다. 우린 뜻대로 안되는 옹졸한 마음 하나 때문에 죽음에 이르러야 비로소 상대도 자신도 용서 할 수 있는 비겁한 인간들이라는 사실이 알리사처럼 아무것도 용서하지 못한 내 자신을 초라하고 서럽게 만들었음이다.

다행히 알리사의 슬픔 만큼이나 소중하게 다가온 존재는 있었다. 매일 아침 열시에 쥘과 체스를 두러 오던 자폐아 소년 다비드였다. 자신이 형성한 습관과 일상의 구조속에서만 안정을 찾는 다비드는 이 작품을 쥘과의 하루 속에 병행되는 다비드와의 하루를 탄생시킨 희망의 빛이었다. 다비드는 소파에 앉아 숨을 거둔 할아버지를 보고 저것은 할아버지가 아니라 할아버지의 껍데기라 칭한다. 하지만 그 껍데기를 앞에 두고도 다비드는 자신이 가장 잘하는 펜케이크의 요리를 만들어 내고 할아버지의 체스말을 두며 게임을 멈추지 않는다. 할아버지 어깨에 기대어 잠시 잠을 청하기도 한 다비드 역시 알리사처럼 어제와 같은 일상으로 그만의 이별식을 거행한 것이었다.

자폐아 소년 다비드가 알리사 할머니의 침대에서 잠이 들고 알리사는 다음 날 아침을 맞이하는 것으로 소설은 막을 내린다. 남편이 사라진 빈 공간에 자폐아 소년이 대신 한 것은 분명 인위적 결말이긴 하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욱 남편이 사라졌음을 재차 확인하게 될 알리사의 마음이 신경쓰이는 것은 바로 그 다음날, 내일이라는 외로운 일상과 다시 마주쳐야 하는 그 변함없음에 대한 섭섭함 그것이었을까. 바깥엔 눈이 오고 커튼은 따스했고, 소년은 아름다웠지만 그것은 오늘 그녀가 연장한 이별식의 시간에서만 가능한 배려였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거라 믿기 때문일까. 쥘과의 하루는 어짜피 어제 그녀의 하루와 같았고 오늘 그녀의 하루였기에 내일 그녀의 하루 일 것이다. 결국 쥘이 있건 없건 그녀의 하루였다는 사실은 내일의 몫 역시 (쥘 없이도)그녀의 것임을 알려주는 일이었다.

한 사람이 죽은 다음 날을 기억한다. 그가 걸어 다니던 공간, 그와 스치던 시간, 그와 마주한 탁자, 그와 손잡던 소파...모든 것이 그대로인데 사람만 하나 없어진 그 순간에도 아침의 커피와 점심의 메뉴와 저녁의 약속은 존재했다. 배우자를 먼저 잃어야 한다면 꼭 읽어야 할 작품이었다. 배우자를 먼저 잃기 싫은 사람도 꼭 읽어야 할 작품이었다. 결국 배우자가 있다면 누군가는 이 소설을 읽고 그때 그 순간을 다시 생각하게 될 지 모르겠다. 배우자가 있다하면 용서해야 할 비밀 한가지쯤 없는 사람은 없지 않겠는가. 이 작품은 누가 되었건 배우자의 마지막을 위해 남겨두어야 할 무덤까지 가지고 갈 비밀에 대한 이야기였다. 아마도 그날이 비밀을 밝혀야 할 날이라 여긴다면 조금은 더 행복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중요한건 어짜피 용서할 것이므로 지금 이 순간 사랑을 주는 것일 테다. 벌써부터 외로와 진다. 하지만 오늘의 일상은 누구보다 훌륭한 카운슬러일 것이다. 배우자의 힘은 곧 일상의 힘일 것이니. 그 힘은 혼자가 된 후에도 습관을 가지고 반복할 수 있는 내성을 길러 줄 것이다. 우린 그날까지 일상을 지금처럼 반복하기만 하면 된다. 얼마나 쉬운가. 그 때까지는.



- 파도소리와 심장소리가 살아온만큼 평화롭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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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0-12 02: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0-12 10: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0-12 21: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0-12 22: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봉주르, 뚜르 - 제11회 문학동네어린이문학상 대상 수상작 보름달문고 40
한윤섭 지음, 김진화 그림 / 문학동네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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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에서 한국인을 만나면 대체로 반갑습니다. 외국을 나가면 모두 애국자가 됩니다. 여러분은 외국에서 외국인이 한국인이냐고 물어보았을 때 기분이 어떻든가요? 아마 일본이나 중국인이냐고 질문을 받을 때가 더 많았을테죠. 만약 누군가가 한국인이냐고 물어보았는데 한국인인 저는 그 사실이 몹시도 부끄러웠다면 그건 슬픈 일이라는 생각이 드는 군요. 그런데 만약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숨겨야 하는 사연이 있었다면 그건 더 슬픈 이야기 아닐까요. 여기 같은 민족이면서 한명은 일본인, 한명은 한국인인 두 소년이 아름다운 마을에서 프랑스어로 같이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어느 나라말로 친구가 되었을까요...

저는 세상에서 맨 처음 이별이라는 슬픔을 피부로 체감한 그날을 아직도 기억합니다. 바로 어린 시절 서울로 이사오면서 친구들과 헤어진 그날이었어요. 그때 나누었던 동심의 순정이라는 것이 이젠 기억하고 싶어도 막연한 그리움으로만 남은 나이가 되었지만 오늘 잠시 두 친구들 덕에 어른임을 잊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지구상 어느 나라에 살건 나는 한국인이지만 같은 민족일지라도 한국인이 아닌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처음으로 어른이 된 것, 그리고 한국인이 된 것, 그럼으로 한국의 어른이 되 버린 것이 많이도 슬펐습니다. 이 작품을 만나는 한국의 어른들은 저처럼 서러운 그리움에 복받칠 것입니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왜 그리 눈물이 나던지 많은 것이 미안했습니다. 우리의 아이들에게도 미안하고 누군가 몹시도 미웠습니다. 우리 민족은 언제쯤이면 모두 온전한 한국인으로서 세상 어느 나라에도 보란 듯이 자랑스러워 질수 있을까요. 그런 날이...오기는 할까요....? 

 

              

                                                     <한윤섭 글, 김진화 그림 / 본문 삽화 중에서>


어른이 어린이 동화를 읽고 눈물을 훔친다면 철이 덜든 탓인지 철이 든 탓인지 모르겠지만 저는 오늘 이런 감정을 자신의 소중한 기억과 만나게 한 작가의 탓으로 돌리고 싶습니다. 최근에 우리 어른들만의 작품을 읽고도 이렇게 가슴이 먹먹해진 적이 없었기에 저는 작가가 유학할 때 살았다는 프랑스의 도시 뚜르가 애꿎게도 그리워 지더군요. 한번도 가보지 못했지만 관광엽서에서나 볼 수 있었던 고성아래 위치한 마을과 은빛 강물, 그리고 집을 비추던 달빛까지 너무나 낭만적인 그곳에서 시작된 동화속 이야기가 적어도 거짓말 같았다면 그래서 저 먼 곳 지구 반대편 다른 나라의 훈훈한 이야기로만 느껴졌다면 좋았을텐데요. 어쩌면 우리 처한 현실이라는 지금과 이곳이 참으로 거짓말 같기 때문에 누구나 다 아는 오랜 거짓 하나쯤은 부러 꺼내어 확인할 필요가 없었던 것일까요? 우린 항상 바쁘고 열심인데 '민족'이나 '분단' 혹은 조금 더 분명한 '북한'이라는 실존적 명제는 이제 지난 세대의 아픈 역사이거나 다음세대와는 거리가 먼 미래인 걸까요? 전쟁이나 이산가족, 북한 문제는 적어도 우리 다음 세대까진 이어지지 않을 자연스레 소실될 사회적 현상일 뿐일까요...이 무겁고도 외면하고픈 주제를 프랑스라는 제 3의 장소에서 따스한 동화로 옷을 입힌 작가의 깊은 마음에 고개를 숙여봅니다. 


 
  < 프랑스 뚜르의 언덕위에 위치한 쉬농성과 그아래 마을, 루아르강의 정경 >


 


<봉주르, 뚜르> 의 배경이 된 도시를 그려봅니다. 옛날 프랑스 왕족들이 너도나도 성을 지어 세계적으로 유명한 고성관광지가 되었지요. 작가는 뚜르의 고성지대 아래 회색빛 지붕이 올망졸망한 예쁜 주택에서 프랑스에서 가장 긴 강이라는 루아르 강물을 바라보며 오래된 강물이 흐르는 소리를 들으며 무슨 생각을 했던 걸까요. 저는 언젠가 파리의 세느강을 바라보며 우리의 한강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옹색한 물줄기와 또 우리의 한강다리에는 반절도 훨씬 못 미치는 퐁네프 다리를 확인하고 얼마나 실망을 했던지요. 적어도 파리의 세느강을 목격하고 지하철을 한번이라도 타본 분들은 우리의 한강과 지하철이 얼마나 대단한 결과였는지(물론 규모와 청결면에서만요....)우쭐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답니다. 유학생이 아닌 그 누구라도 다행히 세느강이 아닌 루아르 강물이 흘러가는 소리를 들으며 자신의 침실을 비추던 별빛과 달빛에 젖어보았다면 오래된 그리움...혹은 타지에서의 외로움이 더 사무치지 않았을까요. 바로 그렇게 매일 비추던 달빛에 이 작품의 주인공 봉주는 자신의 방 책상 모서리에 적힌 낯익은 글씨를 발견한답니다. "사랑하는 조국, 사랑하는 나의 가족", 그리고 한뼘 떨어진 곳에 마치 답장이도 되는 듯 놓여있던 "살아야 한다"...


"사랑하는 조국, 사랑하는 나의 가족, 살아야 한다."


그만 한눈에 보아도 우린 저 낙서가 낙서만이 아닌 절실한 맹세이거나 혹은 소망이거나 아니면...유서일수도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리곤 이내 약속이나 한 듯이 반사적으로 우리의 조국과 우리의 가족...그리고 살고 있으면서도 살아야 한다고 적을 수 밖에 없는 아니 그렇게 적어가면서라도 꼭 살아있어야 하는 누군가를 떠올리며 그 절실함이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오래된 이야기일 것임을 깨닫습니다. 프랑스어 인사말인 봉주르와 같은 이름의 봉주라는 똑똑한 우리의 아들이 이 낙서를 그냥 지나칠 리가 없습니다. 비록 이름은 프랑스 적이지만 머리에 노란물을 들이는 건 유럽이라는 염색약 속으로 뛰어드는 것 같다는 봉주가 아니던가요? 엄마와 벼룩시장에서도 일본말로 인사하는 상인에게 이곳에 사는 동양인은 모두 일본인이 아니라 말하는 코레앙이 아니던가요?

아...저는 작품속 봉주가 우리 한국인인 것이 너무나 자랑스러웠습니다. 언젠가 프랑스에서 오랜 유학생활을 하신 분이 같은 동양인이지만 자신은 베트남이나 일본인, 중국인이 아닌 한국인임을 각인시켜주려고 여기 한국에서보다 더 이를 악물고 공부하고 더 깔끔하게 하고 다녔다는 말이 생각났습니다. 프랑스같은 유럽에선 자기네들이 보기에 한국이나 일본, 중국이 그저 같은 부류의 동양인으로 인식하는 것이 너무나 싫었고 우리 한국인들은 누가 물어보지 않았는데도 굳이 일본인과 중국인과는 다르다는 걸(무엇이 되었건)밝히고 그것을 인정 받고 싶어 한다고 말입니다. 아마 그것은 우리의 자격지심에서 비롯된 것이겠지요... 지금은 그때와 사정이 조금은 달라져 있을거라 믿지만 애국을 강요당한 우리 세대들은 문화적 우월감이 하늘을 찌를 듯한 프랑스 하늘에 우린 굳이 자랑스런 한국인이라 말하고 싶네요. 어떤가요? 한국이라는 나라의 아픈 과거를 실감하지 못하는 봉주에게도 그 핏줄이 이어졌을 것이겠죠? 그전에 바라보지 않았던 달님이지만 열 두살, 프랑스에서 보는 첫달이 비추던 조국과 민족, 삶에 대한 강렬한 문구가 자신과 깊은 관련이 있을 것이라 그리고 그것은 자신이 꼭 알고 넘어가야 할 이야기일 것이라 어렴풋이 감지 했겠죠?

봉주가 낙서아닌 밀서를 발견한 후 그 비밀을 좇아가는 그리고 마침내 비밀이 추억이 되기까지의 이야기가 오래된 강물이 흘러가듯 잔잔히 펼쳐집니다. 낙서아닌 밀서의 주인공을 찾아가는 봉주의 여정이 속상하게도 많이 현실적입니다. 유럽에서 동양인을 바라보는 시각, 외국에서 우리가 일본인을 이야기 하는 속마음, 같은 유색인종으로서 이슬람권 민족을 바라보는 시선, 같은 민족이지만 남한인으로서 북한인을 바라보는 태도...봉주와 친구들을 비롯한 등장인물간의 대화 속에서 작가가 프랑스에서 살면서 접해본 많은 일상들을 어렵지 않게 겹쳐볼 수 있었습니다.

이 작품을 덮고 호기심에서 비롯된 '낙서의 주인공 찾기'가 우리 조국과 우리 민족, 결국은 우리의 삶에 대한 위치 찾기였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조상 때부터 살아온 나라, 자기가 태어난 나라, 부모의 나라'인 조국은 같으나 '통치권이 미치는 집단'인 국가는 달랐던 토시와 봉주의 우정이 그들이 성장함과 같이 단절되지 않고 이어지기를 희망합니다. 그것은 한국의 발전이자 한국인의 성장이자 한국문제의 미래일 것입니다. 이 작품은 동화로서 가질 수 있는 문학적 한계를 뛰어넘어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분단된 한국에서 한국인으로 산다는 것, 분단되지 않은 외국에서 남한인으로 산다는 것에 대한 의미를 성찰하게 함과 동시에 우리 윗세대들이 겪었고 우리 세대가 외면한 분단이라는 현실이 우리 다음세대에 어떻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를 교훈이 아닌 아름다운 이야기로 그려내었다는 점에서 감동의 박수를 보내고자 합니다. 



              < 토시네의 일본 식당이 자리했다는 플뤼므로 광장의 노천 카페 >



                  <회색빛 지붕과 베이지색 주택들로 이루어진 뚜르의 마을 풍경>


이제 우린, 프랑스로 여행을 간다면 굳이 고성여행을 핑계로 뚜르를 방문할 지 모르겠군요. 루아르 강변을 산책하며 공원과 광장에 들러 슬며시 외국인으로서의 감상에 젖어 있을 즈음 누군가 한국인이냐고 물어온다면 그때 '우리나라 사람들은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기에 파리의 세느강 보다는 이곳 루아르 강을 더 좋아한다'고 말해보고 싶은데요. 그때 그들이 이미 우리에게 북한에서 인지 남한에서 인지 궁금해 하지 않아도 되었다면 고성여행이 더 뜻 깊을 것 같습니다. 우린 도착하자마자 이렇게 인사할지 모르겠어요, '봉주르, 뚜르 !!' 우리도 여기보다 멋진 한강이 있어, 그치만 오늘은 이곳 뚜르가 최고야! 우리에겐 소중한 추억이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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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0-10-07 21: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른 사람들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저는 한사람님의 글을 읽게 되면 감성이 자극되는거 같고
읽고난 뒤에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뭐라고 해야 되나..^^;;
마음이 짠하면서도 애틋한 여운이 강하게 남습니다.
조금 있으면 야간 일하러 가야하는데
하루가 끝나가는 즈음에 이런 멋진 글 한 편 볼 수 있어서 행복합니다ㅎㅎ
입에 발린 소리로 보실지도 모르겠지만 진심이랍니다ㅎㅎ
좋은 글, 멋진 사진들 잘 봤습니다^^ㅋ

한사람 2010-10-07 23:28   좋아요 0 | URL

글을 쓰시는 분들은 남의 글 밑에다가
절대로 입에 발린 소리를 하지 않는다는걸 잘 압니다..
아예 침묵하거나..하게되면 거짓을 말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지요^^

cyrus 님의 덧글이야 말로 잔하게 여운이 남는걸요~
아마도 아예 서평 쓸때 제마음에 남지 않았던 책들은 웬만해선(의무가 있는 책을 제외하고)
평을 안하기 때문인거 같습니다..

하루가 끝나갈 시점에 이런 칭찬..정말 감사해요 !!

해라 2010-10-15 09: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사람 님:) 추천 꾸욱!!!^^

한사람 2010-10-15 10:53   좋아요 0 | URL

해라님 ~~~~~
반가워요 !!!!
 
굿 바이 - 다자이 오사무 단편선집
다자이 오사무 지음, 박연정 외 옮김 / 예문 / 2010년 9월
평점 :
품절



어짜피 저 세상 사람들이지만 돌아가는 방법이 자살이었던 작가의 글은 마침 상황이 좋지 않을 때 읽을 경우엔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 자살한 작가들은 거의 유서 쓰듯 작품을 집필한다고 생각하기에 실은 유서를 읽는 것과 같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람에 따라서는 문학이 살아가는 이유가 될 수도 있지만 바로 그 문학이 죽음으로 이끄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평범한 독자인 내가 이해하기엔 여전히 힘겨운 것이 사실이다. 그래도 궁금했다. 혹시나 마지막 작품을 읽으면 혼자만 안고 갔을지 모를 연유에 가닿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에 한가닥 실마리를 찾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오래전에 전혜린의 글을 읽고 이 사람은 죽을 수 밖에 없었겠구나...생각한 적이 있었는데 다자이 오사무 역시 비슷한 느낌이었다. 『굿바이』를 덮고 난 지금 이 사람은 죽는 것이 더 나을 수 도 있었겠다는 공감과 연민으로 가득하다. 이번 소설집은 그가 작품을 발표한 시간 순에 따라 총 여섯 편을 모아 구성한 것이었는데 여섯 편이 모두 집필 당시마다 죽음을 늘 예견하고 있던 사람이 마치 죽음의 이유를 찾고 정당화하는 작업의 결과물로 느껴졌다. 각 편 마다의 무게감이 막중하여 십대의 유서, 이십대, 삼십대의 유서를 차례로 확인한 것 같은 서글픔은 이 작품집의 집요한 의도인 것일까. 무르익어 가는 가을과 함께 가슴깊이 서늘함이 스며들었다. 꼭 그래야만 했을까...그래야만 했을 것이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자살을 정당화했고 쇼펜하우어는 자살을 권장했으며 카프카는 자살로 해방을 얻을 수 있다했으며 아쿠타카와 류노스케는 자살했고 가와바타 야스나리도 그러했으니까.

 ...자의식의 역행


  - 비교적 젊은 시절의 고흐 자화상-

다자이 오사무는 그야말로 시골 부잣집의 아들로 태어나 식사를 할 때 하녀가 옆에서 부채로 더위를 식혀주는 귀족생활을 해온 왕자님이었다. 7남 4녀 중 10번째이면서 아들로는 여섯 번째 였으니 30명이 넘었던 대가족 집안에서는 작품에도 자주 등장하는 남동생과 함께 가장 막내격 이었을 것이다. 아버지는 14살에 작고하고 유모의 젖이나 숙모의 가슴을 만지며 자란 것으로 보아 부모님의 사랑과는 거리가 멀었던 것으로 보인다. 잘난 형과 누나가 많았던 덕에 그들로부터 극심한 열등감에서 자유롭지 못했으며 얼굴이나 신체등 외모컴플렉스도 심했다고 한다. 자살한 일본 작가들이 어린 시절 모성이나 부성이 부재한 경험과 성장하면서 병약한 신체를 지니게 된 점은 이제 하나의 공식과도 같아 보인다. 정서적 불안감은 곧 신체적 나약함으로 이어졌고 그것은 다시 정신적 문제로 확산되는 악순환을 반복하지 않았던가. 여기서 문학은 구원이 아닌 오히려 자살을 부추기거나 결국 유혹이나 협력하는 도구로 전락하고 마는 것이 이들의 순로였다는 것을 그를 보며 다시 한번 인정해야 했었다.

청소년 시절까지의 가족관계와 고향에서의 추억을 서술해낸 <추억>은 오사무가 자의식을 형성해 가는 과정을 그려내고 있는데 유년시절부터 바깥의 세상과 대립하며 자신이 느끼는 자아에 대해 그 나이답지 않게(필요이상으로) 생각이 많았던 것으로 보였다. 부모와의 거리는 소원했다 해도 당시 집안환경이나 교육조건, 주변 인물들로 보아 얼마든지 활달하고 긍정적인 성격으로 성장할 수 있었을 텐데(적어도 청년기까지는) 스스로에 대한 요구치가 지나치게 높아 자신을 반성하거나 다그치는 시간들이 혼자 있는 시간의 주를 이룬 것은 다분히 타고난 기질적 요인에 있었다고 느껴진다. 오사무는 자신의 천성적인 나약함과 평생을 투쟁해 왔다고 생각되며 어쩌면 그 나약함을 이기려고 죽음을 선택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오사무는 부모님과의 기억은 없었지만 막내 동생, 숙모, 하녀들과는 우습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하며 아름다웠던 추억들을 낡은 앨범속의 빛바랜 사진으로 남겨 놓았다. 예닐곱 살에는 책 읽는 방법을 가르쳐 주던 하녀로부터 방화범, 거짓말, 지옥과 같은 도덕적 가치에 대해 편향적인 이야기를 듣고 미신적인 공포를 체험한다. 소학교에서 글짓기에 진실을 담아 쓰면 결과가 좋지 않고 거짓을 쓰거나 표절을 하면 항상 칭찬을 받았던 경험은 많은 상처가 되었던 것 같다. 실제 일상에서도 솔직하게 진실을 전해야 하는 것과 남들이 좋아할 거짓을 선택하는 것 사이에서 혼란스런 학창시절을 보낸다. 형제들 중에서도 잘생긴 형이나 동생과는 사이가 좋지 않았고 자신처럼 못생긴 누나와는 애틋했으며 어릴 때부터 병약했기에 옷차림과 자세, 이마와 머리모양, 건강과 피부색깔에 관한 남들의 평가에 지나치게 예민했다. 열등감과 자존심 때문에 공부했으며 관심있는 여자에게는 절대로 먼저 접근하지 않는 소극성을 우월감으로 합리화하기도 했다. 중학교 시절 완벽주의적인 성향이 굳어지며 모든 것에 만족할 수 없었던 공허한 몸부림은 창작이라는 도피로 이어지며 사실상 그때부터 작가라는 외로운 길을 걸었다고 보여진다. <추억>의 마지막은 자신이 짝사랑하던 고향집의 하녀가 어느날 갑자기 사라지자 그녀와 어머니, 숙모와 함께 찍은 사진을 바라보며 숙모와 닮은 하녀를 발견하는 것으로 막을 내린다. 이 작품의 첫 번째 수록작인 <추억>을 읽으면서 하찮은 멸시를 받으면 죽어버리려 결심했다고 하는 그의 극단을 꽤 어린 시절부터 접하고는 결국 자살은 인간관계에서 혼자 연민하고 혼자 판단하며 혼자 결론짓는 삶의 습관을 형성해온 자의식의 과잉때문 이었다는 것을 일찌감치 감지 할 수 있었다.

제 1회 아쿠타가와상 수상작이 될 뻔 하였던 <역행>이라는 작품 역시 젊은 시절의 팽창된 자의식의 흐름을 시간의 역순을 따라 보여주며 독특한 서사를 선보였다. 만약 이 작품이 차석이 아닌 1등의 수상을 했다면 어떠하였을까. <추억>과 <역행>은 이미 두 번의 자살을 기도하고 반제국주의 학생운동을 하다 자수와 함께 완전히 발을 뺀 직후에 쓰여진 작품들이었다. 특히나 동반자살에서 카페 호스티스는 죽었고 자수역시 그의 죄책감을 극대화하는 상처였을 것인데 그 시기에 자신이 우상으로 여기던 작가의 이름으로 제정된 상의 첫 번째 수상자가 되었다면 얼마간 그 죄책감에서 벗어날 수 있는 계기가 되지 않았을까. 마땅한 전환점을 찾지 못한 오사무는 그 이후에도 같은 상에 집착하는 경향을 보이며 자신의 문학적 행로에 있어 아쿠타가와상에 대한 의미를 세상과의 화해로 생각했을지 모른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도 그럴 것이 재능은 있어 보이나 사생활에 문제가 있어 보인다는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심사평은 그를 더욱 세상과 단절케 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을 것으로 판단되며 끝내 상을 수상하지 못한 오사무에게 자살에 대한 정당성을 굳히는 문학적 테러였다고 생각된다. 

<역행>은 노인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스물다섯을 넘긴 노인의 임종을 묘사한 '나비'를 시작으로 도쿄대 학생으로서 시험을 치는 날의 풍경과 식당에서의 에피소드를 그린 '도적', 술집에서 농사꾼 남자를 무시하다 결투까지 하게 된 '결투', 마을을 방문한 곡마단에서 재주를 부리던 검둥이에게 자신을 투영하며 동일시 해보던 소년의 추억을 그린 '검둥이'의 짧은 이야기가 단편속의 단편으로 구성된 이야기 모음이라 할 수 있다. <역행>이라는 묶음만 없었다면 연결고리가 없는 개별적인 작품으로도 인식될 수 있는 형식을 취하고 있어 서사를 이끄는 주인공이 동인인물이라고 생각하기 어려웠음이다. 네 가지 이야기를 공통으로 관통하던 감정은 자신을 향하던 지독한 냉소였다. 그다지 잘못이라고 생각되지 않는 사소한 생각과 행동들에 쉽게 상처 받고 상황을 심각하게 받아 들여 결국 화살을 자신에게 쏘고 마는 결말은 청춘이 가지는 자기파괴의 특권이라 생각하기엔 그 골이 너무 깊어 보였다. 그래서인지 긴 생애에서 거짓이 아닌 것은 태어남과 죽음, 단 두가지 뿐이라는 그의 결론은 너무 완벽해 보여서 아무런 말을 할 수 없었음이다.

자의식은 내면을 향한 냉철한 의식이지만 자의식에만 빠질 경우 외부와의 단절에서 오는 고독과 그로인한 병적인 망상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오사무는 그토록 과잉된 자의식 속에서도 자신을 가치있는 인간으로 인식하는 자각은 평생 해내기 힘들었던 것 같다. 하지만 개인 오사무는 절망으로 막을 내렸지만 문인 오사무는 바로 청춘의 '분열과 팽창'을 상징하는 문학의 희망으로 남았다. 오사무가 일본문단에서 작가로서 확고한 자리를 잡지 못했을 젊은 시기의 글들을 보면서 아마도 다음 세대의 일본 작가들은 오사무의 청춘의 분열과 팽창을 자신의 질료로 삼아 작가적 소양을 갖추어 나간 문인들이 많았을 것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폐허의 기억


  -공허한 심연이 표현된 고흐의 자화상-

오사무의 작품 이력에서 커다란 계기가 되는 역사적 사건은 태평양전쟁과 그 패배였다. 이 작품에 실린 <망치소리>와 <아침>은 전쟁 패배 직후(1947)에 집필, 발표된 작품들이었다. 문단 초창기 이후 또 한번의 동반자살기도도 있었지만 모친은 별세하고 자신은 오랜 병마와 싸우면서 청춘의 열정을 거의 소진한 상태라 생각된다. 그래서인지 앞선 <추억>과 <역행>과는 확연히 다른 느낌이었다. 날카롭고 예민한 감정상태보다는 슬프고 무의미한 자신의 감각을 나지막히 읊조리는 듯한 분위기는 전후에 폭격으로 소실된 자신의 고향집을 연상케 하며 점차 죽음의 그림자가 더 크고 더 깊게 드리워져 가고 있음을 예감할 수 있었다.

<망치소리>는 스물 여섯 살의 청년이 어느 소설가에게 자신의 고민을 고백하는 내용의 편지글이다. 화자는 태평양 전쟁에 참여해 일본이 항복한 후 고향에 돌아와 우체국에서 일을 하고 있는 평범한 젊은이였지만 군대에 있을 당시 전쟁의 패전을 알리는 라디오 방송과 해산을 명하는 상사의 목소리를 들었던 그 시점에 쇠망치 소리를 동시에 들었던 기억을 무의식에 저장해둔 '상처 입은 청춘'이었다. 비장하거나 엄숙하지 않고 차분해지던 그때의 충격은 그 이후로 화자가 생의 열정을 감지 할 순간마다 여지없이 의식을 두드리며 찬물을 끼얹는 '탕탕탕'의 불청객이 되고 만다. 화자는 이 환청을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지 자신의 고민거리를 소설가에게 의뢰한 것이었다. 망치 소리는 일, 사랑, 인간관계 모두를 잠식하며 결국엔 '허무의 열정'마저 무너뜨려 자신마저도 지각할 수 없게 만드는 무시무시한 외상증후군이었다. 작품자체는 소개된 어느 작품보다도 매끄럽고 감상적이었지만 만약 현실에서도 비슷한 환청에 시달린다면 더 이상 삶을 지속하기 어려운 상태라는 판단이 들었다. 그리고 그것은 역으로 무의미한 현실을 견뎌내는 반복된 습관으로도 인식되었다.

<아침>은 수록된 작품 중에서 가장 짧은 분량의 소설로 작가로 보이는 화자가 집중을 위해 마련한 비밀사무실에서의 일상을 촛불과 교차시키며 자신의 심리를 전달한다. 비밀사무실에는 애인도 연인도 아닌 친분이 있는 여성이 살고 있고 나는 만취한 상태에서 그녀와 같은 하룻밤을 지내게 되지만 촛불을 밝히고 그 촛불이 꺼질 때까지 별다른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시시각각 촛불이라는 소품에 자신의 시선과 심리를 투영시키며 불꽃의 미세한 변화에 따라 대화의 기운이 바뀌는 것을 알 수 있다. 화자는 촛불이 꺼지면 무언가를 해보겠다는 각오를 다져보지만 다짐과 동시에 그만 아침이 되어 돌아갈 채비를 하는 것으로 소설은 막을 내린다. 촛불이 켜져 있을 동안만 열정이 불살랐으며 그 열정을 실천하려 함과 동시에 촛불이 사라지고 어둠이 사라지는 것은 상당히 이율배반적인 결론일 것이다. 촛불이 꺼진 것은 아쉽지만 더 이상 번민을 하지 않아도 되는 죽음의 상태를 의미한다 볼 수 있고 죽음이 아침인 것은 곧 절망만이 희망인 것을 의미하기에 이 역시 반복되어온 오사무의 일상적 고뇌를 일상의 편린으로 표현하였다는 생각이다. <망치소리>와 <아침> 두 작품은 전후 폐허가 된 일본사회에서 심리적으로 그 어떠한 열정도 다시 불태우기 쉽지 않았던 오사무의 절망을 직접, 간접적으로 드러내었기에 그 안타까움이 인상적인 작품이었다.

...고백과 농담


- 자학과 조롱으로 연민에 호소하는 자화상-
 
 

이번 소설집에서 (모두 솔직하지만)특히 오사무의 가공없는 솔직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던 작품은 <내 반생을 말하다>였다. 그런 면에서 <굿바이>는 평소에 자신이 잘 시도하지 않았던 방식으로 아마도 죽기 전에 한번 세상을 향해 웃기는 소리를 내뱉고 가고 싶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두 작품은 모두 오사무가 다섯 번째 자살시도에서 드디어 성공하기 바로 직전에 쓰여졌고 <내 반생을 말하다>는 거의 직접적인 유서로 보아도 무방해 보였음이다. 소설이라는 형식을 빌어 그동안 자신이 세상에 적응 할 수 없었던 이유들을 고이 정리하여 '나는 그렇게 이상한 사람이 아니다'라는 결론을 내리고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세상과 이별하고 싶었고 나약함을 들키지 않기 위해 했던 행동들은 사람들로부터 잘난 체 한다는 비난으로 돌아왔고 문학에 입문하게 된 것은 어떤 큰 뜻을 품고 이룬 것이 아니라 무의식의 세계에서 출발하여 문학의 들판 한가운데 서게 되었고 안톤 체홉, 푸시킨을 톨스토이, 도스토예프스키보다 좋아했다고 말한다. 사람들이 자신을 괴짜로 부르기에 도덕적이지 않다고 오해를 하지만 실은 기독교적인 삶의 태도, 프롤레타리아 적인 의식으로 무장된 도덕적인 사람이라는 것이다. 다만, 스스로 자신을 싫어하면서 학대하는 것은 곧 상대도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이고 그것은 자살할 수밖에 없는 태도임을 깨달았다...그래서 술을 마셨고 가정은 파탄이나 빈곤함을 면치 못하고 결국 처자식을 부양하기엔 너무나 형편없어 죽어야만 할 것 같다는 결론으로 마무리된 그의 반생...에 대한 고백은 자신이 죽어야 하는 많은 이유를 열거하는 반성문과도 같았음이다. 그런데 아직 나의 전생이 아닌 반생인 것을 보면 죽음을 결심하지는 않은 단계로도 보였다. 실은 그것조차 남은 반생에 살짝 유보한 상태였겠지만 이야기적으로 죽어야 할 이유는 참으로 마땅해 보였기에 그 역시 아무런 토를 달수 없는 글이었다. 그는 왜 살아야 할 이유에 대해서는 고민하며 글을 남기지 않았던가.

완성을 다 하지 못한 <굿바이>라는 유작은 완성을 하지 않은 사실 자체가 그 작품의 결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애초부터 이 작품을 집어들 때 신문에 연재분을 넘겨놓고 자살 무대로 달려가는 그의 심리가 퍽이나 궁금했다. 몇 회만 더 작성하면 마무리를 볼 수 있었는데 완벽주의자였던 오사무가 자살하는 마음 한 켠에 미완의 원고를 남겨두었다는 것이 논리적으로 맞지 않아보였기 때문이다. 그 많던 정부들과 소설속이긴 하지만 헤어지기 미안했던 것일까. 주인공은 그동안 큰 의미없이 만남을 지속해오던 정부들과 어느날 갑자기 헤어지기로 결심하고 이별통보를 위해 '까마귀소리'라는 비현실적 캐릭터를 앞세운다. '까마귀소리'라는 여성과 정부를 한명 한명 찾아가기까지의 농담 따먹기와 찾아간 순간의 웃긴 상황, 어설픈 이별을 하고 난 뒤의 허전함을 달래기 위해 또 다음 정부를 찾아가는 서사가 핵심인 이 작품은 사실은 그렇게 해서라도 사람과의 불공평한 인연을 정리하고 싶었으나 그렇게 하지 못한 마음약한 자신에 대한 대단히 웃긴 조롱으로 느껴졌다. 그 작품을 마무리 한다는 것은 아마도 작가로서 상당한 만족감을 주었을텐데, 작가는 그러한 상황을 예견했는지 행운이나 열정의 기운을 느끼는 것이 부담스럽고 두려웠던 것으로 해석된다. 어짜피 다시 열정을 느껴보아야 그것을 채 느껴버리기도 전에 다시 사그라들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에 아예 모든 희망과 절망조차 미리 차단해버리는 심리는 우울증의 핵심이다.

결국 자신이 답습해온 삶의 패턴대로 여인과 투신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무엇이었을까. 자신에 대한 벌이었을까. 더 이해 할 수 없는 것은 동반자살의 대열에 당당히 이름을 올린 나머지 여성들이었다. 실제로 오사무의 자살기도로 세명 중 두명의 여성이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했다. 수면제로 혼자 시도한 적도 있었지만 투신할 땐 여성과 함께였고 그들은 모두 화류계에 종사하는 여성들이었다. 즉, 그들 역시 앞날이 그다지 희망적이진 않았을 것이고 오사무의 심리적 상태를 인지하고 있던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자라면서 모성부재와 부성공포로 상처입은 오사무의 저 심연 밑바닥엔 여성과 살아서 이루지 못할 사랑을 죽어서 이루자는 취지와는 상관없이 태어남과 같은 모성의 품안에서 자유롭게 바다로 뛰어 들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그럼으로써 다시 탄생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가장 대표작인 <인간실격>을 아직 접해보지 못했기에 욕심이 생긴다. 여섯 개의 단편이었지만 솔직하고 섬세한 문체와 함께 끊임없는 자의식에 대한 질책이 의도적인 은유로 반복되는 다자이 오사무의 문학적 독창성은 은근한 중독성을 가공한다는 결론이다. 많이 울어야 할 것 같지만 스스로 너무 부끄러워 참을 수 있을 때까지 참아 낸 다음 글로 담아낸 물기 없는 눈물의 미학으로 느껴진다. 어쩌면 그가 자살한 덕에 누리는 행운일 수도 있겠다. 문학은 공급자의 처절한 입장과는 별도로 그것을 취하는 대상에게는 턱없이 이기적이라는 사실을 깨우쳐준 작품이었다. 그가 몸을 던진 바다가 문학의 바다이었다면 더 좋았을 것이라는 부질없는 생각을 해본다. 굿바이...지금, 여기 보단 조금은 더 좋은 곳이길 바래 본다.


 
-다자이 오사무의 자화상-
.
. 

 오사무의 자화상을 보면서
자화상을 그린 고흐가 계속해서 중첩되었다. 
시대와 분야는 달랐지만 자살로 이른 두 예술가를 향한 서글픈 공감만은
오래 기억하고 싶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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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0-10-05 18: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자이 오사무의 소설과 고흐의 그림의 만남이라,,,
시대는 다르더라도 그들이 겪었던(아니면 견뎌냈다고 말할 수 있는)
삶이 묘하게 어울리네요. 사실 저도 오사무의 독특한 생애만 알고 있을 뿐이지
아직은 그의 작품은 접하지 못했답니다. 저도 <인간 실격> 읽어봐야겠군요^^
오늘 하루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ㅋ

한사람 2010-10-05 22:12   좋아요 0 | URL

cyrus님은 <인간실격>을 어떻게 보실지 궁금한데요?
다자이 오사무는 독자의 마음을 잘 헤아려 주지는 않는 작가인듯 합니다^^


2010-10-06 02: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0-06 18:41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