퀴르발 남작의 성
최제훈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0년 9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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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방 비상구 (The eight points of the emergency exit)
- 스테레오 타입을 탈출하기 위한 방향을 중심으로 -


가끔 책을 덮고 나면 이 사람이 원래 뭐하던 작자(?)인지 궁금할 때가 있다. 이른바 전직이 의심스러운 사람들, 처음부터 걸어온 길이 꼭 문학이라는 가시밭길 같지는 않아 보이는 사람들, 그런데 타고난 운명은 거부할 수 없어 자석에 이끌리듯 그만 방향을 바꾼 사람들. 최제훈이라는 작가를 알지 못했지만 어쩐지 이 분도 그런 느낌이 든다. 나는 문학 평론가는 아니지만 독자라는 책값만큼의 권리로 서평분량만큼만 그의 뒷조사를 하고 싶었다. 허나 세상에 알려진 그의 이력은 두어 줄에 불과했기에 심플한 그 두 줄을 바탕으로 빈약한 상상의 문어발을 뻗을 수 밖에 없었다.

예전 직장생활에 한참 목을 메고 있을 그때 그 시절, 우리 팀에 학부에서 물리학을 전공했지만 다시 디자인이 하고 싶어 그 분야 이름있는 전문대에 늦깍이 학생으로 졸업 후 교수추천으로 입사한 친구가 있었다. 나이는 나와 같았지만 나는 이미 사회생활의 쓴맛 단맛 신맛을 골고루 섞어 마신 꽤 깐깐한 팀장이었고 그 친구는 이제 막 신입으로 합류했으니 그 친구나 나나 사이가 매끄러울 리가 없었다. 한번은 신입 여러 명에게 A3용지를 열장씩 나누어 주고 주어진 목차대로 페이지를 채워오라 숙제를 내준 적이 있는데 어쩐 일인지 꼬박 하루가 걸릴 분량을 혼자 반 나절만에 해결해서 내 앞에 들이민 신입이 있었으니 그치가 그치였던 것이다. 이 친구는 다른 친구들이 아이디어 스케치부터 대충 해치우고 그걸 가지고 자신의 디자인 의도를 설명하는 식의 페이퍼를 작성하지 않고 종이와 자, 계산기를 가지고 남다른 시작을 한 것이다. 즉 최종으로 제작될 제안서 A3 용지의 레이아웃에 딱 들어 맞게 상하좌우 여백을 제하고 거기서 또 목적, 배경, 의도, 연출등의 칸을 정확하게 자로 잰 후 그렇게 나누어진 공간 안에서 한 항목당 10포인트의 글자가 몇 개가 들어갈 지 계산을 한 다음 다른 제안서에서 딱 그 항목에 부합하는 문단을 낱말 수에 맞추어 복사한 후 다시 그 위에다 몇 개의 단어만 바꾸어 페이지를 완성 한 것이었다. 물론 그림은 그 나머지 공간에 어울리는 이미지를 일단 찾아서 붙여놓고 자신은 이렇게 그림을 그리겠다고 말이다. 하나의 틀을 만드는데는 시간이 걸리지만 그 후 10페이지를 똑같은 방법으로 복제하니 제일 빠를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한 페이지당 소요시간을 재어본 후 10페이지 구성의 총 시간을 예상, 아예 목표시간을 맞추어 놓고 그 시간안에 작업을 하였다. 그 친구가 주장한 것은 일의 '효율성' 이었다. 그렇게 일을 진행하면 한페이지 때문에 다음이 막히는 일이 줄어들고 전체 분량을 알 수 있으니 일이 되어가는 큰 그림이 한눈에 보인다는 것이다. 그 친구는 항상 제일 먼저 퇴근했다.

물론, 그 친구의 아이디어가 항상 좋은 평가를 받은 것은 아니었다. 그 친구는 다른 일을 할 때에도 반복되는 일에 있어 항상 (시간이 걸리더라도)자신만의 틀을 먼저 만들고 그 안에다 내용을 삽입하는 성향이 있었는데 결과의 퀄리티는 매번 보장할 수 없었지만 속도면에서는 그를 따라갈 자가 없었다. 우리사이에서 그는 '퀵 페이퍼'라 불리었고 대세에 지장없이 빨리 제출해야 하는 문서는 그가 맡았다. 즉, 그는 동종업계에서 다소 늦게 출발한 자신의 약점을 극복하기 위한 차별화로 업무의 효율성을 특화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책을 덮고 나서 소설쓰기에 있어 자신만의 차별화를 확실히 구축한 작가의 마음 한 구석을 엿보는 기분이었달까. 경영학을 공부한 사람이라 그런지 이야기를 아주 효율적으로 경영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미국 MBA 출신의 빈틈없는 CEO가 구조조정은 물론 M&A, 양자간 MOU도 일사천리로 진행하는 창의적인 비즈니스맨을 연상케 했다. 준비도 철저히 한 것 같았다. 8편의 이야기가 우연히 나왔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는, 아주 잘 계산된 치밀한 계획에 의해 탄생된 프로젝트라는 생각, 늦깍이 신인작가의 이 계획성에 나는 감동받았다. 바로 지난주에 베르나르 키리니라는 벨기에 작가의 <육식이야기>를 읽고 올해 건진 최고의 수확이라고 떠들었는데 '장님코끼리 만지기'라고 어디까지나 지난주까지의 이야기에 불과했다. 첫 소설집이라고 하니 아마 목을 빼고 장편을 기대하는 독자들이 한창 많아지지 않았을까 싶다.

우선, 내가 감지한 이 작가의 차별화 전략은 스테레오타입(Stereotype:고정관념)에의 탈피에 있는 듯하다. 이 부분에선 그가 기존의 소설 장르와 형식, 소재, 작법을 거부하고 애초부터 무언가 새로운 돌파구를 부러 찾아 그 부분을 집중공략 했다는 생각이 드는 건 사실이다. 그런데 그 다름의 완성도가 소름끼칠만큼 완벽하다. 어느 인터뷰를 보니 자신이 글쓰고 싶은 이유를 알고 싶어서 글을 쓴다는 대답을 하더라.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내가 왜 글을 써야 하는지'를 오래 생각해 온 사람으로서 글을 쓰는 이유를 밝히는 것이 소설가로서 소설행위가 되어 자신의 (작가로서의)정체성을 차별화하는 것이 역으로 글을 쓰는 이유가 되지 않았나 싶다. 그리고 그 정체성은 다시 여지껏 억눌려온 많은 사람들이 행해온 방식에서 벗어나 이야기로서 자신의 무한대를 밝혀보고 싶은 욕구로 발전하지 않았을 지.

스테레오 타입이라 함은 '어떤 특정한 대상이나 집단에 대하여 많은 사람이 공통으로 가지는 비교적 고정된 견해와 사고'(네이버 백과사전)를 말하는 것으로 흔히들 고정관념이라 말한다. 이 스테레오 타입이 없다면 새로운 방식은 존재 하지 않는다. 대중들이 스테레오 타입을 의심없이 인지하는 이유는 일상의 질서가 더 평화롭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달리 말하면 고정관념 바깥에 위치하는 어떤 신개념은 일상의 바깥에 있다고도 할 수 있다. 우리로선 일상의 안쪽, 즉 기존의 질서에 순종하는 것이 더 효율적인 태도인 것이다. 그런데 이 작가, 효율성을 궁극의 골라인에 위치시킨 학문, 경영학을 공부한 사람이 어찌보면 전혀 효율적이지 않은 분야로 눈을 돌려 자신의 전공인 효율성을 적용한 지점은 바로, 소설의 질서를 깨뜨리는 일이었다. 기가 막히다. 자신이 가장 잘하는 무기를 가지고 자신의 한계를 넘는 방법이 소설의 효율을 무너뜨리는 것이었고 그것도 아주 최대한 효율적으로 진행한 후 결과적으로 전에 없이 효율적인 작품을 완성한 것이다. 고로 이 작가는 자신을 무너뜨리면서 자신을 쌓아나가는 흡사 자신의 작품들과 아주 일치하는 일을 한 것이다. 이 책의 구성 메카니즘이 곧 이 작가의 정체성을 대변한다고 생각된다.

이 책에는 총 8편의 이야기가 배치되어 있는데 마지막 이야기는 앞의 일곱 편의 후기처럼 정교하게 짜맞춘 작법을 휘날레로 장식하였다. 책을 덮고 나면 마치 희대의 사기극 완결편처럼 읽는 자의 카타르시스를 충분히 만족시켜주며 뇌리속엔 모든 작품이 '기존의 모든 것에 대한 탈피'로서 기분좋은 이야기 현상으로 남는다. 굳건히 닫혀있던 8개의 비상구가 하나씩 열리더니 마침내 동시에 열어 젖히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비상구라는 것이 모두 동시에 열리면 그건 이미 탈출이라기 보다는 개방이나 환영이 아닐까. 공교롭게도 팔방(여러 방향: in all directions)향의 탈출구가 오픈되는 이 현상을 무어라 해야하나. 이야기의 해방? 서사의 자유? 구조의 혁명? .... 탈출을 이룬 그의 방향성을 검토해 보고자 한다.

Gate 1 ... 출발, 릴레이 여행 ! 「퀴르발 남작의 성」

첫 번째 이야기는 1697년부터 2005년까지 대략 3백년간의 이야기 발전사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이야기 '이어달리기'라 할 수 있다. 한 주자가 다음주자에게 바톤을 넘겨주는 형식이다. 6월 9일에 일어난 총 12개의 에피소드들이 이야기 조각으로서 나열되며 각각의 조각은 서로 독립적이면서도 모아 놓으면 하나의 그림이 된다. 이야기의 원 순서는 최초 발생한 하나의 사실이 시발점이고 그 사실은 구전설화가 되더니 나중엔 소설로 발전하고 소설은 영화로 영화는 리메이크되는 식이다. 그 영화들은 강의실로 리포트로 모방범죄로 기자의 비평으로 관객의 감상으로 끊임없이 이어진다. 이야기가 시간과 공간을 넘나들면서 그때그때 전달자와 수신자간의 상호합의 혹은 일방통신에 의해 변형, 확대, 왜곡, 재생산되는 과정을 쉽고도 편하게 확인할 수 있음이 이 작품의 안 보이는 미덕이라 할 것이다. 프랑스에서 미국, 일본, 한국으로 건너오는 이야기 릴레이의 바톤에 해당하는 재료(source)는 '퀴르발 남작의 성'에 살고 있는 퀴르발 남작에 관한 믿을 수 없는 소문이다.

형식도 소재도 모두 신선했고 작가가 우리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바도 분명한 이야기였다. 아마도 6과 9라는 숫자는 이야기를 뒤집어 보거나 역추적 한다는 의미가 내포되 있는 듯하고 서사의 전개가 시간순이 아닌 것은 이토록 이야기는 순리대로 체계를 가지고 변형되는 것이 아니라 우연에 의해 우발적인 사건에 의해 곳곳에서 진행되어 왔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그 이야기의 변형에는 항상 이야기를 전달받아 그것을 재생하는 인간들의 이기심이 핵심에 자리하고 있어 각자 자신들에게 유리한 편으로 뼈대와 살점을 재구성하여 이야기 자체의 진심을 무시하는 것으로 그려진다. 하지만 작가는 이야기의 진심이 곧 우리 사는 현실에 진실은 아닐 수 있다고 말한다. 이야기가 해체되고 축적되는 과정에서 지금 우리 앞에 도달한 이야기의 결과만이 진실로 받아들여지는 것이라고 말한다. 왜곡된 진심이지만 현실에 용인되는 가치만이 진실이라고, 이야기가 거짓말인 것은 중요하지 않다고. 원래 이야기한텐 미안하지만 영원히 살지 않는 우리로선 뼈아픈 진실이자 이해될만한 진심이었다. Originality 보단 Utility에 기우는 것이 퍼져가는 이야기의 속성인 것일까. 문득 우리 사는 오늘날, 진짜라고 믿는 진실이라는 것이 오늘까지의 이야기에 한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 작품이었다.

Gate 2 ... 미스터리 다시짜기 「셜록 홈즈의 숨겨진 사건」


올해의 문제작으로도 알려진 이 작품이 미치도록 반가웠다. 나는 이 작품이 이번 소설집에서 가장 완성도가 높았다고 생각된다. 물론 내 맘대로 내 기준에서 완성도다. 읽는 내내 이 작가 머리가 너무 좋은 거 아닐까...감탄해 마지 않았다. 우선 문체는 홈즈가 왓슨이라는 옛조수에게 보내는 편지글이었다. 고전적인 우아함이 인상적인 말투와 끝까지 지적인 면모를 유지하는 홈즈의 캐릭터가 서사속에서 막대한 집중을 발휘하며 이야기가 끝남이 아쉽도록 만들었다. 서사의 줄기는 셜록 홈즈가 권태로운 일상에서 흥미롭게 발생한 살인사건의 전모를 밝히는 과정을 고백하는 것인데 피해자는 다름아닌 자신의 창조주인 아서 코넌 도일이었다. 소설속에선 홈즈가 전혀 코넌 도일을 모르는 것으로 등장하며 결국 홈즈는 자신을 탄생시킨 작가의 죽음을 추리하는, 우리로선 꽤 당황스런 농담의 시작인 것이다. 게임은 이제부터 인데 처음엔 타살로 추정했다가 여러 가지 추리에 의해 코넌 도일이 자살했음을 밝혀내는 과정이 곧 홈즈로선 이 사건을 묻어야 할 사유가 된다. 작가는 도일경이 설치한 함정을 밝혀내는 홈즈의 논리를 똑같이 셜록 홈즈라는 소설의 기법을 사용해 서사를 밀고 나가며 이미 알려진 소설과 작가, 주인공을 가지고 전혀 다른 이야기를 뻔뻔하게 창조해 낸다. 여기서 더 소름끼치게 아이러니한 것은 사람들이 허구 속 탐정(실제소설에서 자신)에 열광할수록 창조자(도일경)의 실존적 자아는 위태로와져 자신의 실체를 확인하는 방법은 자살밖에 없다고 결론내린 부분이다. 결국 도일경의 죽음은 실제 셜록 홈즈라는 소설의 주인공, 즉 자신(도일경)이 만든 인물 때문에 죽은 것인데 소설바깥 우리가 보기엔 자기(실제 소설속 홈즈)가 죽여 놓고 자기(이야기속의 홈즈)가 이유를 찾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이야기를 만드는 과정 자체를 소설화하는 이 작가의 고뇌가 그대로 반영된 듯한 홈즈의 독백이 의미심장하게 느껴진다. '자신이 만든 환상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침몰한 도일경과 자신을 매혹시킬 현실에 목말라 환각제에 의지한 나'는 곧 이야기속 홈즈와 작가를 말한 것은 아닐까. '덕분에 인간의 상상력이 감히 미치지 못하는 속도로 무한히 재창조 되는 현실 속에서 다시금 느끼는 자유'는 작가의 권태로운 현실에 다시금 피가 돌게 해주는 활력제와도 같은 소설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미스터리를 다시 자신의 의도대로 조작하고 유용한 홈즈와 이야기를 다시 짜맞춘 그가 중첩되면서 홈즈의 숨겨진 진실이 곧 작가의 무기가 되었음을 서늘하게 자각하게 된 작품이었다.

Gate 3 ... 기억의 숨바꼭질 「그녀의 매듭」

이 작품은 이야기로서의 통속성은 가장 강하면서도 서사의 연결고리가 탄탄해 어떤 이야기보다도 작위적이고 거짓말 같으나 그 드라마틱한 내구성으로 가장 진실된 메시지를 똑바로 마주할 수 있었다. 나는 사람의 기억이라는 것이 자기보호를 위한 선택적 방어기제로 사용될 수 있음을 알고 있다. 분명 가족 모두가 같은 공간에서 주고 받은 대화인데 그 중 한사람만 당시를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었다. 모두들 그가 한 말을 기억하는데 정작 당사자는 전혀 그 순간을 자신의 일생에 있었던 일로 여기지 않는 것이다. 그 순간은 아버지의 부도로 가족 모두가 길거리에 나앉게 되자 모두 모여 다같이 죽자고 하는 절박한 상황이었는데 그만이 '나는 죽지 않겠다' 말하며 뛰쳐 나갔고, 그는 그때의 충격으로 아예 그 순간을 기억에서 삭제해 버린 것이다. 그 순간을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그 순간의 충격과 상처는 남아 언젠가는 다른 형태로 표출되지 않을까. 

이 작품은 이처럼 자신이 원하지 않는 기억, 선택하지 않은 삶이 꽁꽁 묶여진 매듭으로 뇌 속에 숨어 있다가 미래의 어느 순간 무의식의 변형된 형태로 부활하며 원치 않는 곳에서 그 매듭이 풀려질 수 있음을 이야기한 어느 정도 있을 법한 이야기이다. 과거의 어느 시기, 어느 장소에서의 기억이 마치 케? 한 조각처럼 잘려졌다가 모든 성분이 허물어진 원형질의 파편이 전혀 최초의 물질을 알 수 없도록 어느날 갑자기 기억체계를 교란시키는 것이다.

이야기는 차화연이라는 디자이너가 오랜 친구였던 성호라는 남자에게서 우정이 아닌 사랑을 느끼게 되기까지의 과정속에 그녀의 어두운 기억의 매듭이 풀어 헤쳐지는 구성이다. 화연은 성호의 여자친구에게 질투심을 느끼고 어느날 인터넷에 떠도는 이현정이라는 이름의 여자 사진과 성호의 사진을 합성해 그의 여자친구를 떨어뜨리는데 성공하지만 사진속 주인공 이현정이 실제 현실에 나타나 진짜 성호의 애인이 되버리는 말도 안되는 상황이 벌어진다. 비밀은 화연이 복수의 용도로 선택한 이현정이라는 가상의 인물이 실제 자신의 기억속에서 서로 치명적인 비밀을 공유한 친구사이라는 것에 있었다. 현정과의 일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화연은 과거의 인생대본에서 선택적 삭제에 의해 상처를 최소화하며 살았던 것. 그리고 기억의 그림자는 끈질기게 오늘 살아가는 현실에 투사되며 피할 수 없는 새 대본을 만들어 가고 있었던 것. 사람들은 어쩌면 자신이 기억하고 싶은 것들만 기억하고 싶은 대로 기억하며 자신이 아닌 자신을 자신이라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 또한 기억의 이야기를 첨가하고 삭제하는 이야기 재구성의 기본원칙에 기초한 진지한 이야기 였음이다.

Gate 4 ... 1인 4역 모노드라마 「그림자 박제」

화자의 1인칭 고백이 진술서처럼 펼쳐지는 이야기이다. 병력을 고백하는 것으로 보아 정신과 의사에게 자신이 저지른 살인사건의 전모를 술회하는 듯하고 병력이라 말하는 것으로 보아 범인은 정신병이 의심되는 사람일 것이다. 내안의 또 다른 나가 부지런히 그 안에서 자신만의 이야기를 쌓아가는 이야기. 그런데 또 다른 나는 한명이 아니었다.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현재 회계사이며 기러기 아빠로 지내고 있는 강철수라는 남자가 왜 자신안에 거칠고 제멋대로인 한량 '톰'과 소심한 자폐증 예술가 '제리'와 배관공이자 목수인 아버지를 둔 친구 '강우빈'을 키우게 되었는지 알게되며 중요한 건 살인사건이 아니라 한사람의 과거에 숨어있던 그림자의 존재였음을 알게된다. 흔히들 파란만장한 자신의 인생을 소설로 쓴다면 한트럭일 것이라 농담을 하는데 이 작품은 한 사람이 어떻게 해서 오늘의 살인자로 살아가게 되었는지 마치 녹취록을 듣는듯 주인공의 목소리가 생생하다.

작가는 누구나 한번쯤 자신이어야 하는 자기, 자기가 알고 있는 자기 외의 인생을 살아보고 싶은 은밀한 욕구에 대해 지속적인 관심을 보인다. 그런데 자신도 모르는 자기, 자신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자기 역시 어느날 갑자기 뜬금없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결국 자신의 슬픔과 충격, 상처와 상실속에서 자라난 자신의 그림자일뿐이라 말한다. 이 분열된 자아가 미스테리를 유발하고 이야기를 조장한다. 주인공이 절대 과장하지 않으면서 자신의 주장을 읖조리는 것에 상당한 설득력이 감지되며 독자가 이에 공감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바로 자신을 향한 거울같은 연민이 아닐까. 마치 어느 유명한 연극배우가 몇 시간 동안 자신의 이야기를 허물고 쌓는 모노드라마를 보는 듯했다. 어떠한 살인범도 이 주인공처럼만 이야기 한다면 달리 유능한 변호사가 필요 없어 보일 정도로 연출이 감동적이었다. 소설가의 법적인 능력은 어디까지란 말인가.

Gate 5 ... 반성문의 업그레이드「마녀의 스테레오타입에 대한 고찰」

이 작품은 마녀에 대한 고정관념을 뒤집는 이야기다. 기자가 월간 '마녀스타킹'이라는 잡지에 기고한 기사형식의 글로 흡사 인문학 교양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 있는 사실을 소설로 뻥치기 하여 교양의 수준을 끌어올리는 작가의 유머와 재치가 경이롭기만 했다. 고찰이 소설을 진행하는 키워드이니 사유의 힘이 매우 강박적이다. 기자는 사회현상을 날카롭게 파헤치는 시선이 매력이자 특기인 사람들이므로 마지막에 궁극의 질문도 회피하지 않는다. 마녀패션의 유행에서 시작된 마녀의 출현배경, 그리스 신화를 바탕으로 한 마녀의 본령 및 역할, 그들이 인간세계로 넘어와서 본모습이 어떻게 왜곡되었는지 서술하는 과정이 서사의 핵심이며 이 과정에서 인간들이 '마녀사냥'을 자행해온 집단이었음을 꼬집는다. 그러니 실은 마녀에 대한 고찰이 아니라 마녀사냥을 일삼아온 인간의 심리 고찰이 맞을 것이다.

작가는 신화나 구전된 이야기에서 스토리의 허점을 예리하게 발굴해 내어 그 지점에 자신의 상상력을 불어 넣는 틈새전략을 구사하는데 그 결과 대박의 소설이 탄생한 것이다. 마녀를 배신한 인간과 마녀의 개념을 훼손하여 자신들의 욕망에 투사한 인간들의 심리에는 자신들이 해결하지 못할 혐의를 무조건 뒤집어 씌우는 대상으로서의 희생양이 필요했음을 강조한다. 그리고 그 형벌까지 즐기던 인간의 그릇된 이기심도 함께 질문한다. 그럼으로 마녀외에도 우리가 고유의 전통으로 착각하고 있는 스테레오타입의 개념들은 그 왜곡을 본질로 하고 있으며 왜곡의 중심에 인간이 자리잡고 있음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는 차분한 목소리가 서늘하게 다가왔다.

이 글을 읽으면서 마녀처럼 우리의 고전들속에서 스테레오 타입으로 정형화된 '계모'에 대한 생각이 떠올랐다. '장화홍련전'과 같은 악독한 계모와 불쌍한 본처자식 구도에 익숙한 많은 고전들이 실은 철저한 가부장제의 피해자인 힘없는 후처들을 앞세워 자신들의 권위를 유지하려한 폭압장치였으며 결국 '사악한 계모의 스테레오타입화' 작업의 일환이었다는 시각이 중첩되었기 때문이다. 마녀나 계모나 인간의 탐욕과 모순에 의해 본질이 왜곡되기는 마찬가지 아니었을까. 아...우리는 왜 우리 자신의 잘못을 누군가에게 전가해야만 살아갈 수 있는 존재들일까. 마녀에게 아무 잘못도 하지 않은 내가 그동안의 오해를 반성하게끔하는 작품이기도 했다. 물론, 이 사실도 오해일 수 있겠지만.

Gate 6 ... 이야기로 용서하기 「마리아, 그런데 말이야」

가장 공감가는 이야기였다. 마리아 탄생설화에서부터 백미인 러브스토리에 이르기까지 어쩌면 우리들 대다수의 이야기라해도 무방했다. 자아의 그림자가 투사된 또 다른 자아가 마리아라는 정체불명의 인물로 묘사된 것이므로 앞선 이야기인 「그림자 박제」와 이야기 계보가 같다 할 것이다. 우리는 학교, 직장생활에서 자신이 본 사람, 겪은 사람 할 거 없이 그 사람의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전달할 때 사실을 그대로 전하기보다 과장과 첨삭이 자신도 모르게 발생하는 경우가 있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한술 더 떠 그 친구의 행동에 슬며시 내가 바라는 말, 내가 해보고 싶었던 행동을 추가하다보니 그 친구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나중엔 다른 사람이 되어있었던 적은 없을까. 더 나중엔 있지도 않은 누군가를 자신의 아바타로 만들어 아바타의 일거수일투족을 내 맘대로 구성해 대화 속에 존립, 유지시킨 적은 없었을까.

드라마 촬영감독이며 이혼남인 성민과 결혼을 앞둔 대학후배 수연이 자신들의 아바타를 가공한 주인공들이다. 대화의 공통분모가 없어 수연이 가공한 마리아는 우리들 온갖 욕망과 부러움의 대상이며 질투와 비난의 대상이기도 하다. 어짜피 없는 인물이므로 한명의 캐릭터로 존재치 않으며 연출자의 작위적 센스에 따라 급변하는 성향이 있다. 어짜피 뻔한 드라마를 찍는 성민의 현실도 드라마 못지않게 드라마틱했지만 마리아는 수연이 연출한 드라마 주인공이었음을 알면서도 모르는 척 해주는 센스아닌 센스는 혹 뻔해도 다음이 궁금해지는 시청자의 심리가 아니었을까.

우린 가끔 가짜에 의지하며 진짜를 유지할 때가 있다. 그러다가 그 진짜가 자신도 느끼지 못한 가짜임을 알았을 그때, 자신을 용서하듯 누군가를 용서하고 싶어진다. 마리아를 용서하는 것은 마리아를 앞세운 수연을 용서하는 것이며 그것은 곧 그녀에 의지한 자신을, 나아가 자신을 속인 누군가를 용서하는 일일테다. 그러고 보면 가짜가 유용할 때가 있다. 인간은 모두 떠나야만 혼자임을 깨닫는 존재들이기에. 거짓을 확인해야 진실을 깨닫는 습관이 있기에.

Gate 7 ... 오해는 설득의 배경 「괴물을 위한 변명」

나는 이 작품을 <현장 비평가가 뽑은 2010 올해의 좋은 소설>이라는 소설집에서 만난 적이 있다. 그때의 기억은 단연 많은 작품들중 가장 참신함으로 남았다. 달랐기에 선뜻 이해하기도 어려웠다. 이렇게도 소설이 될 수 있구나...이야기라는 것이 자체 생명성을 가지고 진화한다는 생각을 갖게한 작품이었다.

이 작품은 실제소설과 소설의 작가를 주인공으로 한다. 앞선 작품 「마녀의 스테레오타입에 대한 고찰」에서도 보았듯이 작가는 한 가지 고착된 생각을 추적해 그 허점을 자신의 소설 실마리로 끌어들이는데 탁월한 재능이 있는듯 하다. 작가는 메리 셰리의 소설 『프랑켄슈타인』을 분석, 재해석하는 과정을 서사로 이끌어 가면서 마녀처럼 프랑켄슈타인이 괴물로 인식되기까지의 그 변질된 진실을 허구로 구성해낸다. 그런데 마찬가지로 괴물에 대한 오해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사이 중요한 인간의 역할이 있었다. 즉, 괴물이라는 환상에 대한 개념 사용여부와 그 목적및 이용행태는 모두 인간의 몫이었다는 것.

첫 번째는 이야기의 전승과정에서의 진실의 누락및 수정 여부를 추적, 질문한다. 이른바 '카더라'통신으로 서술된 괴물이 빅터에게, 빅터가 월턴 선장에게, 선장이 사빌부인에게, 사빌부인이 메리  셀리에게, 셀리여사가 우리에게....그리고 마지막 작가가 나에게... 그리고 두 번째는 허구의 절정에 빅터의 동생 에르네스트를 내세운다. 작가의 분신으로 여겨지는 프랑켄슈타인 박사의 동생은 형의 괴물창조 동기에 대해 신이 부여한 정체성 외에 또다른 자아, 즉 형의 광기와 죄의식, 공포와 분노, 절망의 총체가 투사되었음을 주장한다. 박사의 괴물적 자아가 괴물 프랑켄슈타인이라는 주장은 곧 인간들, 우리의 괴물은 무엇이냐고 묻는 의미심장한 설득장치로 여겨진다. 이 이야기는 우리가 그동안 보아온 프랑켄 슈타인이라는 괴물이 결국 우리안의 온갖 추악한 욕망과 허영, 광기의 조각들을 한데 묶어놓은 또 다른 나의 집합체였음을 환기하는 것 아니겠는가. 이 작품을 덮으면서 문득 작가의 괴물은 소설이라는 문학으로 포장하였구나 하는 생각이 소름끼치게 전해졌다. 그의 변명은 결국 괴물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위한 것...아니었을지

Gate 8 ... 예술로 사기치기 「쉿! 당신이 책장을 덮은 후……」

분리수거된 쓰레기의 재활용장과도 같은 이야기였다. 앞선 이야기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이 총출동해 갑론을박을 펼치는 이야기는 어느 이벤트 행사장에서 해외유명 영화나 광고, 다큐에서 뽑은 명장면들로 다시 재구성된 편집영상물과도 같았다.

퀴르발 남작의 성에 모인 주인공들은 자신의 캐릭터를 십분 살려 의미심장한 대사를 쏟아내고 그와중에 시체조각들을 발견해 한데 모아놓는다. 여기서 작가는 세상에 떠도는 이야기 조각을 꿰매어 자신만의 새로운 이야기보따리로 만들어 내는 자신이 소설하는 방식을 우리에게 내비친다. 사체의 조각들이 짜맞추어 온전한 사람의 형태가 이루어질수록 이세상에는 존재하지 않는 괴이한 형태가 되지만 그것들은 또 직소퍼즐처럼 아구가 딱딱 맞아 떨어지는 것이다. 마치 자신의 소설들처럼. 홈즈는 발견된 사체조각의 숫자에서 자연계의 일반법칙을 설명하는 피보나치 수열을 발견해내는데 이것은 가장 조화롭고 아름다운 황금비율이라 극찬하기까지 한다. (이것은 자신의 소설이 완벽하다는 이야기?) 더불어 발견되지 못한 제 8항(21)에서 제외된 두조각, 즉 머리와 성기는 독자의 몫으로 남겨두는 탐정의 센스까지 발휘한다. 퀴르발 남작이 오픈하라고 한 자신의 책장 너머엔 아마도 중성이 아닌 여성, 남성의 독자들이 우르르 모여있지 않았을까. 작가는 허구라는 안전그물안에서 자신의 의문점을 마음껏 풀어헤쳤듯이 독자인 우리도 자신이 조작한 허구안에서 무한한 호기심을 펼쳐보라는 메시지로 생각된다. 독자인 우리들중 누군가는 이 작품을 이야기 조각삼아 자신처럼 이야기를 재생산할지 모를 일이다. 영특하고도 재치있는 미덕이 아닐 수 없다. 희대의 사기꾼의 기술력이 전수되는 순간임에 틀림없다. 한국문학에서 역사적 순간이라 해야 할까.


비상구로 돌아오다

이야기를 추론해 내는 과정 자체가 소설인 작품을 신나게 독파했다. 읽는 즐거움은 물론 생각의 재미를 선사하는 독특한 독서였다. 창의적 영재만들기 프로젝트에 출품된 발명품을 만난 듯하다. 새롭지 않다면 신인의 의미가 없고 신인이라면 새롭지 않고서는 주목받기 힘들 것이다. 이 작가는 이야기를 꾸며내는 생산자 입장에서의 소설 말고도 다른 형태로 인간에게 전달되어온 수많은 이야기에 투사된 인간의 욕망을 파헤치는 것이 자신이 할 일이라 생각하는 것 같다. 그것이 곳 자신이 알고 싶은 인간을 이야기하는 방법일 것이다.

그동안 수많은 원작은 인간의 편의와 욕심이 투사되어 변형되었다. 하지만 진심은 왜곡되어도 진실이 될 수 있는 것이 현실인 것이다. 오늘을 사는 것은 옛날 이야기의 교훈을 얻고자 함이 아니다. 변형되어 도착한 이야기에서 조차 또 다른 나를 발견하고 의문을 나누는 일일 것이다. 그것이 서로 인간됨을 고찰하고 그럼으로 위로하는 방식일 것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이야기야말로 또 다른 내일에 도착하여 내일의 진실이 되지 않을까. 진실을 변형하면서도 진실은 발전해 나가는 것이 아닐까.

스테레오 타입은 인간의 편의와 질서를 위해 고안된 장치이다. 그러나 스테레오 타입이 인간을 옥죄고 불편하게 할 때 일상의 그림자는 이야기로 탈출을 시도한다. 인간은 자신들이 만든 스테레오 타입이 힘겨워 이야기를 생산하고 그속에서 비상구를 찾는다. 작가가 개방한 여덟 개의 비상구는 다시 우리 삶의 스테레오로 돌아오는 소중한 환송로였다. 다시 비상구가 열릴 날을 기대해 보겠다. 그땐 출구와 입구가 동일한 한 개의 게이트이길 바래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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