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모든 극적인 순간들 - 윤대녕 산문집
윤대녕 지음 / 푸르메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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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사실 이 책을 좀 미루어 두었었다. 어떤 예감때문인 지 올해를 정리하는 시점에 책을 덮고 싶었는데 아마도 윤대녕의 <이 모든 극적인 순간들>을 통해 산다고 하는 이 대책없는 것, 그것을 또 견뎌낸 올 한해를 조용히 격려하고 싶었는 지도 모르겠다. 매일을 숨쉬고 또 그 다음날을 맞는 것이 따로 칭찬받을 일이 되진 않겠지만 나는 그마저도 칭찬해 줄 사람이 필요했었나 보다. 그렇게 중요한 약속을 따로 빼어놓듯 나는 조용히 이 책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곤 큰 기다림때문 이었는지 나는 책을 덮고 사뭇 경건해 지기까지 했다. 나도 모르게 두 손을 모아 내 입술로 가져가 버린 나...어쩐 일인지 깍지낀 두 손에 힘이 주어져 입술도 꼭 깨물어 보았다. 천천히 눈물이 차올랐다. 나는 그런 나를 그냥 잠시 내버려 두었고 올 한해가 주마등처럼 지나가면서 스스로 끝내 대견해진 나는 눈물을 닦지 않았다.

이 책은 마흔 아홉된 소설가 윤대녕의 소설작업 바깥의 사적인 풍경과 텍스트 가장 안쪽의 심상을 고백하는 산문 글이다. 자신이 살아온 배경과 가족들, 만나온 사람들, 읽어온 세월과 느껴온 자연을 지금 시점에서 정리한 글이라 나이들어 그동안 문학해 온 자신을 돌아보고 다시 곧추 세우는 의미있는 작업이었을 것이다. 그가 자신을 말하는 방식은 한눈에도 무척 조심스러워 보였고 마치 어느 산사에서 차 한잔을 사이에 두고 새소리 물소리를 동무삼아 고조곤히 사연을 전해주는 느낌이 들었다. 이 잔잔함의 여운이 내겐 얼마나 길 것인지 나는 두 어장을 넘기면서 이내 간파해 버렸다. 산사에서의 운명적 만남이라도 이루고 온 듯 나는 올 한해 이 곳 속세에서 보고 느끼고 이루어 온 것들을 차근히 되짚어 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나는 그가 그랬던 순서와 방식대로 내 한해를 정리할 수 있었다.

그는 우선 불효를 고백하던 어머니와 늘 거리를 두었던 아버지, 어린 시절 자신을 가르친 할아버지, 역마살 낀 자신을 한결같이 기다려준 아내를 이야기 할 때엔 유난히도 '마흔 넘어', 혹은 '마흔이 다 되어', 아니면 '마흔아홉에'를 언급하며 세월 지나 돌아본 심경을 마치 참회하는 투로 고백을 하곤 하는데 나는 그가 나이를 호명할 때마다 찔린데 또 찔리는 심정으로 마음이 영 편치를 않았다. 올 한해 지겹도록 마흔을 부르짖은 나는 그의 나이를 읽어가며 내 이 책을 마지막으로 마흔의 종지부를 찍고야 말겠다는 생각도 했음이다. 그랬다. 마흔을 받아들이는데 결국 내 전 생애가 걸리게 된 것을 깨닫고만 나는 올 한해 그 과정의 하나로 무차별적인 독서를 시작하였고 그 결과로 일상에서 어떤 반복되는 패턴을 얻게 되었다. 그동안의 내 인생을 정리해 보자는 심정으로 책을 집어 들었던 것이 지난 봄, 유래없이 폭설이 계속되는 시점이었다. 그리곤 정말로 살아온 그간의 기억들을 정리하는 훌륭한 방편이 되어 주었다고나 할까. 어찌 보면 마흔을 잊어보려 했는데 오히려 더 되새겨진 꼴이 되긴 했다. 하지만 이 책은 올 한해 내가 한 일과 그 중에서도 책을 읽고 글을 쓴 일을 다시금 돌아보게 하는 총정리의 시간을 제공해 주었다. 그것이 마흔을 살아낸 내 자신을 격려하는 일이기도 했다. 대충 내 예감은 맞았던 것이다.

나는 소설을 쓰고 싶었다. 그는 애절한 문학청년의 시절이 분명 있었음을 술회하는 작가에 속했지만 내 경운 청춘을 다 지나고 보니 문학에의 염원이 생기게 된 늦깍이 작가 지망생...쯤 되려나. 전문적인 문학의 공부를 따로 한 것도 아니고 원대한 문학의 꿈도 품어보진 않았지만 어느날 갑자기 글을 쓰고 싶어 그렇다면 글을 써야하는 가에 대한 대책없는 질문에 어이없이 생명이 위협당한 경우라 할 것이다. 나는 질문에 대한 답을 점검해 보는 중간 단계로서 보다 안전해 보이는 독서와 서평의 시간을 가지기로 했고 올봄부터 착수한 계획은 큰 차질없이 지금까지 이어졌다. 이 책의 후반부에도 윤대녕이 읽은 책을 소회하는 독서일기가 있는데 간단하면서도 본인이 강렬하게 느낀 인상만 핵심으로 전해주기에 책을 읽지 않은 사람도 부담없이 이해하고 넘어가기 편했다는 생각이 든다. 내 경운 책 한권 읽고 책과 관련된 그동안의 사연을 밑도 끝도 없이 풀어내는 경향이 있어 서평이 산으로 가는 경우가 많았던 것도 사실이다. 지금 생각해보니 내가 세상에 하고 싶은 말이 그리도 많았었나 그런 생각도 드는데 결국 서평을 써가면서 책이야기가 아닌 내 이야기를 원없이 떠들었다는 뿌듯함을 느끼기도 했던 것 같다. 이 만족감은 아마 내가 올 한해를 견뎌온 가장 핵심적인 기쁨의 고통, 그 심장부에 위치하고 있었던 가장 큰 요인이 되었다. 그러면서 나는 자연스레 소설을 쓰고 싶은 생각이 없어져 버렸다. 얼마나 웃긴가. 아니 얼마나 슬픈가. 인생이여, 세월이여...여인의 변덕이여...

어떤 유명한 과학자가 그랬다. 어떤 일이 일어난 후로는 절대 그 이전의 상태로 돌아갈 수는 없다고. 나는 어쩌면 소설이 쓰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그저 내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이 사실을 인정하기란 매우 고통스러운 일인지라 나는 며칠 전 신문에서 유명한 소설가가 에세이로 기재한 글을 대신하겠다. 소설가는 대학교에서 문예창작을 가르치는 일을 병행하고 있는 유명한 작가인데 그녀의 책상엔 원고를 보아달라고 매달 수천페이지의 글이 도착한다고 한다. 그런데 그 중에 육십이 넘은 목사한분이 방대한 분량의 장편을 부쳐와 출간을 하고 싶으니 꼭 좀 읽어 달라 부탁을 하더라는 것. 소설가는 몇페이지 읽고는 문장의 수준과 모든 구성이 책을 내기엔 부적절하다는 답변을 하고 싶었으나 너무나 간곡한 목사의 상처를 염려해 출간하려면 대폭 수정이 필요하다고 에둘러 말을 전하였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는 이제 마음이 바뀌었다며 선생님이 꼼꼼히 읽어주셨다니 책을 내지 않아도 마음이 괜찮다고 울먹이더라는 것이다. 소설의 내용은 하나뿐인 의사아들을 교통사고로 잃은 노인의 인생무상과 아들의 억울함에 관한 자신의 고백이었다. 아...나는 그글을 읽고 누군가에게 내 마음을 들킨 것 같아 그만 얼굴이 뜨거워져 어쩔 줄 몰라 했다.

소설가는 목사의 글이 온정신과 몸을 다해 자신의 억울함을 세상에 토로하는 개인적인 글일뿐 그 글이 어떠한 문학적 가치는 가지지 못했다고 밝히고 있었다. 그래도 된 것이었다. 목사는 글을 썼고 소설가는 그 글을 읽어 주었으니 말이다. 소설가는 목사를 등단시키는데 조력하는 일 보다 그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다는 것에 세상의 답이 있다고 하였다. 시켜주려 읽어보았는데 읽어주니 그만두더라...그의 마음은 단 한명의 세상이라도 풀어질 만큼 이었을까.

'오늘 오후 15시 경 강원도 고성군 토성면 미시령 동서관통도로에서 **구청 버스 브레이크가 파열되면서 관통도로 터널을 지나 500M 쯤에 위치한 울산바위 주차장에 정차 중이던 승용차를 추돌하여 승용차는 10m 절벽 아래로 추락, 2명이 사망...승용차는 완전히 부서져...'

3년 전 내 어머니는 이 기사속에서 당시 운전대를 잡고 있던 이모와 같이 즉사한 2명중 한명이었다. 벚꽃이 만개한 봄날 오후였다. 그날은 또 다른 칠순이모의 생일을 축하하러 형제들이 강원도로 여행을 가시던 중이었고 어머니는 정차된 차에서 막 내릴려던 찰나에 사고를 당한 것이었다. 나는 그날 이후 살아남은 이모들을 지금까지 외면하는 것으로 용서의 마음을 여간해서 열지 못하고 있는 안타까운 조카이기도 하다. 그날의 일을 그럴싸한 소설로 구성하여 두어 번 공모에 낙선한 경험을 가지고 있는 나는 이상하게도 낙선의 기쁨만큼은 후련하게 만끽하고는 했는데 아마도 그 목사님과 비슷한 심정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래도 누군가는 내 글을 읽어 보았겠지...하는.

그렇게 시간이 지나면서 소설쓰기에 대한 막연한 바램이 잦아들 즈음 이 책을 만나게 된 것인데 어쩌나...사람의 욕심은 끝도 없어 나중에 이런 사람이 되어 내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또 지병처럼 들고 마는 것이다. 이렇게 나지막히 단정하게 적어볼 수 있다면...내 어머니와 내 고향과 아버지를 말할 수 있다면...내가 읽은 책을 말할 수 있다면...어느 잠못들던 밤의 이야기와 버리지 못한 것들을 그리고 그 이유를 말할 수 있다면. 이 책은 글을 쓰고 싶었던 나를 돌아보게 하면서 다시 내 앞날을 그려보게 하는 작품이었다.

윤대녕은 이 책의 제목이 된 '이 모든 극적인 순간들'이라는 글에 정지 교통신호를 기다리다 우연히 만난 어느 시인과의 계속되는 인연을 소개하며 삶은 사소한 일상의 연속이라는 깨달음을 강조하고 있다. 그 시인 역시도 휴대폰을 가지러 다시 가지 않았다면 그날의 만남은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하면서 일상에는 늘 극적인 요소가 내재한다는 신비로움이야말로 우리가 매순간 극적인 순간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질문한다. 나는 그 질문에 고개를 끄덕이며 눈을 질끈 감고 순간의 만남, 찰나의 이별에 총이라도 맞은 듯 가슴을 쥐어 뜯었다. 내 어머니가 탄 차가 1분만 주차장에 늦게 도착했더라면... 내 어머니 차를 추돌한 차가 1분만 더 일찍 지나가 버렸다면...아니, 내 어머니가 몇초 만이라도 빨리 차에서 내렸더라면... 누군가는 그 동일한 순간에 生의 희열에 감동하고 또 누군가는 死의 절명에 운명하는 이 모든 우리 인생은 얼마나 극적이고 피할 수 없는 것인가.

또 하나 내가 고백하고 싶은 건 윤대녕의 이별방식, 그가 소설에서 보여준 헤어짐의 미학적 관념세계를 잊지 못해 그리워하는 개인적 사연이라고나 할까. 나는 내친김에 이 책으로 올해 나이 마흔된 내 첫사랑의 종지부도 찍고 싶어진다. 윤대녕은 꼭 내 국어선생님과도 같은 연배의 작가인데 소설가는 못되셨지만 아직도 사립여고에서 교편을 잡고 계시는 그 시절 내 영혼의 별, 한명의 선생님을 떠올리게 한다. 이 십년도 더 된 내 여고시절의 앨범엔 국어 선생님과의 영화보다 더 근사한 바닷가 사진이 있고 하얗게 부숴지던 섬세한 포말처럼 같은 색의 이를 드러내고 읽어주시던 <서시>와 <별 헤는 밤>의 목소리가 담겨있다. 교무실에 비밀간첩이라도 된 듯 몰래 잠입해 선생님의 주소와 연락처를 알아내곤 어느 일요일 아침 무작정 주소를 찾아 비장하게 몸을 던진 74번 버스도 운행중 이시다. 그때 내가 가진 옷중에 가장 예쁜 치마를 골라 입고 처음으로 건너본 한강다리는 얼마나 두려웠던지. 다닥다닥 집들이 모여 있는 언덕 아래 정류장에서 심호흡을 하고 떨어트린 동전 두 개는 얼마나 아득했는지. 선생님의 어머니로 보이는 어르신의 '지금은 없다'는 차가운 대답...실망한 나를 달래기라도 하듯 마지못해 요 앞 목욕탕에 갔다는 말씀을 들었을 때 바보처럼 또 얼마나 안심이 되던지...그렇게 두 번은 다시 걸 용기가 없어 그대로 돌아선 발걸음은 다행히 여고생의 자존심을 세워주며 선생님의 '거절아닌 외면'을 영원한 비밀로 간직할 수 있었음이다.

그렇게 이 책은 내 여고시절 선생님과 나누었던 빛바랜 약속들과 다시 극적으로 조우하게 하였다. 나는 아직 선생님과 헤어지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학생이기 때문에. 지난 시절 나는 윤대녕의 글에서 80년대식의 사랑과 이별만을 찾아 헤메던 고집스런 독자였다. <대설주의보>에서 해란과 같은 여주인공의 낭만적 이름이나 그다지 쿨하지 못한 이별의 방식들, 몽환적인 분위기에서의 꿈과같은 안녕, 더 가까워 보이지 않는 문어체의 대화들에 나는 마치 내 첫사랑의 순정이라도 되찾은 듯 기뻐하던 독자였다. 늘 그리워 하지는 않아도 언젠가 서로를 다시 찾게 되고 그때마다 헤어지는 것조차 무의미한 관계, 다시 말하면 헤어지긴 했으나 헤어진 적이 없는 관계, 그러니까 안 만나도 되지만 다시 만나도 되는 절대 헤어졌다고는 말하지 못하는 관계...우린 얼마나 더 많이 헤어지고 더 많이 기다렸고 그래서 다시 마주쳤던가. 그의 글을 읽고 나면 늘 지난 시절 헤어는 졌지만 미처 헤어지지 못한 그들, 차마 헤어지자 한마디 없이 헤어 질 수밖에 없었던 그들이 모두 헤어짐에 동의할 수 없다며 하나둘 다시 내 앞에 나타나고는 했다. 윤대녕은 내게 이별을 말함으로써 절대 이별하지 못하게 하는, 헤어질 수 없는 작가였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그동안 윤대녕이 고집한 이별방식의 기원도 어렴풋이 감지할 수 있었는데 그것은 그가 불교사상에 동의하며 어떤 사람과도 여간해서는 헤어지지 않는다는 인연을 보호하는 원칙, 그것이 아니었을까. 그는 돌아오는 24절기마다 사람을 만나는 음력의 시간과 계절을 사는 사람이었다. 내가 그의 소설에서도 희미하게나마 기약없는 약속을 다시 기억해내곤 했던 이유는 거리를 두면서도 사람과 한번 맺은 인연은 인위적으로 저버리지 않는 그의 의지때문이 아니었을까.

정말 기도같은 독서를 마치고 돌아와 마음에 촛불하나 밝혀놓은 어렴풋한 나를 보게 된다. 나는 올 한해 그럭저럭 책들과 함께 내 글들과 함께 행복했다. 오대산으로 제주도로 원주로 강원도로 마음살이 부대낄 때마다 정처없이 떠나곤 하던 그가 부럽지 않을 만큼 나도 내 자신을 향해 한껏 웃어주고 마음다해 울어 주었다. 아무리 어렵고 도무지 재미없는 책도 신기하게 이해가 되고 눈물이 났다. 여행으로 늘 여름을 나던 내가 한여름의 열대야를 책으로 이겨내지 않았던가. 나에게 어느 하나 극적이지 않은 책들은 없었을 것이다.

늦었을까. 잊었을까.

많은 일을 했고 많은 곳을 가보았지만 늘 가슴 한구석 끄트머리에 오랫동안 사라지지 않고 몹쓸 병처럼, 갚아지지 않을 평생의 빚처럼 남아있는 어둠의 약속. 할 수 있는 것과 무엇이 되는 것 사이에서 늘 주저하며 언제나 한걸음 물러서던 비겁의 다짐. 나는 오늘도 확인, 또 확인하려 그를 읽고 글을 쓴다.

선생님,
아직도 그날 밤 별처럼 여전히 저를 기억하실 수 있나요.
너무 늦었지만 다시 비추어 볼 수 있을까요.
아마도 선생님을 뵌 지 이십 몇 년이 지난 그 어느 날
제가 선생님을 불현듯 찾아 가더라도 변함없이 저를 잊지 않았다.
말씀 해 주실 그 미소, 그려 보아도 될까요.
그땐 꼭 네가 꿈을 이룰 지 알았고 나를 찾을 지도 예감했다 말씀해 주실 수 있나요.
그날 밤 우리가 세어보던 '별'하나에 추억과, 사랑과 쓸쓸함과 동경과 시를 담고,
그리고 나머지 모든 '별'에 너의 '꿈'을 담아 그렇게 오늘을 기다렸다
벅차게 안아주실 수 있을까요.

윤대녕 작가님,
이 극적인 만남을 기다려 보는 것에 얼마나 동의 하실런가요.
선생님과 절대 헤어진 것이 아니라 믿어 주실런가요.
이 모든 극적인 순간들은 제게도 다르지 않을 것이라  
빙긋이 눈감아 주실런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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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브 키터리지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지음, 권상미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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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팔트에 스며들다 
  

흙냄새를 기억하지 못하는 나는 계절에 따른 아스팔트의 냄새나 날씨에 따른 건물냄새엔 민감하고 세밀하다. 가령, 장마가 오기 전 유월의 밤꽃향이 짙어지는 저녁 해질 무렵 주차장이나 아직 기온이 오르지 않은 아침 출근길의 텅 빈 버스 정류장, 눈길에 묻은 흙이 털어내는 아파트 현관문 같이 살아있는 자연을 제외한 온갖 인공적인 것에 내 신경들이 숨을 쉰다. 시멘트 혹은 플라스틱, 콘크리트, 유리와 대리석, 도시를 이루는 모든 소재는 언제나 코끝을 자극하고 감각의 기억을 만들어왔다. 그러다가 가끔은 예기치 않게 젖은 나무들이 뿜어대는 벌레를 부르는 향에 놀라 보면 흠칫 눈물이 난다. 하나의 생명체대 유기체의 극적인 해후라도 이룬 듯 나는 살아있음이 반가웁다. 같이 살아는 있었던 거다. 살아왔고, 살아있고, 살아가야 할 나는 생명 그 자체로도 기쁠 일이지만 왜 이리 기쁘기도 힘든 것일까.

나는 이 책을 '내일은 많은 비가 예상된다'는 일기예보를 접했던 저녁 무렵 비릿한 아스팔트향이 반가워 잠시 감각이 일렁일 때 만났다. 자기 일 들이 바빠 몇 남지 않은 여고 동창생 중에 유일하게 같은 동네에 살고 있던 그 친구는 남편이 해외대사관에 근무를 하는 터라 이삼년에 한번 꼴로 외국으로 타향살이를 가야했다. 미국에서 돌아온 지 1년이 채 안되어 또다시 태국으로 발령을 받았다고 통화를 한 것은 한 달 전 이었다. 같은 동네에 살기는 했지만 나 역시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해 그 친구가 돌아오면 나는 떠나고 내가 돌아가면 그 친구가 떠나던 얄궂은 인연으로 십여 년을 같은 동네에 살았지만 정작 얼굴보고 떠들었던 기억은 손꼽을 정도였다. 아니나 다를까 이번엔 내가 컴백을 했더니 그 친구가 떠날 차례였던 것이다. 지난번 미국으로 떠날 땐 아이들이 아직 어리다는 핑계로 촌스럽지만 기념사진까지 박았다. 이번엔 그때만큼 아쉬움이 무뎌진 탓도 있었지만 어쩌다보니 그만 이별식의 기회를 놓치게 된 것이다. 그런데 그 녀석 답지 않게 '책'을 보내 온 것이다. 그것도 짧은 손 편지와 함께.

나는 이 책의 내용을 대강은 알고 있었다. 그 친구가 나에게 이별의 징표처럼 보내온 선물 이전에 나 역시 다른 이에게 이 책을 선물했기 때문이다. 즉, 나는 선물만 보내고 읽어보지는 않은 상태였었는데 결국 그 친구로 인해 다시 내 앞에 돌아오게 된 것이다. 지금은 시간이 없어 자신은 돌아가서 읽을 테니 나는 책 읽으며 돌아올 때까지 자신 생각을 많이 하라는 이제 갓 마흔이 넘은 아줌마의 열일곱과 똑같던 글씨체가 연락도 안하고 떠난 서운함을 일시에 녹여주기는 했다. 친구가 적어준 내 이름 석자도 비온 뒤 아스팔트에 막 스며든 풀향기처럼 가슴에 내려앉았다. 그 녀석은 이 책의 내용을 잘 파악했고 나에게 어떤 감동을 주기 위한 깊은 뜻이 있어서가 아니라 틀림없이 서점직원에게 두어마디 들어보고 별 고민없이 선택했을 것이다. 있을 법한 일이지만 내 의지와 선택이 아닌 채로 뜻밖에 전달된 책인지라 나는 그냥 이렇게 책하나 던져주고 떠나버린 그 친구와 여느 택배상자와 다름 없이 건네받은 그때 그 순간이 이 작품의 주제이자 작가가 이렇게 멀리 있는 나에게도 끝내 전하려한 메시지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리고 그것은 정확하게 들어 맞았다.


남의 이야기가 구체적인 내 사건으로 
  
헨리가, 사람 참 지겹게 만드는 재주가 있는 아내 올리브를 두고 일터에서의 동반자 데니지를 마음으로만 사랑한 이야기인 <약국>은 죽도록 지겨워도 결국 제 다리 한쪽과도 같은 올리브와 긴긴 시간을 견디는 이야기로 들렸다. 어렸을 때 살던 집, 그러나 그 집에서 한 번도 행복한 기억은 없어 불행의 추억만 남겨진 그 집에 가보고 싶었던 케빈의 어머니와 그의 선생님었던 올리브 아버지가 자살한 이야기, <밀물>은 그들이 얼마나 生에 대한 애착이 절실했는지에 관한 고백으로 들렸다.

눈가의 부드럽게 잡힌 오십줄의 잔주름이지만 혹독한 일이라고는 일어난 적이 없어 보이는 앤지의 옛사랑과 지금의 사랑에 대한 상처는 네 살 때부터 자연스럽게 生의 일부로 피아노를 만져온 <피아노연주자>의 변함없이 소중한 일상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느껴졌다. 하나뿐인 아들의 결혼식 날 박학다식한 며느리를 얻으며 느껴야 할 '큰 기쁨'이 자신보다 아들에 대해 결코 아는 것이 많지 않아 보이는 그녀로부터 상실감이 되어 되돌아 왔을 때, 결국 그녀의 물건을 훔치는 것으로 자신의 심장을 두근거리게 하고만 <작은 기쁨>은 누구의 며느리가 되어본 적 있는 내가 미처 고개를 들지 못할 '큰 슬픔'으로 다가오기도 했다. 또한, 사람 좋은 인형 같던 남편 헨리와 투덜거리며 나누던 대화는 그녀 그리고 내가 남편에게 그만큼 하지 않고 묻어둔 이야기를 떠올리게 하기도 했다.

세 네 편을 읽고 나서 부터는 올리브 키터리지의 해안가 마을과 이웃들이 마치 우리 동네 와 내 이웃인 것처럼 적응이 되었고, 서사를 이끌어 나가는 작가만의 방식에도 완전히 익숙해져 한편 한편의 이야기가 내 몸처럼 내 목소리인 것처럼 내 눈과 손과 귀 같은 감각에 아주 가깝게 밀착되는 일체감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 그럴수록 더욱 분명해지는 것은 이야기를 통해 보다 구체적으로 회상되던 '나'의 일상이었다. 그것은 어디로 튈지 모르는 공처럼 난처하기도 했는데, 예를 들면 <굶주림>의 경우, 내면적 상처로 인한 거식증을 극복하지 못하고 끝내 어이없이 죽어버린 소녀의 죽음과 외로움에 공감하기 보다는 엉뚱하게도 둘 다 공부가 끝나지 않아 생활비가 없어 부모님에게 의지하던 신혼 초, 남편이 사들고 온 몇 개 안되던 도너츠를 나누어 먹던 기억이 불현듯 떠올라 목이 메이기도 했다. 분명 앞 작품에서도 등장한 '도넛'인데 기어이 내 기억속의 한자락을 끄집어 내고 만 소설 속 한 장면들은 큰 주제와 상관없이 늘 그 자리에 위치하던 올리브처럼 내 인생 어딘 가에서도 의미있게 자리를 차지했던 시간들 이었던 것이다.

생명을 위협하는 극적인 순간에 우연히 알게 된 남편의 생각, 같이 듣거나 보았던 분명 같이 겪은 일임에도 서로의 관점차가 상반되는 사실을 깨닫게 된 <다른 길>은 어쩌면 이 작품에서 나에겐 통째로 펀치를 날려대는 가장 적절한 자화상과도 같았다. 화장실에서 우연히 보게 된 헨리의 털없는 허연 정강이에 핀 검버섯은 늘어난 잔주름과 한웅큼 빠지던 내 머리카락 보다 더 잔인했고, '결혼하고서 당신은 무슨 일에도 한 번도 사과를 한 적이 없는 것 같다'는 헨리의 푸념은 '사과는 잘못한 사람이 먼저 하는 것'이라는 내 비판보다 훨씬 더 정당했다. 배우자의 생각을 알고, 그 생각이 영원히 불변할 것이라는 것을 깨닫고 마찬가지로 상대 또한 나와 같을 것이라는 것을 인정하게 되는 순간의 외로움은 언제나 배우자를 선택하지 않은 자의 그것보다 막강하리라 믿는다. 이 소설에선 거의 모든 편에 올리브를 비롯한 부부나 연인으로 존재하는 인물들이 상대를 어떻게 사랑하고 또 어떻게 상처를 주는 지에 대해 친절히 이야기 하고 있었다. 옮긴이는 이 작품이 '어른을 위한 성장소설'이라는 수식어로 헌사하였지만 나는 '부부를 위한 치유소설'이라는 조금은 덜 세련될지 모르는 또 하나의 날개를 기꺼이 달아주고 싶다. 

 
남의 불행으로 내 상처를
 
소설의 중반부를 넘어서면서 부터는 그런대로 평정심을 찾아 보려던 나에게 좀 더 예리하게 직접적인 면도날을 그어대고 하얀 포말이 부숴 지는 아름다운 바닷가 작은 마을이 아니라 한명 한명 끊임없이 파도가 몰아치는 고독한 섬에 난파된 듯한 고립감마저 느끼고 말았다. 제인부부의 <겨울음악회> 나들이에서 만난 딸 친구 엄마의 뭔가를 아는 듯한 '세상 참 좁기도 하지' 이 한마디는 결국 무덤까지 가지고 갈수 있었던 남편의 말하지 않은 실수로 밝혀지고, 방금 전까지 같이 보았던 크리스마스 전구 불빛을 삼켜버리는 듯했지만 앞으로 남은 生의 시간에 서로를 뺀다는 걸 상상할 수 없었던 그들은 자신의 손만큼이나 친숙한 상대의 손을 잡고 결국 서로를 바라본다. 남의 걱정이나 불행을 부러 접하는 것으로 안도감을 느끼는 이웃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바로 올리브의 처절하고 참담한 현실 속으로 당당하게 침입한다.

헨리가 급작스런 뇌졸중으로 쓰러져 요양원에서 힘겨운 시간들을 보내고 있을 때 올리브는 한때 학교동료이기도 했던 루이즈를 찾아가 살인범 아들을 둔 부모로서의 고통이나 그로인해 자신만큼 혹은 자신보다 더 불행해진 모습을 확인하고 싶었지만 오히려 자신의 그러한 속내만 들켜버리고 결국은 조롱까지 당하게 되는 <튤립>에서는 작품이 끝난 후라도 올리브가 차라리 땅이 얼어버리기 전에 튤립을 심지는 말기를 바랬었다. 남의 자식의 치명적인 허물을 보고 내 자식의 잘못에 안도한다거나, 배우자의 어린사진을 보고 내 자신을 용서하기 힘들었다던가, 간병인 엄마보다 늘 입원한 아버지의 안부만 궁금했던 내 자신도 튤립을 심을 자격은 없다고 자책하기도 했다. <여행바구니>에서도 올리브는 남편을 잃은 옛 제자 말린의 장례식을 도와주러 간 자리에서 크나큰 슬픔에 닥친 그녀의 실의에 찬 모습을 보고 위로를 받고 싶었지만 의외로 무너지지 않은 제자의 모습에 오히려 자신의 상처만 더 커지고 제자가 생전 남편과 같이 여행을 약속하며 간직해온 속절없는 바구니처럼 덩그러니 남겨지게 된다.

인간이란 본능적으로 자기 허물보다 남의 약점이나 실수를 발견하고 관찰해 내는데 보다 특출나다. 하지만 남의 불행으로 운 좋게 얻은 안도감은 정작 내가 불행해졌을 때 나와 똑같을지 모를 상대들로부터 주지도 않은 상처를 덤으로 받게 되는 악순환의 씨가 된다는 점에서 묻지도 받지도 말아야할 것임에 틀림없지만 작가는 올리브를 감정의 始原을 상대에게서 찾은 우범의 결과로 상대적 감정의 피해당사자이자 자기 감정의 가해자로 만들어 어쩔 수 없는 나약한 인간임을 꽤 설득력있게 보여주고 있었다. 세상 모든 이들은 자신이 필요로 하는 걸 얻기 위해 분투하고 있기에. 

 
세상에 자리 발견하기
 
올리브의 제자이기는 하지만 다소 거리가 있어 보였던 젊은이가 등장하는 <병속에 든 배>와  <범죄자>는 그 나이가 비켜간 입장과 시각으로 주인공과 올리브와의 거리만큼 어느 정도 객관성을 유지 할 수 있었다. 어짜피 아빠가 각각 다른 비현실적인 가족관계속에서의 줄리, 위니자매(병속에 든 배)와 아빠는 죽고 엄마로부터는 버림받은 레베카(범죄자)의 이야기는 그래도 그들에게 앞으로 기회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그들의 상처와 그들만의 치유방식에 공감하고 싶지는 않았다. 결혼하고 싶었던 남자친구에게 총구를 겨누던 미인대회출신의 엄마나 하루 종일 지하실에서 물에 떠보지도 못할 것 같은 배를 만드는 아빠가 오히려 안쓰러웠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딸들에게 팬케?을 만들어 같이 먹자는 아빠의 일상이 비오던 날 부쳐주시던 어머니의 부침개처럼 그리웠다. 레베카가 옛 남자친구를 못잊고 헤어짐에 슬퍼하던 것 보다는 나이가 들어 버터를 더 찾는 아버지를 보고 버터가 아버지를 끝장 낼 거라 아버지의 버터사랑에 기대를 걸었다는 레베카의 애증에 더 가슴이 아팠다. 아버지의 병환이 길고 깊어지자 긴병에 효자 없다고 이 고통이 언제 끝날지 기다리곤 했던 내 모습과 다를 바 없었다. 줄리나 레베카는 가출과 물건을 도난 하는 것으로 자신의 상처를 극복하려했지만 훗날 가족이나 친구와의 관계 속에서 역할과 자리를 발견하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 올 것이라 믿고 싶다.

이 소설에서 주인공 올리브의 심리묘사가 가장 직접적으로 느껴진 <불안>과 마지막 수록작품인 <강>역시, 죽을 땐 제발 숨이 금세 끊어졌으면 싶다가도 끝까지 포기 할 수 없었던 인간관계 속에서의 역할과 자리에 관한 물음을 조용히 던져 주었다. 앞선 단편들에서 올리브는 가끔씩 '말풍선'으로만 등장하는 사람으로 느껴지기도 했고 주인공의 이웃으로 등장해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보이는 바닷가 마을 한 자리에 선생님으로 부인과 어머니로 위치해 있었다. 하찮아 보이는 주변인 혹은 어엿한 사건 속에서도 그렇게 모여진 이야기는 결국 자신이 말하는 올리브의 이야기였고, 남들이 말하는 올리브의 이야기이기도 했다.

올리브는 도와달라는 아들의 부탁으로 날아가는 비행기를 타고는 비로소 희망이 무엇인지 기억났고, 소박해 보이는 아들의 새 부인과 부인이 낳아온 두 명의 아이들 틈 속에서 일상을 같이 하며 작지만 어머니로서의 역할을 행사할 때 가족이라는 기쁨을 다시금 맛보기도 했다. 어디든지 같이 도망갈 수 있을 것 같던 마흔 넷에 만난 사랑을 지키기 위해 헨리와 헤어지지 않은 것을 천만 다행으로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두 아들 내외가 아침에 나누던 대수롭지 않은 대화에 마음이 상한 올리브는 아들과 해묵은 서로의 상처를 긁어대며 작품들 중에서 가장 크게 화를 내고는 쓸쓸히 돌아선다. 9.11로 야기된 미국시민의 불안을 글 속에 투영하였다는 <불안>에서 드러난 올리브의 분노는 '불안감은 분노'라는 새 며느리 앤과의 대화에서 암시하듯 자신의 역할이 필요한 것으로 희망을 느꼈던 감정과 평행을 이루며 역할이 사라진 가족관계에서 분노로 남겨진 올리브를 더욱 애처롭게 만들었다.

<강>이라는 마지막 작품은 다른 작품과는 달리 유독 제목이 암시하는 상징적 의미에 집착하도록 했다. <종합병원>이나 <전원일기>같은 매주 주제는 다르지만 같은 형식의 틀과 뼈를 이루는 주인공들로 구성된 주간드라마의 마지막 회 같았다고나 할까. 이야기의 시점이 헨리가 죽은 후이기도 하고 일흔둘의 올리브가 죽음을 앞둔 노년으로서 어떻게든 자신의 인생을 슬기롭게 정리하는 듯한 메시지를 곱게 접어 우리에게 전달해 주어야 했기 때문이다. 혼자는 죽고 싶지 않다는 잭에게 사람은 혼자 태어나 혼자 죽는다는 올리브의 대답이나 올리브가 아직 남편이 살아 있는 친구와 전화를 할 때엔 아버지를 먼저 떠나보낸(먼저 과부가 된) 어머니가 이따금 친구들과 나누던 전화통화를 엿듣는 기분도 들었다. 올리브는 잭이 병원에서 자신을 필요로 한 그 곳에 작지만 아직도 세상의 자리가 존재함에 다시 희망을 느끼고 이른 아침의 산책을 이어간다. 올리브의 자리(노년-silver)는 강변에 다시 봄이 오고 그런 봄이 오는 것이 기쁘다는 것을 견딜 수 없을 지라도 계속 흘러가는 금빛 강물(Gold)과도 같았고, 강물이 흘러가는 한 삶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최고의 일상인으로 다시 만나
 
이 책은 사실 나에게 비일상으로 다가왔던 뜻밖의 감사와는 달리 이야기에 빠져 몰두하기는 어려웠다. 주인공들의 일상 속에서 유난히도 개인적인 '잡념'이 많이 떠올라 생각의 가지치기를 극복하느라 힘겨웠다. 그래서 더더욱 어떠한 한 문장이라도 놓칠 수 없었고, 책을 덮고 나면 떠오르는 여러 가지 생각들로 늘 과식을 한 것처럼 머리가 더부룩했다. 아침에 펼치면 산책이 하고 싶었고, 낮에 읽으면 누군가와 맛난 점심을 먹고 싶었고, 밤에 덮으면 일기라도 쓰고 잠자리에 들고 싶었다.

배우의 경우라면 실제 극중에서 자신의 성격과 비슷한 캐릭터를 만나면 물 만난 듯 잘 표현해 내겠지만 독자인 나는 거울같은 이야기에 합체 되지 못하고 그저 '같다는 것', '같을 것'이라는 무거운 공감만 껴안은 채 며칠을 끙끙대었다. '죽도록 지겨워', '하루가 또 갔네요', '난 괜찮아' 와 같은 짧은 한마디는 잘 구워진 생선을 맛있게 먹다가도 갑자기 목에 가시가 걸리는 순간과도 같았고 바로 내입에서 나온 그것과 다르지 않았다.

그 녀석은 무엇을 느꼈을까. 이 책을 읽으며 똑같이 자신의 엄마와 아버지와 동생과 남편과 시어머니를 그리고 한번은 친구인 나를 생각했을 것이다. 내가 느꼈던 감정들을 그녀석도 느꼈을 것이다. 그래서 힘들었을 것이고, 행복했을 것이다. 이렇게 자신과 내가 똑같을 줄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힘겨움 없는 같음'은 일회적인 행운이나 우연일지 모르지만 이토록 '힘겨운 같음'이 일상을 견디고 살아내야 하는 우리의 운명인 것처럼 새삼 벅차고 감격스럽다.

얼마전 신문에서 '늙으면 엄살이 심해지고 원래 요구가 많은 것이니 너무 신경쓰지 말라'는 간호사들끼리의 주고받던 무심한 한마디 때문에 대장암을 견디고 끝내 이겨버린 어느 老교사의 사연을 접했다. 나이가 들수록 일상에서 접하는 감정의 씨줄날줄간의 간격이 더 촘촘해지는 것을 느낀다. 그리하여 나이로부터 얻을 거라 생각되는 관용, 포용이나 후덕함은 커녕 오히려 사소한 먼지 같은 것들도 일단 들어오면 잘 빠져나가지 않거나 심지어는 아예 들어오지도 못하고 튕겨져 나가는 순간을 맞이할 때가 많다는 것에 얼마나 놀라곤 하는지 모른다. 한해 두해 나이를 먹을수록 어머니에 대한 경외감은 그래서 더 커져만 간다. 내 어머니는 일평생 하루의 시작과 끝이 얼마나 경건한지 그리고 그것을 변함없이 지켜가는 일이 얼마나 자신의 삶을 지탱하는 것인지 몸소 실천하는 '최고의 일상인'이었다. 이 책의 서두에 작가는 '삶을 마법으로 만들 줄 아는 분이자 내가 아는 최고의 이야기꾼인 어머니에게'라고 밝혔다. 아마 작가의 어머니도 나의 어머니와 다르지 않을 것이라 짐작한다. 나는 어머니가 가신 후에야 일상을 존중하고 신념하며 그로부터 얻은 힘으로 가족의 일상을 지원해주신 내 어머니께 비로소 감사하는 마음으로 일상을 시작하였던 것 같다. 그것이 내 삶의 마법이자 지팡이였음을 너무 늦지는 않게 깨달았던 것이다.

겨울을 좋아하는 친구의 분주한 일상도 눈에 그려진다. 크리스마스를 밝혀줄 꼬마전구가 녀석의 집에서도 반짝이고 있지 않을까. 내가 보지 않아도 여전히 열심일 친구가 보고 싶어진다. 우린 서로가 손꼽는 '최고의 일상인'이 되어 만날 것이고 늘 그렇듯이 적지 않은 세월 어디를 가든 무엇을 하건 서로를 등지지 않은 것에 수줍은 한마디를 건낼 날이 올 것이다.

살아는 있었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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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성란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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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 My Accident

그러니까 내가 기억하고 있는 그 일은 '오대양 사건' 이라기 보다는 '그것이 알고 싶다'였었다. 90년대 초반 시사고발 프로그램의 새로운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킨 그 프로그램은 SBS 개국 직후 야심차게 방영된 인기 프로였다. 그런데 그날 밤은 우연히도 부모님이 안 계신 날이었고 TV에선 신도들이 무더기 변사체로 발견된 현장을 뿌옇게 처리한 사진을 보여주며 '집단자살' 혹은 '광신도', '사이비 교주'같은 무시무시한 분석들을 해대고 있었다. 나는 그 한 장의 사진을 아무런 자료 도움없이도 비교적 또렷이 기억해 낼 수 있는데 희미한 영상처리 뒤에는 쓰레기가 널려있는 땅바닥에 사람들의 무리로 보이는 사체 덩어리들이 80년대 컬러사진의 색조를 연상시키는 붉은 톤을 띠며 가지런히 배치된 장면이었다. 그 충격적인 이미지의 잔상효과는 결론으로서의 진실이나 사연을 뛰어넘는 공포이상의 효력이 있었다. 당시 대학교 졸업반으로서 오로지 취직만을 궁리하고 있던 나에게 그날의 사진 한 장은 어떤 급브레이크와도 같았기 때문이다. 산다는 것, 믿는다는 것, 죽는다는 것, 이 세 가지가 결국 한가지일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처음으로 해 본 그날, 돌이켜보니 그때 나는 갓 스물이 넘은 청춘이었다.

그런데 자료를 찾다보니 '오대양 사건'은 실제 1987년에 일어났고 마침 그때 작가의 나이도 내가 그 사건을 처음 접하게 된 나이와 거의 같았다. 나는 87년 당시엔 여고생이었고 기사로선 어떤 기억도 나지 않는다. 그런데 작가가 만약 87년에 '오대양 사건'을 접했더라면 분명 청춘을 고민하는데 있어 작가라는 꿈을 내딛는데 있어 크나큰 반향을 불러왔을 지 모르겠다. 2010년 이렇게 우리들에게 그때의 질문을 모티브로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 놓았다는 것은 당시 느꼈던 의문들이 단순한 사건의 진위여부가 중요한 했던 것이 아니라 당시 스무살 때부터 지금까지 주욱 고민해왔던 나름의 의문이었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만약 그 의문들이 이번 작품을 통해 작가 스스로 그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상위지침의 역할을 했다면 아마도 작가는 상당히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었을 것으로 보인다. 소설가로서 사회적 관심사(숨겨진 진실)가 개인적 관심사(내재된 욕망)와 하나가 되어 작품으로 빛을 발한다면 문학적 평가와는 별도로 얼마나 자기성취감이 크겠는가. 작품의 제목이 의문의 부호를 암시하듯 A로 드러났지만 자신에게 영감을 주었던 소재와 자신이 천착해온 주제를 잘 결합시켰으니 작가 스스로 자신의 결과치에 A학점을 매기고 싶지 않을까 싶었다. 그런데 바로 이점이 독자인 우리에겐 약간의 서운함으로 남는 아이러니가 아니었을까.

하성란 작가의 글은 각 문장마다의 완성도가 높다. 한 문장안에서 높은 밀도로 선택되는 텍스트의 실세가 크다보니 읽어가는 독자로선 즐거운 작업은 아닐 수 있다. 거기다가 이번 작품은 특히 작가가 이루려는 소설적 성취와 독자가 기대하는 독서적 성취간의 간극이 크게 느껴진다. 작가가 말하려고 하는 것과 독자가 듣고 싶은 것이 살짝 일치하지 않아 보이는 것이다. 이것은 작가가 사건의 진실을 파헤치려 A라는 작품을 집필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그래도 한편으론 아쉽게 느껴지는 독자로서의 이기심임을 인정한다. 그래서 나는 돌아가는 서사에 집중하기 보다는 작가가 고민해온 것, 그녀가 말하려고 하는 것을 온 마음으로 수신하려 애를 썼다. 언뜻 보기엔 쉽게(직선적으로) 풀어도 될 이야기였을 텐데 방법적인 면에서(나선형으로) 작가는 그렇게 하고 싶지는 않았던 것 같다. 나 역시 하나의 문제를 어렵게 풀어가는 성향이 다분한 입장으로서 '오대양 사건'에 대한 나름 기억의 트라우마가 있는 터라 책을 덮고는 다시 스무살 된 심정으로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A를 받을 만한 답인지 집요하게 그 의문을 되짚어 해답을 찾아보고 싶었다. 그리고 자못 잘 따라왔다는 보람이 차오른다. 이 작품은 작가 스스로 묻고(Ask) 스스로 답한(Answer) A학점 리포트이다.(그러니까 우리도 스스로 묻고 답해보라는 것이다) 애초부터 독자들의 평가같은 건 두렵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만큼 작가로서 스스로에게 더 중요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어쩌면 그녀 스스로 A 점수를 준 요소들을 내 답으로 얻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나조차도 이십년이 다 되어 가는 그 시절 스쳐 지나간 의문을 그녀로부터 답을 들을 수 있는 기회일 수도 있지 않는가. 그 떨리는 마음이 쉽지는 않았다.


들은 것이 본 것으로

그렇다. 그녀가 묻고 답한 것은 신기하게도 스무살 시절의 충격과 사십이 넘은 끄덕임으로 다가온다. 이것은 아마도 작가 자신이 문단에 데뷔하기 전인 87년 당시 지워지지 않을 의문으로 남은 기억을 등단 후 지금까지 되새김질하여 완성한 중견작가로서의 답안지라 할 수도 있다. 작가로서 당연히 고통스러웠을 이 행보는 작품속의 화자의 행보와 정확하게 일치한다. 화자는 스물 셋에 사건에 대한 후유증으로 장님이 되며 마흔 여섯에 시력을 회복하게 되는데 이는 죽음과도 같았던 시간들이 다시 재생하는 과정을 의미하며 죽음에 대한 의문이 삶에 대한 해답으로 결론지어지는 것과 다름 아닌 것이다. 소설을 가만히 따라가다 보면 이야기는 화자가 식물과 동물이 썩어가는 냄새를 느끼는 장면으로 시작해 바람에 흔들리는 코스모스를 보는 장면으로 끝이 났음을 알 수 있다. 화자에게 있어 냄새는 '죽음'에 대한 기억이며 코스모스는 '삶'에 대한 희망이 아니겠는가. 죽음을 맡고 들은 것에서 삶을 들이 마시고 본 것, 이 결정적이고도 감각적인 대립의 장치는 사실상 이 소설의 모든 것을 암시한다고 느껴졌다. 작가는 자신이 스무살 시절 이끌렸던 막연한 절망의 기운을 마흔이 넘어 희망의 온기로 부활시키며 자신의 트라우마를 스스로 치유하는 성과를 거둔 것이다. 어떻게 보면 나에게 있어서도 그 장면은 어떤 논리나 증거로도 이해될 수 없는 두려움 그 자체였기에 빛바랜 사진이 통과의례적 추억으로 승격되는 행운을 누릴 수 있게 된 것이다. 아마 그 시절 나와 비슷한 기억이 있는 독자들이라면 문학은 이렇게 같은 시기 같은 사건 같은 충격의 공유만으로도 지극히 사적인 치유가 가능하다는 것을 공감하는 분들이 있을 지 모르겠다.

책에서는 끝까지 주인공인 화자의 이름이 불리워 지지 않는 채로 수많은 관계속에서만 화자인 그녀를 인식해야하는 고통이 따른다. '거짓말쟁이', 혹은 '할멈'등으로 불릴뿐 그녀의 이름을 호명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이 화자는 사건당시 식당 종업원으로 일하던 죽은 엄마의 딸이며 신신양회 회장 '어머니'가 살려준 유일한 청소년이며 비교적 분명한 캐릭터를 지니고 있는 언니들의 동생이지만 어쩐지 시종일관 실제하는 인물이라는 생각이 잘 들지 않는 유령같은 존재로 인식되기도 한다. 이는 모든 상황을 전지적 작가입장에서 보고 듣고 만지고 맛보고 느끼게 되는 화자의 예민한 감각을 한층 높여주는 치밀한 장치였던 것으로 이해되었다. 화자의 이름이 무엇이었건 화자가 누구이었건 그녀는 사건현장에서는 물론 어린시절 내내 존재감없는 존재이었기에 이야기속에서도 줄곧 상황속에 있는 것인지 바깥에 있는 것인지 그 경계를 넘나드는 '감각의 존재'로 여겨진다. 그로써 화자가 감지한 고향과도 같은 공장지대의 냄새, 식당에서 흘러나오던 음식냄새, 이모들간의 대화와 웃음소리, 짜진 시금치 된장국과 피자두의 신맛, 살인범으로 느껴진 축축한 손의 감촉까지 모든 오감을 자극하는 감각의 정서들은 '정밀묘사의 여왕'이라는 별명을 가진 작가의 세밀하고도 완성도 높은 묘사에 의해 화자가 전혀 장님이라고 생각되지 않는 서사를 제공해주는 밑거름이 되었다. 화자는 장님이었지만 작가의 투철하고 예리한 시선이 투사된 장님아닌 장님이었기에 작품을 읽어가다 보면 화자의 시점이 슬며시 작가의 시점으로 전환되는 듯한 느낌이 들 때도 있다. 장님이라는 장애를 십분 활용한 작가의 노련한 시점혼용 작법이 독자로 하여금 더 풍부한 상상력을 자극한 것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이렇듯 죽음을 삶으로 감지하기 까지 어쩌면 작가의 전 생애, 온 감각이 쓰여진 것은 아닐까. 우리들 역시도 코스모스를 살아있는 아름다움으로 인식하기 까지 그토록 고약한 악취와 온갖 쓴 맛을 겪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화자가 스물 셋에 눈을 잃어 마흔 여섯에 다시 눈을 찾기까지 딱 살아온 시간만큼의 세월이 걸린 이 깨달음의 기간이 곧 작가가 답을 찾아가는 여정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스물 셋에 화자의 엄마는 화자를 낳았고 화자는 스물 셋에 이야기를 낳았고 작가는 꼭 스물 세 해가 지나서야 의문의 여정이 끝난 것이다. 그래서 그녀들의 이어지는 여정은 끊임없이 나를 자극하고 잠잠하던 저온의 감각을 두드렸다. 궁금하긴 했었지만 그만 놓쳐버린 그래서 내가 의문을 가졌던 것 조차 까마득하게 잊어버린 그 날 그 곳에 남겨진 질문과 나는 우연히도 재회한 것이다. 


죽음의 비밀이 삶의 진실로

화자는 극중에서 자신이 겪은 이야기를 전하고 자신 스스로도 이야기를 꾸며내는 스토리텔러로서 그 입장과 역할, 자신의 각오를 우리에게 반복하여 전달한다. 마치 소설가가 자신은 왜 작가가 되었으며 무슨 이야기에 관심이 많고 앞으로는 어떤 이야기를 쓰겠다고 말하는 것처럼. 여기서 작가는 화자가 뇌종양의 후유증인 코르사코프 증후군 증상의 하나로 '작화作話'라는 병적인 징후에 대한 가능성을 제시함으로써 스토리텔러로서의 화자의 타고난 배경을 배수진으로 치는 치밀함을 보여준다. 화자의 머릿속 종양은 시신경을 눌러 시력을 잃게 하였지만 그 압박으로 기억은 얼마든지 확대, 재구성될 수 있는 새로운 능력을 부여받은 것이다. 언뜻 보기에 치명적 장애일 수 있는 화자의 두 가지 약점은 그녀가 엄마와 이모들의 이야기를 기억해 내고 자신과 언니들의 이야기를 전하고 자신의 이야기를 만들어 가는데 있어 독창적인 감각으로 더 멋진 이야기를 꾸며 낼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는 복선이기도 하지만 그러하기에 이야기가 가지는 허구적 낭만 혹은 비약을 미리 안전하게 보호하는 방어적 장치도 되는 것이다. 이는 소설가라면 소설을 쓸 수밖에 없는 타고난 운명에 온몸으로 대처하며 끊임없이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것이 결국 운명이기도 한 것과 같이 화자에게 운명적으로 주어진 형벌과도 같은 것이다. 즉, 작가는 자신의 고민을 해결하기 위해 화자라는 분신을 이야기속에 출전시킨 것이다.

화자는 그 운명에 슬퍼하지 않으며 엄마와 이모의 이야기를 들려주는데 화자의 이야기를 듣고 내린 작가의 판단은 아마도 그들의 삶의 방식에서 감지되던 특별한 공동체 의식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공동체 의식은 원래 사건의 기사대로 신흥여성 교주가 여성들의 재산과 노동력을 착취하고 급기야 죽음에 이르게 하는 폭력지향적인 것이 아니라 여성의 목소리와 사랑, 출산과 육아를 보호해주고 아버지 없이도 활기를 잃지 않는 평화지향적 태도이었음을 소설에서 천명한다. 그들의 죽음이 사건과 허구 모두에서 자살적 타살이었음에는 변함없지만 죽기이전의 그들의 삶은 여성공동체라는 낭만적 삶의 방식을 추구함으로써 실은 그들이 죽은 이유(사건의 진실)보다는 그들이 살은 이유(삶의 진실)를 더 진심으로 알아보고자 했다는 것이다. 그들이 죽어야 했던 이유는 아직까지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지만 그들이 살았던 이유는 얼마든지 생각해 보고 싶었던 것. 어쩌면 그들의 죽음에서 비밀을 찾기 보다는 그들의 삶 속에서 진실을 찾아 우리가 살아가야 할 희망을 발견할 수 있다면 그들의 죽음도 그녀의 작업도 모두 헛된 일은 아니라는 것. 이렇듯 작가는 그녀들의 삶의 방식을 허구로 복원해 내어 화자라는 제 3자를 통해 우리에게 나지막히 알려주었던 것이다. 우리는 문학안에서 겨우 이정도 밖에 진실을 발견할 수 밖에 없을지 모르지만 아무도 생각치 못했을 그 어둠속에서 찬찬히 진실을 찾아가는 그 과정만큼은 박수받아야 마땅하지 않을까.

진실도 좌표가 있다면 나는 수직적(x축) 진실과 수평적(y축) 진실을 그래프로 그려보고 싶다. 화자가 들려준 이야기는 대체로 여성의 비극이 (수직적으로)대물림되는 사회현상을 적나라하게 포착한다. 화자의 엄마인 서정화의 어머니는 딸이 자신을 강간하려던 이웃남자를 이미 정당방위한 상태에서 보다 잔인하게 확인사살한 후 딸을 도주시켜 십오년의 형집행을 받고 나온 살인범이었다. 그녀는 시골 시장골목에서 촌부들 틈에 끼어 피자두를 파는 것으로 하루하루 살아가는 처지였으며 그녀의 딸인 서정화는 열여섯에 쫓겨나다시피 집을 나온 후 최영주의 아버지(건설부 고위관료)에게 여성을 잃고 딸 서정인을 임신하게 된다. 화자의 엄마 서정화는 서정인에게 '아버지의 부재'를 유산으로 전해주고 서정인은 또다시 아버지 김준 없이 준하를 낳아 기르게 된다. 빈곤과 비천이 대물림 되는 것은 화자의 엄마뿐이 아니라 기태영의 엄마인 기영이도 마찬가지였다. 남편의 폭력으로부터 시달리던 어머니 밑에서 기태영의 엄마는 아버지의 학대로 괴롭힘을 당하다 견디다 못해 무작정 도주한다. 정신과 육체가 피폐된 이들을 구원의 손길로 받아 들인 것은 수직적 대물림을 단절시킬 수 있었던 신신양회의 어머니였기에 이들에게 '어머니'는 신적인 절대자로 새겨졌을 것이다.

신신양회의 마스코트격인 중창단이라 불린 그녀들은 이처럼 자신들이 상처입은 부계사회가 가지는 남성적 폭력과 성의 억제, 자유억압, 권위주의를 배척하고 '어머니'를 중심으로 건강한 사랑, 평화스러운 생활을 추구하게 되는데 그 사회공동체가 바로 '여인왕국'에 다름 아니었던 것이다. 때문에 극중에서 등장하는 남성 캐릭터들은 대부분 폭력적이고 불안하거나 사회비리에 무감하고 이기적이며 소심한 인물들로 그려진다. 특이하게 여성적 느낌의 이름을 가진 '최영주'라는 인물만 정의나 진실을 향한 시선을 멈추지 않는 정도로 묘사될 뿐 남성은 저벅저벅 군홧발소리, 흔들리는 눈빛, 중년의 목소리, 축축한 손등의 실체없는 감각으로 이들 공동체와 대치되는 부정적 이미지를 생산해 낸다. 이 수평적 공동체의 종말을 예고하는 단서는 아마도 서정인이 낳은 준하와 김준희가 낳은 재원이라는 아들(수직적 대물림의 씨앗)들에서 기인하지 않을까. 그리고 보다 확실한 건 서정인의 이복형제인 최영주가 기자된 사회적 시선을 잃지 않고 그녀들을 불행으로 몰고 간 과거세력에 일침을 가한 정의로운 행위와 편견으로부터 그녀들에 조력한 양심, 즉 수평적 감각에 있지 않았을까. 최영주의 개입은 그동안 단순히 쌀가마니나 들어주는 정도의 인력으로서의 남성만이 그들 조직내에 필요했던 여성공동체에 힘이나 성적인 역할과는 상관없이 이성적인 멘토로서 보다 이상적인 공동체를 향한 열린 의지를 느끼게 하는데 기여했다. 이로써 여자들이 대를 물리는 이야기를 여성이 작화하는 이야기는 그 이전의 (수평적)대물림이 끊어지면서 새로운(수평수직이 조화된) 대물림을 예고하는 것으로 막을 내린 것이다.

삶의 방식이 사람의 진실을 이길 수 있을까. 건강하고 평화로운 삶은 실은 남성의 조력으로 더욱 아름다워 지기도 하는 것이다. 이야기의 아우라가 결코 여성우월적인 서사로 비난 받지는 않아야 할 세심함이다. 화자는 어머니가 자신을 살려준 것은 살아남아 부디 자신들의 전철을 밟지 말라는 메시지로도 이해한다. 공동체를 지탱하는 삶의 방식의 옳고 그름을 떠나 화자가 지어내어야 하는 이야기의 향방은 작가가 끌어나가야 할 화자의 인생의 방향과 일치했을 것이기에 어둠속 한줄기 빛, 그것은 결국 죽음의 진실이 아닌 삶의 진실이었던 것이리라. 그것은 죽음의 기억을 단순히 증언하고 전달하는 스토리텔러에서 발전해 자신의 삶과 진심을 이야기하는 작가로서의 길이기도 할 것이리. 그것은 이야기꾼으로서의 '거짓말 쟁이'나 '늙은 할멈'이 아닌 진정한 자신의 이름을 찾는 일이기도 했으리.


연합에서 독립으로

한편 소설속 현재의 오늘에 돌아와 신신양회 어머니들의 죽음 이후 그 아이들이 재회해 뭉쳐서 살아가는 이야기는 어쩐지 이미 헤어짐이 예견된 룸메이트와의 동거처럼 느껴졌다. 그들의 어머니들이 저항의 흔적없이 교주인 '어머니'와 같이 죽음을 받아 들였다는 사실은 각기 자신들의 삶에서 온전히 독립하지 못한 채로 종속적인 삶을 마감하였다는 뜻도 내포하고 있다. 나는 이들이 종교적 이유에서 죽음을 택했건 그녀들이 믿고 의지하던 '어머니'의 몰락에 절망적인 심정으로 죽음에 동참하였건 모두 숙연하게 '따라 죽었'다는 것에 생각이 기운다. 우리나라도 삼국시대에 순장殉葬의 풍습이 있다고 들었다. 임금이나 주인 혹은 남편을 따라 죽는 제도적 풍습은 고대시대부터 군주라는 '남성'을 따라 바쳐지는 인간예물과도 다름없었다. 어머니들이 일상에서는 남성에 억압당하지 않는 태도를 지향했지만 죽음을 택하는 방식에서는 가장 남성중심의 극단적인 가부장제 풍습을 택함으로써 결국 어머니들이 의지한 것은 여성을 뛰어넘어 지배하는 남성성을 가진 군주로서의 '어머니'였다는 것을 스스로 입증한 것이 아닐까. 이는 신신양회의 어머니가 최초 설립한 회사가 건설의 밑거름이 되는 시멘트를 생산하는 본거지 였다는 사실에서도 공장에 우뚝선 사일로가 그들 지역의 상징이었다는 점에서도 '어머니'는 다분히 권위주의적 수직체계와 남성적 폭력양식을 두루 내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어머니'의 이중적인 태도는 그녀가 신신양회를 하나로 응집시키기 위해 사용한 종교적 가르침에서도 드러난다. 그녀는 아이들에게 애초부터 생물학적인 '아빠'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면서 교회에서는 하나님 '아버지'를 가르치고 외우게 하여 남성우월주의적인 가치관에 의지하도록 한 것이다. 작은 키에 홍수로 폐허가 된 마을에 아이하나를 데리고 시발택시를 타고 도착한 그녀, '어머니'는 여성성을 잃어버린 남성으로서 존재하면서 모성의 권리를 추구한 중성적 존재로 여겨진다. 혹시 '어머니'가 아무것도 안보이기에 아무것도 모른다 생각한 화자를 살려 준 의미는 네 안의 여성성을 버리지 말고 한 인간으로서 행복한 삶을 추구하라는 충고가 아니었을까.

이렇듯 아이들은 어머니들의 감추어진 종속적 마인드를 유전자로 태어났기에 홀로 떨어져서는 삶을 행복하게 하는 방법을 알지 못했다. 이들의 연합공동체는 정상적인 가정생활을 해보지 못한 이들이 독립적인 삶을 살아가기 위한 일종의 시행착오로도 느껴졌다. 화자와 서정인, 안은영, 김준희가 중심이 되어 구축한 공동체에선 어머니들과의 추억을 공유하면서 어머니들의 사랑, 출산, 육아방식을 답습한다는 점에서 유사한 여성공동체를 지향했지만 어머니들이 신신양회의 정신적 교주격이었던 '어머니'를 중심으로 현실에 만족하면서 생활했다면 아이들은 카리스마있는 절대자가 따로 없는 상태에서 서로의 의견을 조율하고 보다 자유로운 생활을 유지했다. 어머니들이 교단의 규율과 일정한 노동및 역할에 얽매여 있었던 것과는 진일보된 방식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집단에서 허용된 자유에는 늘 예측못한 상황이 생기듯 서정인과 기태영이 같은 공동체 구성원으로서 교제를 하며 은밀한 의사결정권을 행사하기도 했고 준희처럼 아이아빠와 가정을 이루려는 이탈자가 생기기도 했다. 그래도 무엇보다 창의적이었던 사건은 바로 화자의 아이디어로 추진된 발신인 A의 '편지보내기' 프로젝트 였다. 이들은 건강하고 사회적으로 이름난 젊은 남성에게 메시지로서만 자신들을 알리며 의문의 부호로 프로포즈한다. 이들이 보낸 메시지는 '나와 사랑할 수 있느냐'는 수동적 가능성에 대한 질문에서 발전해 '나와 사랑을 만들어 볼래'하는 능동적 추진성의 의미를 담고 있다. 선택은 우리가 했으니 내키면 손을 잡으라는 메시지는 주체적이면서 다분히 남성적인 태도라 할 수 있다. 이는 연합공동체에서 서로에게 의지하던 종속적 태도가 자신들의 삶은 자신들이 결정한다는 개인적 욕구가 스며든 행위로 보여지며 세상으로부터 편견과 비난을 받고 있는 상황에서 촉발된 대안적인 탈출구이기도 했다.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화자의 역할이기도 했으며 그 이야기를 전개시켜야 할 언니들의 몫이기도 했다. 결국 작가도 소설이라는 편지를 자신의 부호로 독자들에게 보내는 것이라 보았을 때 화자의 편지는 지극히 문학적인 해결방식으로 보였다.

이 연합공동체는 기태영과 최영주라는 다소 뜻밖의 인물로 인해 그들이 가지고 있는 각자의 비밀이 벗겨지면서 차츰 균열이 생긴다. 그런데 나는 어쩐지 화자와 같이 기거하는 언니들과 기태영, 최영주의 출생의 사연들이 밝혀지면서 이야기가 어머니들의 죽음에 다가간다기 보다는 스스로의 역동성을 지닌 채 자꾸 미래로 나아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랬다. 아이들 모두는 어머니들처럼 죽음을 택해야 할 이유가 하나도 없었고 모두 아름답고 건강하게 살아야 할 이유만 있었다. 이들이 같이 있으면서 서로 느낀 것은 같이 죽는 것이 아니라 헤어지더라도 혼자 잘 사는 것이었다. 연합(Association)의 붕괴가 곧 모두의 절망이 아니라 혼자(Alone)서 일어서야 할 새로운 희망을 찾아야 하는 순간으로 인식하게 되기까지 이들은 서로의 모순과 각자의 욕심을 깨닫고 이해하는 과정이 필요 했던 것이다. 그 추억의 시간들은 최영주가 입수한 사진속의 어머니들이 곧 자신들이 밟아야 할 전철은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기까지의 필연적인 시간이기도 했다.


About All's A

그런데 내가 주목한 것은 A라는 의문의 부호로 편지를 보낸 사람이 화자를 비롯한 여성들 말고도 또 한사람 존재했었다는 것이다. 화자가 속한 연합공동체와 최영주가 발신인으로서, 연예인 김준과 이성복이 수신인으로서 A를 주고받았다는 것은 그들이 A를 오해했건 이해했건 이들 젊은이 모두가 A라는 의문의 부호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각자 서로 다른 의문이 A로 대표될 수 있다면 그것은 곧 그 사람의 정체성인 것은 아닐까. 이는 과거 똑같은 분장으로 서로를 구분짓기 어려웠던 공동체속에서의 조직원이 아니라 조직이 붕괴된 후에도 홀로 남겨진 자신만의 정체성으로 개성을 갖게된 인격체를 암시하는 것으로 느껴졌다. 여기서 고교시절부터 연예인 김준과 친구였으며 서정인의 이복형제이기도 한 최영주의 A는 화자가 창안안 편지 A에 대한 일종의 회신의 성격을 띠고 있지만 그 대상과 의미는 보다 사회적이고 교훈적이라는 점에서 퍽이나 의미심장했던 장치였다. 어느정도 비밀을 간파한 최영주가 관련자들에게 보낸 A의 편지는 당신은 적어도 이 A를 알고 있는 사람일것이다는 전제가 포함되어 있다. 최영주의 아버지는 건설부 고위관료이면서 화자의 언니 서정인의 친부이기도 했다. 신신양회 어머니가 지칭한 '그분'에 해당되는 윗분들 중 한사람이었던 것이다. 최영주는 어머니들과 연계가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그분들에게 의문의 A를 던짐으로써 당신이 (비밀에 대한)답신을 하지 않아도 우리(사회)는 알고 있음을 정중히 알려준 것이다. 마치 서로가 알고는 있지만 공개해선 안될 A급 비밀 문서라도 되는 것처럼. 나는 그때 알았다. 작가는 화자가 자신들 연합체에 건강한 남성이 필요하여 그것을 제안하기 위해 편지이름이 A가 된 것이 아니고 실은 그때 그 사건의 비밀을 알고 있을 그분들에게 메시지를 보내기 위해 A라는 발신인이 필요했다는 것을.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당신들의 A는 무엇인지’ 묻고 있는 작가의 질문과도 같이 느껴졌다. 그것은 작품속 인물들의 A를 생각해 보는 시간이기도 했다. 당시 ’오대양 사건’은 정국에 따라 정치적으로 이용되며 시원한 진실이 밝혀지지 않은 채로 의문만 남겨졌지만 상당부분 정치권력의 비호를 받았다는 정황적 증거들이 잔여물처럼 여기저기 흩어져 다니며 누군가는 눈을 감고 누군가는 입을 닫았다는 사실만은 아무도 모르지 않는 다는 것. 그렇게 본다면 최영주의 A는 권력의 그분을 상징하는 Authority 가 아니었을까. 최영주는 서정인과 마찬가지로 선천적으로 인후가 약해 편도선염을 달고 사는 도시인으로 기자이면서도 사회에 제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소심한 지식인을 표상한다. 최영주가 기자된 양심으로 선택한 최선은 그분은 누구인지 혹시 당신은 아닌지에 대한 양심의 부호로서 A였다는 생각이 든다.

 
한편 그림자 같은 기태영에게 A는 신신양회를 출세의 수단으로 삼은 놀라운 추진력에서 알 수 있듯이 야망이나 야심을 상징하는 Ambition으로서의 A였을 것이다. 아버지를 찾지 않았던 다른 여자아이들에 비해 유독 아버지와의 만남에 집착한 어린시절 행보도 그의 A를 설명해주는 좋은 예일 것이다. 기태영은 자신의 A를 반사회적, 반도덕적, 반환경적으로 추구한 덕에 신신양회의 두 번째 몰락을 가져오는 직접적인 원인 제공자가 된다. 이는 오늘날에도 많은 기업인이 지양해야할 자세이겠지만 그들이 주홍글씨 처럼 지니고 가는 비밀의 낙인이기도 할 것이다.


 
영화배우겸 가수이면서 최영주와 고교동창생이기도 했던 김준은 그의 불안을 감지한 서정인과 안은영의 덫에 걸려 그녀들의 타겟이 되고도 훗날 그 결과로 자신의 아들이 태어났다는 사실을 알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의 위치에서 언제 추락할지 몰라 전전긍긍하는 전형적인 자기중심적 인물이었기에 그의 가슴에 자리잡은 불안Anxiety은 김준의 트레이드 마크로서의 A가 되었던 것은 아닐까. 

 
한때 인기가수 김준의 코디네이터이기도 했던 의상학과 출신의 안은영은 지인들에게 성기가 없는 허수아비나 인형으로 인식되며 여성성을 감지하기 힘든 중성적 존재로 표현된다. 김준이 허물없이 인간적인 고민을 털어놓기도 했던 그녀. 타자의 단점을 외적, 내적으로 보완해 주는 것으로 자신의 인간성을 실현했던 그녀에게 A는 섹스와는 무관한 Asexsual이었던 것으로 느껴진다. 남성, 여성과 상관없이 외적인 아름다움을 공정하게 추구한 정직한 예술가가 아니었을까.

 
약한 인후와 후천적으로 형성된 양미간의 세로주름이 인상깊었던 서정인에게 A는 여성적인 매력을 물씬 풍기는 매혹의 Attraction이 아니었을까. 화자의 엄마이기도 한 서정화의 눈에 띄는 미모와 외향적이고 낙천적인 성격, 아버지의 출세욕을 물려받아 어딜가도 주목받는 인물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당대 최고의 가수 김준을 노란색 컨버터블로 유혹해 준하를 낳기까지한 그녀의 도전정신이 왜 그런지 연합공동체가 지향하는 바와 조금은 어긋나보였던 것도 그녀만의 치명적 매력때문이 아니었을지.

 
어린 시절부터 현모양처가 꿈이었던 김준희는 아기아빠의 헌신과 구애를 뿌리치지 못하고 공동체를 벗어나 단란한 가정을 선택하게 된다. 그녀의 내재된 욕망한켠엔 삶의 동반자와의 행복이 가장 중요한 소원으로 자리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느껴진다. 현모양처는 가족구성원에 대한 희생을 밑바탕으로 하기에 그 대상이 곁에 실존해야 하기 때문이다. 김준희의 A는 동행으로서의 Accompany였던 것일까.

 
마지막, 그날의 생존자 화자에게 A는 무엇이었을까. 도시생활을 하면서도 화자가 그리워한 것은 대추나무가 있던 집에서의 삶이었다. 그녀는 혹시 세숫대야 물속에서 흔들리는 대추나무 이파리를 보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자연의 미세함에 그리움을 느끼는 사람은 언제나 아름답다. 현장에서 살아 남았지만 오랫동안 죽음의 냄새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화자가 다시 찾게 된 그리움은 들판 가득 바람에 흔들리는 코스모스의 ’살아있음’이었다. 코스모스의 생명성을 온몸으로 느낀 화자에게 A는 ’살아남음’이 ’살아있음’ 이 된 Alive가 아니었을까.

A는 이렇게 주인공을 부르는 이름이 되어 자신들의 의문에 스스로 답을 했다. 권위Authority, 야망Ambition, 불안Anxiety, 무성Asexsual, 매력Attraction, 동행Accompany, 생존Alive ...이 모든 A는 실은 우리의 A이기도 했다. A는 이 세상의 사람들 만큼이나 많았다. 작가는 어쩌면 그것을 노린 것이 아닐까. A라는 부호를 소쉬르의 기호체계로 보자면 알파벳 A라는 기표 하나에 얼마나 많은 기의가 가능한가. 어떤 사람은 보자마자 혈액형을 떠올리기도 했을 것이고, 어느 걸그룹의 노래제목을 연상하기도 했을 것이다. 이처럼 독자들 뜻대로 다의적 해석이 가능한 의미작용을 원했다는 생각이...이제서야 드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나의 부호로서 A는? 당장 무엇하나 내세울 게 없는 나...분명 이후가 중요할 것이다. After, After....


After A

이야기가 끝이 났다. 중세 유럽의 고성 내부 나선형 계단을 한참이나 올라갔더랬다. 작가는 외롭다(Alone)고 말했고 나는 돌아온 가슴속에 무언가가 일어났다.(Arise)  삶과 죽음, 여성과 남성, 신념과 배신, 집단과 개인, 조직과 독립, 사건과 진실, 비밀과 폭로...내 안에서 서로 상반되는 가치들이 저도 모르게 여러 개의 굴뚝을 세워가며 서로 키재기 경쟁을 하고 있다. 그녀들의 어머니들은 공예공장의 관광용품 인형의 눈썹을 붙이며 인공(Artificial)의 굴뚝을 세우고 있었고 어머니의 아이들은 그 굴뚝에 감람나무 이파리를 문 비둘기와 고글을 쓴 파란 꼬마펭귄을 그려 넣었다. 하지만 그것들도 진짜(Authentic) 가 아니긴 마찬가지였다. 비가오면 굴뚝이 스러지고 난 들판에 자연의 정화가 시작되듯 이제 우리네 가슴에 맺혀있던 죽음의 정화가 시작될 시간이다. 대립의 분진과 이기의 악취와 위선의 오수가 사라진 그곳에 들판 가득 코스모스가 하늘 거릴 것이다. 살아있다는 것은 살아남은 것보다 고마운것. 화자가 생존한 이유가 어머니가 살려준 이유이듯 화자가 살아가야 할 이유는 이후에도 다시 이야기가 시작되어야 할 이유일 것이다.

문득 화자가 지니고 다니던 흰 지팡이가 떠오른다. 어떤 삶을 살아도 방향감각을 상실하지 말아야 할 제 3의 눈으로서 작가는 사회적 사건을 복원하였고 화자는 자신의 사건을 복원하였다. 이제 내 사건을 기다릴 차례다. 눈뜨고도 장님이 되는 세상에서 방향성을 잃지 않고 진실만을 짚는 방법은 무엇일까.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아무것도 몰라도 절대 진정성을 잃지 않는 것, 진정으로 희망을 버리지 않는 것, 진짜배기 굴뚝하나를 영원히 마음에 박아 넣는 것이 아닐까. 그렇게 내 가슴에 진실의 지팡이 하나 오롯하게 세워두고 싶다. 이 작품은 진실을 가르쳐 준 것이 아니고 진실을 느끼고 보는 눈을 가르쳐 준 것이었다. 그것은 혹시 진실이 무엇인지 알아내지 못할지라도 영원히 잃지 말아야 할 우리 가슴속 소중한 눈인 것이다.

살아있는 동안엔 다시는 넘어지지 않을 지팡이에 조금은 덜렁이는 오늘을 걸어본다. 설령 다시는 짚고 싶지 않을 땅이라도 두렵지 않을 나만의 눈을 만져본다. 어제의 흔들림이 못내 기꺼웁다. 내일도 살아있다 하면 진실로 내딛을 수 있기를. 그 걸음 분명 고마웁기를. 그 마음 오래오래 변치 않기를.


<덧붙임>

알파벳 A의 타이포그래피를 Application 하였다.
출처가 분명치 않다.
폰트에 네이밍 해준 값으로 치고 용서를 바란다.
리뷰 쓰면서 글자와 그림짝짓기가 제일 즐거웠다.
Artist와 Author는 Audience의 Apology를 원치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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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영의 지리산 행복학교
공지영 지음 / 오픈하우스 / 2010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나에게 '공지영을 말하라' 하는 일은 당신의 '이삼십대를 서술하라'는 주관식문제와도 같다. 90년대가 나의 이십대였고, <도가니>를 읽은 것이 작년이니 근 이십년간 그녀는 사실상의 내 큰언니와 다름없었다. 학교로 치자면 바로 내 윗세대 386 운동권에다가 여성으로 치자면 결혼과 육아의 선배에다가 직장으로 보아도 남성이라는 우월적 존재와 늘 대적해야 하는 같은 위치로서 그 시절 정신적 멘토이자 카운슬러의 역할을 담당했다. 그때는 그러려니 했는데 지금와 생각해보니 세대와 성별을 넘어서 그녀는 우리시대 문학의 습관에 다름 아니었다. 문단은 연이어 베스트셀러만을 써내놓는 작가와 독자를 약간 하위레벨로 제쳐두는 경향이 있는데 독자는 그럴수록 차기작에 집착하는 행보를 보이므로 나만해도 공지영의 이름이 붙은 책이라면 일단 작품성과 내용에 상관없이 사고 본다. 그렇기에 이번 역시 거의 무의식적으로 장바구니에 집어 넣었는지 책이 내 손에 도착한 날 나는 주문자가 나인지 전표를 보고서야 확인하고 말았다. 헌데 책 한권 읽는 시간도 늘 빠듯하기만 해 그저 가방에 넣고만 다닌 작품도 많았던 그녀의 책을 이렇게 리뷰를 써보기로는 이번이 처음이다. 그땐 화장실 가서 한번 울고 책 한번 쓰다듬고...남 몰래한 사랑이었는데 이제야 답장을 하는 것 같아 새삼 눈가가 촉촉해진다. 지금 막 덮은 책 한권이 아닌 그동안의 세월과 내가 읽어온 그녀를 말하고 싶어 이토록 가슴이 달뜨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 책은 내가 그동안 그녀에게서 받아온 위로의 방식과는 좀 달랐다. 아마 그녀도 나도 시간이 흐른 탓일 게다. 우린 그렇게 나이들을 먹고 있었다는 사실, 그녀는 나를 알 리 없건만 그간의 세월이 이렇게 흘렀다는 사실이 자못 대견했다. 이야기의 무대인 공간이 도심아닌 시골자락이어서 그런지 가슴이 저리기 보다는 오히려 가슴이 자라나는(?)듯 마음이 포근해진 탓일까. 본인이 이야기 했듯이 '나를 키운 건 8할이 상처'라는 말을 나는 내 공식처럼 써먹었었고 '아무리 먼지만한 상처도 내 것이 되면 우주만큼 아프다'는 문장은 거의 매일 수첩에 적다시피하며 살아왔는데 이번엔 책을 덮고 처음으로 빙긋이 미소지었다. 그냥 세월견디고 한참 뒤 마주하면 나도 모르게 솟아 나오는 반가운 눈물, 그런 웃음이었다. 산전수전 다 겪은 그녀의 유머에 그만 달려가 손이라도 덥썩 잡고 싶을 만큼이었다. 나도 지금은 이 책 읽고 많이 웃고 있다고 인사라도 건네며 유치하게 지리산 정상을 배경으로 사진도 찍고 사인도 받아보고 싶었다. 그렇게 섣부른 오해일지 모르나 지난날의 '상처'가 요즈음의 '행복'으로 피어난 건 아닌지 싶었다. 그간에 보여준 세상에 대한 원망이나 회한이 어쩐지 덜해 보였다고나 할까. 어쩌면 내 원망이 줄어 든 것은 아니었나 싶긴 하지만.

자신의 인생이야기가 아니고 남의 인생을 바라보는 이야기라서 그런 것인 지도 모르겠다. 벼랑끝까지 내몰린 남의 입장이 되어 보았기에 같이 눈물 훔치고 같이 욕하더라도 다시 돌아와 '상처'와 '행복'의 무게를 조율할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랬다. 다들 죽고 싶거나 죽을만한 아니면 죽어야 할 상처들을 누가 더 라할 거 없이 모질게도 짊어지고 나타난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그들은 결국 행복해졌다. 살려고 하면 죽고 죽기로 하면 산다고 행복을 내려놓자 행복이 스며 든 것이다. 그들이 대단한 일을 해내고 무엇을 성취한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내 눈엔 누구보다도 자신의 모습으로 자기 자신을 성취한 사람들로 보였다. 내 어머닌 늘 작은 것에 행복해 하라고 하셨는데 그 작고 소박한 것들은 모두 자기로부터 나와 자신을 이루고 있었다.

그들은 왜 많고 많은 곳 중에 지리산에 간 것일까.
무엇하며 어떻게 살았기에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거기, 그들을 찾아가는 것일까.

죽어야 할 불행, 죽지 못할 행복

지리산...도시에 살면서 한 번도 그곳을 불러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한번쯤 지리산으로 들어가고 싶지 않았던 순간이 있을까. 없다고 하는 사람은 아마도 지리산을 모르는 사람임에 틀림없다. 직장인에게 지리산은 스님이 되거나 수녀가 되기엔 종교적 믿음이 약하여 산속으로 들어가 지팡이 하나짚고 도사처럼 속세를 잊고 살고 싶다는 뜻일지어다. 도시에 바둥거리며 낙오되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지만 내 자리는 더 이상 없어 이제 어디로 가야할 지 잠시 생각하고 싶다는, 아니 아무 곳도 생각할 수 없다는 발걸음일 게다. 지리산으로 간다는 건 모든 걸 버렸다거나 모두가 나를 버렸다는 말일 게다. 여기, 자신도 모두를 버리고 세상도 자신을 버린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었으니, 그것은 옛날 이야기도 남의 이야기도 아닌, 지금 사는 오늘의 우리와 다르지 않은 사람들의 이야기였다. 이상하게도 모두들 미리 정해져 있었던 운명처럼 한 곳에서 조우해 우리앞에 나타난 걸 보면 그들의 역할이야말로 지리산에 따로 배정되 있었던 것은 아닐까 싶다.

이 책에는 저마다 눈물없이는 들을 수 없는 사연으로 막다른 절벽에 내몰린 사람들이 차마 산목숨 끊을 수 없어 귀농한 지리산 자락의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두 명은 확실히 시인이고 서너 명은 스님이고 두세 명은 음식점 주인, 그 외 사진사도 있고 도사도 있고 목수도 있다. 시인의 부인도 있고 그들이 키우는 개와 물고기, 닭들도 있다. 가끔 마을에 등불을 밝히는(?) 가수도 드나들고 전직 기타리스트도 돌아온다. 처음부터 지리산에 계시었던 한평생 나무만 심어온 할아버지와 그 나무와 함께 자라온 딸도 있다. 이들은 1년에 50만원이면 먹고 살 수는 있어 나머지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사람들이다. 이들이 날 때 부터 세상에 통달하여 안먹고 안입고 살았던 것은 아니나 지리산에 모인 이후론 그렇게 살 필요가 없었다. 그렇게 살기 싫거나 그렇게 살 수가 없어 간 곳이었지만 그렇게 살다보니 그동안 왜 그러고 살았나 싶은 것이다. 그들은 다소 느리고, 어지간히 게으르고, 얼마간 속터지지만 생명을 사랑하고 계절을 기다린다. 어줍잖게 살아보지도 않고서 그들을 무조건 미화하고 싶지는 않다. 여기서 커피한잔 하며 그들이 부럽다 말하는 나는 얼마나 웃길 것인가. 아무리 거지 같은 인생도 가만히 들여다보면 부러운 게 생길 수 있듯 단순히 내가 가지지 못한 것, 내가 느끼지 못한 것을 가졌다고 선망하고자함은 아니다. 이런 사람들도 사는데 나는 왜 하는 상대적 비교에서 오는 반성이나 알 수 없는 안도감도 아니다. 나는 그들이 부러운 것이 아니라 그들을 품었던 지리산이 신기하고 거기서 자라나는 신기한 행복이 대견하다. 꼭 지리산이어야 행복할 사람들이었던 것처럼 아주 오래전부터 기다려온 약속이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이것은 누구나 다 지리산에 간다고 되어 지는 문제는 아니고 처음부터 지리산에 간다는 결심과 지리산일 수 밖에 없는 선택 자체가 이미 다시 행복할 수 밖에 없다는 지리산적 수사학을 가질 수밖에 없는 문제인 것이다. 즉, 지리산에서 살 운명이라 함은 이미 비지리산에서 불행을 겪었을 수 밖에 없는 전제적 조건이 성립되어야 하므로 그는 더없는 불행의 끝에서 행복을 찾은 사람들인 것이다. 그다지 죽을만큼 불행하지도 않은 주제의 우리가 결과만을 놓고 현상을 부러워 할 자격이 될 리가 만무한 사안인 것이다. 그런데 우린 얼마나 쉽게 그들을 부러워하고 그런만큼 여기를 아쉬워 하나. 그들이 느꼈던 행복에 조금이라도 더 다가가 비슷한 심정을 느끼고 싶은 나를 고백한다. 그들로부터의 행복이지만 내 행복이 거기 숨어있을지 모른다 여긴 내가 부끄럽다.

다정한 시인, 행복한 작가

이 책의 양대산맥인 버들치 시인과 낙장불입시인은 법없어도 살 사람들로 우리같이 법이 없어야(?) 살 사람들을 시종일관 웃기고 울리는 지리산식 페이소스를 선사해 주신다. 시인은 정말로 누구보다도 지리산이 가장 잘 어울리는 직업이 아닌가. 그러나 애석하게도(내가 시인과 연애를 해봐서 아는데) 시인과는 연애만 해야 할 사람이 아니겠는가. 나는 아줌마들과 늘 하는 이야기지만 시인과 사는 부인을 존경해야 한다고 주장한다.(그렇다고 나를 존경하라는 말은 절대, 아니다. 우리 아저씬 가정을 위해 시를 포기했다.) 그런 면에서 낙장불입 시인에게 이불 한장 들고 나타난 고알피엠여사에게 심히 고개숙이련다. 시인의 부인은 자신의 이름을 어느 별, 어느 꽃보다도 더 벅차고 아름답게 불러준 그 한 번의 시를 한평생 가슴에 지니고 살면서 나머지 세월을 용서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시인은 유독 세상의 모든 생명에 감동하고 눈물짓는다. 보통 사람들은 이 감수성을 그저 피상적으로 이해하고 그가 쓴 시를 읽을 때만 끄덕이곤 하는데 시인과 사는 사람은 세상에 태어나 하필 시를 쓴다는 건 씻을 수 없는 원죄로까지 생각되는 가혹한 형벌에 가깝다고 느낀다. 말더듬이에 가까우신 버들치 시인도 집에서 기르던 물고기와 닭이 죽으면 바로 며칠 앓아 눕는 여린 심성을 보여주지 않았던가. 마음을 다치면 그 몇 배로 몸이 망가지고 마음이 가라앉을 때까지 도저히 일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이 바로 시인이다.

언젠가 나는 겨울 한낮에 시인에게 전화를 했다가 어쩐 일인지 그가 울먹이며 말을 잇지 못하고 전화를 끊길래 무슨 큰일이 일어났나 싶어 전화를 다시 하였지만 좀처럼 받지 않는 것이었다. 십 여분 후에 다시 전화를 걸었더니 저쪽에선 통곡에 가까운 울음소리가 들려와 내 가슴은 애가 탈 지경이었다. 이미 대화는 불가능해 그의 자발적 신호를 기다릴 수 밖에 없었던 나는 한 시간이나 후에 그의 신호를 받을 수 있었는데 그 사연은 절대 누구에게 쉽게 말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니었다. 바로 베란다에 벌레 한 마리가 천천히 자신을 향해 다가 오길래 반사적으로 그 녀석을 밟아 죽여 버렸지만 곧 그 녀석이 혹시 자신의 전 생애를 걸고 누구를 찾아 나서는 길이었다든지, 누군가 그 녀석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 시간이었다면 자신은 그녀석의 모든 희망을 죽여버린 것이 아닌가 싶어 너무 미안해서 울었다는 것이다. 자신이 무어라고 단지 발짓 하나로 느릿하게 희망을 이동하던 또 다른 생명을 그렇게 간단히 밟아버릴 자격이 있는 것인지...시인은 자신의 발밑에 깔려있을 벌레를 확인하기 싫어 한참을 베란다에서 울었다고 한다. 그렇게 시인은 보통사람과 같다가도 일 년에 한 두번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로 온몸을 다해 울고는 했다. 그때 시인을 지리산으로 보내지 못했던 건 내가 지리산으로 갈 수 없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앞서 말했듯이 이번엔 남의 인생을 관망하는 시점이라 한결 수월하고 슬프지는 않지만 결코 쉽다거나 여운이 잔잔하지만은 않다. 그녀 특유의 청승(?)조의 분위기가 줄었다는 것이지 유난히도 엉덩이를 들썩이게 하는 그녀의 바람잡이문체는 읽는 내내 지리산을 향한 흑심(?)을 선동하며 지금당장이라도 짐싸서 떠나고 싶은 울컥한 심정을 좀체 가라앉혀 주질 않는다. 간혹 가다 지리산에서 돌아가거나 사라지는 사람들의 사연을 말할 땐 역시 감성소설가답게 그 폭풍감동을 주체할 수 없도록 만드는 여전함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사업실패로 낙향한 L선배의 절절한 사랑이나 수경스님의 잠적 이야기도 소설이 아닌 눈물없이 들을 수 없는 실화였던 것. 그들은 분명 지리산에 자신들의 모든 정한을 잠시 내려두고 지리산이 다시 자신을 품어줄 날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녀가 술친구들이 많고 정이 많아 위로부터의 유명인사들 보다는 아래로부터의 각계인물(?)들과 친분이 많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실명(이것도 알려고 하면 얼마든지 가능한)만 언급되지 않았지 인물사진까지 오픈하며 아예 그래도 이렇게 행복한 자신의 친구들을 세상에 보란듯이 자랑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싶을 정도로 그들간의 인간관계가 부럽기도 했다. 본인도 말했듯이 꽁지작가는 참 행복한 작가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가장 벅차고 놀라웠던 건 정말로 행복학교가 존재했었다는 사실이었다. 처음엔 신문에 연재한다고 할 때부터 내용도 모르고 꽁지작가가 지리산에 학교를 차렸나 싶었는데 그녀가 차린 것은 아니지만 주인공들은 실제로 지리산의 야심찬 다정다감 프로그램을 구성해 전국의 학생들을 가르치는 수업도 하게 된 것이다. 다정도 병인 양, 잘 짜 놓은 각본처럼 하필이면 대부분 예술가들이 많아 시도 쓰고 사진도 찍고 기타도 치고 그림도 그리고 도자기도 굽고 가구도 만들면서 사람사는 이야기와 빼어난 풍광을 벗삼아 소박한 행복을 가꾸고 있었던 것이다. 말이 '소박하다'이고 글이 '고즈넉하다'는 것이지 내보기엔 그 마을이 도심 어느 동네보다 시끌벅적하고 뜨거워보였다. 혼자 사는 버들치 시인이 아프다고 동네여인들 하나둘씩 죄다 죽을 해다 놓고 가는 바람에 부엌엔 죽집을 차려도 좋을 정도로 그릇풍년이 들었다 하니 그 뜨거운 김자락에 내 도시의 삶이 헛헛해지는 까닭일까. 신문사 기자에서 노숙자가 되어 가족과 생이별을 하고도 빨치산이었던 아버지의 흔적을 찾아 본능적으로 지리산에 입성한 낙장불입시인이 고알피엠 여사와 새살림을 차리고 알콩달콩 살아가는 이야기에 내 사랑이 샘이 나는 이유일까. 도자기 기타리스트와 보컬 고알피엠여사와 버들치 시인의 작사로 이루어진 섬지사 동네밴드의 공연이 아이들처럼 천진난만해 보여서일까.

상처는 행복의 씨앗

'난 악양(지리산의 다른 이름)에 산다'고 합창하는 그들이 남일 같지 않게 저릿도 했음이다. 사람냄새란, 역시 마음이 먼저 알아채는 감각이었다. 나는 자신들이 연주해 놓고도 스스로들 눈물 글썽이는 마음에 비로소 '상처'가 '행복'이 되는 각자 저간의 사정들이 떠올라 같이 눈물지었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공지영을 '상처'로만 만났던 지난 시절의 내가 떠올랐다. 돌이켜보면 이십대를 지나면서 '상처'라는 단어와 개념을 알게된 건 다분히 그녀의 공이 컸다. 나는 그녀를 통해 내 상처가 무엇인지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사람은 상처를 받았다고 자신의 상처를 인식하고 그것을 바로보기 힘든 존재 아니던가.

나는 여중, 여고, 여대를 나와 학교생활만 십오년 남녀차별을 모르고 살다가 사회에서 처음으로 도처에 숨어있는 가부장적, 군대적, 권위적 직장체계를 실감하게 된 경우이다. 제일 이해할 수 없었던 건 군필자가 신입으로 입사했을 때, 그러니까 내가 직장생활 3, 4년차이던 시절의 일이다. 밤낮없이 야근과 철야를 꼬박 3년을 견디고 나는 그 분야의 경력을 쌓은 터였다. 그런데 어느 날 나이는 나보다 한 살 정도 많은데 군대를 다녀오느라 입사가 나보다 늦었던 한 다리 건너면 알만한 친구가 교수추천으로 입사를 했다. 그 친구가 입사한 직후 우리는 나란히 승진을 했는데 내 월급은 그 친구보다 약 십만원이 더 적었던 것이다.(같은 것도 아니고) 나란히 승진한 것도 이해하기 힘들었는데 어찌하여 3년 동안 뺑이치며 회사의 주요(?) 인력으로 실무를 쌓아온 나라는 여자가 군대에서 전혀 실무와는 상관없었던 이력을 쌓은 그 친구라는 남자보다 급여가 적은 것인지, 당시의 억울함은 이기적이기만 하던 나에게 큰 상처가 되고도 남았음이다.

이 부분은 우리나라에서 민감한, 군필자에 대한 직장우대 조건을 자꾸 지적하는 일이 되기에 자칫 남녀간의 평등 및 대결문제로 확대되기 아주 좋은 사안이었다. 그런데 나는 가족중에 군대를 다녀온 사람도 없고 남자친구도 군대와는 거리가 멀어 그 시절 '군필자 가산점 제도'와 같은 문제에 가차없이 적대감을 드러내는 청춘이었다. 내가 억울한 것은 내 지난 3년이었다. 물론, 그 친구도 지난 3년이 억울할 것이다. 그러나 그 친구의 국방의무기간 3년을 보상해주는 것이 내 직장경력 3년을 무시해야 하는 일이 되어서는 안되는 일 이라 생각했다. 같은 직위라고는 했지만 업무를 처음 배우는 단계인 그에게 나는 실무를 가르쳐야 하는 입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한달 지나 가져가는 금액은 그 친구보다 적었다는 사실이 나로 하여금 비로소 내가 여자임을 깨우쳐주는 좋은 계기가 되었다. 바로 여자에게 있어 실무경력은 그다지 의미가 없다라는 회의를 들게 했기 때문이다. 나는 남자들이 같은 기간에 꿈을 펼치지 못하고 나라를 위해 젊음의 세월을 바친 시간에 대한 보상이 필요없다는 것이 아니라 보상의 방법이 여성을 차별하는 도구로 쓰여진다는 것에 분개했다. 그전엔 거의 울 일도 없었던 내가 상처를 된통 받아 들고 서점으로 달려가 집어든 것이 그녀의 책들이었다. 그 위로에 대한 기대로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시집이라는 철벽같은 문화를 겪으면서 또 습관처럼 그녀의 책을 집어 들었다. 그런데 올 한해 불혹의 강을 지난히도 건너가던 그 마지막 하류쯤에서 또 그녀를 만나 모든 것 버리고 속된말로 '지리산에나 들어갈까' 생각도 해보던 차에 이 책을 집어 든 것이다. 민망했다. 그래서 이제는 내가 웃는다. 그녀는 당신은 오지 말라, 행여 견딜만하다면 제발 오지마시라 조용히 타일러 주었다.

아직은, 괜찮다

책 덮으며 전에 없이 행복해지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던 작품이었다. 내 행복엔 그냥이 아니라 꼭 '다시'라는 단서가 붙을 것이었다. 나는 이제 이 나이에 걸맞는 상처와 그로 비롯된 그럴싸한 사연을 훈장처럼 지니고 살아가게 되었다. 그만한 사연하나쯤 없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내 사연이 생기고 나서야 알게 된 몽매한 인간이기도 했다. 많은 행복을 손에 쥐고 있었으면서도 얼마나 더 행복해 지기 위해 발버둥 쳤던가. 이 책을 보면서 도저히 아물 것 같지 않은 상처마저도 행복으로 잉태해 낸 사람들에게 내 좁은 소견의 행복이 얼마나 이기적이었는지 다시금 깨우친다. 물질이 떨어지면 곧 불행이 시작되곤 하던 속세의 습관이 얼마나 무섭도록 가여운 것이었는 지 부끄러워진다. 작년에 우린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 전 재산을 처분해 도심 어느 곳에 외양좋은 술집을 꾸며놓고 어이없게도 준비되지 않은 미래를 모두 걸었었다. 일년 만에 우린 겉멋만 잔뜩 머금은 채 거리로 나앉았고 각자의 책임을 통감하며 서로를 반목하는 것으로 스스로에게 벌을 주었다. 서로 실패를 말하지 않고 상처를 기억하지 않으며 각자 견뎌보기로 한 것이 벌써 일 년이 다 되어간다. 우린 잘 견딘 것일까. 그럭저럭 눈물이 난다.

그래서 그녀가 한없이 고맙다. 이번에도 역시 내 상처를 외면하지 않는 큰언니가 맞았던 것이다. 이제, 나 섬진강변의 벚꽃보다 흐드러지고 형제봉에 만개한 철쭉보다 활짝이고 싶다 해도 괜찮을까. 다시 일출도 보고 싶고 피아골의 단풍도 보고 싶다 말해도 좋을까. 오십 줄에 다가선 그녀가 보기엔 이런 나도 한참 젊어 보이겠지만 인간은 애석하게도 제 나이로서만 젊고 늙음을 자각할 수 있으니 지금 나로선 여태까지 전부의 시간으로 가장 나이든 슬픔인 것이다. 아직은 차마 지리산에 갈 용기가 없어 이 책으로 그들의 행복을 엿보기 하며 내 소박한 행복을 다시 꿈꾸어 보고 싶다. 도시가 서럽고 사람이 미워져 자꾸 계절에 기대는 내 자신을 잘 달래어 보련다. 나쁘지 않다. 아직은, 아직은 괜찮지 않은가. 나 비록 온 몸 불사르는 혁명의 이름은 못되었지만, 갈비뼈 어긋나던 시인은 못되었지만, 툭하면 꿈꾸는 자살도 못 이루어 보았지만 아직은 여기서 견뎌볼 터이다. 지은 죄가 아직이라 섬진강은 나를 외면할 지 모르겠다. 지리산은 나를 품어주지 않을 지 모르겠다. 여기 소망을 핑계삼아 나는 그쪽 지리산을 내 쪽 가슴 한 구덩에 심어 놓을 터이다. 언젠가 지리산이 거기 있어 나 여기서 견딜 수 있었다고 꼭 다시 웃으며 이야기 할 그날을 기다릴 것이다. 그동안 날 기다려 주어 고마웠다, 나 오지말라 말해 준 당신이 서운치 않다 말할 것이다.

나 좀 더 사랑하고 좀 더 느긋하고 좀 더 부지런하게 그러나 이 모든 거, 거길 잊지 않으며 울지 않으며 잘해낼 수 있을까. 다시 실패가 두렵지 않아 세상이 야속치 않아 뼛속깊이 그 회한 다 풀지 않아도 씩씩하게 살아갈 수 있을까. 아아...자신이 없다. 또 얼마안가 무례한 도시인에, 냉혹한 도시에 서운타 바보같을 나이기에. 어쩌면 그때까지만 이라는 걸 너무도 잘 알고 있기에. 그래, 지리산으로 오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지리산도 있다는 것일 게다. 그러므로 지리산을 갈 수도 떠날 수도 돌아갈 수도 올 수도 있다는 것일 게다. 그것은 행복할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일 게다. 그리고 그 행복을 운전하는 주인공은 바로 우리 자신일 것이다. 내일도 나는 바람보다 못한 것에 온몸이 떨리고 낙엽보다 가벼운 것에 눈물지을 지 모르지만 당신들의 섬진강 물줄기 하나, 당신들의 화전잎 하나로 희망을 걸어본다.

나는 소망한다. 상처도 행복이 되는 그날의 이야기를. 희망으로 다시 웃는 이곳의 지리산을. 다시 내 희망이 잦아들 그날 다시 그곳이 그리워질 그날 나는 또 그녀를 집어 들 것이다. 큰언니의 답장을 찾아 늘 그래왔던 오늘처럼. 거의 무의식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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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1-15 11: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1-15 13: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한비자 (양장) - 제왕학의 영원한 성전 글항아리 동양고전 시리즈 2
한비 지음, 김원중 옮김 / 글항아리 / 2010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속이 시원하다. 머리가 개운하다. 내가 원했던 건 아마도 '원칙'이었던 것 같다. 나는 최근에 개인적으로 억울한 일을 당했다. 지인들은 하나같이 내가 혐의를 의심하는 자에게 어떤 조취를 취하라 말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내가 지목한 사람에게 피해를 당한 사람은 또 있었다. 사람을 믿었던 건 내 실수였지만 살면서 믿음이 잘못이 될 때 나는 며칠 끙끙 앓아 버리는 습관을 버리지 못한 인간이었다. 나에게 친분을 전했던 사람이라 더욱 믿기도 어려웠고 애꿎게도 막 당도한 계절이나 괜한 나이 탓을 해대곤 했다. 그러나 그 일은 밝히기 보단 묻어야 할 일에 가까웠고 증거또한 희박해 결과적으로 상대가 아닌 나 자신만 점점 피폐한 영혼이 되가는 꼴이었다. 소설도 좋고 에세이도 시도 좋았지만 나는 좀 더 강력한 처방이 필요했다. 어떤 본능은 평소의 취향을 잊어버리게도 만드는 것. 이 책은 요즘 화두가 되고 있는 '정의'나 '도덕'에 관한 인문서적을 택하는 대신 우연찮게 집어든 제왕학의 고전이다. 그런데 제대로 정의로왔다. 울분에 찬 어느 비주류 학자의 집요한 외침이 군주도 법조인도 정치인도 아닌 내 울분을 차근차근 위로해 주었다. 나는 마치 내가 군주가 되거나 억울한 신하, 아니면 어리석은 백성이라도 된 듯 고개를 끄덕이었다. 감동은 없었지만 감분(感奮)만큼은 충분한 독서였다.


의심스런 이야기

요즘 TV에선 '대물'이라는 드라마가 인기이다. 서점가에선 지난 여름 '정의'가 화두가 되기도 했다. 얼마 전 케이블방송의 슈퍼스타 K라는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우승을 한 친구는 국회 국정감사장에서 '우리가 추구해야 할 공정사회의 모델'로 언급되기도 했다. 일련의 흐름으로 볼 때 우리사회가 경제발전이나 민주화를 외치던 시기를 지나 인간다운 삶, 국가다운 국가의 역할을 진지하게 성찰하는 단계로 진입했음을 시사하는 사회현상으로 여겨진다. 그런데 정작 정치인의 자질이나 정의의 실현, 공정한 검찰을 요구하는 우리 대중의 심리이면에는 어떤 기준이 자리잡고 있는 것일까.

내가 이 책을 처음 알게 된 시기는 우연히도 지난 G20 정상회의 개최기간이었다. 방송에선 연일 G20 정상회의 의장국가로서 우리가 세계 주요국가의 반열에 올랐음을 시사했고 무사히 치러낸 지금 새로운 한국, 새로운 미래에 들어선 한국과 한국인에 대한 자부심이 한층 높아진 국력과 세련되어진 국격으로 포장되어 연말을 향하고 있었다. 의장국이라는 프리미엄 덕분인지 언론에서의 홍보때문인지 이명박 대통령과 김윤옥 여사의 정상외교도 예전 국가원수들에게서 느껴지던 겸손함보다는 당당하고 자신감넘치는 이미지로 부각되는 듯 했다. 올해는 동계올림픽과 월드컵, 아시안게임 등의 굵직한 스포츠 행사도 있었고 어쨌거나 대외적으로는 '국가의 격'이 한 단계 상승한 느낌을 받는다. 하지만 대내적으로는 중산층이 몰락하고 서민경제가 붕괴되고 열심히 일하고 번대로 저축하면 생활이 나아질 것이라는 기초적인 희망은 사라진 한해였다. 적어도 서민임을 자처하는 내 입장에서는 국가와 개인이 따로 논다는 생각이 드는 2010년이었다.

거기다가 나는 올해 애석하게도 사십대를 시작하게 되었다. 많이 흔들렸다. 어찌보면 우리 세대들은 성장환경에서 국가적 패배감을 잘 모아둔 종잣돈처럼 지니고 자라났다. 그래서인지 딴에는 애국심도 남다르고 민주화에 대한 열망, 사회정의에 대한 기대 또한 살아온 이력만큼이나 열정적이지 않을까 싶다. 어떤 분야든 우리세대가 움직이면 그 기운엔 변화가 감지되곤 했다. 서점에서 책 한권을 사더라도, 음반이나 영화, 공연을 선택할 때에도 우리의 획일적인 관심은 금새 사회현상에 반영되는 실정이라 할 수 있다. 늘 평균적이던 일상에 변화를 추가해 주는 사람들인 것이다. 일례로 올해 이상현상의 하나로 치부된 하버드대 마이클 샌덜 교수의 <정의란 무엇인가>를 가장 많이 구매한 독자층은 사십대 남성이었다. 그들이 책을 집어 들거나 TV앞에 앉으면 적어도 수치상의 변화를 유발한다. 하지만 그 열정만큼이나 세상을 향한 목소리가 높지는 않아서 이들은 마케팅에선 잠재고객이거나 끝까지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주도면밀한 부동층으로 분류된다. 속된말로 좀 음흉한 세대들이라 할 것이다. 나 역시 그 세대에 진입을 하게 되어 올 한해 내 개인은 물론이고 한국이라는 내가 살고 있는 국가에 대해 누구보다도 음흉한 생각을 시작하게 되었다. 나이가 들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9시 뉴스를 보게 되고 나라의 운명과 자신의 미래를 연결짓게 되는 것 아닐까.

나는 우리사회에 여진히 후진국형 시스템을 벗어나지 못하는 분야가 다름아닌 '사법'분야라고 생각한다. 그 분야의 전문가는 아니지만 법이 집행되는 과정에서 형이 행사되는 과정에서 보통의 시민이 보기에는 그다지 정의롭다고 생각하지 않는 바이다. 그 객관적 기준을 자세히 모르지만 애초에 그러한 기준이 있었는지 조차도 의심스럽다. 이것은 수사와 재판이 정의롭게 시행되고 있는가에 대한 보편적인 질문에 해당할 것이다. 그렇다고 속시원히 답해줄 사람이 없다는 것도 모르지 않는다. 혹시 나처럼 누구에게 묻기도 뭐하고 그렇다고 이대로 답답하기엔 속터지는 독자들이 있다면 이 책은 정말 개운한 선물이 되줄 것 같다. 이 책은 동양의 군주들이 늘 베게머리에 두고 새겼다는 한비자의 법치이론에 관한 고전이지만 고리타분한 법적인 이론들이 주는 아니다. 쉬운 말로 풀이된 중국의 인물과 설화, 문학과 철학, 그리고 한비자의 주장이 강물흐르듯 유유자적 흘러간다.

사연을 살펴보니 한비는 살아생전에 그토록 주창한 자신의 법치사상이 왕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았을뿐만 아니라 가장 친한 동창의 계략에 의해 살해당한 억울한 운명의 소유자였다. 책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억울하게 죽어갔던 일화가 마치 자신의 운명을 예견이라도 하는 듯 세세히 나열되어 있다. 군주는 음모를 오해하여 신하를 죽이고, 신하는 권세를 이용해 군주를 죽이고, 아내는 남편을, 아버지는 아들을, 친구는 친구를 죽이는 사례와 그 연유를 자신이 펼쳐는 논리의 근거이자 그 시대의 교훈처럼 낱낱이 밝히고 있다. 어찌보면 한비는 한비자를 엮으면서 어느 정도 자신의 마지막을 예견하지 않았나 싶을 정도로 목에 칼이 들어와도 내 생각에는 변함이 없고 이러한 내 말을 귀담아 듣지 않으면 언젠가 한번은 꼭 망하리라하는 그 목소리가 사뭇 비장하게 들려왔음이다. 책을 덮고 난 지금 가장 가슴에 와닿는 건 자신의 목소리에 대한 고집이다. 비록 변역체이긴 하지만 아무도 들어주지 않았던 세상을 향해 나는 이만큼이나 고민했고 그런 만큼 누구보다 애절했다는 집착같은 것이 느껴졌다. 더 많이 고민한 사람의 목소리는 언제나 더 의심한 사람의 마음을 울리는 것 아닌가.

냉정어린 이야기

책은 ‘말하는 것을 어려워 하라’는 <난언難言>을 시작으로 총 32편의 글이 600페이지를 육박하는 분량에 담겨져 있다. 처음에 부담스러웠던 것도 사실이지만 첫 장만 읽어보면 재미난 옛날이야기처럼 술술 넘어가는 '넘기는 재미'도 이 책의 매력이라 알려드리고 싶다. 그 매력의 근원에 바로 '입은 삐뚤어져도 바른말을 하겠다'는 부조리와 정치술수에 관한 직언이 끄덕없이 버티고 있다. 실제로 한비는 심한 말더듬이였다고 하는데 이렇게 유창한 논리를 유려한 문장으로 풀어 내는 것을 보니 삶의 모순과 그의 회한이 겹쳐져 숙연해 지기도 했다. 충신으로서 학자로서 자신의 견해를 표명하고 싶었을 한비의 이 열등감은 더욱 완벽한 문장을 구사하게 하는 최고치의 자극으로 작용한 듯 하다. 풀어가는 논리에 한치의 빈틈이 없으면서 도저히 빠져나갈 반론의 여지를 허락치 않기 때문이다. 각 편마다 주로 앞부분에 자신의 견해를 요약하고 의심의 여지를 불식시키기 위해 다양한 사례(역사적 사건및 인물인용, 속담, 설화나 우화 비유등)를 부연 설명한다. 그리고 마지막엔 다시 한번 결론을 강화하며 자신의 논리를 문학적으로 표현한다. 지금으로 본다면 거의 서른 편이 넘는 논문이나 사설을 연구해 낸 것과 같다고 볼 수 있다. 글을 읽으면서 내내 통쾌한 기분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은 겉으로 보기엔 긴가민가해도 하나같이 사회모순과 인간의 추악한 이기심들을 정확하게 찾아내는 날카롭고 예리한 시선때문이었지 싶다. 특히 앞부분에 주로 소개되는 군주의 역할로서의 원칙이나 도리, 신하의 유형들은 한비가 말하는 오늘날이 과연 춘추전국시대의 오늘인지 2010년을 살고 있는 우리의 오늘인지 세월의 차를 오로지 문체로만 느낄 수 있을 뿐이었다.

한비 사상의 큰 틀은 나라의 흥망성쇠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군주의 통치술이 위치한다. 우리는 여기서 서술하는 일관된 시선이 군주인 위로부터의 관리자 마인드인 것을 다소 불쾌하게 생각할 여지는 있다. 하지만 당시 약소국이었던 나라에 속한 한비로선 절대군주의 역할과 도리가 곧 한나라의 성공도 멸망도 가져온다고 보았기에 어떤 과정으로 나라가 망하게 되었는 지를 밝히고 알리는 것이 곧 그와 같은 전철을 밟지 않는 일이라 여긴듯하다. 가장 많은 분량으로 반복되는 부분은 군주와 신하와의 관계인데 신하를 총애하다 보면 반드시 그 군주를 위험에 빠뜨릴 것이며 끝내 군주의 자리는 바뀔 것이라는 논리를 무섭도록 반복, 서술한다. 군주는 신하가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알 수 없도록 허정虛靜과 무위無爲를 뿌리로 두어야 하며 절대 자신의 취향을 드러내면 안된다 주장한다. 오늘날 우리는 대통령은 물론이고 기업총수의 취향까지도 속속들이 알고 있는 실정으로서 나도 모르게 허를 찔리는 심정이었다. 알게 하면 반드시 알게 된다는 것이 한비의 주장이며 새를 잡으려면 몸을 숨기라는 결론을 내고 있다. 신하를 평판이나 추천에 의해 등용하지 않고 반드시 법률에 근거할 것이며 등용된 신하역시 직분에 넘치지 않는 업무수행으로 군주의 권세를 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한비는 외교술이 너무 뛰어나거나 학문의 깊이가 예사롭지 않아 지혜로운 신하들이 자신의 지위를 믿고 판단하는 국정의 모든 것을 경계하였다. 준엄한 법과 엄격한 형벌로 오로지 절대권력을 행사할 사람은 군주가 유일함을 천명한 것이다.

그동안 중국의 유가와 도가사상을 중심으로 仁이나 德을 인간이 추구해야 할 본연의 자세임을 학습해온 우리로서는 신선하고도 놀라운 이론이었다. 인간본성의 어둡고 이기적인 면을 집요하게 밝혀내며 권력의 본질을 냉혹하게 꿰뚫어 본 한비의 통찰력은 어찌 보면 비인간적, 비윤리적인 면모를 다분히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한비가 주장하는 사악한 신하에는 직분을 넘어서 백성에 仁을 베푸는 재상이나 눈물에 이끌려 제대로 형벌을 행사하지 않은 관리도 포함된다. 말이 많은 신하만큼이나 할 말을 하지 않는 침묵의 신하도 예외가 없다. 법으로 정한 분량만큼만 일하고 처음 언급한 대로만 일하라는 것이다. 융통성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는 참으로 냉철한 ‘공정성’ 이었다. 그런 만큼 군주가 빠지기 쉬운 잘못에도 한비가 제시하는 기준은 살벌하다. 작은 충성에 반응하거나 눈앞의 이익에 손을 들어 주거나 충언과 모략을 구분하지 못한다거나 심지어 음악이나 무희에 빠지는 것 조차 나라를 망치는 태도라 비판한다. 나라만 망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결국은 더 강해진 누군가에게 죽임을 당한다는 예언을 빼놓지 않는다. 절대권력을 가지고 있으려면 그만큼 철저하게 자신에게 엄격하고 공정해야 한다는 의미로 해석되었다.

죽도록인(必死) 이야기

그런 가운데 한비 자신의 생각이 솔직하게 담겨있으며 훗날 자신의 미래를 예견하는 듯한 <고분孤憤 : 홀로 분격하다>편은 언제든지 생명이 위협할 수밖에 없는 충신의 비애를 절절히 느낄 수 있었다. 통치술에 정통하고 법도를 잘 준수하는 인재는 정론을 내세워 군주의 편협한 시각을 바로잡으려 하기 때문에 군주의 총애를 받기도 힘들고 다른 신하들의 눈에 거슬리는 존재이기 때문에 어떻게든 제거될 위험에서 벗어날 수 없기에 늘 울분에 차 있다는 심정적 토로였다. 즉, 모함으로 죽거나 덮어 씌울 죄가 없을 경우에는 자객의 칼에 죽는다는 의미심장한 결론은 바로 동창의 모함으로 사약을 받은 그 자신과도 정확하게 중첩되는 구절이었다. 한비는 자신을 총애하는 진시황의 신하인 동창의 모략으로 자살아닌 자살로 최후를 맞았다. 그렇다면 한비의 친구는 비열한 신하였고 진시황은 공정하지 않은 군주였을까. 한비에게는 죄송한 말이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한비는 아무런 잘못이 없었지만 타국의 충신으로서 자국에 들어와 정세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다 주장하는 한비의 친구 역시 한비못지 않은 논리가 있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문제는 타국에서까지 탐낼 정도의 지식과 혜안을 가지고 있었던 한비의 총명함과 재능이 화를 부른 것이 아닐까. 진시황은 그가 죽어서 남긴 한비자를 보고 통치를 하는 것이 살아서 자신보다 더 큰 시야를 가지고 자신을 보필하는 한비보다 더 이롭다고 생각했을지 모를 일이다. 한비의 이론에 의하면 군주나 신하 누가 되었건 자신에게 이득이 될 때 상대를 죽인다고 하였으니 말이다. 물론, 한비에게 한 수 배운 나의 소견이다. 역사는 재능이 있는 사람을 억울한 죽음으로 기록하는 습관이 있다. 성격상 입바른 소리를 많이 해온 나는 그의 억울함이 남일같지 않았음에도 진시황과 그의 신하가 한비를 죽게 한 심리가 한편 이해되기도 했다.

우리 사회 어느 조직이건 실세라는 보이지 않는 세력자들이 있다. 이들은 조직의 총수가 누가 되었건 세력을 유지하며 실질적인 이득을 챙기는 부류로서 정도를 주장하는 사람들을 어렵지 않게 몰아낼 수 있는 자신들만의 패밀리를 형성하고 있다. 보통의 서민이 보기에 그들은 거대한 벽과도 같아 아니라고 틀렸다고 말하기엔 너무 멀고 높기만 한 것이 사실인 것이다. 한비는 이 실세들의 패밀리를 군주를 위협하는 신하군으로 보고 이들에겐 군주가 없어지는 것이 자신들에게 더 많은 이익을 가져오기 때문에 군주를 해치는 것이라 설명한다. 세상이 바뀌었다고는 하지만 자신에게 생기는 이익을 위해 군주가 아니라 자식이나 부모, 배우자까지도 죽이는 이치는 아직도 유효하지 않은가. 한비도 언급했지만 이들은 상대가 더 밉고 그들을 덜 사랑해서가 아니라, 신하들이 더 잔인하고 더 포악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그들이 죽음으로써 이득이 생기기 때문이라 강조한다. 한비는 시종일관 군주도 신하에게도 그 어떤 인간적인 기대는 하지 않는 것으로 보였다. 인과 의와 예와 정을 앞세운 자들의 학문을 명분으로서 이용하지 말라고 경고한다. 사람을 믿지 말라고 하는 한비의 충언은 많은 군주들이 어떻게 죽임을 당했는지 증언하는 것으로 동의를 구하고 있다. 한비가 생존했던 춘추전국시대에는 자고나면 왕이 바뀌고 나라가 빼앗기는 혼란의 시대였다. 철저히 이해관계에 의해 움직이는 인간들을 다스리기 위해 한비는 군주가 이용해야 할 법을 거울이나 저울, 자와 컴퍼스, 쇠망치등의 도구와 같다 말한다. 그가 제시한 정확하고 객관적인 법치, 공사의 구분은 우리사회 공정성의 기준과 다름 아닌 것이다.

우리 사회가 벌받을 사람에게 정확히 벌을 주고 상받을 사람에겐 정당히 상을 주는 것만 제대로 시행하여도 어쩌면 공정을 화두로 내세운 책자들이 베스트셀러가 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자신에게 전혀 이득이 없을 것 같은 ‘바른 말하기’가 시간낭비이거나 체력소모인 일거리로 치부되진 않을 것이다. 상벌이 적절치 못해 생기는 결과는 법치국가에서 바로 법치를 불신하게 되는 요인이 된다. 누군가는 부당한 이익을 얻고 누군가는 정당한 벌을 받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한비는 법치의 권위자로서 모든 결정권을 쥐고 있는 군주의 자세를 까다롭게 지적했다. 아무리 이치상 완전하다고 생각되는 의견도 반드시 채택되지 않는 것은 군주의 어리석음때문이라 꼬집는다. 결국 설득하는 신하(자신)의 어려움을 언급하면서 현명하고 어진 신하가 죽임을 당하고 굴욕을 피할 수 없음을 군주의 우매함으로 귀결시킨 것이다. 이는 한비가 돌리고 에두르고 다른 비유를 몇 차례 들어 가면서도 결국 그 시대의 군주들에게 꼭 하고 싶은 이야기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말을 더듬어 자신을 무시하는 그들에게 자신의 목소리에 귀기울이게 하는 방법은 목숨을 걸어서라도 글로써 기록하고 남기겠다는 의지로 해석되었다. 새삼 오늘, 그의 일침이 무엇보다 통쾌한 까닭은 무엇때문일까. 벼슬아치는 법을 공평하게 하는 자이며, 나라를 다스리는 자는 공평함을 잃어서는 안된다는 그의 목소리가 더 크게 느껴지는 것은 무슨 이유인가.

공부하는 이야기

한비자에는 인문학적 논점들을 사설조로 전개하는 부분외에 이야기로서 주장을 역설하는 부분이 있다. 바로 노자의 도덕경을 풀이한 <해노解老>와 노자의 사상과 비교한 <유노兪老>, 민간전설과 우화를 한비식으로 재구성한 <이야기의 숲, 설림說林>, 설화의 내용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내저설>과 <외저설>에 이르는 옛날이야기들이다. 전체 분량의 반 이상을 차지하는 이야기 퍼레이드는 어렵고 지루할 수 있는 고전읽기의 부담을 완화시키면서 이야기꾼으로서의 한비의 문학적 재능을 엿볼 수 있다. 한비는 유가와 묵가의 사상은 반대하였으나 도가사상에는 우호적이어서 무위나 관조의 지혜를 군주의 도리로 해석하기도 했다. 욕심이 없고 마음이 고요한 상태는 결국 자신을 위한 법치라 할 수 있다. 법과 군주를 떠나서도 마음이 현명해지는 대목이었다. 욕심으로부터 나오는 근심, 만족할 모르는 데서 시작되는 재앙, 자신을 수양함으로써 얻어지는 덕성이야 말로 진실이라는 가르침은 내 자신을 보지 않고 자꾸 먼저 달리고 있는 경쟁자, 높은 곳에 올라가 있는 누군가를 바라보며 마음을 잡지 못하는 현재의 내 모습을 보기좋게 꾸짖는 듯 겸허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스스로 자신을 보는 것이 밝은(明) 것이며 스스로를 이기는 것을 강하다(强) 말하는 건 군주에게만 해당되는 진리는 아닌 까닭이었다.

이야기의 숲, 설림說林에서는 주로 위험에 처한 사람들의 궤변과도 같은 지혜를 속담풀이 하듯 소개한다. 누가 되었건 사람을 보기 좋게 속이는 방법을 제시하며 역으로 속은 사람들의 어리석음을 강조하는 것 역시 군주의 지혜를 강조하는 방법의 하나로 활용한 것은 아닐까. 군주의 위기대처 능력을 설파하려 많은 이야기들을 예로 들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참 웃고 나서 거울을 보니 이야기의 주인공이 나라는 생각이 들게끔 하는 전략은 간접화법이면서 결국 직언에 동조하게끔 하는 정성스런 필력으로 느껴졌다. 설림을 좀 더 층위를 나누어 체계화 한 것이 내저설과 외저설인데 후반부에 전개되는 이 형식은 모두 과거를 반추하고 현재를 직시하며 따라서 미래를 예언하는 공통의 순서를 따르고 있다. 내저설에는 군주가 신하를 다스림에 있어 구체적인 술책과 조심해야 할 사항을 먼저 요약한 후 하나하나 설화를 들어 증명한다. 이 부분은 한비의 철학과 사상이 이론과 방법으로 정리된 이 책의 백미라 할 수 있다. 아마도 내가 조직의 우두머리라면 이 부분은 두고두고 외우다 시피 할 정도로 그 논조가 날카롭고 예리하다. 외저설에서는 주로 언행의 효용성을 이야기 하였는데 묵자같은 중국의 유명한 이론가들의 인물을 예로 들면서 화려한 변론과 다스리는 것과의 괴리를 주장한다. 사실 유익하긴 해도 전체 분량에서 가장 난해한 부분이기도 해 학술가로서 연구적 성과라고도 할 수 있는 한비의 총체적 결과물로 느껴지기도 했다. 다른 부분에 비해 시원한 결론을 내지 않고 질문 그 자체로 끝나는 이야기가 많았던 것은 다른 사상가들을 언급함에 있어 신중함과 예를 갖춘 것이라 생각되었고 한비 스스로도 다른 사상의 실용성과 공리성을 계속하여 공부하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문헌이었다.

한비자의 마지막 문헌인 다섯가지 좀벌레, <오두>는 표면적으로는 나라를 갉아먹는 좀벌레와도 같은 다섯 가지 종류의 사람들을 열거하고 있지만 시대가 달라지고 상황이 바뀌면 다스리는 방법도 달라져야함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오늘날 우리가 한비자를 어떻게 읽어야 할 지를 최종적으로 가이드해주는 지침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 여기서 그 유명한 수주대토(守株待兎)’라는 고사성어가 등장한다. 이 말은 원래 그루터기에 목이 부러져 죽은 토끼를 보고 농부가 쟁기를 버리면서 그루터기를 지키며 다시 토끼가 나오기를 기다린다는 뜻이다. 당시 그 시대에서도 낡은 관습, 영원불변한 규범을 지키고 시대의 변화에 대처하지 못한 사람을 비유하는 한비의 혜안을 상징한다 할 것이다. 세상은 진화하는 것이니 시대가 변하면 방책도 바뀌어야 한다는 주장을 마무리 하면서 자신이 내세운 법치사상도 절대불멸의 진리는 아니라는 것을 은연중에 시사하는 겸손함과 예를 선보였다. 한비는 대단한 예지력과 통찰력으로 미래를 내다본 애국자였으며 그가 주창한 통치술은 현실정치에 기초가 되는 지속가능한 발전모델이었다.

마음잡는 이야기

대통령중심제의 나라에 살고 있는 시민으로서 나는 그동안 사회정의를 떠올릴 때 반사적으로 그 나라의 리더가 겹쳐지고는 했다. 그런데 내 서운함을 어디서부터 무엇을 기준으로 원망을 가져야 하는 지는 알 수가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올해가 가기 전에 제왕학의 기본이라는 <한비자>를 만난 것을 필연의 행운이라 생각한다. 나는 정치인도 법조인도 아니지만, 내가 처한 우리 나라의 현실 속에서 남이 아닌 내 목소리로 사회를 이야기 할 수 있는 잣대를 빌릴 수 있었던 것이다. 한비의 통찰은 결코 너무 멀거나 높지 않았다. 다분히 현실적이고 냉철해 융통성이 없다고 느껴지기 까지 했다. 하지만 대부분 공감할 만한 원칙이었고 그것은 오늘을 살아가는 이 시대의 많은 울분을 위로할만한 지침이기도 했다. 우리는 그 시대의 상황과 배경을 전적으로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이해는 다시 '대물'도 '정의'도 '공정수사'도 '대통령'도 '국격'도 각자 마땅해 보이는 제자리를 찾아 그들의 위치에 긍정하며 돌려 놓는 너그러움을 선사했다. 서두에 언급한 내가 당했다는 억울한 일도 세상의 이치로 잘 배치할 수 있었다.

안팎으로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는 독서였다. 고전은 그렇게 내 흔들림의 기둥이 되어 현실의 풍화를 막아주는 힘이 있다. 선인들의 고민과 해결과정을 엿봄으로써 비로소 내 고민이 별다르지 않았음을 깨우치는 범상함이 있다. 당장 내 고민이 해결되고 눈앞에 변화가 생기는 것은 아니지만 내 근심의 출처를 바로보고 같은 우를 범하지 않도록 자세를 다지게 하는 오래된 반가움인 것이다. 그런데 이 기본적인 고전 독서의 원리와 효과도 세월의 흐름에 따라 달라지는 것은 아닐까. 이 책을 집어든 상황이 벌써 나의 심리를 방증하는 것이겠지만 10대나 20대 때 한비를 만났더라면 과연 그의 주장에 공감하며 감흥 받을 수 있었을까.

새삼 세상에는 유익한 책도 많지만 세월의 흐름에 따라 읽는 사람에 따라 의미가 달라지는 책은 많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불혹(不惑)에 대한 생각도 그렇다. 마흔이 되기 전까지는 외부로부터의 잡다한 유혹에 흔들리지 않는 나이라는 생각이 주였지만 막상 마흔을 넘기고 보니 그 흔들림의 중심에는 바로 내가 가장 커다랗게 자리하고 있음을 비로소 깨닫는다. 내 흔들림이야 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커다란 유혹인 것이다. 사람으로서 역할도 달라지다 보니 독서의 끝에 도착하는 세상도 그 의미가 조금은 달라진다. 만약 내가 평범한 가정주부가 아닌 조직의 대표나 그룹의 리더로서 이 책을 읽었다면 부하나 조직원과의 관계를 기점으로 열심히 리더쉽을 연구하는 태도를 유지했을 것 아닌가. 책을 대하는 목표는 달랐지만 나에겐 막연한 기대가 구체적인 교훈으로 돌아왔다는 사실이 스스로 대견한 시간이었다.

이제 겨울이다. 이제야 지난 가을과의 이별에 정신을 차리고 자꾸 달력을 들여다 보는 내가 실감이 된다. 나는 올 한해 얼마나 성숙한 것일까. 나도 모르게 지난 시간을 들추게 된다. 산다는 건 이렇게 옛날 이야기를 돌려보고 오늘을 확인하며 내일을 기다리는 일이 아닐까. 아마도 어제의 꺼진 불을 기억하며 내일의 등불을 다시 밝히는 일인가 보다. 하지만 먼저 내 마음의 등불이 켜지지 않고서는 절대 내일이라는 미래에 맞설 용기가 없는 것도 우리네 인생일 것이다. 세간의 바람으로 번뇌의 균열로 마음의 등불이 꺼져갈 때 지금처럼 말더듬이의 목소리를 기억하고 싶다. 미처 다하지 못한 애닮픔과 오래된 간절함을 그리워하고 싶다. 심산한 마음이 켜지도록 비로소 등불이 밝아오면 그땐 아마 마음이라는 세상도 한껏 커져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마음이 커지면 내가 사는 지금 이 세상도 조금은 넓어 보이지 않겠는가.

 
 

 


성인은 다른 사람이 나를 사랑해 주는 것에 의지 하지 않고서
나에 의지해 스스로를 위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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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0-12-03 20: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비자>가 마키아벨리의 <군주론>보다 내용면이 더 좋고 읽을만하다던데,,
가격이,,^^;; 이런 책은 도서관에서 빌려서 읽기에는 그렇고 구입해서
틈틈히 읽어보면 좋을텐데 말이죠^^

한사람 2010-12-03 22:24   좋아요 0 | URL

아...전 군주론은 못읽어 보았지만..
한비자는 생각보다 친근했습니다^^
정말 그 두꺼운 분량이 술술 넘어가는 것이 신기하더군요 ㅋㅋ

어떻게 중국에는 그런 사람이 있었을까 싶기도...했습니다..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