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026
김진명 지음 / 새움 / 2010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1. 김대중은 없어도 대중은 있다.
"그들이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겠소?" (김학호, 前 중앙정보부 감찰실장)
잠시 그 시절을 이야기 해볼까 한다. 나는 열 살이었고 3학년 이었다. 그날은 마치 오후부터 정전이라도 된 듯 거리에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다. 요즘처럼 학원이나 과외공부가 없었던 그때 나는 방과 후 늘 같이 놀던 친구가 우리집으로 달려와 소식을 전해주어(이 친구는 오랜동안 방송국에서 근무했다. 세상 참) 대통령이 죽었다는 사실을 처음 접했다. 대통령도 죽는 사람이라는 걸 비로소 피부로 체감한 것이다. 아주 오래전이지만 나는 그날 친구의 표정을, 친구와 맞잡은 두 손을 잊을 수 없다. 내가 살고 있는 나라의 대통령이 저격당했다는 사실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 내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 지 가늠할 수 없는 나이였지만 막연히 이제 '김일성이 처들어 오면 어떻게 하나' 수준의 공포와 두려움만은 또렷이 기억한다. 우린 고무줄을 하면서도 '무찌르자 공산당'을 노래하는 철저하게 반공으로 무장된 어린 소녀들이었다. 그날 이후 TV는 지금으로 치면 全 예능 프로그램과 드라마를 일체 방영하지 않았고 근 한 달간 장송곡 분위기의 음악만 들었던 기억도 생생하다.(사회는 임성훈이었다) 나는 내가 유년기였던 70년대 10년을 그 이후의 어떤 10년보다 소중하게 생각하며 그 시절의 추억을 지금 감수성의 시원(始原)으로 추정하는 과거지향의 사람이라 할 수 있다. 특히 76년 서울로 이사온 이후는 일년 단위로 당시 유행하던 서울의 대중문화를 설명할 수 있는 꽤 기억력이 좋은 기록통이기도 하다. 그런 내게 대통령의 죽음은 당시 유일했던 오락문화인 TV의 죽음과도 같았고 그 해 연말까지 그 분위기는 이어져 학교에서도 누구하나 제대로 큰 목소리를 내는 사람은 없었던 그야말로 쉬쉬 '죽어 지내는' 시절에 다름아니었다. 그해 말 1979년도 가수왕은 '제 3 한강교'의 혜은이였고 다리밑의 강물은 무심하게도 흘러 흘러만 갔다.
우리 식구는 강남개발이 시작되면서 붐을 이룬 강남의 서민 아파트에서 서울생활을 시작했고 그해 79년은 내가 태어나 백화점이라는 곳을 처음 가본 해이기도 하다. 바로 집앞에 뉴코아라는 쇼핑센터가 생겼는데 1층엔 'since by 1979, 롯데리아'라고 적힌 신기한 햄버거 가게가 연일 북새통이었고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끝까지 올라가면 맨 윗층 레코드 가게에선 아바의 댄싱퀸(Dancing Queen)이 지겹도록 흘러나오곤 했다. 대통령이 살해되었고 쿠테타가 일어났지만 당시 열 살 소녀의 눈에 비친 한국은 서울은 강남은 크게 대수롭지 않아보였다. 물론 이제 내가 어른이 되고 돌이켜 보니 사람은 아는 만큼만 보인다고 그땐 그랬을 것이고 또 무얼 안다고 해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겠지만 아무리 기억해 봐도 세상은 변한 게 없었던 것 같다. 다음해 신군부가 정권을 잡고 컬러시대로 넘어가면서 학교에서도 반공보다는 데모를 예방하고자 하는 이념교육에 더 비중을 두는 경향을 보이면서 우리에게 박정희와 김재규는 차츰 잊혀져 갔다고 기억된다. 당시 어른들을 기억해볼 때 사회전체가 그 사안을 언급하는 분위기를 확실히 지양했다는 느낌이다. 과거의 상처는 서둘러 봉합하고 앞날을 위해 잊을 건 잊어야하는 책임이라도 있는 사람들 같았다. 그러니까 김재규라는 이름은 얼추 육영수 여사를 암살한 문세광과 그 의미가 크게 다를 바 없었고 그의 유약한 이미지는 그때그때 편할대로 연민의 대상도 되었다가 또 역적도 되었다가 어떨 땐 영웅이 되기도 하는, 그러나 총체적으로는 불쾌한 과거를 반추하는 대표적인 치욕의 이름에 불과했던 것이다.
우리 세대는 70년대 말부터 80년대 중반까지 대체로 '6백만 불의 사나이', '소머즈', '원더우먼', '두 얼굴을 가진 사나이' 등의 미국 외화 시리즈의 미래적이고도 정의로운 주인공에 무작정 감동하며 자랐다. 인터넷과 게임이 등장하지 않았던 그 시절의 TV란 시청률이라는 통계치를 논할 필요조차도 없는 절대적 매체였다. 초등학교때부터 분단국가로서의 국가적 패배감을 잘 학습한 덕에 끝에 가서는 결국 승리하는 정의의 나라, 영웅의 미국은 별다른 의심없이 원대하게 자리잡은 하나의 자연스런 가치관이었다. 중학생이 되자마자 '람보'식의 허리우드 영화의 개봉관에 새벽부터 줄을 서는 우리이기도 했다. 감수성이 가장 예민할 시기인 청소년기에 미국의 팝가수를 선생님 삼고 팝송을 교과서 삼아 영어단어를 외웠다. 마이클 잭슨과 스티비 원더, 신디로퍼등의 미국 가수가 아프리카 난민 자선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불렀다는 'We are the world'는 그 시절 소풍 장기자랑의 단골메뉴였다. 무엇보다 우리는 세계고 세계는 하나라는 이 노래는 얼마나 정의로왔던가. 솔직히 말해서, 미국은 언제나 더 멋지고 근사했다. 내가 기억하는 한국으로는 80년도에 어느 라디오 드라마의 주제곡인 <창밖의 여자>를 열창하며 오빠로 귀환한 조용필이 유일했다. 생각해보니 우린 조용필에 열광하면서도 빌보드 차트를 외우고 다녔다. 사람들은 오랜 세월 억눌려있던 한이 분출되는 듯한 가창법으로 심금을 울리는 한 가수에 마음을 빼앗겼지만 같은 시기 마이클 잭슨의 문워크 댄스와 마돈나의 뮤직비디오를 누구보다 따라 하기도 했다. 잃어버린 유신의 심장은 조용필에게 위로받고 광주의 상처는 춤추며 잊거나 슬그머니 덮어버렸다. 마음과 몸이 따로 논 것이다. 나는 아직도 80년, 내가 4학년일 때 여름방학을 앞두고 친척들이 서울에 올라와 도란도란 저녁 식사를 하던 어느 저녁 TV에선 '미스 유니버스대회'라는 미인대회를 우리나라에서 처음 개최한다고 대대적인 생중계를 하던 장면을 생생히 기억한다. 숀 웨델리라는 공주님같이 생긴 금발의 미국미녀가 1위를 차지하던 그날은 5.18 광주민주화 운동이 일어난 지 불과 오십일도 되지 않은 시점이었지만 우린 그저 그녀의 늘씬한 다리가 부럽고 파란 눈이 예쁘기만 할 뿐이었다.
그 후로 우린 성장했다. 발전했다. 그들이 역사의 소용돌이치는 격동의 시간을 숨가쁘게 지나올 시기에 나는 햄버거를 먹고 팝송을 외우고 영웅에 열광하며 성실히 어른이 된 것이다. 그들이 미국에 이용당하고 배신당하고 감시당하는 바와는 상관없이 30년이 지난 지금 이렇게 기성사회의 버젓한 한명의 대중이 되었다. 지난 30년 동안 내가 살았던 동네는 화려하게 재건축되었고 79년 이후 패스트 푸드점은 헤아릴 수 없어졌으며 마이클 잭슨은 죽었지만 우리 가수들은 한류바람을 일으키며 국가의 위상을 높이고 있다. 나는 그동안 대중의 한명으로서 이 모든 것을 누리며 크게 잘못하고 살아오진 않은 것 같다. 잘난 대중도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우매한 대중도 아니라 생각했다. 그런데 오늘 30년을 이어온 내 대중의 경력에 무언가 큰 기반이 허물어짐을 감지한다. 30년이 지난 지금 새삼 과거의 진실을 아는 것이 그것을 몰랐던 나에겐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이 책은 나에게 당신은 어떤 대중이었고 앞으로 어떤 대중으로 살아갈 것인지 묻는 것만 같았다. 그것은 역으로 그동안 내가 어떤 대중이었는지 스스로 깨닫게 하는 시간을 제공했다. 굳이 국민이 아니라 대중이라고 한 것은 이 책에서 가장 기억나는 하나의 문장 때문이다. 우리나라에 김대중은 있어도 대중은 없다고 말한 어느 장군의 뼈아픈 한마디 때문이다. 책을 덮으며 나는 무엇을 원하는 대중인지를 자신있게 대답하는 것만이 이 책을 읽었다고 말할 수 있는 자격으로 느껴지는 독서였다. 그랬다. 이 책은 나는 이러한 작가인데 당신은 어떠한 독자요, 이렇게 묻고 있었다.
그래서 아마도 나는 그의 작품을 멀리 했던 것은 아닐까, 싶다. 내가 그동안 김진명의 소설을 택해오지 않았던 이유는 진실을 알게 되는 것이 두려웠던 것이 아니고 알고 나서도 달리 어찌할 수가 없을 것 같은 무력감이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미안한 이야기지만 별로 더 알고 싶지 않았다. 대충 골자만 들어도 굴욕적으로 느껴졌기에 30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가 우리 역사의 상흔을 소상히 확인하고 싶지 않았다. 내게 있어 79년은 롯데리아이지 10.26이고 싶지 않았다. 물론, 이 책은 역사보고서가 아닌 소설이라는 거짓말이 허용된 문학의 범주안에 있다. 팩트(fact)를 도입한 픽션(fiction)인 것이다. 하지만 그가 말했듯이 ‘거짓말(fiction)을 하는 대신에 거짓말을 통해 보이지 않는 배후의 진실을 찾아내라는 것이 세상이 소설가에게 준 사명’이라고 했기에 그의 거짓말은 진실을 찾고 보여주기 위한 방법에 불과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가 가장 분명하게 애국하는 방법은 이 거짓말로 진실을 말하는 수밖에 없었음을 안다. 이것은 진실로 진실하기보다 얼마나 힘든 일인가. 대략 진실의 무게가 막중해 보이는 문학을 대할 때 독자는 멈칫거리게 되는 바인데, 나 역시 거짓말은 거짓말로만 치부하고 싶은 독자였다.
어찌되었건 우린 이제 어엿하게 G20 정상회의를 개최하는 나라가 되었다. 일본에선 우리 걸그룹의 군무에 열광하고 김연아, 박태환은 세계를 빛낸 올해의 선수들이 되었다. 우린 원전기술도 수출하면서 어느덧 아프리카에 기부하는 나라가 된 것이다. 적어도 우리세대들이 만성병처럼 지니고 온 국가적 열등감은 많이도 사라져 보인 한해였다. 그런데 국격이 높아 질수록 명치끝이 체증에 걸린 마냥 때가되면 여지없이 불편해지는 한 구석이 있는데 그건 아마도 분단 트라우마로 늘 잠재된 한반도의 평화에 대한 불안이 아닐까, 싶어진다. 바로 엊그제 광저우 아시안게임에 환호하던 어느날 오후 어이없게도 연평도에 포탄이 날아온 그 순간처럼 말이다. 알고는 있지만 그것이 언제인지 다만 알 수 없는 우리의 또 다른 반쪽, 다시 꺼내고 싶지는 않아 제발 지우고 싶은 과거지만 늘 현재로 더 선명해지는 우리의 현실, 외면할 수 없는 우리의 공동체 운명일 것이다.
그래서 '10.26'이라는 숫자는 그 운명을 제대로 인식하기 위한 소중한 문서파일의 비밀번호처럼 느껴진다. 문서를 확인하거나 열어보지 않거나 모두 우리의 자유지만 이 모두에게 알려진 번호는 언제나 우리의 심장을 똑바로 겨냥하고 있다. 우리는 이 번호를 알면서도 좀처럼 문서를 확인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지 않았을까. 알려진 비밀번호는 이미 비밀이 아닌 것 같은 생각, 새로운 비밀이 나타나도 이미 문은 열렸기 때문에 비밀로서 가치는 상실되겠지 하는 생각, 비밀번호를 입력하기만 하면 되는데 그동안 그냥 지나쳤던 건 내가 궁금하지 않은 비밀이라는 생각이 더 컸음이다. 알아야 하는 비밀일지는 몰라도 알고 싶은 비밀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것은 어쩌면 이미 비밀이 아니기 때문이기도 한데 그럼에도 영원한 비밀일 것이므로 모른 척 해온 대중들이 바로 우리인 것이다. 얼마나 편한가, 비밀이었기 때문에 우리는 몰랐다 하면 되는 일이었다. 아니 비밀로 놓아두면 더 좋을지 몰랐다. 그러니 혹시 알고 싶지 않았던 것은 내가 어떤 대중인지 말하고 싶지 않은 이유때문은 아니었을까. 그것은 안다면 어떤 대중인지 알고 있다는 문제와도 같은 이야기이기 때문에. 진실을 알고 나서는 그 어떤 대중도 그동안 진실을 원했다 말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에.
그렇다. 김진명은 대한민국의 대표적 대중소설가이다. 이 때의 대중은 무엇인가. 순수문학을 하지 않는 소설가를 칭하는 뜻이 하나요, 대중에게 많은 호응을 받고 있는 베스트셀러 작가가 다음이다. 나는 그들이 말하는 순수문학도 대중소설도 모두 읽어온 독자로서 편할대로 구분되어지는 의미에서의 '대중'이 정말 불쾌하다. 이런 대중 한사람의 기분과는 상관없이 누구의 대중과도 동의없이 대중은 불리어져 왔다. 그렇다면 문학에서의 대중은 순수하지 않은 사람들이란 말인가. 이 책을 보면 누구보다도 순수한 집단이 바로 대중으로 나오는데 말이다. 이 작품 역시 어떤 소설보다 순정해 보이는데 말이다. 애석하게도 우린 작년에 두 명의 전직 대통령을 잃었고 그중 한명은 '대중은 없어도 김대중은 있다'에 그 김대중 전 대통령이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에겐 김대중도 일반대중도 그 어떤 대중도 없는 것이다. 대중이 없다는 작가의 이 한마디는 대중소설가로서 참 뼈아픈 절규로 들렸고 대중의 한사람으로서 심히 자존심 상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계속하여 대중소설을 쓸테니(쓸 수밖에 없으니) 당신들은 제발 나의 대중이 우리나라의 대중이 되어 달라는 뜻으로도 들렸다. 나는 작가로서 해야할 소명을 다할 터이니 당신들도 대중으로서 똑바로 읽어달라, 하는 부탁조의 경고처럼 들렸다. 정신이 버쩍 드는 한마디에 그동안 나는 어떤 대중으로 살아왔나 시간이 길어지는 탓에, 이렇게 변명이 길었음이다. 이제 그의 대중이 아니 한국의 대중이 되기까지를 정리해보는 것이 그래도 아직 대중은 있다는 소심한 대답이 되지 않을까 싶다. '김대중은 없어도 대중은 있다.', 내가 대중임을 깨닫고 그것을 밝히는 작업이, 리뷰의 목적이자 결과인 이유이다.
#2. 완전범죄는 없어도 완전추리는 있다.
"이 변호사 같은 사람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경이롭기까지 하오." (재미 도박사, 필립 최)
이 소설은 표면적으로는 10.26 사건의 진상을 추적한다는 과거사의 진실찾기 형식을 취하고 있으며 추적하는 과정에서 모든 연관된 인물을 찾아 실낱같은 단서를 발견해 추론을 정리하는 '범죄의 재구성'단계를 이루고 있다. 재구성된 사건의 진실과 인물의 행적은 과연 오늘날 한반도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 의미를 받아들고서 어떻게 내일을 맞을 것인 지가 아마도 작가가 건네려는 최종 문제지일 것이다. 소설이지만 문학이라는 안전지대 안에서 독자에게 가장 무거운 짐을 안겨주는 장르임에 틀림없다. 예를 들면 어느날 갑자기 경훈이 우연히 받아든 한통의 전화처럼 우린 김진명의 고통스러운 이 보고서 한권을 받아들고 이것을 철저히 검토해 보아야 하는 기분이 드는 것이다. 전화한통에 미국을 접고 고국으로 날아든 경훈에 비하면 우린 비교적 쉽게 마음을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어쩐 일인지 고생으로 밥을 차리는 수고가 한상가득 차려진 밥상보다 차라리 나을지 모르겠다. 정성스런 밥상을 받은 다음 기운을 차린 밥심으로 주먹을 쥐어 본다면 이 소설은 결코 과거를 이야기 하는 소설은 아니지 싶다. 진실일지 모를 과거를 확인한 우리의 오늘과 미래앞날을 다짐하는 우리의 결의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즉, 나는 이 소설을 누구보다도 미래지향적인 이야기로 받아들였음이다.
법학을 전공했고 영어에 능통하고 문학과 예술을 사랑하며 미국에서 유학한 우리의 엘리트 경훈과 수연은 남북정상회담이 개최될 당시 이미 이립(而立, 스스로 서다)한 인물들로 얼추 내 세대와 동일한 젊은이들이었다. 경훈은 보스턴 최고의 천재 변호사로 수연은 하버드 캠브리지 광장에서 판소리를 불러 제친 멋진 유학생으로 등장해 각각 이성과 감성을 조화시켜 환상의 콤비 플레이를 펼쳐 보인다. 기실, 이들이 진실에 가닿으려는 노력이 결국 우리나라의 희망을 약속하는 일일 것이기에 이는 다분히 다음세대로부터 한반도의 미래를 소원하는 작가의 의도로 읽혀졌다. 더불어 같은 시기 같은 고민을 하지 못했던 내 자신을 반추해보며 부끄러움을 떨칠 수 없게 만든 인물이기도 했다. 수연은 고비때마다 경훈에게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하고 사건을 한발 물러서 통찰하게 하는 역할이었고, 경훈은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단서들을 한데 모아 마치 3차원 입체 퍼즐을 신기하게 끼워 맞추듯 비범한 추리를 도출해내는 재능을 선보였다. 나는 특히 경훈이 관상을 잘보는 인물로 설정된 것이 흥미로왔는데 이는 분석이나 추론은 물론이고 그것을 넘어서는 직관력이 뛰어난 인물로서 완벽한 물증이 없는 완전범죄마저도 경훈을 피해갈 수 없도록 절대능력을 부여하고자한 작가의 의도된 보너스로 생각된다. 얼마나 답답하고 분통이 터졌으면 차라리 역술을 이용해서라도 소설속 진실을 더 굳건히 하고자 했을까. 작가는 자신의 확신만으로 어떤 주장을 믿어 달라고 할 수는 없지만 모두가 끄덕일만한 상황논리를 제시한다면 설득력이 생기지 않겠느냐고 말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설득되지 않는 나머지 강심장들에게 믿거나 말거나의 칼자루를 쥐어줄 때 하고 싶은 한마디는 무엇일까. 때로는 내 두 눈으로 보는 것 보다 멀리있지만 용하디 용한 점쟁이의 한마디가 신앙처럼 힘이 실릴 때가 있지 않은가.
그런 면에서 신적인 힘을 겸비한 경훈이 죽어가는 노인의 전화를 받은 것은 거스를 수 없는 운명의 계시라 할 것이다. 어떠한 계기인 지 10.26이 상징하는 비밀의 단서를 전달받았을 최초 작가의 운명처럼 말이다. 작가가 이 운명을 모르는 체 넘어갈 수 없었듯이 경훈 역시 자신의 조국이 호출하는 신호를 외면하지 않았다. 목숨이 넘어가는 순간에도 참회하듯 자신에게 온정을 보여준 조국의 젊은이에게 전화를 걸었던 제럴드 현은 평생 정보공작 요원으로서 벌어온 전 유산을 수연에게 남긴다. 자신의 세대에선 비록 미국을 위해 한국을 배신할 수밖에 없었던 신분이지만 다음 세대인 당신들은 자신과 같은 불행을 겪어서는 안된다는 유언의 의미였을까. 제럴드 현의 유산은 수연과 경훈이 10.26의 사건을 재조사 하는데 쓰여 지는데 나는 한국의 정보를 조사하는 댓가로 받은 돈이 다시 한국의 진실을 찾는 비용으로 사용되는 것이 대단히도 마땅해 보였다. 다만 그 비용이 한 정보공작 요원의 서글픈 인생을, 한국의 아픈 현대사를 의미하는 것이기에 얼마나 목메이는 목숨값이던지 그것이 숙연했다. 그가 미국의 계획된 약물로 정신질환을 알아가면서 까지 지켜온 최상급 비밀의 값이 아니던가. 아니, 우리가 눈물로 되찾은 진실값 그렇기에 영원히 버리지 말아야할 다짐의 값일 것이다. 제럴드 현이 조국을 위해 헌사한 유산의 의미를 볼 때 이 소설은 그를 비롯해 비밀을 함구하고 사라진 많은 정보공작요원들의 죽음을 애도하는 헌정집이라는 느낌도 들었음이다.
조국으로 돌아온 경훈은 한국과 미국의 경계선에 있던 제럴드 현의 죽음을 파헤치는 것이 곧 김재규가 박정희를 죽인 이유를 밝히는 일로 생각하고 그와 관련된 사람들을 찾아 나선다. 제럴드 현은 10.26과 마땅히 관계되어야 할 최고위의 인물이었지만 10.26 시점에 철저히 배제되어 비참한 최후를 맞았기 때문이다. 경훈은 김재규를 탐문했던 수사관을 시작으로 제럴드 현의 주치의였던 로널드 숀과 그의 지인이었던 당시 경찰신분의 오세희, 그의 밑에서 김재규를 담당했던 브루스와 홀리건, 당시 중앙정보부 감찰실장 김학호 장군등의 인물을 좇아가며 사형장에서도 내 배후엔 미국이 있다고 절규한 김재규의 유언이 사실이었음을 차분히 그러나 충격적으로 입증하기 시작한다. 이 추적의 과정은 종점역이 이미 고지된 예정의 기차여행이라 할 수 있었지만 각 구간의 여정이 단 한순간도 편했던 순간은 없었지 싶다. 인물 한명 마다의 사연의 밀도가 높았으며 따라서 서사의 긴장감이 끝까지 유지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경훈의 완전추리를 위해 발휘된 작가의 완성도를 향한 집착에 나는 서서히 뜨거워지고 있었다.
#3. 애국은 없어도 애국자는 있다.
"나는 나의 조국을 위해서 일하는 것을 기쁘게 생각하오."
(美 정보 공작요원, 제임스)
한마디의 유언을 듣고 시작되는 위험한 여정은 결국 작가 자신이 진실을 찾아가는 행로와 방법을 소설로 기록했다는 생각이다. 그 과정에서 경훈은 누군가는 사고를 당했고 누군가는 실종되었고 누군가는 실직되었음을 확인하며 생존해 있는 사람들도 각자 자신이 담당했던 역할로서만 혹은 자신이 예측하는 몇 가지 추리로서만 사건과 인물을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과 마주한다. 조각조각 분해되어 은폐된 퍼즐을 한자리에 모아놓고 진실로 맞추는 몫이 작가의 대리인 경훈의 역할이었다. 주목할만한 사실은 경훈이 만난 사람들 모두가 자신이 속한 분야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프로였다는 것, 그들은 자신의 나라와 10.26에 대해 박정희와 김재규에 대해 소신있게 나름의 견해를 피력한다. 나는 사실 김재규가 박정희를 죽이고자 한 동기와 거사의 과정 및 결과, 배후인 미국이 김재규를 이용하고 철저히 배신한 사건의 진실자체 보다는 경훈이 물어 물어 만난 사람들의 다양한 목소리가 더 인상깊었다. 여행의 목적지보다는 여행하며 만난 사람들이 더 기억난다. 그들은 모두 자신의 나라를 위해 일했고 몸담은 조직에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애국자와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이 책을 쉽게 집어 들지 못했던 이유도 바로 애국과 민족이 지겨웠기 때문이기도 한데(우린 국가와 기념일가, 헌장을 외워 애국을 시험본 마지막 세대이다) 이들의 애국은 구태의연해 막상 지나쳐버린 잔소리 같았어도 책을 덮고 나니 은근히 번져오는 끈끈한 저력이 있었다. 피를 데우는 방법과 속도가 진부하긴 했어도 데우긴 데웠던 것이다. 하지만 애국자이기만 하면 모두 진정으로 애국하는 것일까.
정치적인 글쓰기를 예술로 만드는 일에 큰 관심을 보였던 조지오웰(1903-1950)은 그의 에세이(Notes on Natiolalism,1945)에서 애국주의와 민족주의는 전혀 다른 말이라고 한 바 있다. '애국주의(patriotism)'는 특정 지역과 특정 생활양식에 대한 애착이며, 그것이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것이라 믿되 남들에게 강요할 마음은 없는 것이지만 '민족주의(nationalism)'는 자신을 단일한 나라 또는 다른 집단과 동일시 하되 그것을 선악을 초월하는 것으로 간주하고 그것의 이익을 증진시키는 것만이 전부라고 여기는 것이라 한다. 즉, 애국주의는 속성상 군사적 문화적으로 방어적이지만 민족주의는 힘의 원리에 따라 공격적이고 경쟁적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민족주의자는 극명한 거짓이나 잔학행위등을 범하고도 자신이 무엇을 섬기고 있다는 의식 때문에 심리적으로는 자신이 옳다고 확고한 신념을 가진다. 민족주의적 충심이 개입되면 도덕과 정의에 대한 감각을 잃고 만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그렇게 본다면 미국은 애국을 앞세워 민족주의적 습성을 강요, 고집하는 강대국이었고 우리는 한민족이라는 원죄로 인해 애국이라는 감정에 저당잡힌 분단국이었던 것은 아닐까. 우리의 딜레마는 애국주의가 허용하는 만큼만 민족적일 수밖에 없는 분단의 현실에 있다는 것을 미국은 너무나 잘 이용하고 있는 나라인 것이다. 즉, 김재규는 미국의 민족주의로 애국을 하려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애국하진 않았어도 애국자이고 싶어했던 것이다. 그와 우리를 애국으로 이용한 미국을 보면서 도덕과 양심이 사라진 민족주의야 말로 위선으로 무장된 독재요 평화를 가장한 전쟁의 핵심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제럴드 현과 친분이 있었던 캐나다의 오세희는 자수성가한 사업가로서 경훈에게 이 나라의 이민정책이 더 활성화되어야 함을 강조하며 유대인과 맞먹는 한국인 특유의 핏줄근성을 강조했다. 그는 이 모든 것에 한국인이 조국과 역사에 대한 자부심을 잃었기 때문이라는 뼈있는 말을 한다. 돈과 땅이 있는 나라를 두루 살아본 사업가의 애국하는 방법이었다. 김재규에게 영어를 가르친 또 한명의 정보공작원 브루스는 김재규의 주한미군철수를 막아 달라는 부탁을 혼신의 힘을 다해 절규로 통역한 자신이야말로 한국에서 주한미군철수를 막아내어 한국인을 전쟁으로부터 지켰다고 큰소리를 친다. 미국 정부의 공무원은 대부분 약소국가에 대한 우월감을 행사하는 것으로 자신의 역할을 행사한 것이다.
이 책에서 가장 인상깊었던 인물 중 김재규와 모든 일을 상의하던 중정의 감찰실장 김학호 장군의 회한도 잊을 수 없다. 그는 내가 급소를 찔린 듯한 한마디 김대중은 있을지 몰라도 그냥 대중은 없는 거라며 첩보는 조작이고 그 희생자는 언제나 대중이라고 말한 인물, 중정의 제 2인자였다. 그는 김재규의 기일에 바에서 술을 마시다가 '통일이 된다면 사나이 한목숨 무엇이 두려운가' 노래를 흥얼거리던 애국자였다. 나는 안 죽는다 울부짖으며 부축해주는 경훈에게 변호사가 한밤중에 취한 노인을 일으켜 주다니 이 나라가 그렇게 된 나라냐고 묻는다. 자기만 살자고 화장실로 내뺀 경호실장 차지철을 그때 패죽이지 못한 것을 땅치며 후회한다. 김재규와 정부전복을 위한 도상훈련을 늘 연습해 왔기에 그로부터 '김학호, 시작해' 이 한마디를 못들은 것에 아쉬워하고 김재규를 향한 통한의 원망을 숨기지 않았다. 이 나라의 애(愛)국자는 슬프게 늙어 애(哀)국자가 되어 있었다. 그를 보며 나에게도 통일이 우리의 소원인 줄로 믿었던 어린 시절이 생각이 났다. 소원을 말해보라고 하면 순진하게도 배운 대로 통일이라고 말하던 우리, 다른 소원은 무조건 통일 다음이어야 하는 줄로 알았던 그때가 그립기도 했다. 40년을 정보부의 최고 핵심직으로 부정과 축재하지 않았음을, 죽일 놈은 죽이고 살릴 놈은 살렸음을 외치던 장군의 목소리는 흡사 독립투사의 애국심과 다를 바 없게 느껴졌으며 서문에 특별히 이젠 유명을 달리한 김학호 장군의 도움에 감사하다는 작가의 인사가 더욱 뭉클하게 다가왔던 인물이기도 했다.
이 책에서는 박정희, 김재규, 제럴드 현의 죽음외에도 김형욱과 케네디의 죽음을 흥미롭게 분석하는 경훈의 추론이 제시되어 있다. 김형욱은 10.26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고 볼 수는 없지만 박정희, 김재규와 깊게 관련된 인물이고 중앙정보부가 암살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한시절의 권력자였다. 케네디는 박정희의 자주국방과 같이 비교 언급되던 같은 암살의 희생자였다. 경훈은 김형욱의 실종이 중앙정보부의 보복이라기 보다는 도박의 빚으로 인한 자멸이 더 타당하다고 보는 결론을 내리고 케네디의 암살은 세계평화를 지향하던 그의 정의가 화를 자초했다는 조언을 확인할 수 있었다. 실종된 김형욱의 마지막 일주일을 회고하던 전문도박사 필립 최는 조국과 지도자에게 버림받은 김형욱이 권력자가 아닌 평범한 인간으로서 도박에 나머지 인생을 걸 수밖에 없었던 심리를 생생한 증인이 되어 들려준다. 제럴드 현의 메모에 등장한 케네디의 동서화해와 박정희의 자주국방은 바로 미군부와 CIA, 군수산업체의 표적이라는 점에서 본질이 같으며 이는 곧 미국이 패권주의로 세계를 지배하기 위해서라면 어느 나라의 정상도(심지어 자국의 정상까지도) 무사하지 못할 것이라는 중요한 해석이었다. 케네디는 김대중 전 대통령도 유세현장에서 암살소식을 들었을 때 세상이 원통하고 억울하다는 생각뿐이었다고 한 그 시대 정의의 표상이었다. 김형욱의 미스터리가 경훈의 추론대로라면 우리 정부는 진실을 폭로한 자를 죽인 것은 아니며 미국 정부는 진실을 추구한 자를 죽인 것이 된다. 갑자기 미국이 서늘해지는 순간이었다. 이들 두 사람 외에도 진실 가까이 있는 사람들의 무고한 죽음을 보면서 진실은 항상 목숨근처에 존재하는 위험성을 제 숙명으로 하는 것이기에 진실을 지키는 것은 결국 우리의 생명, 인류의 보존을 이어가는 것이 아닐까 하는 무거운 생각이 들었다.
#4. 형님은 없어도 형제는 있다.
"언젠가 이 형제라는 단어가 필요할 때가 있을 것이오."
(케렌스키, 美 변호사)
하지만 이 책은 세계평화라는 대전제를 앞세워 뒤에선 전쟁으로 이익을 챙기는 미국의 만행을 폭로하고 규탄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정의를 잃고 자국의 실리를 추구하는 방편으로서만 약소국을 철저히 계산하는 미국을 고발하고 적대시하자는 방향성을 가진 소설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러하기에 더욱 미국과의 바람직한 우방관계에서 얻어지는 한반도의 미래상을 넌지시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반미가 아닌 오히려 친미의 결론을 지향하고 있다고 보고 싶다. 바로 보스턴에서 경훈을 스카웃한 케렌스키 변호사의 극적인 행보와 그가 찾던 진실이 그것을 증명한다. 케렌스키는 강대국 미국의 최고 지식인으로서 우방을 존중하고 평화를 사랑하는 선량한 양심을 상징한다. 그는 경훈에게 필립 최에게 물건을 받아오라는 부탁을 할 때 언젠가 '형제'라는 단어가 필요할 것임을 꼭 기억하라고 말한다. 그 부탁은 자신(미국)의 일이기도 하지만 경훈(한국)의 일이기도 하다는 의미심장한 말과 함께였다. '형제'는 필립 최로부터 받은 목갑에 들어있는 디스켓의 암호였고 그 안에 들어 있던 극비문서들은 그동안의 미국이 저질러온 온갖 은폐된 공작들-걸프전과 아시아의 외환위기, 김대중, KAL 007 사건 파일등-이었다. 진실을 찾아가던 이들 두 형제는 진실로 용감했는데 이는 오늘을 사는 최후의 분단국가 한국에서 벌어진 일은 바로 미국의 일이기도 한 것이며 그것은 오래된 형제애를 바탕으로 이루어진 상호 믿음에서 비롯되어야 한다는 강조의 의미로 느껴졌다. 케렌스키 같은 미국인만 있다면 미국은 얼마나 멋진 나라인가.
경훈이 한국 현대사에서 치명적인 사건의 진실을 추적하듯 케렌스키는 미국의 범죄를 상대로 고독한 전쟁을 준비하는 인물이었다. 이들은 미국 CIA의 조작과 공작의 진실을 밝혀내려했기에 결국 경훈과 케렌스키는 같은 그림자를 추적한 것이었고 그 그림자는 한국과 미국이 관계되는 은폐된 진실에 다름아니었다. 이들이 각자 추적한 진실은 작품 마지막에 남북정상회담을 저지하려는 미국의 암살음모라는 공통의 지점에서 약속이나 한 것처럼 조우한다. 한반도의 분단으로 야기된 우리 민족의 비극적 회의 테이블위에서 정확하게 마주 친 것이다. 모두 미국에서 날아들어 결국 분단지대라는 대치 장소에 모인 그들. 그 순간 작가의 치밀하고도 계획된 그리고 짜릿한 플롯의 결말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이었을까. 우리는 올초 천안함 사건과 얼마전 연평도 폭격을 맞아 어느 때보다도 한반도의 긴장상태를 실감하는 한해를 보내었다. 하지만 북한의 공격을 맞을 때마다 반사적으로 미국을 향해 구원의 눈길을 보내는 우리의 처지가 피할 수 없는 작금의 현실인 것이다. 북한을 규탄하는 미국은 북한의 남침 공격을 환영하고 있을까. 우린 미국이 허락해야 북한에 미사일을 쏠 수 있겠지만 미국은 우리의 동의없이도 북한을 공격할 수 있을까. 한미관계의 모든 결론은 결국 우리의 분단현실로 귀결된다는 작가의 마지막이 한없이 슬프고 소름돋았다. 모든 것은 한가지 뿌리에서 시작되었다는 한마디를 실감한다. 더불어 케렌스키를 보면서 자국 CIA의 잘못된 공작을 파헤치려 목숨을 걸 수도 있는 미국인이 정말 존재할까 그러한 양심있는 변호사가 있다면 어린 시절 내가 보아왔던 미국의 영웅이 모두 거짓은 아닐텐데, 하는 생각을 했다.
케렌스키는 김학호 장군과 함께 내 심장을 가장 울렁거리게 하던 인물이었다. 그는 자국의 비행기 폭파사건을 조사하던중 CIA가 진실규명이 아닌 진실조작과 은폐집단이라는 것을 깨닫고 충격과 회의에 빠져 도박으로 그들의 눈길을 피하고 몰래 범죄행각을 수집해온 사람이었다. 작품 초반에 자살로 위장된 그의 의문死는 후반부의 통쾌한 반전을 위한 트릭이었던 것이다. CIA는 미국의 무기이권을 위해서라면 국제테러범을 후원, 보호하기도 하고 자신들을 폭로하려는 CIA요원들을 제거하기도 하는 무소불위의 불가항력적 권력을 행사하는 집단이었다. 그는 경훈에게 군축과 통일을 위해 남북정상회담을 추진하려하는 김대중 대통령이 케네디와 박정희와 같은 위험에 처해있음을 알려주고 한국의 수사관은 제임스의 암살명단을 빼낸 후 죽임을 당한다. 만약 북한의 인사들이 암살을 당하고 미국의 계획대로 쿠테타가 일어난다면 우리는 기뻐해야 하나, 슬퍼해야 하나. 이 작품은 충분히 가능한 가상의 상황만으로도 북한과 미국, 그리고 우리의 역학적 관계를 시뮬레이션하도록 유도하고 있었다. 군인과 정치인이 아닌 일반 대중으로서 우리가 가져야할 태도와 방향성을 대중의 정체성으로 요구하고 있었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대중을 깨우친 한명의 미국인, 브루스의 후임 홀리건이면서 케렌스키가 추적하던 카를로스이면서 제임스라는 무기거래상과 동일인물인 그의 충고아닌 충고를 되새길 필요가 있다. 그가 거쳐 온 업무가 곧 여러 얼굴을 가진 미국의 범죄행로이기 때문이며 그가 말하는 한국이 곧 미국이 대변하는 우리이기 때문이다. 그는 진실을 알고있는 제럴드 현의 주치의 로널드 숀을 교통사고로 위장해 살해하고 진실을 추적하던 경훈을 약물에 의한 자살로 제거하려 했던 인물이다. 후반부에 경훈과 대치하던 제임스는 한국인은 자신의 조국에 무관심하며 미국이 북한을 폭격하면 미국편에서 북한과 전쟁을 치르겠다고 하는 나라가 아니냐 묻는다. 북핵은 남북한의 문제가 아니고 미국을 위협할 수 있기 때문에 겁을 내는 것이라 말한다. 자신을 비난하는 당신네 나라는 미국의 전위대가 되려하면서 그렇게도 자랑스럽냐고 민족을 부정하는 한국이 훌륭한 것이냐를 따져 묻는다. 한국의 지식인들은 조국에 봉사하는 것을 부끄러워하며 애국하면 비난받는 나라인데 자신이 CIA를 위해 일하는 것이 왜 비난 받아야 하느냐 외친다. 입이 열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조국을 최강국으로 유지하는 역할에 자부심을 느끼는 제임스의 보기좋은 비아냥거림은 우리 모두를 숨죽이게 하지 않았는가. 경훈 자신도 미국 유학 당시 온전한 미국인이 되길 바랬기에 우린 다같이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었던 순간이었다. 미국이 북한과 전쟁을 한다면 미국이 이기길 바래었을, 북한정권이 무너지는 것이 한반도가 평화로와 진다고 믿었을 경훈은 곧 우리의 모습과 다르지 않았다. 제임스는 똑똑한 미국의 애국자가 맞았던 것이다. 미국엔 양심의 케렌스키보다 똑똑한 제임스가 더 많은 것이 아닐까.
#5. 햇살은 없어도 하늘은 있다.
"왜 한국인들은 5천년을 이어온 민족의 저력을 생각지 못하는가."
(前 치안본부 외사과 간부, 오세희)
이 책의 마지막에 우리는 경훈과 수연의 귀가 되어 대통령의 목소리를 듣고 한차례 목울대가 울렁이는 순간을 맞이한다. 작가는 우리가 하고 싶은 질문을 수연을 통해 대리질문한 후 듣고 싶었던 대답을 듣게 하는 것으로 이야기의 막을 내린 것이다. 오천년을 이어온 우리의 하늘을 보며 당신도 같은 것이 보이느냐 묻는다. 똑같은 파란의 하늘인지 확인하라 말해준다. 그 순간 나는 하늘은 보이지 않고 앞이 흐려지며 지난시절의 내가 아는 대통령들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우리의 동의 없이 미국이 북한을 공격하면 우린 절대로 한 핏줄을 겨냥하지 않을 것이라는 목소리가 그들의 목소리로 들려왔다. 비록 국제정세와 미국의 압력, 무엇보다 우리 자신의 안보등을 제쳐두고서라도 내가 듣고 싶은 한마디였음이 알아 진 것이다. 대통령 역시도 뒤돌아선 어떤 대처를 하였을지 모르지만 그 순간 우리 앞에서만은 진심이었다고 믿었다. 원통하게도 바위에 몸을 던진 노무현, 퇴임후 늘 못마땅한 표정으로 공식행사에 등장하는 김영삼, 수년째 와병중인 노태우, 심지어는 근근이 추징금을 내고는 있다는 전두환 전 대통령까지도 그 순간만큼은. 나도 모르게 눈물이 차올랐다. 그 순간 어느 드라마에서 세계 초일류 국가를 만들기 위해 강한 대통령이 되겠다는 배우도 더 이상 억울한 국민의 죽음이 없도록 하기위해 대통령이 되었다는 또다른 배우도 떠올랐다. 그 순간 나는 애국자인 대중이었다. 왜 아니겠는가. 올해 김연아 선수가 완벽한 연기로 금메달을 따는 순간 동시에 흘렸던 눈물이었다. 박세리 선수의 하얀 맨발이 그렇게도 목이메던 우리였다. 빼앗긴 금메달의 한풀이라도 하듯 축구경기에서마저 미국을 조롱하는 골 세레모니를 선보이던 우리였다. 그 옛날 머리 하나가 더 큰 중공선수들을 꺽고 결승전에 올라가던 농구선수들처럼 얼싸안고 다같이 울분이 터지던 우리였다. 더 옛날엔 '엄마 나 챔피언 먹었다'는 4전 5기의 신화로 불굴의 의지를 세계에 각인시킨 우리였다.
당장 미국 제품을 쓰지 않고 코쟁이의 노래를 듣지 않고 미국을 대책없이 미워만할 자신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린 미워도 다시 한번 영원한 우방으로 그들을 의존해야 할 현실의 대중이었다. 이 책의 결말은 진실을 알았지만 그저 오천년이나 이어온 무심한 파란 하늘을 바라보는 그 마음 하나로 끝이 난다. 우리가 CIA나 군수업체나 미국의 이기주의를 이길 수 없을진 몰라도 역사적인 자긍심 하나만은 빼앗기거나 잃지 말아야 함을 강조하는 작가의 마지막은 어찌보면 허탈하고도 서글펐다. 결국 마음 하나뿐이라는 응답에 눈시울이 시큰해졌는지 모르겠다. 애초부터 이러한 결말을 예상했기에 그를 외면하려 했던 것이 아니던가. 미국을 몰랐던 것은 아니지만 우리에게 일 줄은 아니라 믿고 싶었다. 우린 믿었고 믿어야 했고 믿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사실인 것이다. 제임스가 버티고 있어도 케렌스키같은 미국인도 있을 것이라 믿어보는 수 밖에 없음이 그저 이 책 한권으로 당신도 나와 같을 것임을 믿는 것외에는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것이 숨이 찬다. 통일이 되면 무언가 피곤해질 사회분위기가 싫어 변화를 두려워하던 우리들이 부끄럽다. 나 사는 동안엔 그저 아무 일도 일어나지 말기를 바라면서 무사안일주의의 공무원을 비난하는 우리가 웃기고 우습다. 우린 하늘을 보며 어렵게 주먹을 쥐었지만 이제 어찌해야 하는가. 오천년을 이어온 하늘이라는 게 우리를 쳐다보고 있기는 한 것인가.
맨 처음 하버드 캠브리지 광장에서 우리 것은 하나도 없는 것 같아 악기를 배워 판소리를 부른다는 수연의 당당한 목소리를 떠올려 본다. 수연의 판소리는 우린 그래도 오천년 역사가 흐르는 민족이라는 1인 시위의 목소리와 다르지 않았음을 이제야 알겠다. 우린 얼마나 우리 것도 있다는 것을 소중하게 생각지 않았던가, 아니 우리 것이 있다는 것조차 잊었던가. 우리가 업신여겼으니 그들이 무시함을 탓할 수 없는 노릇 아닌가. 우리 잘못도 있었지만 강대국 틈에서 살아가는 생존방식이 우리를 그렇게 만든 것이다. 하지만 이제 우린 금메달을 빼앗겼다고 애꿎은 우리의 태극기를 불태우는 그 나라의 심정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다. 지진으로 모든 걸 잃은 나라를 위해 한가득 구호품을 싣고 달려가 도울 수 있다. 우린 우리가 억압받고 또 그것을 극복하며 살았기에 그 사람들의 고통에 눈물지을 수 있는 민족인 것이다. 나이 들고 보니 내게 밥을 사주는 사람도 고맙지만 밥 못먹을 때 곁에서 같이 울어주는 사람이 더 사무친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어쩌면 남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는 그 마음 하나, 그것을 잃지 않는 일이 전부가 아닐까. 우리의 이익이 조금은 줄더라도 더 같이 오래 잘 살기 위해 누군가의 어려움에 손길을 내미는 형제같은 나라, 친구같은 민족이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미국처럼 정보와 무기, 권력을 이용해 세계의 전쟁과 평화를 자국의 이익의 도구로 활용하는 강대국이 절대 더 이상 평화로울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믿는다. 우리는 미국이 되어도 미국처럼은 아닐 것이기에 우리의 믿음은 때로 흔들리고 때로 허물어 지겠지만 오천년 이어온 한민족의 끈기처럼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내가 당신을 믿고 당신도 나를 믿는 우리 모두라면 서로를 불신하는 그 어떤 나라도 우리의 운명을 함부로 조작할 수는 없을 것이다. 미국문서 보관서에 보관되었다는 에버레디계획처럼 우린 늘 믿음이라는 준비를 믿을 수 밖에 없지 않겠는가.
우리 그렇게 다시 하늘을 보자. 30년 후에 꼭 나와 나이가 같을 내 아이가 바라볼 하늘이기에 더욱 간절하다. 당신의 두 눈이 하늘을 향하는지 내가 확인할 수 없듯 당신또한 마찬가지겠지만 이 순간 다같이 하늘을 보며 잠시 손잡고 한 뜨거운 약속만큼은 믿어보기로 하자. 이제 당신과 내가 같은 민족임이 자랑스럽고 같은 하늘 아래임이 벅차지 않은가. 이보다 더 벅차고 가슴이 뛰는 민족이 있다면 그들 역시 우리의 조상이었거나 우리의 후세일 것이다. 이토록 벅찬 가슴 하나만은 잊지 말자. 우린 그것만이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최선의 무기임을 이미 잘 알고 있지 않았는가. 내가 당신을 믿는만큼 당신도 나를 믿어주길, 나는 그 질긴 믿음하나로 한반도를 사랑하겠다. 국민누구도 그날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듯 국민누구도 오늘로부터 잊혀지지 않길 소망한다. 그러므로 우리 내일의 뜨는 태양도 여전히 오천년의 하늘 아래 아니겠는가. 우린 그 하늘아래 이토록 뜨거운 한민족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비로소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러움 없는 한명의 대중이 된 것이 아니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