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고준
고종석 지음 / 새움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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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자亡者를 이해하는 시간

나의 아버지는 자살하지 않았다. 작가도 아니셨다. 하지만 작가로서 마지막을 자살로 선택하셨다면 나는 아버지를 이해할 수 있었을까. 그런데 하필이면 그날이 노무현 前 대통령이 자살한 날이었다면 나는 어느 한사람의 죽음이 덜 슬플 수 있었을까. 아니 동시에 공평하게 슬퍼할 수 있었을까. 나는 확신한다. 나머지 한명의 죽음은 인식조차 할 수 없는 공백의 死로 처리될 것임을. 시간이 지나도 그 한명은 제대로 죽어지지 않을 것임을.

어머니가 죽던 날 나와 가장 친하던, 나를 가장 아끼던 이모가 죽었다. 아니 이모도 죽었다. 그러니까 두 사람은 같은 날 같은 방법으로 같은 장소에서였다. 하지만 아직도 이모의 죽음은 기억조차 나지 않으며 그런만큼 충분히 슬퍼하지 못했다. 많은 사람들이 어머니는 동생인 내 이모를 따라가신 것으로 결론을 내리기에 나는 오랫동안 어머니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결국 이해하기로 했고 그 이해된 마음 한 구석엔 아직도 내 이모가 미안한 얼굴로 서계시다. 나는 그것이 늘 죄스러워 가슴속에 이모 한명을 그냥 살려두었다. 내 부모가 죽은 날 누군가가 죽는다면 그건 같은 날 저 세상을 가게 되는 사람들에게나 의미있는 일이지 남은 사람들에겐 죽음도 슬픔도 1/n로 절대 나눌 수가 없는 것이다. 즉, 내 어머니에게나 이모와 같이 저승길을 간다는 것이 의미있는 일이듯 노무현의 죽음은 독고준에게나 의미있는 일이지 남은 딸에겐 오히려 원망의 대상이 될 수도 있음이다. 물론 작품속에서 독고준은 노무현보다 몇 시간 먼저 죽었다고 적혀있다. 하지만 두 번 소설을 읽은 나에게 독고준은 노무현을 따라 죽은 것으로, 혹은 노무현이 죽고 나서 죽은 것으로, 그것도 안된다면 노무현이 죽는 날 같이 죽어야 할 운명으로 읽혀진다. 굳이 따라 죽는 쪽이라면 노무현이 독고준을 따라 할 일은 백퍼센트 없겠지만 독고준은 그러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책을 덮은 다음 자리잡았기 때문일 것이다. 적혀있지도 않은 이야기를 내 오해와 고집 혹은 착시로 읽는 일이, 이 책에서는 더러 발생하였다. 그래서 이 책을 읽는 것이 나에겐 어머니가 따라간 내 이모를 향한 원망을 많이도 줄일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독고준의 딸이 되어 아버지를 이해하는 시간은 아버지의 죽음을 용서하고 받아들이는 일이었고, 그것은 결국 내 어머니의 선택을 존중하고 받아들이는 나를 확인하는 과정이었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죽음을 이해하고 받아들인 다는 것. 그것은 그 시점까지 살아온 전 생애의 에너지가 필요한 일이 아닐까. 이 작품은 전직대통령이 자살한 그날 투신으로 생을 마감한 작가 아버지의 일기장을 건네받은 딸의 이야기이다. 아니, 교수로 성공한 딸을 둔 작가가 자신이 죽으면서 남겨놓은 일기에 관한 이야기다. 백일 전 우연한 기회로 거의 출간과 동시에 이 책을 처음 만났다. 그땐 <서유기>나 <회색인>이 작가에게 어떠한 의미인지 그저 적혀있는 대로만 눈으로 이해하고 책을 덮었을 때 작품의 내용이 내가 원하던 바의 일기가 아닌 것에, 독고준이 그다지 회색인으로 보이지 않았던 것에 일말의 배신감을 느꼈었다. 그로부터 두어 계절이 지나가는 동안 나에겐 조그만 변화가 생겼다. 물론 <서유기>와 <회색인>을 여전히 읽지 못한 무정한 독자이지만 좀 더 많은 책을 읽었고 그러므로 그에 관해 작성한 서평이 많아졌다. 한해가 마무리 되는 시점에 다시 소설을 들쳐보니 그때와는 사뭇 다른 감정이 발돋움하는 나를 발견한다. 올해 나는 서평자로서 새로운 인생을 살아보았다는 감회때문인지 이 책은 독고준의 딸 독고원의 서평이야기로 다시 보이는 것이다. 작가인 아버지를 둔 평론가 딸이 아버지 사후 그제서야 아버지의 문학작품에 대해 리뷰하는 글로 말이다. 아버지의 작품 전체를 한 번의 리뷰로 마무리 짓는 방법으론 일기보다 더 완벽한 형식은 없다고 본다. 이러한 잘 짜여진 치밀한 각본의 배경을 이해하고 나니 나는 앞서 언급한 어머니의 죽음을 이해하는 과정과 더불어 내 아버지의 직업을 다시 돌아보며 그것을 지금의 어른됨으로 평가하고 있는 내 자신도 발견하게 되었다. 물론, 내 아버지는 글쓰는 일과는 상관없이 술과 말로 상대를 공략하고 회유하며 협상하는 '술상무'에 가까웠지만 나 역시 오랫동안 말로 먹고 사는 직업을 가져왔다는 점에서 아버지의 삶속에서 진행되어온 '말'이라는 작품을 뒤늦게나마 내 '말'을 덧붙여 리메이크해 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이 책은 이래저래 내 부모님의 죽음과 직업을 다시 정리하게 하는 방편으로 제대로 활용한 셈이 되었다. 뜻하지 않게 실로 지극히 개인적인 독서였다. 독서란 어짜피 자신의 내면과 소통하는 가장 사적인 시간이므로 두 번째『독고준』은 내게 공적인 글로써 사적인 상처와 그리움을 위무해주던 일종의 해결사와도 같았음이다.

...언사言辭가 완성되는 시간

나는 작품 속에서 말장난이나 말싸움에 능한 작가를 좋아한다. 이것은 주로 '설득'의 프리젠테이션을 담당해온 내 직업병이기도 하고 논쟁으로 치닫는 대화에서 더 차분해지는, 결론은 내지 못하지만 분석에는 강한 내 성향이기도 하다. 언변에 뛰어나셨던 아버지의 특성이기도 하다. 나는 말장난이나 말싸움 자체를 대화기술의 증진을 위한 연마쯤으로 여겼던 시절도 있었다. 유난히도 아버지와 논리적인 말싸움에서 패배하면 어떻게든 다시 말로써 동의를 구해보려 투지(?)를 불태웠던 적도 있었다. 그래서 문장을 읽어 내려가다 독자에게 말장난을 치거나 싸움을 거는 투의 구절을 만나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물론 여기서의 시비는 관념적인 것이라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반복되면 그 작가의 스타일에서 좀처럼 빠져나오기 힘들 정도로 중독된다. 급기야는 어찌어찌 하여 비슷하게라도 그의 글투를 따라하고 싶어 흉내도 내어본다. 나는 눈과 귀로 확인하는 말투처럼 안보이고 안들리는 글투에도 예민한 편이라 글투를 보고 사람을 확인하는 버릇도 있다. 그래서 어떤 작가의 글투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오히려 책을 빨리 읽어버리는 것으로 책에 대한 아쉬움을 실컷 투사해버리는 독자였다. 이러한 내 경력은 이 작품을 절대 빨리 읽을 수 없었던 이유가 되기도 했다. 작품 전반에 걸쳐 관념적인 분위기를 지속하다가도 불쑥불쑥 싸움을 걸어와 말초적인 신경을 자극하는 그의 글투가 퍽이나 사랑스럽고 흥분되었기 때문에.

아버지가 자살한 후 1년 뒤 어머니로부터 건네받은 아버지의 일기장을 따라가는 딸의 이야기라는 다분히 소설적인 서사의 뼈대는 이 작품에 대한 소설로서의 기대치를 드높이는 효과로도 충분해 보였다. 그런데 프레임 자체는 드라마틱한 줄거리를 지향하고 있지만 펼쳐지는 이야기로는 의외로 담담했다고 할까. '소설의 옷을 입은 에세이' 이거나 '에세이 형식을 빌린 소설'로도 인식되었다. 그것 역시, 나름의 독창성을 획득하면서 이 작품이 가지는 특성이자 문학적 성취로 생각되어 향후 소설적 기법이나 전개에 있어 훌륭한 선례로 기억될 것으로 보인다.

문체의 미감으로 본다면 개인적인 흥분을 토로하지 않을 독자가 있을까 싶지만, 이야기로 본다면 정작 소설 속에 아니 일기 속에 대단한 비밀이나 극적인 내러티브는 없었기로 불만을 내비칠 우려도 있었다. 다른 사건도, 다른 인물도, 다른 갈등도, 그러므로 어떠한 해결이나 결론도 없었기에. 작가로서 숨겨둔 비밀이나 사생활의 고백을 원한 독자들에겐 평화를 가장한 지루함이라고 해도 좋을지 모르겠다. 그가 매일 일기를 쓴 것도 아니고 일기를 쓸 만한 일이나 그에 준하는 생각이 떠올랐기에 일기를 쓴 것이라 가정한다면 적어도 그의 인생에서 일기를 쓴 날은 그렇지 않은 날보다 특별한 날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그런데 그 특별한 날들을 한데 모아 놓은 이야기는 더없이 평탄하고 일률적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있었던 일은 특별할 수 있으나 그것을 표현하는 태도와 방법이 일관되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아버지의 일기와 딸의 일상이 아버지의 작품과 딸의 평가가 교차, 반복되는 과정 역시 절제된 감정, 고요한 패턴, 중도합의된 선에서의 무난함으로 이해되었다. 최상위의 점수와 최하위의 점수를 제외한 나머지 심사위원들의 점수의 합계를 나눈 평균치로서 고급의 절제에 단련된 그 아버지에 그 딸이었다. 그것은 오히려 잘 계획된 부녀간의 평생 프로젝트가 아니었을까, 싶을 정도로. 

그러니까 혹시 아버지는 자신이 죽고 나서 어쩌면 딸이 자신의 부족한 이야기를 객관적으로 보완해 좀 더 완성된 자신을 이룩해 줄 것을 무의식중에 기대하진 않았을까. 그렇게 본다면 특정한 작품과 그에 대한 해설 및 평론이 이보다 더 아름답고 완벽한 작품으로 탄생한 문학은 없을 것이다. 작가와 평론가의 관계 밑바탕에 흐르고 있는 부녀간의 같은 피는 물론이고, 가족으로서 사후에 이루어지는 숙연한 해석, 지식인으로서 덧붙여지는 전문적 통찰까지 고려한 소설적 상황과 결과는 상당히 낭만적으로 느껴졌다. 그래서 이 두 사람은 어느 정도 정치적이고 그리하여 얼마간 이기적이며, 그럼으로써 상당히 자기 자신을 사랑한 사람들이었다는 생각도 들었음이다.

...오해를 고백하는 시간

그런데 이 작품을 읽으면서 가장 힘들었던 건 바로 아버지가 죽은 이유를 발견하기 힘들었다는 것과 아버지로 분한 독고준과 작가인 고종석을 떼어내기가 쉽지 않았다는 것, 두 가지였다. 첫 번째 어려움은 이 작품을 순수한 일기로 기대하고 그 속에서 무언가 해답을 찾으려던 순수한 바램때문 이었을 것이다. 일기를 통해 아버지의 죽음을 정리하고자한 독고원과 독자인 내 바램은 첫 번째 독서에서 어느 정도 이루어졌으나 소설의 주인공과 작가를 분리하지 못한 것은 두 번째 독서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것은 아마도 처음 이 책을 접했을 때 온라인서점『독고준』의 소설 앞에 붙은 '동인문학상 심사 거부' 라는 헤드 카피때문이 아닐까, 싶어진다. 작가는 2003년도 동인문학상 후보를 거절하였다. 수상이 아닌 후보작의 이름에 자신의 이름과 작품이 거론되기를 거부 한 것이다. 그동안 강도높게 비판해온 문학상의 후보에 오른 것을 알면서도 모른 체 하기 싫었다는 인터뷰를 기억한다. 작가의 문단이력을 작품 이해와 관련시키고자 한 의도는 없었지만 책을 처음 접할 때 별수 없이 제시된 홍보용 구절에 영향을 받아야 했다. 적어도 고종석 작가에게 그 이력은 그가 어떤 책을 출간하든지 간에 평생 따라다닐 만한 관용적 문구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로써 그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문인으로서의 정치적 색깔을 만천하에 고한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곧 회색인이라는 선언으로 인식되었고 나는 그 정체성을 자연스레 독고준의 말과 글을 통해 확인하고 있었다. 소설속에는 실제 사건과 정치인 실명이 등장하므로 이것은 작가가 유도한 장치임을 알면서도, 서문에서까지 그 인물들은 현실속 인물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해명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점점 독고준과 고종석이 한 인물이라는 증거를 찾기 위해 책을 읽는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런데 작품을 덮으면서 회색인은 자신이 회색임을 말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고 그러므로 독고준은 회색인이 아니라는 결론에 이르자 그렇다면 자신이 회색이라 천명한 고종석이 뜻밖에도 나머지 과제로 남고 말았다. 난감했다. 결국 회색인을 규정짓는 사람들은 나같이 그들을 회색으로 인식하고 흑백의 사이에서 굳이 회색으로 구분지으려는 사람들의 문제임을, 나는 깨닫고 말았다. 처음부터 두 사람을 일치시켜 색깔이 같은 것인지 확인하고자 한 나는 순수한 독자가 아니었던 것이다. 나는 이 사실을 두 번째 독서에서 씁쓸하게 확인하며 작가의 순수창작물에 일말의 회색시선을 가진 내 정치적 편견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이는 꼭 약점이나 장애가 있는 사람들이 범하는 오류의 하나였다. 자신과 같은 상처를 지닌 사람을 누구보다 잘 알아보는 사람들이 가끔 오해로 상대를 잘못 짚고 그 속내가 결국은 자신의 약점을 들키지 않으려는 심리에서 출발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회색인... 흑과 백을 택하지 않는 언제나 중립자. 그것이야 말로 그동안 내가 지향해온 색깔이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다시, 내 아버지는 작가도 아니었고, 자살도 하지 않았고, 일기도 남기지 않았다. 하지만 아버지가 서른 권의 일기를 남기셨고, 달리 자신의 작품에 대한 언급이 없었고, 내 직업이 문학 평론가이면서 현직교수였다면 나는 백퍼센트 일기를 유고작으로 출판했을 것이다. 작품 속에선 독고준의 딸인 독고원의 입을 빌어서도 일기의 내용을 보고는 아버지가 출간을 염두해 둔 것은 아닌지 심각하게 출판을 고려해 보겠다는 생각을 여러 번 내비추는 것을 확인 할 수 있다. 아버지의 성향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교수인 딸의 고민은 우리가 생각하는 일기라는 문학에 대한 의문과 의심을 정당하게 차단하고 있었다. 누가보아도 독고준의 일기는 사후 출간의지를 반영한 글임에 틀림없었다. 나는 이 잘 짜여진 틀안에서 47년간의 작가로서의 고뇌와 아버지로서의 말로 못다한 가족애와, 북에 두고 온 누이에 대한 그리움과 한 남자로서의 숨겨진 사랑을...적어도 나는 순진하게 그 부분을 기대했었다. 유치하게 소설임을 감안한 어느 정도 반전까지도 가능하다고 믿었다. 이미 죽은 사람의 일기라는 것은 '비밀'이나 '고백'을 상징하는 소설적 소재라 생각했기 때문에. 특히, 자살이라면 더욱더 고백이 마땅하다 생각했기에 첫 번째 독서에서 이 점이 가장 화가 나는 지점이기도 했다.

그런데 다시 독고원을 서평자로 생각하자 내가 작가이면서 그녀의 아버지였다면, 나는 당연히 일기마저도 독고준스럽게 작성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라는 점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작가로서 평론가인 딸을 위한 선배로서의 배려였고 자신의 일기를 출판화하는 것에 대한 전문가로서의 딸의 판단을 전적으로 존중하는 일이었다. 자살로 마무리 하면서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는 한 치의 개입도 허락지 않은 아버지였지만 딸로서 아버지의 죽음을 가장 의미있게 수용할 마지막 일감은 소중히 남겨둔 것이었다. 그러니 독고준의 일기는 일기의 내용으로만 보자면 문예지에 청탁을 받아 미리 써 놓은 원고이거나 혹시라도 누가 볼 수 있음을 배려한 친절하고도 깔끔한 메모의 성격을 띨 수 밖에 없는 것이었다. 간혹 부인과 딸에 대한 걱정과 상념들을 우리가 알고 있는 일기 속에 서술하고 있긴 하나 그 역시 저 깊은 속마음을 담은 '진실' 이라기 보다는 있었던 일상을 전달하는 '사실'에 더 가깝다 할 것이다. 그러니 처음부터 일기장을 다 훑어보면 아버지가 자살한 이유를 알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건 독자로서 크나큰 오해에 불과했던 것 아닐까.

이렇듯 독고준의 일기는 타인으로부터 자유로와야 할 개인의 글인 일기 속에서도 철저히 관념과 사유만으로 완벽한 형식과 구성을 이루고 있다는 것, 아버지의 일기를 보고 느낀 점을 서술하는 딸 역시도 아버지와 같은 유전자를 프리젠테이션 하고 있다는 것에 서운하지 않아야 함이 독자된 이해의 태도임을 나는, 뒤늦게 깨달았다. 이 연출은 애초부터 철저히 독자를 배려할 수 없는 시작이었다. 그의 방식으로 표현하자면 '차가운 열정'이나 '뜨거운 이성'즈음으로 표현될 수 있겠지만 그 '공정함'으로 가는 길이 누구 말마따나 참으로 '편파적'이었기에 나는 처음부터 중심을 잡지 못한 독자였음을 고백한다.

...색깔을 확인하는 시간

또 하나 나를 갸웃거리게 한 것은 일기의 형식이었다. 독고준의 일기는 연도순으로 제시되지 않고 4월부터 3월까지 한 달 단위로 끊어 '사계'라는 부제의 두 번째 장에 소개된다. 이 구성 역시 1960년 4월 혁명부터 2007년 대통령 선거에 이르기까지 수직적인 시간의 흐름을 따르지 않고 47년간의 매해 4월, 매해 5월.....매해 3월 이런 식으로 수평적 구성을 취하고 있다. 이것은 독고준의 의도인가, 아버지의 일기를 독파하고 난 후 딸의 의도인가, 두사람의 작업을 고려한 작가의 의도인가. 시간의 흐름을 단지 숫자로만 이해한다는 것의 의미를 역으로 깨닫기도 했다. 이는 독고준이라는 인물이 시간이 흘러 변모한 모습, 세월이 바뀜에 따라 잃거나 얻은 것들을 총체적으로 정리 할 수 없도록 만듦으로써 그를 생각이 변하지 않는 사람, 그렇기에 발전이나 퇴보도 없는 사람으로 인식되도록 하는 계획된 레이아웃이었을까. 독자로선 이야기의 중심을 잡기가 난해한 형식이었다. 하지만 더욱 더 독고준의 복잡한 내면만을 집중적으로 조명하기 위한 장치로 느껴지기도 했고 그 내면에 함부로 독자의 주관을 삽입하기가 쉽지 않았음도 알아졌다. 일생을 수직적으로 나열하지 않고 수평적으로 배치 할 경우 배치된 것들이 각각의 테마로서 공평해야 하는데 외적으로 특별한 의미없이 치밀하게 의미를 추구한 것으로 느껴져 나는 가슴한구석이 다 서늘해지기도 했다. 일기의 시작을 4월로 한 것은 아마도 4.19혁명을 시작으로 한 의도로 보이나 소제목이었던 '사계'의 의미를 외양적, 내면적으로 모두 제대로 공감하기 어려웠기에 이는 총체적인 회색의 계절로만 기억되었다. 계절의 변화가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에, 바뀌는 계절이 그다지 중요해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일기에 어느 유명한 평론가가 자신의 소설에서 눈치 채지 못한 부분을 이야기하며 슬며시 냉소하는 장면이 소개되는데 나는 혹시라도 작가의 숨은 의도를 전달 받지 못한 것이 아닌가 싶어 이부분이 아직도 막연하다. 책을 덮고 나서도 그의 사계절은 안개처럼, 희뿌연하게 기억될 듯하다. 아마 무언가 가려져 있어 실체가 분명치 않은 회색의 그것조차 맞는 것인지 모르지만.

한편, 내용면에서 독고준의 일기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컨텐츠는 단연 유명인의 죽음이다. 그의 일기 속에서 운명을 달리한 사람들은 대부분 정치인이고 다음이 화가, 작가, 음악인이었다. 그는 자신처럼 속임수에 능했다고 판단한 피카소에겐 명복을 빌었다. 사르트르는 작고했고, 티토, 앙드레 말로, 카뮈, 애거사 크리스티, 호찌민도 작고했다, 고 적었다. 김현, 박정희, 김일성, 모택동, 푸랑코는 죽었으며, 아키노와 케네디는 암살당했다, 고 적었다. 에디트 피아프와 드골, 칼 포퍼, 바슐라르는 타계했으며 유키오는 할복자살, 로맹가리는 자살, 히로히토는 사망했다, 고 표현하였다. 이 부분은 한사람의 죽음을 짧은 한 문장의 부고기사로 남기면서 은연중에 자신의 정치, 예술적 성향을 단적으로 암시한 것이다. 호찌민은 작고했지만 모택동은 죽었다고 했으니까. 아버지의 짧은 부고 글 밑에 이어지는 딸의 해석으로 아버지가 살아 생전에 호감을 보이던 작가와 그렇지 않은 정치인을 알 수는 있었지만 내 경우 그 구분을 알아갈수록 어떤 알 수 없는 열패감이 들었달까. 누구는 좋아하고 누구는 싫어했다는 것이 그들 사이에선 중요한 판단기준으로 생각되었다. 아버지가 회색인이었던 것을 조명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가 회색인이었으면 하는 바램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대체로 일기의 독자인 딸의 시각이나 아버지의 시각이 내게는 한통속으로 보였고 결과를 가지고 이건 의외, 이건 이해라고 덧붙이는 것 자체가 지식인들끼리만 교감할 수 있는 그들만의 우월감으로 느껴졌다면 이것도 자격지심인 것일까. 독고준과 비슷한 연세의 내 아버지와 또 독고원과 비슷한 나이의 내가 작가이면서 평론가인 그들 문학인의 관계로 부터 감지하는 生의 패배감은 아니었을까. 아버지가 비워둔 행간이나 여백에 딸이 주석을 채우는 것으로 그래서 아버지의 아성을 더 굳건히 완성하는 작업의 과정으로 보였다. 부럽다. 소설의 마지막은 '슬프다'는 한마디지만 나는 그 슬픔마저 '부럽다', 고 말하고 싶다. 독고준의 시간 상 마지막 일기에는 이명박이 대통령으로 당선했고 이 땅의 자유주의자들에게 혹은 진보주의자들에게 희망이 있을까? 하는 질문을 마지막으로(2007.12.19) 그는 일기를 중단했다. 어쩌면 그는 희망을 중단했는지도 모르지만.

하지만 이 책에서 가장 인상깊었던 부분은 아무래도 중립적이지 않은 감정을 말할 때였다. 그의 일기를 통해 나는 다수의 젊은 시인들의 시를 구절구절 나누어 가며 그 심정을 이해하고자 한 태도와 그것을 전달하는 공감능력에 크게 위로받았다. 작가로서 작품과 작가를 말하는 것이 가장 유일하게 진솔하게 다가왔고 소개된 시역시 하나같이 애절했기 때문이다. 또 하나, 그는 일기에서 서정시는 근본적으로 시인 자신의 노래이며 시인과 시적화자는 좀처럼 분리되지 않지만 소설은 자기와 무관하게 적대적인 인물을 창조하거나 그들의 자리만 마련해 주고 자신은 거기서 빠져나올 수 있다고 비교하고 있다. 이것은 독고준이 감성으로는 시를 좋아했지만 그럼으로써 시를 쓰지 않은 이유이고 그리하여 소설을 쓴 이유이기도 한 것으로 이해되었다. 즉, 시를 통해서는 자신을 말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며 소설을 통해서 자신을 말하지 않아도 되는 입장이 되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을지. 그렇기에 더욱 시를 이야기 할때 온 감성을 다해 작품을 전달하고 작가에 공감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렇기에 그의 자살은 당당히 자신을 말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으며 작가로서 일생의 전환점을 마련하는 문학적 사건이라고 보고 싶다. 그래서 자신을 말하기 위해 자신을 죽인 작가의 일기는 치밀한 계획서에 다름 아닐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독고준은 자살하고자 일기를 써왔으며 일기를 중단함으로써 삶을 마감한 것이다. 그렇다면 일기를 썼기에 자살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자유를 발견하는 시간

역사적으로 의미있는 정치인의 죽음을 목격한 날 독고준은 가족에게 전화를 걸거나 고향,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에 젖는다. 이것은 하나의 반복되는 습관이자 그가 일기를 작성해온 패턴이기도 한데 바꾸어 말하면 정치인이 죽으면 그날은 일기를 썼다는 것이 된다. 그는 결국 노무현이라는 정치인이 죽은 날 자살이라는 최후의 일기를 마침표로 작성하지 않았나. 그러나 '관념소설'을 쓰며 '회색인'이라 불렸던 유명 소설가가 선택한 죽음까지 온전히 그레이톤은 아니었다. 작가로서 누구보다 이야기의 힘을 믿는 그가 일기 속에 마치 출간을 염두해 둔 듯한 글을 세상에 내 보낼 수 있는 명분으로서 가장 신비스런 장치로 선택한 것이 바로 자살이었으며 또 그것이 가장 유력하고 타당해 보이기까지 하기 때문이다. 그는 결코 '흑'이나 '백'을 선택한 주의자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흑'과 '백'을 적절히 섞은 중립적 의미로서의 '회색인'도 아니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흑'도 '백'도 모두 양손에 들고 있는 그래서 어느 한쪽을 택한 사람보다 인생의 무게가 몇 배일 수 밖에 없었던 '양색인(兩色人)'이었던 것은 아닐까. 다시 말하면 그는 어느 한쪽을 택함으로써 치우칠 수 밖에 없는 부자유를 선택하지 않고 두 쪽 다 택함으로써 자유를 지향한 내면의 욕망에 충실한 완벽한 자유의지자 였던 것이 아닐까. 소설가로서 아버지의 문학세계를 규정한 평론가 딸의 냉철한 결론은 그것을 방증하는 단서였다.

"아버지의 소설은 전형적 모더니즘 소설도 아니고, 전형적 리얼리즘 소설은 더욱 아니다.
 동시에 모더니즘 소설이기도 하고 리얼리즘 소설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일상이건 작품이건 자신을 이야기 하지 않고 남의 말을 듣지도 않고 평가도 원치 않았던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그의 무선택 성향의 근원적인 배경을 가족史에서 쉽게 엿볼 수 있었다. 독고준에게 원산시절 아버지가 월남한 후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 했다는 이유로 학교동무들 앞에서 자아비판을 당했던 기억은 성인이 되면서 어느 쪽도 선택하지 않음으로써 안전해지려는 굳건한 생존의 전략으로 발전한 것이다. 이는 아무것도 선택 하지 않았으므로 살아 생전엔 타인으로부터 평가 받고 싶어 하지 않았다는 것과 맥락을 같이 하며 이것은 곧 나에 대한 평가는 죽고 나서 해달라는 뜻이기도 할 것이다. 누이의 양보로 월남하게 된 독고준은 원래 누이의 남편이었던 매부가 재가한 집의 처제 이유정에게 매력을 느꼈지만 일가친척이 없었던 그가 선택한 여자는 가족을 형성하고 오랜기간 가정을 유지 할 수 있는 소수파 종교인 순임 이었다. 하지만 정작 그는 아내의 전도를 평생 받아들이지 않는 것으로 그 안에서 나름의 주어진 자유를 선택한다. 더 나아가선 동성애자인 큰 딸의 커밍아웃을 인정하고 작은 딸의 아이가 딸린 남자와의 결혼을 반대하지 않음으로써 그 자유의지를 적극적인 지지행위로 실천한다. 이렇듯 외부에 비추어진 작가로서 경계인이자 회색인이었던 독고준은 정작 가정내에서는 그 회색지대의 자유로움을 마음껏 행사하며 따지고 보면 자신의 의지대로 하지 못한 일은 없었던 것이 아닐까.

독고준의 두 딸은 각각 박사와 석사공부를 하고 교수와 기자라는 사회적 성공의 자리에 안착하게 되는데 일기에서 비쳐진 그들의 생활수준은 경제적으로 중상 이상이었다. 두 내외가 딸과 함께 두어 달 유럽여행을 다녀오거나 가족 간에 외식을 할 땐 호텔 레스토랑, 한정식집, 일식집을 벗어나 본적이 없었다. 이렇듯 경제적으로도 안정된 가정내에서 큰 문제 없이 가족들과 잘 지내던 독고준이 자살을 선택 한 것은 바로 자신의 내면을 용서하지 못한 자책에서 기인한 듯하다. 말하지 않을 수 밖에 없었던 자신을 벗어나는 일. 말하지 못했던 자신을 용서하려면 그렇게 자신을 만들어 온 자신에게 복수를 하는 것이 운명일 수 밖에 없는 운명. 나는 결국 회색인으로 인식된 자신을 파기하는 것이야 말로 자신이 발휘할 수 있는 가장 큰 자유의지였으며 그 의지의 실현은 자살일 수 밖에 없었겠구나, 하는 심정으로 책을 덮었다.

...죽음을 이겨내는 시간

중립적인 것은 어느 쪽의 편도 아닌 것임을 의미한다. 독고준은 모두의 편이 되는 것으로 철저하게 자신의 편이 되었다. 그래서 나는 그의 선택이 외롭다. 온전한 자유는 결국 온전한 외로움 위로 날아갈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나는 소설의 마지막 독고준 소묘, 아버지의 문학세계와 삶을 정리한 딸의 글에서 아버지의 죽음을 자유의지로 결론맺고 자신의 작업 역시 아버지의 자유의지에서부터 이미 결정된 일이었음이 슬프다는 그녀의 마지막이 독고준의 죽음보다 더 쓸쓸하게 다가왔다. 아버지는 딸인 자신이 어떤 선택을 할지 알고 계셨기 때문이라는 한마디 독백은 모든 것을 인정하는 끄덕임으로 느껴졌다. 모든 것을 파악하고 이해하고 가슴으로도 받아 들인다는 인증의 목소리였다. 한 사람의 죽음을 안다는 것은, 그래서 외로운 것이다. 하지만 그래서 아름답지 않은가. 아버진 그로써 누구보다 딸이 자랑스러웠을 것이며 그들이 완성해 낸 것은 문학하는 부녀가 보여줄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이고도 빛나는 이야기 일 것이기에.

아버지와 딸의 완벽한 합주를 듣고 나는 그들에게 가슴으로 박수를 보낸다. 이번 독서는 무언가를 많이도 깨닫는 시간이었다. 자발적으로 죽음을 선택한 사람을 이해하는 시간도 되었고, 남겨진 사람이 먼저 간 사람을 이해하는 방법도 배우는 시간이었고, 먼저 가신 부모님을 받아들이고 그들을 객관적으로 평가함으로써 내 자신을 더 책임있게 내 인생을 더 오롯하게 자리매김하는 시간도 마련했다. 정치적인 편견으로 시작한 독서지만 내 마지막은 지극히도 사적이다. 그래서 이 책은 여러모로 내 부모님을 많이도 그립게 한다. 그들의 삶에 내 삶을 포개고 그들이 남겨 놓은 것에 내가 무언가를 덧대는 일이란 무엇일까. 독고원이 자신의 방식으로 아버지를 이해했듯이 나도 내 방식으로 부모님을 이해하고 싶어진다. 그런데 내게 이일은 아버지의 몇십년 일기에 자신의 평을 덧대는 한편의 책처럼 근사하진 않겠지만 아마도 평생을 해가야 할 지속적인 숙제가 아닐까, 싶다. 마치 하루하루 일기를 써가듯 그렇게 죽는 날까지. 아마도 작가의 부모님을 두지 않았고 평론가도 되지 못한 나같은 일개 독자들, 그러나 부모님의 죽음과 그들의 삶만큼은 내가 살아있는 동안 평생 외면하지 못할 뒤늦은 불효자들은 다같은 입장일 것이다. 나는 거꾸로 부모님에 대한 회한과 그리움을 지금의 일기로 그러모아 먼 훗날 그들과 재회의 선물로 준비하겠다는 야무진 계획을 세워본다. 독고준의 딸만큼은 되지 못하겠지만 독고원의 아버지처럼 일기를 써보겠다. 혹시 내 아이가 내 사후 독고원이 되어줄 줄 또 모르지 않는가. 그런데 그러고 보니 일기라고 명명만 하지 않았지 나는 사실 매일 부모님을 그리며 어떤 형태로든 그들과 나의 이야기를 여기저기 적어왔던 것은 아닐까. 그 이야기엔 지금처럼 그들을 향한 원망이나 그리움에서 시작하여 그들과 내 자신을 이해하는 것으로 결론을 내린 글도 있지 않을까. 나도 모르는 새 부모님은 내 시작과 끝이 되고 있지 않았을까. 독고원의 작업이 아버지의 죽음에서부터 이미 시작되 버린 것처럼.

사람들은 각자 자신이 가장 잘할 수 있는 방법으로 부모나 연인, 친구의 죽음을 이겨내는 것이었다. 독고원은 자신이 가장 잘 하는 글쓰기로 아버지의 죽음을 이겨 낸 것이다. 나 역시 우리 역시 지금 이 순간 우리가 가장 잘 하는 방법으로 그들을 돌아다 본다. 그의 죽음은 슬펐고 대통령의 죽음도 슬펐고 죽음을 말하는 그녀도 슬펐지만 그들을 만난 나는 이제 슬프지 않다. 내가 가장 잘하는 건 죽을만큼 슬퍼한 후 결국 슬퍼하지 않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아마도 내 어머니와 아버지는 이런 나를 이미 알고 계셨을 것이 틀림없다. 그러므로 나는, '슬프지 않다'라고 적는다. 이것은 오늘 나의 일기의 전부이고 내가 적을 수 있는 최선의 마지막이다. 슬프지 않다. 내가 혹은 그들이 가장 듣고 싶은 말로 나는 오늘도 일기를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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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의 서 2
미야베 미유키 지음, 김은모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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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죽어도 좋을 여행지



생각해보니 나는 올 한해 아무 곳도 여행하지 않았다. 아버지 기일이 이맘 때이다 보니 연말을 핑계삼아 늘 여행을 떠났었는데 올해는 그것도 여의치 않았다. 하지만 전혀 아쉽다거나 후회스럽지 않은 이유가 있다. 바로 '책'이라는 시공을 초월한 나만의 여행지로 그 어느 때보다 세상 일주를 많이 했기 때문에 물리적인 여행이 하나도 부럽지 않았다. 어쩌면 보이는 세상을 피해 안 보이는 책 속으로 들어간 내 자신을 괜찮다고 위로하는 말인지도 모르겠다. 올해 은둔을 택한 내게 이보다 더 좋은 마약과 오락은 없었다. 책 한권을 읽고 나면 포탄이 난무하는 전쟁터도 눈물로 헤어지던 바닷가도 다녀올 수 있었다. 예전에 내가 학생때 흠모하던 한 교수님은 우연히 금붕어 어항과 팔각 성냥이 놓여진 어느 시골다방에서 흘러간 노래를 들으시곤 '나도 이대로 죽어도 좋을 것 같은 때가 있었지'하며 지나간 사랑을 추억하신 적이 있는데 그 말은 이제 내가 하고 싶은 말이다. 책속에 파묻혀 있다 보면 그냥 그대로 죽어도 후회없을 것 같은 순간이 있기도 했으니 말이다. 인간이 무언가에 빠져든다 함은 어쩌면 '죽어도 좋을 것' 같은 순간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죽어도 좋다는 건 아무런 고통도 그 어떤 걱정도 내일의 두려움도 고독한 슬픔도 없는 절대평안의 마취상태가 아닐까.

그 순간을 지속시키고 싶어 다시 느껴보고 싶어 나는 끊이지 않고 책을 집어 들었다. 그렇게 의식이 원하는 방향대로, 이 책은 내게 잡히고 말았다. 그런데 결과는 내가 책에 잡힌 꼴이 되었다. 신기하게도 이 책은 어느 한순간이 아닌 읽는 내내 책속에 빠져 있는 한 이대로 죽어도 좋을 것 같은 도취상태를 유지시키며 책으로 누릴 수 있는 최상의 판타지를 선사했다. 책을 덮고 나서 나는 한 해 동안 내가 저질러온(?) 다소 무책임한 책 여행은 피상적인 것이었구나, 싶었다. 이토록 입체적으로 빠져든다는 것, 마치 거대한 입을 벌린 '책'이라는 괴물이 나를 삼켜버리자 '문장'이라는 끝없는 내장 속에 오래 잡혀있다 겨우 탈출한 사람처럼 나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던 것이다. 나이들어 독서의 취향이 단단히 굳어진 나로선 여간해선 얻어질 수 없는 신비한 경험이었다. 이것 저것 놀이기구가 한가득인 테마파크라도 몇 바퀴 돌고 나온 기분으로 책을 덮었다. 이 책은 책이 보여주는, 책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오락이자 휴식이었다.

나는 사실 유년기, 학창시절, 사회생활을 통털어 독서의 재미를 일찍부터 체감한 쪽은 아니었다. 늘 필요와 계획에 따라 지식의 축적이나 교양의 목적, 혹은 업무의 방편으로 책을 소비해온 독자였다. 그래서 지금도 자발적 동기에 의해 어린 시절부터 책을 친구삼아온 동료나 지인들이 참 부럽고 대단해 보인다. 그들의 감수성은 아주 오래된 것이기 때문에 대화를 하다보면 어떤 사안에 대한 문제접근 방법이 언제나 진지하고 속깊다. 물론 나 역시 진지한 성향의 사람이긴 하나 머리만 뜨겁고 가슴은 차가운 쪽이었달까. 책을 친구나 연인, 선생님삼지 않고 오로지 책으로써만 대했기에 내 머리 속에 책을 집어 넣는 쪽이었지 절대 책속으로 들어가 보는 쪽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은 다시 내 유년을 시작하는 기분마저 들게 한다. 그 시절로 돌아간다면 나는 이렇게, 입체적으로 빠져보는 독서를 하고 싶다. 이런 식의 이야기를 만났다면 그 다음부턴 책속으로 들어가는 환상의 마법을 꽤 일찍 깨우칠 수 있었을텐데, 하고 말이다. 새삼 독서의 재미를 알게 하는 책, 내게 『영웅의 서』는 새 친구를 사귀고 막 연인을 알아가던 그 설레임과도 같이 마음이 간지럽고 두근거리는 시간이었다. 장르나 판타지 분야라고 큰 기대하지 않았던 마음 한구석 오해도 살짝 부끄러워지는 홍조의 추억이 될 것 같다.





책,


끝간데 없는 무한지대

이 책은 평소 단짝이었던 열한 살 소녀 유리코와 열네 살 소년 히로키 남매가 벌이는 어드벤처 서사시이다. 표면상으로는 이 세계의 유리코가 저 세상의 히로키를 찾아 떠나는 구출작전이자 탐험여행인 것이다. 무난하고 평범한 유리코는 모범생에 스포츠 만능인 오빠 히로키가 반 친구 두 명을 잔인하게 공격하고 실종되었다는 그날부터 현실적인 감각을 잃게 되며 비로소 여행의 본격적인 계기를 얻게 된다. 주변에 죽은 사람은 있으나 실종된 사람이 없어 찾아야겠다는 심정을 뼈저리게 경험한 적은 없지만 '실종'은 '죽음'보다 더 비현실적인 사건인 듯하다. 아니, 비현실로 인도하는 기폭제가 될 것이다. 내 눈으로 현실을 확인하지 않는 이상 찾는 삶도 중단하기 힘들고 그렇기에 지금 삶도 포기하기 힘들며 실종된 그날부터 실종된 사람과의 현실은 잠시 중단된 상태이기 때문이다. 결정이 나지 않은 오늘은 언제든 비현실의 입구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작가는 열한 살 소녀의 현실을 모험이라는 비현실로 인도하는 장치로 사용하며 '실종'과 '모험'을 끝까지 병행시키는 수사를 진행한다. 모험은 그 떠나는 원인이 아무리 암울하여도 자체로서 긍정의 에너지를 발산하는 장르가 아니던가. 나는 작가가 연출하는 유리코의 모험이 현실에서 잃어버린 것을 되찾는 하나의 '에너지 여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모험은 결과의 성패와 상관없이 살아있다는 에너지를 스스로 느끼고 결국 살아가야 할 에너지를 발견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족중에 살인자가 있고 그가 실종되었다는 것과 학교에서 살인자의 동생으로 손가락질 받는 유리코의 현실은 내게 그다지 놀랄만한 조건이 되지는 않았다. 늘 정의에 차있던 오빠 히로키가 왕따를 당하던 여자친구의 부당한 피해에 분노하여 일을 저질렀다는 우발적인 사고 역시 충격적이진 않았다. 내가 놀라웠던 건 이들의 현실이 아니라 이들이 떠나서 겪게 되는 비현실의 끝간데 없는 그 초현실됨에 있었다. 작가의 상상력이 최대한 발휘된 가상의 현실세계를 밀고나가는 추진력, 그 이야기의 거침없음, 그리고 글로써 그려지던 고집스런 모험의 디테일이 너무나 정력적(energetic)이었다는 것이다. 이 책은 내게 에너자이저(energizer)로 충분했다.

소녀 유리코의 여행 목적이 오빠라는 이야기를 찾는 것이라면 그 찾기 위한 과정 자체는 바로 이 소설의 가장 핵심적인 이야기를 이룬다. 마치 <엄마찾아 삼만리>나 <은하철도 999>처럼 찾아야 하는 분명한 대상이 있긴 하지만 찾아가는 여정상에서 벌어지는 슬프고 기쁘고 두려운 여러 사건들이 연쇄적으로 서사의 줄기를 이루고 있는 형식이다. 사실, 이 여정의 과정이 의미하는 것은 궁극에 여정 주체의 성장이겠지만 책에 빠져든 내 입장에서는 좀처럼 여행의 목적이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다이나믹했다고 할까. 여느 허리우드 블록버스터급의 환타지 영화가 전혀 부럽지 않을 정도의 화려하고 장대한 필력은 무엇보다 강한 인상으로 남았다. 요즘같이 현란한 특수효과와 4D의 영상시대에 이렇게 글로써만 세밀하고도 풍부하게 표현되는 환상의 문학이 존재한다는 것이 놀라웠다. 그런데 거기서 그치지 않고 책을 덮고 나서는 소녀의 성장이 내게 시사하는 바가 결코 간단치 않았기에 이는 영상으로만은 얻을 수 없는 통찰의 견지임이 분명하다. 종교와 철학이 근간이된 판타지안에서도 이토록 현실을 직시하게 하는 힘은 보이는 견지(見地)가 아니라 안보이는 견지(堅持)일 것이다. 만약 같은 컨텐츠를 영화로 보았다면 눈앞의 시각효과에만 매혹되어 '책의 비밀'과 '이야기의 힘'이나 '문장의 마법'으로 이루어진 텍스트가 제공하는 영적인 감동은 얻지 못했으리라는 생각이다.





책,


살리고 죽이는 중개소

유리코는 오빠가 실종된 후 꿈속에서 무릎꿇은 오빠 앞에 커다랗고 검은 사람의 형체를 목격하게 되는데 머리를 조아리고 읊조리던 오빠의 노래를 자신도 모르게 부르게 되면서 여행의 순간이 시작된다. 그 순간 오빠의 책꽂이에 살아 숨쉬던 책의 정령과 만나게 된 것이다. 이 빨강 가죽표지의 낡은 책은 촉감과 체온, 파동은 물론 목소리를 가지고 있는 마법의 메신져였다. 빨강 책은 유리코가 학교에서 친구들의 외면하던 시선에 상처받은 마음을 털어놓자 노래하듯 그녀를 위로한다. 단지 책을 가슴에 꽉 껴안았을 뿐인데 세상 없어도 내편이 되어 준 것이다. 한순간 세상이 따스해지던 그 느낌, 나 역시 유달리 감명받은 책을 덮고 나서 두 손에 그러잡고 껴안았던 적이 있었다. 내 심장이 여전히 뛰고 있음을 책에 전달하려고 당신으로 뜨거워진 내 체온을 말하려고 어루만졌던 기억이 떠올랐다. 굳이 책을 읽었다는 증표로 심장의 도장이라도 찍으려는 나만의 의식이었을까. 누구에게 말하기 창피하지만 나는 그 순간 내 심장과 입맞춤한 한 권의 책은 한 명의 내편이 된 것이라 믿었다. 유리코 역시 내 편이라는 믿음이 책을 향해 마음을 열게 한 것이 아닐까. 이 작품은 책을 의인화, 신격화하여 책과 소통하는 인간이 어떻게 삶이라는 이야기를 슬기롭게 살아갈 수 있는지 낱낱이 보여주고 있었다. 그래, 책이라는 세상에서 체험하는 현장학습에 동참할 것인지가 중요했다. 나는 유리코가 빨강의 책을 껴안을 때 흘렸던 눈물을 책이 되어 안아주고 싶은 같은 편의 마음으로 마법여행을 따라가 보았다.

유리코는 빨강 책으로부터 책의 출처와 함께 오빠가 '테두리' 안의 인간들의 세계를 벗어난 세상으로 사라졌음을 알게 된다. 오빠가 가져온 빨강 책이 원래 꽂혀 있던 장소는 작은 할아버지의 오래된 별장이었고 작은 할아버지는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고서점을 방문하다가 결국 책더미에 쓰러져 기이한 죽음을 맞이한 의문의 인물이었다. 고독한 자만이 책과 소통할 수 있다는 사실이 더없이 슬퍼지던 은둔자의 최후였다. 이 책에서는 책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고 골동품이나 유산에만 눈독을 들이는 어른들이나 학교에서도 진실을 외면하는 선생님들은 결코 책에서 감동을 받지 않을 것이므로 마찬가지로 책으로 어떤 피해도 입지 않을 거리감 있는 인물로 묘사된다. 일본의 학교현실에서 죽음을 부를 수도 있는 소재로 이지메를 표면에 내세워 그 이면에는 권위적이고 위선적인 교사들과 학교행정, 물질적이고 이기적인 학부모들을 고발하는 내용은 이해할만했으나 그 표현방법과 형식이 진짜 주인공들이 열광하는 판타지에서 펼쳐진다는 사실이 새롭기만 했다. 유일하게 책과 밀접하게 묘사된 어른으로서 죽은 자를 되살리는 방법을 찾아 전세계 헌책을 수집했다는 작은 할아버지는 그런면에서 아마 책속으로 들어가 기어이 이야기속에서 부활이나 환생을 맞아야 마땅할 인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토록 책에 매달리고 그 속에서 나머지 삶을 온전하게 하려했다면 충분히 가능하지 않을까 싶었다. 그렇다면 별장 서재의 주인인 할아버지에게 책은 거짓말의 세상이 아니라 가장 극명하게 살아있는 진짜 세상이 아니었을까.

책이 거짓이든 진실이든 책을 읽는다는 것은 대체로 부정보단 긍정의 의미를 가진다. 이것은 영웅도 마찬가지다. 대개 악당과 대적하여 그를 물리치는 영웅에게 '나쁜 영웅'의 수식을 붙이기는 미안하다. 책에는 진리가 있고 지식이 있을 것이기에 책을 탐하거나 책에 중독되는 것조차도 미덕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많은 것이다. 범죄와 폭력을 유발하는 불온서적이나 주의를 선동하는 이념서적도 책 자체의 문제라기보다는 어느 정도 책을 읽고 해석하고 받아들이는 독자의 수준으로 치부되는 분야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책이라는 것은 그것을 손에든 독자가 어떤 현실의 바닥위에서 그것을 취하였는지에 따라 그를 영웅이 되게도 혹은 죄인이 되게도 한다는 사실을 새삼 깨우치게 된다. 히로키의 경우 불의를 넘기지 못한 그의 현실 때문에 책을 통해 죄업을 만들게 된 부정의 사례라 할 수 있고 유리코의 경우 오빠의 진실을 찾겠다는 의지로 똑같은 책을 통해 성장을 하게 되는 긍정의 사례라 할 수 있다. 이 책이 청소년 소설임을 감안하면 작가는 이 교훈을 중요한 사실로 주지시키고 싶었던 것이라 생각이 든다. '책'이 이렇게 양면성을 가지고 있듯 작가는 '영웅'도 정의와 불의의 양면성을 가지고 있음을, 그리하여 '인생'이라는 것도 결국 슬픔과 기쁨, 행복과 불행이 공존한다는 보편적인 진리를 전하고자 했던 것은 아닐까.





책,


죄업을 치루는 교도소

하지만 평범한 진리를 추적하는 과정은 그 누구보다도 편협하고 극적이었다. 나는 빨강책 아쥬와 서재의 현자가 유리코와 나누는 대화를 시작으로 이번 독서만을 위한 이야기 사전을 따로 마련해야했다. '이름없는 땅', '최후의 그릇', '황의를 입은 왕', '인을 받은 자', '자아내는 자', '죄업의 대륜', '재의 남자'등... 많은 이름들이 의미하는 형용의 문구와 '테두리', '올 캐스터', '늑대', '무명승'등의 단어를 새롭게 잘 저장해야만 했다. 이 과정은 마치 복잡한 신제품의 매뉴얼을 반복의 조작을 통해 이해하거나 아마존, 툰드라같이 생활문화가 다른 지역에 동떨어져 얼마간 그들이 지시하는 이름들을 다시 내 언어로 기억하는 과정과도 같았음이다. 판타지 게임이나 소설을 거의 접해보지 못한 나였기에 캐스터가 뉴스캐스터가 아닌 마법의 주문을 거는 마법사라는 사실도 한참 뒤에 깨달았다. 때문에 이들 모두를 따라가는 일은 신선의 재미만큼이나 힘이 부치는 일이기도 했다. 하지만 매순간 몰입의 덕으로 2권이 지나면서는 유리코의 마법여행을 통해 작가가 하고싶은 이야기를 순간순간 알아채는 재미속에서 비로소 이야기의 힘을 몸소 체험하기도 했다. 그래서 이 작품은 실은 내 아이가 읽어야 할 성장소설이었지만 한참지난 내가 몰래 읽는 미스테리의 느낌도 들었다. 모르는 게 창피했고 그래서 알아진 게 더 신기했기 때문이다.

신기함이 내 몸처럼 익숙해질 즈음 나는 어느새 내 분신을 현실에 만들어 놓고 유리가 되어 생쥐같이 앙증맞은 메신져와 보라색 눈의 시종을 데리고 이곳저곳을 떠돌기 시작했다. 유리코가 '이름없는 땅'을 시작으로 미노치의 서재로 자신의 집으로 경찰서로 학교 도서실로 자유자재의 공간이동을 해낸 것처럼. 수도원이나 중세풍의 예쁜 마을, 괴물의 병사들이 출몰하는 지옥, 끝이 보이지 않는 돌터널, 통로를 연결해 만든 미로... 가보지 않고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곳이 해당장소였다. 유리코는 수호의 법의를 입고 마법의 효과로 투명인간이 되기도 하고 경찰이나 작가처럼 실재하는 인물로 변신도 한다. 결정적인 순간에 이마의 인을 사용해 문장으로 위기를 탈출하기도 한다. 눈알로 분한 괴물을 비롯해 신비의 인물들을 만나 그들이 우리 사는 인간들처럼 멀쩡히 살아가고 죽어왔던 모습을 보게 된다. 오빠를 찾아 가는 길은 그야말로 공포와 고난의 연속이었다. 어찌보면 만화같기도한 황당무계의 서사를 몰입하게 하는 힘이야말로 이야기가 가진 마법이요, 작가의 마력이겠지만 무엇보다 공감할 수 있었던 건 이야기로 자아내지만 않았지 언젠가 한번은 나 역시 상상해본 적이 있는 질문이었기 때문일까. 언젠가 나도 이 세상에 나를 대신할 내 분신을 만들어 놓고 저 세상 어딘가로 탈출하고자 했던 적이 있었다. 그래놓고 사람들은 내 분신에게 어떤 말과 행동을 하는지 지켜보고 싶었던 적이 있었다. 죽은 자를 되살리는 마법이나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신약이나 늙지 않고 젊음을 유지하는 마약이 하버드대 지하 어딘가에 있을 거라고 믿었던 적도 있다. 쥐도 새도 모르게 실종된 사람은 이 쪽 세상의 죄를 저쪽 세상에서 갚으려고 잠시 자리를 비운 것이라 생각하기도 했다. 가끔 난세를 짊어지는 영웅이 탄생하는 것은 우리가 간절히 원하고 있는 소망에 주어지는 '감사한 이야기'의 선물로도 생각했고 책을 통해 끔찍한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은 귀신이나 죽은 자의 영혼에 빙의되어 그 대리역할을 수행하는 것이라 믿었던 적도 있었다. 다만, 이렇듯 내가 무심코 생각해 본 이야기들을 작가는 놀라운 디테일로 꼼꼼히 자아냈다는 것, 작가는 이 세상에 이야기를 '자아내는 자'는 모두 거짓말로 죄업을 쌓는 사람이라 하였지만 어쩔 수 없이 자신이 가장 잘하는 '자아내는 이야기'로 세상에 그 죄값을 갚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작가는 이번에 그 죄값을 그야말로 톡톡히 치룬 것이 아닐까.





책,


정화하고 순환하는 대기(大氣)

또 하나 이 작품이 흥미로서만 그치지 않은 이유는 치밀한 이야기의 논리와 그것이 지향하는 메세지에 있었다. CG와 특수효과로 치장된 판타지 영화들을 보고나면 그 순간엔 자극적이고 신났었지만 지나고 나면 정작 무엇 때문에 주인공이 마법을 펼친 것인지, 마법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을 때가 많았다. 그때뿐인 이미지들이, 그냥 그러고 마는 아쉬움이, 늘 표현의 한계를 넘어서도 주제의 정점에는 가닿지 못한다는 하나의 습관이자 장르적 특성이었다. 그런데 이 작품은 텍스트라는 문장의 상징이 극중에서 산발적으로 일종의 암호처럼 제시되다가 결말에 이르러서는 비밀의 문서처럼 문장이 빛을 발하며 한데 모여 이야기라는 논리를 충분히 증명해 내고 있었다.

작가는 이야기에도 생명성을 부여하였으므로 그를 이루는 문장에도 당연히 같은 힘을 불어 넣었다. 이 책에서 '문장'은 오빠인 '최후의 그릇'과 같은 피를 가진 '인을 받은 자' 유리코가 <공허의 서>를 <영웅의 서>로 돌리는 힘을 발휘할 수 있는 하나의 신적인 표식으로 이해되었다. '최후의 그릇'이 된 오빠가 자신의 죄를 깊게 후회하여 미숙한 무명승이 되었지만 불완전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그 인간의 마음 한 조각을 정화하는 것도 유리코가 지닌 '문장'의 힘이었다. '인을 받은 자' 유리코는 결국 '문장'의 마법을 수여받아 '문장'의 힘을 행사하는 존재라 보았을 때 이야기를 구성하는 최소단위인 '문장'은 각기 자신이 속해야 할 이야기로 제 위치를 자리 잡아야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유리코가 보여준 마법의 힘은 실은 '문장'의 역할이었다는 점에서 이보다 더 완벽하게 텍스트로서 '문장'의 의미를 문학적으로 상징화할 수는 없겠지 싶었다. 그래서 '문장'이 미숙한 무명승을 진짜 무명승으로 돌려보내는 역할을 수행치 못한다면 이 세상은 전쟁과 싸움이 난무하는 괴물의 현장이 될 것이라 한 문장은 작가로서 이야기를 '자아내는 자'가 명심해야 할 강령이라도 선언하는 것처럼 들려왔다. 문자와 문장이 되지 못하고 의지할 곳이 없어 테두리 안을 떠돌고 있는 것들을 '분리물'이라고 한 것 역시 문장으로 이 세상을 정화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절대 의미있는 그 어떤 이야기도 될 수 없어 쓰레기에 불과하다는 의미심장한 충고로도 들렸다. 작가인 자신에게 스스로 걸어온 주문일 수도 있겠지, 하면서도 나는 순간 멈칫거렸다. 나는, 일개 독자이면서 서평자인 나의 '문장'은 단 한 줄이라도 누구를 무엇을 정화할 수 있을까. 혹시 단 한 번도 생명성을 가지지 못하고 그저 정처없이 허공을 맴도는 '분리물'이 되지나 않을까.

책의 정령으로 유리코를 모험의 세계로 인도한 아쥬, '최후의 그릇'으로 소환자가 된 히로키, 별장 서재의 책임자격인 현자, 지하감옥에서 썩어가는 괴물이 된 작은 할아버지, '이름없는 땅'의 지킴이 무명승, 되살아난 괴물의 독을 받은 용수철 다리의 우즈...많은 인물들이 바로 문장의 힘을 통해 태어난 캐릭터들이었다. 이들 중 가장 현실적으로 다가온 인물은 위험한 사본을 사냥하는 사람, '늑대'라 불리는 장의사 '재의 남자'였다. 전쟁이 끊이지 않는 <헤이틀랜드 연대기> 속의 등장인물, 그는 테두리 안에서도 바깥에서도 존재하는 아니 그 두 경계를 통과하는 인물로 보고 싶었다. 한번 읽고 느끼기만 하면 죽을 수도 죽일 수도 있는 영웅의 사본을 찾아서 그것을 숨기려 하는 사람들, 사악한 힘으로부터 테두리를 지키려는 사람들이야 말로 우리 시대 진정한 영웅이 아닐까, 해서이다. 분노만으로 영웅이 될 수 없는 건 수단을 가리지 않고 도덕을 무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암흑의 왕이 분노에만 휩싸인 인간을 매번 유혹하기 때문이다. 여자친구를 구하고자 백마탄 기사를 자청한 히로키는 영웅이 가지는 정의의 빛만 흡수한 것이 아니라 불의의 그림자까지도 드리워진 비운의 죄인이 되었다. 하지만 유리코는 '아침에 한 아이가 아이를 죽이는 세계는 저녁에 만명의 군사가 살육을 하기 위해 내닫는 세계와 같다'는 이치와 마찬가지로 '한사람을 구한다는 것은 세계를 구하는 것'이라는 진리를 깨닫고 모험후 나쁜 이야기의 사본을 사냥하는 '늑대'로 살아갈 것임을 암시한다.

유리코는 누군가를 살리기 위해 또 다른 누구를 죽이는 영웅이 아니라 그렇게 누군가를 죽일 수 있는 사람을 미연에 방지하는 영웅이 되고 싶었던 것일까. 오빠를 추적하는 과정은 인간의 고통과 슬픔을 추적하는 것이었고 그것은 곧 다른 인간의 아픔을 위로 해줄 수 있는 살아있는 영웅이 되는 일이 아니었을지. 오빠를 찾는 일이 결국 오빠같은 사람을 막는 일이 된 유리코는 불치병으로 죽은 가족을 보고 같은 병을 치료하기 위해 의사가 된 주인공을 떠올리게 한다. 잔인한 범죄로 비참한 희생자가된 가족을 위해 정의의 경찰이 된 사연이 생각난다. '늑대'로 살아갈 유리코는 같은 방법으로 양산되는 희생자를 막기 위한 개인적 정화행위이면서 순환하는 이야기의 운명을 넌지시 암시하고 있다. 더불어 속세에서 양의 탈을 쓴 '늑대'라는 의미의 음흉한 인간도 세상끝까지 나쁜 것을 추적해 사냥한다면 얼마든지 영웅이 되는 것이 앞과 뒤가 공존하는 동전같은 삶의 진리가 아닐까. 백성을 위해 반란을 주도한 키리크가 '영웅'이기도 했지만 새로운 왕에게는 반역자의 낙인이 찍혀 '황의를 입은 왕'이 되기도 한 것처럼.

허나, 이 책에서의 가장 큰 반전은 아마도 유리의 시종으로 분한 소라, 미숙한 무명승의 운명으로 인간의 마음을 쉬이 놓지 못했던 그의 최후였을 것이다. 소라와 만나고 헤어지는 과정이 곧 오빠를 용서하는 과정이었기 때문이다. 유리코가 오빠를 찾는 일은 결국 오빠를 잘 돌려 보내는 일이 아니었을까. 오빠를 되찾는 다는 것은 일상을 되찾는 다는 것인데 그것은 곧 이야기라는 세상의 이치를 받아들이는 일이 아닐까. 살면서 내의지는 물론이고 나로부터 발생하지 않은 타자와의 이별, 뜻하지 않은 죽음, 확인되지 않은 실종을 세상에 속한 나의 이야기로 받아들이고 변함없이 내 이야기를 살아가기란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가. 특히나 가족이나 연인의 죽음은 내 눈으로 확인하고 그들의 뼈를 묻고 돌아와도 분명한 사실을 실감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 법이다. 남의 이야기, 남들에게만 일어나는 이야기 인줄 알았는데 내 이야기도 될 수 있음을 깨닫는 것이 결국, 인생인 것이다. 인생이란 이렇듯 끝없이 새로운 나의 이야기를 죽는 날까지 발견하고 인정하는 것, 그렇게 쌓여진 그동안의 이야기가 결국 나라는 인생의 이야기였음을 깨닫는 일이 아닐까. 작가는 이 숭고한 진리를 모든 이야기가 태어나고 회수된다는 '이름없는 땅'을 빌려와 대서사시를 집필했다는 결론에 다다른다. 이야기는 마치 숨쉬고 내뱉는 우리 사는 거대한 대기大氣와도 마찬가지 였던 것이다.





책,


인印을 받아 인引을 하는 인仁자의 서書


이 책을 덮고 탐험과 신비의 마법이 가라앉을 때즈음, 나는 뜻하지 않게 여정의 후유증이 찾아 들었다. 바로 내게 질문을 남기고 자취를 감춘 인물이 있었으니 그들은 '인을 받은 자'와 '자아내는 자'였다. 책에서는 히로키의 동생 유리코가 '인을 받은 자'로서 문장의 힘을 행사하고 '자아내는 자'는 언급만 될 뿐 역할로 등장하진 않았다. '자아내는 자'는 바로 소설바깥 작가 자신이었기 때문일까. 인을 받은 유리코가 <영웅의 서>의 주인공이었다면 자아내는 작가는 또 다른 꿈을 가진 자들의 영웅일 것이다. 유리코의 인과 작가의 자아냄이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면, 그리하여 언젠가는 문장을 사용할 수 있는 인을 받아 이야기를 자아내는 자가 되고 싶다하면 너무 과한 욕심일까. 인간에게 어떤 감정이나 생각, 눈물과 웃음, 그리움과 연민을 인引하여(끌어내어) 이야기를 자아내는 사람이야말로 인간을 더욱 인간답게 하는 '인仁의 영웅'이 아닐까. 문장의 인印을 받아 인人의 감성을 인引하는 인仁자야 말로 <영웅의 서>의 진정한 주인공이 아닐까. 이 책을 읽고 작가가 된다는 것은 곧 누군가의 영웅이 되는 일임을 벅차게 실감한다.

나에겐 꼭 언젠가 책을 한번 내겠다는 야무진 꿈이 있었다. 문학하는 자가 되지 않아도 그것은 언제나 유효했다. 대략 '문학'을 통하지 않아도 '책'은 낼 수 있다는 희망으로 변질된 일종의 보험같은 꿈이었다. 작가가 아닌 보통사람들도 책 한권 내는 일이 예전처럼 어렵기만 한 시대는 지나갔고 일단 유명인이 된 다음 유명세로 전혀 다른 분야의 책을 출간하는 경우도 보아왔고 일반 블로거들도 출판이 수월해진 시대에 살고 있음을 잘 알게 된 까닭이다.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원한 것은, 내가 내고 싶었던 책은 단 한명의 독자라도 자신의 유일한 심장으로 껴안아줄 수 있는 한권의 책이었다는 것을 다시 깨닫게 되었다. 그건 그냥 아무리 시간이 오래 걸려도 평생의 소원이나 숙제처럼 여기고 말 무책임한 꿈이 아니었던 것이다. 어쩌면 영원히 봉인될 내안의 영웅일 수도 있었지만 이처럼 거부할 수 없는 이야기의 힘으로 나는 봉인된 내 영웅이 파옥하고자 함을 똑바로 목격하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은 그렇게 그동안 내가 읽어온 책과 내가  내고 싶은 책에 대한 의미를 다시 생각게 하는 쉽지 않은 문학이었다.

문학이라는 인을 받는 것은 타자의 슬픔과 상처를 내 것처럼 느낄 수 있을 만큼의 상처의 증거라 생각했다. 내가 흘린 눈물의 양만큼이 곧 인증의 증표라 생각했다. 문학은 고통과 상처의 축적이지 기쁨과 행복의 축적은 아니라는 생각에서였다. 상처가 많아질수록 눈물이 많아지는 것처럼 그리고 그 눈물로 다시 상처를 위로 할 수 있는 것처럼 타인의 아픔을 그냥 넘기지 못하는 마음이야말로 인을 받을 만한 자격이 아닌가 말이다. 그렇게 생긴 자격으로 나는 눈물을 자아내는 문학을 하고 싶었다.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나는 슬픈 상태가 기쁜 상태보다 더 편했고 더 좋았다. 지금 더없이 슬프기 때문에 앞으로는 슬프지 않을 것이고 지금 이만큼 슬프다면 다음엔 이보다는 적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나중의 슬픔으로 그전의 슬픔을 치유하면서 나는 눈물이야말로 인간이 자아낼 수 있는 가장 고결한 가치라 생각했다. 이야기로 울어본 사람만이 이야기로 울릴 수 있다고 그럼으로 이야기를 믿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독자와 눈물로 약속한 관계가 되는 작가가 되고 싶었다. 그 눈물 한 방울로 현실로는 절대 돌아올 수 없는 사람에 대한 집착도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상대의 변절도 이해불가능한 잔혹한 범죄도 따스하게 씻겨주고 안아드리고 싶었다. 한번 일어난 일은 다시 돌이킬 수가 없는데 그럼에도 이야기로 결과를 뒤집을 수 있다고 말하고 싶었다. 내가 죽어도 주인공은 살아남아 또 다음 세대의 슬픔을 자아내며 그들의 눈물에 내가 감사하듯 내가 흘린 눈물만은 기억되고 싶었다.

하지만 왕이나 장군, 예언자나 종교인으로서의 영웅이 아닌 작가로서의 영웅은 언제나 두렵고 무섭기만 했다. 이야기를 만들고 언급하는 것은 인간뿐이라 했던가. 이야기에 살려고 한자는 거짓말에 살고 거짓말을 구현하려는 대죄를 짓는 것이라 했다. 그렇담 이 땅의 모든 작가들은 죄업을 지고 '이름없는 땅'의 무명승이 되어 '죄업의 대륜'으로 쪼갠 보리언덕에서 한쌍의 수레바퀴를 돌려야 할 운명인 것이다. 나는 그 운명의 수레바퀴가 시지프스의 운명처럼 두려웠던 것은 아닐까. 마땅히 '있어야 할 이야기'를 자아내지 못하고 수없는 '분실물'들만 잉태할지 몰라 '문장'의 힘을 불신했던 것은 아닐까. 미노치의 고서들을 매수한 서점주인 마저 최후에는 '솟아나는 샘' 이라는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지 않았던가. 이야기라는 세상 속에서는 누구도 이야기를 피해갈 수 없는 운명인 것을,  돌고 돌아 서점 주인도 독자도 각자 다른 위치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자아내는 사람에 다름 아니었건만.

그러므로 나도, 자아내고 싶다. 영웅을 기다리는 인간들에게 '자아내는 자'도 영웅이 되는 이야기를 자아내고 싶다. 이야기야말로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필수적인 거짓말이 아닌가. 필사적인 거짓말로 진실한 인간이 되고 싶다. 오늘 아침 지난 일년 간 우리 책의 제목으로 가장 많이 사용된 단어는 '나'가 1위이고, 다음은 '이야기', 그 다음은 '무엇인가'라는 출판계의 통계기사를 보았다. 순간 눈이 번쩍 뜨이는 문장의 힘이 나를 손짓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나'의 '이야기'는 '무엇인가'...전광석화처럼 뇌리에 스쳐가던 하나의 문장이 있었다. 나는 울면서 웃었다. 이것이야 말로 내 가슴을 벅차게 뛰도록 하는 제목의 힘이 아니겠는가. 그래 누구보다 가장먼저 내가 알고 싶고, 그리하여 당신에게 알리고 싶다. 나의 이야기가 부디 당신이 궁금했던 그 이야기가 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 순간 죽어도 좋을 나이기에 언젠가는 내가 자아낸 책 한권에 눈물흘리고말 그를 기다린다. 기어이 그의 두손으로 나의 이야기를 가슴에 꼭 끌어안을 그 순간을 상상해본다. 그때라면 나는 부디 빨강책의 정령이 되어 지금 울어도 되지만 절망만은 하지 말라고 다시 내가 웃게 할 이야기에 우리 같이 떠나보자고 사력을 다해 그를 유혹하고 싶다. 나의 이야기는 무엇인가. 책은 나의 영웅이고 나는 영웅에 파옥하나니 이것은 나의 죄업이다. 이제 그 죄값을 치루는 방식은 나만의 이야기가 될 지어다. 세상에서 유일한 단 하나의 '있어야 할 이야기'를 위해 나는 오늘도 한쌍의 수레바퀴를 침묵으로 돌려본다. 나의 영웅이여 깨어나라. 문장이여 빛을 발하라. 그 빛으로 이야기를 숨쉬게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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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명 지음 / 새움 / 2010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1. 김대중은 없어도 대중은 있다.






"그들이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겠소?" (김학호, 前 중앙정보부 감찰실장)


잠시 그 시절을 이야기 해볼까 한다. 나는 열 살이었고 3학년 이었다. 그날은 마치 오후부터 정전이라도 된 듯 거리에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다. 요즘처럼 학원이나 과외공부가 없었던 그때 나는 방과 후 늘 같이 놀던 친구가 우리집으로 달려와 소식을 전해주어(이 친구는 오랜동안 방송국에서 근무했다. 세상 참) 대통령이 죽었다는 사실을 처음 접했다. 대통령도 죽는 사람이라는 걸 비로소 피부로 체감한 것이다. 아주 오래전이지만 나는 그날 친구의 표정을, 친구와 맞잡은 두 손을 잊을 수 없다. 내가 살고 있는 나라의 대통령이 저격당했다는 사실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 내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 지 가늠할 수 없는 나이였지만 막연히 이제 '김일성이 처들어 오면 어떻게 하나' 수준의 공포와 두려움만은 또렷이 기억한다. 우린 고무줄을 하면서도 '무찌르자 공산당'을 노래하는 철저하게 반공으로 무장된 어린 소녀들이었다. 그날 이후 TV는 지금으로 치면 全 예능 프로그램과 드라마를 일체 방영하지 않았고 근 한 달간 장송곡 분위기의 음악만 들었던 기억도 생생하다.(사회는 임성훈이었다) 나는 내가 유년기였던 70년대 10년을 그 이후의 어떤 10년보다 소중하게 생각하며 그 시절의 추억을 지금 감수성의 시원(始原)으로 추정하는 과거지향의 사람이라 할 수 있다. 특히 76년 서울로 이사온 이후는 일년 단위로 당시 유행하던 서울의 대중문화를 설명할 수 있는 꽤 기억력이 좋은 기록통이기도 하다. 그런 내게 대통령의 죽음은 당시 유일했던 오락문화인 TV의 죽음과도 같았고 그 해 연말까지 그 분위기는 이어져 학교에서도 누구하나 제대로 큰 목소리를 내는 사람은 없었던 그야말로 쉬쉬 '죽어 지내는' 시절에 다름아니었다. 그해 말 1979년도 가수왕은 '제 3 한강교'의 혜은이였고 다리밑의 강물은 무심하게도 흘러 흘러만 갔다.

우리 식구는 강남개발이 시작되면서 붐을 이룬 강남의 서민 아파트에서 서울생활을 시작했고 그해 79년은 내가 태어나 백화점이라는 곳을 처음 가본 해이기도 하다. 바로 집앞에 뉴코아라는 쇼핑센터가 생겼는데 1층엔 'since by 1979, 롯데리아'라고 적힌 신기한 햄버거 가게가 연일 북새통이었고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끝까지 올라가면 맨 윗층 레코드 가게에선 아바의 댄싱퀸(Dancing Queen)이 지겹도록 흘러나오곤 했다. 대통령이 살해되었고 쿠테타가 일어났지만 당시 열 살 소녀의 눈에 비친 한국은 서울은 강남은 크게 대수롭지 않아보였다. 물론 이제 내가 어른이 되고 돌이켜 보니 사람은 아는 만큼만 보인다고 그땐 그랬을 것이고 또 무얼 안다고 해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겠지만 아무리 기억해 봐도 세상은 변한 게 없었던 것 같다. 다음해 신군부가 정권을 잡고 컬러시대로 넘어가면서 학교에서도 반공보다는 데모를 예방하고자 하는 이념교육에 더 비중을 두는 경향을 보이면서 우리에게 박정희와 김재규는 차츰 잊혀져 갔다고 기억된다. 당시 어른들을 기억해볼 때 사회전체가 그 사안을 언급하는 분위기를 확실히 지양했다는 느낌이다. 과거의 상처는 서둘러 봉합하고 앞날을 위해 잊을 건 잊어야하는 책임이라도 있는 사람들 같았다. 그러니까 김재규라는 이름은 얼추 육영수 여사를 암살한 문세광과 그 의미가 크게 다를 바 없었고 그의 유약한 이미지는 그때그때 편할대로 연민의 대상도 되었다가 또 역적도 되었다가 어떨 땐 영웅이 되기도 하는, 그러나 총체적으로는 불쾌한 과거를 반추하는 대표적인 치욕의 이름에 불과했던 것이다.

우리 세대는 70년대 말부터 80년대 중반까지 대체로 '6백만 불의 사나이', '소머즈', '원더우먼', '두 얼굴을 가진 사나이' 등의 미국 외화 시리즈의 미래적이고도 정의로운 주인공에 무작정 감동하며 자랐다. 인터넷과 게임이 등장하지 않았던 그 시절의 TV란 시청률이라는 통계치를 논할 필요조차도 없는 절대적 매체였다. 초등학교때부터 분단국가로서의 국가적 패배감을 잘 학습한 덕에 끝에 가서는 결국 승리하는 정의의 나라, 영웅의 미국은 별다른 의심없이 원대하게 자리잡은 하나의 자연스런 가치관이었다. 중학생이 되자마자 '람보'식의 허리우드 영화의 개봉관에 새벽부터 줄을 서는 우리이기도 했다. 감수성이 가장 예민할 시기인 청소년기에 미국의 팝가수를 선생님 삼고 팝송을 교과서 삼아 영어단어를 외웠다. 마이클 잭슨과 스티비 원더, 신디로퍼등의 미국 가수가 아프리카 난민 자선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불렀다는 'We are the world'는 그 시절 소풍 장기자랑의 단골메뉴였다. 무엇보다 우리는 세계고 세계는 하나라는 이 노래는 얼마나 정의로왔던가. 솔직히 말해서, 미국은 언제나 더 멋지고 근사했다. 내가 기억하는 한국으로는 80년도에 어느 라디오 드라마의 주제곡인 <창밖의 여자>를 열창하며 오빠로 귀환한 조용필이 유일했다. 생각해보니 우린 조용필에 열광하면서도 빌보드 차트를 외우고 다녔다. 사람들은 오랜 세월 억눌려있던 한이 분출되는 듯한 가창법으로 심금을 울리는 한 가수에 마음을 빼앗겼지만 같은 시기 마이클 잭슨의 문워크 댄스와 마돈나의 뮤직비디오를 누구보다 따라 하기도 했다. 잃어버린 유신의 심장은 조용필에게 위로받고 광주의 상처는 춤추며 잊거나 슬그머니 덮어버렸다. 마음과 몸이 따로 논 것이다. 나는 아직도 80년, 내가 4학년일 때 여름방학을 앞두고 친척들이 서울에 올라와 도란도란 저녁 식사를 하던 어느 저녁 TV에선 '미스 유니버스대회'라는 미인대회를 우리나라에서 처음 개최한다고 대대적인 생중계를 하던 장면을 생생히 기억한다. 숀 웨델리라는 공주님같이 생긴 금발의 미국미녀가 1위를 차지하던 그날은 5.18 광주민주화 운동이 일어난 지 불과 오십일도 되지 않은 시점이었지만 우린 그저 그녀의 늘씬한 다리가 부럽고 파란 눈이 예쁘기만 할 뿐이었다.

그 후로 우린 성장했다. 발전했다. 그들이 역사의 소용돌이치는 격동의 시간을 숨가쁘게 지나올 시기에 나는 햄버거를 먹고 팝송을 외우고 영웅에 열광하며 성실히 어른이 된 것이다. 그들이 미국에 이용당하고 배신당하고 감시당하는 바와는 상관없이 30년이 지난 지금 이렇게 기성사회의 버젓한 한명의 대중이 되었다. 지난 30년 동안 내가 살았던 동네는 화려하게 재건축되었고 79년 이후 패스트 푸드점은 헤아릴 수 없어졌으며 마이클 잭슨은 죽었지만 우리 가수들은 한류바람을 일으키며 국가의 위상을 높이고 있다. 나는 그동안 대중의 한명으로서 이 모든 것을 누리며 크게 잘못하고 살아오진 않은 것 같다. 잘난 대중도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우매한 대중도 아니라 생각했다. 그런데 오늘 30년을 이어온 내 대중의 경력에 무언가 큰 기반이 허물어짐을 감지한다. 30년이 지난 지금 새삼 과거의 진실을 아는 것이 그것을 몰랐던 나에겐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이 책은 나에게 당신은 어떤 대중이었고 앞으로 어떤 대중으로 살아갈 것인지 묻는 것만 같았다. 그것은 역으로 그동안 내가 어떤 대중이었는지 스스로 깨닫게 하는 시간을 제공했다. 굳이 국민이 아니라 대중이라고 한 것은 이 책에서 가장 기억나는 하나의 문장 때문이다. 우리나라에 김대중은 있어도 대중은 없다고 말한 어느 장군의 뼈아픈 한마디 때문이다. 책을 덮으며 나는 무엇을 원하는 대중인지를 자신있게 대답하는 것만이 이 책을 읽었다고 말할 수 있는 자격으로 느껴지는 독서였다. 그랬다. 이 책은 나는 이러한 작가인데 당신은 어떠한 독자요, 이렇게 묻고 있었다.

그래서 아마도 나는 그의 작품을 멀리 했던 것은 아닐까, 싶다. 내가 그동안 김진명의 소설을 택해오지 않았던 이유는 진실을 알게 되는 것이 두려웠던 것이 아니고 알고 나서도 달리 어찌할 수가 없을 것 같은 무력감이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미안한 이야기지만 별로 더 알고 싶지 않았다. 대충 골자만 들어도 굴욕적으로 느껴졌기에 30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가 우리 역사의 상흔을 소상히 확인하고 싶지 않았다. 내게 있어 79년은 롯데리아이지 10.26이고 싶지 않았다. 물론, 이 책은 역사보고서가 아닌 소설이라는 거짓말이 허용된 문학의 범주안에 있다. 팩트(fact)를 도입한 픽션(fiction)인 것이다. 하지만 그가 말했듯이 ‘거짓말(fiction)을 하는 대신에 거짓말을 통해 보이지 않는 배후의 진실을 찾아내라는 것이 세상이 소설가에게 준 사명’이라고 했기에 그의 거짓말은 진실을 찾고 보여주기 위한 방법에 불과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가 가장 분명하게 애국하는 방법은 이 거짓말로 진실을 말하는 수밖에 없었음을 안다. 이것은 진실로 진실하기보다 얼마나 힘든 일인가. 대략 진실의 무게가 막중해 보이는 문학을 대할 때 독자는 멈칫거리게 되는 바인데, 나 역시 거짓말은 거짓말로만 치부하고 싶은 독자였다.

어찌되었건 우린 이제 어엿하게 G20 정상회의를 개최하는 나라가 되었다. 일본에선 우리 걸그룹의 군무에 열광하고 김연아, 박태환은 세계를 빛낸 올해의 선수들이 되었다. 우린 원전기술도 수출하면서 어느덧 아프리카에 기부하는 나라가 된 것이다. 적어도 우리세대들이 만성병처럼 지니고 온 국가적 열등감은 많이도 사라져 보인 한해였다. 그런데 국격이 높아 질수록 명치끝이 체증에 걸린 마냥 때가되면 여지없이 불편해지는 한 구석이 있는데 그건 아마도 분단 트라우마로 늘 잠재된 한반도의 평화에 대한 불안이 아닐까, 싶어진다. 바로 엊그제 광저우 아시안게임에 환호하던 어느날 오후 어이없게도 연평도에 포탄이 날아온 그 순간처럼 말이다. 알고는 있지만 그것이 언제인지 다만 알 수 없는 우리의 또 다른 반쪽, 다시 꺼내고 싶지는 않아 제발 지우고 싶은 과거지만 늘 현재로 더 선명해지는 우리의 현실, 외면할 수 없는 우리의 공동체 운명일 것이다.

그래서 '10.26'이라는 숫자는 그 운명을 제대로 인식하기 위한 소중한 문서파일의 비밀번호처럼 느껴진다. 문서를 확인하거나 열어보지 않거나 모두 우리의 자유지만 이 모두에게 알려진 번호는 언제나 우리의 심장을 똑바로 겨냥하고 있다. 우리는 이 번호를 알면서도 좀처럼 문서를 확인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지 않았을까. 알려진 비밀번호는 이미 비밀이 아닌 것 같은 생각, 새로운 비밀이 나타나도 이미 문은 열렸기 때문에 비밀로서 가치는 상실되겠지 하는 생각, 비밀번호를 입력하기만 하면 되는데 그동안 그냥 지나쳤던 건 내가 궁금하지 않은 비밀이라는 생각이 더 컸음이다. 알아야 하는 비밀일지는 몰라도 알고 싶은 비밀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것은 어쩌면 이미 비밀이 아니기 때문이기도 한데 그럼에도 영원한 비밀일 것이므로 모른 척 해온 대중들이 바로 우리인 것이다. 얼마나 편한가, 비밀이었기 때문에 우리는 몰랐다 하면 되는 일이었다. 아니 비밀로 놓아두면 더 좋을지 몰랐다. 그러니 혹시 알고 싶지 않았던 것은 내가 어떤 대중인지 말하고 싶지 않은 이유때문은 아니었을까. 그것은 안다면 어떤 대중인지 알고 있다는 문제와도 같은 이야기이기 때문에. 진실을 알고 나서는 그 어떤 대중도 그동안 진실을 원했다 말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에.

그렇다. 김진명은 대한민국의 대표적 대중소설가이다. 이 때의 대중은 무엇인가. 순수문학을 하지 않는 소설가를 칭하는 뜻이 하나요, 대중에게 많은 호응을 받고 있는 베스트셀러 작가가 다음이다. 나는 그들이 말하는 순수문학도 대중소설도 모두 읽어온 독자로서 편할대로 구분되어지는 의미에서의 '대중'이 정말 불쾌하다. 이런 대중 한사람의 기분과는 상관없이 누구의 대중과도 동의없이 대중은 불리어져 왔다. 그렇다면 문학에서의 대중은 순수하지 않은 사람들이란 말인가. 이 책을 보면 누구보다도 순수한 집단이 바로 대중으로 나오는데 말이다. 이 작품 역시 어떤 소설보다 순정해 보이는데 말이다. 애석하게도 우린 작년에 두 명의 전직 대통령을 잃었고 그중 한명은 '대중은 없어도 김대중은 있다'에 그 김대중 전 대통령이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에겐 김대중도 일반대중도 그 어떤 대중도 없는 것이다. 대중이 없다는 작가의 이 한마디는 대중소설가로서 참 뼈아픈 절규로 들렸고 대중의 한사람으로서 심히 자존심 상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계속하여 대중소설을 쓸테니(쓸 수밖에 없으니) 당신들은 제발 나의 대중이 우리나라의 대중이 되어 달라는 뜻으로도 들렸다. 나는 작가로서 해야할 소명을 다할 터이니 당신들도 대중으로서 똑바로 읽어달라, 하는 부탁조의 경고처럼 들렸다. 정신이 버쩍 드는 한마디에 그동안 나는 어떤 대중으로 살아왔나 시간이 길어지는 탓에, 이렇게 변명이 길었음이다. 이제 그의 대중이 아니 한국의 대중이 되기까지를 정리해보는 것이 그래도 아직 대중은 있다는 소심한 대답이 되지 않을까 싶다. '김대중은 없어도 대중은 있다.', 내가 대중임을 깨닫고 그것을 밝히는 작업이, 리뷰의 목적이자 결과인 이유이다.


 #2. 완전범죄는 없어도 완전추리는 있다.





"이 변호사 같은 사람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경이롭기까지 하오." (재미 도박사, 필립 최)



이 소설은 표면적으로는 10.26 사건의 진상을 추적한다는 과거사의 진실찾기 형식을 취하고 있으며 추적하는 과정에서 모든 연관된 인물을 찾아 실낱같은 단서를 발견해 추론을 정리하는 '범죄의 재구성'단계를 이루고 있다. 재구성된 사건의 진실과 인물의 행적은 과연 오늘날 한반도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 의미를 받아들고서 어떻게 내일을 맞을 것인 지가 아마도 작가가 건네려는 최종 문제지일 것이다. 소설이지만 문학이라는 안전지대 안에서 독자에게 가장 무거운 짐을 안겨주는 장르임에 틀림없다. 예를 들면 어느날 갑자기 경훈이 우연히 받아든 한통의 전화처럼 우린 김진명의 고통스러운 이 보고서 한권을 받아들고 이것을 철저히 검토해 보아야 하는 기분이 드는 것이다. 전화한통에 미국을 접고 고국으로 날아든 경훈에 비하면 우린 비교적 쉽게 마음을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어쩐 일인지 고생으로 밥을 차리는 수고가 한상가득 차려진 밥상보다 차라리 나을지 모르겠다. 정성스런 밥상을 받은 다음 기운을 차린 밥심으로 주먹을 쥐어 본다면 이 소설은 결코 과거를 이야기 하는 소설은 아니지 싶다. 진실일지 모를 과거를 확인한 우리의 오늘과 미래앞날을 다짐하는 우리의 결의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즉, 나는 이 소설을 누구보다도 미래지향적인 이야기로 받아들였음이다.

법학을 전공했고 영어에 능통하고 문학과 예술을 사랑하며 미국에서 유학한 우리의 엘리트 경훈과 수연은 남북정상회담이 개최될 당시 이미 이립(而立, 스스로 서다)한 인물들로 얼추 내 세대와 동일한 젊은이들이었다. 경훈은 보스턴 최고의 천재 변호사로 수연은 하버드 캠브리지 광장에서 판소리를 불러 제친 멋진 유학생으로 등장해 각각 이성과 감성을 조화시켜 환상의 콤비 플레이를 펼쳐 보인다. 기실, 이들이 진실에 가닿으려는 노력이 결국 우리나라의 희망을 약속하는 일일 것이기에 이는 다분히 다음세대로부터 한반도의 미래를 소원하는 작가의 의도로 읽혀졌다. 더불어 같은 시기 같은 고민을 하지 못했던 내 자신을 반추해보며 부끄러움을 떨칠 수 없게 만든 인물이기도 했다. 수연은 고비때마다 경훈에게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하고 사건을 한발 물러서 통찰하게 하는 역할이었고, 경훈은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단서들을 한데 모아 마치 3차원 입체 퍼즐을 신기하게 끼워 맞추듯 비범한 추리를 도출해내는 재능을 선보였다. 나는 특히 경훈이 관상을 잘보는 인물로 설정된 것이 흥미로왔는데 이는 분석이나 추론은 물론이고 그것을 넘어서는 직관력이 뛰어난 인물로서 완벽한 물증이 없는 완전범죄마저도 경훈을 피해갈 수 없도록 절대능력을 부여하고자한 작가의 의도된 보너스로 생각된다. 얼마나 답답하고 분통이 터졌으면 차라리 역술을 이용해서라도 소설속 진실을 더 굳건히 하고자 했을까. 작가는 자신의 확신만으로 어떤 주장을 믿어 달라고 할 수는 없지만 모두가 끄덕일만한 상황논리를 제시한다면 설득력이 생기지 않겠느냐고 말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설득되지 않는 나머지 강심장들에게 믿거나 말거나의 칼자루를 쥐어줄 때 하고 싶은 한마디는 무엇일까. 때로는 내 두 눈으로 보는 것 보다 멀리있지만 용하디 용한 점쟁이의 한마디가 신앙처럼 힘이 실릴 때가 있지 않은가.

그런 면에서 신적인 힘을 겸비한 경훈이 죽어가는 노인의 전화를 받은 것은 거스를 수 없는 운명의 계시라 할 것이다. 어떠한 계기인 지 10.26이 상징하는 비밀의 단서를 전달받았을 최초 작가의 운명처럼 말이다. 작가가 이 운명을 모르는 체 넘어갈 수 없었듯이 경훈 역시 자신의 조국이 호출하는 신호를 외면하지 않았다. 목숨이 넘어가는 순간에도 참회하듯 자신에게 온정을 보여준 조국의 젊은이에게 전화를 걸었던 제럴드 현은 평생 정보공작 요원으로서 벌어온 전 유산을 수연에게 남긴다. 자신의 세대에선 비록 미국을 위해 한국을 배신할 수밖에 없었던 신분이지만 다음 세대인 당신들은 자신과 같은 불행을 겪어서는 안된다는 유언의 의미였을까. 제럴드 현의 유산은 수연과 경훈이 10.26의 사건을 재조사 하는데 쓰여 지는데 나는 한국의 정보를 조사하는 댓가로 받은 돈이 다시 한국의 진실을 찾는 비용으로 사용되는 것이 대단히도 마땅해 보였다. 다만 그 비용이 한 정보공작 요원의 서글픈 인생을, 한국의 아픈 현대사를 의미하는 것이기에 얼마나 목메이는 목숨값이던지 그것이 숙연했다. 그가 미국의 계획된 약물로 정신질환을 알아가면서 까지 지켜온 최상급 비밀의 값이 아니던가. 아니, 우리가 눈물로 되찾은 진실값 그렇기에 영원히 버리지 말아야할 다짐의 값일 것이다. 제럴드 현이 조국을 위해 헌사한 유산의 의미를 볼 때 이 소설은 그를 비롯해 비밀을 함구하고 사라진 많은 정보공작요원들의 죽음을 애도하는 헌정집이라는 느낌도 들었음이다.

조국으로 돌아온 경훈은 한국과 미국의 경계선에 있던 제럴드 현의 죽음을 파헤치는 것이 곧 김재규가 박정희를 죽인 이유를 밝히는 일로 생각하고 그와 관련된 사람들을 찾아 나선다. 제럴드 현은 10.26과 마땅히 관계되어야 할 최고위의 인물이었지만 10.26 시점에 철저히 배제되어 비참한 최후를 맞았기 때문이다. 경훈은 김재규를 탐문했던 수사관을 시작으로 제럴드 현의 주치의였던 로널드 숀과 그의 지인이었던 당시 경찰신분의 오세희, 그의 밑에서 김재규를 담당했던 브루스와 홀리건, 당시 중앙정보부 감찰실장 김학호 장군등의 인물을 좇아가며 사형장에서도 내 배후엔 미국이 있다고 절규한 김재규의 유언이 사실이었음을 차분히 그러나 충격적으로 입증하기 시작한다. 이 추적의 과정은 종점역이 이미 고지된 예정의 기차여행이라 할 수 있었지만 각 구간의 여정이 단 한순간도 편했던 순간은 없었지 싶다. 인물 한명 마다의 사연의 밀도가 높았으며 따라서 서사의 긴장감이 끝까지 유지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경훈의 완전추리를 위해 발휘된 작가의 완성도를 향한 집착에 나는 서서히 뜨거워지고 있었다.



 #3. 애국은 없어도 애국자는 있다.





"나는 나의 조국을 위해서 일하는 것을 기쁘게 생각하오."
(美 정보 공작요원, 제임스)


한마디의 유언을 듣고 시작되는 위험한 여정은 결국 작가 자신이 진실을 찾아가는 행로와 방법을 소설로 기록했다는 생각이다. 그 과정에서 경훈은 누군가는 사고를 당했고 누군가는 실종되었고 누군가는 실직되었음을 확인하며 생존해 있는 사람들도 각자 자신이 담당했던 역할로서만 혹은 자신이 예측하는 몇 가지 추리로서만 사건과 인물을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과 마주한다. 조각조각 분해되어 은폐된 퍼즐을 한자리에 모아놓고 진실로 맞추는 몫이 작가의 대리인 경훈의 역할이었다. 주목할만한 사실은 경훈이 만난 사람들 모두가 자신이 속한 분야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프로였다는 것, 그들은 자신의 나라와 10.26에 대해 박정희와 김재규에 대해 소신있게 나름의 견해를 피력한다. 나는 사실 김재규가 박정희를 죽이고자 한 동기와 거사의 과정 및 결과, 배후인 미국이 김재규를 이용하고 철저히 배신한 사건의 진실자체 보다는 경훈이 물어 물어 만난 사람들의 다양한 목소리가 더 인상깊었다. 여행의 목적지보다는 여행하며 만난 사람들이 더 기억난다. 그들은 모두 자신의 나라를 위해 일했고 몸담은 조직에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애국자와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이 책을 쉽게 집어 들지 못했던 이유도 바로 애국과 민족이 지겨웠기 때문이기도 한데(우린 국가와 기념일가, 헌장을 외워 애국을 시험본 마지막 세대이다) 이들의 애국은 구태의연해 막상 지나쳐버린 잔소리 같았어도 책을 덮고 나니 은근히 번져오는 끈끈한 저력이 있었다. 피를 데우는 방법과 속도가 진부하긴 했어도 데우긴 데웠던 것이다. 하지만 애국자이기만 하면 모두 진정으로 애국하는 것일까.

정치적인 글쓰기를 예술로 만드는 일에 큰 관심을 보였던 조지오웰(1903-1950)은 그의 에세이(Notes on Natiolalism,1945)에서 애국주의와 민족주의는 전혀 다른 말이라고 한 바 있다. '애국주의(patriotism)'는 특정 지역과 특정 생활양식에 대한 애착이며, 그것이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것이라 믿되 남들에게 강요할 마음은 없는 것이지만 '민족주의(nationalism)'는 자신을 단일한 나라 또는 다른 집단과 동일시 하되 그것을 선악을 초월하는 것으로 간주하고 그것의 이익을 증진시키는 것만이 전부라고 여기는 것이라 한다. 즉, 애국주의는 속성상 군사적 문화적으로 방어적이지만 민족주의는 힘의 원리에 따라 공격적이고 경쟁적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민족주의자는 극명한 거짓이나 잔학행위등을 범하고도 자신이 무엇을 섬기고 있다는 의식 때문에 심리적으로는 자신이 옳다고 확고한 신념을 가진다. 민족주의적 충심이 개입되면 도덕과 정의에 대한 감각을 잃고 만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그렇게 본다면 미국은 애국을 앞세워 민족주의적 습성을 강요, 고집하는 강대국이었고 우리는 한민족이라는 원죄로 인해 애국이라는 감정에 저당잡힌 분단국이었던 것은 아닐까. 우리의 딜레마는 애국주의가 허용하는 만큼만 민족적일 수밖에 없는 분단의 현실에 있다는 것을 미국은 너무나 잘 이용하고 있는 나라인 것이다. 즉, 김재규는 미국의 민족주의로 애국을 하려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애국하진 않았어도 애국자이고 싶어했던 것이다. 그와 우리를 애국으로 이용한 미국을 보면서 도덕과 양심이 사라진 민족주의야 말로 위선으로 무장된 독재요 평화를 가장한 전쟁의 핵심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제럴드 현과 친분이 있었던 캐나다의 오세희는 자수성가한 사업가로서 경훈에게 이 나라의 이민정책이 더 활성화되어야 함을 강조하며 유대인과 맞먹는 한국인 특유의 핏줄근성을 강조했다. 그는 이 모든 것에 한국인이 조국과 역사에 대한 자부심을 잃었기 때문이라는 뼈있는 말을 한다. 돈과 땅이 있는 나라를 두루 살아본 사업가의 애국하는 방법이었다. 김재규에게 영어를 가르친 또 한명의 정보공작원 브루스는 김재규의 주한미군철수를 막아 달라는 부탁을 혼신의 힘을 다해 절규로 통역한 자신이야말로 한국에서 주한미군철수를 막아내어 한국인을 전쟁으로부터 지켰다고 큰소리를 친다. 미국 정부의 공무원은 대부분 약소국가에 대한 우월감을 행사하는 것으로 자신의 역할을 행사한 것이다.

이 책에서 가장 인상깊었던 인물 중 김재규와 모든 일을 상의하던 중정의 감찰실장 김학호 장군의 회한도 잊을 수 없다. 그는 내가 급소를 찔린 듯한 한마디 김대중은 있을지 몰라도 그냥 대중은 없는 거라며 첩보는 조작이고 그 희생자는 언제나 대중이라고 말한 인물, 중정의 제 2인자였다. 그는 김재규의 기일에 바에서 술을 마시다가 '통일이 된다면 사나이 한목숨 무엇이 두려운가' 노래를 흥얼거리던 애국자였다. 나는 안 죽는다 울부짖으며 부축해주는 경훈에게 변호사가 한밤중에 취한 노인을 일으켜 주다니 이 나라가 그렇게 된 나라냐고 묻는다. 자기만 살자고 화장실로 내뺀 경호실장 차지철을 그때 패죽이지 못한 것을 땅치며 후회한다. 김재규와 정부전복을 위한 도상훈련을 늘 연습해 왔기에 그로부터 '김학호, 시작해' 이 한마디를 못들은 것에 아쉬워하고 김재규를 향한 통한의 원망을 숨기지 않았다. 이 나라의 애(愛)국자는 슬프게 늙어  애(哀)국자가 되어 있었다. 그를 보며 나에게도 통일이 우리의 소원인 줄로 믿었던 어린 시절이 생각이 났다. 소원을 말해보라고 하면 순진하게도 배운 대로 통일이라고 말하던 우리, 다른 소원은 무조건 통일 다음이어야 하는 줄로 알았던 그때가 그립기도 했다. 40년을 정보부의 최고 핵심직으로 부정과 축재하지 않았음을, 죽일 놈은 죽이고 살릴 놈은 살렸음을 외치던 장군의 목소리는 흡사 독립투사의 애국심과 다를 바 없게 느껴졌으며 서문에 특별히 이젠 유명을 달리한 김학호 장군의 도움에 감사하다는 작가의 인사가 더욱 뭉클하게 다가왔던 인물이기도 했다.

이 책에서는 박정희, 김재규, 제럴드 현의 죽음외에도 김형욱과 케네디의 죽음을 흥미롭게 분석하는 경훈의 추론이 제시되어 있다. 김형욱은 10.26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고 볼 수는 없지만 박정희, 김재규와 깊게 관련된 인물이고 중앙정보부가 암살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한시절의 권력자였다. 케네디는 박정희의 자주국방과 같이 비교 언급되던 같은 암살의 희생자였다. 경훈은 김형욱의 실종이 중앙정보부의 보복이라기 보다는 도박의 빚으로 인한 자멸이 더 타당하다고 보는 결론을 내리고 케네디의 암살은 세계평화를 지향하던 그의 정의가 화를 자초했다는 조언을 확인할 수 있었다. 실종된 김형욱의 마지막 일주일을 회고하던 전문도박사 필립 최는 조국과 지도자에게 버림받은 김형욱이 권력자가 아닌 평범한 인간으로서 도박에 나머지 인생을 걸 수밖에 없었던 심리를 생생한 증인이 되어 들려준다. 제럴드 현의 메모에 등장한 케네디의 동서화해와 박정희의 자주국방은 바로 미군부와 CIA, 군수산업체의 표적이라는 점에서 본질이 같으며 이는 곧 미국이 패권주의로 세계를 지배하기 위해서라면 어느 나라의 정상도(심지어 자국의 정상까지도) 무사하지 못할 것이라는 중요한 해석이었다. 케네디는 김대중 전 대통령도 유세현장에서 암살소식을 들었을 때 세상이 원통하고 억울하다는 생각뿐이었다고 한 그 시대 정의의 표상이었다. 김형욱의 미스터리가 경훈의 추론대로라면 우리 정부는 진실을 폭로한 자를 죽인 것은 아니며 미국 정부는 진실을 추구한 자를 죽인 것이 된다. 갑자기 미국이 서늘해지는 순간이었다. 이들 두 사람 외에도 진실 가까이 있는 사람들의 무고한 죽음을 보면서 진실은 항상 목숨근처에 존재하는 위험성을 제 숙명으로 하는 것이기에 진실을 지키는 것은 결국 우리의 생명, 인류의 보존을 이어가는 것이 아닐까 하는 무거운 생각이 들었다. 


 #4. 형님은 없어도 형제는 있다.





"언젠가 이 형제라는 단어가 필요할 때가 있을 것이오."
(케렌스키, 美 변호사)


하지만 이 책은 세계평화라는 대전제를 앞세워 뒤에선 전쟁으로 이익을 챙기는 미국의 만행을 폭로하고 규탄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정의를 잃고 자국의 실리를 추구하는 방편으로서만 약소국을 철저히 계산하는 미국을 고발하고 적대시하자는 방향성을 가진 소설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러하기에 더욱 미국과의 바람직한 우방관계에서 얻어지는 한반도의 미래상을 넌지시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반미가 아닌 오히려 친미의 결론을 지향하고 있다고 보고 싶다. 바로 보스턴에서 경훈을 스카웃한 케렌스키 변호사의 극적인 행보와 그가 찾던 진실이 그것을 증명한다. 케렌스키는 강대국 미국의 최고 지식인으로서 우방을 존중하고 평화를 사랑하는 선량한 양심을 상징한다. 그는 경훈에게 필립 최에게 물건을 받아오라는 부탁을 할 때 언젠가 '형제'라는 단어가 필요할 것임을 꼭 기억하라고 말한다. 그 부탁은 자신(미국)의 일이기도 하지만 경훈(한국)의 일이기도 하다는 의미심장한 말과 함께였다. '형제'는 필립 최로부터 받은 목갑에 들어있는 디스켓의 암호였고 그 안에 들어 있던 극비문서들은 그동안의 미국이 저질러온 온갖 은폐된 공작들-걸프전과 아시아의 외환위기, 김대중, KAL 007 사건 파일등-이었다. 진실을 찾아가던 이들 두 형제는 진실로 용감했는데 이는 오늘을 사는 최후의 분단국가 한국에서 벌어진 일은 바로 미국의 일이기도 한 것이며 그것은 오래된 형제애를 바탕으로 이루어진 상호 믿음에서 비롯되어야 한다는 강조의 의미로 느껴졌다. 케렌스키 같은 미국인만 있다면 미국은 얼마나 멋진 나라인가.

경훈이 한국 현대사에서 치명적인 사건의 진실을 추적하듯 케렌스키는 미국의 범죄를 상대로 고독한 전쟁을 준비하는 인물이었다. 이들은 미국 CIA의 조작과 공작의 진실을 밝혀내려했기에 결국 경훈과 케렌스키는 같은 그림자를 추적한 것이었고 그 그림자는 한국과 미국이 관계되는 은폐된 진실에 다름아니었다. 이들이 각자 추적한 진실은 작품 마지막에 남북정상회담을 저지하려는 미국의 암살음모라는 공통의 지점에서 약속이나 한 것처럼 조우한다. 한반도의 분단으로 야기된 우리 민족의 비극적 회의 테이블위에서 정확하게 마주 친 것이다. 모두 미국에서 날아들어 결국 분단지대라는 대치 장소에 모인 그들. 그 순간 작가의 치밀하고도 계획된 그리고 짜릿한 플롯의 결말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이었을까. 우리는 올초 천안함 사건과 얼마전 연평도 폭격을 맞아 어느 때보다도 한반도의 긴장상태를 실감하는 한해를 보내었다. 하지만 북한의 공격을 맞을 때마다 반사적으로 미국을 향해 구원의 눈길을 보내는 우리의 처지가 피할 수 없는 작금의 현실인 것이다. 북한을 규탄하는 미국은 북한의 남침 공격을 환영하고 있을까. 우린 미국이 허락해야 북한에 미사일을 쏠 수 있겠지만 미국은 우리의 동의없이도 북한을 공격할 수 있을까. 한미관계의 모든 결론은 결국 우리의 분단현실로 귀결된다는 작가의 마지막이 한없이 슬프고 소름돋았다. 모든 것은 한가지 뿌리에서 시작되었다는 한마디를 실감한다. 더불어 케렌스키를 보면서 자국 CIA의 잘못된 공작을 파헤치려 목숨을 걸 수도 있는 미국인이 정말 존재할까 그러한 양심있는 변호사가 있다면 어린 시절 내가 보아왔던 미국의 영웅이 모두 거짓은 아닐텐데, 하는 생각을 했다.

케렌스키는 김학호 장군과 함께 내 심장을 가장 울렁거리게 하던 인물이었다. 그는 자국의 비행기 폭파사건을 조사하던중 CIA가 진실규명이 아닌 진실조작과 은폐집단이라는 것을 깨닫고 충격과 회의에 빠져 도박으로 그들의 눈길을 피하고 몰래 범죄행각을 수집해온 사람이었다. 작품 초반에 자살로 위장된 그의 의문死는 후반부의 통쾌한 반전을 위한 트릭이었던 것이다. CIA는 미국의 무기이권을 위해서라면 국제테러범을 후원, 보호하기도 하고 자신들을 폭로하려는 CIA요원들을 제거하기도 하는 무소불위의 불가항력적 권력을 행사하는 집단이었다. 그는 경훈에게 군축과 통일을 위해 남북정상회담을 추진하려하는 김대중 대통령이 케네디와 박정희와 같은 위험에 처해있음을 알려주고 한국의 수사관은 제임스의 암살명단을 빼낸 후 죽임을 당한다. 만약 북한의 인사들이 암살을 당하고 미국의 계획대로 쿠테타가 일어난다면 우리는 기뻐해야 하나, 슬퍼해야 하나. 이 작품은 충분히 가능한 가상의 상황만으로도 북한과 미국, 그리고 우리의 역학적 관계를 시뮬레이션하도록 유도하고 있었다. 군인과 정치인이 아닌 일반 대중으로서 우리가 가져야할 태도와 방향성을 대중의 정체성으로 요구하고 있었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대중을 깨우친 한명의 미국인, 브루스의 후임 홀리건이면서 케렌스키가 추적하던 카를로스이면서 제임스라는 무기거래상과 동일인물인 그의 충고아닌 충고를 되새길 필요가 있다. 그가 거쳐 온 업무가 곧 여러 얼굴을 가진 미국의 범죄행로이기 때문이며 그가 말하는 한국이 곧 미국이 대변하는 우리이기 때문이다. 그는 진실을 알고있는 제럴드 현의 주치의 로널드 숀을 교통사고로 위장해 살해하고 진실을 추적하던 경훈을 약물에 의한 자살로 제거하려 했던 인물이다. 후반부에 경훈과 대치하던 제임스는 한국인은 자신의 조국에 무관심하며 미국이 북한을 폭격하면 미국편에서 북한과 전쟁을 치르겠다고 하는 나라가 아니냐 묻는다. 북핵은 남북한의 문제가 아니고 미국을 위협할 수 있기 때문에 겁을 내는 것이라 말한다. 자신을 비난하는 당신네 나라는 미국의 전위대가 되려하면서 그렇게도 자랑스럽냐고 민족을 부정하는 한국이 훌륭한 것이냐를 따져 묻는다. 한국의 지식인들은 조국에 봉사하는 것을 부끄러워하며 애국하면 비난받는 나라인데 자신이 CIA를 위해 일하는 것이 왜 비난 받아야 하느냐 외친다. 입이 열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조국을 최강국으로 유지하는 역할에 자부심을 느끼는 제임스의 보기좋은 비아냥거림은 우리 모두를 숨죽이게 하지 않았는가. 경훈 자신도 미국 유학 당시 온전한 미국인이 되길 바랬기에 우린 다같이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었던 순간이었다. 미국이 북한과 전쟁을 한다면 미국이 이기길 바래었을, 북한정권이 무너지는 것이 한반도가 평화로와 진다고 믿었을 경훈은 곧 우리의 모습과 다르지 않았다. 제임스는 똑똑한 미국의 애국자가 맞았던 것이다. 미국엔 양심의 케렌스키보다 똑똑한 제임스가 더 많은 것이 아닐까. 
 

  #5. 햇살은 없어도 하늘은 있다.





"왜 한국인들은 5천년을 이어온 민족의 저력을 생각지 못하는가."
(前 치안본부 외사과 간부, 오세희)


이 책의 마지막에 우리는 경훈과 수연의 귀가 되어 대통령의 목소리를 듣고 한차례 목울대가 울렁이는 순간을 맞이한다. 작가는 우리가 하고 싶은 질문을 수연을 통해 대리질문한 후 듣고 싶었던 대답을 듣게 하는 것으로 이야기의 막을 내린 것이다. 오천년을 이어온 우리의 하늘을 보며 당신도 같은 것이 보이느냐 묻는다. 똑같은 파란의 하늘인지 확인하라 말해준다. 그 순간 나는 하늘은 보이지 않고 앞이 흐려지며 지난시절의 내가 아는 대통령들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우리의 동의 없이 미국이 북한을 공격하면 우린 절대로 한 핏줄을 겨냥하지 않을 것이라는 목소리가 그들의 목소리로 들려왔다. 비록 국제정세와 미국의 압력, 무엇보다 우리 자신의 안보등을 제쳐두고서라도 내가 듣고 싶은 한마디였음이 알아 진 것이다. 대통령 역시도 뒤돌아선 어떤 대처를 하였을지 모르지만 그 순간 우리 앞에서만은 진심이었다고 믿었다. 원통하게도 바위에 몸을 던진 노무현, 퇴임후 늘 못마땅한 표정으로 공식행사에 등장하는 김영삼, 수년째 와병중인 노태우, 심지어는 근근이 추징금을 내고는 있다는 전두환 전 대통령까지도 그 순간만큼은. 나도 모르게 눈물이 차올랐다. 그 순간 어느 드라마에서 세계 초일류 국가를 만들기 위해 강한 대통령이 되겠다는 배우도 더 이상 억울한 국민의 죽음이 없도록 하기위해 대통령이 되었다는 또다른 배우도 떠올랐다. 그 순간 나는 애국자인 대중이었다. 왜 아니겠는가. 올해 김연아 선수가 완벽한 연기로 금메달을 따는 순간 동시에 흘렸던 눈물이었다. 박세리 선수의 하얀 맨발이 그렇게도 목이메던 우리였다. 빼앗긴 금메달의 한풀이라도 하듯 축구경기에서마저 미국을 조롱하는 골 세레모니를 선보이던 우리였다. 그 옛날 머리 하나가 더 큰 중공선수들을 꺽고 결승전에 올라가던 농구선수들처럼 얼싸안고 다같이 울분이 터지던 우리였다. 더 옛날엔 '엄마 나 챔피언 먹었다'는 4전 5기의 신화로 불굴의 의지를 세계에 각인시킨 우리였다.

당장 미국 제품을 쓰지 않고 코쟁이의 노래를 듣지 않고 미국을 대책없이 미워만할 자신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린 미워도 다시 한번 영원한 우방으로 그들을 의존해야 할 현실의 대중이었다. 이 책의 결말은 진실을 알았지만 그저 오천년이나 이어온 무심한 파란 하늘을 바라보는 그 마음 하나로 끝이 난다. 우리가 CIA나 군수업체나 미국의 이기주의를 이길 수 없을진 몰라도 역사적인 자긍심 하나만은 빼앗기거나 잃지 말아야 함을 강조하는 작가의 마지막은 어찌보면 허탈하고도 서글펐다. 결국 마음 하나뿐이라는 응답에 눈시울이 시큰해졌는지 모르겠다. 애초부터 이러한 결말을 예상했기에 그를 외면하려 했던 것이 아니던가. 미국을 몰랐던 것은 아니지만 우리에게 일 줄은 아니라 믿고 싶었다. 우린 믿었고 믿어야 했고 믿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사실인 것이다. 제임스가 버티고 있어도 케렌스키같은 미국인도 있을 것이라 믿어보는 수 밖에 없음이 그저 이 책 한권으로 당신도 나와 같을 것임을 믿는 것외에는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것이 숨이 찬다. 통일이 되면 무언가 피곤해질 사회분위기가 싫어 변화를 두려워하던 우리들이 부끄럽다. 나 사는 동안엔 그저 아무 일도 일어나지 말기를 바라면서 무사안일주의의 공무원을 비난하는 우리가 웃기고 우습다. 우린 하늘을 보며 어렵게 주먹을 쥐었지만 이제 어찌해야 하는가. 오천년을 이어온 하늘이라는 게 우리를 쳐다보고 있기는 한 것인가.

맨 처음 하버드 캠브리지 광장에서 우리 것은 하나도 없는 것 같아 악기를 배워 판소리를 부른다는 수연의 당당한 목소리를 떠올려 본다. 수연의 판소리는 우린 그래도 오천년 역사가 흐르는 민족이라는 1인 시위의 목소리와 다르지 않았음을 이제야 알겠다. 우린 얼마나 우리 것도 있다는 것을 소중하게 생각지 않았던가, 아니 우리 것이 있다는 것조차 잊었던가. 우리가 업신여겼으니 그들이 무시함을 탓할 수 없는 노릇 아닌가. 우리 잘못도 있었지만 강대국 틈에서 살아가는 생존방식이 우리를 그렇게 만든 것이다. 하지만 이제 우린 금메달을 빼앗겼다고 애꿎은 우리의 태극기를 불태우는 그 나라의 심정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다. 지진으로 모든 걸 잃은 나라를 위해 한가득 구호품을 싣고 달려가 도울 수 있다. 우린 우리가 억압받고 또 그것을 극복하며 살았기에 그 사람들의 고통에 눈물지을 수 있는 민족인 것이다. 나이 들고 보니 내게 밥을 사주는 사람도 고맙지만 밥 못먹을 때 곁에서 같이 울어주는 사람이 더 사무친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어쩌면 남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는 그 마음 하나, 그것을 잃지 않는 일이 전부가 아닐까. 우리의 이익이 조금은 줄더라도 더 같이 오래 잘 살기 위해 누군가의 어려움에 손길을 내미는 형제같은 나라, 친구같은 민족이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미국처럼 정보와 무기, 권력을 이용해 세계의 전쟁과 평화를 자국의 이익의 도구로 활용하는 강대국이 절대 더 이상 평화로울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믿는다. 우리는 미국이 되어도 미국처럼은 아닐 것이기에 우리의 믿음은 때로 흔들리고 때로 허물어 지겠지만 오천년 이어온 한민족의 끈기처럼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내가 당신을 믿고 당신도 나를 믿는 우리 모두라면 서로를 불신하는 그 어떤 나라도 우리의 운명을 함부로 조작할 수는 없을 것이다. 미국문서 보관서에 보관되었다는 에버레디계획처럼 우린 늘 믿음이라는 준비를 믿을 수 밖에 없지 않겠는가.  

우리 그렇게 다시 하늘을 보자. 30년 후에 꼭 나와 나이가 같을 내 아이가 바라볼 하늘이기에 더욱 간절하다.  당신의 두 눈이 하늘을 향하는지 내가 확인할 수 없듯 당신또한 마찬가지겠지만 이 순간 다같이 하늘을 보며 잠시 손잡고 한 뜨거운 약속만큼은 믿어보기로 하자. 이제 당신과 내가 같은 민족임이 자랑스럽고 같은 하늘 아래임이 벅차지 않은가. 이보다 더 벅차고 가슴이 뛰는 민족이 있다면 그들 역시 우리의 조상이었거나 우리의 후세일 것이다. 이토록 벅찬 가슴 하나만은 잊지 말자. 우린 그것만이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최선의 무기임을 이미 잘 알고 있지 않았는가. 내가 당신을 믿는만큼 당신도 나를 믿어주길, 나는 그 질긴 믿음하나로 한반도를 사랑하겠다. 국민누구도 그날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듯 국민누구도 오늘로부터 잊혀지지 않길 소망한다. 그러므로 우리 내일의 뜨는 태양도 여전히 오천년의 하늘 아래 아니겠는가. 우린 그 하늘아래 이토록 뜨거운 한민족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비로소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러움 없는 한명의 대중이 된 것이 아니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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렛미인 1 블랙펜 클럽 BLACK PEN CLUB 10
욘 아이비데 린드크비스트 지음, 최세희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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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 속에 비친 아이   ....  雪鏡
"난 완전히 혼자야.
 난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어"

책을 덮었을 때 어느 시골마을의 눈밭에 웅크리고 앉아있는 어린 아이의 환영이 떠올랐다. 소년인지 소녀인지 무릎에 얼굴을 묻은 아이에게 가만히 다가가 안아주고 싶다는 생각, 내 손이 차가운 눈보다 따뜻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니 내가 눈이 되어 잠시 아이의 바닥이 되어주고 싶었다. 한 줄 한 줄 눈처럼 쌓여버린 문장들로 나는 눈사람이 되어 아이에게 어깨를 내주고 싶었다. 그렇게 곁에 머무를 수 있다면 그 순간 내게 피같은 건 통하지 않아도 좋을 것 같았다. 언젠가는 녹아 내릴 운명이지만 아이가 외롭지 않다면, 나로 인해 울지 않을 수 있다면 얼마든지 서 주고픈 꼬마 눈사람...이 책을 읽고 처음으로 눈사람이 되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그리곤 눈사람 또한 얼마나 외로웠을까 싶어진다. 한겨울 친구들과 만들어 놓고 두고 온 눈사람을 떠올리게 한다. 그 눈사람은 언제쯤 녹아 내렸을까. 아니 언제까지 살아 있었을까.

내 유년이 쌓은 눈사람을 맨발로 찾게 만드는 책, 호호 불며 입김을 내뿜던 친구들의 빨개진 코가 시큰해지던 책, 여기저기 헤매다 겨우 발견한 그 녀석이 녹아 사라진 걸 기어이 확인하게 만드는 책. 내게 있어 『렛미인』은 외로움이라는 눈송이를 조심스레 굴려 쌓아 올린 살아있는 인형, 그것을 어루만지는 일이었다. 책을 읽는 내내 나는 어린 시절에서 더 이상 자라지 못하는 영원한 유년이었기 때문에. 나는 지방에서 서울로 전학온 촌티나는 아이였고 청년이 되기까지 외톨이로 생활하는 방법을 꽤 일찍 터득한 대견한 학생이었다. 그 시절 내 어머니의 교육열은 맹모삼천지교와 다를 바가 없었기에 나는 거의 일년에 한번 씩 전학을 가야했고 부산시절을 포함해 초등학교 여섯 군데를 거쳐온 학생이기도 했다. 그러니까 그중에 생애 최초의 학교생활 1년을 고향인 부산에서 보낸 것인데 나는 나머지 학교생활을 거의 그 일년을 그리워하며 버텨낸 거나 다름없었다. 내 소꿉친구들은 하나같이 바다와 함께하는 여름의 벌거숭이였고 시끄럽게 물장구치는 장난꾸러기였다. 눈이 바다보다 귀했던 그곳에서 나는 딱 한번 친구들과 그럴싸한 눈사람을 만들고는 하루종일 집에 들어가지 않았던 겨울날이 있었는데 지금 기억해보면 억지로 그 얕은 눈을 뭉쳐 어떻게 해서라도 눈사람을 한번 만들어 보겠다는 의지만큼은 실로 대단했던 것같다. 그땐 친구들과 영영 헤어지게 되는 앞날 같은 건 생각지도 못할 나이였던 나... 그날 이후 서울의 겨울은 무섭도록 추웠고 지겹게도 눈이 많아 부산에서의 어설픈 눈사람에 비하면 훨씬 더 근사한 눈사람을 만들 수 있었을 터인데 나는 한번도 눈사람을 만들어 본 적이 없다. 그러니까 그때 그 눈사람은 내 유년의 마지막 인형이었다.

이 뼛속까지 허기지는 그리움은 책을 놓고도 한참을 마음잡지 못하게 하는 짓궂은 구석이 있었다. 작가의 나이를 살펴보니 얼추 내 세대인 데다가 작품의 배경시점도 공교롭게 80년대초 내가 막 서울에 이사와 한참 새로운 환경에 적응할 시기였기에 나는 그 시절의 나를 작가의 숲속에서 빈번히도 마주쳤다. 그렇게도 소원하던 눈사람이라면 언제라도 쉽게 만들 수 있을 것 같던 서울의 겨울이었다. 지독히도 추웠던 한겨울 영하 18도(그땐 그렇게도 추웠다), 무릎까지 쑥쑥 파묻히던 학교앞 눈길, 친구를 사귀면 어짜피 또 헤어질 거라는 두려움마저 새하얗던 그때였다. 그로부터 30년이 지난 지금, 12살 뱀파이어 소녀에게 그 소녀를 사랑하는 소년에게 나는 대체 무엇이 감염된 것일까.

물어 물어 영화를 보았다. 우선 소설을 읽고 영화를 본 경우이다. '렛미인'이라는 영화를 들어보기는 했지만 겨울도 싫어하고 피를 부르는 영상을 유난히도 두려워 하는 내가 부러 선택할만한 작품은 아니었다. 또 하나 이미 소설로 감명받은 작품을 뒤늦게 다시 영화로 보았을 때 대략 <오페라의 유령>이나 <다빈치 코드>식의 실망을 하게 마련인지라 망설임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스웨덴 영화에서는 원작자가 각본을 맡았다기에 어떻게 첨삭을 했는지도 궁금했고 이토록 쓸쓸하고 애잔한 느낌을 시각으로도 느껴보고 싶었다. 영화로 본다면 허리우드식이 아닌 북유럽식이 어울릴 것이라는 생각도 한몫했다. 다행히 영상은 아름다움이 슬픔과 동의어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해주었고 영화를 보지 않았더라면 이 작품이 허전하고 아프게만 남았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영혼이 아름답던 두 친구로부터 소설의 트라우마를 위로받다니...단기간에 병주고 약주는 살아있는 체험이었다. 어쩌면 인생이라는 것도 결국 과거의 상처를 오늘에 반추해 봄으로써 신기하게도 당시의 상처가 치유되는 체험학습이 아닐까. 소설에서 숲속을 헤매는 기분이 들었다면 영화에선 그 시절 내 어린 친구들을 찾아 어렵게 만나고 온 기분이 들어 결과적으로 잘했다는 생각이다.

그런데 이상한 건 소설이나 영화나 흡혈귀라는 주인공의 속성이 가지는 가장 명확하고도 구체적인 '피'에 대해서는 그다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심지어는 하얀 눈밭에 얼룩지던 빨간색의 방울마저도 그것이 우리의 몸속을 흘러 다니는 '피' 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이 분명하고도 단순한 시각적 정보를 차단하는 무언가가 철저히 버티고 있다는 느낌, 이 소설은 뱀파이어의 소설이 아니었다. 시각으로 증명되는 뱀파이어를 보고선 오히려 더욱 확신이 들었다. 아니 어쩌면 뱀파이어라도 상관이 없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사랑에 빠지고 난 후라면 상대의 괴물같은 치명적인 결점도 상관없어 지듯이 말이다. 그래, 그렇다면 나는 혹시 소녀의 결점을 사랑할 수 밖에 없는 소년의 눈물에 감염된 것일까. 소년이 흘린 눈물은 혹시 소녀의 눈에서 흘러야 할 것의 대신이 아니었을까.


  눈, 녹지 않는 허무  ....  雪無
"우리가 뭘 할 수 있을까."

얼마나 추웠을까. 영하 30도까지 내려간다는 스웨덴의 블라케베리 마을의 하얀 숲 그 곳은. 이 소설의 중심 배경이 되는 숲속 무대는 흡사 하얀 페인트가 칠해진 사각의 회벽을 얼음처럼 투명한 강화유리가 덮어 씌우기라도 한 듯 탈출구는 하나도 없어 자유롭지 못한 장소로 인식되었다. 그 유리벽 속에 유순하고 포동포동하고 오줌공을 찬 소년, 이혼한 엄마와는 저녁마다 핫초코와 시나몬롤을 먹으며 전단지 아르바이트를 하는 열두살 오스카르가 겨울보다 시려운 표정을 하고 앉아 있었다. 공동주택의 아래 하수구처럼 연결된 지하 방공호엔 결손가정이라는 같은 처지의 비행소년 톰미형이 비밀의 아지트를 꾸며놓고 있었다. 학교에서 왕따를 주도하던 오스카르의 친구 욘니 역시 배다른 형제와 마리화나를 피우는 불량소년으로 등장했다. 이들 소년은 모두 부성의 부재로 헤어진 아빠와의 추억이나 남겨진 소품과 유품을 소중히 간직하는 아들이었지만 결핍으로 인한 불안과 욕구불만은 각자 다른 형태로 표출되어 진다. 오스카르는 애꿎은 나무에 못을 박듯 칼로 분한 난도질을 하며 친구들에게 복수를 연출하고 톰미는 본드를 흡입하며 동생들에게 금전을 갈취하고 욘니는 친구의 약점을 잡아 습관적으로 폭력을 일삼는다. 서사에선 이들의 비행이 주가 된다고 느껴지진 않았지만 작가가 자신의 어린 시절을 자전적 소설로 펼쳤다고 했기에 나는 이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에서 소년시절의 외로움이 바로 환상을 좇는 계기가 되었음을 쉽게 알 수 있었다.

오스카르는 아르바이트 비를 톰미에게 주고 소니 워크맨을 얻고자 하며 톰미는 '키스'라는 록밴드 그룹의 앨범을 빌려주겠다고 한다. 작가는 마치 자신의 어린 시절을 회고하듯 이들 소년이 소비하는 물건과 책, 음악, TV프로그램을 통해 유년을 차곡히 정리하는 것으로 느껴졌다. 나 역시 그 시절 유행하던 음악잡지에서 드라큐라 분장을 한 '키스'의 멤버를 어찌 잊을 수 있나. 같은 세대로서 같은 시기 같은 문화를 공유한 감정은 나이들수록 소중하기 마련인데 스웨덴의 고전부터 속담, 문학, 신문, 드라마등 아마 내가 스웨덴 국민이었다면 반가운 장면들이 얼마나 많았을까.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왜 이야기 하는 것인 지 작가의 속내를 더 빠르게 간파할 수 있었으련만 그저 내가 아는 몇 개의 컨텐츠들로 반가운 위로를 삼아야 했다.

80년대 비로소 컬러시대를 맞이한 우리에 비하면 이들이 대화하는 자본주의는 그 퇴폐마저도 어쩐지 더 성숙해 보인다는 열등감을 확인하기도 했다. 왜 아니겠는가. '요람에서 무덤까지'의 복지를 완벽히 실천하고 있는 선진국의 나라, 세계에서 가장 튼튼한 차의 대명사 볼보의 스웨덴이었다. 그런 스웨덴이지만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하나같이 오히려 동유럽의 공산주의를 연상시킬 정도로 미래가 없이 반복되는 노동의 각박한 현실에 몸부림 치고 있었다는 사실, 그래서 더욱 놀라웠다. 특히 어른들은 싸구려 중국술집에 모여앉아 니코틴과 알코올에 의존하며 서로를 질시하고 비난하는 것으로 하루하루를 견뎌내고 그들의 자식격인 학생들은 일상의 무료함을 달랠 수 없어 폭력과 비행을 일삼는 것으로 느껴졌다. 선생님과 학부모, 부모의 친구 할 것 없이 전혀 삶에 애착이 느껴지지 않는 공허한 그들의 일상에 나는 문득 우리의 그 시절이 그리워지기도 했다.

80년대 초반 우리 사횐 군부독재의 억압속에서도 서민들은 선진국과 민주화에 대한 열망으로 뜨거운 희망만은 놓지 않았다. 아시안 게임과 올림픽을 앞두고 여기서 조금만 더 박차를 가하면 우리도 잘 살 수 있고 삶이 근사해 질 것 같은 활기가 있었다. 우리 부모님과 선생님들은 누구보다 바쁘고 열성적이었다. 내 유년기, 청소년기는 그렇게 뒤처지는 나라 특유의 열정과 성실함, 그렇기에 미래를 기다리는 끈기가 있었다. 스웨덴까지는 아직 너무나 멀기만 했던 것이다. 그런데 같은 시기 그들은 기존의 평온을 유지하기 위해 그동안 잘 훈련된 평화가 되려 억압이 되고 있었다. 물론 또 그 시기의 위기를 잘 극복했을 터이지만 그들을 보며 모두가 공평하게 잘 살게 되는 것이 모두가 함께 못살게 되는 것보다 꼭 낫다고 볼 수는 없지 않을까, 싶었다. 이방인인 마약거래상도 사회의 혜택을 누릴 수 있다면 그다지 모범생의 위치가 부러울 것도 없는 작가의 무의식을 슬쩍 엿보는 기분도 들었음이다. 세월이 지나 나라의 위상은 드높아졌지만 희망을 잃은 지금 세대의 우리 젊은이들도 중첩되었다. 이유는 달랐지만 미래를 예견할 수 있다는 것이 오히려 미래를 외면하는 이유가 되는 것은 아닐까. 좋은 세상이라는 것이 어쩌면 더 외로와지는 세상을 말하는 게 아닐까. 이 책에서의 사람들 모두는 하얗게 안전한 겨울숲에 홀로이 남겨진 나무들처럼 공평하게 쓸쓸해 보였다. 눈이 오고 계절이 바뀌어 녹아 내리는 변화 하나 없이 사라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마저 눈속에 묻혀질 것 같았다. 만약 눈이 내리고 있다면 우리처럼 귀한 것이 아니라 그들 사이를 더 황망하게 만드는 요인이 되겠다 싶어 눈으로 나타날 수 밖에 없다면 차라리 눈사람이라도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이유이다.


   눈, 보다 하얀 피  ....  雪皮
"시체의 피는 소용없어.
 사실은 해롭다고 할 수 있지."

원하는 것에 애착이 없을 때 사람들은 잃어버리는 것에 대해서도 무감해지는 것이 아닐까. 그런 면에서 나는 간절히 사랑을 갈구한 호칸의 태도가 차라리 가슴 아팠다. 호칸은 해직된 국어교사로서 일터를 잃고 집은 불탄 후 거리에 내몰린 新빈곤층이었다. 호칸은 이미 엘리를 만나기 전부터도 아동 강간미수라는 경력을 가진 반사회적 성향을 보였는데 나는 그의 소아기호증이 일반적으로 부끄럼을 많이 타고 수동적인 성격의 성인 남성에게 보여지는 증상으로 해석되지 않고 열 두살 같은 또래의 성장하지 못한 유년의 구애로 보고 싶었다. 즉, 육체적 행위나 쾌락으로서의 성적욕구가 아닌 정신적 보상이나 위로차원의 영적욕구로 이해하고 싶었다. 호칸은 엘리에게 사랑을 받기 위해 엘리가 원하는 피를 채혈하는 인물이었지만 끝내 엘리의 진정한 사랑은 얻지 못하고 스스로 파멸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죽고 싶어도 죽어지지 않는 운명이란 죽기 싫어도 죽을 수 밖에 없는 운명보다 하등 나을게 없다는 교훈을 주는 인물이었다. 그런데 이 비운의 호칸이 엘리에게 선택되어 죽임을 당하지 않고 살아남아 자신의 생이 다하는 날까지 엘리의 곁을 지킬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엘리는 호칸에게 위로를 주고 호칸은 엘리에게 봉사하는 방식의 거래의 시작은 서로를 향한 연민은 아니었을까. 그에 대한 해답으로 여실히 존재하는 또 한명의 열 두살 오스카르를 떠올리게 된다. 호칸은 오스카르의 미래일 것이기에 어느 시점엔 결국 오스카르도 영원한 사랑을 믿은 댓가로, 아니 영원치 않아야 할 사랑을 영원시키려한 벌로 자멸할 수 밖에 없는 운명인 것이다. 그것은 혹 인간에 대한 반칙의 결과는 아닐까. 호칸은 엘리의 나이인 열 두살의 눈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 나이의 아이들에게 끈질긴 사랑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었을지. 나는 작품속에서 마저 짝이 없는 호칸의 사랑이 갈기갈기 찢어지던 마지막이 많이도 쓰라렸다. 노동의 연장으로 보이던 살인의 현장도 중요한 실험처럼 행하던 채혈작업도 염산으로 불태워진 참혹한 얼굴도...죽음으로 피를 허락한 그의 목덜미도 모두 잊고 싶지 않았다. 살아있는 한 아니 죽어서까지 그 누구도 그를 따스하게 안아줄 사람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아 보였기에 그의 잘못아닌 잘못을 오래오래 용서해주고 싶었다. 그것은 어쩌면 자기 자신부터 사랑하지 않은 이 세상 모든 호칸을, 혹시라도 부질없을 내 욕심의 호칸을 눈감아주는 일일지도 몰랐다. 오스카르에게 만은 보여주고 싶지 않은 사랑의 종말일 지도 몰랐다.

또 하나 이 작품을 뱀파이어류의 호러소설로 볼 수 없는 이유는 바로 뱀파이어라는 존재조건을 성립시키는 '피'의 상징적 역할에 있다고 본다. 우리가 살면서 '피'라는 물질의 형태와 색채의 본질을 확인하려면 '피'는 자신의 주활동 공간인 인체바깥으로 나와야 하는 물리적 상황에 놓여진다. '피'는 철저히 내부 활동으로서 보이지 않을 때에만 그 생명성을 가지는 물질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간은 '피'가 생명성을 상실했을 때라야만 비로소 '피'의 생명감을 인지한다. 눈으로 색깔을 인식하고 동작으로 흘러 내리는 것을 확인해야 비로소 '피'가 살아있었다는 사실을 자각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의 '피'는 어쩐 일인지 흐르는 것, 즉 살아있는 것으로 인식이 되지 않는다. '피'를 이야기 하면서 '피'를 느끼지 못하게 하는 작가의 하얀 문체, 투명한 작법이 놀라웠다. 이것은 기존의 뱀파이어가 등장하는 소설에서 날카로운 송곳니로 피해자의 목을 가해하는 공격행위의 결과로 증명되던 '피'의 서사와는 중요한 차이를 드러내는 깨끗한 연출이었다. 영화에서도 엘리가 대상의 피를 구할 때 공격이 가해지는 잔인한 순간은 대부분 원경의 장면으로 포착되었다. '피'가 선동하는 역동성을 배제한 대신 인위적인 상처로 인해 그 반응으로 뚝뚝 떨어지는 효과없이도 마치 엑스레이 사진이나 내시경을 통해 원래 그 자리에 있었던 몸의 일부가 일시적으로 투시되는 느낌이 들도록 한 것이다. 그렇다고 정지하여 응고된 것도 아닌 다만 나타나는 것. 이 작품에서의 '피(혈액, 血)'는 드러난 결과인 외피로서의 '피(껍데기, 皮)'로 시각화되기에 그것은 붉게 물드는 신체적 고통이 아니라 하얗게 얼어 붙는 영혼의 고독인 것이다. 하지만 껍데기로 발견된 화석에는 수 천만년의 이야기가 흐르고 있듯 '피(皮)'의 내면엔 그들만의 사연이 흘러 내리는 것이다. 이는 몰랐던 사실이 아니라 원래 있었던 진실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호칸이 숲속에서 소년을 거꾸로 매달아 놓고 깔때기로 채취하던 '피'는 건강한 나무의 열매에서 신선한 액즙이라도 짜내는 신성한 노동으로 느껴졌다. 착실한 친구 요케가 엘리를 통해 흘리던 '피'는 노동자의 증거로서 땀이라는 따스한 체액이 아닐까. 오스카르를 괴롭히던 욘니의 귀에서 흐르던 피는 그동안 돼지새끼라고 놀리던 자신의 귀에 반사되어온 메아리의 파편들이 아닐까. 오스카르가 사랑의 맹세를 하자며 나이프로 자신의 손을 자해한 후 베어나오던 '피'는 미래를 향한 용기의 증표, 표식으로서의 흉터가 아닐까. 엘리에게 감염된 싱글맘 비르기니아의 목에서 굳어가던 '피'는 비정규직 노동자로서의 불안과 고독이 열꽃으로 피어난 건 아닐까. 톰미의 팔뚝 안쪽에서 흘러 내리던 '피'는 환자인 엘리에게 헌혈하기 위한 희생이 아니었을까. 엘리가 잠겨있던 욕조속의 한가득한 '피'는 원통하게 헤어진 어머니 뱃속의 자궁에서 숨쉬던 양수가 아니었을까. 오스카르에게 초대받지 못한 말로 얼굴의 땀구멍에서 흘러 내리던 엘리의 '피'는 이 백년동안 삶과 죽음 모두에게 외면당한 온갖 슬픔의 문신이 아니었을까... 우린 이렇듯 실은 각자가 가진 피만큼의 열정과 상처와 외로움과 고독으로 살아가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진정으로 상대가 되어 본다는 것은 상대의 상처를 자신의 것처럼 느끼는 일일 것이므로 상대가 흘린 피도 내 것처럼 핥을 수 있으며 그래서 내 피 역시 상대에게 고이 내줄 수 있는 것은 아닐까.

이 책에서 피를 마주하는 일은 하나의 정신적인 노동이었다. 자신은 피로써 살아간다는 엘리의 대답이 그것은 당신도 마찬가지라는 또렷한 한마디가 피처럼 벌겋게 새겨지는 순간이었다. 그들이, 엘리가, 내가 흘린 건 피로 염색된 눈물, 빨강으로 꽃핀 상처, 멈추지 말아야 할 심장에 다름아니었다. 내 생명을 위해 남의 피를 구하듯 우린 각혈하는 상대를 위해 내 피를 수혈함으로써 그의 지혈을 도울 수 있는 존재가 아닐까, 싶어진다. 이렇듯 사람들은 피로써 자신을 말하며 서로와 커뮤니케이션 했을 뿐 누가 누구에게 물려 뱀파이어가 되었는 지는 중요한 사안이 아니었던 것이다. 소설속에선 서로를 알아본 오스카르와 엘리만이 유일하게 피가 아닌 그들만의 또다른 장치로 커뮤니케이션에 성공을 한다. 이것은 피의 형질은 달라도 그 온도만큼은 같았던 어린 아이의 특권이며 어른된 그리움이다. 이들은 어떻게 서로의 비밀을 공유하고 나누면서 또 간직할 수 있었을까.

오스카르와 엘리가 나누던 교감은 이해타산이 배제된 순정한 동심이었다. 이들은 각자 자신이 가진 외로움을 똑같이 상대에게서 발견해 내는 한쌍의 힘겨운 어린 새들이었다. 이들이 맨처음 조우한 곳은 미끄럼틀이 달린 정글짐, 사각의 놀이터였다. 하지만 사방에 노출된 놀이터라는 장소적 특성은 그들만의 비밀을 공유하기엔 부족했던 것. 오스카르는 엘리에게 루빅스 큐브라는 퍼즐장난감을 건네고 엘리는 큐브의 색을 완벽하게 맞추어 나타난다. 오스카르는 자신의 눈과 큐브를 연결하는 끈 하나가 있다고 믿었고 자신은 풀지 못하는 초능력을 가진 사람을 기다린 것이다. 마치 비밀의 열쇠를 찾아 그들만의 비밀숲으로 들어가듯 큐브는 신비의 약속을 상징하는 중요한 보석이었다. 이들은 하얀 벽을 사이에 두고 모르스 부호로 교신하며 서로의 안부와 의사를 전달한다. 서로를 선택한 것에 대한 반복되는 확인 행위일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자신들만의 언어로 사랑을 전달할 때 세상속에서 유일하게 소중한 자신들과 사랑의 특별함에 쾌감을 느낀다. 서로를 제외한 세상 그 누구도 모른다는 사실은 한편으론 자유, 내 편이라는 믿음인 것이다. 오스카르는 이 신비의 큐브로 위기에 처한 엘리를 구하기도 한다. 약속에 대한 믿음이 현실로 나타난 결과였다. 오스카르는 교실에 불을 지르고 난 후 수천조각으로 이루어진 번쩍이는 금달걀 조형물을 앞에 두고 자축의 놀이를 벌이기도 한다. 오스카르의 큐브는 오늘을 살아가는 '지혜'이며 엘리의 계란은 내일의 '부활'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오스카르는 마지막에 이 모든 유년의 추억을 트렁크안에 집어 넣고 기차를 탄다. 이 세상에는 어느 정도 마법이라는 게 있다는 작가의 한마디가 울려오는 기적소리였다. 아무것도 아닌 유치한 행위인 것 같지만 그 시절 퍼즐을 좋아하고 비밀을 공유함으로써 우정을 지키던 작가, 그리고 내 어린 시절과 다르지 않았던 동화같은 그림, 그림같은 우정, 우정보다 멋진 마법이었다.


   눈, 사람처럼 따스한  ....  雪人
"왜냐하면 넌 살고 싶으니까.
 마치 나처럼."

이 책을 읽고는 문득 피로써도 영혼이 감염되는 사람들을 보면서 내 정신은 무엇에 감염되었을 지, 생각해 보았다. 몸으로 나타나는 현격한 전염상태가 아닌 사고의 체계, 의식의 흐름, 직관의 방향처럼 피보다 더 치명적일 수 있는 그 무엇이 있을 것만 같았다. 살기 위해 피를 먹고 사람을 죽인다는 엘리, 잠시만이라도 그런 내가 되어 달라는 영혼의 목소리가 자꾸만 내 굳어진 심장을 두드린 까닭일까. 왜 그래야 하는 지의 질문에 난 너와 같기 때문이라는 '너는 누구냐'는 질문에 '나는 너야'라고 대답한 엘리의 마음이 내 거울이 되는 것만 같다. 몸을 섞는 것이 아니라 피를 섞어 하나가 되는 서약을 하려던 오스카르의 순심(純心)은 얼마나 깨끗하고 낭만적인가. 가슴이 터질 것 같은 산소를 머금은 사람의 체온, 그것으로 완성된 피가 흐르는 그들의 심장이 내 영혼에 전염되었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이 전염체야말로 고유의 생명성을 가지고 내가 죽어도 살아남기를 바란다. 엘리의 눈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확인하던 오스카르처럼 그들의 피를 통해 내 심장의 온도를 높일 수 있다면 얼마든지 감사할 감염이 아니겠는가.

올해가 가는 시점에 이 겨울같은 소설을 여행하게 되어 참으로 고마운 독서였다. 오스카르와 엘리의 아름다운 러브스토리는 내 유년과 지금의 장년이 만나는 재회의 스토리가 되었다. 내가 만약 더 피끓는 청춘이었다면 이 소설의 사랑이 더 예민하고 안타깝게 다가왔을거라는 슬픔이 진한 아쉬움으로 남는다. 하지만 피가 식었기에 순수가 이렇게 더 그리운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오스카르가 트렁크를 동반한 기차여행을 떠나는 장면에서야 겨우 어른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희안하게도 그 기차를 타고 작가 역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비로소 네 안에 들어가게 해달라는 엘리의 희망이 더 온전하게 실현된 장면만 같아 그것으로 그 시절의 사랑이 그만 완성되었다는 생각도 들었다. 사랑은 영원한 것이 아니라 어느 한시절의 하나됨의 기억으로 영원을 약속하는 일이라 생각하기 때문에. 이제 외롭게 서있던 전나무들의 숲에서 가슴을 짓누르던 영혼들에 인사하고 싶다. 영화에선 등장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오스카르의 편이었던 톰미, 아빠가 죽고 경찰관과 사귀는 엄마를 둔, 키스의 노래를 좋아하던 그는 얼마나 씩씩한 어른으로 성장했을까. 오스카르와 엘리 못지 않게 나를 울게 만든 호칸, 자신의 최후를 알고서도 엘리와의 동행을 벗어날 수 없었던 그의 묘비에 꽃 한송이라도 놓고 떠나올 걸...

이제 곧 성탄인데 나는 이 책으로 선물을 받은 것만 같아 가슴이 뿌듯해진다. 나이든 내게 더이상 누가 산타가 되어 줄 것인가. 내 마음속에 누군가를 초대하고 싶다는 바램도 누군가에게 들어가도 되는지 허락을 구하는 일도 잊고있던 설레임이다. 사랑이 아름답다는 말도, 영원하다는 생각도 너무 오래되었다. 올해의 크리스마스엔 하얀 나무로 트리를 꾸며볼 생각이다. 눈이 온다면 꼭 눈사람도 만들어 볼 생각이다. 아니 내 가슴에 눈사람을 초대해야지, 만약 기회가 없다면 누군가에게 그냥 눈사람이라도 되어 주고 싶다. 눈사람으로 마음에 들어가도 될 지 확인하는 나이고 싶다. 그러고보니 눈밭에 앉아 울고 있던 그 아이는 내 유년의 눈사람이었을까. 아니 그 시절의 나일지도 모르겠다. 어린 나를 어른 된 내가 안아주던 겨울여행...맑고 투명한 눈결정을 확인하고 온 기분으로 또 남은 겨울을 견뎌낼 기운을 얻는다. 이번에 눈사람을 만든다면 같은 눈사람이 되어 잠시 곁에 머물러 줌으로써 서로가 외롭지 않도록 하고 싶다. 내가 이렇게 늙어버렸으니 눈사람은 얼마나 놀랄 것인가. 하지만 매번 녹아 사라진다는 역설이 결국 나를 위로할 것임을 안다. 어리니까 약하니까 그것으로 계속 살 수 있다는 게 어떠한 불행인지 그도 알 것이다. 사람이 죽지 않으면 추할 것이기에 눈사람 역시 녹지 않는다면 애절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호호불며 벙어리 장갑으로 완성해낸 그때 눈사람, 절대 녹지 않을 것 같던 동심을 그리워 하는 것이 더 행복할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어쩌면 그토록 투명한 한 번의 동심(童心)으로 나머지 세월의 노심(老心)을 견뎌내는 존재들이 아니겠는가.

앞마당에 눈이 쌓이는 그리움으로 책을 덮어본다. 차갑지 않다. 무섭지도 두렵지도 않다.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 참 오랜만이다. 다만 외롭지 않을 수 있어 그리운 눈사람, 잠시 서 있어도 되냐고 안으로 들어가도 되냐고 묻고 싶은 눈사람, 꼭 한번 다시 만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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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리다
파울로 코엘료 지음, 권미선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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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으로 휴식하다

나는 올 한해를 거의 나이와 시간, 계절과 세월에 씨름하며 여기까지 온 것 같다. 시시각각 그것들이 변화하는 미세한 과정을 온몸으로 마주하며 버텨내었다는 생각이다. 얼마나 울었는지 결코 아무도 모를만큼일 게다. 내 생애 가장 힘든 시절이었다. 앞으로 이와 같은 시절을 다시는 겪고 싶지 않아 나는 제대로 고통을 완수해내려 안간힘을 썼다. 가장 먼저 이용한 것은 문학이라는 마법이었다. 내가 선택한 마법의 세계에선 별다른 노력이 필요치 않을 것 같다는 쉬운 생각이 전부였다. 예상대로 마법의 길은 다른 이의 도움이 필요치 않았고 내 마음대로 멈출 수 있었다. 보이지 않는 세상과 교류한다는 명분으로 보이는 세상과 담을 쌓은 것과 같았다. 점점 책 한권을 읽고 다음 책을 집어 들기까지의 공백이 두려워 졌다. 그 짧은 틈새로 계절의 변화가 세상의 상처가 침입하게 될까봐 나는 점점 공백을 최소화하기 시작했고 그러는 사이 봄과 여름이 훌쩍 지나가 버린 것이다.

가을이 되자 살갗이 말라가듯 마음도 바스라지는 것 같았다. 이상했다. 책꽂이는 좁아지고 책상에 쉴 새 없이 책이 쌓여 가는데도 마음은 가라앉기만 했다. 우리 집은 도심 외곽 어느 산자락을 무너뜨려 세운 아파트 1층인지라 지난 여름 내내 자연의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창문을 열어 놓으면 하루 종일 뻐꾸기를 비롯해 이름을 알 수 없는 새와 매미, 바람이 교신하며 비로소 내가 살아있음을 깨우쳐 주었던 것이다. 그런데 날씨가 쌀쌀해져 온 집안의 문을 닫고 난방을 틀기 시작하자 자연은 사라지고 창밖의 나무는 초록을 지키지 못하기 시작했다. 지난 여름 바람이 무섭던 어느 새벽, 나뭇가지가 베란다 창문을 세차게 때리면서 마치 기둥이 부러지기라도 할 듯 요동을 멈추지 못하던 그 때 그 나무였다. 눈부신 금빛이나 화려한 붉음으로 변신하지 못하고 건강상의 이유로 노화마저 중단한 것처럼 느껴졌다. 내리쬐는 햇볕은 잎사귀의 메마름을 더욱 부추기고 지나가던 고양이마저 외면할지 모를 기색이 꼭 나의 그것과 닮았었다. 새삼 마음이 울렁였다. 그리고 억울했다. 나는 내가 계절이 바뀌어 가을이 된 것 조차 보고 싶어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고 그것은 자꾸만 메말라 가는 내 자신을 인식하지 않으려 한 거부현상의 결과와 다름 아니었다. 시간을 거부한다고 시간이 멈추는 것이 아니듯, 세상을 거부한다고 내가 그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는데. 나도 한때는 누구보다 소중한 사람이었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그토록 나에게 상처를 준 세상이지만 다시 나를 보듬어줄 세상이 그리웠다. 누구 하나 나를 지목하지 않았지만 나는 나 혼자 세상에 분노하고 또 그런 만큼 세상을 몰래 기다렸던 것이다. 나는 내가 선택한 마법의 길에서 잠시 휴식해 보기로 했고 울렁이던 마음을 스스로 안아보고 싶었다. 망각이나 회피, 혹은 물욕이라는 목적을 떠나 진짜 내 마음을 위한 독서를 원하고 있었다. 가급적 겨울이 오기전이길 바래었고 혹시 책을 덮고 나서 기대에 못 미치더라도 후회하지 말기로 다짐했다. 그리곤 영하의 날씨가 막 시작되는 겨울의 초입에, 아니 늦가을 오후에 이렇게 책을 덮었다. 어찌 보면 이 책을 대하는 내 마음도 해답이나 위로를 바라는 강렬한 목적이 있었음을 인정한다. 하지만 나는 다른 책을 제쳐두고 이 책을 집어들 때 이미 알고 있었다. 내 영혼이 원하는 건 지금이라는 시간, 그리고 당신이라는 마법이었다고.

마법으로 체험하다

부끄럽지만 나는 지난 시절 '한권의 책이 가장 많은 언어로 번역된 기록'을 가졌다는 파울로 코엘료의 작품을 하나도 만나보지 못했다. 서점에 그토록 드나들면서 언제나 베스트셀러의 서가에서 그를 쉽게 확인할 수 있었지만 '이런' 류의 소설에 선뜻 손이 가는 마음을 지니지 못했던 독자였다. 살인적인 업무와 빈틈없는 일상에 지쳐 '그런' 식의 영혼의 울림은 어쩐지 간지럽고 부담스러워 나같은 사람하고는 멀어도 한참이지 싶었다. 한창 경력의 건물만 짓고 있었으니 보나마나 다 알만한 이야기라며 독자이길 거부하는 내 마음을 정당화했던 것이다. 그런데 사람은 알 수 없어 그 영혼의 울림이 이토록 애타게 그리울 줄 누가 알았겠는가. 아니 영혼이 울린다는 말뜻조차 이해할 수 없었던 나였기에 이 여운은 결코 예사롭지 않았음이다. 그동안 살면서 영혼이 아닌 육체를 향해 얼마나 남을 울리고 또 그 남으로부터 울었던가. 나는 한명의 시인이 한편의 시를 쓰기까지 얼마나 울어야 했는지 알아 주는 독자가 되고 싶었다. 마치 내가 얼마나 울었는지 누군가 알아주길 바라는 마음일지도 몰랐다. 그랬다. 이 책은 바로 몸의 울음을 위로해주는 영혼의 대답이었다. 그것은 신기하게도 내 영혼을 울리고 있었다.

이 책은 브리다라는 스무살 처녀의 영적탐색의 길에 관한 여정을 아름답게 그리고 있다. 마법을 배우고 싶어 물어물어 찾아간 마법사와 마녀를 통해 태양과 달의 전승을 배우고 마침내 자아를 발견한다는 어찌 보면 구태의연할 수 있는 평범한 서사를 그 줄기로 하고 있다. 주인공과 배경이 단순하며 사건은 대부분 마음의 변화로 일어나는 현상을 중심부로 택하였기에 다른 소설에서 느낄 수 있는 서사에 대한 부담, 충격이나 반전 등의 플롯, 인물의 캐릭터같은 피곤함은 전혀 인지할 수가 없다. 그것은 이 작품의 매력이었다. 물흐르듯 자연스럽고 기행문이나 치유를 위한 에세이의 성격도 감지되었다. 때문에 페이지를 넘기다 보면 어느새 훌쩍 종착지에 도달해있다. 도보로만 길고 먼 숲을 천천히 걸어 돌아온 느낌이 든다. 언젠가 남이섬에서 양옆이 숲으로 우거진 메타세쿼이아길을 걸었던 순간이 떠오른다. 심신을 안정시키는 피톤치드 물질로 온 가슴이 뻥 뚫릴 것 같았던 발걸음을 기억한다. 이 책은 글로 이루어진 숲이라고 해도 좋았다.

실제로 브리다는 마법사의 숲속에서 어둠의 밤을 온몸과 영혼으로 경험하는 수행의 신고식을 치르게 된다. 그곳에서 그녀는 어린 시절 '밤은 하루의 일과에 불과하다'는 아버지의 말씀을 떠올리며 어둠도 자신을 보호할 수 있다는 믿음을 발견한다. 신선하고 가슴 아릿한 시작이었다. 나는 첫 장면부터 '믿음'이란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받아들이느냐 마느냐의 문제라는 걸 끄덕이면서 페이지를 넘기었다. 마치 산이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라 오르느냐 마느냐의 문제인 것처럼. 산이 있어 오르는 것처럼 믿음역시 있기 때문에 신뢰한다는 진리를 나는 몰랐던 것이다. 이 책은 처음부터 자신(작가)을 한번 믿어보라 말하고 있었다. 그러면 곧 자기 자신(독자)을 믿을 수 있다고 말하는 듯했다. 이야기에 대한 일말의 의심을 미안케하는 작가의 의도였을까. 독서란 행위는 어짜피 책을 대함에 있어 작가에 대한 신뢰가 작품의 이해와 평가에 미치는 영향력이 막대한 분야이다. 나는 믿음을 인지하자 자연스럽게 브리다가 어둠속에서 느꼈던 하룻밤의 두려움과 번민을 온전한 내 두려움으로 인식할 수 있었다. 나는 스무살로 돌아가 있었던 것, 아니 어쩌면 그때로 돌아가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브리다는 서점을 통해 위카라는 마녀를 소개받고 '소울메이트'에 대한 개념을 이해한다. 영혼이 분화할 때 남자와 여자로 나뉘었기에 언젠간 다시 하나로 결합할 수 밖에 없는 분신과도 같은 사랑. 소울메이트는 우리세대에게 학창시절 룸메이트라는 존재를 떠올리게 하는 새로운 개념이었다. 물론, 태어나 단 한명으로 존재하는 운명적인 내 영혼의 반쪽이라는 의미의 소울메이트를 몰랐던 것은 아니다. 허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결혼이라는 만남을 전제로 한 배우자의 개념에 더 가까운 것이 사실이었다. 그런데 이 책에서는 소울메이트는 한 사람이 아닐 수 있으며 내 영혼이 나뉘어진 사람일지라도 사랑을 이루는 방법이 꼭 다시 하나로 결합하는 것은 아니라 말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운명적 사람'이라기 보다는 '운명적 만남'을 떠올렸다. 단 한번일지라도 그 운명적 만남은 영원한 사랑으로 기억될 수 있다고 말이다.

작가는 브리다가 자신의 소울메이트를 찾아가는 과정을 곧 자신을 발견하는 과정과 동일시하고 있었다. 브리다를 좇아가다 보니 자연스레 지난시절 내 소울메이트들을 떠올려보는 시간이 주어졌다. 최종적인 마법사의 선택과 그것을 받아 들이는 브리다의 지혜는 내 청춘의 수많은 시행착오를 더듬어 자꾸만 내 자신을 부끄럽게 만들었다. 우린 얼마나 상대를 소유하려 애를 끓였으며 누군가를 빼앗지 못해 애를 태웠던가. 사랑하고 헤어지는 것만큼이나 상대를 가지려 했고 버리려 했을 것이다. 그때 내 영혼의 소울메이트가 단 한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면 어땠을까. 한사람에 대한 집착은 혹시 매번 이번이 마지막일 수 있다는 강박을 초래했던 것은 아닐까. 다음 사람을 사랑하였다고 그 전 사람과의 사랑이 의미없는 것은 아닐 것이다. 돌이켜보니 그렇게 소울메이트로서의 한사람에 대한 강박은 곧 더 큰 상처를 야기하는 원인이 된듯하다. 상대에 대한 욕심은 곧 나 역시도 상대의 단 한사람이고픈 욕망과 동일했다. 마법사는 자신의 시행착오를 브리다에게 되풀이 하지 않기 위해 그녀가 자유롭게 자신의 길을 가도록 유도한다. 나에게도 그런 사랑은 있었지만 상대를 위한다기 보다 내 자존심을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아서 돌아선 것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브리다의 남자친구가 물리학 조교였던 것은 이상적인 설정이었다는 생각이다. 인간의 탄생과 생명의 근원적 이유에 호기심을 가진 브리다의 우주적 자아성찰에 도움을 주었을 뿐 아니라 질문 자체를 소중하게 여기는 그의 철학적 태도가 나를 안심케 했다. 나는 돌아서는 마법사가 된 듯 그녀의 남자친구를 믿어볼 수밖에 없었다.

작품에서 유치하지 않게 묘사된 상황으로 마법의 의식행위들도 인상적이었다. 이것은 전적으로 문학을 영적세계로 끌어 올리는 작가의 신비로운 능력이라 느껴진다. 같은 불륜이라는 소재를 가지고도 예술영화를 연출해 내는 외국의 영화감독이 겹쳐지기도 했다. 마녀의 의식으로 구체적으로 묘사되던 브리다의 체험은 다소 원시적이며 주술적이었는데 소설의 영역에서 독자들에게 제공할 수 있는 최대치의 에너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미술이나 영상처럼 시각적 정보를 배제한 상태에서 글로만 영적인 에너지를 선사한다는 것은 종교적 영역에 가깝다 할 것이다. 불교나 기독교등의 여타 종교를 뛰어넘는 문학적 성취가 곧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전파되어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작가의 '재능'으로 인식된다.

위카는 브리다에게 마법의 신비에 입문하는 과정을 가르치며 '달의 주기'를 체험함으로써 달전승을 깨우치도록 한다. 마법의 지팡이로서의 검이나 타로카드, 허브숲등은 자신의 영적인 에너지를 한데 모으는 도구였으며 세상의 소리에 맞추어 춤을 추는 것은 자신에 대한 믿음을 이룩하는 행위였다. 옷을 입고 벗는 행위는 눈에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를 연결하는 다리를 통과하는 것으로 그려진다. 그다지 특별나 보이지 않는 그 과정에서 '밖으로 드러나 보이는 것을 바꾼다는 건, 내면에 존재하는 것을 바꾸는 것보다 어려운 일'이라는 목소리의 충고는 특히 오래 남았다. 마음 바꾸기보다 몸 바꾸기가 어렵다는 이야기로도 들렸고 변신이라는 방어기제를 내세워 외피를 쉽게 바꿀 수 있는 것 같아도 실은 결국 마음을 먹어야 가능한 일이라고도 해석되었다. 마녀들의 전승 입문식 전에 꾸어야 한다는 '옷꿈'은 그대로 입문식에서의 행위로 재연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꽤 길게 묘사된 마녀의 입문식 과정은 흡사 우리 조상들의 달의 정기를 받아들이는 부녀자들의 의식을 연상케 했는데 음력의 에너지를 가진 달, 즉 변화의 기운을 잉태한 여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인식하고 그것을 신비롭게 자각하는 행위로 느껴졌다. 행위의 절정에서는 자신의 (기존에 입던)옷을 벗고 달의 기운을 받아 새로운 재능이라는 옷을 입는 것으로 표현했는데 작품 초반부부터 제기된 그녀의 재능을 옷으로 형상화 한 것이다. 흡사 신비로운 뮤지컬의 한 장면이 상상되었다. 작가는 우주와 하나되는 여인의 삶을 달빛아래 마녀들의 숲속무대에서 종합연출한 훌륭한 감독이었다.

마법으로 불러보다

서로를 알아보는 소울메이트와 재능을 형상화한 의식행위도 좋았지만 무엇보다도 의심이 믿음이 되는 과정이 내게는 중요했다. 그것은 내가 이 책을 집어든 궁극적인 이유와도 같았기 때문이다. 우주에 대한 믿음, 소울메이트에 대한 믿음, 재능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도 자신에 대한 믿음이 없다면 앞서 말한 모든 믿음은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내가 살아있다는 기적에 온 자신을 던지고 질문이 있다면 답도 있을 거라 생각하며 자신이 선택한 길을 평생 의심하지 않고 가는 것. 아니 평생 끊임없이 의심하면서도 자신의 길을 계속하여 가는 것. 그것이야 말로 내가 나일 수 있는 가장 큰 재능임을 나는 이 책을 통해서 깨우친 것이다.

나는 그동안 내가 가진 재능을 절대 과대평가하지도 않았지만 재능에 따른 결과에도 그다지 기뻐하지도 않았다. 오만하지도 않았지만 겸손하지도 않았던 나. 나의 재능은 언제나 나의 의심에 가려 벽과도 같은 불신으로 제대로 대접받지 못했던 것이다. 그 중심에 바로 작가가 언급한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실수와 상처에 대한 두려움이 버티고 있었다. 내가 인정하지 않은 재능은 곧 나에 대한 불신으로 나타났고 그것은 도전을 회피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또는 도전해 놓고서도 그것을 도전으로 생각지 않는 비겁으로 발전했다. 도전하지 않았기에 그 어떤 결과도 인정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이다. 작가는 내게 실수를 두려워하지 말라는 충고를 하기 위해 브리다가 자신을 어떻게 믿게 되는지 증명해 보였던 것이다. 내 자신에 대한 신뢰는 내 자신이 소중한 사람이라는 생각에서 오는 것이며 그것은 내가 사랑할 수 있고 사랑받을 수 있는 존재라는 확인에서 기인한다는 것을 이렇게 가르쳐 준것이다. 나는 이미 소중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나도 재능이 존재했고 그로써 빛날 수 있었던 사람, 이미 빛나고 있는지 모를 사람이었다.

나는 의심하지 않기로 했다. 고마운 사람, 그는 내게 실수야 말로 세상을 움직이는 것이라 말한다. 나는 다소 완벽주의자적인 성향이 많아 지난 시절 많은 지인들을 피곤하게 하였다. 실수는 용납하기 어려운 과오인만큼 실수하지 않기 위해 누구보다도 내 자신을 가장 많이 괴롭혀왔다. 어쩌면 너무 완벽해서 실패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눈물이 났다. 그동안의 고생을 위해, 아무도 위로해주지 않은 나를 위해, 떨어지는 낙엽이 억울한 나를 위해 나는 울었다. 겨울이 오고 있었다. 올 것은 오지 않는가.

이 작품을 나처럼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자신을 불신하는, 세상에 상처받지 않기 위해 도전하지 않는 냉담한 독자들이 잠시 가던 길을 멈추고 집어들기 바란다. 문학이라는 마법은 얼마든지 걸려보아도 좋을 시간인 것이다. 인간은 어짜피 자신이 깨달을 수 있는 것들만 깨닫는다. 분명 자신의 채널로 마치 한 몸인듯 강하게 이끌리는 메시지가 용기를 줄 것이라 믿는다. 영혼의 울림은 세상 저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가 아니고 내 안에서 밀쳐오는 외침인 것이다. 그것은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가 아니고 들었느냐 못 들었느냐의 문제인 것이다. 우린 이렇게 스스로들 그 목소리를 들을 수 없는 나약한 존재이기에 문학이라는 마법의 길을 선택하는 게 아닐까. 마법이 풀리는 날 다시 현실의 목소리로 불러보자.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얼마나 많은 것들을 잃었던가"


살면서 살아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는 순간이 매번이지 않다. 그 순간에 자신을 온전히 믿기도 쉽지 않다. 믿었다고 실수하지 말란 법도 없다. 그래도 살자. 살아서 믿자. 믿어서 내딛자. 그럼으로 사랑하자. 그것만이 인간이 인간된 이유 아니겠는가. 인간으로서 공평한 재능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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