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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자서전 - 전2권 ㅣ 김대중 자서전
김대중 지음 / 삼인 / 2010년 7월
평점 :
눈물, 후회 없도록
#1. 나는 1970년 부산에서 태어났다. 경남 남해가 고향인 내 부모님은 부산에서 이십년 적을 두다 외동딸인 내 교육 문제로 1976년, 서울로 이사하셨다. 나는 강남에서 초,중,고를 마치고 여대를 입학한 후 다시 강남에서 사회생활을 했다. 경남 진해가 본적인 부모님을 둔 남자와 결혼 후 분당에 살림을 차리고 그곳에서 아이를 길렀다. 부모님은 분당과 용인에서 사셨다. 부모님의 영향으로 초등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조선일보를 구독해왔다. 올해 41세의 대한민국 국적을 가진 이 여성은 그동안 살아오면서 네 번의 대통령 선거에 참여할 기회가 있었고, 모두 투표를 했다. 그러므로 그녀에게도 김대중을 대통령으로 당선시킬 기회는 두번이나 있었던 것이다. 과연, 그녀는 김대중을 찍을 수 있었을까.
많이 울었다. 왜 그렇게 울었는지 나 자신도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시작부터 끝까지 자주 훌쩍 거리곤 했다. 어떨 땐 눈두덩이 뜨거워져 얼굴에 열감으로 종일을 보내었고, 울컥하며 목이 메어 울분에 그만 눈을 감아 버리기도 했고, 어떨 땐 가슴이 저미는 설움으로 온 폐부가 돌덩이처럼 가라앉는 듯 했다. 또 어떨 땐 쿵쾅거리는 심장을 주체하지 못해 벅찬 눈물이 나도 모르게 터져 나오곤 했다. 살면서 그동안 책이라는 존재를 대하며 이토록 여러 가지의 감정으로 눈물을 흘린 적이 있었던가. 『김대중 자서전』은 내 눈물의 모든 것이었다. 이 가을, 나는 울고 있었다. 그것도 제대로 마음껏, 후회 없도록 이었다.
왜 울었는지 참참히 따져 물어야 했다. 내 눈물의 진정성을 밝히는 것이 곧 그를 알아가는 일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자 그 과정과 의미를 정리정돈하고 싶어졌다. 감정을 정리하자 이성이 찾아왔고 이성은 다시 마음을 살찌웠다. 독서란 문학이란 그런 것일까. 책 한권 읽었다고 갑자기 가치관이 바뀔 나이는 지나온 지 오래지만 나는 지금 그동안의 내 무지와 무심, 무정함을 적절한 시기에 운좋게 보완했다는 충만감에 들떠있다. 이토록 달뜬 설레임은 나를 적잖이 애타게 만들며 연인들이 늘 '사랑'이라는 진부한 말 대신 그보다 더한 말을 찾아 헤매듯 '존경'이라는 말로는 영, 성이 차지 않는 심정이다. 부족하다.
생각해보자. 우리는 종교인이나 학자, 혹은 기업인까지도 존경한다 말해 보았지만 정치인을 존경한다고 말해본 적이 있던가. 그것도 한국의 정치인을. 물론, 자신이 지지하는 후보를 존경할 수는 있겠지만 종교는 달라도 김수환 추기경이나 법정스님을 존경한다고 말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이야기일 것이다. 주변에 '정치적'이라는 접두어가 붙은 사람들을 떠올려 보더라도 그 '정치적'이라는 관용된 의미를 고운 시선으로 봐주기 힘들지 않았던가. 요즘 유행하는 TV드라마의 주연격인 국회의원도 '정치란 절대 선과 절대 악의 논리가 아니다. 49%의 악속에 피어나는 51%의 선의 꽃이 정치다.' 이렇게 말하지 않았는가. 김대중 대통령도 정치란 심산유곡에 핀 순결한 백합화가 아니라 흙탕물 속에 피어나는 연꽃이라 비유했다. 좋은 말로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은 유기적인 존재인 것이지 상황에 따라 늘 변수를 안고 있는 유동성 존재인 것이다. '정치적'인 사람은 곧 비윤리적이고 비인간적이며 어딘지 모르게 음모에 능한 사람이라는 것이 하나의 공식처럼 사용된 지도 이미 오래되었다. 이처럼 변화와 변수, 변모를 정체성으로 하는 일을 하는 사람을 존경하기란 애초부터 불가능하다는 생각도 든다. '정치'란 단어만 억울하게 되었지만 그만큼 한 인간으로서 정치인을 존경하기란 어렵기도 할뿐더러 또 우리 근현대사에 존경할만한 정치인이 없었다는 현실을 보더라도, 평생 정치인이었던 김대중을 존경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한명이라도 있다면 그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익히 존경받아 마땅한 정치인일지 모른다. 그런데 아니 그래서, 나는 그를 존경하는 사람은 아니었다는 말이다. 굳이 그래프를 그려보자면 비호감의 좌표에 가까웠다. 아니, 솔직하자. 나는 그를 거의 혐오에 가까울 정도로 태생부터 뼛속부터 오랜기간 거부해왔노라, 고백하겠다. 그런데, 살면서 이렇게 그 사실에 대한 변명의 기회가 제대로 생길지는 꿈에도 몰랐다. 그리고 이토록 처연하게 마음이 시퍼렇게 멍울지고 난 후 일지도 몰랐다.
나는 왜 !
#2. 내 아버지는 뚝심의 경상도 사나이였다. 어머니는 전라도 사람을 공산당과 버금 갈 정도로 싫어하셨다. 이유는 여러 가지였지만 당시 부모님을 이해하거나 오해할 필요가 없었던 어린 나로서는 지겹도록 '전라도 사람과 결혼만은 안 된다'는 정언을 밥먹듯이 듣고 자랐다. 초등학교 다니면서는 더 지겹도록 반공교육을 받았다. 그때 북한은 '괴뢰군' 혹은 '괴수'로 통일, 지칭되었으며 '박살내자', '때려잡자' 같은 단어로 표어를 짓던 기억이 생생하다. 동네에서 고무줄 놀이를 할 때까지 무심코 불러대던 세 곡의 노래도 우렁찼다.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로 시작해 ’아아 잊으랴 어찌 우리 그날을’을 읊조리다 결국 마지막엔 ’무찌르자 공산당’으로 마무리했다. 어쩌다 삐라를 주워 온 친구가 있으면 그날은 금방이라도 전쟁이 날 것처럼 공포에 떨었던 기억...내게 있어 공산당은 민방위 훈련날 귀를 찢으며 교실에 울려 퍼지던 싸이렌 소리만큼 가까웠음이다. 그런데 아버지는 TV에 자주 나오던 김대중이라는 사람이 빨치산 출신이라 하셨다. 그러니까, 김대중은 내게 처음부터 확실히 결혼만은 안 된다던 '전라도' 사람이면서 괴수라 불리던 '공산당'이었던 것이다. 나는 달리 의심없이 김일성이 북한의 지도자인 것과 마찬가지로 그 두 가지를 믿고 살아왔다. 그 두 가지는 훗날 내가 나이들어 성인이 되고 난 후에도 좀처럼 의식의 심연 저 밑바닥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나는 아무 잘못이 없었다, 고 말하고 싶었다. 그리고 실제로 잘못은 하지 않았다. 부모님 말씀 잘 듣고 선생님 말씀 잘 따라야 했던 그 시절 우리가 아니던가. 그는 정부의 탄압보다 국민의 오해가 미치도록 무서웠다 고백했다. 나와 같이 경상도에서 자라 모범생이라는 역할을 맡아온 학생들이라면 그들의 가슴에 김대중 이름 석자는 역적의 낙인이 되고도 남았을 진대.
만만치 않았던 두 권의 책을 덮고 나서 실로 많은 생각을 했다. 아니 많은 생각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예전부터 역대 대통령들 중 그의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거나 자서전으로 출간하면 가장 흥행에 성공하겠다는 세속적인 예감은 하고 있었다. 그것은 그가 살아온 누구보다도 드라마틱한 인생이라는 원재료의 충실함도 있었겠지만 대통령들 중에서는 가장 문화, 예술에 근접한 분이라는 막연한 믿음이 있었던 까닭이다. 그중에서 특히 문학적 소양이 뛰어나다고 알려지긴 했지만 나는 흡사 오바마 대통령이나 반기문 UN 사무총장 정도의 자서전을 떠올리며 가볍지 않은 책의 무게를 나름대로 이겨보려 했었다, 처음부터. 그런데 그것은 너무도 정치적인 내 소견이었다. 무겁고 진중한 것은 그대로 진지하고 엄숙하게 받아 들여야 했다. 진실이란 그런 것일까. 머리로 사실을 알고 있는 것과 가슴으로 진실을 느끼는 것은 엄청난 차이였으니 말이다.
이 책은 우리 현대사에 족적을 남긴 한 인물의 자서전이라고만 하기에는 아쉽고 안타깝다. 나는 그것이 못내 미안하고 서운하다. 역사를 따라가는 서사를 기본으로 소설이나 시가 가지는 문학적 장악력과 에세이에서 느껴지는 감동과 진솔함, 인문학이 발산하는 교양의 향기, 종교나 고전에서 발견하는 삶의 진리가 고스란히 담겨있는 '살아있는 문학 예술품'에 근접하다 할 것이다. 나는 이 책에서 '진실을 확인하고 진심을 느끼고 진리를 깨달았다', 상투적이지만 이렇게 말하고 싶다. 나는 그가 마지막 까지 그토록 믿어 의심치 않았다는 역사속에 위치하던 국민의 한 사람임을 이제야 알겠다. 문학의 테두리 안에 이 모든 것이 앉혀져 지나간 역사를 돌이켜보고 그 안에 서 있는 내 인생을 돌아보고 마침내 오늘의 가슴에 뭉클한 심지를 피울 수 있다는 사실이 새삼 놀랍고 목이 메인다. 나는 덜컹대며 내 목이 울렁거리던 이유를, 내 눈이 내 입술이 붉어짐에 그리하여 가슴마져 홧홧하게 뜨거워지던 마지막에 머리 숙인다. 나는 왜 !... 이것을 말하는 내 모습이 자랑스럽다. 어찌하면 성이 찰 것인가. 한없이 모자라기만 한 존경을 넘고 싶은 한사람의 이야기를 그는 지금 알고나 계실지.
우리집 김대중
#3. 나는 학창시절엔 집에서 '우리집 김대중'으로 불리었다. 두 가지 생각이 세뇌처럼 박혀있던 나에게 그 말은 어떤 욕보다도 끔찍했다. 부모님의 이유인 즉슨 자신이 잘못을 해 놓고도 미안하다는 말을 받아내는 적반하장 격의 논리를 고집스럽게 주장하여 사람을 무안하게 한다는 것이었다. 부모님은 나와 말싸움이 벌어질 때 '우리집 김대중인데 어련하겠어', 이렇게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나를 비난하셨다. 나는 학교에서도 반장선거에 나가 연설(까지는 아니지만)을 하면 선생님에게 김대중처럼 사람의 마음을 선동한다는 칭찬인지 질책인지 모를 야릇한 이야기를 곧잘 듣곤 했다. 그러고 보니 고2 때(내가 반장일 때), 우연히 학교앞 서점과의 고착된 비리와 함께 보충수업 교재의 성의없는 선정을 목격하곤 아이들과 함께 교재와 그 교재를 선정한 선생님을 바꾸어주지 않으면 수업을 받지 않겠다는 당돌한 항의를 한 적이 있긴 했다. 나는 국회의원을 아버지로 둔 반 친구를 설득해 위로부터의 압력을 뒤에서 조종하는 놀라운 정치적 술수를 발휘하며 결국 교재를 우리가 원하는 것으로 바꾸는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또, 그러고 보니 사회생활하면서 나는 업체 공개 프리젠테이션을 담당한 경우가 많았는데 공모에서 누가보아도 대결구도가 불리한 국면에 오로지 열정과 마지막 심정적인 호소로 결과를 역전시키는 경우도 더럿 있었던 기억이 난다. 그때 누군가 'PT 한'이 아니라 'DJ 한'이라고 놀리던 사람도 있었다. 그러고 보면 김대중 같다는 말이 욕이 아니었음을 스스로 깨닫게 되기까지 그리고 그 말은 개인적으로도 영광스러운 칭찬으로서 내심 저릿해 지기까지 결국 나는 내 온 생애가 걸린 것이 아닌가.
두 권의 자서전을 덮고 나는 마음을 깊게 쓸고 지나가던 단어들을 적어보았다. 용기, 평화, 화해, 존경...그리곤 그들 밑에 '설득'이라 적고 마침표를 찍었다. 돌이켜보니 자서전은 1권에서 대통령이 되기까지, 2권에서는 대통령이 되고 나서의 시간 순 글들이었지만 결국 모두 한평생 설득하는 인생을 살아오셨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곤 마지막까지 이렇게 책으로 그렇게 살아야 했던 자신과 나를 설득하는구나...사람들은 늘 그의 설득앞에서 고개를 끄덕이거나 뒤돌아 주저하였겠구나 싶었다. 그랬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죽기 직전까지 늘 무엇인가를, 누군가에게 설득하고 있었다. 실은 그렇게 긴 세월 변함없이 세상과 자신을 설득하고 나서야 대통령이 된 것이었다. 그는 가정, 학교, 회사, 단체, 정치권, 해외 할 것 없이 만나는 사람들에게 늘 자신의 의견을 이야기하고 그 시기와 대상마다 적절한 방향성을 제시하였다. 그것을 알기 때문에 사람들은 위기상황일수록 그를 찾았고 그는 죽기직전까지 해외에 초청을 받아 세상을 향해 의견을 내보였던 것이다. 그런데 그 의견은 또 늘 기존의 현실과 고정관념들을 깨우치는 새롭고 혁신적인 의견들이 많았다. 누구나 다 자신이 맞다고 생각한 것을 남에게 펼쳐 보이기도 힘들며 내보였다고 해서 상대의 생각을 바꾸기는 더 어렵다. 그리고 의견이 매번 새롭게 느껴지기도 불가능하다. 그런데 그는 늘 한결같이 새롭고 늘 자신이 옳다고 당당히 말하며 그런 자신과 그 앞에 선 역사와 그를 지켜보는 국민을 믿었다. 같은 말을 해도 한번에 귀담아 듣지 못했으니 매번 새로울 수밖에 없었다.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고 때로는 자신의 이야기를 믿지 않고 알아주지도 않아 가슴을 치며 울부짖기도 했지만 그는 왜 한 번도 멈추지 않았을까. 어쩌면 멈추려는 자신을 설득하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힘든 일이었기 때문은 아닐까.
아버지의 목소리로
#4. 다시 선거철은 돌아와 1997년 그해 말, 아버지는 전에 없이 나를 불러 앉혀다 놓고 김대중만은 찍지 말라고 진지한 한 표를 호소하셨다. 나는 한창 직장생활로 삼일이 멀다하고 철야를 강행할 때였고, 투표에 대한 생각조차 없을 시기였다. 당시 보수세력의 유력한 후보였던 이회창 후보가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지만 김대중이 대통령이 되면 나라가 불안해진다는 것이 아버지 의견이셨다. 아버진 한국전쟁때 18살의 나이로 군대에 자원입대 하신 참전용사였다. 중학교 교육을 일본에서 받은 지라 일어에 유창하셨고 일본에 대한 향수가 남다른 분이셨다. 훗날 특유의 언변을 장기삼아 일본을 대상으로 수산무역업에 종사하셨다. 그날 아버지의 논리는 유려하면서도 아주 인상깊었기에 십년도 더 된 아버지의 목소리가 바로 어제처럼 생생하다. 우리나라 역대 대통령(당시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은 모두 'DJ 컴플렉스'가 있다는 것이었다. 김대중은 사람의 마음을 휘어잡는 마력이 있기 때문에 역대 그분들은 모두 그를 죽이려 했고 어떻게든 그의 정치인생을 매장하기 위해 온 전력을 다해왔다고 하셨다. 아버진 부산시절 대통령 선거에서 DJ의 명연설을 들은 일이 있다 하셨다. 누구라도 그의 연설을 들은 사람은 희망을 가질 수 밖에 없고 열광할 수 밖에 없다고 회상하셨다. DJ와 경쟁구도였던 역대 집권자들은 한마디로 그가 눈에 가시였기 때문에 끝에 가선 전라도 촌사람에다가 학력도 변변찮고 용공이라고 몰아 부치는 수 밖에 없지 않았겠느냐 하셨다. 너무 긴 세월 억눌려 있었기에 차라리 처음에 박정희를 이겼다면 몰라도 그의 지지기반인 호남세력이 갑자기 폭발 할 것이고 그동안 집권하였던 권력자 집단과의 충돌로 나라가 시끄러울 것이며, 그것은 곧 북한이 원하는 바가 될 것이라는 말씀이었다. 즉, 김대중이라는 인물이 대통령감인 것은 확실하나 이 나라의 정권과 국민은 아직 그를 대통령으로 맞이할 수준이 안 된다는 것이 아버지 결론이었다. 아버지에게 있어 일제시대와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경험한 국민적 패배감은 같은 나라의 국민에 대한 뿌리깊은 실망감으로 자리잡은 듯했다. 아버지의 '국민수준론'은 충격이었다. 전쟁에 대한 상처가 자신의 피해와 동일했던 아버지 세대들은 김대중이라는 이름 석자와 다시 전쟁이 일어날 수 있는 불안한 기운을 동일시 하셨다. 오랜 기간 반공을 독재의 밑거름으로 활용해온 정부하에서 당연한 결과였다. 하지만 무엇보다 아버지가 김대중을 '대통령을 할 만한' 인물로 인정한다는 사실 자체가 놀라웠다. 그해 DJ의 당선이 확실시 되던 그날 밤, 아버진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시며 오래 잠을 이루지 못하셨다. 국민들이 갑자기 수준이 높아 진 것일까. 사람들은 왜 그가 대통령이 되는 것을 두려워 하였을까. 왜 그를 겁내하였던 것일까.
자서전을 써내려간 문체를 기억한다. 책에는 재임시절 대통령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 수많은 연설문이 구어체로 소개되어 있다. 담담하면서도 치우치지 않았고 진실을 전하려고 하는 의지가 강하게 느껴졌다. 첫 번째 아내를 잃었을 때, 재혼을 하게 되었을 때, 동생과 누이, 부모님 상을 당했을 때, 자식이 감옥에 갔을 때, 오랜 지인의 부음을 들었을 때 등 개인적인 슬픔을 술회할 땐 짧고 강하면서도 문학적인 표현으로 마음을 저 멀리 하의도 고향 앞바다에 띄워 보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늘 시국의 현장 속에 있으면서도 중간 중간 견딜 수 없는 슬픔을 토로할 땐 외로움의 진액이 유난히 오롯해 보였다. 그렇게 홀로된 고독에의 허기를 민중을 향한 열정으로 다시 삶의 윤기를 빚어내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래서 인지 그의 목소리는 때론 허기지고 때론 윤기가 났다. 나는 그 목소리의 울림에서 어떤 오래된 '진정성(眞正性)'을 느낄 수 있었다. 거짓이 아닌 정성된 목소리. 이것은 그의 업적과 대통령으로서의 평가와는 상관없이 한사람의 아름다운 목소리였다. 그가 내뿜는 음역(音域)은 높고 낮음을 초월한 인간의 슬픔과 외로움, 기쁨과 환희 모두를 끌어안는 무한대 주파수의 영역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음파가 가닿는 곳은 정확하게도 우리들 가슴 한 가운데 였던 것이다. 때론 난파되고 때론 침몰되면서 거친 生의 파도를 헤쳐 나온 독특한 그만의 음률이 전해주는 목소리였다. 정치인의 목소리가 아름답기란 얼마나 힘이 드는 것인가. 진실 자체는 고통스럽고 추할 수도 있으며 내가 원하는 바가 아닐 수도 있었지만 그것을 전하는 마음만큼은 아름답게 느껴졌다. 진정성의 선물이었다.
그는 어쩌면 우리나라에서 보다 해외에서 더 인격적으로 존경받았던 것은 아닌가 싶다. 그들이 우리보다 더 좋은 더 밝은 귀를 가졌던 것일까. 그들이 우리보다 더 열린 마음이었던 것일까. 나는 그가 국내 국외의 장소 및 남녀노소, 사회계층을 불문하고 연설장에서 답이 곤란한 질문을 받거나 화가 날만한 항의를 받을 때 보여주었던 기지와 재치, 혜안이 그때마다 무릎을 탁 칠정도로 대단해 보였고 내심 짜릿하고 통쾌할 때가 많았다. 상대를 기분상하지 않게 하면서도 자신의 논지를 분명히 하면서 감동까지 선사하기란 토론문화가 발달하지 않은 우리 실정에서 누구나 본받을 만한 능력임에 틀림없다. 수많은 세계 정상들은 하나같이 그의 연설에 감동하며 정상회담에서 그의 의견에 공감을 표시하였다. 물론 자서전에 다소 좋은 결과의 내용만 언급되었을 수도 있고 결국 제3자가 아닌 자신이 집필한다는 주관성의 한계가 있음을 모르지 않으나 많은 객관적인 자료들에서도 사람들은 그의 말에 결국 설득당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거기엔 늘 이성적인 이해를 넘어선 감성적인 공감과 인간적인 감동이 수반되었다. 클린턴 대통령을 비롯한 많은 정상들이 화답한 문건과 그들과의 대화들을 살펴보면 단순히 한나라 정상끼리의 외교적인 대화가 아니라 지면과 사진을 통해서도 서로의 인격을 깊이 존중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의 정책과 전략이 탁월할 만큼 우수했을 수도 있었겠지만 무엇보다 그러한 정책을 피력하는 진심어린 진정성에 정상들은 먼저 마음이 동화되었던 것이 아닐까 싶었다. 상대 정상과 국가에 존경을 표시할 때도 틀에 박힌 교과서적 인사가 아닌 자신 스스로가 공부해 발견한 깨우침을 역사적인 의미를 부각해 상대국에 자긍심을 세워주는 모습, 진심으로 상대에게 공을 돌리는 겸허한 자세, 상대의 무례나 오해까지도 포용하려던 성심, 한 번의 만남이라도 인연을 소중하게 여기는 따스한 태도등이 비록 그의 정책에는 동의하지 않았을지라도 그 마음에는 흠뻑 동감하도록 만드는 그만의 능력이었다. 부시대통령도 한참 연장자인 그를 처음엔 변방의 촌놈처럼 무시하는 결례를 범했다가 훗날 다시 여러 방법으로 사죄하는 에피소드를 보고 무례하기로 유례없던 미국의 대통령도 그를 향한 존경과 진심은 있었구나 싶었다. 왜 사람들은 그의 연설을 들으면 가슴이 뛰고, 그와의 대화에서 고개를 끄덕이고, 그의 진심에 마음으로 감동했을까.
그는 어떻게 '자기 진정성'(authenticity)을 구축해 온 것일까. 아니 어떻게 해서 그렇게 변함없이 진정할 수 있었을까. 어릴 적부터 막연히 임금님이 되겠다는 큰 뜻을 품어온 그이기에 타고난 기질도 있었겠지만 나는 그의 진정성을 이루는 몇 가지 가슴아픈 피와 눈물의 흔적을 책을 읽어가며 찾아내어야 했다. 그는 사람을 마주할 때 자신이 그때까지 이루어온 온몸을 다 쓰면서 상대를 설득해 온 것은 아닐까. 즉, 머리로는 스스로 깨우친 지식을 전달하고 몸으로는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적용하고 가슴으로는 우러나온 태도를 전함으로써 그때그때 마다 상대를 최선으로 배려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는 난항이 예상되는 정상간의 회담이나 연설이 끝난 후엔 그야말로 '젖먹던 힘을 다해' 애를 썼고 쏟아 부었다는 표현을 자주 했다. 실제로 그는 어머님의 젖을 풍부하게 먹고 자랐을까...마는 매순간 최선을 다하지 않는 대통령이 어디 있을까마는, 유독 아주 힘들 때 마지막 남은 힘까지 모두 짜내어 그가 다해마지 않은 사력은 늘 진실과 정성의 극대치였다는 점에서 더 애닯고 끈질겨 보인다.
자기진정성의 밑바탕에 분명 자신의 머리에서 나온 자기 철학이 있었다. 이 점은 정세에 따라 정책을 제안하고 시행과정에서 또 시류에 휘말려 뒤집기를 반복하는 오늘날 철학이 없는 수많은 정치인을 떠올려 보면 그 중요성을 더욱 실감할 수 있다. 그런데 인류가 철학자가 아닌 정치인에게 세상을 맡긴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자기 철학을 행동에 옮겨야 하는 대통령이 철학자와는 달리 특정한 시기, 특정한 사회에서, 특정한 권한을 가지고, 특정한 임무를 수행하는 자이기 때문이 아닐까? 나는 자서전 1권을 덮으면서 그가 그토록 오랜 세월 대통령이 되지 못한 이유는 바로 한반도의 가장 특정한 시기에 최고 난이도의 특정한 임무를 수행해야 했기 때문이었구나 하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그는 결국 대통령이 되지 못한 시기 동안 그 특정한 임무를 위해 철학과 종교와 사회와 인간을 끊임없이 준비하며 마침내 목표를 성취하였던 것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그 앞엔 언제나 발전을 요구하는 국민이 있었다. 대통령의 자기 철학은 언제나 국민이 요구하는 바와 사회발전 방향과 부합해야 할 것이다. 그는 일제시대, 한국전쟁, 군부독재, 민주화투쟁이라는 근현대사의 모든 상처를 직접 겪으면서 우리나라 민주주의의 방향성과 통일정책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가지게 된다. 그가 자주 설득하던 '아시아인의 민주주의 자질'은 내 학창시절 이십년 동안 어떤 선생님도 제시하지 못했던 신선한 이론이었다. 수많은 책을 읽고 더 많은 사람을 겪고 일본인 교사로부터 배운 것들, 전쟁의 상황에서 겪은 부조리, 지도자의 선택이 한반도에 미치는 영향, 독재가 불러온 폐해등을 몸소 체험하며 현장에서 익힌 실물경제 감각을 더해 익혀진 자기진정성의 탄탄한 밑거름이었던 것이다. 이는 단순히 어떤 한사람의 정책을 모방했다거나 선진국의 방식을 그대로 차용한 것이 아닌 그 모든 것을 수용해 독창적으로 고안해 낸 것이었다. 자신 안에서 자신의 의지대로 生의 방식을 선택한 것이었으며 그러한 방식을 선택하는 근원적 기준은 자기 자신에게 진실한가, 역사와 국민앞에 당당한가였기 때문에 그는 누구를 만나도 어디를 가든지 '자기진정성'을 최대의 무기로 삼을 수 있었던 것이다.
대부분 그를 말할 때 언변이 뛰어난 사람이라는 수식을 하고는 한다. 말 한마디로 천냥빚을 갚는다는 속담처럼 그는 대인관계에 있어 그 어떤 대통령보다 대화술이 뛰어났던 것으로 알려졌다. 지방출신의 고졸학력을 가진 그가 세계 지도자들을 만나서도 자신감을 잃지 않고 품위를 지키면서 소신을 펼 수 있었던 배경엔 지독할 정도로 쌓아올린 풍부한 지식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그는 6년간의 감옥이라는 학교에 있을 때에도 독서의 자유와 사색의 즐거움을 잊을 수 없다고 고백했다. 그 자신도 오십 줄에 영어를 독학으로 깨우칠 수 있었던 것은 감옥에 간 덕분이라 말하지 않았던가. 감옥에서 만난 앨빈 토플러의 <제 3의 물결>은 IT 강국이라는 자랑스런 결실로 돌아왔다. 선거 패배이후 망명길에 올랐을 때에도 휴식이나 단절등의 비교적 쉬운 삶을 택하지 않고 미래를 위해 끊임없이 연구하고 준비하는 행보를 보여주었다. 유명한 정치인에게 수여하는 형식적인 명예박사가 아니라 정식논문으로 인정받은 박사학위를 따고 마는 그의 정열을 그저 개인의 욕심으로 치부하기엔 사람된 죄스러움이 먼저 마음을 가로 막는다.
운명의 상련相憐으로
#5. 아버진 만성신부전증으로 15년을 고생하시다 2004년 폐렴 합병증으로 돌아가셨다. 내 어머닌 동창회에서 여흥중 우연히 누군가에게 뒷 발목을 걷어차인 후 치료를 제때 받지 않아 말년에 오른쪽 다리를 절게 되셨다. 아버진 일주일에 세 번 신장투석을 하셨는데 가장 힘든 것은 투석할 때마다 찔러대는 대바늘도 아니고 마음대로 먹지 못하는 음식도 아니고 앞으로 죽을 때까지 죽는 그날까지 투석을 해야 한다는 그 사실 자체라 말씀 하셨다. 투석이 있는 날엔 하루 종일 우울하고 예민하셨다. 어머닌 내 결혼식 때 곱게 차려입고도 실수로 넘어지게 될까봐 어머님이 입장하는 순서에 온 신경을 쏟으셨다.
언젠가 그가 퇴임 후 신부전증으로 일주일에 세 번 투석을 받는 다는 소식을 듣고 같은 병으로 고생하신 아버지가 떠올라 가슴팍이 저며들던 기억이 있다. 서재 뒷켠에 간이 침대를 마련해 놓고 집에서 투석을 받았다하니 그 병의 징후를 너무나도 잘 아는 가족으로서 마음이 편치 않았던 까닭이다. 또한 그는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다리가 불편한 장애인으로서 재임기간 중 지팡이를 짚고 다녔기에 화면을 통해서 그러한 신체적 불편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순간도 많았다고 기억된다. 어머닌 유난히도 그렇게 뒤뚱거리는 걸음걸이를 목격할 땐 한나라의 대통령이라는 사람이 저게 뭐냐며 노골적인 거부감을 드러내곤 하셨는데 아마도 같은 불편을 겪고 있는 장애인으로서 늘 타인의 시선이 야속하고 두려웠던 마음이 그를 향해 투사 된 것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책에는 재임중 다리가 너무 아파 중요한 행사에 혹시 넘어지기라도 할까봐 늘 온 신경을 쓰고는 했다는 고백도, 신장투석도 너무 두렵고 힘들었다는 투정도 있었다. 자신의 신체장애에 대한 솔직한 글을 접할 때 마다 나는 거짓말처럼 같은 병치례를 하셨던 부모님이 자꾸 불쑥 튀어나와 어쩔 수 없이 눈물을 쏟아내곤 했다. 그래서인지, 자꾸 미안하고 더 없이 감사했다. 투석환자이면서도 퇴임 후에 그렇게 전 세계의 초청을 마다 않고 운명하기 두달 전까지 강행군을 해왔다는 것이 국민으로서 감사했고, 그의 불편한 걸음걸이를 국민으로서 창피해 한 마음이 고개들 수 없을 정도로 죄송했다. 어느 날인가 TV에 유난히도 피곤한 기색을 드러내며 심하게 절룩거리는 모습을 보고 그의 건강을 걱정하기 보다는 우리는 언제쯤 외모도 말투도 남부끄럽지 않은 젊은 대통령을 맞이해보나, 하는 식의 하소연을 직장동료와 나눈 기억도 있다. 책을 읽으면서 감옥에선 다리가 아파 제대로 무릎을 펴기도 힘들어서 밥을 먹기도 힘들었다는 고백에 목이 메어 한참을 숨 넘기기 힘들 때도 있었다. 아마도 평생을 사악하고 불순한 것들만 남들보다 몇 백 배로 걸러 오느라 신장이 망가 진 것이고 이미 인격적으로 흠이 없었던 그가 전 세계를 누비며 만인의 존경을 받게 될까봐 그러한 그의 발목을 잡으려고 했던 사람들이 너무 많았기에 그의 다리는 지팡이를 필요로 하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나는 대통령쯤이 되면 훌륭한 전담의사도 있고 집에서 치료를 받으며 일반 환자들보다 비교적 편하게 투병생활을 할 것이라 생각하였는데 실은 대외적으로 대통령이라는 위치와 역할때문에 마음놓고 자신의 고통을 어디다 호소하지도 못하였고 의지만으로는 불가한 신체적 장애까지 정신력으로 극복하며 모든 의전행사를 치루어야 했던 심적인 고통과 고독이 일반인은 상상하지 못할 수준이었던 것이다. 그는 얄궂게도 내 아버지와 똑같이 급작스런 폐렴과 이어지는 패혈증을 극복하지 못하고 운명했기에 끝내 아버지의 마지막을 생각케 하며 나를 복받치게 만들었다. 그런 면에서 더욱 앞서 운명을 선택한 노무현 대통령이 야속했다고 한다면 그가 서운해 할런가.
형님된 심정으로
#6. 사람의 일이란 한치 앞을 알 수 없어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자살했을 때 나는 술집을 운영하고 있었다. 그가 대통령이 될 운명이었다면 그것은 곧 대통령으로 죽을 운명이었다는 말인가. 그날 나는 가게 테라스에 노란 풍선과 검은 리본을 장식했다. 바로 건너편엔 호프집이 오픈을 해 행사도우미들이 반라로 춤을 추고 있었다. 나는 그날 밤 태어나 처음으로 동사무소에 민원 신고를 했다, 그것도 세 번이나. 우리가게 손님들은 노무현이 생전에 좋아하던 노래를 들려주니 약속이나 한 듯이 하나둘씩 울기 시작했다. 생전 목소리로 부르는 '상록수'가 울려 퍼지자 어떤 사람은 테이블에 엎드려 목을 놓아 통곡하며 소리를 질렀다. 그날 가게 매상은 평소의 세배였다. 그의 장례식 때 한명의 노구가 휠체어를 탄 채로 오열하는 모습을 보았다. 아...살면서 나는 저 사람의 저 가식없는 울음을 몇 번이나 더 TV에서 볼 수 있을까. 어쩌면 모두들 예감했을지 모르겠지만 정말로 마지막이 될 것 같아 이번이 마지막이길 감히 바라지도 못했다. 어떤 슬픔은 자신이 겪었어도 여전히 믿겨지지 않을 때가 있다. 나는 그때 사람들의 울음을 보면서 슬픈 건 그의 죽음이 아니라 한때 대통령이었던 사람도 자살하는 나라에서 내일도 우리는 여전히 슬플 것이라는 자신들의 현실이었다는 걸 느꼈다. 그날, 우리는 모처럼 같은 마음으로 슬퍼했고 아무도 서로를 질책하지 않았으며 서로 다른 의견이 없음에 기꺼이 안도하며 가게 문을 닫았다.
만약 그들이 아직 생존해 올 초 있었던 천안함 사건이나 얼마전 시행된 북한의 3대 세습과정, 연이어 터진 연평도 도발을 지켜보았다면 어떤 심정이었을까. 밤새도록 자신의 가슴을 쥐어 뜯으며 세계적인 시각으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구상하는 그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올들어 심심찮게 김대중 전 대통령의 유산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취지의 글들을 접할 때가 많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대표적인 사설로는 햇볕정책으로 인해 김정일 정권의 수명이 연장되었고 핵무기와 장거리 미사일을 개발하는데 도움을 초래했다는 강도 높은 비난도 있었다. 천안함 사태에 대한 불신 역시 그가 남긴 친북주의에 기인한다는 결론도 많았다. 나는 정치에 관심이 있는 유권자가 아니었기에 이러한 정치적인 주장들에는 정답도 오답도 없는 당시 상황만 비일비재하다는 생각을 버리지 않아왔다. 그런데 이번 자서전을 읽고 그의 대북정책에 대한 평가와는 상관없이 한 가지 분명하게 깨달은 점이 있다. 그것은 대화를 누가 하느냐, 즉 일생 단 한 번의 만남으로 이루어진 가장 짧은 대화라 할지라도 어떤 사람과 하느냐에 따라 그 결과는 천차만별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대표적으로 그가 6.15 공동 선언 당시 김정일 위원장을 만나 대화를 끌어나간 것을 보면 어렵지 않게 역시 중요한 것은 '사람'이었구나 하는 걸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나는 당시 2000년 TV에서 두 정상이 손을 붙들고 감격에 웃음짓던 장면을 또렷이 기억한다. 당장 통일이라도 눈앞에 다가온 듯했던 흥분에 나도 모르게 소름끼치던 순간...화면을 통해 전해지던 김정일의 화통한 목소리와 웃음소리, 북한 주민들의 열렬한 환호...그해 여름을 앞두고 우린 분명 IMF 를 단기간에 극복했다는 자부심과 벤쳐기업들의 신화와 월드컵을 앞둔 시점에서 '다시 한번 해보자'는 열정만은 최고치였던 멋진 추억이 있었다. 책에서는 그가 햇볕정책의 정통성과 철학적 배경, 나름의 소신을 가지고 전 세계 정상들을 만나며 자신 있게 그들을 설득하는 장면들이 잇달아 소개된다. 김정일 위원장도 다른 사람은 몰라도 김대중을 존경해 왔다고 마음 한켠으로부터 인간된 정리를 강하게 느꼈던 것으로 보인다. 꼭 연장자여서가 아니라 그때는 김정일도 한국이 아닌 외국인의 시각으로서 그의 인품과 인생에 동지적 연민을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김정일이 대화중 왜 '우리'끼리 대화해서 해결할 생각을 하지 않고 자꾸 '다른' 나라를 끌어들여 자주적인 통일을 훼방놓느냐는 말이 무척이나 인상깊었다. 따지고 보면 틀린 말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러모로 국제적인 시각이 부족했던 그에게 세계정세와 흐름을 알려주고 가르친다는 우월감보다는 자존심 상하지 않게 호소하며 김정일의 입장에서 어려운 점을 진심으로 이해하려 했던 그의 노력이 결국 그의 마음을 열었던 것이라 생각한다. 남북정상회담이 끝나고 세계언론은 김정일이 '대화할 만한 사람'이라는 평가를 내렸다. 그전까지는 전혀 대화가 불가능하다고 판단된 김정일이 세계에 당당히 대화가 가능한 지도자로 인식된 것은 바로 그가 대화한 상대에서 연유를 찾아야 할 것이다. 김정일은 김대중과 대화했기에 대화가능한 인물이 된 것이 아니었을까. 정말이지 아버지나 큰 형된 심정으로 같은 민족을 염려한다는 느낌을 받았던 것이라 믿는다. 나는 비록 지면이지만 다시보는 남북 정상회담의 일련과정을 지켜보면서 김정일 위원장의 열린 마음을 느낄 수 있었고 그러한 노력은 아무래도 정작 당사자였기에 객관적이기 힘든 우리가 아닌, 세계가 더 먼저 그리고 더 많이 더 오래 이해했다는 생각이다. 혼자 이리 뛰고 저리 뛰는 그의 행보가 단지 노벨평화상을 수상하기 위한 무리한 전략이었다고는 그때도 지금도 전혀 느끼지 않음이다. 세계가 인정한 것은 그의 민주화투쟁, 통일정책과 세계평화에 드러난 공적으로서의 결과와 기여도가 아니라 바로 변함없이 '자기진정성'을 버리지 않은 끈질긴 고집이 아니었을까. 나는 그가 김정일 뿐 아니라 각국의 정상들과 대화를 하는 것을 보고도 새삼 '만남'과 '대화'라는 것의 중요성을 뼈저리게 통감하고는 했다. 그는 애정을 가지고 추진한 정상과의 회담이 결렬되거나 국제 정세에 밀려 취소되고 난 후 항시 가정법을 사용해 '만일 그때 김정일이 클린턴을 만났더라면', '야당총재가 김정일을 만났더라면' 하는 식으로 훗날 역사의 전환점에 방점을 찍지 못한 그 순간을 땅을 치며 애통해했다. 단 한 번이라도 단 한 명이라도 단 한 나라라도 그 하나의 절대성과 인연은 나라와 나라사이 역사를 전환하는 대단한 계기가 되는 것이었고 그러했기에 그 당사자가 어떠한 사람이었는가는 결국 사안의 성공과 실패를 가늠하는 절대적 요인이라는 다소 운명적인 생각을 하게 되었다. 정상들은 왜 그를 존경했을까. 왜 다른 사람이 아닌 그와 대화하고 싶어 했을까.
고통이 소통으로
#7. 얼마전 평소 호감을 가졌던 한 유명인사가 뜻밖에 자살을 했다. 그는 자신이 죽어야 할 이유를 신체적 고통이라 유언했다. 연예인, 일반인, 청소년 할 것 없이 자살률이 증가하고 있다는 통계적 수치를 보면서 '그렇게 죽어야 할 이유가 많은 것일까' 다시금 생각했다. 누가 보아도 죽을 만큼 죽고 싶은 순간이 많았을 것으로 보이는 한사람이 떠올랐다. 노무현 대통령도 자살을 선택했는데 그렇다면 김대중 대통령은 그보다 죽을 이유가 적었던 것일까. 2010년 현재 어느 기관에서 우리시대 위대한 영웅을 조사하였더니 1위는 노무현, 2위는 김대중이었다. 만약 자살을 선택하지 않았어도 노무현이 1위가 되었을까. 나는 다분히 자살 프리미엄 효과의 수혜를 받은 1위라 생각하기에 어쩐지 순위가 뒤바뀌었으면 싶었다. 죽고싶어도 살아낸 사람이 영웅이 되는 세상이면 좋겠다 싶었다. 죽어야 마땅할 이유로 친다면 그보다 더 한 사람도 얼마든지 살고 있는 세상이고, 죽을 만큼의 고통으로 견주어 본다면 마찬가지로 삶보다는 죽음을 선택할 사람이 적지 않을 거라는 생각을 한다. 하지만 인간은 이유나 고통 때문에 살고 죽는 것이 아니고 스스로의 자발적 의지 때문에 살거나 죽는 것이 아닐까. 자살을 선택한 사람들도 나름대로 공통의 의지는 함의하고 있었음이다. 문제는 의지의 향방이었던 것이다. 죽도록 죽고 싶은 의지가 죽도록 살고 싶은 의지로 선회하게 하는 힘은 무엇일까.
우리 사회는 대통령을 비롯한 이상적 롤 모델이나 유명스타에 대해선 유독 절대성의 잣대를 들이대며 조그만 실수나 잘못, 약점과 단점을 발견하면 굉장히 너그럽지 못한 국민적 성향이 있다. 최근 연예인과 유명인사들의 잇다른 자살을 겪으면서 정신과 의사들은 교과서적 얘기지만 일반인에게 많이 알려진 롤 모델일 경우 스스로 ‘내적 힘’(Self-Strength)을 길러야 한다고 조언한다. 이 힘은 절대 한 번에 얻어지는 것이 아니며 스스로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힘들 때 힘들다고 털어놓을 수 있는 용기를 가질 때, 그리고 그 과정을 통해 심리적 어려움을 극복하는 ‘성공’의 경험을 했을 때 비로소 생기는 결과물이라 말하고 있다. 그런데 이때 가장 중요한 것은 이미 사회적으로 공감을 획득한 그들이기에 바로 그들의 입장에서 고통을 들어주는 ‘지지그룹’의 형성이라고 한다.
그렇게 본다면 누구보다 '내적 힘'이 강했던 그는 '지지그룹'이 결코 영원할 수 없는 정치인의 태생적 한계를 어떻게 극복한 것일까. 돌이켜보면 국민들 중에서도 오랜 세월 그의 정책이나 정치노선은 지지하지 않았더라도 그의 인격에 대한 지지만은 중단된 적이 없지 않았나 생각된다. 이것은 여러 차례 죽음의 고비를 넘기면서도 그가 끝까지 국민을 믿었기 때문에 역으로 얻어낸 고귀한 '지지'였다는 점에서 결국 그 지지의 모태 역시 그것을 끌어낸 당사자에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본보기라 할 것이다. 그에게 표면적인 '지지그룹'도 노동자에서부터 지도자까지 속 깊었을 뿐 아니라 안으로는 이희호 여사를 비롯한 가족에서부터 여성, 지역사회, 인권단체, 지식인, 종교인, 정치인까지 폭넓었기에 수직수평의 꽤 탄탄한 스펙트럼을 그 기반으로 하고 있었던 것 같다. 이는 납치, 망명, 연금등의 수차례 억압과 연이은 선거패배에도 굴하지 않고 자신의 고통을 견딜 수 있는 심리적 소통장치가 되었던 것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그 또한 지지그룹에게 정치활동 외에도 학업이 되었건 연구가 되었건 끊임없이 자신의 주장을 내보임으로써 어쩌면 자신의 두려움, 나약함을 더욱 극복하는 계기가 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했기에 마땅히 죽고 싶었을 많은 순간에도 죽음을 향한 의지를 선회할 수 있지 않았을까. 용기를 최대의 미덕으로 알고 진실에 근거한 웅변을 무기로 삼아 항상 설득할 자신이 있었던 것이다.
어찌 보면 그가 실패할수록 그를 지지하는 그룹은 증가했고 그룹이 증가할수록 그는 실패를 실패로 여기지 않을 수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한 그도 92년 선거 패배후엔 용공조작에 좌우되는 국민을 원망하며 한없이 실망했다고 고백한 적이 있지 않은가. 그에게는 병실이라는 위선적 감옥과 독방이라는 고독의 감옥과 함께 국민이라는 양심의 감옥이 있었다. 그는 끝내 국민을 버리지 않았고 훗날 대통력 수칙엔 '국민의 양심과 애국심을 믿자'고 적을 수 있었다. 그가 빛을 발한 자기 진정성은 혼자만의 종교적 수행이 아닌 국민이라는 양심과 역사라는 진실을 향해 있었고 포기하지 않게 해준 많은 사람들이 있었기에 새삼 더 크고 위대해 보였던 것은 아닐지.
국민의 이름으로
그는 '역사를 신앙으로 섬기고 정의를 믿었으며 진실이 역사가 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 추운 겨울동안에도 죽지 않는 인동(忍冬)의 세월을 이기고 꽃을 피웠다. 한참 유세중에 케네디의 피격소식을 듣고 그를 만나 본 적은 없지만 그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억울하다 했던가. 나는 무엇을 견디었던가. 돌이켜보니 나는 김대중이라는 역사를 견디기는 커녕 늘 외면하려고만 하였던가. 그를 제대로 알지 못했다는 것은 곧 우리나라 역사를 제대로 알지 못했다는 뜻과 같았으니, 그것은 제대로 된 국민이 아니었음에 다름 아니다. 하지만 오늘 그가 없음이 억울하고 원통한 내게도 어제 그럴만한 이유는 있었다. 그러했기에 대통령과 국민으로 헤어지고 이렇게 저자와 독자로 만나게 된 것이 아니겠는가. 만나자 헤어지는 내 오늘에 이제라도 뒤늦은 국민의 이름을 갖고 싶다. 그는 떠났지만 나는 아직 내 나라를 떠나지 않았고 그곳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나는 그를 믿지 않았지만 그가 믿었던 국민이고 싶기 때문이다.
정치를 떠나서도 내 삶의 '자기진정성'에 대한 진지한 질문과 대답을 떠올리게 하는 장중한 독서였다. 역사와 국민앞에 그리고 자신에게 진실하고자 했던 그는 내게 붉은 진정의 꽃을 선사했다. 우리네 삶이 진실을 우선가치로 삼기는 쉬워도 생활에서조차 우선순위로 두기는 얼마나 어려운 현실인가. 어쩌면 정치인으로서 유일하게 사회나 역사가 아닌 도덕교과서에 등장할지 모를 일이며 그 또한 마지막이 되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다. 더불어 이제와 생각하니 누가 보면 창피 할 정도로 눈물을 쏟아낸 그 마음은 그동안의 내 인생에 대한 위로와 격려였던 것 같다. 나는 김대중이라는 한국의 제 15대 대통령의 인생과 업적을 돌아 본 것이 아니라 그의 진정한 손에 이끌려 우리가 살아낸 지난 시간과 공간속에서 나에게 일어난 일들을 촘촘히 들여다 본 것이었다. 주마등처럼 스치고 지나가는 모든 이야기에 내 인생과 내 가족이 거기 있었다. 그 시간과 공간은 한국의 역사이었고 결국 우리들 인생과 가족의 이야기가 모여 국민이라는 역사가 되는 것이었다.
이제, 책상위 문신처럼 걸려있는 내 부모님의 사진을 올려다 본다. 그들도 누구보다 나라를 사랑하신 애국자이었다. 반공과 독재와 지역감정의 수혜자이자 피해자였던 그들, 나는 이제야 국민이었던 그들에게 인사한다. 부모님의 빈자리 만큼이나 그의 빈자리가 그리웁다. 무엇을 해도 무조건 내편이었던 부모님처럼 어떤 나랏일도 가장 뜨거울 그가 보고 싶다. 잠 못드는 그 새벽 어머니의 잔소리처럼 큰일 앞둔 그의 한마디를 듣고 싶다. 넘어지고 그 다음이 더 두려운 절망의 아침에도 우리는 너를 믿어왔다 그 눈빛이 부시고 시리웁다. 가을 코스모스 벌판을 뒤로 그의 웃는 얼굴이 사무친다. 그래도 눈물이 난다. 어디선가 캠브리지의 짝사랑 로빈이 날아든다. 로빈은 내게 말한다. 가슴에 새긴 붉은 털이 우리 모두의 진정이라고. 당신의 가슴에도 뜨거운 깃털 하나 오롯이 자라나 그 붉은 이름으로 국민이라 새겨졌다고.
나는 국민이다. 역사는 계속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