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를 위한 여섯 가지 은유
이어령 지음 / 열림원 / 2010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아파야 기쁜 우리관계

컨셉트 플래너. 젊은 날 내 명함엔 이렇게 쓰여 있었던 적이 있었다. 십오년 쯤 되었으려나. 당시 우리 회산 일본의 유명한 설계회사의 安을 받아서 이른바 그들로부터 한수를 배우는 프로젝트를 수행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일본팀의 수장 명함엔 컨셉트 플래너(Concept Planner)라는 아리송한 직함이 써 있었던 것이다. 일본어를 다 알아듣진 못했지만 한눈에 보아도 자신감 넘치는 설명과 지적으로 보이는 그의 언변에 우리쪽 사람들은 그저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그가 컨셉을 도출해내면 일본에선 당선 백프로라는 이야기도 들었다. 자존심 상하는 일이지만 우리는 그들의 安(그의 컨셉)으로 프로젝트가 당선되는 기쁨아닌 기쁨을 맛보았고 그가 떠난 후로 우리 부서의 기획자들은 **팀 컨셉트 플래너라는 직함이 명함에 표기되기(이는 더 자존심 상하는 일이지만) 시작했다. 그날 이후 우린 새로운 컨셉을 생각해내기 위해 한국의 컨셉도출의 1인자 이어령 前장관(우리시절엔 장관이라 불렀다)의 서적을 옆에 쌓아 놓고 살았다. 'A는 B다' 식의 고난이도 은유의 달인. 한국말로 가장 한국과 한국인을 창의적으로 멋지게 말하는 사람. 문화, 예술계에서 이어령은 문학계에서의 이어령보다 한층 높은 위치에 지존처럼 우뚝 서 계신다. 우리나라의 굵직한 국가 행사는 대부분 이어령의 자문을 거친다고 보면 되는데 이는 곧 그만큼 한국을 독창적인 컨셉으로 연출할 사람이 없다는 뜻과도 같다. 그래서 나는 이어령을 문학으로 읽어 온 것이 아니고 컨셉으로 느껴왔다. 이것은 그의 문학성과 작품 내용과는 무관한 오래된 습관이었다. 그리고 항상 얄밉게도 책을 덮으면 건질 것은 건져내고 필요없는 것은 버려왔다. 어찌보면 내 업무를 위해 방법론으로서 이어령을 철저하게 이용해 왔던 것이다. 그런데 이번엔 좀 달랐다. 최근의 그의 문학적 행보에서 느껴지는 말년의 감성적 변화를 드디어 접수하게 된 것이다. 나는 좀 마음이 급했다. 왜 그런지... 머리가 아닌 가슴이 그를 향하고 있었다. 어머니라는 숨막히는 단어...때문이었을까. 어머니를 컨셉으로 읽어내기엔 내가 너무 작았다.

이 책은 제목 그대로 어머니에 대한 글을 시작으로 어린 시절 고향에서의 기억, 문학의 길을 택하게 된 배경등 사적인 체험을 주로 술회하고 있다. 지난 봄에 출간된 <지성에서 영성으로>에서의 '메멘토 모리'를 기억한다면 이번엔 언제나 '어머니를 기억하고 살아라'라는 뜻으로 후속 연재해 주신 듯하다. 그리고 유난히도 이번 에세이는 이어령 은유의 정수精髓를 느낄 수 있는 은유의 교과서라 해도 좋을 듯하다. 그의 은유엔 언제나 한국이라는 자부심과 지식인의 혜안과 문학인의 감성이 논리적으로 탁월하게 믹스되어 있지 않았던가. 이번엔 어머니라는 모성, 탄생의 시작, 인연의 바다가 하나 더 추가되었다. 어머니로 시작된 글이어서 그런지 시종일관 문체는 숙연하고 그리웁다. 왜 아니겠는가. 그의 나이는 꼭 내 아버지와 같은데 나는 그의 어머니 그러니까 나에게는 우리 할머니로 여겨지는 그 세대분들의 등에 업혀 자라난 마지막 세대일 것이다. 그는 열한 살에 어머니를 여의었지만 어머니를 기억하는 그 짧은 기간의 추억은 그의 문학의 모든 것이라 해도 좋았다. 어떻게 저렇게 박식하고 언변이 유창할까 싶었던 그 신기함의 모태는 바로 어머니라는 비밀아닌 비밀이었던 것이다.

어머니...나는 아직 내 어머니를 또 다른 말로 은유할 수 없다. 내가 이어령의 나이가 되면, 그와 비슷하기라도 한 경지에 만에 하나 근접하기라도 한다면 혹시 두어 개, 아니 하나라도 은유할 수 있을까. 그것도 자신이 없다. 어머니를 여섯 가지로 은유할 수 있다는 것은 이제 자신의 생애를 여섯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는 말일 터이다. 어머니를 은유한다는 것은 자신이 해온 모든 문학적 작업을 집적하는 일일 것이다. 반사적으로 '왜'가 아닌 '이제'라는 시점으로 들려오는 이 은유는 작가로서 많은 의미를 상징한다고 느껴진다. 어머니가 있다고 해서 모두 문학을 한다고 해서 이렇게 여섯 가지로 은유할 수 있는 일은 아니라 생각한다. 설령 은유한다고 해도 그건 굉장히 사적인 영역에 가까운 일이 아닐까. 이어령은 인간으로서 가장 사적인 인간관계인 어머니를 은유하는 것이 그와 세상사이의 어떤 예정된 약속처럼 느껴진다. 세상이 기다리고 있었기에 그는 약속을 지키려 했던 것은 아닐까. 우리가 바라는 것은 늘 그를 깊숙이 관통하고 세상에 등장하는 세상 유일한 창조작업으로서 가장 고통스런 언어였을테니 말이다. 우리는 작가가 되도록 많이 아파야 최대한 기쁠 수 있는 존재일테니 말이다.

모순의 법칙, 역설의 진리

그에게 어머니는 영원히 다 읽지 못하는 책이다. 집을 떠나고 돌아오는 것을 가르쳐준 나들이다. 어머니를 대신해 대청마루에 앉아있는 뒤주다. 세상의 쓴 맛을 가르쳐 준 금계랍이다. 사무치는 그리움으로 남겨주신 귤이다. 현존하는 거대한 부재로서 바다이다. 책은 유전으로 전수된 어머니의 문학적 기질을 상징한다. 어머니는 수많은 소설책을 읽어주셨기 때문이다. 나들이는 어린 시절 고향의 정취를 대신한다. 어머니 손을 잡고 외갓집을 오가던 그 길이 아름다운 여행길이었기 때문이다. 뒤주는 어머니의 역할을 암시한다. 많은 식구들을 거느리시고 베풀어 주시던 어머니의 지혜창고였기 때문이다. 금계랍은 어머니의 가르침이다. 젖줄을 떼어내고 혼자 일어설 용기를 길러주신 약이기 때문이다. 귤은 어머니의 유품을 의미한다. 그 시절 귀한 것이라 먹지 않고 보내 오셨지만 유골과 함께여서 먹을 수 없었던 애통의 과일이기 때문이다. 바다는 돌아가셨지만 늘 눈앞에서 생생한 어머니를 떠올리게 한다. 살아있는 것 같으면서도 죽어 있는 것, 꽉 차있으면서도 텅 비어있는 것이 바다이기 때문이다. 이 여섯 가지는 사실 어머니를 대신하기도 하지만 그럼으로써 자신을 대변하는 이어령의 정체성이기도 하다. 그런데 어머니와 11년이라는 짧은 삶을 살아온 이어령의 체험은 책이라는 구체적 사물에서부터 나들이라는 한국적 행동개념, 뒤주와 같은 시대를 대변하는 물건, 금계랍이나 귤같은 음식, 동서양을 아우르는 보편적 대상인 바다까지 선뜻 연관성을 짓기 참 난해한 여섯 가지로 정리되었다. 이들을 연계시킬 대 주제는 오로지 이어령의 어머니 하나로 인식되는 지극히 개인적 작업의 결과물이지만 그의 언어는 이 여섯 가지를 우주적으로 승화시키는 힘이 있다. 우주적 승화에는 그 만의 창조원칙과 방식이 있었다.

그에게 고향은 고집스런 기억의 공간일 뿐 누구라도 이미 고향이라 말하며 그 시절을 그리워 할 시점엔 고향은 없어진 것이라 말한다. 기억속에 늘 존재하지만 실제로는 부재한 고향의 역설을 시작으로 그는 고향을 지키고 있던 우물의 모순도 발견해 낸다. 우물이 좀 더 깊어져 생성된 자신의 고향 온양온천은 지하에서 솟구쳐 올라오는 불꽃과 어두운 심연을 향해 하강하는 모순속에서 피어나는 고향의 진원지라 설명한다. 이 대비되는 관념은 온천 주변에 병원이 있어 늘 신혼부부들과 부상자를 동시에 볼 수 있었던 이유로 육체의 쾌락과 아픔이 공존하는 삶의 모순을 실체로도 일찍이 확인한 것으로 보인다. 따뜻한 햇볕이라는 뜻의 온양의 태양아래 자라난 수박은 깨보기 전엔 절대 알 수 없는 내면을 가진 과일이므로 여름의 태양을 닮은 속살을 간직한 고향사람들을 비유하기도 한다. 결국 고향은 자신이 그랬듯이 떠날 때면 할머니가 멀어질 때까지 손짓을 하는 이별의 방식을 그 원풍경으로 하는 것이므로 고향은 어디에 있다고 함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결론내리고 있다. 자신이 살아온 고향을 통해 고향을 정의하는 이 방식은 자신의 어머니를 통해 어머니를 은유하는 방식과 일치한다. 개인의 경험에서 탄생된 언어의 우주화, 이것은 이어령 은유의 기본원칙과도 같지 않을까.

언제나 자연과 인간의 모순속에서 진리를 발견해 내는 그의 혜안은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독창성을 지니고 있는 바이지만 이제 그는 신화속에서 발견한 세 가지 언어를 통해 자신이 앞으로 택해야 할 언어를 소망하는 지혜를 보여준다. 반항과 저항, 투쟁과 불의 언어로서 프로메테우스의 언어를 지나 모순의 강을 뛰어넘는 다리로서 헤르메스의 언어도 지나 마지막으로 대립에서 교통으로 교통에서 화합에 이르는 오르페우스의 언어를 원하고 있다. 그는 생이 다하는 날까지 사막을 건너는 낙타의 혹과 선인장의 샘이 되어 문학을 더 성장시키고자 한다. 더 이상 발전의 경지가 남아있을 것 같지 않아 보이는 그도 지속적인 성장의 언어로 화합을 택하고 있었다. 언젠가 그는 강연에서 아침에 일어나면 제일 먼저 서재로 가 오늘은 무슨 책을 읽을지 생각하는 것이 아침의 시작이요, 하루의 기쁨이라 말한 적이 있다. 창조에 대한 열정만큼은 어느 젊은이들 부럽지 않은 자신이라 말했다. 어머니와 문학 사이의 연결고리라 할 수 있는 제 2장 '이마를 짚는 손'에선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오르페우스의 언어에 대한 의지가 어떻게 구현되었는지 명징하게 나타나 있어 우린 주옥같은 그의 창조작업으로서의 화합의 언어를 확인할 수 있다.

자신이 키워온 혹을 하늘삼아 꿈을 꾸는 낙타처럼 자신의 몸속에 저장한 수분을 영양삼아 갈증을 해소하는 선인장처럼 그는 진리탐구에도 존재함으로써 발생하는 모순의 법칙을 재료삼아 역설의 진리를 밝혀내고 인간과 세상을 연결지으려 한다. 이 모순하는 반대어를 하나되는 동의어로 끌어안는 그의 안간힘은 얼마나 고독하였을 것인가. 이십대에 이미 일간지의 논설을 쓰셨고 문학평론가로서 위세를 떨치셨고 교수로서 베스트셀러의 저자로서 초대 문화부 장관으로서 국내의 국제행사의 기획연출자로서 그는 부와 명예 혹은 권세까지 누릴만큼 누린 자타공인 유명인사였다. 이 책의 후반부에 어느 방송사와 인터뷰한 내용에도 언급이 되지만 그는 더는 올라갈 수 없는 극치의 정상에서 아마도 텅 비어있는 '존재의 빈터'를 이미 체감하였으리라 생각된다. 간혹 문학의 천재들이 이 실존의 극한을 체험하고 자살에 이르는 작가들도 있어 왔지만 그는 다행히 속세의 문명과 영혼의 자아를 아주 훌륭히 조율하여 스스로의 번뇌의 결과에 의해 자신의 문학적 자아를 완성시키는 면모를 보여주었다. 이어령은 바로 이 빛과 그림자의 동반관계 자체를 자신의 시대적 숙명이라 인식하고 그 정체성으로 문학이라는 꽃을 피운 것이다. 이 너무 일찍 알아버린 절대고독의 길에서 그는 얼마나 외로왔을까. 외로움마저도 낙타의 혹처럼 키워낸 그의 고독이 언어로 잉태되는 이번 에세이는 그래서 유난히 결연하고 영롱한지 모르겠다. '감기바이러스'에서 시작해 '우수의 이력서'로 회오리처럼 이어지는 언어의 이끌림은 페이지를 넘길수록 가속력이 추가되어 어떤 최면에 걸린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감기가 걸린 나는 내 이마를 짚는 손에 의해서만 내 신열을 확인하므로 상대 손의 차가움이 내 이마의 뜨거움과 하나되는 그 순간의 언어를 기적으로 은유하는 그만의 목소리를 조용히 들어보시라. 어느덧 세상에 들끓는 분노와 알 수 없는 시기에 스스로 상처받은 우리들 이마에 그의 손이 넌지시 내려앉는 기분이 들고 말 것이다. 심장이 두근대며 얼굴이 붉어지는 그 마음은 분명 감사의 증표이리라.

실존으로 공명을 찾아내고 그곳에서 스스로 진동하는 생명의 기운을 이끄는 그의 언어창조작업은 한 겨울 소년이 잃어버린 '연'이나 값비싼 털모자와 '팽이'를 바꾸어 버린 사내의 비극이 가지는 生의 의미를 정의하는 지점에 이르면 그가 얼마나 감성을 이성으로 논리화하는 독창적 창조자인지 알 수 있다. 연(鳶)을 좇다가 최초로 잃어버린 연줄이 우리 전 생애에 어떤 연(緣)이 끊어진 것인지 반대로 연을 띄우는 것은 유년의 生에서 무엇을 희망한 것인지 우리는 소년의 얼굴을 통해 이어령의 혹은 우리 자신의 미소와 눈물을 발견한다. 털모자를 쓴 지주의 아들이 동네꼬마들이 요술같이 돌려대는 팽이가 부러워 자랑스럽게 바꾸고 돌아온 날 소년은 어떠한 生으로 진입하게 되는 것인지 우리는 그토록 시린 겨울에 무엇을 잃어버린 것인지 그가 풀어내는 상실에 대한 조사弔辭는 이미 지나가 버린 동심의 가슴을 무겁게 짓누른다. 병든 굴과 조개에서만 생겨나는 진주의 생명이 왜 불행하면서도 광채를 가질 수 있는지 마치 生의 비밀을 알아가듯 나지막히 짚어주신다. 그렇게 하나씩 둘씩 깨달은 우수憂愁의 이력이 자신이 창조해 낸 작품만큼 같은 높이로 쌓여 그는 그 끝에서 극적으로 크리스천이 되고만 것은 아닐까.

배꼽의 질문, 영성의 대답

그가 문학을 하게 된 배경을 술회하는 '나의 문학적 자서전'의 부분에는 실제 나이와 호적상의 나이가 달라 호적의 언어로 자신이 호명된 학교생활이 지울 수 없는 크나큰 상처로 남은 이야기들이 실려 있다. 이 호적의 언어란 단순히 생년월일만을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일제시대 창씨개명을 통해 학적부에 등록된 이름과 낯선 이름이 호명되면서 시작되는 일본땅에 대한 경배, 자신이 인정할 수 없는 타국의 영웅들을 자신도 호명해야 하는 수치심, 같은 언어로 평가받아야 하는 자존심등이 복합적으로 더해진 언어였다. 그는 이러한 호적의 언어와 본능적으로 대적하였던 자신의 모태, 배꼽의 언어로서 어머니, 그리고 친구들의 진정한 이름을 지어주고 싶은 고향의 언어로서 범법행위가 문학을 태동시키게 되었다고 말한다. 이 자신과 나라에 대한 실존적 욕구는 하나의 정당방위로서 호적의 언어로 불리어지기 이전의 유년시절이 고스란히 한국의 정서, 한국의 문화, 한국어의 창의성과 연결되며 그의 문학적 정체성이 되었던 것이다. 유년시절 고향땅을 장난삼아 호기심에 파보던 행위는 바로 땅을 파서 그 밑을 보고 진실을 캐내는 그만의 창작형식이 된 것이다. 표층에서 심층까지 켜켜이 쌓여진 다양한 층위를 밝혀내고 비밀을 캐내는 것이 이어령 문학의 수사학이었던 것이다. 그는 언어의 말살이라는 극명한 억압속에서 가장 아름답게 탄생한 언어의 자유를 증명해 보이는 것이 자기문학의 업적을 달성하는 일이라 여겨왔던 것은 아닐까. 이 태어남의 아픔을 상징하는 진주의 눈물은 혹시 자신이 흘린 눈물을 말하는 것은 아닐까. 자기를 드러내놓지 않고 내면으로만 끝없이 스며드는 진주의 빛이란 역설과 모순이 빚어낸 자신의 운명을 말하는 것은 아니었을 지.

이 책의 마지막 장, '나는 피조물이었다' 는 라디오 프로그램 ‘장승철의 CBS 초대석’(2008. 1.6)에서 이루어진 인터뷰를 그대로 실은 내용이다. 대담의 목적은 그가 어떻게 신앙을 가지게 되었는 지의 계기와 과정들을 들어보는 시간이었을 것이다. 아무래도 신년대담의 성격이다 보니 이어령 특유의 희망적인 메시지가 다분하다. 우리나라에서 전 일간지를 통털어 아마도 신년메시지를 가장 많이 작성해 온 사람이 그가 아닐까 싶다. 그것은 곧 새로운 해를 맞아 새로운 희망을 품고 싶은 우리네 보통 사람들의 소박한 일상에 섬광과도 같은 영혼의 기운을 가장 논리적이면서 또 가장 감성적으로 전해주는 적임자로서 그를 능가할 사람은 없다는 뜻과도 같다.

이 인터뷰는 형식으로는 구술체가 문어체와 동일시되는 그의 유려한 언변을 단적으로 증명하는 글이며 내용상으로는 향후 작가로서의 그의 행보를 암시한다 할 수 있다. 그는 그동안 무신론자로 살아왔던 그 핵심에 자신의 지적오만을 겸손하게 이야기 하는데 이는 역으로 자신도 피조물이면서 시 쓰고 소설 쓰고 보니 무엇을 창작해 낸다는 오만이 결국 절대고독을 버텨낼 수 있는 힘이었다는 소리로도 들렸다. 그러나 나이 들어 지난 날의 업적들을 돌이켜 볼 때 이제는 자신의 존재에 대한 증거로서 총체적인 결산의 시점에 이르자 결국 영원성을 추구하게 되었다는 것으로도 들리었다. 그는 이 영원성에 대한 일종의 운명적 계시를 여섯 살 때에 아무도 없는 대낮 길 한복판에서 영문도 모른 채 눈물을 흘렸던 기억에서 찾고 있었다. 그때 무방비 상태에서 벼락과도 같이 체험한 유년의 충격은 이미 1차적 세례였다는 생각을 오랫동안 가져온 듯하다. 모든 것을 다 두루 체험했기에 이제 세속을 졸업한 심정으로 지식으로는 다 할 수 없는 신앙을 받아들이기로 한 그의 진솔한 이야기는 하루하루 다시 태어나고 하루하루를 창조하라는 조언으로 마무리된다. 영혼을 울리는 사색의 종소리가 마침표를 찍는 순간이었다. 어머님에 대한 그리움이 영성의 대답으로 돌아온 글이었다.

내가 참 작아 보이는 글이기도 했다. 언젠가 아주 젊은 후배에게 이어령을 물었더니 그를 모른다는 대답을 들은 적이 있었다. 비로소 내가 나이 들었고 내가 선배가 되었음을 자각한 순간이었다. 공부나 여성을 먼저 살아온 선배로서 이어령의 책을 권하는 것의 의미도 새삼 생각하게 하는 작품이었다. 이제, 이어령을 권하는 것은 인생선배로서 겸손한 충고에 대한 은유일 것이다.

어머니를 말하는 것이 문학을 말하는 것이고 그것이 곧 한국을 말하는 것이고 그럼으로 자신을 말하는 일이었음을 다시금 깨닫는다. 그립고 사무친다고 적지 않은 세월 울기만 한 내 자신이 한없이 초라하고 가엾어 보이는 이 문학의 정신앞에 나는 무신론자로서 기도를 드리고 싶다. 아직은 어머니를 입에 올릴 자격조차 되지 않는 나를 위해 매일이 다시 태어나는 내 인생이 되기 위해 이 지독한 생의 감기 바이러스를 감사히 여겨 볼 터이다. 감기의 신열이 부르는 생의 유혹을 못 본 척 뿌리치지 않아 볼 테다. 폐부를 울리는 기침소리에 꿋꿋이 내 심장의 의지를 확인할 테다. 사라져 버린 시간들, 헤어져버린 이웃들, 반목해버린 친구들, 모두 내 열기를 확인하러 뻗어오던 그 손길을 외면하지 않을 테다. 당신의 냉기로만 비로소 확인되는 나의 열기를 더 소중히 여겨 볼 테다. 감기의 함정에 빠져 온갖 세상으로부터 도피하는 내 못난 침잠을 경계할 테다.

아...이 겨울이 가도 나는 내 어머니를 볼 수 없다. 나만을 바라보고 나 하나를 위해 생을 다하신 어머니 그를 결코 말할 수 없다. 말할 수 없으니 글로도 무지하다. 나는 침묵의 언어로 눈물을 변주하겠다. 언젠가 내 썩은 조개의 분비물로도 진주가 오롯되는 그 순간이 온다면 그 불행의 광채가 행복이 되는 바로 그날, 내 눈물은 당신의 모든 것이었다 다만 촉촉이 떠들어 보리라. 내 어머닌 차마 대신할 수 없어 그 어떤 것으로도 은유할 수 없었다고. 당신을 말하는 것은 내 못남을 말하는 것과 같아 그땐 벙어리가슴이 될 수 밖에 없었다고. 나는 그 한마디 변명을 위해 오늘을 걷는다. 이 그리움의 산책의 길에서 이어령을 걷고 은유를 줍고 어머니를 담는다. 어둠으로 빛이되는 그때 그날을 위해 천천히, 그리고 뜨겁게 내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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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말 학교 - 제10회 문학동네어린이문학상 대상 수상작 보름달문고 35
전성희 지음, 소윤경 그림 / 문학동네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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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위에 계란

거짓말...돌이켜보니 거짓말을 해놓고 가장 크게 죄책감을 느꼈던 사람은 역시 엄마였다. 그리고 내 거짓을 밝혀낸 사람도, 거짓말을 했다는 이유로 가장 큰 질책을 가한 사람도 엄마였다. 그러고 보니 내 인생을 통털어 가장 많은 거짓말을 한 사람도 엄마라는 결론에 이른다. 바른 말도 많이 했을 터인데 왜 그 순간은 기억이 나지 않는 걸까. 성장한 후라고 거짓말을 하지 않았겠는가. 사회생활하면서는 또 얼마나 거짓말을 하고 다녔을까. 그런데 이상한 건 어느 시점 이후로는 내가 한 거짓말에 죄책감을 느끼기는 커녕 몇몇 상대의 배신을 제외하곤 대부분의 거짓말에도 크게 상처 받지 않아온 것 같다. 그 순간 서운한 마음 그뿐이었고 그러려니 하고 살아왔지 싶다. 아니 그래야 살아졌다. 내 쪽에서 크게 피해가 가지 않은 경우라면 내 허물도 만만치 않으니 거짓말쯤으로 상대를 비난할 자격은 서로들 없다고 생각했다. 내 거짓으로 상대의 거짓 퉁치기. 오늘, 이 사실이 나를 슬프게 한다. 내가 거짓을 용인하고 거짓말을 눈감아 주느니 당신도 그러리라 믿으며 거짓으로 인한 상처에 불감해지는 것이 정녕 나이먹는 일이란 말인가.

그러고 보면 지난 시절, 아직 가치관과 자의식이 완성되지 않았을 그때, 상대를 속인다는 사실에 가슴이 뛰고 그 순간 엄마의 눈을 바로 볼 수가 없고 그 후에도 지나가는 선생님앞에서 고개를 들지 못한 어린 내가 그립다. 이 책은 바로 순진했던 그 가슴위에 쌓인 수많은 거짓말로 속고 속아온 내 두터운 심장앞에 거짓말처럼 도착해 그 심장의 두께를 제대로 가늠해 보고 싶도록 만드는 작품이었다. 여간해선 누구의 거짓도 뚫고 들어 올 수 없게 된 그 두께는 곧 어떤 진실도 통과하기 힘든 거대한 벽과도 같았다. 책을 덮는 것이 내 굳건한 심장을 두드리는 일이었다. 오랜 세월 바람에 풍화되고 파도에 침식된 후 켜켜이 퇴적된 바위덩어리 하나가 내 속에 버티고 있었다. 거짓말...같은 진실이다. 진실같은 거짓말이 내 거짓말 같은 진실을 이길 수 있을까. 어떤 거짓말은 세상의 모든 진실보다 위대하다, 바로 문학이라는 거짓말이 학교를 오래전 마무리한 내게 학교와 다름 아니었던 것이다. 나는 내안의 바위를 향해 문학이라는 계란을 힘껏 던져보았다. 한 두번으론 꿈쩍도 안할 것 같아 여러 번 이 책을 뒤적거렸다. "자, 이제 어떡할래?"

훌륭한 학교

사실 우리가 살면서 크고 작건 거짓말의 딜레마에 빠질 수 밖에 없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어릴 적부터 '거짓은 잘못, 거짓말 하는 사람은 나쁜 사람'이라는 교과서적 명제를 절대 불변의 진리처럼 누누이 들어왔기 때문이다. 세상에 이런 거짓말이 어디 있단 말인가. 인간은 하루에 200번 거짓말을 한다고 하며 전 세계적으로 사기꾼이 가장 많은 나라가 우리나라라는데 그렇다면 인간은 곧 하루에 200번 잘못하는 천하의 나쁜 존재이며 그러한 인간들이 가장 많이 살고 있는 나라가 한국이라는 말과 다를 게 무엇인가.(틀릴 것도 없지만..)

정신과 의사들은 '거짓말은 제2의 천성'이라 주장하며 심리학과 교수들은 '거짓말은 사회적 재능'이라고도 한다. 사회학적 관점에서 본다면 거짓말은 사회의 공동생활을 위해 매우 중요한 자질이라고 볼 수도 있다. 사기나 음모, 위증같이 명백히 상대를 속여 피해자가 발생케 하는 거짓말도 있지만 상대를 위한 배려, 애교차원의 아부가 섞인 선의의 거짓말도 있는 것이다. 장소 및 때와 상황, 그리고 상대에 따라 '거짓말'은 역기능도 순기능도 담당하는 유기적 개념체인 것이다. 그런데 그동안 우리는 (우리가 당해온 것처럼)거짓말에 한해선 옳고 그름을 거짓말 자체의 등장여부에 두는 아주 단순한 방법을 아이들에게 가르치고 강요해왔다. 일단 거짓말은 나쁜 것이니 될 수 있으면 최대한 하지 말아야 하고 나중에 어른이 되면 그때 세상과 사람을 알아가듯 알게 될 것이다...이렇게 말이다. 즉, 거짓말의 의도나 목적, 거짓말의 종류, 거짓말의 단계와 단계별 진행방법, 거짓말의 수위, 거짓말의 효과등에 관해서는 살다보면 스스로 깨우쳐진다는 말과 다름 아닌 것이다. 거짓말을 배울 필요가 없으니 그 사용처를 알 필요가 없다는 논리와 같다. 이 말은 사람을 배울 필요가 없으니 세상을 알 필요가 없다는 말과도 같다. 거짓말을 안다는 것은 그것을 말하는 인간을, 그 인간들이 살아가는 세상을 아는 것에 다름아니기 때문이다.『거짓말 학교』는 사람과 세상을 가르쳐 주는 학교였다. 내 평생 가장 훌륭한 학교였다. 문학의 역할이 이처럼 통쾌한 적이 없었다. 그중에서도 아동문학이 역설하는 이 발칙함이 깨물어 주고 싶을 만큼의 사랑스러움, 어찌할 바를 모를 환호가 미소로 번져오는 작품이었다.

내 부모님은 어떤 사연이 있으셨는지 자식이라고는 나 하나, 그것도 마흔이 다 되어 보시는 통에 나는 그만 외동이가 되었는데 어쩐 일인지 내 주변엔 내 또래의 아이들이라고는 찾아 볼 수가 없었다. 고로 어렸을 적부터 내 말동무는 대부분 어르신인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나는 비교적 어른들이 좋아하는 모습의 아이로 성장할 수 있었다.(성장해야 했었다) 어른들이 어떤 것을 좋아하는지 일찍부터 간파하여 그들이 원하는 모습으로 나를 보여줌으로써 칭찬과 사랑을 잃기 싫었던 탓이다. 이 유년기의 생활태도는 학교생활에서도 고스란히 적용되어 선생님들이 어떤 학생을 선호하며 호감가지는 지 한발 앞서 실천함으로써 그들로부터 무한한 신뢰와 사랑을 얻을 수 있는 일종의 재능이자 내 캐릭터가 되어버렸다. 대학에 들어가서는 친구 엄마들이 나와 전화를 하며 자신의 딸이자 내 친구인 그 녀석의 미래를 같이 걱정하기도 했다. 사회생활을 하면서도 가장 지독하다고 악명높은 상사밑에서 그 시절 가장 오랜 기간을 견뎌낸 직원이 되기도 했다. 물론, 내가 그 어르신과 선생님들, 조직의 윗분들을 매순간 마음으로 존경하고 진심으로 이해했던 것은 아니다. 돌이켜보면 나는 그들을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싫어도 싫지 않은 척, 혹은 좋은 척'하는 태도를 버리지 않음으로써 어른이 되었던 것이다. 냉정하게 말하면 그들을 속이고 그러한 나 자신도 속이며 훌륭한 사람이 되고자 했던 것이리라. 내 목적을 위해 진실이 아닌 거짓을, 거짓말을 반복하며 여기까지 온 것이다. 더 참혹하게 말해볼까... 거짓과 거짓말로 이룩된 내 인생, 다는 아니라 해도 전부 아니라 말 못하는 진실, 나뿐만 아니라 당신도 해당되는 이 진리, 오늘 나는 진심을 다해 이야기 하고 싶다. 어쩌면 단순히 리뷰가 목적이 아니라 우리 살아온 인생과 앞으로 살아갈 우리 미래를 위해서라도 꼭 한번은 나누어야 할 담론이자 소중한 대화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 책에 등장하는 아이들은 막 중학생이 된 십대이다. 막연하던 꿈이 구체화되기 시작하면서 향후 진로나 자신의 미래에 대해 포부가 가장 큰 시기라 할 수 있다. 이 시기에 시작되는 거짓말은 초등학교 아이들의 노란 거짓말과는 차원이 다르다. 엄마의 관심을 끌기위해 거짓으로 울고 칭얼대던 갓난아기를 지나와 친구의 물건을 빼앗고 모른 척 하는 유치원시기의 유아적 행동도 끝마쳤다. 숙제와 청소가 하기 싫어 꾀병으로 아픈 척하는 초등생의 거짓말 수준도 유치한 시기이다. 이미 많은 거짓말을 학습해 온 이 시기의 거짓말은 속이 보여도 귀여운 구석이 있는 노란 거짓말보다는 더 진하고 들통날 때까지 버텨보는 새빨간 거짓말보다는 연하다. 책에서처럼 가정환경이나 성적, 교우관계에서의 열등감과 관련한 자아보호격의 거짓말이 많아질 시기이다. 아직 덜 익었을지 모르지만 분명히 톡톡한 에너지를 가지고 있는 오렌지색의 거짓말인 것이다. 이것은 가치관이 완전히 성립되지 않은 이들에게 비타민C 처럼 과다섭취하면 부작용이 생기지만 어느 정도 그 나이까지 살아온 자신을 지키는 방어기제로서 작용하는 거짓말이 아닐까. 즉, (그 시기를 거쳐 온)어른 된 입장에서 충분히 이해할만한 거짓말인 것이다.

그런데 작가는 이 시기의 아이들에게 거짓말의 층위를 타자나 사회를 향한 종류의 것(외적인 거짓말)외에 내 자신을 향한 거짓말(내적인 거짓말)로 쪼개어 결국 사회의 거짓말로부터 시작해 개인(독자)에게 마지막 물음표를 선사하는 짜릿한 수사학을 선보였다. 내가 주목한 것은 바로 진실을 밝혀내려는 거짓된 행보의 최종 도착지, 그 지점에서의 진실은 과연 우리가 밝혀야 하는 거짓인가 묻어야 할 진실인가 하는 가치관의 아노미 상태, 이것은 결국 억류로서의 난국과 다름 아니었다. 불행히도 나는 지금 진실과 거짓을 적절히 버무리며 살고 있는 어른이었고 이 책을 읽어야 할 아이의 학부모였다. 즉, 무슨 말인지는 알고 있으나 내가 알고 있는 인생을 아이에게 그대로 말하고 싶지는 않은 원래 어른 된 거짓이 자꾸 나를 방해 하는 것이다. 맞지만 그렇게 하고 싶지는 않은 것, 아마도 우리의 선생님과 학교는 이런 심정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진실인 것처럼 거짓말을 해대었을 것이다, 아니 우리가 들었던 거짓은 그들이 바래온 진실일 것이다. 그때 내가 이러한 문학을 만나지 못한 것이 다소 억울하긴 하나 어쩌겠는가. 이 책은 나로 하여금 독자인 개인의 감상을 술회하기 보다는 언제나 진실을 강요하는 어른으로서 거짓을 질책하는 학부모로서 내 자리를 인식하게 하여 비로소 기성세대의 사회적 역할을 돌아보게 만든다. 나는 그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거짓말의 경험자로서의 추억, 학부모된 시각, 사회학및 교육이론, 마지막으로 아이의 의견을 종합해 나름의 진실을 정리하고 싶었다. 이야기의 결말이 꼭 '너라면 어떻게 할거니' 고집스럽게 묻는 것 같아 나는 그 고집에 제대로 맞서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사회적 시사점, 반가운 질문

21세기 연금술인 거짓말을 가르쳐 주는 학교, 세계를 뒤흔들고 새 역사를 만드는 위대한 거짓말을 배우기 위해 엄청난 경쟁률을 뚫고 입학한 '거짓말 학교' 는 사실 거짓말을 가르쳐 주는 곳이지 거짓말을 시키거나 거짓말을 위한 학교는 아니다. 이는 마치 인류평화를 위해 무기나 전쟁, 범죄를 배우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범죄심리학을 가르치는 것이 범죄자를 양성하는 것과 동일한 의미가 아니듯. 평화를 지키기 위해 전쟁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깨닫는 것처럼 진실과 믿음이라는 가치가 인간에게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역설하는 반어법의 수사가 학교의 존립에 숨어 있다. 그런데 이 반어법의 시스템에 작가는 결론으로서 상투적인 교훈을 제시하거나 아이들에게 그러하니 진실이 더 중요한 것이라 강요하지 않는다.

언뜻 보기에 특수목적의 엘리트 양성학교를 연상시키는 이 특성화 학교는 뛰어난 인재배출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그런데 결정적인 순간에 인간은 인간에 대한 무모한 믿음과 쓸데없는 양심 때문에 실패를 한다는 이유로 인간의 양심과 죄의식에 해당하는 뇌의 영역을 물리적인 자극을 통해 조종하자는 국가적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인간의 기억이나 감정을 관장하는 뇌의 영역을 연구하여 사이버 인간으로서 최첨단무기를 계획하거나 특수한 재능을 가진 복제인간을 만드는 허리우드 영화처럼 SF적 모티브를 시도한 것이다. 거짓말 학교라는 이 비인간적인 프로젝트를 특수효과가 현란한 영화가 아닌 아이들의 진실찾기 게임으로 재구성하여 아동문학으로 귀결하였다. 한국 아동문학의 종착지에서 '거짓말'은 선과 악으로서의 진실 대 거짓을 이야기하기 위한 인류보편적 가치가 아니라 오히려 맹목적 성공을 위해 치열한 경쟁체제에 내몰린 우리 아이들에게 한국의 획일적 교육시스템하에서 꼭 필요한 진실이 아니냐 되묻는다. 그리고 아이들에게는 스스로의 거짓말을 입체적으로 보게 하여 상대와 사회를 속이는 것이 아닌 자신을 속이는 거짓도 발견하도록 유도한다. 어떠한 답을 내려주지 않고 자기주도적으로 해답을 구성해 보라는 것이다. 이는 <거짓말 학교>라는 아동문학이 사회적으로는 교육시스템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도 개인적으로는 아이들이 추구해야할 진정성을 지향케 하는 두가지 시사점을 지혜롭게 겨냥하고 있음을 알려주는 학교존립의 목적인 것이다.

거짓말 학교에는 여느 학교처럼 교장을 비롯한 선생님과 학생인 아이들이 있다. 소설의 시점은 나영과 인애의 시점을 번갈아 가면서 진행되는데 이는 후반부 친한 친구인 상대의 거짓말을 통해 자신의 거짓말을 인식하기 위한 공평하고도 지혜로운 장치로 생각되었다. 우선 학교의 운영체제및 방식을 살펴보면 소설속 거짓속에 숨겨진 우리 사회의 진실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국가에서 기밀로 운영되며 입학조건이 까다롭다는 것은 소수의 특혜를 위한 불공정한 시스템을 상징한다 할 것 이다. 낙오자가 생기며 우리시절 국민교육 헌장처럼 거짓말 헌장을 제창하도록 하는 것은 경쟁을 조장하고 조직에 대한 경외감을 세뇌시키며 뼛속까지 각인시키기 위함이다. 어학연수, 장학금등의 과장된 특혜와 졸업 후 국가를 위한 취업을 보장한다는 것은 특수계층으로서의 우월감을 가지게 함과 동시에 조직의 낙오나 이탈은 곧 성공을 향한 기회의 상실이라는 상대적 박탈감을 가져오는 강력한 동기유발 및 유지 장치이다. 나는 이 학교에서 교장의 세뇌교육도 우스웠지만 무엇보다 '거짓말 뉴스'가 인상깊었다. 아버지가 부동산 재벌인 어느 후보가 국회의원 출마 공약으로 부동산 투기를 위해 세금을 늘리겠다는 참신하지 않은 거짓말을 한 것에 대한 비난인 것이다. 거짓말의 실패사례로 오늘날 어른들의 뉴스를 시원하게 조롱하는 것 같아 내심 '이것 봐라' 했던 순간이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건 이 '거짓말 뉴스'를 시청하던 학생들이 거짓말처럼 쓰러지는 사건이 발생했다는 것. 처음엔 순진하게도 진실에의 충격이 불러온 혼란사태일까 싶었다. 거짓말이든 진실이든 뉴스를 듣고 쓰러질 수 있다면 그 가슴은 얼마나 순정한 마음이란 말인가. 우린 이제 어지간한 대형사고나 초유의 사기꾼이 아니면 눈 하나 꿈쩍하지 않을 만한 뚝심의 가슴을 키워놓지 않았던가.

이 책에 등장하는 어른들은 공교롭게도 거짓말을 잘 활용하며 자신의 위치에 변함없이 서 있는 것으로 묘사된다. 학교의 교장과 교사는 물론이고 뉴스에 등장하는 국회의원 후보, 수업안에 포함된 정치인은 우리사회에서 제대로 된(?) 거짓말로 성공을 이루어낸 대표적 인물들로 소개된다. 이 학교 졸업생이면서 제약산업을 이끌어 간다는 어느 선배의 특강은 너무나 솔직해서 얼굴이 화끈거릴 정도였다. 교장은 아이들끼리 서로 의심을 부추기고 부모는 아이의 치료경력 같은 건 무시하며 연구원은 자신의 연구과제에만 몰두하여 정작 그 중심에 있는 아이들보다 어리숙하게 묘사된다. 이는 사리사욕에 사로잡힌 기업인과 정치인을 비난하며 진실을 말하지 못하는 교사와 관료주의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는 교육행정체계를 꼬집는 것이며 아이들 개개인의 특성을 고려치 않는 부모를 비웃는 아주 통쾌한 거짓말인 것이다. 이 책이 말하는 진실같은 거짓말은 우리사회 만연된 교육현실을 정확하게 관통한고 있다는 점에서 어쩌면 당신들처럼 거짓말로 성공을 이룬 사람들이 거짓말을 하지 말라고 하는 거짓말에 속기 보다는 차라리 이처럼 거짓말을 당당히 가르치는 학교를 만들어 당신같은 사람들을 길러내는 것이 어떻겠느냐 하는 허를 찌르는 공격인 것이다. 작가의 당돌하면서도 당연한 질문이 얼마나 반가웠던지.

개인적 시사점, 내 자신 바로보기

거짓말 학교의 정식명칭은 '메티스 스쿨'(METIS-Mental Energy Traning Intensive Sysrem-SCHOOL)이라 하는데 '메티스'는 제우스의 첫사랑으로 충고와 지혜의 여신이 아니었던가. 신과 인간들 중에서도 가장 아는 것이 많은 것으로 알려져 사리 분별이 분명한 존재로 회자되는 이름인 것이다. 이 역시 거짓말이야 말로 삶의 가장 중요한 지혜라는 역설적 작명이다. 그러한 메티스란 직역하면 '정신력 훈련 강화 시스템'이라 할 수 있다.그러니까 여기서 정신력 훈련은 거짓을 지혜롭게 구분하는 것이 아닌 거짓말을 지혜롭게 사용하라는 뜻으로 변형된 것이다. '자기 자신마저도 완벽히 속일 수 있는 거짓말, 세계를 이끌어 갈 창의적인 거짓말 인재'라 함은 그러한 정신력 훈련의 강화로 탄생된다는 논리인 것이다. 여기서 창의적인 거짓말은 문학에서 <마지막 잎새> 처럼 희망을 이야기 하는 하얀 거짓말이 아니다. 오로지 성공에 걸림돌이 되는 양심이나 믿음을 부정하는 데 쓰여지는 지혜를 말한다. 그것은 우리가 소중하다고 여기는 보편적 가치들에 대한 개념을 부정하는 것이고 개념의 부정은 인간성을 파괴시키는 또 다른 부정을 낳게 된다. 인간은 자신의 인간성을 파괴하지 않기 위해 이러한 '인지부조화'를 감당하는 방법으로 쉽게 자신을 합리화하거나 속이는 차선의 방법을 택하게 되는 것이다. 이 책에 등장하는 아이들은 어떻게 인지부조화 현상을 받아 들였을까. 바로 인애와 나영이 겪게 되는 거짓과 진실로 인한 자아찾기는 인지부조화 현상의 한가운데 있다. 아이들이 힘겨운 여행 끝에 마주한 진실은 무엇이었을까.

인간은 누구나 어떤 일을 대하는 태도와 실제로 그것을 행하는 행동이 균형을 이루게 하려는 심리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일반적으로 내적신념과 일치하는 행동을 하게 된다. 그런데 이 두 가지가 일치되지 않을 때는 저도 모르게 부조화를 기피하고 조화를 선택하게 된다는 것이 인지부조화 이론이다. 부조화(불일치)를 피해 조화(일치)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가장 쉽게 나타나는 태도변화가 자기 합리화라 할 수 있다.

인애의 경우를 보자. 아버지는 사기라는 큰 거짓말을 당해 온 가족이 길거리에 나앉게 되었기에 거짓말이라면 누구보다 분노하고 경멸해왔다. 이러한 인애가 거짓말 학교의 교육방침에 동조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을 리 만무했지만 자신의 현실에서는 그 학교를 선택해야 하는 불가피한 상황에 놓이게 된다. 여기서 인애는 자신이 기존에 가지고 있던 생각대로 학교를 포기하기 보다는(행동변화) 거짓말에 대한 태도를 긍정적으로 바꿈으로써(태도변화) 인지의 조화를 추구하게 된 것이다. 인애가 자신을 정당화하는 방어기제는 그 거짓말에 지배당하지 않겠다는 논리로 강화, 발전한다. 자신은 누구에게도 속지 않으며 자신에게 하는 거짓말은 누구든 밝힐 수 있다고 주체적 입장을 취함으로써 최초에 가졌던 거짓말에 대한 생각을 변형하게 된 것이다.

일상에서도 우리는 인지부조화 현상을 자주 겪고 있는데 그렇게 좋다는 스마트폰을 손에 넣었는데 막상 사용해 보니 별로 대단할 것도 없고 오히려 더 불편하다 느낀 사람들이 있다. 이 경우 스마트폰을 사용하지 않기 보다는 스마트폰에 오히려 객관적이지 못한 더 많은 가치를 찾고 부여함으로써 스마트폰의 기능적 우월성을 그 전보다 더 인정하는 사람들이 있다. 불편한 것은 나일 뿐이지 제품이 나쁜 것은 아니라는 생각, 인지부조화가 가져온 추론의 확장인 것이다. 이처럼 사람들은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해 자신도 모르게 가치를 변경시키는 경향이 있다. 원래 신념을 교정하기 위해 과다한 논리로 자신을 포장한다든지 새로운 근거나 추론을 만들어 내어 그 사실을 객관적으로 믿는 것이 아님에도, 그렇게 믿도록 자신에게 강요를 하는 것이다. 이 작품에서 다행히 인애와 나영은 자신들이 지금 인지부조화에 빠져 있는 상황을 깨닫고, 마지막엔 자기가 자신에게 거짓말 하였음을 인식하게 되는데 이는 어른들에게도 그리 쉬운 일이 아닌 것이다. 아니, 오히려 어른이기에 더 뻔뻔하고 억지스럽다. 어른들은 여지껏 자신이 이루어 놓은 명예나 자존심 때문에 이러한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자신을 속인 자신을 더 믿고 의지하여 나중엔 정말로 거짓자체를 진실처럼 여기게 된다. 세간에 뻔히 드러난 거짓을 가지고도 너무나 당당하게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는 유명인들은 자신에게 일어난 인지부조화 현상을 슬기롭게 극복하지 못하고 치명적인 선택을 함으로써 결국 파멸로 이르게 되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어른일수록 인지부조화에 대응하고자 하는 더 다양하고 강력한 방어기제가 학습되었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는 인애외에 다른 학생들도 거짓말은 안 좋다는 생각을 했었지만 거짓말 학교에 적응해야 하는 각자의 현실 때문에 대부분 거짓말에 대한 생각을 바꾸는 것으로 조화를 추구한다. 하지만 아이들은 원래 가치를 바꾸어 자신들의 목표에 충실하게 적응하다가 사소한 행동이 발단이 되어 그 사건을 계기로 자신들의 생각에 하나둘 오점들을 발견해 나가기 시작한다. 나는 후반부 이 과정이 무엇보다 흥미진진했는데 비밀사건을 취조하듯 긴박하게 그려져 마치 추리소설에서 범인을 추적하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모두들 범인의 가능성을 안고 있는 용의자로 몰고 가는 작가의 집중력이 놀라웠고 그것을 종용한 교장과 실마리를 가지고 있는 의사와 진실학 선생님의 행보가 전혀 작위적으로 느껴지지 않아 서사의 흐름이 매끄럽다는 느낌을 받았다. 모두를 의심해 보아야 비로소 자신을 의심할 수 있는 게 아니겠는가.

여기서 교장실을 침입한 네 명의 아이들에게 밀고자를 찾으라는 교장의 비열한 지시에 아이들이 보여준 논리싸움은 우리에게도 많은 점을 시사한다. 그동안 알게 모르게 숨겨온 서로의 약점을 들먹이며 바로 그 치명적 약점이 교장이라는 권력과 결탁하게 될 핵심이라고 분석하는 아이들의 시선은 흡사 어른들의 치졸한 행태를 그대로 연상케 했다. 우리사회에서 일단 사람을 의심하고 그 다음 성장환경이나 학력, 사회생활을 조사분석 한 후 마녀사냥식으로 죄인을 만들어 집단으로 비난하는 일종의 인격테러가 생각나기도 했다. 작가는 아이들의 논리 전개과정을 통해 점점 범인에 근접하기 보다는 자신에 다가가 보라고 하는 것은 아니었을지.

집안 형편이 어려워 일찍부터 부모의 경제능력이 자식의 경쟁능력이 됨을 알게 된 인애는 교장도 재수없고 친구들도 맘에 들지 않지만 학교의 운영체제를 모범적으로 따르는 학생이었기에 누구보다 이 학교가 아쉬운 사람이었다. 준우는 집안 대대로 엘리트 신분인데다가 공부하는 티를 안내고도 일등을 놓치지 않는 대표적 엄친아이므로 그 우월감과 공명심은 이 학교에서의 낙오와 연결짓기 어려웠다. 실력보다는 부모의 능력으로 입학하게 된 도윤이에게도 교장과의 결탁은 누구보다도 필요해 보였다. 부모님의 이혼으로 두 사람 모두가 양육에의 부담을 안고 있는 나영으로서도 거짓말 학교는 가장 대안적인 생존방식인 것이다. 교장은 탁월한 거짓말 쟁이로서 이러한 아이들의 경쟁심리와 인지부조화를 이용해 진실한 교사됨을 보여주는 것이 아닌 인간을 믿는 것에 대한 무모함을 역으로 강조한다. 교장은 그야말로 자신의 역할을 제대로 한 것이다.

작가는 여기서 서둘러 진실을 밝히는데 주력하지 않고 침착하게 아이들을 앞세운다. 사건의 진실도 중요하지만 더 우선시 되어야 하는 것은 그러한 사건을 통해 아이들이 바라보아야 할 자기 자신이었던 것이다. 이 작품의 백미는 아마도 마지막 인애와 나영이 서로에게 상처를 주면서 결국 자신을 알아가게 되는 뼈아픈 대화에 있을 듯 하다.

나영이와 인애는 처음 친구가 되는 과정에서도 거짓말이 직간접적으로 사용된 경우다. 나영이는 '거짓말 법칙'이라는 책을 먼저 빌린 대출자로서 같은 책을 빌리러 자신에게 온 인애에게 아직 과제를 다 못했다는 거짓말을 했다. 경쟁자에게 책을 넘겨주고 싶지 않은 무의식에서 뜻하지 않게 나온 말이었다. 그런데 그러한 속내를 간파한 인애는 자신의 어려운 가정환경과 면접 때 교장에게 당한 수모를 이야기하여 나영이의 경계심을 허물어 뜨림으로써 마음을 여는 방법으로 결국 같이 숙제를 하는데 성공한다. 인애는 나영이에게 호감을 느껴서 진솔한 마음을 열어 보인 것이 아니고 자신의 단점을 먼저 이야기하여 상대로 하여금 솔직하다는 평가를 유도한 후 자신이 원하는 목적을 달성하는 방법을 구사한 것 뿐이었다. 이 방법...나 역시도 많이 당했고 그런만큼 나 자신에게도 결백하지 않다. 소기의 목적을 위해 약점을 파는 것. 우린 왜 고민이나 약점을 말하는 것이 곧 진실하다는 것과 같다는 착각을 하는 것일까. 고민이나 상처를 팔아 효과를 본 사람은 그 보상에의 달콤함을 뿌리치기 힘들다. 그리고 그 사실을 가장 잘 아는 자신을 자학하는 방법으로 다시 더 큰 상처를 팔게 된다. 진실한 척 했기 때문에 계속 진실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진실해야하는 진실이 살아가는 방식이 되는 사람들을 많이 보아왔다. 특히 문학을 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지능과 재능을 추가하여 누구도 겪지 못했을 자신만의 상처를 공감의 장치로 앞세우는 습관이 있다. 인애의 방식은 지난날 내가 사람으로부터 얻은 상채기들을 떠올리게 하며 어른이 되어도 여전히 고민파는 습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스스로 누구보다도 진실하다 착각하는 사람들이 새삼 밉도록 만들었음이다.

그러한 인애도 결정적인 자신의 약점은 빼놓고 자신과 친한 척 한 나영에게 진정한 친구는 아니라 말하고 나영은 혼자가 되는 것이 두려워 인애에게 사과를 하지만 인애는 처음부터 나영을 믿은 적 이 없었다고 대응한다. 인애에게 약한 모습을 들킨 나영은 일류 중학교에 합격하고 시험을 아무리 백점 맞아도 더 사랑받거나 더 행복하다는 게 아닌 것을 알면서도 스스로 버림 받는게 싫어 자신이 원한 것이라 스스로를 속였다는 것을 깨닫는다. 인애 역시 나영을 통해 그동안 가난을 앞세워 친구의 진심을 사고 학교의 신뢰를 받아온 자신을 돌아보곤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자신을 속였음을 인정하게 된다. 아이들이 그동안 누구를 믿어야 하는지를 방황하는 가운데 누구보다도 자신 스스로 자신을 속였음을 깨닫는 것으로 이야기는 막을 내린다. 그동안의 모든 거짓은 이로써 정당했고 마침내 자신들을 향한 진실이 되어 준 것이다.

거짓과 학교의 병행

아이가 내게 거짓말을 했다는 사실을 맨 처음 알았을 때 많이도 아팠다. 눈물이 날만큼 마음의 피부가 갈갈이 찢겨져 나가는 듯 했다. 아이의 도덕과 습관, 미래가 걱정된 것이 아니라 나를, 엄마인 나를 속였다는 사실이 너무도 인정하기 싫었다. 언젠가 방에 들어가 대성통곡을 하였더니 아이는 그 후로 무엇을 깨달았는지 지금껏 거짓말에 능숙치 못하다. 내 속으로 낳았는데 그걸 모르겠냐던 엄마가 생각나서 가슴을 부여잡은 것이었다. 나는 엄마가 주신 약을 먹지 않고 여러 번 몰래 장롱틈사이로 버려두었는데 그 사실을 들킨 날 나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엄마에게 매를 맞았다. 엄마는 그 순간 피멍든 내 종아리처럼 가슴에 멍이 들었을 것이다. 내 아이가 앞으로 자라면서 얼마나 더 많은 거짓말을 내게 하게 될까 생각하면 벌써부터 가슴이 벌렁거린다. 차라리 그 거짓을 내가 알게 되지 말기를 바라는 이기심이 부모된 역할을 짓누른다.

아이는 이 책을 읽고 여지껏 읽은 책들 중 가장 어려웠다고 고백했다. 그러니 엄마가 꼭 읽어보고 무슨 뜻인지 가르쳐 달라고 했다. 그러고 꼭 반년이 지났고 이 책을 집어든 건 반이상이 의무와 책임때문 이었다. 세월이 흐르는 동안 아이는 궁금증을 풀었을까. 내가 책을 덮고 나자 왜 이제야 읽는 것이냐 묻지도 않았다. 대신 자신은 인애처럼 할 말을 자신있게 할 줄 아는 사람이 좋다고 했다. 요즘 유행하는 드라마 '대물'을 보고는 <거짓말 학교>에 정치인이 거짓말하는 단계가 나오는데 똑같다고 말했다. 진실학 선생님이 인애에게 보낸 암호편지에 등장하는 암호보다 '타이거 수사대'에 나오는 암호가 더 인기 많다고 했다. 4학년 딸아이는 어쩐 일인지 내가 기대하는 거짓말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고 이 책을 빌려간 친구들 중에 재미있다고 말하는 친구는 반에서 1등하는 친구밖에 없었다고 했다. 충격이었다. 시원한 결론이 나지 않고 스스로 생각하게 하는 결말을 가진 작품들은 아이들이 선호하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했다. 학습지 선생님들과 늘 하는 이야기지만 요즘 아이들은 너무 일찍부터 엄마의 지휘아래 선행학습에 길들여져 있는 터라 '생각'을 요하는 상황을 귀찮아하고 그것을 숙제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이 책의 경우에도 인애와 나영이 과연 수술을 받는 것인지 교장에게 밀고한 사람이 진실학 선생님이 맞는 것인지 사건의 결말에만 초점을 맞추고 독서를 마쳤다면 아이들 입장에선 아직 끝난 이야기가 아닌 것이다. 이 사실은 더더욱 <거짓말 학교>같은 구성의 작품이 아동문학에 위치해야 함을 알려주는 중요한 단서로 생각된다.

나는 문학이라는 학교의 특별활동을 믿는 학부모이다. 아이는 기특하게도 독서광에 가까워 나는 올 한 해 동안 많은 책을 사주었다. 덕분에 창작동화와 청소년 문고를 통해 아동문학의 현주소를 알게 되기도 했다. 그런데 학년이 올라갈수록 우리나라 교육은 대입에 집중되는 경향이 있어 독서도 논술을 위한 하나의 과목이 되가고 있다. 앞서 말했지만 그래서 이야기의 결말이 사고를 요하는 구성인 경우 아이들은 본능적으로 두려움을 느끼게 된다. 자신의 생각이 틀릴지 모를 것에 대한 불안, 나와는 다른 생각을 할 친구에 대한 의심, 부모나 선생님이 요구할 것 같은 답안에 대한 부담등이 섞여 숙제나 시험이라면 몰라도 스스로는 시도조차 하고 싶지 않은 비호감의 장르인 것이다.

작가들의 입장에서는 어떠할까. 이것은 물리고 물려있는 한국 교육의 실상을 그대로 반영하는 슬픈 일이다. 획일적, 주입식 교육을 받아온 작가된 입장에선 그들도 매번 완벽하게 창의적인 동화를 창작할 수는 없다. <거짓말 학교> 같은 작품이 문학상의 주인공이 될 수 있었던 것도 아마 이렇게 아이들 스스로 사고를 요하는 구성과 결말이 문학성은 물론이고 교육적으로도 신선하다는 평가를 받은 요인이라 생각한다. 물론 교육을 목적으로 아동문학이 그 테두리에 갖혀서는 안될 것이다. 또 주입식, 교훈식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아이들을 하나의 인격체로 스스로 삶을 운영해 나가는 주체로 인식해 그들을 독립된 독자로 대우하고 이야기를 비판하고 이야기를 더 진행 할 수 있도록 우리 아이들의 자격을 좀 더 승격시킬 필요가 있다고 본다. 교육이론에서 말하는 자기주도적 학습이나 구성주의 이론이 학교바깥에서도 자연스럽게 체화되려면 이론을 적용하기 이전에 그 대상인 아이들을 더욱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 <거짓말 학교>는 아이들의 토론학습에도 아주 유용한 교재로서 손색이 없다. 그러나 학교에서 필독서로 권장되고 선생님이 숙제로 내준다면 아이들에겐 정작 보기 좋게 외면받는 실상이 교육계의 목메이는 현실인 것이다. 이것이 우리 독서교육의 현주소이다.

나도 그랬지만 초등학교 아이들이 거짓말을 하는 심리를 들여다보면 대부분 엄마에게 '혼나고 맞을 까봐'가 일순위이다. 이 심리에는 부모님이 바라는 아이, 사회가 정해놓은 모범생이라는 테두리를 벗어난 자신을 발견하게 된 부모와 세상이 자신에게 실망을 할까봐 하는 두려움이 내재되어 있다. 즉, 그들에게 실망을 주기 싫다는 욕심, 나는 좋은 자식이고, 좋은 학생이고 싶은 욕망이 거짓말을 앞세우는 것이다. 결국 훌륭하고 싶기 때문에 거짓말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역으로 거짓말을 하다 보니 훌륭할 수는 없어지는 현실이 아이들, 그리고 우리네 인생인 것이다.

나는 그동안 문학작품을 대하면서 리뷰에서 어떤 분명한 결론을 내지는 않아왔다. 책을 읽고 남과 다르게 느낀 점이 중요한 것이지 남에게 보여주어야 하는 의견을 표명하는 것은 상당히 조심스러웠다. 그런데 이번엔 의견을 말하고 싶다. '거짓'이라는 뜨거운 화두를 깊게 생각할 기회를 얻게 됨에 있어 거짓말을 해온 아이였었고 거짓말로 속아본 엄마된 입장으로 마치 가정통신란의 학부모란을 채워야 할 것 같은 심정이 들기 때문이다. 나는 이 책에 등장하는 거짓말을 파헤치고 진실을 밝혀내는 진실학 선생님의 도움을 받고 싶다. 바로 인애의 롤모델이기도 했던 진실학 선생님은 아버지가 밉다는 인애에게 암호쪽지로 아버지에 대한 믿음을 끝까지 버리지 말라는 말을 전한다. 자신의 의심과 믿음도 의심해 보라는 충고를 한 것이다. 내게 생기는 의심은 거짓학을 통해 점검해 보고 내가 가져온 믿음은 진실학을 통해 되짚어 보는 일. 그럼으로써 남이 아닌 자신에게 떳떳한 자신을 만들어 가는 일. 아마도 거짓말 학교는 아이들에게 이 사실을 힘겹게 가르쳐 주려 거짓말처럼 지어진 학교가 아닐까 싶다.

거짓과 진실의 동행

할 말이 많은 독서였기에 이야기가 길어졌다. 서두에 거짓말에 그럭저럭 무감해진 세월을 넋두리했지만 실은 아직도 사소한 거짓말에 상처받고 상대의 거짓을 확인할 때 눈물짓는 습관을 버리지 못한 나이기에 마지막은 나 자신을 속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거짓말이든 진실이든 이제 학교를 다닐 수 없는 나에게 문학만큼 쉽고도 어려운 학교는 더 이상 없다고도 느껴진다. 오늘도 우린 크고 작은 거짓말을 인식조차 못하면서 여기까지 도착했고 같은 거짓말(문학)을 겪었다는 인연으로 거짓말처럼 마주하지 않았는가. 하지만 앞으로도 살면서 거짓말을 하지 않겠다는 거짓말은 하지 못하겠다. 불행히도 이것만이 진실이다. 당신도 나도 서로서로 거짓말에 속고 속아주며 내일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 인생인 것이다. 이렇게 진실하게 살아있어도 거짓말처럼 죽는 우리의 삶이란 그렇게 진실과 거짓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 불가분의 동반관계를 다행히 홀로 짊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만이 나를 위로한다. 이 사실을 어떻게 알고 문학은 다행히 우리의 짐을 잠시 덜었다 다시 짊어주기도 한다. 그렇게 진실 된 거짓이지만 우리 삶에 거짓같은 진실로 알차게 쌓여간다는 것이 얼마나 가슴시린 행운인가.

나는 진실이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그것이 매번 통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항상 승리한다고도 믿지 않는다. 그것이 늘 옳은 쪽이라고 여기지도 않는다. 세상의 모든 진실은 세상의 모든 거짓만큼이나 많지만 거짓만큼이나 밝히기 어렵고 밝혀지기 어렵다. 내가 더없이 진실했다고 상대도 그것을 같은 밀도로 받아주지 않을뿐더러 살다보면 거짓이 더 효과적이고 빠를 때가 훨씬 많다. 우리는 간혹 진실과 최선을 혼동하곤 하는데 최선을 다했다고 매번 진실된 결과가 나오지 않을뿐더러 최선은 얼마든지 거짓으로 다할 수도 있는 것이다. 불성실과 거짓도 얼마든지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살다보니 완전히 까지는 아니더라도 페어플레이 하지 않고 약간의 거짓을 섞어가면서도 나보다 더 좋은 결과를 내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런 건 대부분 국산멸치로 국물을 내다가 어쩌다 한번 화학조미료로 찌개를 만드는 편법의 하나로 치부되는 듯했다. 나는 그들이 아닌 세상에 상처도 받아 보았다. 세상은 그런 것을 구별할 줄 모르기도 했고 또 그럴 필요가 없기도 했고, 그럴만한 시간이 없어 보이기도 했다. 그런데 정작 이러한 진실과 거짓의 현상학적 현실론을 알게 된 것은 불행히도 그리 오래되지는 않았다. 진실은 반드시 먹힐 것이라 내 진실만은 세상이 알아줄 것이라 믿어왔던 내 가치관이 제아무리 그 내구성이 탄탄해왔다손 치더라도 나는 다른 이의 도움없이도 이 사실이 마침내 알아진 것이다. 이것은 참담한 현실이자 뼈아픈 진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실은 소중한 것이고 언젠가는 꼭 통하리라 믿는 이 미련함. 진실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믿는 마음만이 중요한 것이라는 결론이 별다른 대안없이 오늘을 살아가는 내 모습일 뿐이었다.

삶과 죽음이, 이해와 오해가, 진실과 거짓이 서로 반대편이 아니라 같은 편에서 나란히 손잡고 동행하는 주자였다는 사실을 이 책을 마주하며 다시금 깨닫는다. 하지만 그것을 부러 아이에게 밥 먹여주듯 가르쳐 주고 싶지는 않았다. 거짓을 당해보고 거짓을 행해봐야 진실의 소중함을 뼈저리게 실감할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나 살자고 세상을 인정하기로 했다. 편하게 살고 싶었다. 깨달음이라는 것도 어짜피 자신이 깨달을 수 있는 것만 깨닫는 것이다. 나는 그동안 내가 거짓을 부정하고 불성실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자신에 대한 믿음이 거짓이라는 걸 아는데 실은 평생이 걸린 것이다. 나는 내가 진실하고 성실하여 세상에 화난 것이 아니라 내가 진실한 사람이라는 믿음으로 상대를 불신 한 것 뿐이었다. 물론, 내가 나를 속이고자 했던 것은 아니다. 다만, 나라고 매번, 항상, 똑같은 밀도로 진실하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은 것 자체가 큰 오해였다는 말이다. 내안의 거짓을 인정하는 것이야 말로 거짓된 타자를 인정하고 그들이 꾸려나가는 세상을 이해하는 것임을 나는 왜 몰랐을까.

나는 내가 진실한 사람이라는 거짓을 버리기로 했다. 다만, 진실하고자 노력하는 사람으로 남고 싶다. 그것이 그동안 내가 진실한 사람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내 고집을 그나마 위로하고 존중해주는 일일 것이다. 우리는 어쩌면 모두 진실하지 않다. 하지만 오늘도 진실하고자 노력하며 진실은 언젠가 통한다고 믿는다. 그렇지 않고선 거짓을 이겨낼 다른 방법이 없는 듯하다. 나는 오늘부터 거짓을 옆집 친구처럼 인정해 보겠다. 나도 그와 친구일 수 있음을 그는 이미 알고 있었을 것이 틀림없다. 세상은 아름답지 않지만 세상을 아름답게 보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있을 뿐이다. 그들은 결국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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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용린 교수님의 행복한 도덕학교
문용린.길해연 지음, 추덕영 그림 / 주니어김영사 / 2010년 9월
평점 :
품절



아이, 어른을 바라보다

어른들 말씀이 하나도 그른 게 없어 올 한해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 달력을 보면서 새삼 놀라고 있는 요즈음이다. 아이도 벌써 겨울방학을 앞두고 크리스마스 선물 타령을 하고 있다. 이제 이 맘 때가 되면 학생이나 학부모 할 거 없이 이번 방학엔 어디로 보내야 하나를 고민하게 된다. 처음엔 대한민국 학부모로 사는 한 이렇게 살아야 하는가 싶었는데 그것도 습관이 되버렸고 습관도 경력인 지 여기저기 방학 프로그램에 관한 정보를 향해 열심히 안테나를 작동중이시다.

그나마 다행인 건 맞벌이 할 땐 늘 정신없이 아이가 무슨 책을 보는지 요즘 어떤 일이 화제인지 도무지 몰랐는데 요즘은 대화시간이 늘어 아이와 눈을 맞출 수 있다는 것. 그러다 보니 아이가 조울증세가 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좋을 땐 춤이라도 출 듯 흥분상태라 너무 좋고 사소한 일이라도 기분이 나쁠 땐 머리가 아파 토할 정도로 안 좋아 지는 것이다. 대부분 학교에 갔다 오는 처음 얼굴을 보면 대충 알 수 있는데 요즘 들어 친구보다 선생님에 대한 비평을 자주 하는 추세다. 즉, 자신 또는 친구가 잘못하지 않았는데 선생님이 잘 알지도 못하고 꾸중을 한다든지, 선생님이 아이들과 한 약속을 잊어버렸다든지, 정해진 기준없이 누군가를 선별한다든지 하는 것에 심각하게 반응한다. 친구들이 아닌 선생님의 '도덕'에 시선이 향해 있었다. 아이가 커버린 것이다.

아이는 가끔 선생님이 이러이러 한데 이것은 나쁜 행동이 아니냐 묻는다. 친구간에 벌어진 일을 물어올 땐 자신있게 답하다가 선생님으로 주인공이 바뀌다 보니 상당히 당황스럽다. 자꾸 선생님도 이유는 있었을 것이라는 어른 된 입장으로 같은 편이 되려는 나 자신을 발견한다. 아마 학년이 올라갈수록 선생님이나 어른들의 잘못을 지적하는 아이들에게 나처럼 허를 찔리는 기분이 드는 학부모들이 많을 것 같다는 생각이다. 분명 어려운 단어를 써가면서 적당히 넘어가기 곤란한 경우도 생긴다. 아이가 끝까지 선생님의 잘못을 인정받고 싶어 할때, 그럴 때가 있다. 어른들 사이에서 요즘 한창 '정의'와 '도덕', '공정'이라는 개념이 유행인데 이 책은 아이들 입장에서의 도덕을 말하고 있다. 그렇게 보면 선생님도 얼마든지 아이들 기준에서 비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상대를 비판하기 전에 항상 나 자신을 먼저 되돌아보아야 하는 것이라고 우린 이렇게 답할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은 아이들은 물론 학부모, 선생님에게도 유용한 기준이 될 듯하다.

승부, 정면으로 하다

먼저, 이 책은 참 착하다. 솔직히 제목에 '도덕학교'라는 말이 들어 있어 아이가 거부감을 느끼지 않을까 싶었는데 어디서 소문을 들었는지 누군가 재밌다는 이야기를 했다는 것이다. 입소문은 이렇게 중요하다. 사실 아이들이 문용린 교수를 알리는 만무하고 이 책은 바로 학부모를 타겟으로 한 책이라 느껴진다. 엄마(혹은 교육계)가 선택해서 아이한테 권하는 루트를 꾀했다고 보여지는 제목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방법이 초등 3학년만 넘어가도 그다지 효과적이지 않다는 것을 출판사도 좀 알았으면 한다.(다음부터는...고학년 대상이라면 더욱더) 그래서 나는 책을 사줄 때 '이건 너무 지루하지 않겠어?', '이 이야긴 너무 빤한 거 아냐?' 이렇게 말하곤 한다. 특히 『문용린 교수님의(아이들 입장에서 누구인 지 알게 무언가) 행복한(너무 진부하지 않나?, 도덕해야 행복하다는 말? 도덕을 배우는 것이 행복하다는 말?) 도덕학교(뭔가 교훈을 주입할 것 같은 분위기 아닌가?)』라는 제목은 너무 정직한 편인 것이다. 그런데 이번엔 오히려 이 정공법이 제대로 먹힌 듯 하다. 책 제목에서부터 저자의 어떤 의지와 자신감을 감지했는데 에두르지 않고 바로 정면으로 승부한 마케팅에 박수를 보낸다.

이 책에는 문용린 교수의 분신인 스마일 선생님과 여섯 명의 아이들, 그리고 한명의 엄마가 등장한다. 공통의 커다란 줄거리 안에 다시 한명씩 고민이 담겨지는 따로 또같이의 이야기 구성이다. 공동의 목표는 합창대회라는 하모니에 있으며 개인의 목표는 도덕에 관한 개념이해라 할 수 있다. 스마일 선생님은 행복교실의 담임선생님이자 학교 운동장에 설치한 행복우체통의 비밀 관리인이다. 아이들은 각 편의 이야기에서 저마다의 고민을 편지로 적어 우체통에 질문하고 마지막에 선생님이 답변을 해준다는(물론, 아이들은 누군지 모르고) 형식이다. 합창단을 지휘하는 엄마는 애석하게도 큰 역할은 없다. 같은 엄마인 입장에서 이야기속에 등장하는 엄마는 늘 우스꽝스럽거나 다그치는 캐릭터로 출연하는 것이 서운하고 불만스럽다. '남자의 자격' 합창단을 지휘했던 박칼린 선생만큼은 아니지만 아이들과 관련된 소정의 역할이 있었으면 했는데(특히 선표의 목소리를 배려하는 음악과 관련있는 부분의 경우는 충분히 엄마의 역할이 있을 수 있지 않았을까) 책을 덮고 나서도 생각나는 건 과장된 몸짓과 우스운 말투가 전부다. 이 시대의 학생들에게 엄마란 성적관리 혹은 학원감독, 아니면 사생활 감시자로서만 인식되는 것 같아 좀 맥빠지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화음, 여섯 개로 울리다

여섯 가지의 이야기는 정직, 약속, 용서, 책임, 배려, 소유 즉 '정.약.용.책.배.소.'를 구성으로 하는 도덕원칙을 주제로 하고 있다. 진부한 듯 해도 도덕이란 아주 기본적인 인성에서 시작하는 것이니 우리는 주제를 끌어내는 아이들의 에피소드에 주목해야 한다. 여섯 가지 이야기를 들어가는 이야기는 여섯 명의 아이들이 한 팀이 되어 합창대회에 나가게 되었다는 조건으로 시작한다. 문제는 이나무, 강웅, 김선표, 김병희, 이다미, 오필이가 같이 모여 노래를 하는 것인지는 몰랐다는 것이고 이들은 각자 따로 대회에 나가는 줄 알았던 것이다. 문용린 교수는 결국 여섯 가지 도덕원칙을 각자가 내는 목소리로 여기고 다같이 조화롭게 화음을 만들고자 했던 것 같다. 이들은 할 수 없이 오필이네 집에 모여 연습을 하게 되는데 바로 오필이의 엄마는 지휘자로서 불협화음을 아름다운 화음으로 이끌어야 하는 역할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이야기의 중심은 합창대회를 위한 노래연습 과정이라기 보다는 아이들이 공부하고 모이고 대화하고 헤어지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아이들간의 사소한 그렇지만 예민한 갈등에 있었다. 그리고 그 갈등 유발 요인에는 여섯 가지 도덕원칙이 불편하게 자리한다.

정직을 이야기 할 땐 내가 하지 않은 것을 내가 행한 것으로 하는 거짓을 예로 들었다. 합창대회 출전곡의 노래가사를 각자 써오는 숙제에서 다미는 이미 언니가 발표한 가사를 가지고 왔는데 그만 다미의 것이 만장일치로 채택된 것. 웅이는 이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다미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알면서도 친구들에게 그 사실을 말하지 않는다. 언뜻 보기에 한집안 식구인 언니가 지은 가사를 가져와 급한 대로 제출하는 다미의 행동이 대수롭게 보이지 않을 수 있지만, 친구의 속임수를 보고 가만히 있는 것도 이해할만한 마음이지만 문용린 교수는 정직한 사람과 정직한 사람들이 사는 나라를 한번 생각해보라 한다. 그리고 사실대로 솔직하게 말하는 습관이야 말로 우정을 더 단단히 해준다 답해준다. 아이들은 다미가 우체통에 써낸 편지와 의문의 천사로부터 돌아온 답장을 통해 자신만의 비밀과도 같은 고민이 해결되는 느낌을 받으며 타의가 아닌 스스로에 의해 자신의 잘못을 돌아볼 수 있었던 것이다.

아무리 보아도 이 우체통이라는 고민해결사가 이 책의 가장 큰 매력이었던 것 같다.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우체통에 쓰레기를 넣지 않고 누군가 편지를 넣었더니 신기하게도 답장을 받았다는 소식에서부터 아이들은 우체통에 자신의 고민을 의지하게 된 것이다. 엄마에게도 친구에게도 선생님에게도 말못 할 사연을 띄우면 '그래 네 고민을 잘 알고 있으니 이렇게 해보렴' 하는 위로성의 답장이 배달되는 것이다. 우체통이 운영될수록 아이들은 공정한 누군가가 친구들끼리의 민감한 잘못도 판가름할 수 있다는 기대와 해결에의 신뢰를 가지게 된다. 아이도 이 책에서 편지를 쓰고 누군가 답을 해주는 것이 가장 좋았다고 했다. 편지는 질문의 역할도 하면서 동시에 반성문의 역할도 하고 있는데 일어난 일을 돌이켜보면서 비로소 상대친구를 이해하는 과정이 되기도 한다.

약속을 이야기 할 땐 '선약'의 중요성을 실감하도록 하였다. 치과를 혼자 가기 싫어하는 병희를 위해 같이 가주겠노라 약속한 선표가 그만 병희가 청소를 하는 사이 다른 친구의 생일초대에 가버린 것이다. 선표는 병희와의 약속을 잊은 것이 아니라 일 년에 한번인 친구 생일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한편, 병희는 자신이 먼저 제안한 선표가 걱정이 되어 치과예약 시간도 놓치고 노래연습을 하러 갔는데 선표는 태연하게 피자한판을 들고 나타난다. 선표는 자신이 무슨 잘못을 했는지 알고 있었을까?

용서를 말하는 이야기는 가장 감동적인 화해장면을 연출해 내었다. 유치원때부터 친구사이인 나무와 웅이가 서로를 미워하게 된 것은 과학실에서의 실험기구파손을 선생님에게 일러바쳐 웅이가 망신을 당하게 된 이후 부터였다. 나무는 반장이었고 웅이가 가장 믿었던 친구였기에 웅이의 상처는 클 수밖에 없었다. 나무의 반장된 책임과 웅이의 친구로서의 우정이 맞서게 된 서로의 미움은 어느 비오는 날 웅이를 바쳐 준 나무의 우산으로 전환을 맞는다. 이들은 서로를 용서할 수 있었을까?

책임 이야기에선 반장인 나무의 고민이 설득력있게 전개된다. 과학실 사건으로 웅이와 불편한 관계가 된 뒤로 나무는 모범생으로서 아이들의 잘못을 잡아내고 선생님에게 전달하는 역할이 짐처럼 부담스러워진다. 웅이에겐 반을 대표하는 공적인 책임이 중요한 것일까. 친한 친구와의 사적인 책임이 중요한 것일까. 만약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한다면 친구를 버리고 반을 선택하는 것이 맞는 것일까?

배려를 말할 땐 상대의 입장에 서서 생각하는 아이들의 지혜를 예쁘게 모아 놓은 이야기였다. 목이 아파 소리가 나오지 않는 선표를 위해 친구들은 각자 자신의 방식대로 선표를 위한다고 목에 좋다는 음식을 가져온다. 하지만 이것은 친구의 아픔을 걱정하기 보다 친구로 인해 대회가 걱정된 마음은 아니었을까? 선표는 오히려 이들의 배려가 더욱 속사정을 시원히 말 못하게 하는 부담으로 작용할 뿐이었던 것. 생각하긴 쉬워도 진정으로 상대의 어려운 입장을 위해 실행해내긴 힘든 것인데 아이들은 어떻게 양보와 희생을 배우고 선표를 배려할 수 있었을까.

마지막 이야기인 소유는 내 물건이 소중하듯 남의 물건도 소중함을 알게 하는 이야기였다. 다미는 죽은 엄마가 남겨주신 '따또(따로 또 같이)'라는 인형을 잃어버렸는데 그것을 본 친구들은 낡고 더러운 인형이었기에 누군가 버린 것인 줄 알고 쓰레기 취급을 한다. 나에게 필요도 의미도 없고 외양이 형편없기라도 하다면 누군가에게도 마찬가지인 것일까? 길거리에 떨어져 너덜너덜한 빛바랜 사진 한 장이지만 사진의 주인에겐 고이접어 지갑속에 간직하던 가장 소중한 유품일 수 있지 않을까.

다미의 정직, 선표의 약속, 웅이의 용서, 나무의 책임, 병희의 배려, 오필이의 소유는 훌륭한 화음을 이루며 합창대회의 성공을 기대하게 만들었다. 문용린 교수는 교육심리 전공자 답게 아이들의 사소한 감정변화와 그 원인을 잘 잡아내어 아기자기한 일상의 에피소드로 배치하였다. 거짓말하지 마라, 약속 잘 지켜라, 모범을 보여라, 친구 입장을 생각해라, 남의 물건도 소중히 하라는 틀에 박힌 주입을 하지 않기 위해 부러 아이들이 먼저 잘못을 하게 만들고 스스로들 자신의 잘못을 인식하도록 하였다. 그러면서도 아이들의 죄책감과 동시에 난국을 해결하도록 자연스레 편지와 우체통이라는 매개체를 활용하여 교육적인 답안을 전달해주는 영리한 방식을 시도하였다. 반갑고도 지혜로운 교육이 아닐 수 없다.

도덕, 영원히 배우다

정직을 비롯한 여섯 가지 도덕원칙은 살아가면서도 매일 부딪치는 일상의 원칙과도 같다. 거짓을 안 하고 살기 얼마나 힘든가. 약속을 어기지 않기란 또 얼마나 힘든가. 밉기만 한 누군가를 용서하기란, 내 책임을 다하기란, 상대입장을 먼저 생각하기란, 상대 물건도 내 것처럼 여기기란 도덕교과서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아이들의 동화를 읽다보면 정말 세상의 분진이 많이 묻었구나...그런 생각이 든다. 아이는 어짜피 이 동화를 읽고는 나름대로 교훈을 얻었을 것이고 이젠 내 삶의 원칙을 돌아봐야 할 시간이 아닐까 싶다.

여섯 가지 도덕원칙을 갈고 닦은 아이들이라도 결국 우리처럼 변변찮은 어른이 될지 모른다. 남의 생각을 슬쩍 가져다 써놓고선 태연하게 모른 척 하고, 핑계를 대어 약속을 파기하고, 형식적인 용서만을 하고 살아가는 우리처럼 말이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행해놓고 무엇을 했는지 모르는 것과 자신이 한 잘못이라도 인식하고 있는 것과는 차이가 있기를 바란다. 잘못했음을 알았기에 이제 반복하지만 않으면 되는 아주 쉽고도 어려운, 그 일만이 남았으니 말이다. 언젠가 아이들은 반드시 이 원칙의 잣대로 우리에게 질문 할 것이다. 거짓과 약속위반과 원망과 태만과 이기와 무관심을 지적하며 의아해 할 것이다. 아이로부터 배운다는 말이 있다. 우리가 가르치고 싶었던 것이지만 아이가 더 깨끗하고 훌륭할 땐 그들로부터 다시 배워서라도 깨우쳐야 하는 것이 인생이지 싶다. 다만, 아이들이 우리처럼 더 많은 시행착오 없이 정확한 잣대를 가진 도덕원칙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를 잃지 말기를 바란다. 우리 역시 언제라도 허물어진 잣대를 다시 바로 세워 아이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어른이 되어야 할 것이다.

오랜만에 선생님이 떠오르는 독서를 했다. 하지만 도덕이란 지식이거나 학문의 문제는 아닌 것 같다. 야무지게 알면서도 야속하게 마음을 접지 않는가. 다분히 의지의 문제인 것이다. 우린 또 늘 흔들릴 터이니 고맙게도 이러한 책들은 언제나 우리를 기다린다. 아이들의 행복한 도덕학교에 슬며시 숨어들어 이야기 몇 개 훔쳐들은 기분, 나쁘지 않다. 도강의 재미란 원래 학점도 신청하지 않아 자격이 안되는 학생이지만 수업이 듣고 싶어 찾아든 용기있는 의지의 실현에 있다. 끝까지 들키지 말자. 학부모들이여, 실은 도덕은 우리의 문제인 것을, 당신도 나도 잘 알고는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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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0-12-01 14: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분의 글을 읽으면 참 좋을거 같은데,, 대부분의 책이 어린이실에 있어서
안타깝기만 하네요. 그 책을 읽은건 아니지만 한사람님의 글 덕분에 간접적으로 책 내용을
알 수 있었습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한사람 2010-12-01 19:39   좋아요 0 | URL

좀 교과서적이긴 하나 정성이 담겨있습니다.
감사합니다
 
김대중 자서전 - 전2권 김대중 자서전
김대중 지음 / 삼인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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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 후회 없도록


#1. 나는 1970년 부산에서 태어났다. 경남 남해가 고향인 내 부모님은 부산에서 이십년 적을 두다 외동딸인 내 교육 문제로 1976년, 서울로 이사하셨다. 나는 강남에서 초,중,고를 마치고 여대를 입학한 후 다시 강남에서 사회생활을 했다. 경남 진해가 본적인 부모님을 둔 남자와 결혼 후 분당에 살림을 차리고 그곳에서 아이를 길렀다. 부모님은 분당과 용인에서 사셨다. 부모님의 영향으로 초등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조선일보를 구독해왔다. 올해 41세의 대한민국 국적을 가진 이 여성은 그동안 살아오면서 네 번의 대통령 선거에 참여할 기회가 있었고, 모두 투표를 했다. 그러므로 그녀에게도 김대중을 대통령으로 당선시킬 기회는 두번이나 있었던 것이다. 과연, 그녀는 김대중을 찍을 수 있었을까.

많이 울었다. 왜 그렇게 울었는지 나 자신도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시작부터 끝까지 자주 훌쩍 거리곤 했다. 어떨 땐 눈두덩이 뜨거워져 얼굴에 열감으로 종일을 보내었고, 울컥하며 목이 메어 울분에 그만 눈을 감아 버리기도 했고, 어떨 땐 가슴이 저미는 설움으로 온 폐부가 돌덩이처럼 가라앉는 듯 했다. 또 어떨 땐 쿵쾅거리는 심장을 주체하지 못해 벅찬 눈물이 나도 모르게 터져 나오곤 했다. 살면서 그동안 책이라는 존재를 대하며 이토록 여러 가지의 감정으로 눈물을 흘린 적이 있었던가. 『김대중 자서전』은 내 눈물의 모든 것이었다. 이 가을, 나는 울고 있었다. 그것도 제대로 마음껏, 후회 없도록 이었다.

왜 울었는지 참참히 따져 물어야 했다. 내 눈물의 진정성을 밝히는 것이 곧 그를 알아가는 일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자 그 과정과 의미를 정리정돈하고 싶어졌다. 감정을 정리하자 이성이 찾아왔고 이성은 다시 마음을 살찌웠다. 독서란 문학이란 그런 것일까. 책 한권 읽었다고 갑자기 가치관이 바뀔 나이는 지나온 지 오래지만 나는 지금 그동안의 내 무지와 무심, 무정함을 적절한 시기에 운좋게 보완했다는 충만감에 들떠있다. 이토록 달뜬 설레임은 나를 적잖이 애타게 만들며 연인들이 늘 '사랑'이라는 진부한 말 대신 그보다 더한 말을 찾아 헤매듯 '존경'이라는 말로는 영, 성이 차지 않는 심정이다. 부족하다.

생각해보자. 우리는 종교인이나 학자, 혹은 기업인까지도 존경한다 말해 보았지만 정치인을 존경한다고 말해본 적이 있던가. 그것도 한국의 정치인을. 물론, 자신이 지지하는 후보를 존경할 수는 있겠지만 종교는 달라도 김수환 추기경이나 법정스님을 존경한다고 말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이야기일 것이다. 주변에 '정치적'이라는 접두어가 붙은 사람들을 떠올려 보더라도 그 '정치적'이라는 관용된 의미를 고운 시선으로 봐주기 힘들지 않았던가. 요즘 유행하는 TV드라마의 주연격인 국회의원도 '정치란 절대 선과 절대 악의 논리가 아니다. 49%의 악속에 피어나는 51%의 선의 꽃이 정치다.' 이렇게 말하지 않았는가. 김대중 대통령도 정치란 심산유곡에 핀 순결한 백합화가 아니라 흙탕물 속에 피어나는 연꽃이라 비유했다. 좋은 말로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은 유기적인 존재인 것이지 상황에 따라 늘 변수를 안고 있는 유동성 존재인 것이다. '정치적'인 사람은 곧 비윤리적이고 비인간적이며 어딘지 모르게 음모에 능한 사람이라는 것이 하나의 공식처럼 사용된 지도 이미 오래되었다. 이처럼 변화와 변수, 변모를 정체성으로 하는 일을 하는 사람을 존경하기란 애초부터 불가능하다는 생각도 든다. '정치'란 단어만 억울하게 되었지만 그만큼 한 인간으로서 정치인을 존경하기란 어렵기도 할뿐더러 또 우리 근현대사에 존경할만한 정치인이 없었다는 현실을 보더라도, 평생 정치인이었던 김대중을 존경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한명이라도 있다면 그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익히 존경받아 마땅한 정치인일지 모른다. 그런데 아니 그래서, 나는 그를 존경하는 사람은 아니었다는 말이다. 굳이 그래프를 그려보자면 비호감의 좌표에 가까웠다. 아니, 솔직하자. 나는 그를 거의 혐오에 가까울 정도로 태생부터 뼛속부터 오랜기간 거부해왔노라, 고백하겠다. 그런데, 살면서 이렇게 그 사실에 대한 변명의 기회가 제대로 생길지는 꿈에도 몰랐다. 그리고 이토록 처연하게 마음이 시퍼렇게 멍울지고 난 후 일지도 몰랐다.


나는 왜 !

#2. 내 아버지는 뚝심의 경상도 사나이였다. 어머니는 전라도 사람을 공산당과 버금 갈 정도로 싫어하셨다. 이유는 여러 가지였지만 당시 부모님을 이해하거나 오해할 필요가 없었던 어린 나로서는 지겹도록 '전라도 사람과 결혼만은 안 된다'는 정언을 밥먹듯이 듣고 자랐다. 초등학교 다니면서는 더 지겹도록 반공교육을 받았다. 그때 북한은 '괴뢰군' 혹은 '괴수'로 통일, 지칭되었으며 '박살내자', '때려잡자' 같은 단어로 표어를 짓던 기억이 생생하다. 동네에서 고무줄 놀이를 할 때까지 무심코 불러대던 세 곡의 노래도 우렁찼다.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로 시작해 ’아아 잊으랴 어찌 우리 그날을’을 읊조리다 결국 마지막엔 ’무찌르자 공산당’으로 마무리했다. 어쩌다 삐라를 주워 온 친구가 있으면 그날은 금방이라도 전쟁이 날 것처럼 공포에 떨었던 기억...내게 있어 공산당은 민방위 훈련날 귀를 찢으며 교실에 울려 퍼지던 싸이렌 소리만큼 가까웠음이다. 그런데 아버지는 TV에 자주 나오던 김대중이라는 사람이 빨치산 출신이라 하셨다. 그러니까, 김대중은 내게 처음부터 확실히 결혼만은 안 된다던 '전라도' 사람이면서 괴수라 불리던 '공산당'이었던 것이다. 나는 달리 의심없이 김일성이 북한의 지도자인 것과 마찬가지로 그 두 가지를 믿고 살아왔다. 그 두 가지는 훗날 내가 나이들어 성인이 되고 난 후에도 좀처럼 의식의 심연 저 밑바닥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나는 아무 잘못이 없었다, 고 말하고 싶었다. 그리고 실제로 잘못은 하지 않았다. 부모님 말씀 잘 듣고 선생님 말씀 잘 따라야 했던 그 시절 우리가 아니던가. 그는 정부의 탄압보다 국민의 오해가 미치도록 무서웠다 고백했다. 나와 같이 경상도에서 자라 모범생이라는 역할을 맡아온 학생들이라면 그들의 가슴에 김대중 이름 석자는 역적의 낙인이 되고도 남았을 진대.

만만치 않았던 두 권의 책을 덮고 나서 실로 많은 생각을 했다. 아니 많은 생각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예전부터 역대 대통령들 중 그의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거나 자서전으로 출간하면 가장 흥행에 성공하겠다는 세속적인 예감은 하고 있었다. 그것은 그가 살아온 누구보다도 드라마틱한 인생이라는 원재료의 충실함도 있었겠지만 대통령들 중에서는 가장 문화, 예술에 근접한 분이라는 막연한 믿음이 있었던 까닭이다. 그중에서 특히 문학적 소양이 뛰어나다고 알려지긴 했지만 나는 흡사 오바마 대통령이나 반기문 UN 사무총장 정도의 자서전을 떠올리며 가볍지 않은 책의 무게를 나름대로 이겨보려 했었다, 처음부터. 그런데 그것은 너무도 정치적인 내 소견이었다. 무겁고 진중한 것은 그대로 진지하고 엄숙하게 받아 들여야 했다. 진실이란 그런 것일까. 머리로 사실을 알고 있는 것과 가슴으로 진실을 느끼는 것은 엄청난 차이였으니 말이다.

이 책은 우리 현대사에 족적을 남긴 한 인물의 자서전이라고만 하기에는 아쉽고 안타깝다. 나는 그것이 못내 미안하고 서운하다. 역사를 따라가는 서사를 기본으로 소설이나 시가 가지는 문학적 장악력과 에세이에서 느껴지는 감동과 진솔함, 인문학이 발산하는 교양의 향기, 종교나 고전에서 발견하는 삶의 진리가 고스란히 담겨있는 '살아있는 문학 예술품'에 근접하다 할 것이다. 나는 이 책에서 '진실을 확인하고 진심을 느끼고 진리를 깨달았다', 상투적이지만 이렇게 말하고 싶다. 나는 그가 마지막 까지 그토록 믿어 의심치 않았다는 역사속에 위치하던 국민의 한 사람임을 이제야 알겠다. 문학의 테두리 안에 이 모든 것이 앉혀져 지나간 역사를 돌이켜보고 그 안에 서 있는 내 인생을 돌아보고 마침내 오늘의 가슴에 뭉클한 심지를 피울 수 있다는 사실이 새삼 놀랍고 목이 메인다. 나는 덜컹대며 내 목이 울렁거리던 이유를, 내 눈이 내 입술이 붉어짐에 그리하여 가슴마져 홧홧하게 뜨거워지던 마지막에 머리 숙인다. 나는 왜 !... 이것을 말하는 내 모습이 자랑스럽다. 어찌하면 성이 찰 것인가. 한없이 모자라기만 한 존경을 넘고 싶은 한사람의 이야기를 그는 지금 알고나 계실지.


우리집 김대중

#3. 나는 학창시절엔 집에서 '우리집 김대중'으로 불리었다. 두 가지 생각이 세뇌처럼 박혀있던 나에게 그 말은 어떤 욕보다도 끔찍했다. 부모님의 이유인 즉슨 자신이 잘못을 해 놓고도 미안하다는 말을 받아내는 적반하장 격의 논리를 고집스럽게 주장하여 사람을 무안하게 한다는 것이었다. 부모님은 나와 말싸움이 벌어질 때 '우리집 김대중인데 어련하겠어', 이렇게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나를 비난하셨다. 나는 학교에서도 반장선거에 나가 연설(까지는 아니지만)을 하면 선생님에게 김대중처럼 사람의 마음을 선동한다는 칭찬인지 질책인지 모를 야릇한 이야기를 곧잘 듣곤 했다. 그러고 보니 고2 때(내가 반장일 때), 우연히 학교앞 서점과의 고착된 비리와 함께 보충수업 교재의 성의없는 선정을 목격하곤 아이들과 함께 교재와 그 교재를 선정한 선생님을 바꾸어주지 않으면 수업을 받지 않겠다는 당돌한 항의를 한 적이 있긴 했다. 나는 국회의원을 아버지로 둔 반 친구를 설득해 위로부터의 압력을 뒤에서 조종하는 놀라운 정치적 술수를 발휘하며 결국 교재를 우리가 원하는 것으로 바꾸는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또, 그러고 보니 사회생활하면서 나는 업체 공개 프리젠테이션을 담당한 경우가 많았는데 공모에서 누가보아도 대결구도가 불리한 국면에 오로지 열정과 마지막 심정적인 호소로 결과를 역전시키는 경우도 더럿 있었던 기억이 난다. 그때 누군가 'PT 한'이 아니라 'DJ 한'이라고 놀리던 사람도 있었다. 그러고 보면 김대중 같다는 말이 욕이 아니었음을 스스로 깨닫게 되기까지 그리고 그 말은 개인적으로도 영광스러운 칭찬으로서 내심 저릿해 지기까지 결국 나는 내 온 생애가 걸린 것이 아닌가.

두 권의 자서전을 덮고 나는 마음을 깊게 쓸고 지나가던 단어들을 적어보았다. 용기, 평화, 화해, 존경...그리곤 그들 밑에 '설득'이라 적고 마침표를 찍었다. 돌이켜보니 자서전은 1권에서 대통령이 되기까지, 2권에서는 대통령이 되고 나서의 시간 순 글들이었지만 결국 모두 한평생 설득하는 인생을 살아오셨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곤 마지막까지 이렇게 책으로 그렇게 살아야 했던 자신과 나를 설득하는구나...사람들은 늘 그의 설득앞에서 고개를 끄덕이거나 뒤돌아 주저하였겠구나 싶었다. 그랬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죽기 직전까지 늘 무엇인가를, 누군가에게 설득하고 있었다. 실은 그렇게 긴 세월 변함없이 세상과 자신을 설득하고 나서야 대통령이 된 것이었다. 그는 가정, 학교, 회사, 단체, 정치권, 해외 할 것 없이 만나는 사람들에게 늘 자신의 의견을 이야기하고 그 시기와 대상마다 적절한 방향성을 제시하였다. 그것을 알기 때문에 사람들은 위기상황일수록 그를 찾았고 그는 죽기직전까지 해외에 초청을 받아 세상을 향해 의견을 내보였던 것이다. 그런데 그 의견은 또 늘 기존의 현실과 고정관념들을 깨우치는 새롭고 혁신적인 의견들이 많았다. 누구나 다 자신이 맞다고 생각한 것을 남에게 펼쳐 보이기도 힘들며 내보였다고 해서 상대의 생각을 바꾸기는 더 어렵다. 그리고 의견이 매번 새롭게 느껴지기도 불가능하다. 그런데 그는 늘 한결같이 새롭고 늘 자신이 옳다고 당당히 말하며 그런 자신과 그 앞에 선 역사와 그를 지켜보는 국민을 믿었다. 같은 말을 해도 한번에 귀담아 듣지 못했으니 매번 새로울 수밖에 없었다.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고 때로는 자신의 이야기를 믿지 않고 알아주지도 않아 가슴을 치며 울부짖기도 했지만 그는 왜 한 번도 멈추지 않았을까. 어쩌면 멈추려는 자신을 설득하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힘든 일이었기 때문은 아닐까.


아버지의 목소리로

#4. 다시 선거철은 돌아와 1997년 그해 말, 아버지는 전에 없이 나를 불러 앉혀다 놓고 김대중만은 찍지 말라고 진지한 한 표를 호소하셨다. 나는 한창 직장생활로 삼일이 멀다하고 철야를 강행할 때였고, 투표에 대한 생각조차 없을 시기였다. 당시 보수세력의 유력한 후보였던 이회창 후보가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지만 김대중이 대통령이 되면 나라가 불안해진다는 것이 아버지 의견이셨다. 아버진 한국전쟁때 18살의 나이로 군대에 자원입대 하신 참전용사였다. 중학교 교육을 일본에서 받은 지라 일어에 유창하셨고 일본에 대한 향수가 남다른 분이셨다. 훗날 특유의 언변을 장기삼아 일본을 대상으로 수산무역업에 종사하셨다. 그날 아버지의 논리는 유려하면서도 아주 인상깊었기에 십년도 더 된 아버지의 목소리가 바로 어제처럼 생생하다. 우리나라 역대 대통령(당시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은 모두 'DJ 컴플렉스'가 있다는 것이었다. 김대중은 사람의 마음을 휘어잡는 마력이 있기 때문에 역대 그분들은 모두 그를 죽이려 했고 어떻게든 그의 정치인생을 매장하기 위해 온 전력을 다해왔다고 하셨다. 아버진 부산시절 대통령 선거에서 DJ의 명연설을 들은 일이 있다 하셨다. 누구라도 그의 연설을 들은 사람은 희망을 가질 수 밖에 없고 열광할 수 밖에 없다고 회상하셨다. DJ와 경쟁구도였던 역대 집권자들은 한마디로 그가 눈에 가시였기 때문에 끝에 가선 전라도 촌사람에다가 학력도 변변찮고 용공이라고 몰아 부치는 수 밖에 없지 않았겠느냐 하셨다. 너무 긴 세월 억눌려 있었기에 차라리 처음에 박정희를 이겼다면 몰라도 그의 지지기반인 호남세력이 갑자기 폭발 할 것이고 그동안 집권하였던 권력자 집단과의 충돌로 나라가 시끄러울 것이며, 그것은 곧 북한이 원하는 바가 될 것이라는 말씀이었다. 즉, 김대중이라는 인물이 대통령감인 것은 확실하나 이 나라의 정권과 국민은 아직 그를 대통령으로 맞이할 수준이 안 된다는 것이 아버지 결론이었다. 아버지에게 있어 일제시대와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경험한 국민적 패배감은 같은 나라의 국민에 대한 뿌리깊은 실망감으로 자리잡은 듯했다. 아버지의 '국민수준론'은 충격이었다. 전쟁에 대한 상처가 자신의 피해와 동일했던 아버지 세대들은 김대중이라는 이름 석자와 다시 전쟁이 일어날 수 있는 불안한 기운을 동일시 하셨다. 오랜 기간 반공을 독재의 밑거름으로 활용해온 정부하에서 당연한 결과였다. 하지만 무엇보다 아버지가 김대중을 '대통령을 할 만한' 인물로 인정한다는 사실 자체가 놀라웠다. 그해 DJ의 당선이 확실시 되던 그날 밤, 아버진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시며 오래 잠을 이루지 못하셨다. 국민들이 갑자기 수준이 높아 진 것일까. 사람들은 왜 그가 대통령이 되는 것을 두려워 하였을까. 왜 그를 겁내하였던 것일까.

자서전을 써내려간 문체를 기억한다. 책에는 재임시절 대통령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 수많은 연설문이 구어체로 소개되어 있다. 담담하면서도 치우치지 않았고 진실을 전하려고 하는 의지가 강하게 느껴졌다. 첫 번째 아내를 잃었을 때, 재혼을 하게 되었을 때, 동생과 누이, 부모님 상을 당했을 때, 자식이 감옥에 갔을 때, 오랜 지인의 부음을 들었을 때 등 개인적인 슬픔을 술회할 땐 짧고 강하면서도 문학적인 표현으로 마음을 저 멀리 하의도 고향 앞바다에 띄워 보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늘 시국의 현장 속에 있으면서도 중간 중간 견딜 수 없는 슬픔을 토로할 땐 외로움의 진액이 유난히 오롯해 보였다. 그렇게 홀로된 고독에의 허기를 민중을 향한 열정으로 다시 삶의 윤기를 빚어내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래서 인지 그의 목소리는 때론 허기지고 때론 윤기가 났다. 나는 그 목소리의 울림에서 어떤 오래된 '진정성(眞正性)'을 느낄 수 있었다. 거짓이 아닌 정성된 목소리. 이것은 그의 업적과 대통령으로서의 평가와는 상관없이 한사람의 아름다운 목소리였다. 그가 내뿜는 음역(音域)은 높고 낮음을 초월한 인간의 슬픔과 외로움, 기쁨과 환희 모두를 끌어안는 무한대 주파수의 영역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음파가 가닿는 곳은 정확하게도 우리들 가슴 한 가운데 였던 것이다. 때론 난파되고 때론 침몰되면서 거친 生의 파도를 헤쳐 나온 독특한 그만의 음률이 전해주는 목소리였다. 정치인의 목소리가 아름답기란 얼마나 힘이 드는 것인가. 진실 자체는 고통스럽고 추할 수도 있으며 내가 원하는 바가 아닐 수도 있었지만 그것을 전하는 마음만큼은 아름답게 느껴졌다. 진정성의 선물이었다.

그는 어쩌면 우리나라에서 보다 해외에서 더 인격적으로 존경받았던 것은 아닌가 싶다. 그들이 우리보다 더 좋은 더 밝은 귀를 가졌던 것일까. 그들이 우리보다 더 열린 마음이었던 것일까. 나는 그가 국내 국외의 장소 및 남녀노소, 사회계층을 불문하고 연설장에서 답이 곤란한 질문을 받거나 화가 날만한 항의를 받을 때 보여주었던 기지와 재치, 혜안이 그때마다 무릎을 탁 칠정도로 대단해 보였고 내심 짜릿하고 통쾌할 때가 많았다. 상대를 기분상하지 않게 하면서도 자신의 논지를 분명히 하면서 감동까지 선사하기란 토론문화가 발달하지 않은 우리 실정에서 누구나 본받을 만한 능력임에 틀림없다. 수많은 세계 정상들은 하나같이 그의 연설에 감동하며 정상회담에서 그의 의견에 공감을 표시하였다. 물론 자서전에 다소 좋은 결과의 내용만 언급되었을 수도 있고 결국 제3자가 아닌 자신이 집필한다는 주관성의 한계가 있음을 모르지 않으나 많은 객관적인 자료들에서도 사람들은 그의 말에 결국 설득당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거기엔 늘 이성적인 이해를 넘어선 감성적인 공감과 인간적인 감동이 수반되었다. 클린턴 대통령을 비롯한 많은 정상들이 화답한 문건과 그들과의 대화들을 살펴보면 단순히 한나라 정상끼리의 외교적인 대화가 아니라 지면과 사진을 통해서도 서로의 인격을 깊이 존중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의 정책과 전략이 탁월할 만큼 우수했을 수도 있었겠지만 무엇보다 그러한 정책을 피력하는 진심어린 진정성에 정상들은 먼저 마음이 동화되었던 것이 아닐까 싶었다. 상대 정상과 국가에 존경을 표시할 때도 틀에 박힌 교과서적 인사가 아닌 자신 스스로가 공부해 발견한 깨우침을 역사적인 의미를 부각해 상대국에 자긍심을 세워주는 모습, 진심으로 상대에게 공을 돌리는 겸허한 자세, 상대의 무례나 오해까지도 포용하려던 성심, 한 번의 만남이라도 인연을 소중하게 여기는 따스한 태도등이 비록 그의 정책에는 동의하지 않았을지라도 그 마음에는 흠뻑 동감하도록 만드는 그만의 능력이었다. 부시대통령도 한참 연장자인 그를 처음엔 변방의 촌놈처럼 무시하는 결례를 범했다가 훗날 다시 여러 방법으로 사죄하는 에피소드를 보고 무례하기로 유례없던 미국의 대통령도 그를 향한 존경과 진심은 있었구나 싶었다. 왜 사람들은 그의 연설을 들으면 가슴이 뛰고, 그와의 대화에서 고개를 끄덕이고, 그의 진심에 마음으로 감동했을까.

그는 어떻게 '자기 진정성'(authenticity)을 구축해 온 것일까. 아니 어떻게 해서 그렇게 변함없이 진정할 수 있었을까. 어릴 적부터 막연히 임금님이 되겠다는 큰 뜻을 품어온 그이기에 타고난 기질도 있었겠지만 나는 그의 진정성을 이루는 몇 가지 가슴아픈 피와 눈물의 흔적을 책을 읽어가며 찾아내어야 했다. 그는 사람을 마주할 때 자신이 그때까지 이루어온 온몸을 다 쓰면서 상대를 설득해 온 것은 아닐까. 즉, 머리로는 스스로 깨우친 지식을 전달하고 몸으로는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적용하고 가슴으로는 우러나온 태도를 전함으로써 그때그때 마다 상대를 최선으로 배려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는 난항이 예상되는 정상간의 회담이나 연설이 끝난 후엔 그야말로 '젖먹던 힘을 다해' 애를 썼고 쏟아 부었다는 표현을 자주 했다. 실제로 그는 어머님의 젖을 풍부하게 먹고 자랐을까...마는 매순간 최선을 다하지 않는 대통령이 어디 있을까마는, 유독 아주 힘들 때 마지막 남은 힘까지 모두 짜내어 그가 다해마지 않은 사력은 늘 진실과 정성의 극대치였다는 점에서 더 애닯고 끈질겨 보인다.

자기진정성의 밑바탕에 분명 자신의 머리에서 나온 자기 철학이 있었다. 이 점은 정세에 따라 정책을 제안하고 시행과정에서 또 시류에 휘말려 뒤집기를 반복하는 오늘날 철학이 없는 수많은 정치인을 떠올려 보면 그 중요성을 더욱 실감할 수 있다. 그런데 인류가 철학자가 아닌 정치인에게 세상을 맡긴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자기 철학을 행동에 옮겨야 하는 대통령이 철학자와는 달리 특정한 시기, 특정한 사회에서, 특정한 권한을 가지고, 특정한 임무를 수행하는 자이기 때문이 아닐까? 나는 자서전 1권을 덮으면서 그가 그토록 오랜 세월 대통령이 되지 못한 이유는 바로 한반도의 가장 특정한 시기에 최고 난이도의 특정한 임무를 수행해야 했기 때문이었구나 하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그는 결국 대통령이 되지 못한 시기 동안 그 특정한 임무를 위해 철학과 종교와 사회와 인간을 끊임없이 준비하며 마침내 목표를 성취하였던 것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그 앞엔 언제나 발전을 요구하는 국민이 있었다. 대통령의 자기 철학은 언제나 국민이 요구하는 바와 사회발전 방향과 부합해야 할 것이다. 그는 일제시대, 한국전쟁, 군부독재, 민주화투쟁이라는 근현대사의 모든 상처를 직접 겪으면서 우리나라 민주주의의 방향성과 통일정책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가지게 된다. 그가 자주 설득하던 '아시아인의 민주주의 자질'은 내 학창시절 이십년 동안 어떤 선생님도 제시하지 못했던 신선한 이론이었다. 수많은 책을 읽고 더 많은 사람을 겪고 일본인 교사로부터 배운 것들, 전쟁의 상황에서 겪은 부조리, 지도자의 선택이 한반도에 미치는 영향, 독재가 불러온 폐해등을 몸소 체험하며 현장에서 익힌 실물경제 감각을 더해 익혀진 자기진정성의 탄탄한 밑거름이었던 것이다. 이는 단순히 어떤 한사람의 정책을 모방했다거나 선진국의 방식을 그대로 차용한 것이 아닌 그 모든 것을 수용해 독창적으로 고안해 낸 것이었다. 자신 안에서 자신의 의지대로 生의 방식을 선택한 것이었으며 그러한 방식을 선택하는 근원적 기준은 자기 자신에게 진실한가, 역사와 국민앞에 당당한가였기 때문에 그는 누구를 만나도 어디를 가든지 '자기진정성'을 최대의 무기로 삼을 수 있었던 것이다.

대부분 그를 말할 때 언변이 뛰어난 사람이라는 수식을 하고는 한다. 말 한마디로 천냥빚을 갚는다는 속담처럼 그는 대인관계에 있어 그 어떤 대통령보다 대화술이 뛰어났던 것으로 알려졌다. 지방출신의 고졸학력을 가진 그가 세계 지도자들을 만나서도 자신감을 잃지 않고 품위를 지키면서 소신을 펼 수 있었던 배경엔 지독할 정도로 쌓아올린 풍부한 지식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그는 6년간의 감옥이라는 학교에 있을 때에도 독서의 자유와 사색의 즐거움을 잊을 수 없다고 고백했다. 그 자신도 오십 줄에 영어를 독학으로 깨우칠 수 있었던 것은 감옥에 간 덕분이라 말하지 않았던가. 감옥에서 만난 앨빈 토플러의 <제 3의 물결>은 IT 강국이라는 자랑스런 결실로 돌아왔다. 선거 패배이후 망명길에 올랐을 때에도 휴식이나 단절등의 비교적 쉬운 삶을 택하지 않고 미래를 위해 끊임없이 연구하고 준비하는 행보를 보여주었다. 유명한 정치인에게 수여하는 형식적인 명예박사가 아니라 정식논문으로 인정받은 박사학위를 따고 마는 그의 정열을 그저 개인의 욕심으로 치부하기엔 사람된 죄스러움이 먼저 마음을 가로 막는다.


운명의 상련相憐으로

#5. 아버진 만성신부전증으로 15년을 고생하시다 2004년 폐렴 합병증으로 돌아가셨다. 내 어머닌 동창회에서 여흥중 우연히 누군가에게 뒷 발목을 걷어차인 후 치료를 제때 받지 않아 말년에 오른쪽 다리를 절게 되셨다. 아버진 일주일에 세 번 신장투석을 하셨는데 가장 힘든 것은 투석할 때마다 찔러대는 대바늘도 아니고 마음대로 먹지 못하는 음식도 아니고 앞으로 죽을 때까지 죽는 그날까지 투석을 해야 한다는 그 사실 자체라 말씀 하셨다. 투석이 있는 날엔 하루 종일 우울하고 예민하셨다. 어머닌 내 결혼식 때 곱게 차려입고도 실수로 넘어지게 될까봐 어머님이 입장하는 순서에 온 신경을 쏟으셨다.

언젠가 그가 퇴임 후 신부전증으로 일주일에 세 번 투석을 받는 다는 소식을 듣고 같은 병으로 고생하신 아버지가 떠올라 가슴팍이 저며들던 기억이 있다. 서재 뒷켠에 간이 침대를 마련해 놓고 집에서 투석을 받았다하니 그 병의 징후를 너무나도 잘 아는 가족으로서 마음이 편치 않았던 까닭이다. 또한 그는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다리가 불편한 장애인으로서 재임기간 중 지팡이를 짚고 다녔기에 화면을 통해서 그러한 신체적 불편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순간도 많았다고 기억된다. 어머닌 유난히도 그렇게 뒤뚱거리는 걸음걸이를 목격할 땐 한나라의 대통령이라는 사람이 저게 뭐냐며 노골적인 거부감을 드러내곤 하셨는데 아마도 같은 불편을 겪고 있는 장애인으로서 늘 타인의 시선이 야속하고 두려웠던 마음이 그를 향해 투사 된 것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책에는 재임중 다리가 너무 아파 중요한 행사에 혹시 넘어지기라도 할까봐 늘 온 신경을 쓰고는 했다는 고백도, 신장투석도 너무 두렵고 힘들었다는 투정도 있었다. 자신의 신체장애에 대한 솔직한 글을 접할 때 마다 나는 거짓말처럼 같은 병치례를 하셨던 부모님이 자꾸 불쑥 튀어나와 어쩔 수 없이 눈물을 쏟아내곤 했다. 그래서인지, 자꾸 미안하고 더 없이 감사했다. 투석환자이면서도 퇴임 후에 그렇게 전 세계의 초청을 마다 않고 운명하기 두달 전까지 강행군을 해왔다는 것이 국민으로서 감사했고, 그의 불편한 걸음걸이를 국민으로서 창피해 한 마음이 고개들 수 없을 정도로 죄송했다. 어느 날인가 TV에 유난히도 피곤한 기색을 드러내며 심하게 절룩거리는 모습을 보고 그의 건강을 걱정하기 보다는 우리는 언제쯤 외모도 말투도 남부끄럽지 않은 젊은 대통령을 맞이해보나, 하는 식의 하소연을 직장동료와 나눈 기억도 있다. 책을 읽으면서 감옥에선 다리가 아파 제대로 무릎을 펴기도 힘들어서 밥을 먹기도 힘들었다는 고백에 목이 메어 한참을 숨 넘기기 힘들 때도 있었다. 아마도 평생을 사악하고 불순한 것들만 남들보다 몇 백 배로 걸러 오느라 신장이 망가 진 것이고 이미 인격적으로 흠이 없었던 그가 전 세계를 누비며 만인의 존경을 받게 될까봐 그러한 그의 발목을 잡으려고 했던 사람들이 너무 많았기에 그의 다리는 지팡이를 필요로 하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나는 대통령쯤이 되면 훌륭한 전담의사도 있고 집에서 치료를 받으며 일반 환자들보다 비교적 편하게 투병생활을 할 것이라 생각하였는데 실은 대외적으로 대통령이라는 위치와 역할때문에 마음놓고 자신의 고통을 어디다 호소하지도 못하였고 의지만으로는 불가한 신체적 장애까지 정신력으로 극복하며 모든 의전행사를 치루어야 했던 심적인 고통과 고독이 일반인은 상상하지 못할 수준이었던 것이다. 그는 얄궂게도 내 아버지와 똑같이 급작스런 폐렴과 이어지는 패혈증을 극복하지 못하고 운명했기에 끝내 아버지의 마지막을 생각케 하며 나를 복받치게 만들었다. 그런 면에서 더욱 앞서 운명을 선택한 노무현 대통령이 야속했다고 한다면 그가 서운해 할런가.


형님된 심정으로

#6. 사람의 일이란 한치 앞을 알 수 없어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자살했을 때 나는 술집을 운영하고 있었다. 그가 대통령이 될 운명이었다면 그것은 곧 대통령으로 죽을 운명이었다는 말인가. 그날 나는 가게 테라스에 노란 풍선과 검은 리본을 장식했다. 바로 건너편엔 호프집이 오픈을 해 행사도우미들이 반라로 춤을 추고 있었다. 나는 그날 밤 태어나 처음으로 동사무소에 민원 신고를 했다, 그것도 세 번이나. 우리가게 손님들은 노무현이 생전에 좋아하던 노래를 들려주니 약속이나 한 듯이 하나둘씩 울기 시작했다. 생전 목소리로 부르는 '상록수'가 울려 퍼지자 어떤 사람은 테이블에 엎드려 목을 놓아 통곡하며 소리를 질렀다. 그날 가게 매상은 평소의 세배였다. 그의 장례식 때 한명의 노구가 휠체어를 탄 채로 오열하는 모습을 보았다. 아...살면서 나는 저 사람의 저 가식없는 울음을 몇 번이나 더 TV에서 볼 수 있을까. 어쩌면 모두들 예감했을지 모르겠지만 정말로 마지막이 될 것 같아 이번이 마지막이길 감히 바라지도 못했다. 어떤 슬픔은 자신이 겪었어도 여전히 믿겨지지 않을 때가 있다. 나는 그때 사람들의 울음을 보면서 슬픈 건 그의 죽음이 아니라 한때 대통령이었던 사람도 자살하는 나라에서 내일도 우리는 여전히 슬플 것이라는 자신들의 현실이었다는 걸 느꼈다. 그날, 우리는 모처럼 같은 마음으로 슬퍼했고 아무도 서로를 질책하지 않았으며 서로 다른 의견이 없음에 기꺼이 안도하며 가게 문을 닫았다.

만약 그들이 아직 생존해 올 초 있었던 천안함 사건이나 얼마전 시행된 북한의 3대 세습과정, 연이어 터진 연평도 도발을 지켜보았다면 어떤 심정이었을까. 밤새도록 자신의 가슴을 쥐어 뜯으며 세계적인 시각으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구상하는 그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올들어 심심찮게 김대중 전 대통령의 유산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취지의 글들을 접할 때가 많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대표적인 사설로는 햇볕정책으로 인해 김정일 정권의 수명이 연장되었고 핵무기와 장거리 미사일을 개발하는데 도움을 초래했다는 강도 높은 비난도 있었다. 천안함 사태에 대한 불신 역시 그가 남긴 친북주의에 기인한다는 결론도 많았다. 나는 정치에 관심이 있는 유권자가 아니었기에 이러한 정치적인 주장들에는 정답도 오답도 없는 당시 상황만 비일비재하다는 생각을 버리지 않아왔다. 그런데 이번 자서전을 읽고 그의 대북정책에 대한 평가와는 상관없이 한 가지 분명하게 깨달은 점이 있다. 그것은 대화를 누가 하느냐, 즉 일생 단 한 번의 만남으로 이루어진 가장 짧은 대화라 할지라도 어떤 사람과 하느냐에 따라 그 결과는 천차만별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대표적으로 그가 6.15 공동 선언 당시 김정일 위원장을 만나 대화를 끌어나간 것을 보면 어렵지 않게 역시 중요한 것은 '사람'이었구나 하는 걸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나는 당시 2000년 TV에서 두 정상이 손을 붙들고 감격에 웃음짓던 장면을 또렷이 기억한다. 당장 통일이라도 눈앞에 다가온 듯했던 흥분에 나도 모르게 소름끼치던 순간...화면을 통해 전해지던 김정일의 화통한 목소리와 웃음소리, 북한 주민들의 열렬한 환호...그해 여름을 앞두고 우린 분명 IMF 를 단기간에 극복했다는 자부심과 벤쳐기업들의 신화와 월드컵을 앞둔 시점에서 '다시 한번 해보자'는 열정만은 최고치였던 멋진 추억이 있었다. 책에서는 그가 햇볕정책의 정통성과 철학적 배경, 나름의 소신을 가지고 전 세계 정상들을 만나며 자신 있게 그들을 설득하는 장면들이 잇달아 소개된다. 김정일 위원장도 다른 사람은 몰라도 김대중을 존경해 왔다고 마음 한켠으로부터 인간된 정리를 강하게 느꼈던 것으로 보인다. 꼭 연장자여서가 아니라 그때는 김정일도 한국이 아닌 외국인의 시각으로서 그의 인품과 인생에 동지적 연민을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김정일이 대화중 왜 '우리'끼리 대화해서 해결할 생각을 하지 않고 자꾸 '다른' 나라를 끌어들여 자주적인 통일을 훼방놓느냐는 말이 무척이나 인상깊었다. 따지고 보면 틀린 말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러모로 국제적인 시각이 부족했던 그에게 세계정세와 흐름을 알려주고 가르친다는 우월감보다는 자존심 상하지 않게 호소하며 김정일의 입장에서 어려운 점을 진심으로 이해하려 했던 그의 노력이 결국 그의 마음을 열었던 것이라 생각한다. 남북정상회담이 끝나고 세계언론은 김정일이 '대화할 만한 사람'이라는 평가를 내렸다. 그전까지는 전혀 대화가 불가능하다고 판단된 김정일이 세계에 당당히 대화가 가능한 지도자로 인식된 것은 바로 그가 대화한 상대에서 연유를 찾아야 할 것이다. 김정일은 김대중과 대화했기에 대화가능한 인물이 된 것이 아니었을까. 정말이지 아버지나 큰 형된 심정으로 같은 민족을 염려한다는 느낌을 받았던 것이라 믿는다. 나는 비록 지면이지만 다시보는 남북 정상회담의 일련과정을 지켜보면서 김정일 위원장의 열린 마음을 느낄 수 있었고 그러한 노력은 아무래도 정작 당사자였기에 객관적이기 힘든 우리가 아닌, 세계가 더 먼저 그리고 더 많이 더 오래 이해했다는 생각이다. 혼자 이리 뛰고 저리 뛰는 그의 행보가 단지 노벨평화상을 수상하기 위한 무리한 전략이었다고는 그때도 지금도 전혀 느끼지 않음이다. 세계가 인정한 것은 그의 민주화투쟁, 통일정책과 세계평화에 드러난 공적으로서의 결과와 기여도가 아니라 바로 변함없이 '자기진정성'을 버리지 않은 끈질긴 고집이 아니었을까. 나는 그가 김정일 뿐 아니라 각국의 정상들과 대화를 하는 것을 보고도 새삼 '만남'과 '대화'라는 것의 중요성을 뼈저리게 통감하고는 했다. 그는 애정을 가지고 추진한 정상과의 회담이 결렬되거나 국제 정세에 밀려 취소되고 난 후 항시 가정법을 사용해 '만일 그때 김정일이 클린턴을 만났더라면', '야당총재가 김정일을 만났더라면' 하는 식으로 훗날 역사의 전환점에 방점을 찍지 못한 그 순간을 땅을 치며 애통해했다. 단 한 번이라도 단 한 명이라도 단 한 나라라도 그 하나의 절대성과 인연은 나라와 나라사이 역사를 전환하는 대단한 계기가 되는 것이었고 그러했기에 그 당사자가 어떠한 사람이었는가는 결국 사안의 성공과 실패를 가늠하는 절대적 요인이라는 다소 운명적인 생각을 하게 되었다. 정상들은 왜 그를 존경했을까. 왜 다른 사람이 아닌 그와 대화하고 싶어 했을까.


고통이 소통으로

#7. 얼마전 평소 호감을 가졌던 한 유명인사가 뜻밖에 자살을 했다. 그는 자신이 죽어야 할 이유를 신체적 고통이라 유언했다. 연예인, 일반인, 청소년 할 것 없이 자살률이 증가하고 있다는 통계적 수치를 보면서 '그렇게 죽어야 할 이유가 많은 것일까' 다시금 생각했다. 누가 보아도 죽을 만큼 죽고 싶은 순간이 많았을 것으로 보이는 한사람이 떠올랐다. 노무현 대통령도 자살을 선택했는데 그렇다면 김대중 대통령은 그보다 죽을 이유가 적었던 것일까. 2010년 현재 어느 기관에서 우리시대 위대한 영웅을 조사하였더니 1위는 노무현, 2위는 김대중이었다. 만약 자살을 선택하지 않았어도 노무현이 1위가 되었을까. 나는 다분히 자살 프리미엄 효과의 수혜를 받은 1위라 생각하기에 어쩐지 순위가 뒤바뀌었으면 싶었다. 죽고싶어도 살아낸 사람이 영웅이 되는 세상이면 좋겠다 싶었다. 죽어야 마땅할 이유로 친다면 그보다 더 한 사람도 얼마든지 살고 있는 세상이고, 죽을 만큼의 고통으로 견주어 본다면 마찬가지로 삶보다는 죽음을 선택할 사람이 적지 않을 거라는 생각을 한다. 하지만 인간은 이유나 고통 때문에 살고 죽는 것이 아니고 스스로의 자발적 의지 때문에 살거나 죽는 것이 아닐까. 자살을 선택한 사람들도 나름대로 공통의 의지는 함의하고 있었음이다. 문제는 의지의 향방이었던 것이다. 죽도록 죽고 싶은 의지가 죽도록 살고 싶은 의지로 선회하게 하는 힘은 무엇일까.

우리 사회는 대통령을 비롯한 이상적 롤 모델이나 유명스타에 대해선 유독 절대성의 잣대를 들이대며 조그만 실수나 잘못, 약점과 단점을 발견하면 굉장히 너그럽지 못한 국민적 성향이 있다. 최근 연예인과 유명인사들의 잇다른 자살을 겪으면서 정신과 의사들은 교과서적 얘기지만 일반인에게 많이 알려진 롤 모델일 경우 스스로 ‘내적 힘’(Self-Strength)을 길러야 한다고 조언한다. 이 힘은 절대 한 번에 얻어지는 것이 아니며 스스로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힘들 때 힘들다고 털어놓을 수 있는 용기를 가질 때, 그리고 그 과정을 통해 심리적 어려움을 극복하는 ‘성공’의 경험을 했을 때 비로소 생기는 결과물이라 말하고 있다. 그런데 이때 가장 중요한 것은 이미 사회적으로 공감을 획득한 그들이기에 바로 그들의 입장에서 고통을 들어주는 ‘지지그룹’의 형성이라고 한다.

그렇게 본다면 누구보다 '내적 힘'이 강했던 그는 '지지그룹'이 결코 영원할 수 없는 정치인의 태생적 한계를 어떻게 극복한 것일까. 돌이켜보면 국민들 중에서도 오랜 세월 그의 정책이나 정치노선은 지지하지 않았더라도 그의 인격에 대한 지지만은 중단된 적이 없지 않았나 생각된다. 이것은 여러 차례 죽음의 고비를 넘기면서도 그가 끝까지 국민을 믿었기 때문에 역으로 얻어낸 고귀한 '지지'였다는 점에서 결국 그 지지의 모태 역시 그것을 끌어낸 당사자에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본보기라 할 것이다. 그에게 표면적인 '지지그룹'도 노동자에서부터 지도자까지 속 깊었을 뿐 아니라 안으로는 이희호 여사를 비롯한 가족에서부터 여성, 지역사회, 인권단체, 지식인, 종교인, 정치인까지 폭넓었기에 수직수평의 꽤 탄탄한 스펙트럼을 그 기반으로 하고 있었던 것 같다. 이는 납치, 망명, 연금등의 수차례 억압과 연이은 선거패배에도 굴하지 않고 자신의 고통을 견딜 수 있는 심리적 소통장치가 되었던 것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그 또한 지지그룹에게 정치활동 외에도 학업이 되었건 연구가 되었건 끊임없이 자신의 주장을 내보임으로써 어쩌면 자신의 두려움, 나약함을 더욱 극복하는 계기가 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했기에 마땅히 죽고 싶었을 많은 순간에도 죽음을 향한 의지를 선회할 수 있지 않았을까. 용기를 최대의 미덕으로 알고 진실에 근거한 웅변을 무기로 삼아 항상 설득할 자신이 있었던 것이다.

어찌 보면 그가 실패할수록 그를 지지하는 그룹은 증가했고 그룹이 증가할수록 그는 실패를 실패로 여기지 않을 수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한 그도 92년 선거 패배후엔 용공조작에 좌우되는 국민을 원망하며 한없이 실망했다고 고백한 적이 있지 않은가. 그에게는 병실이라는 위선적 감옥과 독방이라는 고독의 감옥과 함께 국민이라는 양심의 감옥이 있었다. 그는 끝내 국민을 버리지 않았고 훗날 대통력 수칙엔 '국민의 양심과 애국심을 믿자'고 적을 수 있었다. 그가 빛을 발한 자기 진정성은 혼자만의 종교적 수행이 아닌 국민이라는 양심과 역사라는 진실을 향해 있었고 포기하지 않게 해준 많은 사람들이 있었기에 새삼 더 크고 위대해 보였던 것은 아닐지.


국민의 이름으로

그는 '역사를 신앙으로 섬기고 정의를 믿었으며 진실이 역사가 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 추운 겨울동안에도 죽지 않는 인동(忍冬)의 세월을 이기고 꽃을 피웠다. 한참 유세중에 케네디의 피격소식을 듣고 그를 만나 본 적은 없지만 그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억울하다 했던가. 나는 무엇을 견디었던가. 돌이켜보니 나는 김대중이라는 역사를 견디기는 커녕 늘 외면하려고만 하였던가. 그를 제대로 알지 못했다는 것은 곧 우리나라 역사를 제대로 알지 못했다는 뜻과 같았으니, 그것은 제대로 된 국민이 아니었음에 다름 아니다. 하지만 오늘 그가 없음이 억울하고 원통한 내게도 어제 그럴만한 이유는 있었다. 그러했기에 대통령과 국민으로 헤어지고 이렇게 저자와 독자로 만나게 된 것이 아니겠는가. 만나자 헤어지는 내 오늘에 이제라도 뒤늦은 국민의 이름을 갖고 싶다. 그는 떠났지만 나는 아직 내 나라를 떠나지 않았고 그곳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나는 그를 믿지 않았지만 그가 믿었던 국민이고 싶기 때문이다.

정치를 떠나서도 내 삶의 '자기진정성'에 대한 진지한 질문과 대답을 떠올리게 하는 장중한 독서였다. 역사와 국민앞에 그리고 자신에게 진실하고자 했던 그는 내게 붉은 진정의 꽃을 선사했다. 우리네 삶이 진실을 우선가치로 삼기는 쉬워도 생활에서조차 우선순위로 두기는 얼마나 어려운 현실인가. 어쩌면 정치인으로서 유일하게 사회나 역사가 아닌 도덕교과서에 등장할지 모를 일이며 그 또한 마지막이 되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다. 더불어 이제와 생각하니 누가 보면 창피 할 정도로 눈물을 쏟아낸 그 마음은 그동안의 내 인생에 대한 위로와 격려였던 것 같다. 나는 김대중이라는 한국의 제 15대 대통령의 인생과 업적을 돌아 본 것이 아니라 그의 진정한 손에 이끌려 우리가 살아낸 지난 시간과 공간속에서 나에게 일어난 일들을 촘촘히 들여다 본 것이었다. 주마등처럼 스치고 지나가는 모든 이야기에 내 인생과 내 가족이 거기 있었다. 그 시간과 공간은 한국의 역사이었고 결국 우리들 인생과 가족의 이야기가 모여 국민이라는 역사가 되는 것이었다.

이제, 책상위 문신처럼 걸려있는 내 부모님의 사진을 올려다 본다. 그들도 누구보다 나라를 사랑하신 애국자이었다. 반공과 독재와 지역감정의 수혜자이자 피해자였던 그들, 나는 이제야 국민이었던 그들에게 인사한다. 부모님의 빈자리 만큼이나 그의 빈자리가 그리웁다. 무엇을 해도 무조건 내편이었던 부모님처럼 어떤 나랏일도 가장 뜨거울 그가 보고 싶다. 잠 못드는 그 새벽 어머니의 잔소리처럼 큰일 앞둔 그의 한마디를 듣고 싶다. 넘어지고 그 다음이 더 두려운 절망의 아침에도 우리는 너를 믿어왔다 그 눈빛이 부시고 시리웁다. 가을 코스모스 벌판을 뒤로 그의 웃는 얼굴이 사무친다. 그래도 눈물이 난다. 어디선가 캠브리지의 짝사랑 로빈이 날아든다. 로빈은 내게 말한다. 가슴에 새긴 붉은 털이 우리 모두의 진정이라고. 당신의 가슴에도 뜨거운 깃털 하나 오롯이 자라나 그 붉은 이름으로 국민이라 새겨졌다고.

나는 국민이다. 역사는 계속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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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지마할 2010-11-25 23: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한사람 2010-12-01 19:36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Bopper 2010-11-30 23: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8월을 뜨겁게 달구었던 자서전의 열기가 조금은 가라앉은 지금 저자의 뜨거운 가슴을 느끼며
한여름에 마주했던 그 시간이 떠오르네요! 어쩌면 정치적으로 감성적으로 반대편에 위치 했기 때문에
더욱 입체적인 조명이 가능했을 거란 생각이 듭니다. 후광선생도 독서는 반드시 창조적인 재해석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는데 님의 독서가 그러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책을 읽고 무엇인가 끄적여야 겠다는 생각이 너무많아 결국 한자도 쓰지 못했는데 님의 글을 읽으니
다시한번 독서의 기억을 더듬어야 할것 같습니다.

책과 사유에 관한 님의 열정과 창조적 해석에 경의를 표합니다.
그리고 그가 그토록 사랑하고 존경했던 국민이 되심을 축하합니다.


한사람 2010-12-01 19:38   좋아요 0 | URL

정성스런 덧글, 감사합니다
맨뒤에 두분의 사진보고 많이 울었더랬습니다^^*

김정일은, 그렇게 보아주었더니 이렇게 등을 치네요...
외람된 것일지 모르나 차라리 이런 꼴 안보고 가시는게 낫지 않았나하는 생각도 듭니다..

비로그인 2012-05-21 16: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살 프리미엄이라는 표현을 어디서 봤나 했는데
이 리뷰에서 본 거였네요
이런 표현 생각해내시는 센스에 감탄합니다

'죽어야 마땅할 이유로 친다면 그보다 더 한 사람도 얼마든지 살고 있는 세상이고..'
'자살을 선택하지 않았어도 노무현이 1위가 되었을까. 다분히 자살 프리미엄 효과의 수혜를 받은 1위'

네. 그렇죠. 다 옳은 말씀이십니다.
 
나는 왜 쓰는가 - 조지 오웰 에세이
조지 오웰 지음, 이한중 옮김 / 한겨레출판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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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라는 불행

사실 이 책은 많이 힘겨웠다. 서른 편 가까운 에세이라고는 하지만 이십년 넘는 작가생활 전반에 걸친 자서전의 느낌이 나기 때문이다. 내가 이 책에 강렬히 끌렸던 이유는 아마도 '그는 왜 쓰는 지'를 통해 '나는 왜 쓰는 지'를 한번 정리해보고 싶은 생각에서였다.(많은 분들이 나와 같은 이유가 아니었을 지) 그런데 책을 덮고 난 지금 오히려 정리가 안되는 심정이 퍽이나 당혹스럽다. 결코 한눈에 요약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던 것이다. 나는 비록 동네수준의 서평자지만 글(서평)을 쓰면서도 왜 쓰는 지를 한 번도 진지하게 고민해보지 않았다. 그냥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되었다가 맞을 것이다. 심지어는 서평도 (그가 말하는)글인가? 하는 오만한 생각도 했었다. 물론, 이 질문도 그동안의 서평생활(?)을 통해 나름의 성취와 발전이 있었기에 도대체 '나는 왜 서평을 쓰는가'에 이제야 봉착하게 된 새로운 난국으로서의 자기검열의 한 단계임을 모르지 않는다. 즉, 왜 처음에 그러한 생각을 하게 되었는 지가 아니라 하다 보니 왜 계속 그러는 것 같으냐에 대한 사건이 아닌 현상에 대한 질문인 것이다. 자기가 하고 있는 것이니 그 이유를 말하기 쉽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이 질문은 글을 쓰지 않는 사람들에게 '나는 왜 사는지' 적어보라고 하는 것과 같은 문제였다. 이는 결국 '그동안 왜 살았는 지'와 '앞으로 어떻게 살 지'에 관한 질문과 무관하지 않지 않은가.

대부분 그림을 그리거나 노래를 하는 사람들에게 왜 그리는 지, 왜 노래하는 지를 물어보면 당연히 그림을 잘 그렸고 노래를 잘했을 거라는 전제를 공유한 상태에서 답을 바라게 된다. 답을 들어보지 않아도 우리는 대부분 자신의 재능을 발견했기에 예술을 향한 욕구때문이었을 것이라 예상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사실은 의심없이 순차적으로 당연해 보인다.(노래와 그림에 소질도 없으면서 노래하고 그림그리는 사람은 글에 소질도 없으면서 글 쓰는 사람보다 적지 않을까) 예술가로서 성공여부를 떠나 타고난 재능과 필연적인 욕구는 바로 자신이 노래하고 그림을 그리는 가장 일차적인 요인이 될 지어다. 그런데 글쓰는 사람은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생각이다. 당신은 왜 쓰는지 물어보면 재능과 욕구라는 답으로는 어쩐지 부족한 느낌이다. 질문을 던진 자나 대답하는 자 모두 무언가 진짜 이유가 있을 것 같다는 생각...무언가 더 구체적이고 더 감동적인 사연이 있을 것 같은...그것은 아마도 글을 쓴다는 것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 결코 근사하거나 편하고 즐거운 방법이 아님을 익히 알고 있는 보통사람들의 궁금증 일 것이다. 확실히 글을 안 쓰는 것은 글을 쓰는 것보다 편하니 말이다. 그런데 그들은 안 쓰는게 더 불편해서 덜 불편한 쪽을 택하는 사람들 아닐까.

노래를 잘하고 그림을 잘 그리는 것이 재능이듯 글을 잘 쓰는 것도 분명 재능인데 사람들은 노래나 그림의 재능보다 글의 재능을 가진 자가 무언가 생각이 올바를 것이라 여기고 거짓이 덜할 것이라 착각하는 경향이 있다. 이는 글이 곧 그의 생각이라 믿고 글로 표현된 생각은 적어도 작가의 순연한 진심이라 믿고 싶은 까닭이다. 노래하는 자와 그림을 그리는 자는 뒤에서 욕을 하며 거짓을 일삼아도 작품이 훌륭하면 감동을 줄 수 있다고 여기지만 글쓰는 자는 자신의 마음을 속여 가며 진실을 외면해선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건 용서받지 못할 배신이자 죄악인 것이다. 작가들에게 요구하는 이 시대의 책무는 언제나 동시대의 화가와 가수에게보다 높고 막중했다. 일상에선 웃고 술마시고 춤추다가도 노래를 할 땐 세상 모든 이별을 다 겪어낸 것처럼 노래하는 가수는 이해하지만 해외의 트렌드를 빌려 표절의 수위를 넘나드는 작곡가도 이해해주려 하지만 남의 생각을 자신의 것처럼 꾸미거나 자신의 견해도 아니면서 거짓으로 결론을 주장하는 작가들에겐 절대 용서하고 싶지 않음이다. 가수와 화가는 몇 번의 결혼과 이혼, 재혼도 사생활이라는 똘레랑스를 우아하게 적용해주고 싶지만 몇해 전에 죽은 아내를 그리는 절절한 시로 유명세를 타 놓고선 돈 좀 벌었다고 바로 재혼하는 시인은 온 마음으로 질책한다. 등따숩고 배부르면 글이 안나오느니 우리는 광고에 출연해 유명해진 작가에겐 더 이상의 피같은 소설을 기대하지 않는다. 상처한 시인은 재혼하면 안되고 가난했던 소설가는 부자가 되면 안된다. 애절한 시와 고통스런 소설에의 감동이 줄어들 것을 염려한 독자된 이기심 때문이기도 하고 실제로 작가들의 부와 작품에 대한 감동은 반비례하는 경향이 있다. 문학은 상처와 슬픔의 축적이지 영광과 기쁨의 축적은 아니기 때문이다. 위선과 추악한 욕심과 세상 모든 거짓을 노래하고 그림그리는 예술가가 있듯 작가도 자신의 재능인 글을 가지고 위선하고 거짓하면 안되는 일일까. 절대, 안된다. 작가는 예술과 윤리의 영역이 분리되도록 허락된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정치는? 경제는? 과학과 사회는? 작가는 윤리든 정치든 경제든 과학이든 사회든 그것들을 글쓰는 예술로 말해야 하는 사람들이다. 그것도 아주 진심으로 진실되게.

그래서 나는 문학하는 사람들을 싫어했고 문학을 하고자 하지 않았다. 작가들이란 인생에 패배해놓고선 어떻게든 문학으로 이것도 승리라 말하는 사람들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져놓고 이겼다 말하는 사람들이라 생각했다. 그래놓고선 자신들은 세상에서 굉장히도 진실한 사람들이라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적어도 글을 쓰지 않는 사람들에 비해서) 현실에선 거짓을 일삼아 놓고선 글로는 거짓했음을 고백하여 마치 진실한 삶을 추구해온 것처럼 자신을 미화하는 습관도 있다. 평일 내내 욕하다가 주일에 교회가서 참회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진실해야 하기 때문인 것이지 진실한 것과는 다른 문제인데 작가에 대한 기대치를 곧 자신이 추구하는 인격치와 동일시하여 고매한 인격자로 살아가는 척을 하는 작가들도 있다는 이야기다. 살면서 진실만을 추구하는 것이 얼마나 웃기고 힘든 일인지 알게 될수록 작가를 희망할 자신이 없었다. 재능에 대한 열등감보다는 작가로서의 책임을 짊어지고 싶지 않았고 차라리 내 돈내고 산 책 한권과 그 작가를 비판하는 쪽이 더 속편한 입장이었다. 그래서 더더욱 작품으로서의 성공과 인격으로서의 성공이 합체된 작가는 언제나 경외감의 대상이었다. 그는 작가라는 예술을 했다기 보다 인간이라는 수행을 한 것이기 때문일 터이다. 하지만 문학하는 사람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하여 진실하고자하는 노력을 문학하지 않는 사람들 보다 많이 한다는 점에 있어서 다른 예술분야보다 더 인정받아야 마땅하다 생각한다.

조지 오웰은 바로 이 두 가지를 누구보다도 동일시한 작가로서 그 최대치에 근접하려 노력한 사람이라는 생각이다. 본인도 말했듯이 위선을 발견해 내는 재능을 일찌감치 타고난 덕에 일상에서 학교에서 직장에서 자신이 마주한 세상의 온갖 위선이라 하면 이미 오래전 죽은 작가라 할 지라도 발견할 수밖에 없었고 알게 된 이상 쓰지 않을 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위선에 둔감해지는 것이 살아가는 방편이 됨을 모르지 않는 나이기에 그의 인생은 누구보다 피곤하고 외로왔을 것이라는 연민이 떠나질 않았다. 어떤 작가가 안 피곤하고 안 외로울까마는 그의 글은 적어도 위선에 대해선 연구와 성과의 깊이가 상당히 전문적이다. 환자입장에서 밝혀내는 논리가 간편한 X레이 수준은 아닌 것. 각 부위별 CT단층 촬영및 MRI촬영이 반복되는 정밀검사의 영역인 것이다. 나도 대충 X레이 사진까지는 그동안 들어온 지식으로 이해, 판독이 가능하다 할 것이다. 하지만 정밀검사는 설명을 듣고 있으면서도 이해하는데 시간이 좀 걸린다. 아니 시간을 들여 꼼꼼히 확인하고 싶다. 나는 그의 소설을 한편도 읽지 않았던 것이 살면서 한번도 부끄러웠던 적은 없었다. 그런데 소설도 안 읽어 놓고 에세이집을 가지고 이런 평가를 하는 것은 상당히 부끄럽다. 고개를 들 수 없지만 어쩌겠는가. 나는 일개 서평자이고 서평자를 택한 나로선 작가와 작품을 말할 수 있는 권리에 편승한 것이니 다만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온갖 미사여구로 감동의 문장을 남발하는 글만은 쓰지 않겠다는 초보수준의 다짐을 앞세우기로 하겠다.

양심과 죄의식의 축적

아마도 책을 읽으며 근자에 이렇게 밑줄을 그어본 적이 있었던가 싶다. 그만큼 한줄 한줄이 내 가슴을 찌르기도 했고 머리가 번쩍하고 정신이 들기도 했다. 우선 그의 문장은 절대 감성과 이성 그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아 자로잰 듯 공평한 느낌이다. 물론 이 느낌은 굳이 분류하자면 이성에 가깝기는 하다. 저널리스트로서의 날카롭고 지적인 면모가 그의 특성이자 매력이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문학이 '상처와 슬픔'의 축적이라 한다면(어디서 많이 들어본 말이라 찾아보니 문학이 슬픔의 축적이라 한 사람은 최승자 시인이다) 조지 오웰의 글은 '양심과 죄의식'의 축적이라 느껴진다. 그런데 이 축적된 글을 마주한 나로서는 그의 양심과 죄의식이 억울하게만 느껴진다. 즉, 그다지 작가로서 혹은 선진국이라는 영국시민으로서 크게 잘못하며 살아온 것 같지 않기 때문이다. 그 시대의 독일이나 일본 작가였다면 모를까 하는 단순한 생각이 내 수준이었던 것이다. 우리시대에도 그랬고 작가들은 유난히도 폐병으로 생을 마감하는 경우가 많은데 숨쉬기 힘들다는 것은 정신적으로도 많은 것을 상징한다고 생각한다. 제대로 숨을 쉬지 못하였기 때문에 숨쉬기 힘든 병에 걸렸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유전 및 환경적 요인이나 생활수준, 작가의 생활방식등이 폐병과 쉽게 연결되곤 하지만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은 결국 자신을 옥죄는 무엇이 병을 초래하는 것이 아닐까. 조지 오웰의 글은 거의 전편이 자신을 옥죄던 세상의 무엇인가에 저항하는 방편으로 느껴진다. 그 거대한 세상의 중심엔 영국이라는 위선과 전쟁이라는 과실과 작가라는 책임이 사이좋게 연대를 이루고 있었다.

1. 영국에서 작가하기

스물아홉편의 글 중에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는 세편의 글에 공통점이 있다. 바로 자신이 태어난 조국 영국이라는 나라에 대한 신랄한 분석과 비난이다. 신사의 나라 영국이 물론 미국이나 독일 심지어는 일본보다도 위선적이라는 생각을 안해본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렇게 뼛속까지 자국의 국체(國體)를 꼬집는 글은 만나보지 못했던 터라 같은 시기 동양의 일본으로부터 그가 죄책감을 느꼈다는 식민지처지였던 우리로선 오히려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영국, 당신의 영국>, <민족주의 비망록>, <정말, 정말 좋았지> 이 세편을 읽다보면 영국은 참 형편없는 나라였구나라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는데 특히 오웰이 여덟살 때부터 다녔다는 사립학교 시절의 경험을 그려낸 <정말, 정말 좋았지>는 한때 아이를 데리고 영국으로 가서 교육을 시킬까도 진지하게 고민했던 학부모였기에 내 자신에게 화가 나서 미치는 줄 알았다. 이 글은 오웰이 어떻게 해서 최초 죄의식을 가지게 되었고 그것이 누구를 향한 것이었는지 깨닫게 되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쓰여진 연도로 보면 그의 작가생활 후반부에(1947) 속하지만 내용상(1911-1916) 전기로 본다면 맨 앞부분에 위치해야 할 글이다. 이 글을 읽고 비로소 오웰의 대책없는 죄의식의 뿌리를 찾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귀족이나 백만장자, 혹은 중산층 이상의 자녀들과 같이 학교생활을 하면서 철저한 속물근성의 교장과 그의 부인에게 생의 패배감을 부당하게 세뇌당하게 되는데 겉으로는 고마워해야 하지만 오웰의 마음에 싹튼 증오는 평생을 떨쳐버릴 수 없는 죄의식으로 발전한다. 결국 그 시기에 지식인이 얼마나 지적으로 속물적일 수 있는지 몸소 배우고 체험한 오웰은 영국 상류층과 중산층 특유의 결함을 이 기숙학교에서의 뿌리깊고도 잘못된 관행에서 시작한다고 결론짓는다. 이 글은 자신의 어린 시절 내면의 상처를 가장 감성적으로 표현했지만 또 가장 지적으로 길게 반항한 글이었다. 옳은 것과 그른 것,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 강자와 약자, 가진 자와 못가진 자에 대한 기준이 늘 일치하지 않는 다는 것으로부터 자신도 죄를 지을 수 있음을, 살아남는 생존본능도 범죄가 될 수 있음을 깨닫는다. 그러니까 그는 자의식이 형성될 시기부터 죄의식 때문에 자신을 떳떳한 사람으로 성공할 사람으로 생각지 않은 것이다. 비록 실패 할 것이 뻔하고 옳은 일을 하지 않는 자신이지만 그 안에서 최선을 다하고 행복하고 싶었기 때문에 나름의 도덕과 양심을 지키기 위해 글을 쓴 것이었다.

그가 애국과 민족, 그리고 영국인의 국민성에 대해 이야기 할 때는 언제나 히틀러를 말할 때보다 더 날카롭다. 영국을 대표하는 작가로서 그냥 넘어갈 수 있는 문제는 아니라 생각한 듯하다. 영국국민은 누구보다도 애국적인데 이 심성을 예술적 재능은 없으면서 꽃에는 열렬히 반응하는 이중적태도로 비유해 설명한다. 전쟁과 군국주의를 가장 혐오하는 것 같아도 실은 한때 지구상의 1/4의 영토를 점령한 식민지 지배국가임을 강조한다. 하지만 이렇게 위선이 가장 강력한 안전장치가 되어온 영국에서 문학을 대표하는 세익스피어를 비난하는 톨스토이를 반박하는 그 역시도 객관을 앞세운 애국자였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영국과 영국인은 사악하지만 또 완전히 사악하지만은 않아서 더 사악하다는 결론을 내리며 그러한 영국에서 자라온 자신 역시 좌파 지식인과 작가를 분리 할 수 없듯이 자신의 글에 정치성이 결여될 수 없음을 불가분의 모순처럼 역설하고 있다.

작가가 정치와 관련있는 글을 어떻게 쓰는지에 관한 본보기는 <민족주의 비망록>이 대변해주는데 여기서 그는 애국주의와 민족주의의 다름을, 관념의 실체가 아닌 부정적인 대상을 지칭하는 습성으로서의 민족주의에 대한 개념을 설파하며 영국이 이 개념을 어떻게 이용해왔는지 차근차근 짚어본다. 영국은 공산주의든 민주주의든 이 민족주의적 충심을 개입시켜 그때그때 애국을 발휘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오웰은 민족주의자가 자기편이 저지른 잔학행위를 반대하지 않으며 뻔히 일어난 객관적 사실을 무시할 수 있으며 사실이 알려져 괴로운 것 보다는 모름으로써 인정하지 않는 편을 택한다는 것이다. 인종차별이나 평화주의, 종교분쟁, 공산주의 까지도 민족주의가 전이된 것이며 이것은 모두 도덕을 앞서는 기질 혹은 습성이라는 것이다. 오웰은 이 습성을 적나라하게 꼬집으면서도 지식인으로서의 작가는 사실을 그대로 받아 들이는 태도를 가지고 정치행동 이전에 자신의 사고과정을 오염시키지 말라고 충고한다. 그러한 도덕적 노력이야 말로 정치에 개입할 수밖에 없는 작가에게 가장 필요한 소양이고 오웰은 이러한 글을 쓰면서 오히려 흔들릴수 있었던 자신의 의지를 다지는 것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2. 전쟁에도 작가하기

오웰은 47세라는 길지 않은 생애에 이십여 년의 작가생활을 하면서 시대가 가진 운명인 전쟁이라는 굴레를 벗어나 본 적이 없었다. 그가 그 어렵다는 사립학교를 졸업하고 어떤 반감으로 '인도 제국경찰'에 지원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대학이라는 성공을 향하지 않고 인도라는 동양을 택한 것은 일종의 양심돌파구였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막연한 양심의 가책을 해결하려다 되려 더 지독하고 구체적인 양심만 짊어지고 온 경우가 된 것은 아니었을까. 작가활동을 하고 있던 중에도 파시즘에 맞서기 위해 달려간 스페인 전장은 마찬가지로 둥그런 양심을 보상받기 보다는 더욱 전체주의에 맞서는 네모진 양심을 길러낸 것은 아니었을까. 스페인 내전 후에도 그는 계속되는 경제불안과 2차 대전의 발발로 정신적인 무력감과 육체적인 병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경향을 보인다. 이처럼 양심을 털어내려 할수록 얄궂게도 더욱 그 배로 들러 붙는 것, 오웰에게 있어 양심은 혹 떼려다 더 붙이는 결과가 반복됨을 알 수 있는데 이것은 결국 작가된 운명으로 벗어날 수 없는 시지프스의 형벌과도 같지 않았을까 싶다.

오웰은 인도경찰 근무시 바로 앞에 걸어가는 사형수의 갈색등을 보고 양팔이 결박된 그 와중에도 물웅덩이를 피하느라 살짝 옆으로 비껴가는 그를 보고 건강하고 의식있는 한 사람의 목숨줄을 끊어버리는 일의 부당함에 새삼 전율한다. 제국주의자를 증오하는 인도사람들의 눈빛에 못 이겨 마을에 뛰어든 코끼리를 어쩔 수 없이 죽여버린 스스로에 대한 자괴감에 몸부린 친다. 그는 인도경찰 시절 백인의 동양지배가 부질없음을 폭력을 휘두르는 건 백인이지만 결국 폭력적이미지에 걸맞게 예상하는 대로 행동해야만 하는 가식적 꼭두각시에 불과하다는 깨우침을 얻게 된다. 스페인 내전에 대한 진실보도를 하지 않는 자국에 대해 파시스트 선전에 이용되지 않기를 바라는 지식인들의 속내를 비난하며 영국은 진상보도를 하지 않았기에 파시즘을 제대로 알 기회를 부여받지 못했으며 결국 자신도 그 때문에 내전에서 파시스트를 반대하는 적들에게 총상을 입었다는 논리를 끌어 낸다. 파시즘에 맞서 민주주의를 수호하는 명분으로 참가했던 혁명군 전사로서의 기억이라곤 동물적 허기와 온갖 악취, 수면부족, 얼음과 찬바람이 전부라고 말한다. 파시스트를 쏘러간 오웰은 눈앞에서 바지를 추스르는 인간을 보고 자신과 다를 바 없는 그를 쏘지 못했으며 남루하다는 이유로 도둑으로 몰린 인도병의 눈빛도 쉽게 잊지 못한다. 위병소에서 자신의 손을 잡아준 유럽노동계층 이탈리아 민병대원의 인간다움 삶을 성취하고자 했던 온기도 잊지 못한다.

전쟁이 반복되는 시대에 그는 인간다운 삶과 진실로서의 역사를 증언하고 싶었을 것이다. 이것은 희망이 아닌 절망을 말함으로써 희망을 찾으려는 욕구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변절자로서의 지식인과 역사를 진실로 기록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절망을 이겨보려 글을 써온 것은 아닐까. 그 자신도 변절하지 않기 위해 진실로서의 역사만을 말하기 위해 그 시대의 정치와 과학과 예술과 전쟁을 기록했던 것은 아닐까. 그리고 그것은 끝까지 자신의 믿음을 포기하지 않는 결과로서 작가의 삶을 살게 한 것은 아닐까.

3. 글쓰며 작가하기

오웰은 서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한 적도 있으며 방송국에서 라디오 프로듀서로도 활동한 경력이 있다. 문학잡지의 편집장을 맡으면서 오랜 세월 서평을 써 온 것으로 보아 언론인이나 자신을 비롯해 주변에 책 좀 읽고 글 좀 쓰는 이른바 지식인들에 대한 견해를 표명할 기회가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아니 늘 세상을 향해 떠들고 소리치는 사람들의 행태와 심리에 대해 불만이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작가된 양심이라는 것은 과거를 밝히는 의미도 있지만 애초부터 잘못도 하지 않은 무고한 사람들에게 지워지는 향후를 대비한 우리시대 일종의 보험이라는 생각이 드는 건 왜 일까. 흡사 선생님이라는 직업에 가해지는 사회적 역할과도 비슷한데 작가는 진실을 모르고 있는 것도 죄가 되는게 아닐까. 나이드니 들추는 게 꼭 지혜라는 생각은 들지 않아 때로는 묻어버리는 것이 누이좋고 매부좋은 거라는 생각도 드는 게 사실이다. 오웰은 들추면서 묻어버리는 이 절묘한 테크닉을 타고난 듯 하다. 자신도 작가이면서 세상 모든 작가에게 요구하는 그의 글들이 나는 왜 그런지 철저히 작가된 슬픔이자 뼈아픈 고독으로 느껴졌다.

서평은 오웰의 생업인 동시에 작가로서의 소양을 쌓는데 큰 자양분이 되었다고 한다. <어느 서평자의 고백> 편은 어쩌면 모든 서평자가 하고 싶은 말을 대신해주는 짜릿함이 컸다고 본다. 평하는 대상이 '책'이라는 문화적 무게 때문에 글을 쓴 사람이 '작가'라는 지식인이기에 감동은 커녕 욕이 나오지 않으면 다행인 수준의 작품일지라도 어떤 다른 이유들로 솔직할 수 없는 서평자의 비애를 까발린 글이라고 할까.

실제로 전혀 그 작품과 작가에게 감흥을 느끼지 않았지만 출판사 홍보차원의 리뷰대회의 목적성에 확실히 부합해주기 위해 거짓감동을 나열하여 영예의 수상을 한 지인도 있다. 이 부분은 나 역시도 완전히 자유롭지 못한 입장이라 이른바 떡밥이 걸려있거나 보상이 주어지는 서평에는 함부로 비판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볼 수 있다. 어짜피 그들의 홍보목적에 이용되는 내 글에다가 솔직한 비난을 해놓고서 그들이 주는 떡밥을 기대하는 건 오히려 위선에 불과하다는 생각이다. 그래도 느끼지 않은 것은 느꼈다 말하고 싶지 않은 기본적인 양심은 있어 비록 아마추어 글쟁이지만 진실됨을 잃고 싶지는 않다. 그런데 이 느낀 것만 이야기하자는 최소한의 원칙이 나와 꼭 같지는 않은 사람들도 있었다. 느끼지도 않은 것을 지어내거나 느낀 것을 과장하거나 남이 느낀 것을 자신이 느낀 것에 덧대는 작자들이 그들이다. 딱 동네수준의 서평자들에게 어울릴만한 작태가 아닐까 싶은 이 광경을 지난 몇 개월, 그러니까 서평이라는 것을 써보자고 마음먹은 후 잊어먹을만 하면 보아왔다. 정식 작가들도 아니고 서평 한편으로 떼 돈버는 글쟁이도 아닌데 꼭 그렇게 까지 해야하는 가에 대한 자괴감은 서평을 쓰고 싶지 않게 만드는 일등공신이었다. 오웰은 아무리 양심적으로 칭찬을 하든 욕을 하든 서평은 본질적으로 사기라 지적한다. 불멸의 영혼을 하수구에 한 번에 한파인트씩 흘려 보내는 작업이라고 말이다. 나는 어느날 갑자기 서평을 쓰기 시작한 내 불쌍한 영혼을 하수구에 흘려보내지 않으려고 어떤 책도 가볍게 혹은 쉽게 혹은 막연하게, 대충 넘어가지 않았다. 그들을 향한 원망의 불똥이 우습게도 그러나 당연하게 나에게로 튄 꼴이다. 오웰처럼 말이다. 그래서 더 지독하게 파헤치고 빠트리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러다보니 서평이 점점 길어지기 시작했고 내 리뷰는 내가 써놓고 보아도 심했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런 성의를 알아주는 사람이 있었는지 나는 글 한 편당 떡밥이 걸리는 확률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내가 그런데 응모를 했나 언제 당첨이 되었는지 모르고 넘어가는 일도 생겨 급기야 당신은 리뷰대회 수상만을 목적으로 글을 쓴다는 웃지 못할 이야기도 들은 바이다. 아니라고 증명할 길은 별로 없어 보였고 나로선 더욱 서평을 진실하고도 성의있게 쓰는 것 외엔 달리 탈출구가 없었다. 그런 말을 들을 줄 알았다면 그동안 운좋게 리뷰대회 수상을 했을 때 좋아라도 해볼 걸 하는 후회도 들었다.(그렇게 좋지 않았던 이유는 계속해서 글을 써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에 대한 답으로 느껴졌기에 서두에도 밝혔지만 나는 어떤 형태로도 문학을 좋아는 하지만 하고 싶지 않았던 사람으로 남고 싶었기 때문이다) 알게 모르게들 그렇게 많이 내 글을 읽는 지도 몰랐던 나는 어느덧 서평자로서의 책임이 드리우는 걸 느끼기 시작했고 결국 이런 책까지 집어들게 된 것이다.

어쨋거나 나는 오늘도 서평을 쓰고 있으며 오웰이 그랬던 것처럼 괴롭긴 해도 스스로 꽤 즐겼던 분야로서 글쓰기에 도움이 되길 바란다. 나는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한 강도 높은 비하가 어떤 의미에서 자신감의 표현이라 생각한다. <어떤 서평자의 고백>은 최고치의 비하를 통해 최상의 자신감을 표현한 역설의 고백으로 들린다. 왜냐하면 그는 평생 자신이 영화평론가보다는 그래도 낫다고 생각하는 그 서평을 써왔으며 그로 인해 인정받았으며 내가 보기엔 서평쓰는 방식이 곧 오웰의 글쓰는 패턴이 되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다만, 그는 자신감도 자괴스런 슬픔으로 밖에 표현할 줄 몰랐기에 (가장 잘하는 방법으로)그렇게 쓴 것뿐. 그는 최고의 서평자였음에 틀림없다.

그 외 영어권에서 언어의 타락을 부추기는 타성에 젖은 관습을 지적하는 <정치와 영어>편도 무릎을 탁탁치며 읽었다. 그가 타락한 글쓰기의 하나로 지적한 죽어가는 비유, 이른바 상투적인 관용어에 의지하는 비유와 젠 체하는 용어는 피해갈 수 없는 글쟁이들의 필요악에 가깝다. 나는 아주 오래전부터 시쓰는 사람들의 산문을 좋아하지 않는 편인데(어쩌면 내가 시를 못 씀에 있어 시를 쓰지 않으니 시 쓰는 사람들도 산문을 넘보지 말라는 억지도 포함한다) 그래서인지 지나친 은유자체로 문장을 완성하는 습관을 가진 류의 작가는 별로 선호하지 않는다. 산문에 있어 감성과 이성을 모든 은유로 포장하는 행위는 시적부력을 이용한 반칙에 가깝다 생각하기 때문이다. 젠 체하는 용어 역시 괜스레 라틴어, 그리스어원을 찾아 집어 넣고 심리학 용어를 가져오고 누가 시키지 않아도 내 맘대로 합성어를 만들어 내는 행위를...나는 곧잘 시행해왔다. 변명을 하자면 꼭 유식해보이고자 함보다는 내 논리를 강화하기 위한 다양한 접근이었다고 말하고 싶다. 이중부정으로 멋부리기, 쓸데없는 수동태의 사용, 모호한 결론내기등등 국문과 교수의 강의와도 같은 그의 글에 많은 자극을 받았다. 문득 그의 글을 읽으니 무슨 뜻인지 도무지 모르기만 하라는 뜻으로 여겨지는 많은 평론가들의 문학비평글들이 떠오르기도 했다. 오웰은 이렇게 포현된 언어가 결국은 생각을 타락시킨다고 실패자라는 기분에 마신 술이 결국 실패자를 만드는 꼴은 되지 말자고 신신 당부한다.

서평자의 입장에서 평생가도 이런 서평은 쓸 수 없겠다 싶은 절망을 안겨준 글도 있었다. <정치 대 문학: 『걸리버 여행기』에 대하여>와 <리어, 톨스토이 그리고 어릿광대> 이 두편은 걸리버 여행기를 집필한 작가 조나단 스위프트와 세익스피어를 힐난한 톨스토이에 대한 평론이다. 공정한 비판이란 이런 것이구나 싶은 글이었고 작가의 성격및 심리와 작품간의 관계를 끌어내는 그의 통찰력은 내가 읽어본 그 어떤 평론보다도 독창적이면서 치밀하고 타당했다. 위대한 작품을 써낸 작가가 꼭 위대하지 않다는 것은 알았지만 왜 그러한지 조목조목 밝혀내는 것도 놀라웠고 하지만 결국 자신이 가장 좋아하며 위대한 작품이라는 것에는 동의하고 마는 그의 결론도 뿌듯했다. 엊그제 톨스토이 100주년을 맞이한 러시아의 쓸쓸한 분위기를 전하는 기사를 보았는데 가장 영국을 대표하는 세익스피어를 폄하하며 특히 <리어왕>을 혹평하는 톨스토이를 심리적으로 공격하는 오웰의 반격은 2010년을 살고 있는 내 입장에선 어짜피 이 세상 사람들이 아닌 작가들의 영국대 러시아의 문학자존심 대결로 읽혀지기도 했다. 얼추 세익스피어의 폭넓은 사고력 대 톨스토이의 성인되고자 함으로 요약되는 이 재미를 나는 두어 번 읽어내려 가며 박수를 쳤다. <전쟁과 평화>와 <안나 까레리나>라도 썼으니 언급이라도 해준다는 마지막 결론은 그야말로 짜릿한 독설이었다. 나 역시 오웰이니 박수친다 아니었을까.

반가운 검열

이 책은 나로 하여금 서평을 계속 써야 하는가, 쓴다면 어떻게 써야 하는가, 문학의 길을 희망해야 하는가, 작가의 꿈을 버리지 말아야 하는가, 작가가 된다면 어떤 글을 쓸 것인가에 대한 잠시 미루어둔 의제들을 다시 꺼내어 차근차근 되돌아 보게 하였다. 그가 글을 쓰는 이유로 밝힌 것들과 나의 이유와 일치되는 것이 아무리 다시 보아도 그다지 없어 보인 다는 것이 영 서운하고 다소 충격적이기 까지 하지만 분명한건 앞으로도 글을 쓰는 행위에 자유로울 것 같지는 않다는 것. 위의 모든 고민이 해결되지 않아도 나는 계속해서 글을 쓰고 있거나 쓰려고 하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솔직히 내가 얼마간 작가로서의 소질이 있다는 것에는 동의하지만 작가의 길을 향해야 하는 가엔 늘 동의하지 못하는 실정이라 할 수 있다. 언제나 도전을 유보하는 내 심리엔 재능에 대한 불신, 자신감의 결여도 있겠지만 만에 하나 작가가 된다고 하더라도 그 길이 행복할 것인가, 나는 그 고난마저도 작가로서의 운명으로 생각하고 기꺼이 미래를 내 던질 각오가 되어있는가 하는 자기검열이 아직 이루어 지지 않은 탓이라 생각한다. 실은 그 중간 단계로서 안전해 보이는 서평작업을 선택한 것이었는데 이번에 보기 좋게 제대로 자기검열을 당했다는 생각이다. 그런 면에서 조지 오웰은 내게 있어 앞으로도 훌륭한 검열관이 되어 줄 것 같다.

아직은 턱없이 부족함을 안다. 그래도 나는 글쓰기가 좋고 글을 쓰고 나면 많은 것을 토해내었다는 원초적인 기쁨이 반갑다. 이제는 말하는 것보다 글로써 전달하는 것이 더 편할 때도 있다. 글을 쓰면서 가장 위로가 되는 것이 자신이라는 것을 깨달은 탓일 게다. 아주 먼 훗날 내가 만약 '나는 왜 쓰는가'를 제목으로 책을 낼 수 있을(아니면 내가 죽어서라도 누가 내줄만큼)까. 혹시 그 정도가 된다면 여러 꼭지들 중 꼭 조지오웰의 작품과 그의 죄의식을 신랄하게 비평해 보고 싶다. 걸리버 여행기를 여섯 번 읽었다고 하니 나 또한 그의 작품을 그만큼 읽어야 할 것이다. 그 때가 된다면 지금의 나처럼 글을 계속 써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고민하는 어떤 서평자에게도 번득이는 자기검열의 시간을 마련해줄 수 있을까. 나는 불행히도 부디 누군가가 나를 비평하고 내 책을 서평하는 그날이 오기를 기원한다. 나는 얼마든지 톨스토이가 되어 내 이상을 분석당할테니 당신은 오웰처럼 내 허구를 꼬집으라. 원하시면 세익스피어가 되어 드릴테니 내 언어를 마음껏 조롱하시라. 꽁꽁 숨겨진 내 열등감과 위선을 찾아내어 달라. 십년이든 백년이든 그대앞에 끝까지 살아남아 작품으로 그 생존을 증명하고 그리하여 내 이름 하나 기억되고 싶다. 그것은 내 인생 최대의 불행이겠지만 그렇기에 작가 최상의 행복일 것이다. 나는 끝내 불행으로 행복하고 싶다. 오웰 그가 그러했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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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0-11-25 18: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간혹 몇 몇 글은 쉽게 잘 안 읽혀지더라고요. 배경지식이 좀 있어야 이해할 수 있는 글이 있었고요,
그래고 이번 에세이들을 통해서 오웰의 문학을 좀 더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어서 좋은거 같아요.
소설을 읽기 전에 진작에 에세이들을 먼저 읽었으면 좋았을것 같다는 아쉬움도 들기도 했답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한사람 2010-11-26 09:32   좋아요 0 | URL

전 이 책이 힘겨워도..읽는 내내 좋았어요
오래전 사람이라는 생각도 안들고..
영국인이라는 생각도 안들었죠^^

september 2010-11-25 19: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는 어째서 써야만 하는가?"

반딧불이 2011-03-13 0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렇게 훌륭한 글을 이제서야 읽었습니다. 아무래도 오늘 밤 잠자리는 행복하면서도 부끄럽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