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하는 골짜기
임철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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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시골마을에 아담하고 오래된 간이역이 있었다. 하지만 더 새롭고 더 빠르게 변한 세상은 열차의 크기를 줄이고 말았다. 조금 더 있다가는 노선이 사라지고 할 수 없이 역무원도 사라지고 마지막으로 역사 驛舍도 사라졌다. 이제 驛舍를 지나온 이별의 歷史마저 사라지는 것일까. 이별했다고 만났던 일이 없어지는 게 아니듯, 驛舍가 사라졌다고 기차가 달리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여기, 이별하러 도착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모두 기차를 타고 왔다가 기차를 타고 떠났을 것이다.

나는 책을 선택하는 데 있어서는 영화나 미술보다 훨씬 소심하다. 덜커덕 선입견으로 작품을 집어 든다든지 서점에서 몇 장 넘겨보고 그 첫인상만으로 계산대로 달려가진 않는 편이다. 적어도 내 의지로 선택할 땐 어쩐지 늘 책 앞에서 주눅이 들어 자신이 없다. 지인들이 추천하거나 나와 성향이 비슷한(하다고 판단되는) 사람들의 이야기로 내 주관을 의지하고 싶은 것이다.(그러니 편향적일 수 밖에) 그런데 가끔가다 소설의 제목이 시집같다거나 시집의 제목이 소설같으면 본능적으로 끌린다. 혹시 낚일지 몰라도 본능을 따르고 만다. 『이별하는 골짜기』는 바로 그 우물쭈물하는 내 본능에 강력하게 호소했다. 문지 홈피에서 제목만 언뜻 보고 시집인 줄 알고 있다가 몇 개의 홍보기사에 "간이역처럼 스러져 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라는 부제는 물론이고 김승옥, 이청준의 단아함과 절제를 계승했다고 하는 평가나 한마디로 "애잔함"...(애잔이라 했다)을 주장하니 어쩔 수 없었다. 나는 애잔하고 싶었다. 애처롭고 애틋한 애잔이었겠지만 나는 애잔(사랑하는 나머지, 愛殘)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더할 수 없이 愛殘에 만취했다. 이 소설은 사계절을 테마로 사람들의 사연을 한데 모았지만 나에게는 온 계절이 꼭 시월의 단풍, 낙엽의 거리로 느껴져 가을의 소설로 다가왔다. 내 본능은 가을이 필요했고, 가을은 문학을 손짓했던 것이다.

이별이다. 그들은 모두 이별했다. 아니 이별해야 했기에 실은 만난 것이다. 아니 이별할 줄 모르고 만났던 것이다. 그러므로 만날 줄도 몰랐었던 것이다. 작가는 두 명의 여자와 두 명의 남자를 이별하는 골짜기(別於曲)로 불러 들여 한명마다 계절의 이름을 부여하고 이별의 노래를 부르게 했다. 두 명의 남자는 간이역의 역무원으로, 두 명의 여자는 타지에서 흘러 들어온 외지인으로 교차시켜 이들이 별어곡에 모이게 된 세월과 연유를 차근차근 꼽아 본다. 기차가 다가오면 마음이 달뜨고 기차가 멀어지면 마음이 허전하듯 사람과의 만남과 이별을 시적 원근감으로 조율하는 작가의 운전이 어찌나 세심하고 서정적이던지 책을 덮을 때 마저 조심스레 마음을 내려놓았다. 간이역이라는 곳이 언제든 기차가 들어오고 떠날 것을 알기에 실은 만남이든 이별이든 기다림이 반 이상이고 기다림은 누구에게든 잠시 머무르게 되는 것이다. 이들이 간이역에 잠시 쉬지 않고 이별하는 골짜기에 머무르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이들은 혹 저마다 간절히 만나야 할 사람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나는 결국, 이 작품을 '만남'에 관한 이야기로 받아 들이고 싶었다. 어쩌면 가을에 누군가를 떠나 보내기 힘들었던 세상 모든 이의 추억이라 해도 좋다. 아직은 가을의 추억이 겨울의 기다림보다 애잔하니까...하지만 나는 애잔(사랑하는 나머지, 愛殘)하고 싶었으니까.


애틋한 이야기 - 시인, 언젠가는

시작은 '별어곡의 시인'이라 불리는 역무원 정동수라는 젊은이였다. 오래전에 울면서 본 일본영화 <철도원>을 떠올리며 하얀 눈으로 뒤덮인 시골 마을에서 역무원으로 평생 살아가는 남자의 사연을 그려보기도 했다. 그런데...간이역과 시인이라...그는 생명의 축복과 계절의 환희를 느낄 줄 아는 청년이었다. 그는 느끼는 데서 그치지 않고 노시인의 충고대로 노트에 아름다움을 적으며 상상력을 훈련하고 있었다.

"이제부터 날마다 뭐든 아름답고 행복한 것들을 천 가지만 찾아내봐." 

그런데 여자라곤 어머니와 외할머니 밖에 모르던 자신을 의지하던 다방 여종업원, 빨강머리 소녀가 뜻밖에 자살을 하고 길가에 버려진 병든 개는 주인을 찾아 헤메다가 결국 아스팔트에서 검붉게 발견된다. 여지껏 평범하게 자라왔다고 믿던 그는 책장에서 탄광촌의 어두운 역사와 마주하고 비로소 자신의 출생에 대해 의문을 갖기 시작한다. 막연한 어두움은 눈앞의 두려움과 조우한 것이다. 그는 기차가 끊긴 시간에 제초제를 마셨다는 아들을 만나러 가기위해 눈물콧물로 유리창을 두드리던 노파를 보며 '시'는 '아름다움'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으로 울음을 터뜨린다. 그것은 곧 우리네 삶이었고 곧 그의 삶일 것이었다. 도망치거나 외면해선 안 될 그 무엇이라는 청년의 눈물앞에 하얀 나비가 날아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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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한 나비의 날개 짓이 슬픈 건 아름답기 때문일까. 하지만 청년은 슬퍼하지 않았다. 순진한 시골청년, 막내 역무원의 가슴에 날아 든 것은 그래도 품어야 할, 자신의 꿈이었을 것이다. 바로 그때 수십 마리의 흰나비는 날갯짓으로 힘차게 그를 응원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시는 슬프기도 아름답기도 한것-



애절한 이야기 - 기차여, 용서해요

"저 아저씨도 참 박복하시네요."

철도 공무원 생활 35년의 백전 노장 신태묵의 이야기는 이 작품에서 가장 내 가슴을 짓눌렀다. 나는 한 가지 일을 오래한 남자들을 보면, 그런데 그 일이라는 것이 그다지 세상에서 알아주는 일이 아닌 경우 나도 모르게 아버지가 중첩되며 부질없는 그리움에서 잘 헤어나오지 못하곤 한다. 신태묵은 피난길에서 혈육을 읽어버린 후 오랜 불면증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던 환각과 고통의 날들을 매일 들이고 내보내는 기차로부터 위안을 받아왔던 것 같다. 하지만 업무중 실수로 한집안의 가장이자 대학진학의 꿈을 갖고 있던 수려한 용모의 젊은이를 치어 죽이게 되고 운명의 장난으로 그의 아내와 딸과는 역사에서 재회한다. 신태묵의 실수를 전혀 모르던 남자의 아내는 신태묵의 구애를 받아 들이고 행복을 약속한다. 하지만 언제나 자신의 비밀에 죄책감을 떨칠 수 없었던 신태묵은 더욱 더 아내를 향한 집착과 소유욕으로 자신과 상대 모두를 파괴시키고 우연히 신태묵의 비밀을 알게 된 아내는 그만 자살을 하고 만다. 내 손으로 당신을 죽여 버릴 거라던 의붓딸의 절규와 반 실성한 듯 나비처럼 날아갈 거라는 딸의 노래가 한동안 귓전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렇게 헤어진 이후 한 번도 딸의 얼굴을 보지 못했던 신태묵은 사위로부터 딸이 여섯 번째 유산 끝에 일곱 번째 드디어 아들을 순산했다는 소식을 듣고 유년기 이후 터지지 않았던 울음을 끝내 터뜨리고 만다.
그는 역사 주변에 매년 꽃씨를 심던 따스한 사람이었고 술이 들어가면 정선아리랑을 멋들어지게 부르던 사람이었다. 일생동안 소중한 것이라면 무엇이든 일방적으로 잃는 것만이 익숙했던 그가 아는 단 한 가지 사랑법은 상대를 자신과 동일시 하는 일방적 '동화同化'였다. 눈앞이 캄캄해 질정도로 아득한 그의 눈물앞에 팔랑팔랑 호랑나비 한 마리가 날아 들었다. 평생 쇳물 같은 덩어리로 펄펄 끓기만 하던 그의 가슴이 봇물처럼 터져버리던 그날 그가 곱게 심은 꽃씨는 기쁨과 행복의 나비로 피어 난 것이리라. 그는 사람이 아닌 세상에 '동화同化'됨을 택한 것인지도 모른다.  

 
-눈물은 슬프기도 기쁘기도 한 것-



애통스런 이야기 - 할머니, 잘가요

작가가 가장 공을 들였다고 생각되는 '겨울이야기-귀로'는 전라도 구례가 고향인 전순례라는 70대 할머니의 차마 눈뜨고 보고 들을 수 없는 우리시대 가슴아픈 이야기이다. 작가는 어쩐 일인지 살아온 세월만큼이나 할머니의 이야기를 가장 길고도 가장 자세하게, 그리하여 더 이상 슬픔과 한탄과 분노에서 한 치도 도망칠 수 없을 때까지 우리를 쉬지 않고 몰아 붙였다. 50대의 조카와 우연히 마을에 흘러온 할머니는 늘 바퀴가 달린 가방을 질질 끌고 역사로 들어와 차표만 사고는 멍하니 기차를 바라만 보는 별어곡의 '가방할멈'이시었다. 꽃다운 열여섯의 나이에 만주 방직공장에서 돈을 벌게 해주겠다는 동네이장의 말에 속아 일본군 위안부로 청춘을 짓밟힌 그녀의 '위안부 체험기'는 차라리 거짓말이었으면 얼마나 좋을지 모르겠다. 나치 수용소에서 처형된 유태인이거나 중국인 마루타의 이야기처럼 남의 나라 남의 불행이 아닌 것이 너무나 원망스러운 이야기였다. 읽는 내내 어서 끝이 나주기를 기다리며 벌렁거리던 가슴을 꾹꾹 누르고 있어야 했으며 사실, 다른 이야기에 비해 몇 배나 많은 분량으로 정밀묘사 했어야 했는지 되묻고도 싶었다.

조금 더 짧았어도 의도는 충분히 전달되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많았다. 작가는 적당한 지점에서 비극의 서사를 멈출 수는 없었던 것일까. 가방 할머니의 과거 스쳐온 이야기로 적당히 언급하기고 말기엔 스스로 견디기 힘들었던 것일까. 그동안 분단의 문제와 이데올로기의 폭력성에 천착해온 작가이니 만큼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어쩌면 훨씬 모자르고 턱없이 부족했을지도 모르겠다.

가방할머니와 함께 위안부 생활을 했던 언니들과 동생의 죽음이 더 할 수 없이 애통하다. 일본군에게 영혼과 육체를 짓밟혀 가면서도 사랑하던 남자의 아이를 끝까지 지키려했던 마유미의 죽음은 거룩했다. 한명 한명 동료들이 가진 천조각을 모아 화장실 천정에 목 매달아 죽은 다케코의 죽음은 처연했다. 도피하지 못할 처지만큼 병세가 악화된 환자 유리코의 거품물린 죽음엔 피가 끓었다. 절벽 꼭대기에서 몸을 던진 사다코의 죽음은 차라리 탈출과도 같았다. 가난한 농사꾼의 장녀로 태어나 별명은 걸귀가 씐 '허천뱅이'였던 만큼 굶주린 식구들을 위해 입하나 덜어준, 가족과 시대의 희생자 전순례 할머니의 기구한 삶을 오래도록 잊지 말라는 통곡의 외침일 것이다.

하지만 그녀가 죽을 듯 죽을 듯 기어이 죽지 않고 살아남았던 이유도 불행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니라는 저주받은 현실을 확인하는 것에 불과했다. 만주벌판에서 구사일생으로 자신을 구해준 남자와 기적같이 새 생명을 얻게 되지만 연이어 터지는 한국전쟁은 그녀에게서 남편과 아이를 빼앗았고 십 수년 만에 밟은 고향땅에선 빨치산 동생 때문에 온가족이 비참하게 몰살당하고난 흉가만이 그녀를 반겨줄 뿐이었다. 아...순례할머니는 살아 남은 것을 어떻게 견딜 수 있었을까.

그녀에겐 자신만이 아는 목적지가 있을 터이다. 기어코 찾아야 할 어떤 것, 가 닿아야 하는 목적지.
그것이 아직 존재하는 한 그녀의 외출은 죽는 날까지 이어질지도 모른다. 225p


그녀는 사람들이 죽을 때마다 노란나비의 꿈을 꾸었다. 자살을 결심하고 강가로 들어갔을 때 마저 그녀의 걸음을 멈추게 한 것은 수천마리의 황금나비 아니었나. 그녀가 그토록 가고 싶었던 곳은 지천으로 피던 산수유 꽃과 눈부시게 아름답던 노랑나비가 날아다니던 고향마을 그 언덕에 검정치마와 노랑저고리를 입고 있던 소녀, 자신조차 기억하지 못할 그 소녀에게로 ...가 아니었을까.
 


- 피지 못한 꽃, 날아가지 못한 꿈 -



애처로운 이야기 - 손가락, 울지마요


마지막 이야기는 별어곡 맞은편에 어울리지 않은 모습으로 자리한 빵집주인 '안경 쓴 말라깽이' 여자의 이야기다. 어머니가 무녀이었던 빵집 여주인은 늘 불행에 대한 자신의 육감을 절대적으로 믿어왔기에 이곳 역무원 정동수와의 만남이 처음부터 예사롭지 않았음이다. 그녀는 어린 시절, 산속에서 탈영병을 만나 그로부터 아내에게 편지를 부쳐줄 것, 자신을 보았다고 절대 말하지 말 것을 부탁받는다. 하지만 장교아버지를 둔 그녀는 탈영병과의 약속을 지키기에 너무 어렸고 그녀로부터 위치를 알게 된 군인들에게 포위된 탈영병은 수류탄으로 자폭을 하게 된다.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과 의문을 늘 품고 있던 정동수의 진짜 아버지가 탈영병이라고 확신한 그녀는 어머니를 묻고 온 그에게 평생 숙원이던 속죄의 시간을 부여받고 드디어 자신을 옭아맨 죄책감에서 벗어나게 된다. 탈영병을 가리키던 그녀의 손가락은 결국 사는 동안 자기 자신을 카리키며 지독히도 상처를 찔러대었던 것이다. 이제 그 손으로 탈영병이 쓴 편지를 불러내어 정동수에게 읽어주던 그녀의 굵은 눈물은 만남이 곧 이별이었던 간이역의 가장 아름다운 역사로 남게 되었다.

그녀에겐 생의 특별한 고비 마다 커다란 부채꼴 날개를 단 주홍색의 나비가 찾아든다. 그녀는 늘 그것이 불운과 위험의 징조라 생각했지만 이번엔 아니었다. 그녀는 이제 남들 앞에서 떳떳하게 자신의 손을 내보일 수 있게 될까. 주홍색 불행이 아닌 주홍색 열정이었다면 틀림없이 손을 가리지 않으리라.  


-  다시, 생의 열정으로 -

별어곡이 1인 배치 간이역에서 무인역으로 격하된다는 소식은 마을 사람들을 역사라는 추억의 공간으로 모두 불러 모으게 되고 신태묵과 정동수를 비롯한 역무원들은 저마다 별어곡과의 만남과 이별을 가슴에 새겨 넣는 자리를 마련한다. 고속철도가 개통되던 날 이들은 종무식과 송별회를 한 것이다. 비록 같은 날 이 땅의 수많은 역들이 무인 간이역으로 일제히 바뀌게 된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없었지만 그곳 간이역에서 얼마나 많은 이별과 만남을 치루어 내었는지, 그들은 기억할 수 있었다. 그리고 모두 기차를 타고 고향을 떠났지만 그 곳에서 만나고 헤어졌던 우리들은 그 만큼의 만남과 이별을 기억할 것이다. 마지막 근무자 동수가 별어곡을 떠날 때 떠오른 수천수만 마리의 나비들이 무수한 만남과 이별의 기억들인 것이다. 3월의 눈꽃처럼 하얗게 가슴에 내려앉은 이별하는 골짜기에서 였을 것이다.


오늘, 기차타고서


네 사람은 모두 별어곡에서 헤어졌다. 그런데 이들 모두는 똑같이 누군가 꼭 만나야할 사람이 있었고, 꼭 만나야 할 그 무엇도 있었다. 별어곡 시인 정동수에겐 살아생전 비밀로 관철된 아버지에 대한 진실여부를 꼭 만나야만 했었다. 35년 철도역무원 신태묵씨는 죽은 아내에게 속죄하기 위해서라도 그녀의 딸을 꼭 만나야 했었다. 위안부 전순례 할머니에게는 북으로 끌려간 남편 소달섭의 생사와 꼭 만나야 했었고 빵집주인 아주머니는 탈영병의 가족을 만나서 그의 마지막을 알려야 했었다.

이들 네 사람의 인연을 이끌고 운명으로 한자리에 모이게 한 사건은 다름 아닌 한국 전쟁이었다. 이들은 모두 분단과 전쟁에 관한 직접, 간접의 상처를 품고 지니고 있었다. 이렇듯 전쟁세대와 전후세대를 지나 전쟁과 무관하듯 살아가는 세대가 되고 있는 우리들은 결국 상처의 인연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한 후세대 인 것이다. 사라져 가는 역사驛舍와 사라질 뻔 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서정적인 표현으로 애잔함을 선사한 작가의 '순수'를 향한 고집을 엿보았다. 슬프지만 아름다웠다.

가을이 가면 겨울이 올 것이다. 올 것은 올 것이기 때문이다. 언제나 쓸쓸함을 알고 있는 행운이 반복의 상처를 뛰어 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겨울보다 봄보다 가을이 더 헤어지기 힘든 것은 무엇 때문일까. 그것은 언제나 헤어짐은 그 계절의 지금 이루어지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은 가을이니 당연히 가을의 이별이 더 애잔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다음 겨울에 느끼는 겨울이별은 가을보다 더 아플 것이리라. 그러므로 지금 우리 사는 오늘은 언제나 내일보다 더 아프고 더 슬픈 것이다. 간이역은 어제와 내일을 이어주는 우리 슬픔과 실연을 잠시 놓아두는 곳이었다. 하지만 영원한 골짜기는 될 수 없었음이다. 우리 모두는 그 모두를 다시 짊어 들고 기차를 탄다. 그렇게 오늘을 살아간다. 너무나도 오랜만에 기차를 타고 가을을 떠나고픈 작품이었다. 단풍이라면 더 벅차지 않을까 싶다. 


겨울을 앞둔 나무들은 제 스스로 가지의 잎을 모조리 지워낸다. 잎과 가지에 물기를 남기면 추위에 금방 얼어붙고 말 터이기 때문이다. 한 올 집착도 미련도 남기지 말아야 함을, 어짜피 떠나보낼 것은 보내야 함을 나무들은 잘 알고 있는 것이다. 86p 


 
- 인생, 다시 짊어 지고 오르는 오늘의 여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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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Q84 3 - 10月-12月 1Q84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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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다닐 때 억지로 수영을 배운 적이 있다. 우리 학교는 교양필수과목으로 누구나 수영을 이수해야만 다시는 수영을 안 할 수 있었다. 유난히도 물을 무서워했던 내가 별 수 없이 학점 때문에 혼자 수영장을 몰래 다닐 정도였다. 1.9m 풀에 다이빙으로 뛰어 들어 25m는 자유형으로, 다시 턴한 다음 25m는 배영으로 돌아오는 그 코스를 중간에 멈추지 않고 헤엄쳐 나온다는 것은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일요일마다 아무도 없는 동네수영장에 들러 나머지 연습을 했던 나...그런데 어느날 자유형도 겨우 10m를 이어갈까 말까하던 내가 우연히 둥둥 뜬 몸으로 나도 모르게 뒤로 물살을 가르게 된 그날, 나는 내 위에 펼쳐진 뜻밖의 세상을 보고 말았다. 물속에선 물안경을 끼고도 눈도 뜨지 못하던 내가 거짓말처럼 물위에 누워서 바라본 하늘은 내가 만나본 세상 중에 가장 넓고도 아름다웠다. 거기다가 내의지로 내 몸을 움직여 하늘을 떠다니는 것 같은 기분은 내가 지금 속해 있는 세계를 잠시 넘어와 있다는 생각까지 할 정도였다. 완벽하게 다른 세상이 온전한 지금의 세상이 되는 경험...나는 그때 교양과목을 가까스로 통과하면서 수영을 배운 것이 아니라 다른 세계를 통과하고 왔다는 안도감에 앞으로 또 다른 어떤 세상이 닥쳐와도 두렵지 않을 것 같았던 순간을 잊지 못한다.

이 작품을 읽는 내내 나는 그때의 물, 아니 그때의 하늘 위를 떠다니듯 작품 속에서 다른 세상을 헤엄쳐 나오고 있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그렇게 홀린 듯 빠져 나와 버린 지금 나는 그 어떤 문학도 다른 세상을 만남에 있어 지금처럼 새롭지 않을 것 같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작품 속에 완전히 몰입해 있던 시간들이 물살을 가르고 하늘을 떠다닌 자유로움 그 자체였다. 매순간 가득한 해방감을 느끼며 온정신과 육체가 다른 세상에 의지했다는 생각을 한다. 행복했다.  
     

이야기를 믿다

이 작품을 읽는 내내 집요하게 내 의식을 좇아다니던 단어는 '세계'라는 두 음절의 세계였다. 내 의식속의 '세계'란 '세계화' 캠페인 이후 더 이상 발전하지 못하는 고착된 死語에 가까웠기에 점점 '세상'이라는 보다 현실적이고 자조적인 의미의 단어에 익숙해진 지 오래였다. 그런데 소설 속 주인공들은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이 세계가 어디인지'를 집요하게 되묻고 있었다. 즉, 자신이 지금 바라보고 지각하는 세계가 진짜 현실세계 인지 혹시 잠시 다른 세계를 비집고 들어 온 것이라면 자신은 지금 '왜 여기에 있는지'하는 궁극의 위치인식에 대한 질문이 지속적으로 반복되고 있었던 것이다. 세상에서 소설가가 차지하는 위치인식은 곧 작품 속 주인공들이 찾아가는 인물의 위치를 이끌 것이고 그것은 여지없이 독자의 인식체계에 영향을 미친다. 이 물 흐르듯 당연해 보이는 문학의 이치가 그것이 깨달아지는 과정을 면밀히 들여다 본다면 과연 아름답다고만 말할 수 있을까. 나는 이 작품을 지나오면서 한 작가의 소중한 깨달음을 일종의 무위로 얻어버렸다는 생각을 했다. 통렬한 자각과 고통 없이 단지 1Q84라는 열차에 무임승차 한 덕에 비교적 수월하게 세상에 대한 이치를 짜릿하게 알아 채버린듯 한 승리감은 독자로서는 커다란 행운일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이 작품이 가지는 문학적 성취나 작품성에 대한 논의는 적어도 내 몫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러했기에 한마디 감사는 그냥 넘기기 어려웠다. 많은 사람들이 이 작품을 선택하는 이유가 그 깨달음에 도착하는 과정에서 (비극인지 희극인지와는 상관없이)아름답지 못할 수도 있었던 시간과 노력을 덜어주기 때문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마치 고통이 없는 안락사나 무통치료와 같은 처방전을 받아들고 그전에 느껴보지 못한 치료과정을 경험했다면 투병환자로선 천금같은 소식이 아닐 수 없지 않겠는가. 깨우침에 대한 수월한 과정,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이 문학적 성찰의 진수를 보여준 것은 무엇 때문일까.

나는 커다란 깨달음을 관통하던 아주 견고한 그리고 촘촘한 하나의 응고된 덩어리로서 그 내재된 힘을 들여다보고 싶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이야기에 대한 신뢰, 그 어떤 이야기가 전개되어도 온전히 동화될 수 있다는 믿음, 그것이었다. 이 신뢰감은 하루키 작품에 대한 일종의 기시감이나 1,2권에 의한 선험적 학습효과일 수도 있고 이미 세계적 반열에 올라선 작가에 대한 막연한 기대감일 수도 있지만 1권 이후 거의 이야기에 내맡겨진 듯한 진지한 착각의 힘은 마치 마술사의 매직박스에 들어가 어떠한 칼이 들어와도 안전할 것을 믿는 여주인공이거나 머리위에 사과를 올려놓아도 정확하게 목표물을 명중시키고 말 아버지를 믿는 아들과도 같은 심정이었다. 이 느낌은 세상에 존재하는 유일한 것이기에 그저 읽어보라고 밖에는 다른 할 말이 없다는 것, 비슷한 다른 것을 설명하거나 비유할 수 없는 영역의 것이기에 아마도 설명한다고 해서 알아질 문제는 아니라는 것, 나는 이야기의 힘(magic)에 휘둘려진 독자로서 그 이야기가 이끄는 힘의 진원지를 찾고자 했다.

진원지에서 발견한 진리는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다'라는 보편적인 깨달음이었다. 일본작가의 지극히 일본적인 그렇기에 극적이고 세계적인 성취를 이루어 낼 수 있었던 작품이라는 결론을 얻고 말았다. (시기적으로 한참 후에 작품을 집어든)내게 이 작품을 강력히 권해준 지인은 평소 책을 속독하는 사람이 아니었지만 그는 분량에 비해 의외로 빨리 넘어가던 페이지의 마술과 그 가속력을 감당할 수 없었다고 말하였다. 어떠한 비논리도 논리성을 가지게 하는 의식의 흐름을 지배하는 문장구사력 덕분에 물 흐르듯 서사를 좇아가다 보면 이 소설이 지극히도 일본적인 당면문제와 그것을 해결하고자 하는 개인의 성찰을 방대하게 풀어 놓았다는 사실을 대수롭지 않게 지나칠 지 모른다. 물론, 독서의 즐거움이 우선시 되는 경우라면 그러한 일본적 코드와 기호를 분석해가며 일일이 의미를 재해석 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물 흐르듯 지나쳐 온 그 두껍던 책들을 세 권이나 덮고 난 지금 우리는 도대체 무엇에 홀렸으며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한번쯤은 정리하고 넘어가야 할 것 같고 독자로서의 감회는 서술해 볼 필요는 있다고 본다. 가장 일본적이라는 특수성이 가장 세계적이라는 보편성과 결합하며 나타나는 현상적 결과는 세계적 베스트셀러라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기에 나는 그 결과에 협조한 한국의 독자로서 이러한 기회를 지나쳐 보내는 것은 책임회피이자 직무태만이라고 느껴지기 때문이다.

서두가 길었지만 나는 이야기의 힘, 즉 소설적 서사의 구성적 파워를 1Q84의 뼈대가 된 네가지 이야기로부터 시작할 수 있었고, 가장 일본적이어서 가장 세계적인 대중에 호소한 주제는 세계무대에 위치한 일본인의 위치발견이었다고 생각하기에 이 두 가지를 작품의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로 인식하여 정리하고자 한다.    


따로 또 같이


먼저 1Q84에서는 이야기가 이야기를 낳는 서사출산의 구조가 천연덕스럽게 이어지는데 나는 이 구조를 1+Q+84=1Q84 라는 공식으로 만들어 보았다. 즉, 1과 Q와 84는 각기 독립적인 이야기의 줄거리를 지니고 있으면서도 모두 합해져서 1Q84를 복합적으로 구성해내는 수사학을 선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1과 Q와 84는 각기 일본의 현실과 일본의 스타일들을 명징하게 암시하는 작품속의 개별적인 스토리라인이자 1Q84의 서사적 모태를 상징한다.

1   그 첫 번째 이야기는 '유일한 믿음' 그 하나였다. 익히 알려진 바와 같이 이 작품의 모티브가 된 소재들은 일본 내 종교적 사건을 암시하고 있다. 사이비 종교 문제가 심각하던 90년대 일본의 옴 진리교는 세계 언론의 주목을 받으며 전 세계에 자신들의 '이단성'을 손쉽게 홍보할 수 있었다. 바로 아오마메의 부모가 자식을 버리면서 까지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던 '증인회'는 아마도 옴 진리교(와 같은 사이비교)를 상징한다 할 것이다. 사회주의 공동체 '선구' 역시 농업을 기반으로 이상사회를 건설하고자 한 일본의 '야마기사회'가 그 모델로 알려졌다. 하지만 평화롭게 유기농법으로 농사를 짓던 단순한 농업 코민에서 사이비 광신단체로 변모하면서 그 역시 옴 진리교와 다를 바 없는 '신흥종교'로서 죽음으로서만 재생되는 극단적인 믿음을 과시하였다. 아오마메의 부모가 믿었던 것, 후까에리의 아버지 즉 선구의 리더가 믿었던 것들은 고도의 물질문명을 비판하며 나름의 절대적 순수성을 추구하는 '유일한 믿음'이었다. 하루끼는 옴 진리교 사건 사형수들을 만나 그들을 인터뷰 한 후 마치 달의 뒤편에 한명 더 남아 있던 것 같은 공포를 느꼈기에 그 상상력이 이야기의 출발점이 되었다고 고백한 바 있다. 실제로 일본인들은 1995년 고베 지진과 옴진리교 지하철 가스사건을 겪은 뒤 "내가 지금 왜 여기에 있는가?" 하는 현실과의 괴리감을 통렬하게 자각했다고 한다. 비록 시발은 자국 내에서 자국에 관한 문제였지만 그 질문만은 (어쩌면) 세계보다 빠른 세계적인 인식의 전환점이었음에 틀림없었고 그것은 1Q84라는 문학적 메아리로 돌아온 것이었다. 1Q84에서 1이 일인칭인 I(나)가 아닌 절대치의 1(하나이자 처음)인 것은 이러한 일본의 세계를 향한 자신감 혹은 우월감을 반영한 코드라 느껴졌기에 그들의 질문과 대답이 세계적인 공감에 접수한 사실이 새삼 부럽고 대단해 보였음이다.

Q   두 번째 이야기는 '의문(Question)을 안고 있는 것'으로서 후까에리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초안을 쓰고 덴고가 다듬어 완성한 <공기번데기>의 이야기였다. <공기번데기>라는 작품속의 소설에 등장하는 주인공은 열 살의 소녀로서 고립된 커뮤니티에 살고 있었던 후까에리 자신(원작자)을 암시한다. 소녀는 밤중에 은밀히 찾아와 공기번데기를 만드는 리틀 피플을 목격한다. 공기 번데기 속에는 소녀의 분신이 들어있고 그곳에서 마더와 도터의 관계가 발생했음을 인지한다. 그 세계에는 두 개의 달이 떠 있었다. 리틀 피플처럼 통로를 만들어 다시 돌아가고자 했던 소녀가 통로의 문을 열려고 하는 장면에서 이야기는 끝이 난다.(그러므로 끝이 난 것은 아니다) 나는 공기번데기의 동화적 환타지를 만나면서 미야자키 하야오식의 일본 특유의 서정적 애니메이션을 쉽게 떠올릴 수 있었다. 특히, 소녀가 어두운 밤에 공기 속에서 실을 뽑아 번데기를 만드는 모습은 <반딧불의 묘, 2006, 다카하타 이사오 감독>의 한 장면인 반딧불로 어둠을 밝히려는 남매의 모습과 중첩되면서 묘한 기시감을 불러 일으켰다. 여타 다른 일본 애니메이션에서도 누에고치의 외피 속에 만화캐릭터를 등장시켜 신비롭게 인물을 묘사하던 방식을 쉽게 기억할 수 있었다.  

   
     <반딧불의 묘, 2006 / 다카하타 이사오>    <2005 일본 아이치 엑스포 나카구테 일본관 건축 이미지>

공기번데기 개념은 2005년 일본 아이치 세계박람회의 일본주제관(나가쿠테 일본관)에서도 파사드(건축물 외관) 이미지 컨셉으로 사용된 사례가 있다. 당시 나는 건축관련 일을 하고 있었는데 대나무 구조의 바구니를 연상시키는 이 건축물은 '부화해서 성장하는 생명을 지키는 누에고치'를 상징하며 당시 많은 화제를 낳았었다. 엑스포의 테마였던 "순환형 사회"를 표현하기 위해 친환경적인 대나무를 이용하여 생명의 영원성을 품는 인공적인 프레임을 누에고치의 외피로 형상화 한 것은 지극히 일본다운 발상이었고 신비감과 조형미를 동시에 만족시킨 건축물이었다. 공기번데기가 암시하는 생명에의 영원성과 시각적인 청결, 자연미 그것에 대한 의문은 순수에 대한 서정적 신비감에 귀착된다 할 것이다. 아오마메가 수도고속도로 비상계단을 통과하며 1Q84년의 세계로 물리적인 진입이 이루어 졌다고 본다면 공기번데기는 '의문을 안고 있는' 정서적 진입에의 유도체로서 아오마메와 덴고 모두에게 내면의 통로(bridge)역할을 하였다고 생각한다. 

공기번데기의 외적 이미지는 누에고치를 의미하는 코쿤(cocoon)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하는데 최근 도쿄 신주쿠에 건립된 코쿤 타워(2008) 역시 나방이 되기 전에 마음껏 꿈을 만들고 미래를 준비하라는 의미의 염원이 담겨있는 건축물로 도쿄의 랜드마크가 되었다. 코쿤에 담긴 심리적 기호를 살펴보면 복잡하고 물질적인 현대사회에서 급작스런 위험이나 예측할 수 없는 현상으로부터 자신을 안전하게 보호하려는 하나의 보호막을 의미한다고도 볼 수 있다. 주인공인 덴고와 아오마메는 물론이고 주조연격인 후까에리, 고마쓰, 우시카와, 노부인, 다마루 이들 모두는 외부세상에서 도피하여 타자의 간섭없이 자신만의 공간 안에 머무는 성향이 있으며 혼자있는 시간과 공간을 가장 편안하게 생각하기에 타자와 어울리기 보다는 자신만의 일과 취미를 즐기며 칩거를 일상화하는 '코쿤족'에 속한다 할 것이다. 일본은 이러한 코쿤의 시각적 이미지를 유기체적인 인테리어나 디자인 상품에 많이 접목하여 젊은이들에 소구하는 대표적인 디자인 강국이다. <공기번데기>는 언뜻 보기에 뜬금없이 보이는 '의문을 안고' 있는 이야기였지만 실은 건축, 영상, 디자인 전반에 익숙하게 소비되던 일본의 문화적(상품적) 소재였던 것이다.   
<도쿄 신주쿠 코쿤 타워 / 2008> 


84      세 번째 이야기는 아오마메와 덴고가 각각 스포츠 클럽의 인스트럭터와 수학 학원강사로서 변함없는 일상을 아무런 의심없이 살고 있었던 '(문제는 있었지만) 문제를 인식하지 못한' 현실 세계의 이야기이다. 표면적으로는 1984년을 의미하며 소설 속에서의 실존적 현실을 상징한다. 이들에게 있어 1984년은 그해 일 년의 시간과 공간을 의미한다기 보다는 그들이 초등학교 때 헤어진 이후 서로 각자 지나온 이십년의 세월만큼의 누적된 시간과 이동하여 왔던 공간을 모두 의미한다고 느껴졌다. 즉, 그해 1984년은 1984년이 되기까지의 아오마메와 덴고의 현실이라 할 수 있었다. 사실, 1,2권을 읽을 때까지만 해도 조지오웰의 <1984>와 빅브라더로서의 리틀 피플을 하나의 전제된 공식처럼 연결지었었고 1984년의 일본에 일어난 역사적 사건과 사회분위기를 생각했었다. 그런데 3권을 덮고 난 지금 1984년은 달이 두 개가 아닌, 현실을 인식하고 그 현실 속에서의 자신을 부정하지 않는 지금 있는 그대로의 우리 세계라는 생각이 더 많아졌음이다. 즉 조지오웰의 1984년을 문학적으로 계승한다는 의미나 일본의 역사적 전환점의 시기로서의 1984년이라는 전제적 당위성은 작품을 덮고 난 지금 큰 의미는 없어졌다고 생각된다. 오히려 단순하게 일반인들에게 널리 공유된 시각적 기호로서의 상징성과 익숙함을 <1984>라는 작품에서 차용해왔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1984년이 되었건, 1985년이 되었건 어짜피 1Q84 혹은 1Q85는 존재 했을 것이라는 것이다.

단, 1Q84년이 없었다면 1984년은 1985년이나 1994년과 다를 바가 없는 의미 없이 흘러가는 세계일 뿐 이었을 것이고, 궤도상에서 이탈하지 않은 이유로 다시 돌아가야 할 필요가 없었을 종속적 개연성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 그것을 주목해야 했다. 이것은 1984년 때문에 1Q84년이 발생한 것이 아니라 1Q84년(비현실)을 통해 비로소 1984년(현실)의 의미를 깨닫게 된 것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떠났기 때문에 돌아와야 했고 돌아 올 곳이 있었던 이야기라는 점에서, 우리는 현실을 인식하고 제 것으로 받아 들이는 일은 결과적으로 현실을 이탈했기에 가능했다는 소설적 교훈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럼으로 1Q84라는 작품에서 가장 작위적인 이야기는 실은 1과 Q, 그리고 1Q84가 아닌 '84'의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었고 실은 두 개의 달이 떠오르는 세계보다 더 비현실적인 세계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개가 다시 하나로 합쳐지는 세계, 1984년의 현실이었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애초부터 소설적 낭만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는 생각도 들었다. 1Q84년이 소설 바깥이 아니라 1984년이 소설 바깥으로 느껴지는 시점의 착란 현상은 작품속에서도 원래 처해야 하는 현실(1984)이 지금 처한 현실(1Q84) 보다 지극히 비현실적으로 인식되도록 함으로써 어디까지가 가설이고 어디까지가 현실인지 그 경계가 모호하다는 인상을 심어주는데 성공했다. 시간과 공간에 있어 전혀 원근감과 이동성을 느낄 수 없도록 의도한 작가의 치밀한 전략이었다. 이는 어느 이야기건 이야기의 힘을 같은 밀도로 전달하는 하루키에 대한 신뢰도가 빚어낸 어쩔 수 없는 역반응일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내게 있어 1984년이 더 비현실적으로 느껴졌기에 온갖 비현실이 난무하는 현실이야 말로 진짜 현 세계일지 모른다는 깨우침을 얻게 한 '84' 스토리였다.

1Q84   비로소 마지막을 이룬 이야기는 1과 Q, 84의 이야기가 복합적으로 잘 구성된 이 작품의 실체이자 소설의 현실세계 1Q84의 이야기였다. 아오마메가 수도고속도로 비상계단을 타고 아래의 246번 도로에 내려갔을 때부터 바뀌어 버린 세계이기도 하고, 세계의 보편적인 룰이 느슨해져 많은 부분의 이성이 상실되어 가는 세계이면서 무언가 기존과는 다른 원리위에 성립되어 다른 룰로 운영되는 세계라 할 수 있다. 의문을 안고 있는 소설 <공기번데기>에서처럼 크고 작은 두 개의 달이 하늘에 떠오르고 리틀 피플이라는 존재가 사람들의 운명을 지배하는 부조리한 세계에서 사람들은 외톨이로 살아간다. 하지만 아오마메와 덴고는 다른 현실세계로 진입했음을 인지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각자 생명에의 위협을 느끼기 전까지는 여간해서 돌아갈 방도를 찾지 못하는 안타까운 행보를 보여 주었다. 다만 몇 가지 희망적인 사실은 같은 세계에서 같은 것을 본다는 것, 보이지 않아도 늘 서로를 생각해 왔다는 것, 각자의 인생에 서로가 운명적인 인물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정도였다. 만약 1Q84를 서로의 운명적인 첫사랑을 찾아가는 러브 스토리라 말한다면 1Q84는 이들의 만남을 기어이 유도하는 공시적, 통시적 배경으로서 소설적 당위성을 필연적으로 확보하는 치밀한 계획으로 준비된 세계였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현실 안에 가설이 있고 가설 안에 현실이 있는 진짜 세계를 향한 좌표와 자아의 위치찾기라 말한다면 진짜와 가짜가 공존하면서 공생하던 1Q84의 세계는 죽음이 아닌 삶의 구원을 받기위한 통과의례적 경계지대로서 엄청난 설득력을 확보한다 할 수 있겠다.

...통과하는 사람들

1Q84에서 두 주인공이 만난 주요 인물들은 그런 의미에서 다분히 채널러(통과하는 사람: channeler)의 역할을 지니고 등장했다고 보여진다. 1,2권에서 후까에리가 충실한 역할을 수행했다면 3권에서는 단연 우시카와일 것이다. 후까에리가 긍정이라면 우시카와는 부정적 채널러였지만 두 사람은 1984년에는 존재하지 않을 사람들로서 아오마메와 덴고의 비현실적인 현실세계에서 이들의 사랑을 더욱 극적으로 부각시키는 소중한 인물이었다.

후까에리는 가장 숭고한 행위를 담당하는 매개체로서 덴고의 정자와 희망을 채집, 수렴하는 종교적(이단적)인물이었다. 후까에리로 전달된 덴고의 정자는 후까에리 아버지 선구의 리더에게 전달되었고 그것은 자신의 죽음과 동시에 자신을 죽인 아오마메에게 남겨진다. 그녀가 창안한 <공기 번데기> 역시 현실과 비현실을 이어주는 '통과하는 이야기' 로서 1Q84의 세계에서 공유되도록 하였다. 

좀처럼 만날 기회가 없어보이던 두 사람이 2권의 마지막에서 한사람은 자살에 실패하고 한사람은 삶의 의지를 깨우쳤지만 감동적인 해후는 다음으로 기약할 수 밖에 없었다. 아오마메가 다시 찾아간 1Q84년의 출발점, 비상계단에선 출구가 막혀있었다. 죽음이 삶의 출구일 수는 없었던 것이다. 덴고는 쓰러진 아버지 병실에서 열 살의 아오마메가 빛나던 공기번데기를 선사받고 비로소 아오마메를 찾겠다는 다짐을 하였다. 하지만 이 두 사람이 서로 자력과 의지, 주어진 상황만으로 해후를 하기에는 서사의 흥미나 논리성이 부족해 보였던 것일까. 3권에서 등장하는 우시카와는 1984년과 1Q84년 사이에 존재하던 비상계단과도 같았다. 계단은 출발하는 상황에 따라 내려갈 수도 올라갈 수도 있는 전이공간이다. 바로 우시카와는 스토리 적으로는 두 사람의 만남을 훼방 놓는 역할이었지만 결과적으로는 두 사람을 만나게 하는 결정적인 실마리를 제공하는 안내자로서 이야기의 구심점이 되었다.

아오마메와 덴고는 초등학교에서 운명의 조우를 이룬 후 1Q84년에서는 어린이 공원이라는 접점지대에서 운명의 기운으로만 다시 재회한다. 그런데 주목할 사건은 같은 곳에 우시카와라는 제 3의 인물도 합세를 한다는 사실이었다. 우시카와는 3권이 시작됨과 동시에 그동안 이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었던 특별한 사람으로 1Q84년이 아닌 2Q84나 1Q85년에서 시공을 초월해 나타난 메신져처럼 느껴졌다. 3권의 존립당위성은 우선 우시카와라는 인물을 받아들이고 나서야 이루어 질 수 있었기에 나는 우시카와라는 인물을 처음부터 인정하기로 했다. 우시카와는 진전이 없어 보이던 이야기의 평행선을 허물어 뜨려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긴장감을 조성하며 훌륭하게 자신의 임무를 완수하였다. 우시카와가 펼치는 심리 변화와 논리 조합의 묘사는 그 디테일과 몰입도에서 아오마메와 덴고의 그것을 능가했다. 안타깝게도 소설 속에서 수행하지 못한 자신의 실수는 독자를 위한 확실한 희생이었던 것이다. 우시카와는 3권의 분량을 증가시킨 일등공신이자 아오마메와 덴고 두사람의 환타지를 현실화 논리화하는 조율자였다. 나는 우시카와가 죽음을 맞이할 때 두 사람의 만남을 기대하면서도 한편 그의 냉철하고도 집요한 분석을 더 이상 볼 수 없음에 몹시 아쉽고도 허탈했다. 현실에선 어디에도 발붙이지 못한 경계인으로서 삶을 마감한 우시카와가 뜻밖의 공기번데기를 재생해내는 이변(?)을 연출해 냄으로서 진한 연민을 대신해주긴 했지만 다시 생각해봐도 소설적으로 가장 근사한 캐릭터였다.

그를 통해 현실을 평생 비현실적으로 산다는 것 역시 죽음을 지향하는 삶의 태도일 수 밖에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시카와는 아오마메, 덴고와 함께 1Q84의 세계에서 두 개의 달을 목격한 유일한 사람이었다.(후까에리처럼 공기번데기와 일차적 인연이 없는) 하지만 그는 그 세계에게 자신만을 향한 진지한 성찰이 없었고 성찰이 없었다는 것은 자신이 넘어와 버린 세계에서 자신이 저지르고 있는 일에 대한 (도덕적)인식이 없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똑같이 두 개의 달을 목격했지만 자신이 처한 비현실적인 현실을 집요하게 고뇌함으로써 타의가 아닌 자의로 주체적인 의지를 가지지 못한 우시카와만이 죽음으로 재생되었다는 것은 자연스레 주체적인 태도와 긍정적인 행동으로 비현실의 현실을 헤쳐나간 두 사람의 행보와 비교되는 상징적 결말이었다. 비록 타의에 의해, 혹은 어쩔 수 없이 주어진 상황 때문에 자신이 원하지 않는 현실세계에 내던져 졌을지라도 계속하여 타의적인 삶에 모든 것을 걸었던 우시카와와 비현실적 현실을 선택한 것도 자신이요 그것을 극복해갈 것도 자신이라 생각한 두 사람과의 차이점은 비현실적인 오늘을 살아가는 세상의 모든 현대인에게 의미하는 바가 크다 할 것이다. 타자를 탓하지 않고 부모와 세상을 원망하지 않고 주어진 현실을 받아 들이고 그 속에서 현실을 이겨내기란 얼마나 비현실적으로 외롭고 힘겨운 것인가. 현실을 현실에서 이겨내지 못하는 사람은 현실에 남을 수 없다는 명징한 진리가 이토록 방대한 분량의 이야기에 무의식처럼 녹아 있었다는 사실이 소름끼치도록 섬뜩한 순간이었다. 세 사람의 결말을 보면서 나도 모르게 새삼 내가 처한 현실을 내 스스로 받아 들이고 있는지 이 세계가 내가 살고 있는, 앞으로 내가 살아가야 할 세계임을 확신하고 있는 것인지 처음으로 자문을 하게 되었던 것 같다.

...상실된 사람들

우시카와는 통과하는 사람이었지만 가장 처참하게 사라지는 사람이기도 했다. 후까에리가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고 스스로 종적을 감추면서 상실되었다면 우시카와는 타자에 의해 생을 마감하면서 소실되었다고 본다. 우시카와는 전지적 작가시점으로서의 작가의 분신이면서 사건과 사건의 논리를 가장 잘 끼어 맞춘 결과로 결국 두 사람의 로맨스를 가장 잘 이해한 단 한명의 사람이었다. 나는 우시카와가 사라지고 난후 직감적으로 작가는 더 이상 할 일이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동안의 긴장이 풀어지는 것을 체감했다.

두 사람이 초등학교에서의 만남 이후 각자 의지한 사랑 역시 주체적이지 못했기에 지속되지 못했다고 보여진다. 아오마메는 학창시절 다마끼라는 친구에게 모든 것을 의존했고 사회로 나와서는 아유미라는 여성과 동성애적 사랑에 매달리며 몸과 마음을 소비해왔다. 덴고 역시 연상의 유부녀와 반복된 패턴에 의한 성행위를 유지하며 진실한 사랑을 추구하진 않아왔다. 아오마메와 덴고가 스쳐온 사랑은 모두 정상적이지 않았고 상대의 실체가 아닌 그들이 생성하는 그림자 아래에서 자신을 숨겨 온 것이었다. 이렇듯 다마끼, 아유미, 연상 유부녀 모두는 자살, 살해, 실종이라는 공통의 운명으로 그들에게서 상실된다. 두 사람과 관계했던 여성들이 약속이나 한 것처럼 사라질 때 나는 어쩌면 그들보다 더 놀라곤 했었다. 그들의 상실은 아마 애초부터 예정된 작가와의 약속이었겠지만 특히, 아유미와 연상녀가 사라진 후 두 사람이 보여준 일상들은 '진실한 단 하나의 사랑'을 찾고 있던 두 사람을 정당화하기 보다는 '진실하지 않은 나머지 사랑'에 대한 댓가로 느껴져 많이도 씁쓸했음이다. 하루끼는 적어도 '상실'에 관해서라면 소설적으로 인정머리가 없는 편이었다. 그 외 후까에리의 아버지 선구의 리더가 아오마메에게 살해 당한 것은 작품에서도 의미했듯이 자신 스스로 죽음을 갈구했기 때문에 '자연사'에 가깝다 할 수 있으며 상실이라기 보다는 구원을 향한 실천으로 느껴졌다. 그는 죽기직전 아오마메에게 "자네는 무거운 시련을 뚫고 나가지 않으면 안돼. 그것을 뚫고 나갔을 때, 있어야 할 곳에 있는 것들을 목격할게야" 라는 의미심장한 유언을 남긴다. 그의 유언은 종교적 의미를 떠나서 결코 상실되지 말아야 할 소설적 진실이 아니었을까.

...감각의 사람들

이 소설이 특히 감각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실제로 주인공들이 인간의 감각에 의존하며 특정한 자신만의 감각에 탁월한 재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오마메는 초등학교에서 덴고의 손을 잡은 이후 촉각에서 보다 뛰어난 능력을 갖게 된다. 그녀가 노부인을 마사지 할 때나 선구의 리더를 살해할 때, 아유미와 유희를 즐길 때 촉각은 신체뿐 아니라 그녀의 의식, 무의식을 지배하는 독창적인 감각이었다. 덴고는 후까에리의 독특한 억양에서도 감정과 논리를 읽어내는 따스한 청각의 소유자였다. 그는 요양소에서 의식을 잃은 아버지에게도 소설을 읽어주며 무언 아닌 무언의 대화를 나누려 했고, 고양이, 올빼미, 기차등 환청과 유사한 소리에 자신의 의식을 정립하며 청각이상의 초감각을 발휘하기도 했다. 만져보지 않은 악기를 연주할 줄 알던 절대음감도 지니고 있었던 것 같다. 우시카와에게는 위험을 감지하는 본능적인 후각이 있어 사건을 추적하고 단서를 연결짓는데 누구보다 뛰어날 수 있었다. 이들은 모두 다른 세계로 이동하면서 그 세계의 시간과 공간에 맞서기 위해 감각이 더 예민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은 아닐까.

이러한 인간의 오감에 속하는 감각외에도 초인지적인 감각으로 해석되는 직감이나 위기 대응능력은 시련을 헤쳐 나가기 위해 주인공에게 작가가 부여한 일종의 무기로도 느껴졌다. 아오마메와 덴고는 비록 어렸지만 자기발로 억압된 상황을 탈출한 의지가 강한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자신들 앞에 놓여진 비현실적인 현실을 견뎌내기 위해 '시간과 공간의 이탈'을 향한 환상감을 방어기제로 사용했다. 아오마메는 자살 단념 후 은신의 시간을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라는 이야기로, 덴고는 아버지의 병실이라는 공간을 '고양이 마을'이라는 문학적 공간으로 관념적인 치환을 하며 자신의 온감각을 의지했다. 이는 현실을 도피 했다기보다 주어진 상황에서 다른 출구를 찾았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비현실을 어짜피 같은 비현실인 문학으로 이겨내게 한 작가의 의도적 장치가 흡사 그동안 자신이 시행해온 발걸음과도 같이 느껴졌던 부분이었다.

초능력적 감각의 절정은 아오마메의 임신이었다. 하지만 아오마메가 선구의 리더를 살해한 순간 수태된 무엇은 생물학적인 생명체를 잉태했다기 보다는 자신의 내면에 새로운 무언가를 탄생케 한 의미로서 생명성을 가진 개념체로 이해되었다. 그러므로 덴고가 아버지의 병실에서 본 공기번데기와 소녀의 분신은 아오마메의 임신을 상징하는 태몽으로 볼 수 있다. 개념체가 생물체가 되기 위해서 두 사람은 1Q84년에서 1984년으로 돌아가야 했었고 그곳에서 실제 성관계라는 행위를 통해 비로소 자신들의 생명체에 인간성을 부여 하게 된 것이다. 즉 1Q84의 세계에서는 단지 가능성에 불과했지만 1984의 세계에서는 눈에 보이는 현실성을 획득한 것이었다. 가능성은 곧 아오마메에게 있어 산다는 것(생존)이었고 그것은 곧 덴고와의 만남에 대한 실현 가능성(재회)과 동일한 의미였다. 그토록 간절히 바라던 '희망'이 '리얼'을 만들었다는 점에서 표현은 초감각적이었지만 장중한 여행의 값진 결론만큼은 문학적 고전성을 추구한 것으로 느껴졌다.

...머무는 사람들

그런데 누구나 다 달라진 세계를 인식하고 이전의 원래 세계로 돌아가려 했을까? 혹은 돌아갈 필요가 있었을까? 어쩌면 변화된 세계에서도 변화자체를 감지하지 못했거나 감지했다 하더라도 그것이 의미가 없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즉, 1Q84년이 끝나기 전에 돌아오지 못하고(돌아가지 않고) 그대로 그 세계에 머무는 인간들도 있었을 것이다. 원래의 현실로 돌아가야 할 절실한 이유가 없었던 사람들이라면 세계의 룰이 느슨한 그 곳에서 그런대로 그 생활을 반복하며 살아도 상관없었을지 모르겠다. 버드나무 저택의 노부인이나 그녀의 충신이자 아오마메의 수호천사였던 다마루, 덴고의 상사 고마쓰, 호스피스 병동에서 삶과 죽음의 경계를 정돈해주던 간호사들은 어쩐지 1Q84의 세계에 머무르려는 사람들로 보였다. 언제나 변함없이 그 자리에 있을 것 같은 그 사람들은 어쩌면 아오마메와 덴고 같은 사람들을 위해 그 세계에 꼭 필요한 존재였을지도 모른다. 이들은 모두 비현실이 현실보다 나은 사람들이 아니었을까. 나는 가끔 현실에서도 어느 세계에 살았어도 무방할 사람들을 목격할 때가 있는데 그들은 세상에 대한 적응력이 뛰어 나다기 보다는 세상 저편, 시간 너머 그 어디에서도 남들에게 피해주지 않으며(혹은 피해 준 것을 크게 생각지 않으며) 조용히 살아갈 사람으로 보였다.

3권에서 우시카와와 함께 인상깊었던 인물 중 NHK 수금원 역시 그곳에 머무르려는 사람으로 생각된다. 실제 수금원으로서 평생 사역당해 온 덴고의 아버지가 무의식의 세계에서 사람들에게 죽기 전 무언가 메시지를 전하려고 했다는 인상을 주기에 충분했던 그는 후까에리, 아오마메, 덴고, 우시카와의 집앞에서 연신 노크를 해대던 공포스런 인물이었다. 그는 실제로 비밀이 있었던 주인공들에게 자신은 그 비밀의 내용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당신들이 무언가 비밀을 숨기고 있다는 그 사실만큼은 알고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함으로써 그 비밀은 영원하지 않을뿐더러 비밀을 가지고 있는 한 계속해서 자신의 노크로부터 자유롭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경고한다. NHK수금원은 시청료를 지불하지 않은 비양심적인 사람들만을 향해 노크를 하는 사람이었고 덴고의 아버지는 그 일을 가장 잘 수행하던 사람이었다. 수금원의 섬칫한 목소리는 원하는 것을 손에 넣었으면 그 댓가를 지불하라는 자본주의 논리를 전달하는 보이지 않는 권력자를 떠올리게 했다. 그리고 저곳 현실세계로 돌아가려면 이곳 비현실 세계에 진입하여 여기서 누린 것들을 깨끗이 정리하고 가라는 수차례 경고로 느껴져 지극히 비현실적인 존재로서 가장 극명하게 현실을 깨우쳐 주는 멋진 존재였다.


달보고 오늘보다

이제, 간절한 바램이 현실로 이루어지던 소설의 결말을 떠올려 본다. 두 사람이 다시 찾은 수도고속도로에 비상계단은 막혀있지 않았고 그 출구를 통해 1Q84를 빠져나온 그들은 달이 하나인 1984년의 세계로 돌아온다. 아오마메는 드디어 덴고의 품안에서 콩깍지 안에 든 콩처럼 자신의 몸을 맡기며 덴고의 아오마메(靑豆, 푸른 콩)가 된다. 결국 덴고가 1Q84에서 보았던 열 살소녀의 공기번데기는 1984년의 아오마메(푸른 콩)로 현실화 된 것이었고 두사람의 결실은 아오마메의 푸른콩(태아)이 될 것이었다. 1Q84의 하늘에는 노란색 커다란 달과 초록색 이끼긴 작은 달이 나란했었지만 두 사람의 몸이 하나가 되듯 달은 하나로 빛나고 그 달빛아래에서 자신들의 소중한 생명에 미래를 약속하였다. 초록색 이끼긴 작은 달은 자신들의 과거 어두운 그림자 이면서 그들의 인생에 드리우는 미래 죽음의 그림자이기도 했다. 나는 두 개의 달 중 한 개의 달이 사라졌다기 보다 두 개의 달이 서서히 하나로 합쳐졌다고 느껴졌기에 그 하나 되는 과정에서 두 사람의 운명에 영향을 주면서 사라지고 남게 된 인물들을 점점 드러나는 달빛 속에 비춰볼 수 있었다. 1,2권에 주로 두 사람의 인생에 죽음의 그림자를 드리우던 인물들이 등장했었다면 3권에선 그 그림자가 서서히 걷혀가는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아오마메의 위험을 감지하고 결정적인 도움을 준 다마루와 의미심장한 충고를 마다않은 고마쓰와 도쿄로 돌아가라고 했던 간호사들...비밀을 가진 모든 사람의 무의식을 흔들어 대던 영원한 노크맨 NHK수금원까지 아쉬운 작별인사를 하며 나 역시도 소설바깥, 지금의 내 현실로 힘겹게...돌아왔음이다.

소설 속에서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만약, 덴고가 아오마메를 만난 후에도 소설을 계속 쓸 것이라면 과연 <공기번데기>에 그려진 세계를 그대로 계승하여 두 개의 달이 뜨는 세계에서 리틀피플이 등장하는 이야기를 그려 낼 것인가. 그때도 세계가 소멸한 뒤에는 어떤 왕국이 도래 할 것이며 내가 소멸한 뒤에는 무엇이 찾아 오는지, 나는 도대체 어디에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 것인지 나의 본모습과 세계의 본 모습에 천착할 것인가... 나는 소설 속에서 덴고가 그려낼 공기번데기의 후속작품이 바로 '바늘로 찌르면 붉은 피가 나는 현실세계'에서 하루끼가 창조해 낸 1Q84라는 작품이었다고 생각한다. 소설 속 덴고의 질문을 답으로 작성한 1Q84는 그래서 품에 안을 수 밖에 없으며 그 깜찍한 영민함에 박수를 보낼 수밖에 없음이다. 아오마메가 1Q84의 세계에서 잉태하고 1984의 세계에 등장게 될 그들의 소중한 새 생명은 분명 보다 완벽한 인간일 것임에 틀림없어 보인다. 가드너의 다중이론적 시각으로 보았을 때 덴고는 논리 및 수리지능, 음악 및 언어지능이 아오마메는 신체 운동지능, 자연탐구지능이 특히 발달된 것으로 보이므로 결국 좌뇌와 우뇌가 골고루 발달된 창의적인 2세를 기대해볼 수 있지 않겠는가. 이렇듯 모든 일은 이야기에서 시작되었고 하루끼가 직조해낸 이야기의 힘은 새로운 공기, 새로운 인간, 새로운 생명을 창출해 내었다. 자신의 목표를 당당히 성취하고만 작가정신에 고개 숙이지 않을 수 없다. 역시 그는 일본인이었으며 가장 일본적인 고뇌를 세계적 공감대로 끌어 올려 놓은 그의 능력이 한가위 보름달만큼 빛나게 느껴진다.

1Q84를 읽은 독자들이었다면 이번 추석에 떠오른 달을 보며 소원을 빌기 전에 확인한 사실들이 분명 있을 것이다. 이번 보름달은 더 깊고도 아릿해 그 달무리가 서정적으로 느껴졌다면 나만 그런 것일까. 우리는 대부분 과거나 추억을 떠올리며 그리움으로 달을 바라보지만 일 년에 단 한번 한가위 때 만큼은 자신의 앞날과 소원을 희망하며 달을 우러러 본다. 이 세계는 달이 하나이듯 우리의 삶도 한번, 그럼으로 죽음도 한번인 인생을 딱 한번만 살 수 있다. 하지만 그 하나뿐인 달은 다행히 한번만 뜨는 것이 아니고 어쩌면 우리가 바라보고자 할 때마다 늘 거기 떠 있었다고 생각한다. 달빛은 고맙게도 변함없이 우리를 지켜주고 기다리는 우리를 저버리지 않아왔다. 이제는 추억 때문에 달을 보는 것이 아니라 미래를 떠올리며 달을 바라보게 될 것 같다. 내 마음 한구석 어딘가에 자리 잡은 초록색 이끼낀 달그림자를 잘 어루만져 보고 커다랗고 밝은 달을 보며 지금 이 세계에 속한 나의 모습을 계속 투영한다면 결국 달빛만큼 근사해 질 것이기 때문이다. 달이 뜨는 횟수만큼이 결국 내 인생의 시간들임을 알겠다. 달빛 아래 누군가와 손을 잡고 싶은 밤이다.

혹시, 에소 주유소 광고판에 그려진 목격자 호랑이는 두 사람의 극적인 귀환을 축하하며 아마도 이렇게 말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나는 이 한마디를 얻으려 이토록 긴 이야기를 돌아왔던 것은 아닐까.


                                   " 인간은 희망을 부여받고, 그것을 연료로 목적으로 삼아 인생을 살아간다."
                                                        
  -1Q84/3, 112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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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9-30 15: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9-30 16: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울기엔 좀 애매한 사계절 만화가 열전 1
최규석 글.그림 / 사계절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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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있어 만화란 중학교 시절 황미나의 <안녕, 미스터 블랙>이 마지막이었다. 그 이후론 잘 기억나지 않는 이유들로 만화와 인연이 끊어졌기에 만화에 대해선 아직 '순정'이나 '로맨스', '환타지' 라는 장르적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한 보수적 독자층이었다. 그래서 나는 처음 이 작품의 제목을 보고 감히 만화일거라고는 상상조차 못했으며 최규석이라는 작가 또한 알고 있을 리가 만무했다. 그러니까 지금 내 심정은 대학시절 늘 그렇고 그런 헐리우드 영화를 보아오다 어쩌다가 학회에서 장산곶매의 <닫힌 교문을 열며> 같은 영화를 본 기분이라 할 것이다. 만화라 하기엔 좀 애매하고 그렇다고 웃기엔 더 애매한 이 작품은 며칠 전부터 시작된 가을바람 만큼이나 신선하고 놀라웠다.

먼저 이 작품의 참신한 미덕은 무엇보다도 '표현과 감정의 디테일'에 있는 듯하다. 작가는 처음엔 60페이지 분량을 생각했다가 어찌하다 보니 125페이지의 살인적인 작화작업을 헤쳐나왔다고 했다. 그도 그럴 것이 한 장 한 장 일일이 선화작업을 하고 채색한 컷수가 어림잡아 800커트가 넘어 보인다.(세어보면서 새롭게 발견한 그림도 있다) 길바닥에 떨어진 지라시에 전화번호까지 새겨넣는 세밀함을 배경의 기본으로 유지한 덕에 그 노동량을 페이지가 넘어가는 손끝에서 실감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렇게 공을 들인 덕에 요즘 일반만화는 물론이고 수채만화조차 접해본 일이 없었던 만화까막눈인 나로선 마른하늘에 떨어진 날벼락같은 행운이 아닐 수 없었다. 눈이 즐겁고 마음이 풍요로왔다.

공평한 꿈

하지만 그렇게만 말하고 말기엔 뭔가 좀 애매한 이 잔여감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턱없이 부족하다. 아마도 담겨진 이야기가 너무나 만화적이지 않다는 '리얼리티' 때문인 걸까. 작품에 등장하는 주인공은 김밥장사 어머니를 둔 강원빈 학생이다. 이름은 고급스럽지만 그의 외모는 원래부터 빈(貧)했을 것같은 뉘앙스가 물씬이다. 원빈이라는 배우가 생겨버릴지 미처 몰랐을 그의 부모의 센스가 아쉬울 지경이다. 실제로 작가는 미술학원에서 대학입시 만화강사로 일하며 학생들과 농담따먹기에 능했다고 했다. 그래서 작품엔 자학성 개그, 위악성 개그, 폭로성 개그가 난무한다. 원래 늘 거울로 확인하던 자신의 얼굴도 어느날 문득 정사진으로 새겨지면 그제서야 얼굴에 드리운 세월의 신산(辛酸)을 실감하듯 늘 보아왔던 서울의 거리, 동네학원가, 청소년의 뒷모습이 스틸컷으로 표현되고 나니 이토록 비정하고 짠할 수 있다니 새삼 우리 현실이 시려온다. 입시를 앞둔 청소년들의 실상이 그야말로 울기엔 좀 애매하지만, 그렇다고 화를 낼 수는 없지 않은가.


  
- 웃거나 울거나만 있는 건 아니잖아. 화를 내는 것도 가능하지 -

울기도 뭣하고 웃기엔 미안하고, 화내기엔 썰렁하고... 얼마나 익숙해지면 상처에 무던해 질수 있을까. 나는 주방에서 오래 일한 어느 주방장의 수천 번 데인 손등이나 하도 발길질을 해서 발톱이 문드러져 버린 축구선수를 떠올렸다. 분명 매번 아프고 견디기 힘든 외상일테지만 반복된 내성은 본질이나 형태까지도 변하게 할 수 있는 '고통의 성찰'단계, 아프긴 하지만 견뎌내는 방법을 잘 알고 있기에 '알 수 있는 슬픔'이자 그러기에 '두렵지 않은 슬픔'일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말하는 친구가 산전수전 다 겪은 아저씨, 아줌마가 아닌 꿈많은 십대 청소년들이다. 아... 이제 우리나라의 청소년들에게 '꿈 많다'는 무책임한 수식을 해서는 안되는 것일까.

많지는 않았지만 선명한 꿈은 있었다. 이혼한 어머니와 함께 사는 집안형편 때문에 재능을 포기할 뻔한 원빈이에게도, 합격한 대학에 어떻게든 등록금을 낼 수 있을 줄 알았던 은수에게도, 단점은 없지만 몇 년 동안 특성이 없는 그림을 그려내던 부잣집 딸 지현이에게도, 지현이보다 성적은 높았지만 수시합격에 떨어진 윤선이에게도, 술집에서 알바를 하던 은지에게도 모두 꿈은 있었다. 이들에게 꿈이 없었다면 현실은 오히려 더 편하고 그런대로 살만했을까. 이들은 모두 확실한 꿈이 있었기에 현실이 아팠다. 학원비는 그들이 키우는 꿈의 속도를 좇아오지 못하고 툭하면 밀리기 일쑤고, 겉으로 천민자본주의를 신랄하게 비난하던 서점 사장에겐 노동의 사기를 당하고 만다. 언뜻 보아도 누구라 콕 짚어 말하긴 거시기한 누구와 참 비슷하게 생긴 학원 원장은 강사에게 살짝 손댄 그림을 학생응모작으로 공모전에 접수하라며 돈 주는 애들을 위해 일을 하라 핀잔을 준다. 어른이 보기에도 어른 됨을 무지하게 후회하게끔 만드는 어른들의 얼굴은 거리의 전봇대나 어지러운 간판, 포장마차의 불빛과 어우러져 늘 그 자리를 지키던 길고양이에게까지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음이다.

불공평한 재능

학원이라는 같은 공간에서 사제지간에서도 그런대로 농담을 주고 받으며 꿈을 준비하던 이들에게 무엇보다 그냥 넘길 수 없었던 순간은 빈부격차가 곧 합격의 격차와 같을 수 있다는 사실이 자신의 꿈과도 무관하지 않다는 현실을 확인 하는 일이었을 것이다. 수시합격자 발표를 둘러싼 학원내부 비리 갈등은 비단 입시를 준비하는 학원에서만 일어나는 비극은 아닐 것이지만 태섭샘과 달리 세상이 더 편해 보이는 종화샘이 보여준 어른들의 야합과 학생들을 향한 기만은 그의 반반한 얼굴을 더욱 역겹게 하는 대목이었다. 때리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고 90도로 인사하던 지현이 부모님보다 걱정하지 말라던 종화샘도 분명 어른이 되면 세상을 바꿀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을 가진 시기가 있었을 텐데 말이다. 경쟁은 거기서 끝났지만 작품이후 지현이의 삶은 어떠했을까. 친구들 그림으로 만들어진 포트폴리오로 대학을 합격한 지현이는 대학시절을 떳떳하게 보낼 수 있었을까. 그렇게 기득권을 차지해버린 지현이가 부모가 되었을 때 다시 자신의 아이를 같은 방법으로 지원해 줄 것은 불을 보듯 뻔하지 않은가.

자신의 그림으로 자신이 응시하려고 한 대학에 합격한 지현의 소식을 듣고도 원빈은 윤선이 처럼 울거나 은지처럼 화내지 않는다. 머리 좋으면 놀아도 공부 잘하고, 재능이 있으면 그림도 금방 그리고, 얼굴이 예쁘면 살기 편하다고 그러니까 '돈도 재능이다'라는 말로 우린 그저 돈이라는 재능이 없었을 뿐이라는 슬픈 의견을 내비치고 만다. 아이들의 꿈을 담보로 학원에서마저 철저하게 모순된 부조리를 겪으며 그 순간을 이해해 버리고 마는 원빈이는 너무 일찍 철이 들어 버린 것일까. '운도 실력이다' 나 '부모도 능력이다', '얼굴도 재능이다'같은 우리 세대들의 넋두리에서 진일보된 '돈도 재능이다'는 이 작품의 명언이자 사실상의 결론이었다.

"돈 외에 명예 그런 것이 있다고 하지만 결국에 돈이 있으면서 다른 가치가 붙어 있는 경우에만 그 사람의 가치가 입증되지, 돈이 없는 상황에서 학식만 있는 사람은 학식이 입증 안된 것으로 판단된단 말이에요 대중들한테. 그런 것을 좀 깨고 싶은 생각이 있죠."     - 작가 인터뷰 중에서

작가는 명예나 학식은 독립적으로 입증되는 가치가 아니라 돈이라는 자본 위에서만이 비로소 그 후광효과를 톡톡히 얻을 수 밖에 없는 종속적 가치라 주장한다. 즉, 돈도 없이 명예나 학식을 입증하기란 소위말해 지들끼리 땅 따먹는 놀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돈은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는 것이라는 진부한 논리는 여기서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재능은 적어도 타고나는 것인데 돈이 재능이라면 지현이 같이 날 때부터 타고난 돈으로 원빈이나 재수생 은수보다 조금은 더 쉽게 명예나 학식을 손에 넣을 수 있을 것 같다. 세명 다 그림이라는 재능은 거기서 거기라 치고 돈이라는 재능에선 지현을 따라 잡을 수 없었기에 마치 백미터 달리기에서 50미터는 저만치 앞서 출발한 주자와 다를 것이 무엇인가. 암담하다. 아랑곳 하지 않고 열심히 기계처럼 그림을 그린 덕에 어찌하여 지현이와 같은 대학에 붙었다 하자. 그런데 마침 지현이도 어쩐 일인지 친구들에 대한 미안한 마음 때문에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고 탄탄대로로 좋은 직장을 배정받았다면 재능의 차이는 노력과 상관없이 절대로 좁혀지지 않는 것일까. 우리는 여기서 원빈이와 은수에게 지현이와 경쟁하려들지 말고 자신과 경쟁하며 오로지 자신의 부족함만을 채우라 말할 수 있을 것인가.

무엇으로 깰 것인가. 이작품의 마지막 장면에서 원빈이는 대학을 합격해 놓고도 은수처럼 '어떻게든' 등록금을 마련하지 못한 자신을 앞에 두고 그야말로 울기에 애매한 상황에서 울음을 터뜨리지 않으려 살아온 모든 내공을 발휘하고 만다. 이대로 끝인가? 슬픔을 일찍부터 내면화하며 누구의 탓도 하지 않아온 원빈이가 그 순간 만큼은 울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독자의 슬픔을 위해 원빈이의 슬픔이 가라앉지 말기를 간절히 바라는 바이다. 눈물로 외면화 될 수 있었던 원빈이의 외침이 sound off 되면서 막을 내리는 이 작품의 야속함은 우리 모두의 심장을 억누르며 차마 울지도 못하게 하는 비루함을 선사하는데 대성공 한다.

재능과 꿈의 동행

이 작품은 우리시대, 울고 싶은 십대를 위한 것이 아니라 십대를 울게 하는 나머지 세대들을 위한 작품일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마주칠 때마다 미안하고 눈돌릴 수 없다는 대한민국 청소년들을 향한 작가의 농담은 담배 한모금 들이 마시고 쳐다보는 가을하늘을 생각게 한다. 구름한점 없는 가을 하늘엔 왜 그리 떠다니는 것들이 많은 것일까. 작가의 분신으로 보이는 태섭샘은 수업중에는 지현이의 재산을 노리고 있는 것은 자신이라며 원빈에게 농담을 던지다가도 어쩐 일인지 아이들 입시전략이나 원장의 위선을 대하는 갈등해결 국면에서는 좀처럼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 인물로 표현된다. 아쉽게도 태섭의 사연과 관련된 에피소드를 삽입하지 않았다는 작가의 의도가 실제로 불의나 부조리 앞에서도 막상 팔 걷어 붙이고 투쟁하기엔 힘이 없는(아니 용기가 없는) 기성세대를 암시하는 것 같아 씁쓸하기도 했다. 그의 역할은 학원에서 원장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펜과 붓으로 아이들의 울기엔 좀 애매한 상황들을 멋지게 그려내는 일이었을 것이다.

원빈이는 '어떻게든' 등록금을 마련해 지현이와 같은 대학에 입학하길 바란다. 은수는 화장실에서 헤어진 여자친구와 선후배로 다시 재회하길(화장실 청소와 그녀의 독설장면은 이 작품에서 표현과 감정의 디테일이 가장 완성도 높게 어우러지는 명장면이었다) 바란다. 윤선과 은지도 정시모집에선 합격의 축배를 들길 바란다. 생계를 위해서건 미래를 위해서건 한때 만화를 가르치며 아이들과 현실의 위악을 견뎌낸 그가 이렇게 독특한 창작력으로 주목받는 만화가가 되었듯이 그때 그 친구들도 각기 원하는 곳에서 원하는 모습으로 어른이 되어주길 바란다. 울기엔 좀 애매해도 나를 위해 울기엔 쑥쓰러워도 한명의 친구를 위해 울어줄 수 있는 확실한 어른이 되어주길 바란다. 방법은 없다. 묘안이나 전략도 없다. 좋은 어른이 꼭 좋은 환경에서 좋은 청소년을 지내왔으리라 말하지 못하겠다. 다만 이미 어른 된 어른일지라도 좋은 어른이 되고 싶어 이렇게 만화도 넘겨보고 그만 미안함에 냉가슴이 되곤 한다.

늘 그 자리에 있었던 듯 트럭밑에서 눈을 부릅뜨던 길고양이를 떠올린다. 다 지켜보고 있었을 것 같은 유난히 파랗던 하늘도 생각난다. 인생은 길고양이의 눈과 눈부신 하늘 사이에 위치하는 것 같다. 고양이는 재능이고 하늘은 꿈인 걸까? 우리는 가끔가다 고양이를 벗삼아 먹이를 줄 때도, 눈이 부셔 그만 눈물이 나올 것 같은 하늘을 우러러 볼 때도 틀림없이 있을 것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 갈 길을 잃지 않고 앞을 보고 걸어가게 될 것이다. 재능과 꿈이 하나 될 그날까지 미련하게 반복 할 것이다. 그 외엔 없지 않을까? 


 
 - 어두운 주황과 카키톤의 모노톤을 유지하지만 하늘만큼은 파랑이었다 -



- 억지로 찍게된 사진이라지만 본인이 만족하는 것 같아 살짝 퍼왔다 -

그의 홈피에는 누가보아도 예쁜여자가 자신은 절대 예쁘지 않다며 한사코 부인 하는 류의 사람들이 제발 '객관적 지표로 볼 때 예쁘다'는 사실을 인정하기를 바란다고 한다.외모뿐만 아니라 자신의 재능에 관해 지나치게 겸손인 사람들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유무형의 자본을 부정함으로써 자신이 누려온 혜택을 은폐함과 동시에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겪었을 고통도 애초에 없는 것으로 만들어 버리기 위한 작전이라 말한다. 그래서 그는 '인물 덕을 봅니다'라며 당당히 말해왔기에 평판이 안좋아졌다고 말한다. 잘생긴 그의 얼굴만큼이나 마음에 드는 글이었다. (참고 : http://www.mokwa.net/

 < 덧붙임 >

오늘 새벽 (9.29) 우연히도(까마귀 날자 배떨어진 격으로)  KBS '책읽는 밤'에서  최규석 작가와의 인터뷰를 시청했다. 그는 아이들과 같이 보낸 그 시절에 이미 꼭 만화로 그 시절을 이야기 하는 것이 내가 아이들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라 다짐했다며 그래서 이 작품을 마치고 어떤 것보다 보람있었다 말했다. 외모는 도시적, 예술적이었지만 의외로 약간의 사투리 투박한 억양이 무뚝뚝하게도 느껴졌지만 표정에서 소설가의 서사를 읽을 수 있었다. 만화를 하려는 친구들에게 막연히 만화가를 꿈꾸지 말고 나는 어떤 만화를 그리겠다는 분명한 좌표를 오래동안 생각하라는 그의 눈빛이 진지해보였다. 우연히 좋은(?) 작가를 알게된 것 같아 기뻤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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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0-10-01 21: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만화 속 하늘처럼 요즘 가을 하늘도 너무 좋을만큼 파랗기만한데 왜 현실은 속시원하게 울 수도 없으면서도
그렇다고 웃을 수도 없을 정도로 애매할까요?? 만화가 다루고 있는 이야기와 한마음님의 글을 읽으니
뭔가 가슴이 먹먹하네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한사람 2010-10-02 12:24   좋아요 0 | URL

만화라 하기 참 애매한 작품이었던 이유는...
아마도..서사가 소설적이라는 이유때문인 것같아요
다분히 소설식의(?) 결말을 지향하는 듯해요
 
테러 비타 악티바 : 개념사 19
공진성 지음 / 책세상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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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러를 추억하다

9.11 테러 이후 미국을 방문했을 때 일이다. 그 해 나는 우연히 미국을 두 번 방문했는데 두 번째 방문에 그만 secondary 조사를 받은 것이다. 그날의 순간을 생각하면 다시는 미국을 방문하고 싶지 않을뿐더러 혹시 다시 방문하더라도 secondary이력이 내게 미칠 영향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당시는 미국 전 공항에서 자국인이 아닌 외국인 중에서도 특히 아시아인, 그중에서도 여성에게 보안검색을 까다롭게 할 시기였다. 나는 그날 샌프란시스코 공항 입국심사에서 어느 덩치 큰 흑인의 뒤를 따라 미국입국검사대 바로 뒤편에 따로 마련되어 있는 사무실로 인솔되었다. 영어로 내 자신을 변호할만한 실력은 되지 않았던 내게 무슨 일로 한해 두 번씩이나 미국을 방문했느냐, 직업에 대해 자세히 말해달라는 질문을 반복적으로 받고서도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삼십 여분 동안 되지도 않은 영어로 열을 올리고 나니 그제서야 공항 내 한국직원이 들어왔고 그 한국인 덕에 풀려(?)날 수 있었지만 그들은 내게 다른 외국인들과는 다른 출구에서 생화학적 세균을 제거하는 방역가스를 한차례 확실하게 살포한 후에야 보내주었다.(당시의 굴욕적이고도 창피했던 심정이란...) 지금도 여권엔 주홍글씨의 낙인처럼 secondary가 빨갛게 찍혀있다. 나중에 한국직원으로부터 들은 것이지만 secondary라는 것은 미국입국의 조건을 갖추지 못한 사람을 재조사 하는 곳이며 당신은 테러 유발 위험 인물로 기재된 중국인 여성과 인물이 흡사해 재수없게 조사를 받은 것이라고 했다.(테러유발자와 인상착의가 비슷하다니...이 얼마나 소름끼치는 소식인지) 돌아와서 우스개 소리로 그날의 일화를 이야기하곤 했지만 나에게 '테러'는 그저 뉴스에서만 접하던 아주 상관없는 남의 문제는 아니었던 것이다. 우리나라 역시 9.11테러와 직접적인 연관은 없었을 지 모르지만 지구상에 미국을 알고 미국과 인연이 있거나 미국을 방문하려는 아시아인들에게 '테러'는 어이없게도 가장 피부체감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책은 오늘날 '테러' 소식이 '오늘의 교통사고 사망자' 소식만큼 진부해졌다며 굳이 책을 사서 읽고 싶을 만큼 흥미로운 소재는 아니라는 말로 서두를 시작한다. 나 역시 9.11 테러와 미국방문 전에는 '테러'에 대해 그 단어가 가지는 실상과 피해, 그리고 영향만큼 진지한 성찰을 해온 독자는 아니었다. 요즘엔 보도, 교양, 시사가 아닌 예능 프로그램에서도 자극적이고 충격적인 상황을 '테러'에 빗대며 관용화하고 있지 않은가. 그때 secondary사무실에서 내가 영어를 유창하게 했다 해도 억울하긴 마찬가지 였겠지만(한국직원은 꽤 오래 나를 위로하기 까지 했다) 당시 영문도 모르고 방역작업까지 당한 나로서는 이 책이 일종의 보상장치로서 조금이나마 테러 해프닝에 위로를 제공해줄 것으로 믿었던 것 같다. 알고나 당하자...하는 진부한 의지였지만 책에 대한 기대는 내심 남달랐음이다.  

책은 얇은 두께에 비해서 상당히 논리적이고 그리하여 설득적이었다. 책을 덮고 난 지금 그동안의 내 오해와 무지에 대한 부끄러움은 물론 앞으로 발생하는 어떠한 '테러'에 대해서도 나름의 진지한 해석과 그로인한 시사적 견지를 시도해 보겠다는 야무진 태도를 심어주었으니 '실천하는 삶'이라는 뜻의 라틴어 Vita Activa 시리즈로서 '주체적인 삶과 실천의 방향을 모색'하고자 하는 출판의 목표는 충분히 달성된 듯하다. 하지만 행동이 아닌 개념적인 사고전환에의 실천은 그 시작과 과정, 결과 모두 많은 시간이 걸리고 효과 역시 눈에 보이지는 않을 것이라는 한계가 존재한다. 이러한 보편적인 한계 앞에 그동안 '폭력의 정치학'에 천착해온 저자의 질문들은 '정치'에 무심하고 '테러'를 외면해온 보통의 시민독자들을 위한 가깝고도 친절한 서비스로 느껴졌다. 그동안 '테러'와 '도덕', '테러'와 '정치'를 연결 지어 현상을 분석하기 어려웠던 나 같은 독자들은 이번 '테러의 정치학'에서 속속들이 얻어가는 영양분이 많을 것으로 생각된다. 

테러에 질문하다

아마도 이 책에서 가장 빛을 발하는 부분은 '테러리즘에 대한 도덕적 평가'를 설득력있게 결론지은 질문 들일 것이다. 도덕과는 멀어도 한참 멀어 보이는 테러와 도덕성사이에 펼쳐지는 직접 간접적인 역사적 배경과 사회적 개념의 변화들도, 상당히 흥미롭고 위험해 보일 수 있는 논조에서도 나름의 품격을 잃지 않는 객관성은 마지막 부분의 저자의 결론을 한층 부각시키는 일등공신이었다.

저자는 “테러리즘을 도덕적으로 비판할 수 있을 때에 오히려 우리는 정당하지 않은 방법으로 테러리즘에 맞서 싸우는 것 또한 비판할 수 있다”는 논리로 기실 도덕과 테러를 연결짓기 어려운 최초부담감을 테러를 진압하는 쪽을 향한 도덕성에 대한 질문으로 최소화하는 전략을 구사했다. 그리곤, 이어지는 결론으로 “기존 권력에, 또는 테러리즘에 어떻게 맞서 싸우는 것이 도덕적으로 올바른 것인지 질문하지 않고, 선험적으로 이러저러한 올바름을 전제하는 것이야말로 자유의 가장 위험한 적이며 테러리즘에 가장 우호적인 토양"이라며 어느 정도 현 정부를 의식한 질타성의 결론을 그것을 인식하는 다수 시민들에게 포커스를 이동해 '질문하지 않는 비도덕' 성을 날카롭게 지적하며 결국 끊임없이 비판하고 '질문하는 도덕'성이야 말로 테러리즘에 맞서는 가장 현명한 방안이라 주장한 것이다. 나는 도덕성의 여부를 질문이라는 학문의 가장 기초적인 동기유발 항목으로 기초화한 저자의 참신함과 우아함에 깜찍하고도 지적인 감명을 받았다. 우리는 그동안 TV에서 테러관련 보도를 접하면서 얼마나 질문하고, 무엇을 질문하였던가. 누가 나서서 일절 질문하지 말라고 억압한 사람도 없었건만 대부분 시각적인 이미지와 그 결과 몇 명이 죽었는지에 대해 놀란 가슴을 쓸어 내리고 다행히 이곳, 우리에겐 미치지 않는 사안이라 다행임에 안도하고 측은지심에 공감하는 것으로 테러를 감성적 컨텐츠화 해 오진 않았던가. 저자는 테러를 감성적 컨텐츠에서 이성적 컨텐츠로 느끼는 뉴스에서 질문하는 뉴스로, 시각적 정보에서 인지적 정보로 수동적 동정에서 능동적 도덕으로 전환되어야 함을 차근차근 부추기고 있었다.

그동안 일반인들이 테러에 두려워하고 공포감을 느꼈던 이유는 정치적이든 종교적이든 테러의 대상이 정작 정치 종교와는 무고한 시민이자 무작위로 선출된 사람들이라는 데 있었다. 그 대상에는 갓난아이를 포함한 여성, 노약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버스나 지하철, 비행기 등의 교통수단, 관청이나 백화점, 호텔, 관광지등의 불특정 장소를 가리지 않기 때문에 언제 어디서든 속된 말로 재수 없으면 여름휴가지 나이트 클럽에서도 목적지를 향하던 버스 안에서도 폭탄세례를 받을 수 있다는 다소 운명적인 자조성의 두려움이 많았던 것이다. 그런데 이 두려움은 마치 내가 아무리 운전을 잘하여도 상대방이 중앙선을 넘어 돌진해 온다면 재수없이 충돌하여 죽을 수 밖에 없다는 종류의 누구나 어쩔 수 없는 만연된 두려움과 다르지 않다는 본질적 모순을 안고 있다. 저자는 바로 이 혹시 어쩌다가 '나' 일 수도 있겠지만 설마 '나'이지는 않길 바라는 그 냉소적이고 소극적인 비겁함을 꼬집는다.

우리가 당연시 해왔던 학교나 군대에서의 테러의 방식과 연대책임 논리는 뒷통수를 얻어 맞은 듯 통렬했다. 학기 초에 수업분위기를 바로 잡기 위해 작은 실수를 저지른 학생을 필요이상으로 처벌하여 공포 분위기를 확산한다든가 간혹 가다 선택의 무작위성을 각인시키기 위해 모범생에게도 같은 체벌을 가함으로써 체벌자로서의 공평한 권력을 강조하는 것 모두 무고한 사람을 무작위로 계획하는 테러의 작동방식을 의미한다는 것은 참으로 충격적이었다. 군대에서 한명의 낙오자라도 생기면 전체인원이 동일한 처벌을 받게 하는 것은 같은 집단에 소속되어 있다면 억울하거나 무고한 사람은 없다는 연대책임론에 입각한 것이라며 그 정당화 논리 역시 테러리스트들의 논리이기에 도덕적으로 정당화 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저자는 '무고한 사람은 없다'의 의미를 '공존의 거부'로 인식하고 공존을 거부하고자 했던 반정치적 사고는 민족주의적, 종교적 테러리즘 뿐 아니라 우익의 백색테러도 마찬가지라는 견해를 제시한다.

공포를 이용한 지배와 저항의 역사를 서술하면서 로마 제국의 통치술부터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을 예로 든 것은 '테러'라는 말이 사용되기 이전에 테러는 이미 통치 방식으로서 자리 잡은 고도의 계산된 행위였음을 쉽게 알려주는 일종의 도입부 흥미 전략이었다. 특히, 한 두 사람을 본보기로 잡아 희생양을 만들고 지배적 분위기를 확고히 다지는 조직폭력배들을 빗대어 흔히 마키아벨리스트라 지칭하지만 '정치적인' 자비로움과 '개인적인' 자비로움을 구분한 그의 주장이 마키아벨리즘이라는 부정적 주의로 결론짓기 보다는 그가 주장한 '최소도덕'으로서의 공포를 '비도덕적 정치'가 아닌 '정치적 도덕'으로 해석해야 함을 지적한 부분은 참신하고 주목할만 했다. 비로소 '테러'와 '도덕'사이의 연결고리를 발견한 기분이었고 결국 정치적인 시각으로 눈을 돌릴 수 있었던 계기가 되었다.

프랑스 혁명과 러시아혁명의 시대를 질러오며 뇌리에 인상 깊었던 문구는 "두려워 하지 않는 대중"이었다. 스피노자에 의해 공표된 이 말이 "대중이 느끼는 공포"와 상반되는 "대중이 불러 일으키는 공포"라는 의미의 "공포의 상호성"으로 해석되었음을 서술하는 부분이었다. 두려움을 잃어버린 농민들이 귀족들의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다는 역사적 현상은 오늘날 분단시대를 살고 있는 한국인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쩌면 두려움이야 말로 시민을 가장 쉽게 통제할 수 있는 심리적 통치전략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기 때문이다. 적당한 긴장이 없으면 목표를 달성 할 수 없듯이 두려움은 철저하게 계획되어진 후 알맞은 시기에 제공되는 지배자의 선심과도 같다는 불신과, 테러는 그 연장선에서 이용되는 '최소도덕'일지 모른다는 회의에서 자유롭기 힘들었음이다.

저자는 무고한 시민들이 막연한 불안에서 헤어 나오지 못할 때 테러집단과 그 대응집단이 서로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 교묘하게 '정치적 맥락의 불안정'을 이용한다고 비판하고 있다. 서로가 가한 폭력이 각자의 입장에서 더 정당함을 주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예로 저자는 이데올로기가 사람들 간의 정서적 연계를 차단하여 공포의 확산마저 차단하여 온 단적인 사건, 독일의 유대인 학살을 제시한다. 독일의 국가사회주의는 독일인과 유대인간의 정서적 연계를 이데올로기 적으로 차단하여 유대인에게 가해지는 국가적 테러를 그저 '유고한'자들에게 가해진 것으로 따라서 '무고한'자신들과는 상관이 없게끔 인식하게 하였다는 것이다. 이 사실은 바로 올 초에 있었던 천안함 사건을 떠올리게 한다. 만약 내가 북한의 인민이었다면 북측이 남측에 가한 테러 역시 '유고한' 남한 사람들에게 가해진 것이기에 '무고한' 자신들에게는 미치지 않을 폭력으로 받아 들였을 것이라는 추측에 이르자 나는 테러와 도덕이면에는 각자 테러시행집단과 테러대응집단 그 하부에 소속된 무고한 시민들 마저도 '도덕성'에 자유롭지 못하다는 사실을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테러와 도덕은 결국 정치와 도덕, 그리고 인간과 도덕을 이야기 하는 것이며 이야기 할 수 밖에 없는 불가분의 관계였던 것이다.

매스미디어가 발달된 오늘날에는 테러의 목적 자체가 공포라는 심리를 확산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종족적, 계급적, 사회적, 민족적으로 뿌리 뽑혀있는 자신들의 정치적 근거를 마련하기 위해 제 3자를 끌어 모으는 홍보수단으로 활용하고 있다는 사실도 섬뜻하게 다가왔다. 또한 자살공격같은 희생정신이 부각되는 영웅적 심리나 죽음으로 구원받겠다는 순교자적 태도가 마치 지배자와 강자를 대하는 약자의 최후선택인 것처럼 면죄부를 획득하는 현상을 경계하자는 부분 역시 날카로왔다. 대중의 지지와 도움을 구할 수 없는 또는 구하려고 하지도 않는 정치적 약자가 가장 손쉽게 선택하는 수단이 테러이므로 물리적으로 약하다는 것 자체가 테러리즘을 호소하는 것에 당위성을 부여받아서는 안된다고 강조한다. 그렇다고 모든 정치가 결국은 테러리즘이라며 냉소적인 치부로 정치집단을 매도하는 것도 정당성 없는 공권력을 사용하는 집단에게 부도덕함을 희석시키는 기회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올바른 태도는 아니라고 설득한다. 테러를 일으키는 입장과 대응하는 입장, 그리고 바라보는 입장을 골고루 반영하여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는다는 공평함을 느낄 수 있었다.  

테러에 자유롭다

저자는 마지막에 도덕적으로 테러리즘에 맞서 싸우는 것이 정치집단에게만 해당되는 의무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늘상 테러에 노출되는 무고한 시민일지라도 테러리즘을 도덕적으로 비판하라는 충고가 이해는 되면서도 선뜻 자신있게 실행하기 어렵게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테러리즘에 대한 도덕적 비판'을 내 나름대로 '공포에 대한 올바른 인식과 판단'이라는 조금은 쉬운 강령으로 전환해 보았다. 우리는 지금 당장 전쟁이 일어나 수용소에 배치될 것 같지는 않아도 언제든지 내가 탄 비행기가 추락하거나 지하철에서 폭탄이 터질 수 있다는 공공장소에서의 테러불안에는 어쩐지 익숙하다. 공포는 이성을 마비시키고 궁극에는 우리의 자유를 빼앗는다는 점에서 살금살금 누적된 공포는 사실 야금야금 빼어먹은 자유의 질량과 동일 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1차적 사건 발생이후 2차적으로 이러한 공포를 가공, 확산시키는 실체를 파악하고 그것이 언론이 되었건 정부가 되었건 공포의 늪에 빠지지 않는 것이 우리가 자유로와 질 수 있는 대안이라고 보여진다. 무고한 민간인이자 테러와 폭력 혹은 정치 전문가가 아닌 일반인으로서 시민들이 테러발생이후 이러한 통찰력을 지니기는 쉽지 않아 보이지만 그리 불가능한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을 원하는지 모르는 것이 두려운 것이지 무엇을 원하는지 알고 있다면 다음은 선택의 문제이기에 원인을 알면 두렵지 않다는 두렵지 않은 것이 자유의 첫걸음이라는 이 책의 마지막 문구는 상당히 고마운 말씀임에 틀림없었다.

이 책은 테러라는 말이 사용되기 이전부터 역사적으로 시도되어온 테러리즘의 실례와 그 배경에서부터 혁명의 시대, 커뮤니케이션의 시대를 거쳐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정치와 도덕이라는 테러와 이율배반적인 주제를 쉽고도 공감하도록 논지를 정리하였다는 점에서 퍽이나 유용한 독서였다. 테러에 '무고한' 일반인 독자를 '유고한' 관계된 독자로 만들어 준 것에 감사하며 되도록 많은 유고한 독자가 늘어나길 기대한다. 테러를 나름대로 도덕적으로 비판해보기 위해 어쩌면 다음 테러를 기다려야 할지 모르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생겨버렸음을 나지막히 비밀로 하고자 한다. 타자와의 공존을 추구하는 테러 정치학은 독자와의 공생을 추구하는 실천하는 삶으로 남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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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0-10-01 21: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타 악티바 시리즈,, 분량은 얇은데 내용은 진짜 깊이가 있고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서 좋은거 같에요^^
아직 <인종주의>랑 <파시즘>만 읽어서 모든 시리즈가 괜찮다고 말하기에는 그렇지만^^;;
나름 내용이 좀 어려운 사회과학 분야 시리즈치고는 이 시리즈는 쉽게 읽을 수 있고 가격이 착해서 좋네요ㅎㅎ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한사람 2010-10-02 12:28   좋아요 0 | URL

아..비타 악티바 시리즈를 전혀 몰랐는데..
이벤트 지원을 할까 하다가..cyrus님 말씀 하시는 인종이나 주의...이런 것들은
아무래도 제가 잘 알지 못하는 관계로..그냥 저와 관련이있었다고(?)
여겨지는 테러를 한번 읽어봤어요^^

의외로 압축해서..할말을 힘있게 전달하는 책이더라구요
생각보다 유용했답니다~~

cyrus 2010-10-02 13: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실은 도서관에서 있었던 시리즈를 읽었을 뿐입니다^^;; 동네 도서관에 인종주의, 파시즘 말고도
노동가치, 정당... 저에게는 아직 생소한 개념의 시리즈 밖에 없어서 그냥 그 두 권을 읽은 겁니다.
테러도 읽고 싶었는데... 제가 다니는 도서관에는 없네요ㅠㅠ
 
대책 없이 해피엔딩 - 김연수 김중혁 대꾸 에세이
김연수.김중혁 지음 / 씨네21북스 / 2010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초등학교 6학년일 때 장만한 지 얼마 안 되던 컬러 TV에선 주말마다 프로야구를 했는데 그때 난 서울에 살고 있었으므로 당연히 MBC 청룡의 팬이었다. (서울에 사는 사람들은 그래야 하는 줄 알았다. 참..) 나는 당시 이 책의 저자들처럼 야구기록을 하진 않았지만 대신 그보다 유치한 야구게임(서로의 한손을 세워 가리고 동그라미에 색칠된 표식으로 스트라이크와 볼을 맞추던)은 빈번하게 했던 것 같다. 6학년을 떠올리면 나는 하늘색 나이키 런닝화와 청 플레어 스커트, 그리고 흰 블라우스만 생각난다. 거의 우리 반 여자아이들의 교복이나 다름 없었던 그 복장을 지독히도 혐오한(몰개성의 몰지각한 행동이라 비난시작) 나는 당시 나이키와 필적할 수 있었던 프로-스펙스 테니스화와 조다쉬 청바지(1개월 투쟁과 설득끝에)를 시위하듯 입은 채로 조용필의 단발머리와 고추잠자리를 낮이나 밤이나 불러대던 '어린 아이'였었다. 이 책을 읽고 내 기억은 그때 그곳으로 마구 달려가는 걸 막지 못했다. 그때 나와 같이 프로-스펙스를 신었던 친구가 한명이라도 있었다면 나도 이들처럼 같은 책에 이름을 올릴 수 있는 두 명의 작가 중 한명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대책없는 생각에 잠시 잠겨본 시간이었다.

그렇다. 나는 김연수 작가가 6학년일 때 같은 학년이었고, 그가 89학번일 때도 같은 학번이었으므로 그와 나는 갑장의 관계라 할 것이다. 그런데 나는 작년까지 인생사가 무척이나 바쁘던 사람이었기에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김연수'와 '김언수', 혹은 '김중혁'과 김경욱'을 명확히 구분하는 독자는 아니었다. 그러니 김연수 작가와 김중혁 작가가 김천 출신의 30년 지기 친구라는 것을 알 리가 없었다. 그들이 젊은 날 자취방에서 밤을 새며 이 시대의 문학과 그 시대의 부조리에 번민하고 계실 때 나는 남녀평등이 아닌 우리사회를 뼈저리게 실감하며 산업전선에서 날밤을 새고 있었다. 하지만 각자 다른 곳에서 다른 일로 밤을 새었을 지언정 그 격동의(?) 시기를 이 맨몸 하나로 헤쳐(?) 나왔다는 그 질펀한 동질감은 솔직히 그들이 어떤 이야기를 해도 그래 우린 그랬지, 그 마음 내가 알지...짜식들...요즘 애들은 모르지...이렇게 박수쳐줄 수 있는 독자는 얼마든지 되고도 남음이다.

핑퐁에세이라 했다. 한명이 '핑'하고 공을 던지면 한명이 '퐁'하고 받아주는, 잘하면 박빙의 탁구경기지만 어설프면 지들끼리 '잘 노는'꼴이라 할 수 있다. 주로 서브는 김연수가 맡는 것으로 보였다. 스파이크 역시 김연수가 강약조절을 하면 김중혁이 장단에 맞추는 것으로 느껴졌다. 이 두 사람을 비교할 일이 전혀 없었던 나로선 본의 아니게 주거니 받거니 하는 그들의 글을 넘기다보니 이 사람과 저 사람이 다른 점을 알게 되어 자연스레 그들의 매력을 도마 위에 올려 놓게 되었다. 그러기에 누가 동네 친구들끼리 책을 내라고 했나. 만약 저들 중 한명하고 황석영 혹은 이문열 작가가 합심하여 공동집필을 했다하면 내 이렇게까지 할 일은 없을 터. 하필 같은 세대라는 이 필연적인 우연을 이용해서라도 (이게 웬 떡인가 싶어) 다시없을 이 기회를 잘 활용하여 나는 그들을 내 맘대로 비교분석 할 수 있는 행운을 누릴 수 있었다.




무려 쉰다섯꼭지나 되는 두 사람의 글은「씨네21」에 '나의 친구 그의 영화'라는 제목으로 번갈아 쓴 칼럼을 묶은 것이라 했다. 그들이 '영화'를 보고 쓴 칼럼인지 미처 몰랐기에 순수한 에세인줄 알았던 나로서는 처음 적잖이 실망을 했었다. 몇 년 전에 김영하 작가가 같은 잡지에 칼럼을 기고한 글을 묶어버린 책을 우연히 접했는데 솔직히 영화전문가가 아닌 소설가들한테 영화평 하라고 원고주면 삼분의 이는 자신의 인생평으로 채운다는 걸 그때 이미 깨달았기 때문이다. 온전한 영화도 아닌, 그렇다고 완전한 인생도 아닌 뭔가 2% 부족함을 역시 그의 소설로 밖에 채울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 적이 있었기에 에고...결국 이들의 소설을 봐야하나 이런 생각으로 책을 들추었음을 고백하고자 한다.

그런데, 이번 件은 기획이 신선했다. 허물없는(어 보이는) 친구관계인 두 남자가 서로 상대친구와 영화에 대해 1년 동안 격주로 한번 씩 정리 한 글이니 요즘 유행하는 프로젝트 그룹 창민과 이현의 '밥만 잘 먹더라'가 퍼뜩 생각이 날 정도로 각자 잘나간다고 생각되는 작가를 (소속사에서) 한데 묶어 잘 프로듀싱한 반짝 앨범처럼 보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어느정도는 먹혔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들이 기본적으로 가창력이 뛰어난 가수였었고, 이들도 피튀기는 글빨을 무기로 갈고 닦은 실력파였기에 읽는 재미 또한 쏠쏠했음이다.

거기다가 두 사람이 글을 연재한 기간이 딱 2009년(우린 작년에 우리나라에 무슨 일이 일어 났었는지 우리조차 이해가 안되는)의 일 년이었기에 이야기의 흐름은 자신들이 본 영화 - 떠오른 옛날일화 - 작금의 현실 순으로 이어지며 인생은 알다가도 모르겠다는 식의 넋두리성 글들이 많아 핑퐁게임이라고만 하기엔 던지는 공의 무게가 진중해 보였다고나 할까. 두 사람은 툭하면 그놈의 '마흔'이라는 수식어를 붙여가며 잊을만 하면 현재 내 나이를 인식하게끔 하여 웃다가도 입을 다물게 했다. 모르긴 해도 아마 나처럼 마흔의 감기나 불혹의 체증을 꽤 오랫동안 겪어내고 있는 것으로 보여 마음이 짠한 구절이 많았던 것도 부인치 않겠다.

두 사람의 이야기가 반복되다 보니 어느 순간엔 글 시작 페이지에 그려진 인물 아이콘이 없어도 누가 썼는지 자동적으로 알아졌는데 김연수 작가의 글에서 어린 시절 내 모습과 대학시절 고민, 과거에 대한 우수한(?) 기억력, 정치적인 견해가 일치해서 였는지 나와는 성향이 많이 다른 김중혁 작가가 참으로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몇 개의 단편에서 김중혁이라는 사람은 꽤 매니아적인 기질이 있는 아웃사이더로 인식되었기에 자신이 관심가는 분야에는 철저하고 그렇지 않은 분야에는 도통 관심이 없어 보이는 그의 기질에 충분한 공감이 되었고 (김연수의 표현에 의하면)예술가 성향이 강하다는 김중혁의 유머는 두어 번 배꼽을 잡고 뒹굴 정도로 급소를 정확하게 공격당했다.

굳이 온도를 재보자면 김연수는 1도가 뜨겁고 김중혁은 1도가 차가운 것으로 느껴졌다. 목소리로 보자면 김연수가 아나운서 톤이라면 김중혁은 성우톤이었다. 기타로 치면 김연수는 C나 F, 김중혁은 D나 E코드...직업으로 보자면 김연수는 기자가 쓴 글 김중혁은 건축가가 쓴 글....이상하게도 그랬다. 똑같은 영화를 이야기 하고 같은 추억을 떠올리고 어느 한사람 웃기지 않은 구절이 없었음에도 나는, 그렇게 느껴졌다. 슬픔에 대해서라면 김연수는 울컥하기 까지를, 김중혁은 울컥 한 후를 말하는 것 같았다. 그러니까 김연수는 이렇게 된 자신을 돌아 보는 시간이 많았던 것 같고, 김중혁은 지금 이후 앞으로의 자신에 대해 더 걱정인 것으로 생각되었다. 어쨌거나 두 사람은 허물과 장점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 친구들로서 나로 하여금 친구가, 글쓰기가...친구와 글쓰기가 사무치게 그립도록 만들었다. 작가들끼리 친구가 되기가 쉽지 않다는 말을 어디서 들은 것 같았는데 다행히도 이들은 작가가 되기 훨씬 전부터 이미 친구였기에 오늘날이 가능하지 않았나 싶었고, 재능이라는 것이 얼마간 재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겐 늘 비슷한 재능을 가진 상대의 재능이 부럽고 더 커 보이는 열등감을 부르기 쉬운 문단에서 적어도 그러한 질투와 시기심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자신의 편을 태어날 때부터 배정받은 사람들로 느껴져 나는 그들의 관계가 너무나 질투나고 부러웠다.

김연수의 글에선 미키루크를 보고 인생을 깨달았다는 이야기가 꼭 작년의 나와 같아 이 사람이 나와 같이 영화를 보았나 착각이 들 정도였다. 신촌의 동시개봉 영화관에서 보았다는 <나인하프 위크>, <투문 정션>, <카프리의 깊은 밤>은 나 역시도 모조리 본 영화였고 그중에 킴 베이싱어와 미키루크가 보여준 신기의 과일정사신은 우리시대 베드신의 고전으로 남지 않았던가. 그 꽃미남 미키루크가 <더 레슬러>에서 이마에 호치키스를 박는 레슬러로 변신할 줄, 아니 망가질 줄 나는 그 영화를 보기 전까진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었다. 그 영화를 보고 그날 화장실에서 나는 내 얼굴을 꽤 오래 쳐다보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가 <전원일기>의 등장인물을 일일이 열거해 가며 원고의 80%를 (영화가 아닌 전원일기의)드라마의 배경과 전체줄거리로 정리할 땐 그만 눈물이 핑 돌 지경이었다. 특별한 조연이었던 노인 삼총사를 기억하고 있다니...갑자기 전원일기의 주제곡이 귓전에 들려오던 순간이었다. 그는 필히 혜은이를 첫사랑으로 짝사랑 했을 것이다! 그 시절을 연도별로 기억하는 내 기억속의 혜은이는 1979년도 가수왕이었다. 강물은 흘러만 간다던 그대와 나의 꿈을 싣고서 흘러만 간다던...그때 우린 열 살이었다.


<전원일기와 김연수...>

웃다가 울면 어디가 어떻게 된다고 했더라...김중혁의 글은 키득키득 웃다가도 방심한 그 순간 처절한 한방에 무너지는 격이다. <김씨 표류기>에서 자살을 결심한 주인공이 그만 샐비어를 따먹고 달작지근한 딱 그만큼의 희망으로 다시 일어난 장면을 떠올리며 노무현 전 대통령이 뛰어 내린 부엉이 바위 주변에 샐비어라도 있었다면 혹시라도 그를 붙잡을 수 있었을까 하던 그의 안타까운 심정은 지난 일년간 잊고 있었던 그 무엇을 꾹꾹 눌러버리는 것 같아 숨쉬기가 쉽지 않았다. 그는 <마더>의 마지막 장면인 김혜자가 춤을 추는 모습에서도 자신의 부모님이 관광버스에서 넋놓고 춤을 추시던 모습을 회상하며 그때 춤사위를 부끄러워 하던 자신이 부끄러워 숨을 쉬기가 힘들었다고 고백한다. 그가 제시하는 관람 그래프 분석과 모기향 인생론은 그의 단편에서도 자주 확인하던 아이디어 스케치의 한 페이지를 들쳐보는 기분이었다. 그는 그런 식으로 무엇이든 기발하게 단순화는 재능을 타고난 사람으로 보였고 김연수는 그런 그를 무척이나 즐거워 하는(자랑스러워서) 듯 했다.



<마더, 김혜자 그리고 김중혁...>

두 명 다 작가이다 보니 간혹 가다 뼈있는(그래서 뼈아픈)문구들을 물 흐르듯 잘 위치시켜 역시나 키득키득하던 내 가슴을 서늘하게 할 때도 있었다. 주로 은근하게 배수진을 치는 김중혁은 총제적으로 견해를 밝히고 김연수쪽은 구체적으로 서술한다. 툭 던지는 한마디의 김연수는(이때는 기자필이 예리하다) 대 여섯 번 15년차 작가의 내공을 올곧게 느낄 수 있는 구절들을 선보이며 자신만의 논리도 자신있게 밝히고 있었다. 그중에 마지막 부분에 이르러 나는 참았던 밑줄을 기어이 긋고 만 구절이 있는데, '치졸하게 느껴질 때, 그건 진실일 가능성이 많다.' 아...나는 비교적 내 삶에서 우아하지 않았던 지난 일년 간을 떠올리며 그것은 현재 마흔, 우리에게 딱 어울리는 지금까지의 중간결론임에 적극 동의하는 바이다. 포괄적이고 우아하고 잘난 것은 진실이 아닐 확률이 높은 것...그래, 어쩌면 두 사람은 서로 치졸한 서로의 구석까지 알고 있기에 진실한 친구 일 수 있겠지 싶었다. 치졸하기 까지 하면서 진실하지도 않다면 인생은 얼마나 슬픈 것인가.

두 남자의 영화를 빙자한 1년간의 수다가 말처럼 가볍지만은 않은 독서였다. 순간 그들이 여자들이었다면 어떠한 글이었을 지 궁금했고, 대책없이 해피엔딩의 시리즈 격으로 그렇게 친구인 작가들이 주거니 받으니 글을 쓴다면 우리로선 재미난 구경이 될 것 같았다. 이 책을 덮고 나니 우연인지 내 앞엔 가을이 다가와 있었다. 술이든 차 한잔이든 마시며 요즘 화두인 '공정'이나 '정의' 같은 이야기를 나누어 볼 듯이 만나서 요즘 컴백한 F.T 아일랜드의 새 노래 들어봤냐며 농담이나 주고받을 친구가 너무도 그리워진 시간들이었다.

이 책은 영화를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오래된 친구와 사소한 것들을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교환하는 이미 친구인 사람들이 나누어 가진 우정에 대한 이야기 였다. 그들의 방식은 치사하게 부러울만큼 근사했고, 그들이 나눈 우정은 김천의 세월만큼 퍽이나 질겼다. 소재가 된 영화는 노래방에서 새우깡이냐 양파깡이냐의 차이일 뿐 무엇이 되었든 동일하게 근사하고 질겼을 것이다. 김연수와 김중혁이 각자의 톤으로 돌아와 자신들만의 무기로 사람들을 불러 모을 다음의 솔로앨범을 기다려 봐야겠다. 그러는 와중에 난 혹시나 바뀌었을 지 모를 친구들의 전화번호나 뒤적여 볼 생각이다. 이 가을이 가기 전에 꼭!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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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9-13 23: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9-13 23: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이조부 2010-11-09 09: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최근에 구입한 책이네요. 이 책 재미가 좋아요~

님의 블로그 구경 잘하고 갑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