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피아빛 초상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06
이사벨 아옌데 지음, 조영실 옮김 / 민음사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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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에 산 첫 번째 책이다. 이번에는 사두기만 하지 않고 바로 때려 읽었다. 왜 재밌으니까. 그리고 에피쿠로스의 후예답게 즐거움, 몰입 그리고 의미까지 모조리 잡은 최고의 책이었다. 작년 여름에 이사벨 아옌데의 <영혼의 집>을 사서 좀 읽다 말았는데, 그리고 연말에 산 <바다의 긴 꽃잎>도 바로 읽기 시작했다. 이래서 책은 미리 사두어야 한다는 거다. 흐름이 끊기지 않게 말이지.

 

소설의 시작은 1880년 어느 가을의 화요일이다. 화자가 태어났다. 엄마의 이름은 미국 샌프란시코에 살던 절세미인 린 소머스. 생부는 마티아스 델 바예, 소설에서 아마존 여전사급의 신화적 인물로 등장하는 파울리나의 맏아들이다. 공화국 여신상 모델로까지 추앙받던 린은 딸 아우로라(중국 이름으로는 리밍)를 낳고 곧 죽었다. 화자의 탄생부터 무언가 파란만장 썰이 펼쳐질 것 같은 예감이 들지 않은가.

 

칠레 출신의 파울리나는 펠리시나오와 눈이 맞아 가족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사랑의 도피를 감행한다. 아마존 여전사의 치부 능력은 남자들의 그것을 훨씬 뛰어 넘었다. 손대는 사업마다 대박이 터진다. 미국에 철도에 깔릴 시절에는 철도 산업으로 한몫 단단히 챙겼다. 적어도 소설의 주인공들이 먹고사니즘을 걱정하지 않기 위해서는 이런 든든한 재정이 필요한 법이다. 주인공 아우로라처럼 당시 최신 기술이었던 돈이 많이 드는 사진을 찍으려면 장비나 암실 그리고 엄청난 비용이 드는데 당시 가난뱅이들로서는 꿈도 꿀 수 없는 그런 상황이리라. 그러니 훗날을 대비한 작가의 빌드업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피렌체 장인이 만들었다는 넵투누스 침대의 두 개의 거대한 바다를 건너는 화려한 배달 의식은 실로 장관이었다. 이 정도의 압도적 장관 정도가 등장해야 이야기에 몰입할 수 있는 자락이 깔리나 싶을 정도로 말이다.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경우도 마찬가지지만, 라틴 아메리카 작가들 특유의 집안/가문에 대한 집착은 <세피아빛 초상>에서도 어김 없이 등장한다. 아마 그쪽 동네 소설의 특징이 아닌가 싶을 정도다. 최소 3대는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는 말이지. 어떤 면에서 우리의 그것과 유사하다는 느낌도 들었다. 그리고 종교와 보수주의는 기성 세대를 규정하는 특징으로 등장한다. 당연히 새로운 세대, 그리고 주인공들은 그런 과거의 인습을 인정하지 않고 뽀개는 투사로 등장하는 클리셰이도 빠지지 않는다.

 

아마존 여전사 파울리나는 그런 점에서 선을 넘지 않는 인물로 그려진다. 다음에 중요한 인물로 등장하는 인물이 바로 매력적인 남자 세베로 델 바예다. 파울리나가 자신의 아들들보다 더 유능한 인물로 어쩌면 자신의 사업을 보좌할 미래의 변호사로 꼽은 이가 바로 조카 세베로였다. 세베로는 어찌어찌하여 내기로 절세미녀 린을 품은 사촌형의 딸 아우로아의 법적 아버지가 되길 마다하지 않는다. 고향 칠레에는 그를 사랑하는 미래의 아내 니베아가 있는데 말이다. 훗날 그 둘은 무려 15명이나 되는 아이들을 생산한다.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전직 장교 출신 세베로는 사랑하는 린을 잃고 실의에 빠진다. 기껏 사랑하는 연인 니베아까지 버리고 장가를 들었는데 졸지에 자신의 애도 아닌 아우로라까지 거둬야 하는 홀아비 신세가 된 것이다. 이 지점까지가 델 바예 가문의 성쇠와 세베로 연애 스토리가 주를 이루었다면 다음 무대는 전쟁과 내전이다.

 

187945, 칠레는 당시까지만 해도 패자 노릇을 하던 페루와 볼리비아를 상대로 태평양전쟁(War of the Pacific)을 시작했다. 이 부분을 좀 더 이해하기 위해 인터넷에서 기사와 논문까지 찾아보기도 했다. 역시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읽기야말로 즐거움의 원천이 아니던가. 전쟁의 발단은 아타카마 사막과 당시까지만 해도 볼리비아 영토였던 안토파가스타 지역에서 나는 구아노와 초석 채굴에 대한 것이었다. 산업화 시대에 천연 비료인 구아노와 화약의 원료가 되는 초석은 한 마디로 돈이 되는 사업이었다. 볼리비아는 칠레 사업가들에게 자국 원료 생산을 허가하고 면세 조치를 약속했지만, 나중에 뒤집어 버렸다. 그 결과, 갈등이 폭발하면서 전쟁까지 치르게 된 것이다.

 

15세기 스페인 정복자들 중에서도 가장 호전적인 이들만이 당시 세상의 끝인 칠레 정복에 나섰다고 한다. 서방의 지원을 받는 칠레 병사들은 소설에 따르면 야만적이었다. 소설에 자세하게 나와 있는데, 전쟁 초기에 칠레 VS 페루-볼리비아 동맹군의 전력은 비등했지만 전세가 칠레 쪽에 유리하게 전개되면서 결국 칠레군이 페루의 수도 리마를 함락시키고, 볼리비아에서 안토파가스타 주를 빼앗는 대승리로 전쟁은 종결되었다. 볼리비아는 졸지에 태평양으로 나가는 영토를 상실하고 내륙국가로 전락해 버렸다. 이 전쟁의 여파는 아직까지도 해결되지 않고 여전히 칠레-볼리비아 국경에서 분쟁의 원인이 되고 있다고 한다.

 

사랑하는 린을 잃고 오로지 죽기 위해 이 야만적 태평양 전쟁에 참전한 세베로 델 바예는 수도 리마 공략을 앞두고 적(여성!)의 도끼날에 맞아 왼쪽발을 절단하게 된다. 그리고 든든한 빽으로 후방으로 이송되어 니베아의 초월적인 간호로 목숨을 구했다. 그리고 보니 <바다의 긴 꽃잎>에 등장하는 주인공 빅토르 달마우도 전투에서 왼발 부상으로 다리를 절게 되지 않았나. 무언가 닮은 점들이 많이 연결되는 아옌데 작가의 설정이 아닌가 싶다.

 

아 그리고 보니 몇 대째 중의(中醫) 출신으로 린의 아빠로 등장하는 타오 치엔에 대해서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어쩌면 화자 아우로라의 아빠 노릇을 실제적으로 한 사람이자 훗날 그녀의 악몽의 원인을 제공하기도 하지 않았던가. 중국인 배척 조례라는 합법적인 방식으로 중국인들이 개와 비슷한 대접을 받던 시절에, 샌프란시스코 차이나타운에서 인술을 베풀던 인물로 평생의 연인 엘리사 소머스와 결혼(?)해서 맏아들 럭키와 린을 낳았다. 동시에 성노예로 팔려온 싱송 걸들을 구해내는 슈퍼히어로 같은 인물이기도 했다.

 


다시 아우로라 이야기로 돌아가 그렇게 칠레 현대사를 관통하는 사건들을 아옌데 작가는 곳곳에 의도적으로 배치해 두었다. 이사벨 아옌데가 아니었다면 내가 어떻게 칠레의 열 번째 대통령이 호세 마누엘 발마세다였고 내전을 치르다가 자살하게 되었는지 알 수 있단 말인가. 혁명과 내전의 아수라장 속에서 조국으로 돌아온 파울리나 델 바예는 매 순간마다 돈벌이의 기회를 놓치지 않는다. 태평양 전쟁 당시에는 불안한 사람들의 설탕 소비가 폭발할 거라는 예상 아래 투자한 설탕 투기 사업이 역시나 대박이 터진다. 남편 펠리시나오가 죽은 다음, 새 남편으로 들어선 영국 출신 집사 프레데릭 윌리엄스와 프랑스 포도주에 대항할 만한 칠레 포도주 생산을 위해 말년을 투자한다. 역사와 사회적 현상들을 다루는 작가의 놀라운 솜씨가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최근 빵에서 풀려난 정치인이 언젠가 FTA로 값싼 칠레산 포도주를 마실 수 있게 되었더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데, 지금도 이마트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칠레에서 바다 건너온 적포도주의 연원이 그렇게 된다는 말이지.

 

그렇게 미국 샌프란시스코와 칠레의 산티아고를 오가는 신명나는 빌드업이 끝나고서야 비로소 화자인 아우로라 델 바예, 자신에 대한 이야기가 시작된다. 엄마만큼 아름답지 않았던 아우로라에게 생부 마티아스는 아름다움은 저주라는 말을 했던가. 5살 때, 외할머니 엘리사 소머스는 손녀딸을 파울리나에게 보내고 죽은 남편의 시신을 홍콩에 묻기 위해 칠레를 떠난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거의 죽을 지경이 되어서야 나타난 생수 마티아스와 만나게 되는 아우로라. 참으로 기구한 운명이 아닐 수 없다. 13살 때부터는 코닥 카메라를 선물로 받아 사진 명장 돈 후안 리베로에게 사진수업을 받기 시작한다. 물론 처음부터 쉽게 진행된 건 아니고, 델 바예 가문의 정통 혈통다운 똥고집으로 스승에게 사사받기 시작한다. 파울리나는 처음에 돈으로 명장을 매수하려 하지만, 돈으로 모든 게 다 되는 건 아니라는 걸 예술가는 몸으로 보여준다.

 

공교육을 거부하는 아우로라는 사회주의자 출신 개인교사 마틸데 피네다 양와 황금시대 서점의 돈 페드로 테이 그리고 자신의 법적 아버지 세베로의 영향을 받아 주체적 아가씨로 성장한다. 당시로서는 최신 기술이었던 카메라에 예전에 회화가 담당하던 귀족이나 귀부인들의 사진을 찍는 대신, 칠레의 가난한 사람들이나 인디오들 같이 사회에서 소외당한 사람들의 모습을 담았다. 사진은 그런 점에서 현실을 포착하는 이미지인 동시에 역사의 기록이라는 사실도 주지할 수기 있었다. 물론 셔터를 누르는 이의 감정도 피사체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말도 작가는 빼놓지 않는다.

 

오래 전, 열화당에서 나온 세계적인 사진작가들이 찍은 세기의 사진들을 보면서 나도 이런 사진들을 찍고 싶다고 생각했던 시절이 떠올랐다. 장비나 여건 그리고 스킬은 아마 그 시절보다 훨씬 나아졌지만, 그 때의 열정은 사라져 버렸다. 필름 카메라 시절, 비싼 필름값 때문에 사진 한 장을 찍을 때마다 호흡을 멈춰 가며 신중하게 누르던 셔터 찰칵은 디지털 카메라 시절에 아무런 부담 없이 거의 수백장의 연속촬영을 하더라도 아무 부담 없이 더불어 생각 없는 셔터 찰칵으로 치환되지 않았던가.

 

이사벨 아옌데는 양친과 유일한 혈육 파울리나를 잇달아 잃은 기구한 아우로라의 서사를 풀어내기에 앞서 다양한 종류의 떡밥들을 투척한다. 그리고 나서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방식이다. 칼레우푸 농장 출신의 호남자 디에고 도밍게스와의 결혼 그리고 이어지는 막장 드라마, 칭기즈 칸 이반 라도빅과의 우정을 빙자한 연애 그리고 마지막 퍼즐을 완성하기 위해 16년 만에 나타난 외할머니 엘리사 소머스의 등장에 이르기까지 숨가쁜 전개가 이어진다. 그야말로 가능한 모든 서사의 원형을 담은 소설이 바로 <소피아빛 초상>이지 싶을 정도다.

 

말이 필요 없다. 오래 전에 출간되었다가 다시 나온 <소피아빛 초상> 단 한 권으로 바로 나는 이사벨 아옌데 작가의 팬이 되어 버렸다. 이 소설은 내가 원하던 몰입, 즐거움 그리고 의미를 모두 충족시켜주었다. 계묘년 연초부터 이런 좋은 소설을 만나게 되다니, 되는 대로 살자가 모토인 나에게 마음에 쏙 드는 그런 신년 선물이지 싶다. 어제부터 <세피아빛 초상>도 못 다 읽은 상태에서 읽기 시작한 <바다의 긴 꽃잎>을 읽고 나면 이사벨 아옌데 삼부작 <영혼의 집>에 도전해봐야겠다. 언제나 그렇지만 좋은 책과의 만남은 행복의 또다른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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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3-01-05 10: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진짜 재미죠잉. 이야기꾼!

레삭매냐 2023-01-05 14:36   좋아요 1 | URL
삼부작의 마지막이라고 하던데,
전작들도 읽어야지 싶습니다.

이야기꾼, 쌉인정.

새파랑 2023-01-05 13:0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북플 셀럽 분들이 모두 이 책을 추천하는군요 ㅋ 저도 이 책 샀는데 주말에 읽어봐야겠습니다~!!

레삭매냐 2023-01-05 14:37   좋아요 2 | URL
그전에 절판책이라 참 가지고
싶었는데, 중고책방에 나와 있
어서 냉큼 사서 읽었답니다.

몰입, 즐거움 그리고 의미까지
모두 사냥하시길 기원합니다.

바람돌이 2023-01-05 20: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하 보관함에 들어있는 이사벨 아옌데를 또 깨우시는군요.
이토록 완벽한 칭찬이라니

레삭매냐 2023-01-05 21:45   좋아요 1 | URL
82 피플 ~ 다 같이 질러 BoA요 !!!

후회하시지 않으리라고 단언합니다.

chika 2023-01-06 07: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표지가 제 취향이 아니라 무심히 넘기는데 작가 이름보고 찾아 읽었는데 정말 장바구니에 넣게 만드십니다! ^^

레삭매냐 2023-01-06 10:19   좋아요 1 | URL
저도 민땡사 세문의 표지가
여엉 적응이 되지 않으나 -

책은 진국이었습니다. 쨩.

감사합니다.

자목련 2023-01-06 09: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왜 재밌으니까!
이렇게 멋진 리뷰가 있을까요. 읽고 싶은 소설인데, 언젠가 저도 읽게 될까요?

레삭매냐 2023-01-06 10:20   좋아요 0 | URL
몰입도 최고의 책이었습니다.
상찬 감사합니다.

세피아빛 대열에 곧 동참하
시길 기대해 봅니다.

<방어가 제철> 읽고 있는데...
참 느낌이 좋네요.

독서괭 2023-01-06 11: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래서 책은 미리 사두여야 한다˝
ㅋㅋㅋㅋ 정말 저도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지금 책을 안 사려고 하다보니 더욱, 읽고 싶은 책이 마침 집에 있으면 과거의 저를 칭찬하게 되네요? ㅎㅎ
이사벨 아옌데 3부작은 언젠가 꼭 읽어보겠습니다!

레삭매냐 2023-01-06 11:49   좋아요 0 | URL
고기 먹을 적에 공급이 끊어지면
안되는 것처럼, 책 또한 마찬가
지라고 생각합니다.

한 작가의 책을 만나 뻑이 갔을
적에 바로 또 내쳐 달려야 한다
고 생각합니다.

저도 과거에 두 번이나 옳은 선
택을 한 저에게 칭찬하고 싶습니
다.

부디 도전은 고고씽~하시길.

서니데이 2023-02-07 2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합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
 
이순신의 바다 - 그 바다는 무엇을 삼켰나
황현필 지음 / 역바연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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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서부터 내셔널리즘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축구를 좋아하지 않는 탓도, 월드컵도 잘 보지 않았다.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거의 모든 이들이 봤다는 <명량>도 보지 않았다. 그러다 세밑에 도서관에 갔다가 황현필 작가의 <이순신의 바다>가 보였다. 냉큼 빌려다 읽기 시작했다. 계묘년 첫해의 첫 번째 책으로 이 책을 만나게 되었다. 술술 읽혔고, 그림과 지도들이 많아서 읽는데 전혀 부담이 없었다. 마음에 들었다는 말이다.

 

영웅을 뛰어 넘어 성웅이라 불리는 역사적 인물이 우리나라에 또 있을까. 세종과 이순신 정도가 아닐까 싶다. 국가와 민족을 위해 헌신했지만, 군주에게 핍팍과 억압을 당하고 결국 7년 전란을 마무리짓는 마지막 전투에서 산화한 신화적 인물이 바로 이순신이 아니던가. 자그마치 5,000여명이 되는 이들이 이순신 연구를 하고 있다니 그가 얼마나 문제적 인간인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그가 처음부터 타협적인 태도를 지닌 정치적 인간이었다면 원균의 모함이나 조정이나 선조의 탄핵을 받아 백의종군하거나 그런 일은 처음부터 없었으리라. 하지만 우리의 주인공은 태생부터 그렇게 생겨 먹은 위인이 아니었다. 그렇지 않아도 사색당파로 분열된 조정에서 한낱 지방관에 불과한 무인을 주무르는 건 일도 아니었으리라. 그나마 그를 발탁한 서애 류성룡을 필두로 한 인물들이 이순신을 비호해서 죽음의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침략이 가시화되고 있었지만, 개국 이래 200년간의 태평성대로 조선은 외적의 대대적인 침략에 맞설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15924월 일본의 고니시 유키나가와 가토 기요마사가 이끄는 일본군 정예부대가 부산진에 상륙했을 때 육전에서 조선군은 일본군에게 판판히 박살이 나고 있었다. 결국 임금 선조는 파천하고 의주로 튀어 버렸다. 한국전쟁 때 최고책임자처럼 말이다.

 

조국이 파국으로 치닫던 상황에서 조정으로부터 아무런 지원도 받지 못한 전라좌수사 이순신이 일군의 수군을 이끌고 왜군의 수륙병진작전에 쐐기를 박았다. 가장 먼저 왜군이 상륙한 경상도 바다를 지켜야 했던 원균은 아무런 작전도 하지 않은 채 도주했다. 이런 인간을 선조는 계속해서 중용하다가 결국 칠천량에서 사단을 내고 만다. 그를 비호한 조정 인사였던 윤두수는 원균과 사돈지간이었고, 또 윤두수는 선조와 사돈지간이었다고 한다. 망조 들린 나라 조선 몰락의 이유에는 이렇게 정실인사가 자리 잡고 있었다.

 

조선 재정의 1/3을 책임지는 호남을 왜군에게 넘겨준다면, 전쟁 수행을 위해 보급이 절실하게 필요했던 조선 원정군에게 날개를 달아주는 격이었다. 일본 수군의 서해 진출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아야 했다. 이순신은 자신 휘하에 배속된 수군은 물론이고 끌어 모을 수 있는 모든 병사들과 주력함선인 판옥선을 모으는데 집중했다. 일대일 대결에서는 일본 소년 무사 하나를 당해낼 수가 없었기에 원거리 아웃복싱을 주력으로 삼았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 수군의 장기인 등선육박전을 피하고, 대신 원거리 함포사격으로 왜군 격파를 시도했다.

 

한편, 조정으로부터 아무런 지원과 보급을 기대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판옥선의 건조는 물론이고, 군량미와 화약 등 전쟁 필수물자들을 자급자족해야 했다. 삼국지에 나오는 조조가 도입했다는 둔전제 실시에도 적극적이었다. 전쟁이 소강기를 맞이했을 때는, 이순신이 직접 농기구를 들고 밭을 갈기도 했다고 한다. 뛰어난 지방관으로서의 모습도 보인다.

 

전략가로서는 말할 필요도 없다. 적에게 아군의 의도를 숨긴 채 기동하는 기도비닉은 기본이었다. 사전에 실전에 가까운 빡센 모의훈련으로 얼마 안되는 조선 수군을 정예병사로 키워내는데 성공했다. 지속된 정찰로 적의 동태를 파악하는 데도 최선을 다했다. 그리고 자신이 원하는 전장으로 적을 유인해서, 아군의 피해는 최소한으로 하면서 적을 섬멸하는데 목표를 두었다. 옥포해전을 필두로 해서, 마지막 노량해전을 제외하고 스무 차례에 달하는 전투에서 아군의 피해가 말도 안되는 가성비를 자랑했다.

 

물론 가장 많은 적은 쳐부순 한산도대첩도 중요했지만, 이순신 자신은 당포해전을 중요시했다는 점도 이번에 새로 알게 된 사실이다. 견내량과 한산도를 장악한 이순신은 일본 수군의 서진을 철저하게 막았다. 오죽했으면, 타이코 히데요시가 일본 수군에게 이순신과 맞붙지 말라는 명을 내렸을까.

 

고려 천자라 불리던 만력제의 결단으로 선조가 그렇게 고대하던 명군이 마침내 참전하면서 내내 밀리던 육전에서도 상황이 역전되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남의 나라 전쟁에 참전한 명군이 조선군처럼 열심히 싸우기를 기대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명군과 왜군과의 정전협상이 개시되면서 1597년까지 4년간의 냉전이 시작됐다. 명에서 파견된 협상가 심유경의 주작질로 협상이 질질 끄는 동안, 일본은 자그마치 9만 명의 대군을 동원해서 진주성을 함락시키고 대학살을 자행한다. 그동안 이순신은 조정을 명을 받고 일본군을 요격하고자 부산진까지 출진했지만, 협상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명나라의 제지를 받고 군사를 돌리게 된다.

 

이 와중에 사사건건 이순신의 전쟁을 방해하던 원균이 올린 장계를 철썩 같이 믿은 멍청이 임금 선조를 결국 이순신의 파직시키고 조정으로 압송을 명령한다. 도대체 이순신이 무슨 역적질을 했단 말인가? 나라를 잃고 파천한 임금이 자신에게 유일하게 주어진 조커 같은 카드를 이렇게 대하다니 그저 할 말이 없을 뿐이었다. 인조와 더불어 조선 역사에서 두 번째라면 서러워할 암군 선조가 그렇게 믿고 의지한 원균이 이순신이 수년간 애를 써가면서 키운 조선 수군을 칠천량 전투에서 한 방에 들어먹었다. 이순신이 건재하던 시절에는 얼씬도 못하던 남해 바다가 왜군의 수중에 들어가고, 일본이 재침공한 정유재란의 시발점이 되었다.

 

아무리 멍청한 임금이지만, 자신에게 주어진 카드가 달랑 하나 남아 있다는 걸 비로소 깨달은 선조는 백의종군한 영웅을 다시 복직시킨다. 그렇게 절망적인 상황에서 영웅은 남아 있는 한 줌의 패잔 부대를 끌어 모아 기세등등한 일본 수군에 맞선 전투가 바로 명량대첩이었다. 아무래도 영화를 봐야 하나 싶다.

 

그간 황현필 작가의 임진왜란 역사 콘텐츠를 많이 보았는데 그중에서도 백미는 역시나 임진-정유재란을 마무리짓는 노량해전이 아닌가 싶다. 조국의 강토를 짓밟은 왜군이 다시는 조선 땅을 엄두도 내지 못하게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죽음으로 사기가 떨어진 채 철군하는 왜군을 섬멸하는 것이 이순신의 최우선 목표였다.

 

울산왜성의 가토 기요마사 부대와 사천왜성의 시마즈 요시히로 부대는 조선 수군의 작전 지역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서 타겟이 될 수가 없었다. 대신 순천왜성에 주둔하던 고니시 유키나가 부대는 그대로 돌려보낼 수가 없다는 게 이순신의 판단이었다. 해상으로 철군하지 않으면 고사당할 위기에 처한 일본군의 발악은 예상을 뛰어 넘었다. 그만큼 조선군의 피해도 막심했다. 그리고 자신의 죽음을 예견이라도 한 듯, 이순신은 마지막 전투에서 장렬한 최후를 맞이한다.

 

실제 역사지만, 이렇게 완벽한 서사가 또 있을 수가 있을까 싶다. 무과에 급제해서 변방에서 실력을 기른 장수가 국난의 위기에 분연히 일어나 연전연승하며 조국을 구했다. 국가 지도자는 이런 영웅에게 어떠한 지원도 해주지 않은 채, 터무니없는 명령만 주문한다. 라이벌의 모함을 받아 들여 그를 파직시키고 공개적으로 망신을 주었다. 그 누구보다 사랑했던 막내 아들과 어머니를 전란 중에 잃었다. 자신도 사천전투에서 부상을 입어 1년 간 고생했다. 역병에 걸려 운신이 어려운 와중에도 뜨거운 조국애와 애민정신으로 어마어마한 스트레스를 겪었다. 어느 누구도 생전에 영웅의 노고에 대한 정당한 보상을 해주지 않았다. 전쟁이 끝나면 결국 자신은 해도 그만인 망궐례를 임금에게 하지 않고, 항명을 빌미로 파직과 탄핵을 당할 것을 그 누구보다 잘 알았다. 전쟁의 대단원을 알리는 마지막 전투에서 영웅의 죽음은 이 위대한 서사의 화룡점정이었다. 다양한 변주를 통해 두고두고 우려먹을 수밖에 없는 완벽한 서사라는 점을 도저히 부인할 수가 없다.

 

왜 우리는 역사에서 배우지 못하는가. 정의조차 취사선택되는 수상한 시절 탓을 해야 하는 걸까. 내우외환, 고물가 그리고 경제 위기에 대한 경고가 끊이지 않는다. 모든 지표가 그 어느 때보다 불확실한 시기에 지도자의 자질과 품격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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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3-01-01 20: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고려천자 ㅎㅎㅎ 딱 맞는 말같아요. 칠전량전투 너무 열받더라고요. 마지막 문단 와닿습니다 매냐님 ~ 편한 저녁 보내세요 *^^*

레삭매냐 2023-01-02 10:01   좋아요 1 | URL
어제 결국 영화 <명량>을 봤는데
진차 국뽕 원탑이었습니다.

칠천량 전투는 정말 - 감사합니다.

새파랑 2023-01-01 20:4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실제 역사지만 너무 드라마틱해서 더 감동적인것 같아요~!! 사실 그대로의 국뽕은 너무 좋은거 같아요~!!

레삭매냐 2023-01-02 10:02   좋아요 2 | URL
그러니까요. 실제 역사가
이렇게 드라마틱할 수 있
다니...

명량-한산 그리고 마지막
노량이라고 하는데, 마지
막 작품은 눙물바다가 될
것 같습니다.

bookholic 2023-01-01 22:0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황현필 유튜브도 좋더라구요...^^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요~~

레삭매냐 2023-01-02 10:03   좋아요 1 | URL
네 황작가님 너튜브
즐겨 보고 있답니다.

좋은 콘텐츠에 박수
를 보내는 바입니다.
쨕쨕쨕.

감사합니다, 북홀릭님
도 새해 복 많이 받으
셔요.

coolcat329 2023-01-02 08:0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국뽕할 만 해요. 정말 영웅의 서사입니다. 저도 읽어보고 싶어요.

레삭매냐 2023-01-02 10:06   좋아요 1 | URL
저의 디폴트는 국뽕 결사
반대지만, 이 정도면 예외
를 두어도 되지 싶습니다.

<명량>에서 적군의 무차별
공격으로 만신창이가 된
대장선이 울돌목으로 빨
려 들어갈 때, 갑자기 등
장한 백성들의 포작선(?)
이 침몰 위기를 구해내는
장면은 진차 압권이었습니다.

책은 쉬워서 슬슬 읽힙니다.
감히 일독을 권하는 바입니다.
 
엉덩이에 입맞춤을 일루저니스트 illusionist 세계의 작가 9
에펠리 하우오파 지음, 서남희 옮김 / 들녘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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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에 우연히 알게 된 들녘 일루저니스트 시리즈 가운데 하나인 마누엘 리바스의 <목수의 연필>을 빌리러 갔다. 그러다 문득 14년 전에 읽은 유쾌한 소설 에펠리 하우오파의 <엉덩이에 입맞춤을>도 그 시리즈 가운데 한 편이라는 사실이 떠올랐다. <엉덩이>도 같이 빌렸다. 그리고 이미 한 번 읽은 <엉덩이>를 먼저 읽게 됐다. 요즘 약간 독서 슬럼프라 재밌는 책이 읽고 싶었던 모양이다.

 

소설의 주인공 오일레이 봄보키의 엉덩이에 문제가 발생했다. 좀 더 레알하게 밝히자면 그의 똥구멍에 비상이 걸린 거다. 자고로 먹고 싸는 문제만 해결되면 삶이 순탄할 거라고 누가 그랬던가. 소싯적 권투 챔피언으로 지금은 성공한 택시 사업가이자 농장주로 잘 나가던 티포타에 사는 오일레이에게 이런 일이 생기다니! 게다가 그가 앓고 있는 부위는 누군가에게 밝히기도 꺼릴 만한 그런 곳이 아니던가.

 

설상가상으로 남말하기와 뒤까기에 있어서 두 번째 가라면 서러워할 사람들이 바로 코로다무 사람들이다. 똥구멍이 아픈 오일레이에 대한 소문이 그야말로 바람을 타고 모든 호사가들의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이렇다할 오락거리가 없는 그들에게 어쩌면 미래의 상원의원이 될 지도 모를 오일레이의 고통은 누군가에게는 희소식일 수도 있다는 점이 서사를 보다 더 흥미롭게 만든다.

 

게다가 남태평양 섬에 사는 코코넛들은 최신 현대 의술을 1도 믿지 않는다. 그들에게 병원은 시체안치소와 동일한 말이다. 사실 현대 의학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비용이 비싸서 그들은 의사들의 진단보다도 동네 주술사들 보다 고상하게 말하면 도토레들을 더 의지하고 따른다. 그렇다고 도토레들의 실력이 죽을 것 같은 고통으로 괴로워하는 오일레이를 구원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신앙의 영역의 문제로 돌려야 할까.

 

에펠리 하우오파 작가의 직설적이고 가감 없는 주인공 오일레이 봄보키에 대한 묘사는 일품이었다. 아니 어쩌면 모든 소설이 반드시 문학적 성취나 고상해야 한다는 사변적 당위성을 가져야 하는 건 아니니까. 그런 점에서 나는 <엉덩이에 입맞춤을>이 품은 서사가 14년 전이나 지금이나 그렇게 사랑스러울 수가 없었다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 저자가 구사하는 중요한 메시지 중의 하나가 공존이라고 생각한다. 현대 의사들은 자신들의 영리를 위해 기존의 민간요법이나 일체의 주술을 거부한다. 어떤 기득권층이 자신의 밥그릇 혹은 파이가 줄어드는 걸 원한단 말인가. 하지만 남태평양 현지의 상황을 파악한 의사/닥터들은 아무리 기독교 신앙이 포교되었다고 하더라도 원주민들에게 뿌리 깊이 자리한 민간신앙과 민간치료를 발본색원할 수 없다는 걸 깨닫게 된다. 연합 심포지엄인가에서 그들의 존재를 이해하고 자신들은 닥터로 그리고 민간 주술사들은 도토레라고 불리는 공존에 대한 합의를 이루게 된다.

 

한편, 날이 갈수록 악화되는 오일레이의 똥구멍 치료를 위해 영험하다는 도토레들은 물론이고 용의 연고, 심리학자 그리고 신앙의 힘까지 총동원된다. 현세의 고통 때문에 유약해진 오일레이의 영혼은 그야말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이단 사이비에 현혹되기도 한다. 잠시나마 당장의 고통을 잊을 수는 있었지만 문제의 근원 해결에는 역시 도움이 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오일레이의 고통은 배가될 뿐이었다.

 

결국에 가서 오일레이는 키위들의 도움을 받기로 결정한다. 그 와중에 등장한 부타코 경관은 뉴질랜드 대사에게 호소해서 오일레이를 돕는다면 명목으로 이민을 추진하기도 한다. 똥구멍 같은 코코넛들의 나라에서 비전이 없다고 생각한 부타코 경관은 불법이민을 추진하다가 발각이 되고, 결국 밀항길에 오른다. 그리고 천신만고 끝에 뉴질랜드에 도착한 오일레이는 기상천외한 방식의 항문이식수술을...

 

아마 백인 작가가 이런 얼토당토않은 서사를 구사했다면, 바로 인종차별이나 코코넛들에 대한 비하로 공격받았을 것이다. 더 나아가 엉덩이에서 출발해서 우주의 본성까지 들먹이는 작가의 뻔뻔함에 할 말을 잃었다. 이런 구성은 어디까지나 현지인들만이 할 수 있는 그런 영역의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에펠리 하우오파는 기존의 점잔빼는 서구인들의 시선에 이 소설로 묵직한 한 방을 날렸다. 너희들에게는 닥터가 있다면, 우리에게는 도토레들이 있단 말이지 하고 말이다. 에펠리 하우오파의 다른 저작들을 만날 수가 없어 아쉬울 따름이다.


[뱀다리] 처음에 읽었을 적에는 별 다섯 개를 주었는데, 다시 읽다 보니 그 정도는 아닌 듯 싶게 되었다. 시간이 가니, 책에 대한 감상이나 평가도 달라지는가. 그래도 여전히 빵빵 터지는 코코넛 스타일의 유머는 건재했다. 아마 번역의 힘도 상당하지 않았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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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onnight 2022-12-28 11: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항문이식수술@_@; 음음 하며 읽다가 깜놀@_@;;; 제가 이 책을 읽었다면 이건 뭐지 하며 비틀비틀 쓰러졌을텐데 역시 레삭매냐님의 내공에 고개 숙입니다(_ _);;

레삭매냐 2022-12-28 11:30   좋아요 1 | URL
주술적 레알리즘까지 가면
너무 먼 듯하고, 판타지스러운
설정과 코코넛스러운 냉소가
빵빵 터지는 유쾌한 소설이랍
니다.

저의 허접한 내공을 좋게 봐주
셔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Falstaff 2022-12-28 11: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오, 진즉 읽으시지요! 이 재미난 책을. ㅋㅋㅋ

레삭매냐 2022-12-28 11:41   좋아요 0 | URL
ㅋㅋㅋ 재밌다는 점에
격렬하게 공감합니다.

리뷰 서두에 있지만
이미 14년 전에 읽었다는.
 
목수의 연필 일루저니스트 illusionist 세계의 작가 26
마누엘 리바스 지음, 정창 옮김 / 들녘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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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인류 역사에 남긴 두 번의 생채기 중의 하나라는 에스파냐 내전을 다룬 소설이다. 예전에 아주 새로운 작가들을 소개하는 들녘의 일루저니스트의 팬이었는데 왜 이 소설의 존재는 몰랐을까. 이 책을 빌리러 도서관에 갔다가 같은 시리즈에 속한 에펠리 하우오파의 <엉덩이에 입맞춤을>도 빌려서 먼저 읽었다. 묵직한 내용 때문인지 읽는데 시간이 좀 걸렸다. 아니 한눈을 팔았다는 게 더 솔직한 말이겠지.

 

에스파냐에서도 오지 중의 오지라는 갈리시아 지방 출신의 마누엘 리바스는 전후 세대로 아마도 구전되는 전설에 가까운 이야기들로부터 이 소설의 영감을 얻지 않았나 싶다. 때로는 현실이 소설보다 더 소설 같더라는 이야기는 이제 진부하기까지 하다. 그만큼 현실 세계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사건사고들은 버라이어티하고 예상을 뛰어넘는다.

 

1936717일 국가주의자들이 스페인령 모로코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같은해 216, 인민전선이 총선에서 승리했고, 공화파 정부가 들어섰다. 독재자 프랑코와 군부를 중심으로 한 국가주의자들은 같은 파시스트들인 이탈리아의 무솔리니와 독일의 히틀러의 전폭적인 군사지원 아래 공화파들을 거점을 차례로 공략했다. 바르셀로나와 마드리드가 차례로 함락당하고 193941일 공화파의 마지막 저항거점이었던 톨레도가 항복하면서 내전은 프랑코파의 승리로 귀결되었다.

 

내전의 최전선에서 국가주의자들과 공화파가 매섭게 맞붙었다면, 후방에서도 전방 못지않은 전투가 벌어졌다. 국가주의자들과 팔랑헤 당원으로 구성된 민병대원들은 공화파 인사, 사회주의자와 불온세력을 대거 체포해서 포로로 잡았다. 불법구금과 처형이 만연했다. 중세 종교재판 이래, 다시 한 번 에스파냐에 무법천지가 도래한 것이다.

 

<목수의 연필>에는 모두 세 명의 주인공들이 등장한다. 첫 두 인물들은 바로 다니엘 다 바르카 의사와 그의 연인 마리사 마요다. 그리고 이 둘보다 더 중요한 캐릭터라고 내가 생각하는 전직 군인 출신 간수 에르발이다. 다 바르카와 마리사가 지식인 계급과 부르주아 계급을 대변한다면, 에르발은 프롤레타리아 계급이자 국가주의자 진영의 대표선수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농촌 출신 에르발의 계급을 본다면 당연히 반대편에 서야 하겠지만, 그는 다른 선택을 했다. 그리고 그는 포로들을 산책시키는 일을 서슴지 않았다. 여기서 산책은 포로들의 신속한 불법 처형을 의미했다. 문명 사회의 기준인 기소나 재판 따위는 절차는 필요 없었다. 프랑코에 반대하는 인사들은 모두 현실 세계에서 제거되어야만 했다.

 

그런 의미에서 이데올로기를 그리는 화가가 가장 먼저 처형되었다. 역시 국가주의자들은 선전선동의 중요성을 충분히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무지한 에르발은 화가가 독재 시스템에 아무런 위협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했지만, 그의 상관들의 그것은 그의 생각과 달랐다. 에르발에 화가의 머리에 총알을 박아 넣자, 화가의 영혼이 에르발에 달라붙었다. 그리고 그의 의식과 교류하기 시작한다. 라틴 아메리카에서 한창 유행한 주술적 리얼리즘의 영향이 보인다.

 

체포조에 반항하던 다 바르카에게 개머리판으로 한 방 먹인 사람도 바로 에르발이었다. 그는 앞으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할 독재 권력에 충실한 개 역할을 할 인사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해서 자신의 상관인 란데사 중사의 마음에 꼭 들었다.

 

투옥되어 있는 동안, 가장 먼저 제거되어야 할 인사였던 다 바르카는 두 번이나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부지하는데 성공한다. 에르발은 다 바르카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그의 애인인 마리사 마요보다도 그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다. , 여기서 또 로맨스가 빠지면 안되지. 절세미녀인 마리사는 자신의 애인을 죽음으로부터 구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한다. 한편, 자기 계급의 적인 다 바르카를 반대하는 그녀의 조부 베니토 마요는 그를 세상에서 소멸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노라고 사랑하는 손녀딸에게 말한다. 마리사는 자해까지 감행하면서 다 바르카에 대한 절절한 사랑을 표현했다. 다 바르카가 긴 투옥 생활을 이겨내는데 사랑의 힘이 가장 큰 원동력이 아니었을까라고 추정해 본다.

 

마누엘 리바스 작가는 에스파냐 내전 당시, 아무런 죄 없이 투옥된 포로/죄수들을 도운 에스파냐 여성들의 지지에 대해서도 소설의 곳곳에서 언급하고 있다. 그들은 적어도 반동적인 역사의 흐름에 있어 방관자가 아니었다. 다 바르카나 다른 공화파 인사들이 체포조에 의해 끌려갈 때, 그들을 막기 위해 격렬하게 저항했다. 빨래를 이용해서 감옥에 갇힌 이들에게 메시지를 보내고, 자신의 형제 부모 남편이나 애인들에게 해산물을 공급하기도 했다. 국가주의자들과 프랑코 독재에 맞서 그들만의 방식으로 싸운 이들에 대한 리바스식 경의 표시라는 생각이 들었다.

 

에르발에게 들러붙은 화가의 그것은 양심의 목소리다. 이러한 설정은 아무리 에르발이 독재자 프랑코에게 부역한 빌런이라고 하더라도 일말의 양심은 남아 있었을 거라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마누엘 리바스는 다 바르카나 마리사 마요의 입장 그러니까 피해자의 목소리보다 가해자의 목소리에 보다 비중을 두었다. 반성과 화해 그리고 역사 청산이라는 에스파냐가 짊어진 궁극적 과제에 대한 문제 제기의 발로다. 언제나 그렇지만, 역사는 진실을 밝히기 위한 끝없는 투쟁이다. 소설 <목수의 연필>은 역사에 대해 영원한 무관심에 빠진 이들에게 각성을 촉구한다. 깨어나 행동에 나서라고.

 

[뱀다리] 같이 읽으면 좋은 책 두 권이 말미에 실려 있어 기록해 본다.

1. <살라미나의 병사들> 하비에르 세르카스 (열린책들)

2. <열세 송이 붉은 장미> 카를로스 폰세카/헤수스 페레로 (국내미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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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목련 2022-12-28 08: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가 분명 이 소설을 읽고 리뷰까지 썼는데 내용이 하나도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ㅠ
그래서 제가 쓴 리뷰를 찾아 읽고 매냐 님의 글을 다시 읽었어요.

레삭매냐 2022-12-28 09:47   좋아요 0 | URL
저도 그러한 책들이 부지기수
랍니다.
분명 읽은 것도 리뷰로 기록을
남긴 것도 기억이 나지만, 정
작 내용은 모두...

저도 자목련님의 리뷰 찾아 보
겠습니다 :>

그레이스 2022-12-29 08: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목이 스페인 내전과 관계있을거라고는 생각 못했네요. 저장하고 갑니다.

레삭매냐 2022-12-29 10:52   좋아요 1 | URL
아마 올해 읽은 마지막 책이 될
것 같은데, 한 해를 마무리하기
에 좋은 책이었습니다.

coolcat329 2022-12-31 20: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처음 보는 책, 작가인데 스페인 내전 배경에 세 명의 인물이 주인공이라니 뭔가 흥미진진할 거 같네요.

레삭매냐 2023-01-04 10:58   좋아요 0 | URL
저도 최근에 알게 되었네요.
뛰어난 작품이었습니다.

<스페인 내전> 그리고 오늘부터
읽기 시작한 이사벨 아옌데의
<바다의 긴 꽃잎>...

책을 읽을수록 가슴이 먹먹해 지네요.

서니데이 2023-01-06 23: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합니다.
따뜻한 주말 보내세요.^^

thkang1001 2023-01-07 1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레삭메냐님! 이달의 당선작 선정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항상 건강하시길 기원합니다! 행복한 하루 보내세요! 감사합니다!
 
제5도살장 (그래픽 노블)
커트 보니것 원작, 라이언 노스 각색, 앨버트 먼티스 그림, 공보경 옮김 / 문학동네 / 2022년 10월
평점 :
일시품절



 

2009년 그리고 2017년에 커트 보네거트의 <5도살장>을 읽었다. 그리고 거의 대부분의 내용들을 잊어 버렸다. 다시 5년이 지나, 그래픽 노블로 새롭게 <5도살장>을 읽었다. 새로웠고, 또 원전이 읽고 싶어졌다. 보네거트와 세풀베다, 예나 지금이나 좋아할 수밖에 없는 그런 작가들이다.

 

2차 세계대전 참전용사인 저자가 반전 운동가이자 소설가가 된 계기가 되었던 1945213일 드레스덴 폭격이 그래픽 노블 <5도살장>을 중심을 차지한다. 미영 연합군 수뇌부들은 독일 전쟁기계의 전쟁 의지를 박살내기 위해, 전무후무한 공습을 구상했다. 영국의 중폭격기 772대와 미군기 527대를 동원해서 비무장도시로 알려진 엘베 강변의 드레스덴에 그야말로 3,900톤에 달하는 고성능 폭탄의 비를 퍼부었다. 그 결과, 1939년 기준으로 독일에서 7번째로 큰 도시였던 드레스덴 시의 중심은 잿더미가 되었다. 도심의 90%가 형체를 알아 볼 수 없을 정도로 파괴되었고, 22,700명에서 25,000명에 달하는 인명이 살상되었다. 그중에는 다수의 연합군 포로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소설의 주인공으로 현실 세계에서 보면 또라이처럼 보이는 빌리 필그림이 등장한다. 그는 뉴욕 주에 있다는 가상의 도시 일리엄 출신이란다. 커트 보네거트처럼 독일군의 마지막으로 서부전선에서 매서운 반격을 보여준 벌지전투에서 빌리 필그림은 포로가 되었다. 어떤 면에서 보아도, 그는 진짜 군인이 아니었다. 양키 군인을 만난 독일 사람들은 진짜 군인들은 오랜 전쟁으로 모두 죽었다며 그를 무시한다. 그의 동료들조차 그를 무시한다.

 

다른 낙오병들은 전투모에 소총, 그리고 제대로 된 행색을 갖추었지만 빌리 필그림은 무엇 하나 갖추지 못한 오합지졸의 전형이자 이른바 소년십자군처럼 보였던 모양이다. 소설을 처음에 읽을 적에 원제에 아무렇지도 않게 붙어 있던 “The Children’s crusade” 문구가 바로 이해가 되었다. 제대로 된 군사 훈련도 없이 전장으로 내몰린 빌리 필그림 같은 이야말로 소년십자군이 아니면 뭐란 말인가.

 

이런 역사적 사건만 다루었다면, 커트 보네거트의 <5도살장>은 다른 전쟁문학과 다를 게 없는 그저 그런 작품이 되었으리라. 하지만 작가는 시공간의 분할과 개입, 시간여행 그리고 트랄팔마도어 행성이라는 판타지스러운 요소들을 주입하면서 새로운 창조적 도전을 시전한다.

 

우선 시간의 구성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오가며 직조된다. 다른 낙오병들이나 동료 포로들과 달리 전쟁에서 빌리 필그림은 살아남았다. 강해서 살아남는 게 아니라, 살아남은 자가 강자라는 명제가 그에게 딱 들어맞는 이야기가 아닐까. 그리고 그 서사는 저자인 커트 보네거트에게도 똑같이 적용되는 말이지 싶다.

 

전후에 빌리 필그림은 검안사가 되어 잘 먹고 잘 살게 된다. 바람을 피우기도 하고, 항공사고를 당해 죽을 위기에서 벗어나기도 한다. 다만 전쟁 때 얻은 PTSD로 정신병원을 전전하기도 한다. 하긴 누구라도, 드레스덴 폭격 같은 인류사적 비극을 직접 목격한 사람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그러지 않을 이가 얼마나 될 것인가.

 

트랄팔마도어 인들에게 납치되어 동물원에 갇히기도 했다. 그리고 외계인들은 지구인들을 관찰하기를 즐긴다. 비슷하게 트랄팔마도어 인들에게 납치된 지구인 여성과 짝짓기도 하고 아이도 낳고... 이게 모두 같은 시간대에 벌어지는 일들이란 말인가? 그러니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적어도 빌리 필그림에게 죽음은 죽음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 어쩌면 그가 아내의 사망 소식에도 덤덤하게 반응할 수 있는 이유가 아니었나 싶기도 하다. 빌리는 이 순간을 살면서도 동시에 또 다른 공간과 시간에 분열하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말이다. 내가 서술하면서도 과연 그게 맞는 건지 아닌지에 대해 확신할 수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 그렇게 가는 거지.

 

다른 동료 포로들에게 폐급 병사취급을 당하고, 제리(독일군)들에게 갖은 학대를 당하면서도 우리의 빌리 필그림은 꿋꿋하게 생존하는데 성공했다. 독일군 간수들은 미군 병사들이 영국군들처럼 서로 협력하지 않고 각자도생하는 사실을 비웃는다. 그리고 일단의 소년십자군들은 짐승처럼 가축 화차에 실려 곧 비극의 무대가 되는 드레스덴에 도착한다. 빌리 필그림/커트 보네거트는 운이 좋았다. 시대에 있던 드레스덴 시민들과 미군 포로들은 도심을 휩쓴 불의 폭풍에 휩쓸려 한 줌의 재가 되었다. 도심에서 멀리 떨어져 있던 슐라흐토프-퓐프(5도살장)에 머물던 빌리들은 살아남았다. 뭐 그렇게 가는 거다.

 

보통 시간은 서사 구조에 있어 결정적 역할을 한다. 하지만 <5도살장>에서 플래시백으로 치환되는 시간들은 종잡을 수가 없는 그런 요소다. 그렇기 때문에 커트 보네거트를 처음으로 접하는 독자들은 짜증을 낼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가 여러 작품들을 통해 구축한 세계관에 발을 딛고 익숙해진다면 그 또한 극복할 수 있는 그런 문제일 것이다.

 

카메오로 등장하는 나치 프로파간다를 전파하는 미국인 하워드 W. 캠벨 주니어와 SF 소설가 킬고어 트라우트도 반가웠다. 혹시 보네거트 작가가 발자크의 등장인물 우려먹기 기법에서 영감을 얻지 않았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하긴 나라도 시간여행이라는 특별한 장치와 트랄팔마도어 행성에서 수시로 인간계에 개입하는 외계인들 이야기를 한 번만 써먹기에는 아깝지 않나 싶으니 말이다.

 

소설로 두 번 그리고 그래픽 노블로 다시 만나도 <슐라흐토프-퓐프>는 여전히 매력적이었다. 다시 소설을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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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onnight 2022-12-27 08:4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요즘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의 단편집을 읽고 있는데.. 레삭매냐님 글을 읽으니 막막함이 다시 고개를 드는군요-_ㅠ;;; 자신감 하락ㅠㅠ 저도 용기를 내어 커트 보네거트를 읽을 수 있기를(언젠가;;)

레삭매냐 2022-12-27 09:21   좋아요 1 | URL
오오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
저도 낭중에 중고로 나오면
광년이 사서 읽어 보려고
대기 중이랍니다.

커트 보네거트, 짱입니다.
참말로. 그의 시커먼 유머
의 매력에 빠지시면 답 없
으시리라고 믿슙니다.

mini74 2022-12-30 18: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그래픽노블로 나왔군요. 저도 이 책 좋아하는데 ~~~ 연애소설 읽는 노인도 참 좋아하는 소설이에요 *^^*

레삭매냐 2022-12-30 19:20   좋아요 1 | URL
그래픽 노블로 나왔다는 말
듣고, 도서관에 가서 냅다
빌려다 읽었답니다. 다시 원
전이 만나고 싶어지더라구요.

저도 <연애소설 읽는 노인>
애정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