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도살장 (그래픽 노블)
커트 보니것 원작, 라이언 노스 각색, 앨버트 먼티스 그림, 공보경 옮김 / 문학동네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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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그리고 2017년에 커트 보네거트의 <5도살장>을 읽었다. 그리고 거의 대부분의 내용들을 잊어 버렸다. 다시 5년이 지나, 그래픽 노블로 새롭게 <5도살장>을 읽었다. 새로웠고, 또 원전이 읽고 싶어졌다. 보네거트와 세풀베다, 예나 지금이나 좋아할 수밖에 없는 그런 작가들이다.

 

2차 세계대전 참전용사인 저자가 반전 운동가이자 소설가가 된 계기가 되었던 1945213일 드레스덴 폭격이 그래픽 노블 <5도살장>을 중심을 차지한다. 미영 연합군 수뇌부들은 독일 전쟁기계의 전쟁 의지를 박살내기 위해, 전무후무한 공습을 구상했다. 영국의 중폭격기 772대와 미군기 527대를 동원해서 비무장도시로 알려진 엘베 강변의 드레스덴에 그야말로 3,900톤에 달하는 고성능 폭탄의 비를 퍼부었다. 그 결과, 1939년 기준으로 독일에서 7번째로 큰 도시였던 드레스덴 시의 중심은 잿더미가 되었다. 도심의 90%가 형체를 알아 볼 수 없을 정도로 파괴되었고, 22,700명에서 25,000명에 달하는 인명이 살상되었다. 그중에는 다수의 연합군 포로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소설의 주인공으로 현실 세계에서 보면 또라이처럼 보이는 빌리 필그림이 등장한다. 그는 뉴욕 주에 있다는 가상의 도시 일리엄 출신이란다. 커트 보네거트처럼 독일군의 마지막으로 서부전선에서 매서운 반격을 보여준 벌지전투에서 빌리 필그림은 포로가 되었다. 어떤 면에서 보아도, 그는 진짜 군인이 아니었다. 양키 군인을 만난 독일 사람들은 진짜 군인들은 오랜 전쟁으로 모두 죽었다며 그를 무시한다. 그의 동료들조차 그를 무시한다.

 

다른 낙오병들은 전투모에 소총, 그리고 제대로 된 행색을 갖추었지만 빌리 필그림은 무엇 하나 갖추지 못한 오합지졸의 전형이자 이른바 소년십자군처럼 보였던 모양이다. 소설을 처음에 읽을 적에 원제에 아무렇지도 않게 붙어 있던 “The Children’s crusade” 문구가 바로 이해가 되었다. 제대로 된 군사 훈련도 없이 전장으로 내몰린 빌리 필그림 같은 이야말로 소년십자군이 아니면 뭐란 말인가.

 

이런 역사적 사건만 다루었다면, 커트 보네거트의 <5도살장>은 다른 전쟁문학과 다를 게 없는 그저 그런 작품이 되었으리라. 하지만 작가는 시공간의 분할과 개입, 시간여행 그리고 트랄팔마도어 행성이라는 판타지스러운 요소들을 주입하면서 새로운 창조적 도전을 시전한다.

 

우선 시간의 구성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오가며 직조된다. 다른 낙오병들이나 동료 포로들과 달리 전쟁에서 빌리 필그림은 살아남았다. 강해서 살아남는 게 아니라, 살아남은 자가 강자라는 명제가 그에게 딱 들어맞는 이야기가 아닐까. 그리고 그 서사는 저자인 커트 보네거트에게도 똑같이 적용되는 말이지 싶다.

 

전후에 빌리 필그림은 검안사가 되어 잘 먹고 잘 살게 된다. 바람을 피우기도 하고, 항공사고를 당해 죽을 위기에서 벗어나기도 한다. 다만 전쟁 때 얻은 PTSD로 정신병원을 전전하기도 한다. 하긴 누구라도, 드레스덴 폭격 같은 인류사적 비극을 직접 목격한 사람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그러지 않을 이가 얼마나 될 것인가.

 

트랄팔마도어 인들에게 납치되어 동물원에 갇히기도 했다. 그리고 외계인들은 지구인들을 관찰하기를 즐긴다. 비슷하게 트랄팔마도어 인들에게 납치된 지구인 여성과 짝짓기도 하고 아이도 낳고... 이게 모두 같은 시간대에 벌어지는 일들이란 말인가? 그러니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적어도 빌리 필그림에게 죽음은 죽음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 어쩌면 그가 아내의 사망 소식에도 덤덤하게 반응할 수 있는 이유가 아니었나 싶기도 하다. 빌리는 이 순간을 살면서도 동시에 또 다른 공간과 시간에 분열하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말이다. 내가 서술하면서도 과연 그게 맞는 건지 아닌지에 대해 확신할 수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 그렇게 가는 거지.

 

다른 동료 포로들에게 폐급 병사취급을 당하고, 제리(독일군)들에게 갖은 학대를 당하면서도 우리의 빌리 필그림은 꿋꿋하게 생존하는데 성공했다. 독일군 간수들은 미군 병사들이 영국군들처럼 서로 협력하지 않고 각자도생하는 사실을 비웃는다. 그리고 일단의 소년십자군들은 짐승처럼 가축 화차에 실려 곧 비극의 무대가 되는 드레스덴에 도착한다. 빌리 필그림/커트 보네거트는 운이 좋았다. 시대에 있던 드레스덴 시민들과 미군 포로들은 도심을 휩쓴 불의 폭풍에 휩쓸려 한 줌의 재가 되었다. 도심에서 멀리 떨어져 있던 슐라흐토프-퓐프(5도살장)에 머물던 빌리들은 살아남았다. 뭐 그렇게 가는 거다.

 

보통 시간은 서사 구조에 있어 결정적 역할을 한다. 하지만 <5도살장>에서 플래시백으로 치환되는 시간들은 종잡을 수가 없는 그런 요소다. 그렇기 때문에 커트 보네거트를 처음으로 접하는 독자들은 짜증을 낼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가 여러 작품들을 통해 구축한 세계관에 발을 딛고 익숙해진다면 그 또한 극복할 수 있는 그런 문제일 것이다.

 

카메오로 등장하는 나치 프로파간다를 전파하는 미국인 하워드 W. 캠벨 주니어와 SF 소설가 킬고어 트라우트도 반가웠다. 혹시 보네거트 작가가 발자크의 등장인물 우려먹기 기법에서 영감을 얻지 않았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하긴 나라도 시간여행이라는 특별한 장치와 트랄팔마도어 행성에서 수시로 인간계에 개입하는 외계인들 이야기를 한 번만 써먹기에는 아깝지 않나 싶으니 말이다.

 

소설로 두 번 그리고 그래픽 노블로 다시 만나도 <슐라흐토프-퓐프>는 여전히 매력적이었다. 다시 소설을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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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onnight 2022-12-27 08:4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요즘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의 단편집을 읽고 있는데.. 레삭매냐님 글을 읽으니 막막함이 다시 고개를 드는군요-_ㅠ;;; 자신감 하락ㅠㅠ 저도 용기를 내어 커트 보네거트를 읽을 수 있기를(언젠가;;)

레삭매냐 2022-12-27 09:21   좋아요 1 | URL
오오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
저도 낭중에 중고로 나오면
광년이 사서 읽어 보려고
대기 중이랍니다.

커트 보네거트, 짱입니다.
참말로. 그의 시커먼 유머
의 매력에 빠지시면 답 없
으시리라고 믿슙니다.

mini74 2022-12-30 18: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그래픽노블로 나왔군요. 저도 이 책 좋아하는데 ~~~ 연애소설 읽는 노인도 참 좋아하는 소설이에요 *^^*

레삭매냐 2022-12-30 19:20   좋아요 1 | URL
그래픽 노블로 나왔다는 말
듣고, 도서관에 가서 냅다
빌려다 읽었답니다. 다시 원
전이 만나고 싶어지더라구요.

저도 <연애소설 읽는 노인>
애정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