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목수의 연필 ㅣ 일루저니스트 illusionist 세계의 작가 26
마누엘 리바스 지음, 정창 옮김 / 들녘 / 2012년 9월
평점 :

20세기 인류 역사에 남긴 두 번의 생채기 중의 하나라는 에스파냐 내전을 다룬 소설이다. 예전에 아주 새로운 작가들을 소개하는 들녘의 일루저니스트의 팬이었는데 왜 이 소설의 존재는 몰랐을까. 이 책을 빌리러 도서관에 갔다가 같은 시리즈에 속한 에펠리 하우오파의 <엉덩이에 입맞춤을>도 빌려서 먼저 읽었다. 묵직한 내용 때문인지 읽는데 시간이 좀 걸렸다. 아니 한눈을 팔았다는 게 더 솔직한 말이겠지.
에스파냐에서도 오지 중의 오지라는 갈리시아 지방 출신의 마누엘 리바스는 전후 세대로 아마도 구전되는 전설에 가까운 이야기들로부터 이 소설의 영감을 얻지 않았나 싶다. 때로는 현실이 소설보다 더 소설 같더라는 이야기는 이제 진부하기까지 하다. 그만큼 현실 세계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사건사고들은 버라이어티하고 예상을 뛰어넘는다.
1936년 7월 17일 국가주의자들이 스페인령 모로코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같은해 2월 16일, 인민전선이 총선에서 승리했고, 공화파 정부가 들어섰다. 독재자 프랑코와 군부를 중심으로 한 국가주의자들은 같은 파시스트들인 이탈리아의 무솔리니와 독일의 히틀러의 전폭적인 군사지원 아래 공화파들을 거점을 차례로 공략했다. 바르셀로나와 마드리드가 차례로 함락당하고 1939년 4월 1일 공화파의 마지막 저항거점이었던 톨레도가 항복하면서 내전은 프랑코파의 승리로 귀결되었다.
내전의 최전선에서 국가주의자들과 공화파가 매섭게 맞붙었다면, 후방에서도 전방 못지않은 전투가 벌어졌다. 국가주의자들과 팔랑헤 당원으로 구성된 민병대원들은 공화파 인사, 사회주의자와 불온세력을 대거 체포해서 포로로 잡았다. 불법구금과 처형이 만연했다. 중세 종교재판 이래, 다시 한 번 에스파냐에 무법천지가 도래한 것이다.
<목수의 연필>에는 모두 세 명의 주인공들이 등장한다. 첫 두 인물들은 바로 다니엘 다 바르카 의사와 그의 연인 마리사 마요다. 그리고 이 둘보다 더 중요한 캐릭터라고 내가 생각하는 전직 군인 출신 간수 에르발이다. 다 바르카와 마리사가 지식인 계급과 부르주아 계급을 대변한다면, 에르발은 프롤레타리아 계급이자 국가주의자 진영의 대표선수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농촌 출신 에르발의 계급을 본다면 당연히 반대편에 서야 하겠지만, 그는 다른 선택을 했다. 그리고 그는 포로들을 ‘산책’시키는 일을 서슴지 않았다. 여기서 산책은 포로들의 신속한 불법 처형을 의미했다. 문명 사회의 기준인 기소나 재판 따위는 절차는 필요 없었다. 프랑코에 반대하는 인사들은 모두 현실 세계에서 제거되어야만 했다.
그런 의미에서 이데올로기를 그리는 화가가 가장 먼저 처형되었다. 역시 국가주의자들은 선전선동의 중요성을 충분히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무지한 에르발은 화가가 독재 시스템에 아무런 위협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했지만, 그의 상관들의 그것은 그의 생각과 달랐다. 에르발에 화가의 머리에 총알을 박아 넣자, 화가의 영혼이 에르발에 달라붙었다. 그리고 그의 의식과 교류하기 시작한다. 라틴 아메리카에서 한창 유행한 주술적 리얼리즘의 영향이 보인다.
체포조에 반항하던 다 바르카에게 개머리판으로 한 방 먹인 사람도 바로 에르발이었다. 그는 앞으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할 독재 권력에 충실한 개 역할을 할 인사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해서 자신의 상관인 란데사 중사의 마음에 꼭 들었다.
투옥되어 있는 동안, 가장 먼저 제거되어야 할 인사였던 다 바르카는 두 번이나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부지하는데 성공한다. 에르발은 다 바르카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그의 애인인 마리사 마요보다도 그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다. 아, 여기서 또 로맨스가 빠지면 안되지. 절세미녀인 마리사는 자신의 애인을 죽음으로부터 구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한다. 한편, 자기 계급의 적인 다 바르카를 반대하는 그녀의 조부 베니토 마요는 그를 세상에서 소멸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노라고 사랑하는 손녀딸에게 말한다. 마리사는 자해까지 감행하면서 다 바르카에 대한 절절한 사랑을 표현했다. 다 바르카가 긴 투옥 생활을 이겨내는데 사랑의 힘이 가장 큰 원동력이 아니었을까라고 추정해 본다.
마누엘 리바스 작가는 에스파냐 내전 당시, 아무런 죄 없이 투옥된 포로/죄수들을 도운 에스파냐 여성들의 지지에 대해서도 소설의 곳곳에서 언급하고 있다. 그들은 적어도 반동적인 역사의 흐름에 있어 방관자가 아니었다. 다 바르카나 다른 공화파 인사들이 체포조에 의해 끌려갈 때, 그들을 막기 위해 격렬하게 저항했다. 빨래를 이용해서 감옥에 갇힌 이들에게 메시지를 보내고, 자신의 형제 부모 남편이나 애인들에게 해산물을 공급하기도 했다. 국가주의자들과 프랑코 독재에 맞서 그들만의 방식으로 싸운 이들에 대한 리바스식 경의 표시라는 생각이 들었다.
에르발에게 들러붙은 화가의 그것은 양심의 목소리다. 이러한 설정은 아무리 에르발이 독재자 프랑코에게 부역한 빌런이라고 하더라도 일말의 양심은 남아 있었을 거라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마누엘 리바스는 다 바르카나 마리사 마요의 입장 그러니까 피해자의 목소리보다 가해자의 목소리에 보다 비중을 두었다. 반성과 화해 그리고 역사 청산이라는 에스파냐가 짊어진 궁극적 과제에 대한 문제 제기의 발로다. 언제나 그렇지만, 역사는 진실을 밝히기 위한 끝없는 투쟁이다. 소설 <목수의 연필>은 역사에 대해 영원한 무관심에 빠진 이들에게 각성을 촉구한다. 깨어나 행동에 나서라고.
[뱀다리] 같이 읽으면 좋은 책 두 권이 말미에 실려 있어 기록해 본다.
1. <살라미나의 병사들> 하비에르 세르카스 (열린책들)
2. <열세 송이 붉은 장미> 카를로스 폰세카/헤수스 페레로 (국내미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