엉덩이에 입맞춤을 일루저니스트 illusionist 세계의 작가 9
에펠리 하우오파 지음, 서남희 옮김 / 들녘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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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에 우연히 알게 된 들녘 일루저니스트 시리즈 가운데 하나인 마누엘 리바스의 <목수의 연필>을 빌리러 갔다. 그러다 문득 14년 전에 읽은 유쾌한 소설 에펠리 하우오파의 <엉덩이에 입맞춤을>도 그 시리즈 가운데 한 편이라는 사실이 떠올랐다. <엉덩이>도 같이 빌렸다. 그리고 이미 한 번 읽은 <엉덩이>를 먼저 읽게 됐다. 요즘 약간 독서 슬럼프라 재밌는 책이 읽고 싶었던 모양이다.

 

소설의 주인공 오일레이 봄보키의 엉덩이에 문제가 발생했다. 좀 더 레알하게 밝히자면 그의 똥구멍에 비상이 걸린 거다. 자고로 먹고 싸는 문제만 해결되면 삶이 순탄할 거라고 누가 그랬던가. 소싯적 권투 챔피언으로 지금은 성공한 택시 사업가이자 농장주로 잘 나가던 티포타에 사는 오일레이에게 이런 일이 생기다니! 게다가 그가 앓고 있는 부위는 누군가에게 밝히기도 꺼릴 만한 그런 곳이 아니던가.

 

설상가상으로 남말하기와 뒤까기에 있어서 두 번째 가라면 서러워할 사람들이 바로 코로다무 사람들이다. 똥구멍이 아픈 오일레이에 대한 소문이 그야말로 바람을 타고 모든 호사가들의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이렇다할 오락거리가 없는 그들에게 어쩌면 미래의 상원의원이 될 지도 모를 오일레이의 고통은 누군가에게는 희소식일 수도 있다는 점이 서사를 보다 더 흥미롭게 만든다.

 

게다가 남태평양 섬에 사는 코코넛들은 최신 현대 의술을 1도 믿지 않는다. 그들에게 병원은 시체안치소와 동일한 말이다. 사실 현대 의학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비용이 비싸서 그들은 의사들의 진단보다도 동네 주술사들 보다 고상하게 말하면 도토레들을 더 의지하고 따른다. 그렇다고 도토레들의 실력이 죽을 것 같은 고통으로 괴로워하는 오일레이를 구원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신앙의 영역의 문제로 돌려야 할까.

 

에펠리 하우오파 작가의 직설적이고 가감 없는 주인공 오일레이 봄보키에 대한 묘사는 일품이었다. 아니 어쩌면 모든 소설이 반드시 문학적 성취나 고상해야 한다는 사변적 당위성을 가져야 하는 건 아니니까. 그런 점에서 나는 <엉덩이에 입맞춤을>이 품은 서사가 14년 전이나 지금이나 그렇게 사랑스러울 수가 없었다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 저자가 구사하는 중요한 메시지 중의 하나가 공존이라고 생각한다. 현대 의사들은 자신들의 영리를 위해 기존의 민간요법이나 일체의 주술을 거부한다. 어떤 기득권층이 자신의 밥그릇 혹은 파이가 줄어드는 걸 원한단 말인가. 하지만 남태평양 현지의 상황을 파악한 의사/닥터들은 아무리 기독교 신앙이 포교되었다고 하더라도 원주민들에게 뿌리 깊이 자리한 민간신앙과 민간치료를 발본색원할 수 없다는 걸 깨닫게 된다. 연합 심포지엄인가에서 그들의 존재를 이해하고 자신들은 닥터로 그리고 민간 주술사들은 도토레라고 불리는 공존에 대한 합의를 이루게 된다.

 

한편, 날이 갈수록 악화되는 오일레이의 똥구멍 치료를 위해 영험하다는 도토레들은 물론이고 용의 연고, 심리학자 그리고 신앙의 힘까지 총동원된다. 현세의 고통 때문에 유약해진 오일레이의 영혼은 그야말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이단 사이비에 현혹되기도 한다. 잠시나마 당장의 고통을 잊을 수는 있었지만 문제의 근원 해결에는 역시 도움이 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오일레이의 고통은 배가될 뿐이었다.

 

결국에 가서 오일레이는 키위들의 도움을 받기로 결정한다. 그 와중에 등장한 부타코 경관은 뉴질랜드 대사에게 호소해서 오일레이를 돕는다면 명목으로 이민을 추진하기도 한다. 똥구멍 같은 코코넛들의 나라에서 비전이 없다고 생각한 부타코 경관은 불법이민을 추진하다가 발각이 되고, 결국 밀항길에 오른다. 그리고 천신만고 끝에 뉴질랜드에 도착한 오일레이는 기상천외한 방식의 항문이식수술을...

 

아마 백인 작가가 이런 얼토당토않은 서사를 구사했다면, 바로 인종차별이나 코코넛들에 대한 비하로 공격받았을 것이다. 더 나아가 엉덩이에서 출발해서 우주의 본성까지 들먹이는 작가의 뻔뻔함에 할 말을 잃었다. 이런 구성은 어디까지나 현지인들만이 할 수 있는 그런 영역의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에펠리 하우오파는 기존의 점잔빼는 서구인들의 시선에 이 소설로 묵직한 한 방을 날렸다. 너희들에게는 닥터가 있다면, 우리에게는 도토레들이 있단 말이지 하고 말이다. 에펠리 하우오파의 다른 저작들을 만날 수가 없어 아쉬울 따름이다.


[뱀다리] 처음에 읽었을 적에는 별 다섯 개를 주었는데, 다시 읽다 보니 그 정도는 아닌 듯 싶게 되었다. 시간이 가니, 책에 대한 감상이나 평가도 달라지는가. 그래도 여전히 빵빵 터지는 코코넛 스타일의 유머는 건재했다. 아마 번역의 힘도 상당하지 않았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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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onnight 2022-12-28 11: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항문이식수술@_@; 음음 하며 읽다가 깜놀@_@;;; 제가 이 책을 읽었다면 이건 뭐지 하며 비틀비틀 쓰러졌을텐데 역시 레삭매냐님의 내공에 고개 숙입니다(_ _);;

레삭매냐 2022-12-28 11:30   좋아요 1 | URL
주술적 레알리즘까지 가면
너무 먼 듯하고, 판타지스러운
설정과 코코넛스러운 냉소가
빵빵 터지는 유쾌한 소설이랍
니다.

저의 허접한 내공을 좋게 봐주
셔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Falstaff 2022-12-28 11: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오, 진즉 읽으시지요! 이 재미난 책을. ㅋㅋㅋ

레삭매냐 2022-12-28 11:41   좋아요 0 | URL
ㅋㅋㅋ 재밌다는 점에
격렬하게 공감합니다.

리뷰 서두에 있지만
이미 14년 전에 읽었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