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일간지에 최근 서울 각지에서 만난 외국인 관광객 100명을 심층 인터뷰한 결과를 정리한 것이 실렸다. 외국인 관광객이 ‘한국에서 이해할 수 없었던 일들’에 관한 인터뷰였다. 그중에서 내 눈길을 끈 것을 옮겨 보았다.



휴지를 변기가 아니라 쓰레기통에 버리도록 해 놓은 곳도 외국인 눈에는 낯설었다. 이들은 “그런 화장실은 중남미의 빈곤국가를 연상케 했다”고 말했다. 음식점이나 주점의 ‘남녀 공용 화장실’을 보고 외국인들은 “오 마이 갓!”을 외쳤다. 이들은 “화장실이 남녀 공용이라니, 매우 충격적이었다. 몇 번이고 문이 잠긴 것을 확인해야 했다”고 말했다.


- 조선일보, 2011. 8. 13-14.




휴지를 쓰레기통에 버리는 것, 남녀 공용의 화장실을 사용하는 것 등은 우리들에겐 이미 익숙해져 버려서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들인데, 외국인들의 눈엔 충격적이었다는 사실이 오히려 우리에겐 충격이 아닐까.

지하철에 관한 것도 있었다. “개찰구를 통과하자마자 다들 뛰기에 무슨 일이 난 것 같아 무서웠다. 알고 보니 지하철이 구내로 들어오고 있었다”고 말했다. 음식점에 관한 것도 있었다. (손님들이) “여기요!” “저기요!” 하며 종업원을 부르는 것이 낯설다고 했다. “식탁 위에 화장실 휴지가 있어 깜짝 놀랐다”는 대답도 있었다.


외국인들은 이 밖에도, 한국의 길거리에서 휴지통을 볼 수 없다는 것 그래서 쓰레기를 내내 들고 다니다가 호텔에 와서 버렸다는 것, 쓰레기통도 없는데 길거리에서 전단을 나눠 주는 사람이 많다는 것, 특히 여자 나체사진이 담긴 전단이 대학가에 뿌려져 있다는 것 등을 지적했다.


외국인들의 눈에 비친 우리 삶의 풍경을 보니 ‘문제’가 무엇인지 알 것 같다. 우리가 이런 것들을 개선해야 할 ‘문제’라고 여기지 않는 건 ‘이미 익숙해져 버려서’이다. 익숙하면 무감각해지기 때문이다.


익숙함으로 인한 무감각은 조지 오웰이 쓴 ‘교수형’이란 제목의 에세이에 잘 나타나 있다. 교수형을 집행하는 사람들은 사람을 죽이는 일이 반복되는 일상사이므로 한 사람의 죽음에 대해 태연스럽기만 하다. 
 

 




우리는 교수대 뒤편으로 돌아가 죄수의 (교수형을 당한) 시신을 확인했다. 발끝이 아래로 쭉 뻗어 있는 그는 돌처럼 생명 없이 매달린 채 천천히 돌고 있었다.


소장은 지팡이를 뻗어 시신의 맨살을 찔러 보았다. 시신이 슬쩍 흔들렸다. “‘제대로’ 됐다.” 소장은 그렇게 말하고는 교수대 밖으로 나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시무룩한 기색이 어느새 걷혀 있었다. 그는 손목시계를 흘끗 바라보았다. “8시 8분. 오늘 아침에 할 건 다했다. 휴우.”


- 조지 오웰 저, <나는 왜 쓰는가>, 28쪽~29쪽.




소장이 교수형을 처음 집행하는 날부터 시신을 지팡이로 찔러 보는 일을 예사로 하진 않았을 것이다. 반복되어 생긴 그 ‘익숙함’이 죽은 사람에 대한 연민도 슬픔도 없는 무감각한 사람으로 만들어 버렸을 것이다.


며칠 전, 텔레비전에서 모 연예인(남자)이 부부 사이에서 오갔던 말을 재현하는 장면이 있었다. 그중 이런 말이 나왔다.


“야, 내가 뭘 잘못했니?”(남편이 아내에게 하는 말)


‘야’라고 부르는 것이 시청자에 따라선 부부 간에 예의가 없는 사람처럼 또는 저급한 사람처럼 보일 수 있다는 것을 모 연예인은 몰랐을 것이다. 왜냐하면 자신은 익숙한 것이므로.


길거리에 침을 뱉는 사람들을 종종 본다. 아마 그런 사람들도 그것에 대해 타인이 느끼는 불쾌감을 모를 것이다. 왜냐하면 자신은 익숙한 것이므로.


거짓말을 하다 보면 그 자신조차 그 거짓말에 속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그래서 자신의 잘못을 모른다고 한다. 습관적으로 폭력을 휘두르는 사람도, 습관적으로 도둑질을 하는 사람도 그것에 익숙해져 버려서 그것이 ‘악’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는 게 아닐까. 그래서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고 뻔뻔해지는 게 아닐까.

  

다음의 명언들이 이를 증명하고 있는 듯하다.




모든 일은 익숙해지면 아무것도 아니다.(스위프트)


비관주의는 일단 거기 익숙해지면 낙관주의처럼 편안한 것이다.(아널드 베넷)


아름다움은 곧 애인에게 익숙해져서 보이지도 느껴지지도 않게 된다.(J. 애디슨)


역경에 익숙해지면 그것은 더 이상 괴롭지도 않다.(클라우디아누스)


- <세계의 명언 2>, 해누리, 369쪽.




흔히 우리는 잘못된 사회를 비판하고 개선되길 희망한다. 그런데 ‘자기 개선’이라는 작은 일부터 실천하는 자세를 갖지 않는다면 사회를 변화시키는 일은 불가능하다. 보다 나은 삶을 위해 우리 모두 일상적 습관이 되어 버린 익숙한 것들을 점검해 보는 시간을 갖는 게 필요할 것 같다. 외국인의 눈으로 한국인의 세계를 본 것처럼, 제삼자의 눈으로 자신의 세계를 점검하는 시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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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11-08-15 19: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창호가 그런 이야기를 했죠.세상이 악하다고 투덜대지 말고 네가 착한 사람이 되어라.

자기의 잘못은 절대 인정 않으면서 세상이 왜이리 악하냐고 삿대질하는 인간들이 있죠.

페크pek0501 2011-08-16 11:18   좋아요 0 | URL
맞습니다. 개인 하나하나가 다 잘 하면 좋은 세상은 저절로 되니까요.

오늘 날씨는 흐리네요. 초가을 날씨 같아요. 즐거운 하루 되세요, 반가운 노이에자이트님!!!!!!!!!!

노이에자이트 2011-08-16 17:12   좋아요 0 | URL
명랑한 인사를 들으니 기분이 좋습니다! 힘냅시다!

페크pek0501 2011-08-17 00:42   좋아요 0 | URL
예, 파이팅입니다.

옹달샘 2011-08-16 19: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익숙하면 무감각해지기 때문이다'라는 말에 공감합니다.저에게도 익숙함으로 나쁜 습관이 생활화되어 문제로 인식을 못하고 삽니다. 무슨 일이든 나부터 반성하고 고치는 일이 순서인 것 같습니다.

페크pek0501 2011-08-17 00:42   좋아요 0 | URL
반가워요, 옹달샘님. 잘 지내죠? ^^^

누구에게나 익숙함의 무감각으로 인해 문제점이 있는데도 자각하지 못하는 게 있을 거예요. 그래서 집에 손님이 오면 집안 청소를 한다든지 해서 점검하는 거지요.

이 글을 쓰고 나서 저도 저 자신에 대해 점검하게 되었습니다. 글쓰기 자체가 '정신 교육'인 것 같아요. 쓰면서 많이 배웁니다. 또 남의 글에도 자연히 관심을 갖게 되니 (책이든 블로거들의 글이든) 많이 읽게 되고 배웁니다.

 

1.


우리는 자신이 예상한 것과 정반대의 마음 작동을 보이는 상대로 인해 당황하거나 불쾌한 기분을 느낀 적이 있을 것이다. 정반대의 마음 작동을 일으키는 예를 나의 상상력으로 써 보았다.


A라는 선생님이 초등학교 6학년의 여름방학식 날에 학생들에게 말했다. “이번 여름방학은 중학교 교과서를 마지막으로 공부할 수 있는 중요한 방학이다. 그러니 방학 동안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라고. 그러자 어떤 학생은 이런 생각을 한다. ‘초등학생으로서 마지막 방학이니 실컷 놀아야지. 중학생이 되면 학원 다니느라 놀 시간이 없을 거야.’


B라는 남자가 여자와 연애를 하면서 싸움을 자주 하게 됐다. 그래서 더 이상 싸우지 않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나, 생각한 끝에 무조건 그녀에게 잘 해 주기로 했다. 그러면 싸울 일이 없을 줄 알았던 것. 그런데 정반대의 결과가 나타났다. 너무 잘 해 주었더니 그녀가 자만해져서 더 싸울 일이 많아졌던 것이다.


C라는 사람이 어느 블로그에 들어가서 “이 글은 참 재미있군요.”라고 댓글을 썼다. 정말 잘 썼다고 생각해서 최고의 찬사로 그렇게 쓴 것이다. 그러면 글쓴이가 기분 좋아할 줄 알았다. 그런데 글쓴이는 오히려 기분 나빠했다. ‘내 글이 깊이는 없고 재미만 있다는 말이군.’하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2.


어떤 주제로 글을 쓰려고 하면 자연히 그것과 관련 있는 글이 떠오른다. 내가 읽은 책 중에서 정반대의 마음 작동을 보여 주는 글과 그 책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 조지 오웰 저, <나는 왜 쓰는가>에서    

 



조지 오웰의 글을 만난다는 것은 내겐 ‘충격’을 만나는 일과 같다. 그가 쓴 소설 <동물농장>이 그랬고, <1984>가 그랬다.


29편의 에세이가 실린 <나는 왜 쓰는가>라는 에세이집 역시 충격을 주는 글이 많이 실려 있다. 이 책에는 그가 몸소 체험한 생생한 이야기가 담겨 있어 마치 그의 육성을 직접 듣는 듯해 자서전처럼 읽히는 글이 많다. 이 중에서 조지 오웰이 부랑자 생활을 한 경험을 토대로 쓴 ‘스파이크’라는 제목의 에세이가 있다. (스파이크란 ‘부랑자 임시숙소’를 말함)


부랑자들이 있는 스파이크에선 그저 맛없는 빵과 차로 끼니를 때운다. 그런데 200야드 떨어진 구빈원 부엌에선 “소고기로 만든 굉장한 요리들”(16쪽)을 비롯한 음식이 많았고, 사람들이 먹고 남은 음식을 모두 쓰레기통에 버리게 했다. “남은 음식을 부랑자들에게 주지 않고 버리는 건 고의적인 방침인 듯했다.”(17쪽)


그 이유는 이러했다.




“이런 데를 너무 좋게 만들어 놓으면 온 나라의 쓰레기들(부랑자들을 말함)이 다 몰려들게 돼요. 그런 쓰레기들을 떼어 놓으려면 음식이 나빠야만 되고요.”


- 조지 오웰 저, <나는 왜 쓰는가>, 18쪽.




구빈원 부엌에서, 먹다가 남은 음식을 부랑자들에게 주지 않고 쓰레기통에 넣는 것은 좋은 음식을 주게 되면 부랑자들이 몰려들기 때문이란다. 이런 마음 작동은 충격적이다.


혹시 우리나라에서도 정부가 서울역에 몰려드는 노숙자들에게 기거할 주택을 마련해 주지 않고 방관하는 이유도 이와 같기 때문일까 하는 생각이 스친다.


(2) 버트런드 러셀 저, <런던통신 1931-1935>에서   

 


<런던통신 1931-1935>는 135편의 칼럼들이 실려 있는데, 러셀이 1930년대에 주로 미국 신문에 기고했던 글이다. 그 시대를 살며 목격하고 생각한 일들에 대해 날카로운 직관으로 풀어 써서 그의 깊은 사색을 만날 수 있는 책이다. 글을 쓴 시대로부터 시간이 많이 흘렀지만 현재를 살고 있는 이 시대의 사람들에게도 여전히 생각할 거리를 제공하는 좋은 글이 많다. 
 



그중, ‘기대하는 마음이란’의 제목의 칼럼에는 남녀 사이에서 변심한 사람에 대한 그의 시각이 잘 나타나 있다.




결혼을 하는 신랑 신부는 이제부터 서로를 사랑하는 것이 두 사람의 ‘의무’라는 얘기를 듣는다. 사랑이란 하나의 감정이기 때문에 의지로 통제할 수 없고 따라서 의무의 영역에 넣을 수 없는데도 그렇다고 한다. 신중한 행동이야 의무가 될 수도 있겠지만 사랑은 하늘의 은총이다. 따라서 그 은총이 철회되었을 때는 그것을 상실한 사람을 비난할 게 아니라 동정하는 것이 마땅하다.


- 버트런드 러셀 저, <런던통신 1931-1935>, 192쪽.



우리는 흔히 변심한 사람을 나쁜 사람으로 판단해 버린다. 남녀가 만났으면 사랑을 영원히 간직한 채 살아야 좋은 사람인 것이다. 하지만 사랑은 감정의 영역에 있으므로 변할 수 있다. 그리고 변심한 사람은 사랑을 잃은 것이므로 미워하기보단 가엾게 여겨야 할 것 같은 생각도 든다. 그래서 변심한 사람을 비난할 게 아니라 오히려 동정하는 게 마땅하다고 하는 이 마음 작동은 옳은 것 같다. 또 서로를 위해서 이런 마음 작동이 바람직한 것 같다.


(3) 홍은희 저, <삶의 시간들>에서 


   


<삶의 시간들>은 중앙일보 논설위원을 지낸 저자가 1996년부터 2006년까지 쓴 생활칼럼 가운데 110편을 가려 모은 책이다. 이 책은 사랑에 관한 것, 여성들의 문제에 관한 것, 남성들의 문제에 관한 것, 고질적인 생활문화의 병폐에 관한 것, 조기유학의 실상과 같은 우리 사회의 문제에 관한 것 등을 다루고 있다.


 

그중, ‘부부싸움과 말버릇’이란 칼럼은 어느 부부싸움에 대한 사람들의 마음 작동이 성별에 따라서 얼마나 다른지를 보여 준다.




얼마 전, 부산에서 남편의 술버릇 때문에 부부싸움을 하던 아내가 아파트 옥상에서 투신자살을 기도했다가 뒤쫓아 달려온 남편이 간신히 팔을 붙잡아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진 일이 있었다.


‘목숨 건 부부싸움’ 기사를 보다가 그들 부부의 ‘사건 후 세력판도’가 궁금해졌다. 질문을 받은 몇몇 남성들은 예외 없이 “이제 그 남편은 완전히 마누라에게 잡혔군” 하는 반응을 보였다. 반면 여성들은 “남편이 생명의 은인이 됐으니 큰소리치긴 다 틀렸다”고들 했다.


- 홍은희 저, <삶의 시간들>, 178쪽~179쪽.




하나의 부부싸움을 보면서 신기하게도 남성들과 여성들은 정반대의 마음 작동을 일으키고 있다. 누군가를 이해하려 할 땐 세상을 읽는 시각이 자신과 같은지, 다른지의 문제부터 살펴봐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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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등학생 때 금붕어를 키운 적이 있다. 한 마리의 금붕어가 어항 속에서 헤엄치며 노는 것을 들여다보는 재미가 있었다. 먹이를 주려고 먹이가 든 내 손을 어항 위로 가까이 대면 금붕어는 먹이를 먹기 위해 위로 쏙 올라오곤 해서 먹이를 주는 재미도 있었다. 어째서 한 마리뿐이었는지 그 이유는 기억이 나질 않는다. 누가 한 마리만 준 것인지, 아니면 몇 마리를 샀는데 다 죽고 한 마리만 남았는지 기억이 없다. 다만 내가 기억하는 것은 지금부터 말하려는 사건이다. (누구나 지난 일에 대해선 인상적인 부분만 기억하는 법이다.)


한 마리가 어항 속에 갇혀 있는 것을 보니 금붕어가 심심할 것 같았다. 그래서 생김새와 크기가 비슷한 것으로 금붕어 한 마리를 더 사서 그 어항에 넣어 주었다. 둘이 친구처럼 의지하며 즐겁게 놀라는 뜻에서였다. 그런데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내가 키우던 금붕어가 새로 사 온 금붕어를 공격하는 것 같았다. 자세히 보니 키우던 금붕어가 입으로 새 금붕어의 몸을 쪼고 있는 것 같았고, 그럴 때마다 새 금붕어는 도망치는 것 같았다. 그런데 확실히 알 수는 없었다. 나는 사람이고 그들은 금붕어니까. 혹시 둘이 장난치며 노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어 며칠을 지켜보기로 했다. 그런데 그로부터 며칠 뒤, 새 금붕어가 물 위에 떠서 움직이지 않았고 물은 뿌옇게 변해 있었다. 죽은 것이다. 둘이 즐겁게 장난친 게 아니라 괴롭게 전쟁을 치르고 새 금붕어가 패배하여 죽은 것이다. 아마 한쪽에서의 일방적인 전쟁이었을 것이다.


난 이 일에 충격을 받았다. 죽은 금붕어를 땅 속에 묻어 주고 나니 기분도 우울했다. 그리고 동료 금붕어를 죽인 그 금붕어를 더 이상 좋아할 수가 없었다. 한 마디로 정이 떨어졌고 무서웠다. 그 뒤로는 더 이상 금붕어를 키우는 취미가 없어져 버렸다.


여기서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내가 예상한 것과 정반대의 마음 작동을 일으킨 그 금붕어에 관한 것이다. 홀로 있는 게 심심할까 봐 내 딴엔 생각해서 새 금붕어를 넣어 주었는데 새 금붕어를 죽임으로써 오히려 홀로 남는 것을 택한 그 마음 작동의 이유가 궁금하다. 자신의 영역을 침범한 ‘적’으로 알고 그랬을까. 먹이를 나눠 먹어야 하는 경쟁자로 알고 그랬을까. 일종의 텃세였을까. 그 이유를 금붕어에게 물어볼 수도 없으니 모를 일이다.


사람들 중에도 그 금붕어처럼 나의 예상과 정반대의 마음 작동을 일으키는 사람들이 있다. 타인을 배려하는 마음으로 친절을 베푼 나의 말에 상대가 불쾌감을 표명하는 사람들을 본다. 어째서 그들은 내가 예측하던 것과 정반대의 마음 작동을 하는 것일까. 서로 삶의 역사가 달라서일까, 세계관이 달라서일까.


이런 생각 끝에 나의 삶을 돌아본다. 나 역시 분명 상대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해 정반대의 마음 작동을 보여 상대를 실망하게 만들거나 상처를 준 적이 있을 것이다.


2.


사람들과의 관계가 어렵다고 느껴질 때가 있다. 특히 내가 의도한 바와 다른 방향으로 상대가 마음 작동이 일어나는 것을 경험할 때 그렇다. 그럴 때 상대편의 처지에서 생각해 보려는 태도와 상대에 대해 관찰하는 태도가 내게 필요했음을 뒤늦게 깨닫게 된다.


이것과 관련하여 강신주 저, <철학이 필요한 시간>에는 눈여겨볼 만한 이런 글들이 있다.




관찰자는 모든 것의 원천입니다. 관찰자가 없으면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관찰자는 모든 지식의 기초입니다. 인간 자신, 세계 그리고 우주와 관계되어 있는 모든 주장의 기초입니다. 관찰자의 소멸은 우리가 알고 있는 세계의 종말과 소멸을 의미할 것입니다. 지각하고, 말하고, 기술하고, 설명하는 사람이 아무도 남아 있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 강신주 저, <철학이 필요한 시간>에서.






특히 그(비트겐슈타인)가 혐오했던 것은 말할 수 없는 것을 타인에게 함부로 말하는 인간의 허영이나 과시욕이었다. 우리는 얼마나 타인의 속내에 대해 당사자보다 더 잘 알고 있다는 듯이 함부로 이야기하고 있는가?


- 강신주 저, <철학이 필요한 시간>에서.






비트겐슈타인에 따르면, 모든 사람들은 자신만의 고유한 삶의 맥락에서 태어나 자라면서 자신만의 고유한 언어 규칙을 따른다. ~ 문제는 같은 언어나 문화를 공유하고 있는 사람을 만날 때 발생하기 쉽다. 겉으로는 유사해 보이지만 그들은 지역, 가족, 학교, 전공 등등에 의해 나의 문맥과는 일치하지 않는 언어를 사용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욕쟁이 할머니의 식당에서 느끼기 쉬운 불쾌감이나 거부감을 반복하지 않으려면, 우리는 자신과 대화하는 사람이 어떤 삶의 문맥을 가지고 이야기하고 있는지 섬세하게 읽어내야 한다.


- 강신주 저, <철학이 필요한 시간>에서.







중요한 것은 상대방의 무의식적 정서, 즉 상대방이 부끄럽게 생각하는 것, 상대방이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을 읽을 수 있는 타자에 대한 감수성이다.


- 강신주 저, <철학이 필요한 시간>에서.




이런 글들을 읽으면서 사람마다 세상을 읽는 문법이 다르고 사유 방식이 다르다는 사실의 중요성을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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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8-19 17:3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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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8-19 18:0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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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8-22 10:2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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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8-22 16:0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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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1-08-22 16: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글을 하나하나 꼼꼼히 다 읽어 보셨다는 분이 있어 떨리네요. 영광으로 생각하겠습니다.
비교적 나은 글도 있고 꽤 후진 글도 있을 겁니다. 사실 그 후진 글들을 삭제하고 싶었으나 그냥 두었습니다. 너무 잘난 사람은 매력이 없는 법. 추천수가 0인 글도 가끔 써야죠. ^^^
 


단상(19) 심각한 진짜 바람을 피우지 않는 이유 외


1. 심각한 진짜 바람을 피우지 않는 이유


요즘 가장 관심 있게 읽는 책은 심리학 분야의 책이다. 인간을 이해하게 만드는 책에 흥미를 느껴서다. 인간에 대해 공부하고 싶어서다. 알아도 안다고 할 수 없는 게 인간이란 존재가 아닐까. 그래서 인간을 알기 위한 공부는 끝이 없을 것 같다. (혹시 심리학을 공부하고 나면 내 글에 심리학적 관점에서 쓴 부분의 글도 출현하게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하고 있다.)


이번 달에 구입한 책은 심리학책은 아니지만 인간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은 <영장류 인간과(科) 동물도감>이다. 일본의 드라마 작가이면서 소설가인 무코다 구니코가 쓴 책으로 ‘유쾌한 인간관찰기’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인간관찰기’라는 말에 끌리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일본 최고의 드라마 작가께선 인간에 대해 얼마나 예리한 통찰력을 가졌는지가 궁금했다. 궁금한 건 못 참는다. 그래서 구입했다. 
 



가장 인상 깊게 읽었던 것은 이 부분. 



다른 강아지나 고양이를 데리고 즐겁게 놀고 난 뒤면 나를 맞이하는 우리 집 고양이에게 좀 미안한 기분이 들어, 좋아하는 마른 멸치를 평소보다 두세 마리 더 주기도 한다.


‘인생, 가는 곳마다 바람기 있음’이 아닐까?


백화점에서 살 마음도 별로 없는 옷을 입어보는 것도 일종의 바람피우기이다. 인스턴트 라면이나 세제를 다른 상표로 바꿔 쓰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텔레비전 채널을 돌릴 때마다 광고라는 것이 주부에게 바람피우기를 권한다.


이런 사소한 바람을 피우면서 우리는 자신도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하루하루 생활의 근심을 잊는다. 미니 사이즈의 바람피우기인 것이다. 그 덕분에 심각한 진짜 바람을 피우지 않는 게 아닐까?


- 무코다 구니코 저, <영장류 인간과(科) 동물도감>, 159쪽~160쪽.





이 글에 따르면, 나처럼 책을 좋아하는 사람은 책을 통해 바람을 피우고 있는 셈이다. 도스토예프스키와 데이트를 하고 임어당과 데이트를 하고 알랭 드 보통과 데이트를 하고….


어느 특정한 연예인에 열광하며 광팬을 자처하는 사람은 자신이 좋아하는 연예인과의 데이트를 맘속으로 즐기며 가짜 바람을 피우는 것이라고 볼 수 있겠다. 예전에 ‘배용준’ 배우를 보기 위해 일본에서 우리나라를 방문한 일본 주부들은 배용준 배우와의 데이트를 맘속으로 즐기며 그들의 남편에게는 미안한 마음을 가졌을지도 모른다.


‘바람피우기’란 이렇게 해석하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배우자 또는 연인을 향해 이렇게 소리치는 것과 같다고.


“나에겐 당신 말고도 즐거움을 주는 그 무엇이 있다구요.”


책을 좋아하는 사람은, “나에겐 당신 말고도 즐거움을 주는 책이 있다구요.”


연예인을 좋아하는 사람은 “나에겐 당신 말고도 즐거움을 주는 연예인이 있다구요.”


강아지를 좋아하는 사람은 “나에겐 당신 말고도 즐거움을 주는 강아지가 있다구요.”


명품을 좋아하는 사람은 “나에겐 당신 말고도 즐거움을 주는 명품 쇼핑이 있다구요.”


무코다 구니코에 의하면, 그 덕분에 심각한 진짜 바람을 피우지 않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그들의 배우자 또는 연인은 그런 바람피우기의 대상에 대해 불쾌하기보다 오히려 감사해야 할 것 같다. 그러니 다른 것으로부터 즐거움을 얻을지라도 진짜 바람피우기가 아니라면 말리지 말 일이다.



2. 나는 울 만큼 원하는 게 있을까




아직 이십대를 넘지 않아 보이는 청바지 차림의 엄마 손에 이끌려 매장을 나서는 중이었다. 눈물로 범벅이 된 (아이의) 얼굴은 이 세상이 끝나기라도 한 것처럼 비통한 표정이었고, 좀처럼 울음을 멈출 기색이 없었다.


그 아이는 뭘 갖고 싶었던 것일까.


나는 지금, 소리 내어 울 만큼 원하는 게 있을까?


- 무코다 구니코 저, <영장류 인간과(科) 동물도감>, 50쪽~51쪽.




누구나 어린 시절에 한 번쯤은 갖고 싶은 장난감이 있어서 울어 본 적이 있으리라. 나는 피아노를 갖고 싶어서 운 적이 있다. 절실하게 갖고 싶었다. 조르고 조르다가 나중에 내 방에 피아노를 들여 놓던 날, 얼마나 행복했는지를 지금도 또렷이 기억한다. 피아노가 배달되기 전날 밤엔 흥분되어 잠을 설칠 정도였다. 피아노가 귀하던 시절이었다.


요즘 대부분의 아이들은 그런 절실함을 느끼지 못한 채 성장하는 것 같다. 오히려 부모들이 나서서 피아노를 사 주고 핸드폰을 사 주는 게 요즘의 추세이기 때문이다. 또 냉장고엔 먹을거리가 잔뜩 들어 있다. 그 예전 작은 사탕 하나에도 행복해 했던 우리들의 어린 시절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풍족한 세상이다. 그렇다고 해서 요즘 아이들이 그 옛날의 아이들보다 더 행복하다고 확신할 수 있을까. 무엇을 갖기 위해 울어 본 적이 없는 아이는 행복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게 아닐까.


어떤 사람이 천국에 가게 되었다. 그곳에는 먹을 것이 많았고, 걱정거리가 없었으며, 사람들 간에 갈등이나 분쟁이 없었다. 기후는 늘 알맞았고 환경은 쾌적하였다. 그런데 그 어떤 사람은 그곳에서 지내다가 어느 날 이렇게 기도하였다.


“하느님, 이 천국에서 나가게 해 주십시오. 제가 살던 세상으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제발 제 기도를 들어 주십시오.”


이유는 간단했다. 천국에서의 생활이 권태로웠기 때문이다. 가장 견딜 수 없는 것은 바로 ‘권태’였다. 권태야말로 인간을 가장 불행하게 만든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그래서 적당히 근심이 있고 고민이 있고 행복과 불행이 섞여 있는 세상이 그리워졌다.


울 만큼 원하는 게 있는 사람은 최소한 권태롭지는 않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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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


“나는 지금, 소리 내어 울 만큼 원하는 게 있을까?”(51쪽)


이 문장을 읽고 나는 지금 소리 내어 울 만큼 원하는 게 없다는 걸 알았다. 울고 싶은 정도라는 건 쉽게 가질 수 없는 것을 절실히 원하는 것을 의미하리라.


그러다가 한 가지 생각해 냈다. 울 정도는 아니지만 내가 지금 원하는 것은 통찰력을 갖는 것임을.


작가가 아니더라도 누구나 글을 쓸 땐 잘 쓰고 싶을 것이다. 그것은 가수가 아니더라도 노래를 부를 땐(노래방에서든 어디서든) 잘 부르고 싶은 것과 같다. 노래를 부르는 건 즐기기 위해서지만 막상 노래를 부를 땐 잘 부르고 싶은 것과 마찬가지로, 글을 쓰는 건 즐기기 위해서지만 막상 글을 쓸 땐 잘 쓰고 싶은 것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글을 잘 쓰려면 두 가지가 필요하다. 문장력과 통찰력이다. 글의 형식이 좋으려면 문장력이 필요하고, 글의 내용이 좋으려면 통찰력이 필요하다. 그런데 문장력보다 갖기 어려운 게 통찰력이다. 글을 잘 쓰는 사람들은 인간과 세상에 대한 통찰력이 뛰어난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좋은 글을 만난다는 것은 필자의 통찰력을 마주하는 일이다.


나를 포함해 글쟁이들이 제일 듣고 싶은 말은 이런 게 아닐까.


“당신의 글을 보니 통찰력이 대단하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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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코다 구니코의 다른 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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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달샘 2011-07-26 19: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제가 지금 간절히 원하는 건 문장력과 통찰력 둘다 입니다.

페크pek0501 2011-07-27 00:57   좋아요 0 | URL
와우, 반가워요. 겸손의 말씀이시군요.ㅋ

어떤 때는 좋은 문장력을 발견하는 재미로 책을 읽을 때가 있어요.

오늘 같이 비 오는 날이면
'비오는 날의 마음의 그림자를 사랑하라'(김수영 시인)
라는 구절이 생각나요.
이 간단한 구절이 맘에 들어요.

노이에자이트 2011-07-27 13: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의 어린이나 청소년이 불행한 것은 놀거나 운동할 시간이 없다는 것입니다.그들의 부모세대는 그래도 방학에 쉬기도 했는데 요즘은 방학 때도 학교 가서 공부해야 하고...그들이야 쉬고 싶겠죠.부모들이 닦달하니까 어쩔 수 없지만요.

페크pek0501 2011-07-27 18:02   좋아요 0 | URL
그렇네요. 요즘 아이들이 물질적 혜택은 많지만 심적으로 육체적으로 더 고생인 것 같네요.

좋은 댓글에 감사 드립니다.

반가웠어요. ㅋ
 


단상(18) 그가 나를 좋아하게 만들려면


어떤 상대가 자신을 좋아하게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우선 생각나는 것으로 상대에게 선물 공세로 환심을 사는 방법이 있다. 그런데 그것은 돈이 많이 들 뿐만 아니라 효과도 안심할 수 없다. 상대가 선물을 준 ‘사람’이 아닌 선물로 준 ‘그것’만 좋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보다 더 좋은 방법이 있을 듯하다. 돈도 들지 않고 효과도 만점인 것.


러셀에게서 답을 구했다.




특별히 예쁘거나 뛰어나지 않더라도 사랑 받는 방법은 만나는 이들로 하여금 자신이 괜찮다는 생각이 들도록 해 주는 것이다. 의식적인 아부는 이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 아니다. 최선의 방법은 그들과 어울리는 순간을 즐기고, 무엇보다 그들이 과시하는 능력을 즐기는 것이다. - 346쪽. 

- 러셀 저, <런던통신 1931-1935>에서.




러셀에 의하면 자신을 좋아하게 만드는 방법은 ‘상대가 과시할 수 있는 시간을 주고 그 시간을 함께 즐기는 것’이다. 그래서 상대가 자신이 꽤 괜찮은 사람임을 느끼게 해 주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과거 연인에게 열광했던, 또는 현재 열광하는, 또는 미래에 열광할 이유를 설명해 주기도 하는 것 같다. 가족이나 친구보다 연인에게 열광하는 이유 중의 하나가 연인이 자신의 장점을 발견하고 그것을 멋지게 봐 줌으로써 자신이 꽤 괜찮은 사람임을 느끼게 해 주기 때문일 것 같아서.



예를 들면 나는 그녀의 두 앞니 사이의 틈을 이상적인 배열로부터의 불쾌한 일탈이라고 보는 것이 아니라, 치아의 완벽성을 독창적으로 그리고 사랑할 가치가 있는 방식으로 재배치한 것으로 보았다. 나는 그녀의 치아 사이의 틈에 그냥 무심한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그것을 예뻐했다. - 128쪽.


그것의 진정한 가치, 호기심이 덜한 사람이나 사랑이 덜한 사람에게는 당연히 의미 없어 보일 가치를 발견하기 위해서 바로 연인이 필요한 것이 아닐까? - 150쪽.


- 알랭 드 보통 저,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에서.





이처럼 다른 사람의 눈엔 결코 아름답게 보이지 않을 ‘두 앞니 사이의 틈’에서도 독창성 있는 아름다움을 발견해 내는 게 바로 연인의 눈이다. 그래서 그렇게 자신을 최대한으로 아름답게 봐 주는 그 ‘연인’이 그렇지 않은 무심한 ‘친구’에 비해 좋아지는 건 당연하다.


도스토예프스키의 글에 이런 게 있다.




아까 내가 마치 모욕 받은 계집처럼 네 앞에서 그만 눈물을 흘렸다는 것, 그것 때문에라도 나는 영원히 너를 원망할 거야! 또 지금 너한테 이런 걸 고백하고 있다는 것, 이것 때문에라도 나는 영원히 너를 미워할 거다! 그렇다, 너는 이런 모든 것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 왜냐하면 네가 공교롭게 그런 순간에 찾아왔기 때문이다. - 185쪽.

- 도스토예프스키 저, <지하생활자의 수기>에서.




이 남자는 계집처럼 눈물을 흘리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본 여자를 원망하겠다고 한다. 하필 이러한 때에 그녀가 나타났다는 사실에 울화가 치미는 것이다. 왜냐하면 좋은 모습만을 보게 해 주고 싶었던 상대가 자신의 가장 추한 모습을 우연히 보았기 때문이다. 아무리 계획되지 않은 우연한 목격이라 할지라도 남자는 화가 난다. 누구나 자신의 초라한 모습을 본 사람을 싫어하고 자신을 근사한 모습으로 봐 주는 사람을 좋아하는 법이다. (그러니까 누군가가 추한 모습을 하고 있을 땐 모른 척하고 지나갈 일이다.)


TV 드라마에서 딴 여자와 연애하는 남편의 단골 대사로 등장하는 말이 있다.


“그 여자는 나를 남자로 느끼게 해 줘.”


이 말은, “그 여자는 남자라는 사실을 잊고 지내던 나를 남자로 느끼게 해 줘. 그것도 아주 매력적인 남자로 말이야.”라는 말과 같다. 그러니 아내와 함께 있는 것보다 그녀와 함께 있는 게 행복하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행복을 찾아서 살고 싶다는 마음의 표출인 셈이다. 결국 자신을 잘 봐 주는 이가 좋다는 것.  


그렇다고 해서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는 이유가 무조건 그 상대가 자신을 좋아하기 때문인 것은 물론 아니다. 어떤 사람을 좋아하게 되는 것은 그 상대가 가진 매력 때문일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똑같은 조건 하에서라면 자신에 대해 호감을 나타내는 사람을 좋아한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똑같은 정도로 매력적인 두 사람이 있다면 그중 자신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더 마음이 끌린다는 것이다. 우월감은 사람을 행복하게 하므로.


이런 예를 들어 본다.


만약 자신이 중학교 때의 성적은 상위권에 속하는데, 고등학교 때의 성적은 하위권에 속한다면 어느 동창회에 가길 좋아할까. 그 두 동창회가 같은 날, 같은 시각에 있다면 어디로 발길을 돌릴까.  

답은 뻔하다. 중학교 동창회에 갈 것이다. 왜냐하면 자신이 보다 우월하게 보이는 자리를 선호할 것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우월감을 가질 수 있는 자리에 있으면 행복하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래서 우리는 자신의 능력이나 재능을 인정해 주지 않는 친구보다 인정해 주는 친구를 좋아하나 보다.  

결론은 상대가 자신을 좋아하게 만들려면, 상대가 이런 생각을 하도록 만들 것.


‘너를 만나면 내가 꽤 괜찮은 사람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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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


여러 책을 읽다보면 알게 되는 게 있다. 같은 내용을 표현만 다르게 쓴 글이 많다는 사실이다. 작가는 다르지만 내용이 많이 중복된다는 뜻이다. 그래서 웬만큼 독서를 해 본 사람은 ‘거기서 거기군.’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것을 다른 말로 폼 나게 표현하면 ‘하늘 아래 새로울 게 하나도 없다. 같은 내용에 대해 다양한 변주가 있을 뿐이다.’가 된다.


이 글을 쓰면서 그 동안 미처 알지 못한 걸 생각해 냈다. 나를 따르는 후배 몇이 있는데, 내가 그들을 예뻐하는 가장 큰 이유를 알아낸 것이다. 그것은 그들이 만날 때마다 나를 좋게 봐 주기 때문인 것이다. 그들이 ‘선배님과 얘기를 나누는 게 좋아요.’하는 얼굴이라고 여겨질 때 내게서 아름다운 빛이 나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게 하기에 그들을 좋아함을 알았다. 또 학생들을 가르치는 수업시간에 ‘선생님은 뭐든지 다 알고 계시는군요.’하는 듯한 얼굴로 보는 학생들을 내가 좋아했다는 사실도 떠올랐다.


독서를 ‘내면으로의 여행’, ‘나를 읽는 행위’라고 하는 이유를 알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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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과 관련한 책>



러셀 저, <런던통신 1931-1935>

알랭 드 보통 저,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도스토예프스키 저, <지하생활자의 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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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P 2011-07-19 0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를 읽으며 음, 음, 음, 하며 감탄을 탄복하며 읽었습니다. ^^ 지금 제 상황에 딱 맞는 리뷰이어서요. 크게 깨달아 우주의 지평이 열리는 기분입니다. ㅋㅋㅋ

저도 놀러왔어요. 이런 좋은 글을 보다니 오늘은 무척이나 상쾌한 날이네요. 헤헤 노신 선생을 좋아하신다는 방명록에 자극 받아 노신 선생의 리뷰를 쓸 작정을 하고 있습니다. ^^

읽고 또 읽고 감탄사를 연발하고 있습니다. ㅋㅋㅋ

페크pek0501 2011-07-19 15:18   좋아요 0 | URL
'탄복하며...'라는 말은 듣기 좋은 새콤달콤한 말입니다. 새콤달콤해지는군요. 고맙습니다.

참, 루쉰이라는 아이디를 잘 지으신 것 같아요. 제가 루쉰의 팬이라서 들르게 되었으니까요. 저도 이럴 줄 알았으면 제가 좋아하는 작가 이름으로 아이디를 짓는 건데...ㅋㅋ 꼭 루쉰의 분신 같거든요.

좋은 리뷰 쓰시길 기원합니다.

노이에자이트 2011-07-20 15: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서 사람은 남자로만 혹은 여자로만 살면 불륜을 저지를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부모로,남편이나 아내로 살고 있기도 하다는 점을 자각해야 하는데...그래도 능수능란한 도사들에게 걸리면 해답이 없죠.

페크pek0501 2011-07-21 13:57   좋아요 0 | URL
결혼제도가 있어서 딴 길로 새지 않는다는 말씀이군요. 맞아요. 결혼제도가 아내나 남편,또는 부모의 자리를 갖게 함으로써 질서를 갖게 하죠.

"그래도 능수능란한 도사들에게 걸리면 해답이 없죠." - 이 말도 맞습니다. "이 세상을 지배하는 건 이성이 아니라 정열이다(임어당의 말)."의 경우가 분명 있으니까요.

반가웠어요. 좋은 하루 보내세요.

2011-07-22 21: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7-23 11: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7-23 20: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7-24 03:07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