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이 선생이다
황현산 지음 / 난다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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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문학자의 세상 읽기

: 망각에 대한 애도와 치유를 위한 밤의 시간들


- 황현산밤이 선생이다(2013) 읽고


 


현재 살고 있는 집으로 이사 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주변 지리를 파악할 겸 산책할 때였다. 이 지역은 낮은 언덕과 평지가 이어지는데, 언덕에는 주로 단독주택과 재개발된 소규모 아파트 단지들이 모여 있었다. 반면 평지에는 재래시장과 주변의 대규모 뉴타운이 인접해 있었다. 골목길을 따라 가다가 단독주택 지역과 아파트 단지의 경계를 이루는 도로를 따라 걷게 되었다. 길에 사람은 거의 없었다. 아파트 단지는 언덕 위로 하늘을 절반쯤 가리고 있었고, 높은 담이 단지 주변을 에워싸고 있었다.


 

아파트 단지의 한쪽 담벼락에는 도로변으로 엘리베이터가 설치되어 있었다. 누군가가 엘리베이터에서 나오는 모습을 보았기에, 나는 아파트 단지 내의 보도를 따라 산책해보려고 했지만 엘리베이터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알고 보니 엘리베이터는 아파트 단지 주민들만을 위한 시설이었다. 아파트 주민들은 엘리베이터용 키를 지니고 있는 듯했다. 아파트 단지 주민이 아니면 아파트 담 주위로 나있는 계단을 따라 언덕을 올라가야 했다. 아파트 단지는 높은 성벽으로 둘러싸인 하나의 요새처럼 보였다. 이런 구조가 주변 지역과의 분리와 단절을 불러온다고 생각되었다. 당시에 내가 했던 생각들은 황현산의 칼럼집 밤이 선생이다를 읽으며 되살아났다.


 

해방 직전에 전라남도 목포에서 태어난 저자는 신안 앞바다의 한 섬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이 칼럼집은 저자의 어린 시절 몸에 새겨진 흔적을 고스란히 드러내 보인다. 그는 이 때의 기억을 마련해준 고향 섬이 성인이 된 후에도 여전히 삶의 준거가 되고 있다고 밝힌다. 1986년부터 2012년까지 사반세기에 걸쳐 쓰인 글들로부터 느낄 수 있는 정서는 망각에 대한 저항이었다. 저자의 외할머니는 가마솥에 바닷물을 넣고 불을 때어 얻는 화염과 햇빛에 말려 얻는 천일염 맛을 구분했던 분으로, 화염을 넣어 만든 제대로 된 오뉘죽 맛을 기억하는 마지막 사람이었다. 마찬가지로 안방의 술을 익게 하는 귀신’, 건넛방의 메주 띄우는 귀신과 함께한 시간들은 이제 세상의 편리와 자본의 논리에 덮여 사라져 버리고 저자의 마음 속 깊은 곳에만 남게 되었다. 저자는 글 속에서 자신의 오랜 기억을 심심찮게, 때론 집요하게 소환해내었다.


 

저자는 무슨 까닭으로 사라지는 것들에 이토록 안타까워하고 이들을 기억하고자 했을까? 사람은 태어나 언젠가는 세상을 뜨기 마련이고, 개인의 기억은 사라진다. 인류의 역사에서 무수히 반복된 이 과정에 한 사람의 기억이 사라지는 일이 대수인가. 하지만 계속 글을 읽다보면 저자가 말하는 기억은 개인의 기억을 넘어 한 공동체가 공유하는 집단의 기억까지 포함하는 듯했다.


 

사람의 마음속에 세상과 교섭해온 흔적이 남지 않고, 삶이 진정한 기억으로 그 일관성을 얻지 못하면, 이 삶을 왜 사는지조차 알 수 없게 된다. 삶이 그 내부에서 의미를 만들어내지 못하면 밖에서 생산된 기호로 그것을 대신할 수밖에 없다.”(191)


 

유독 유행에 민감한 우리 사회의 모습을 읽어내는 글에서 저자가 현대인의 망각에 줄곧 저항하는 이유를 일부나마 짐작할 수 있다. 그가 말하는 기억의 필요는 우리의 편리를 위한 것이 아니라 본질적인 삶의 의미를 향하고 있었다. 저자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집안의 여러 귀신우리의 고독한 몸을 세상 만물과 이어주는 연결선이며, 그렇게 맺어온 관계의 흔적이자 세상과 사랑을 나누었던 내력’(252)이었다. 우리 몸이 시간의 역사를 담고 삶을 기억하는 매체라고 저자는 말하고 있었다. 몸에 새겨진 기억들이 사라져버리면, 공동의 기억을 매개로 하던 사람들의 관계망 역시 콘크리트로 덮이듯 은폐되기 시작하여 결국에는 영영 잊혀 지게 된다. 우리가 관계하던 땅과 그 땅에 발을 딛고 있던 사람들의 삶도 그렇게 사라진다는 의미다. ‘요새처럼 높은 담장에 둘러싸여 왕래가 차단된 아파트 단지를 걸을 때 내가 느꼈던 생각들과 다르지 않다. 한 지역에 거주하는 세대수는 월등히 많아졌지만, 아파트 단지 주변에서 사람의 모습은 거의 볼 수 없었다. 사람이 자신의 장소와 관계 맺기를 하지 못한다면, 삶이 줄 수 있는 가능성과 상상력은 영원히 사라져버리고 말 것이다. 화염과 천일염의 소금맛이 아니라 그저 짠맛만 남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이와 달리 맞은편 주택가의 소규모 재래시장 주변에서는 꽤나 분주한 삶이 이어지고 있었다. 나는 요새처럼 폐쇄적으로 지어진 아파트 단지에서 장소에 대한 기억과 상상력의 소멸을 우려한다.


 

저자는 기억이 없으면 윤리도 없다”(204)고 예술의 입장을 대변한다. 그가 말하는 기억은 부끄러움을 자각하는 상상력과 결부되어 있다. 이 상상력은 타인의 고통과 상처에 반응하고 공감하는 능력이기도 하다. 하지만 몸에 각인된 기억이 사라질 경우, 저자는 우리가 부끄러움이 무엇인지조차 모르는 상태가 될 것이라고 경고한다. 용산 철거 시위 사건을 두고 192인의 문인들이 공동 선언을 하고 이를 글로 쓴 일은 무엇보다 이 사건을 잊지 않기 위함이었다. 이들의 선언은 슬픔과 상처를 치유하기 위한 기도였을 것이다. 또 집단의 기억을 보존하는 것에서 나아가 공동체의 공감하는 능력을 지켜내려는 다짐이기도 했을 테다. 재개발 아파트 단지가 불러온 단절, 대규모 뉴타운의 인적 없는 거리와 임대간판이 내걸린 수많은 빈 가게들을 보면서 했던 생각은, 저자가 밝고 깨끗하고 번쩍거리는 폐허’(51)라고 언급한 것과 다르지 않다. 사람의 기억을 덮고 사람의 자리를 외면한 개발의 결과는 결국 사람이 제 땅에서 망명객이 되는’(51) 삶으로 이어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 저자는 이미 오래 전부터 이런 징후를 읽고 글로 말하고 있었다.


 

저자의 표현에 따르면, 사람의 몸에 기억을 지닌다는 말은 삶의 깊이를 지니고 사람과 그의 삶을 존중하는 맥락’(97)을 고려한다는 의미다. 이는 그 사람이 살아온 장소와 시간의 복원을 전제한다. 인간을 획일적인 소비 대상으로 치부해버리는 무감각에 저항하는 일이기도 하다. 또 타인의 고통에 반응하고 이에 공감하는 상상력을 확보하여 어디에나 사람이 있음’(244)을 감지하는 일이다. ‘요새와 같은 아파트 단지는 장소와 관계 맺어온 사람들의 기억을 차단하고 사람에 대한 상상력을 빼앗아 가버린다. 내가 다른 사람이 될 수 있는 여지, 내 안에 타인이 설 자리를 애초에 지워버린다. 따라서 시간 속에서 장소와 관계 맺어온 사람을 기억하는 일은 우리가 존재의 이유를 확인하고 인간다움을 유지하는 길이다. 저자는 이를 시를 읽을 때처럼 우리가 잠시나마 비로소 사람이 되는’(245)일 이라고 표현했다.


 

앞서 언급한 아파트 단지의 개발 방식과 뉴타운의 모습은 우리의 존재 이유를 망각하게 만드는 사례다. 같은 맥락에서 저자는 청계천 복개 과정을 이야기한다. 청계천 복개 후 정리 과정에서 개발 주체 및 관련자들은 상인들과 주민들을 불암산 자락으로 내몰았다. 이 관행은 강정마을 해군기지 건설로 이어졌다. 정부와 개발 주체가 주도하여 마을 사람들을 분열시키고 구럼비 바위와 맺어온 기억을 파괴한 셈이다. 이는 공동체에 망각을 강요한 폭력이었다. 우리가 계속해서 삶의 근본적인 문제를 고민하지 않고 눈앞의 현안으로 이를 가려버릴 때, 저자가 말하는 덮어 가리기 근대화’(111)의 모습은 되풀이될 수밖에 없다. 이 책에 실린 글 대부분에서 저자가 기억을 붙들고 저항하고자 했던 이유다. 우리가 이런 일들을 영원히 망각해버리고, 슬픔을 함께하며 부끄러움을 느끼는 능력마저 잃어버린다면 우리는 삶에서 어떤 의미를 찾을 수 있을까. 심지어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땅이 그 기억을 간직하지 못한다면, (...) 한 사람이 이 땅에서 백년을 산다 한들, 단 한순간도 살지 않은 것이나 같다”(59)고 말이다. 인간이 삶에서 관계 맺은 모든 것들에 대해 기억이 중요한 이유는 이것이 우리 정체성의 근간이 되기 때문이다.


밤이 선생이다에서 저자는 우리 사회가 잃어버린 것, 혹은 잃고 있는 대상에 대한 애도하기를 일관된 태도로 보여준다. 청계천 복개 사업이나 강정마을 미군기지 건설에서와 같이 덮어 가리기 근대화는 집단적인 망각을 초래했고, 고통과 상처를 남겨놓았다. 저자는 공동체 앞으로 다가온 망각에 끊임없이 저항했다. 우리는 삶에서 늘 패배하곤 하지만, 이따금 누군가는 공동체가 떠안은 상처와 슬픔을 치유할 희망을 발견하기도 한다. 문학비평가인 저자는 시에 그 희망을 걸어 보기도 한다. 삶에서 얻은 좌절과 슬픔, 분노를 시를 통해 왕성한 생명력과 더불어 기억해낼 수 있다면, 이 모든 것을 삶의 깊이로 만들 수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가 시는 기억술’(204)이라는 말을 믿는 이유다.


 

저자가 주목한 관점 중 인상적인 것 하나는 그가 갈구하는 희망과 치유의 가능성이 밤의 시간에 속한다고 말하는 부분이다. 그의 견해에 의하면 낮의 시간은 이성과 사회적 자아의 시간인 반면, ‘밤의 시간은 상상력과 창조적 자아의 시간이다. 또 밤의 시간은 낮에 발생하고 겪었던 슬픔과 상처를 문학, 특히 시를 통해 치유하고 봉합하며, 새살을 돋게 하는 소생의 시간이기도 하다. 같은 맥락에서 밤의 시간은 잃어버린 기억을 복원하는 시간이기도 하겠다. 이미 150년 전에 보들레르는 잘 정비된 도시의 모습에서 기억이 사라지고 상상력이 소멸된 폐허의 모습을 어둠의 입을 통해 우리에게 전했고, 괴테는 그보다 더 일찍 밤의 말이 지닌 힘을 간파했던 것 같다.


 

하늘 높이 머물러라

 사랑스러운 루나여,

 언제까지나 밤이도록 자비를 베풀어라

 낮이 우리를 쫓아내지 않도록!”  (*)


 

이 대목은 괴테의 파우스트에서 요정 세이렌들이 에게 해의 바다 위로 떠오른 달을 보며 노래하는 대목이다. 이 세이렌들처럼 저자는 독자들이 각자의 은밀한 시간을 통해 기억과 상상력을 회복하고, 상처와 슬픔을 치유하며 소생해나갈 수 있기를 바랐을 것이다. 다만 그가 떠나고 없는 이 세계는 어둠의 입을 통해 기억을 전하던 그리오 Griot한 명을 더 잃게 된 셈이다





(*) 출처: 요한 볼프강 폰 괴테, 파우스트, 김인순 옮김, 열린책들, 2009, 318






[1] "언제나 끝까지 잊어버리지 않는 것은 글 쓰는 사람들이다. 사실은 잊어버리지 않는 사람만 글쓰는 사람이 된다.", "그것을 잊어버릴 수 없기 때문이다."(32)
- 「그 세상의 이름은 무엇일까」(2009) 중에서

[2] "그 시인이 시인이기 때문에 30만원을 버는 것이 아니라, 시인이기 때문에 30만원으로 당당하게 살 수 있는 것이라고 대답했어야 한다."(37)
- 「30만 원으로 사는 사람」(2010) 중에서

[3] "뱀처럼 구불구불한 골목길이 광장으로 바뀐 자리에서 제 삶의 기억이 송두리째 사라져버린 것을 알게 된다. 그는 제 땅에서 망명객이 되었다고 생각한다."(50)
- 「산딸기 있는 곳에 뱀이 있다고」(2010) 중에서

[4] "강에 댐을 쌓고 하안 공사를 하고 난 후 나루터가 없어지고 나니 거기서 일하던 기억도 사라지고 말았다고 늙은 사공들은 대답했다."(60)
- 「기억과 장소」(2010) 중에서

[5] "어떤 비평가는 작가의 윤리와 작품의 윤리를 구별해야 한다면서, 프랑스의 소설가 발자크는 윤리적으로 순결한 사람이 아니었지만 그가 훌륭한 작품을 썼기에 훌륭한 작가로 인정된다는 점을 예로 들었다. 이 예는 적절치 않다. 발자크는 자기 안에서 들끓는 자본주의적 욕망을 자기 시대 비판의 창조적 열망으로 바꿀 수 있었기에 훌륭한 작가로 성장하였다. 반면에 친일 작가들의 친일 행위는 그들이 애초에 지녔던 창조적 열망까지도 메마르게 만들었다."(84)
- 「<고향의 봄> 앞에서」(2011) 중에서

[6] "김수영 시인이 <사랑의 변주곡>에서 말했던 것처럼 제 마음 속의 복숭아 씨와 살구 씨가 "사랑으로 만들어진 것"을 알고 그 힘을 창조력의 밑받침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판단하고 선택하기 전에 모든 것을 보지도 듣지도 못하게 가려놓은 채, 생명에 삽질을 하고 시멘트를 발라 둑을 쌓아둔다면, 거기 고이는 것은 창조하는 자의 사랑이 아니라 굴종하는 자의 증오일 것이다."(100)
- 「금지곡」(2010) 중에서

[7] "이 주소의 역사는 서울이 그 주변을 식민지로 만들고, 그와 관련된 서민들의 삶을 식민화한 역사와 같다."(111)
- 「덮어 가리기와 백사마을」(2011) 중, 중계동 104번지에 있던 백사마을을 언급하며

"청계천 복개는 내가 ‘덮어 가리기 근대화’라고 부르는 것의 전형적인 예이다."(111)

[8] "표절이 명백하다는 전문가들의 의견에도 불구하고 학위를 준 대학이 학위를 취소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대학이 아닐 것이며, 그 사람이 계속 교수로 남아 있는 대학도 대학이라고 말하기 어려울 것이다. (...) 우리의 삶이 아무리 비천해도 그 고통까지 마비시키지는 못한다."(124)
- 「시대의 비천함」(2012) 중에서

[9] "사람의 꿈은 사람 속에서 피어나 사람과 동행하지만 반드시 사람과 같은 방향에 시선을 두는 것은 아니다. 이 겨울의 개는 우리가 흔히 예술이라고 부르는 것의 정신이다."(152)
- 사진가 강운구의 사진을 다룬 「겨울의 개」중에서

[10] "사실은 공허하게, 움직일 수 없이 거기 있기에 다른 것이 된다고 말할 수 있는 힘이야말로 사실주의 예술의 뛰어난 미덕이다."(163)
- 사진가 강운구의 사진을 다룬 「찌푸린 얼굴들」중에서

[11] "사람의 마음 속에 세상과 교섭해온 흔적이 남지 않고, 삶이 진정한 기억으로 그 일관성을 얻지 못하면, 이 삶을 왜 사는지조차 알 수 없게 된다. 삶이 그 내부에서 의미를 만들어내지 못하면 밖에서 생산된 기호로 그것을 대신할 수밖에 없다. 가지가지 유행이 밖에서 생산된 바로 그 기호다. (...) 그래서 유행의 문화는 열등감의 문화와 가장 가까운 자리에 놓인다."(191-192)
- 「유행과 사물의 감수성」(2002) 중에서

[12] "시는 기억술이라는 말이 있다. 비단 시만이 아니라 모든 예술은 왕성했던 생명과 순결했던 마음을, 좌절과 패배와 분노의 감정을, 마음이 고양된 순간에 품었던 희망을, 내내 기억하고 현재의 순간에 용솟음쳐오르게 하는 아름다운 방법이다. 기억이 없으면 윤리도 없다고 예술은 말한다. 예술의 윤리는 (...) 순결한 날의 희망과 좌절, 그리고 새롭게 얻어낸 희망을 세세연년 잊어버리지 않게 하는 데에 있기 때문이다. 기억만이 현재의 폭을 두껍게 만들어준다. (...) 미학적이건 사회적이건 일체의 감수성과 통찰력은 한 인간이 지닌 현재의 폭이 얼마나 넓은가에 의해 가름된다."(204)
- 「윤리는 기억이다」(2003) 중에서

[13] "오페라 <심청>의 대본을 쓴 사람(윤이상)에게 정작 그 착상을 도와준 것이 있다면, 아마도 괴테의 《파우스트》 가운데 한 구절, "낮에 잃은 것을, 밤이여, 돌려다오"라는 그 유명한 구절일 것이다. 여기서 낮이 이성의 시간이라면 밤은 상상력의 시간이다. 낭만주의 이후의 문학, 특히 시는 이 밤에 거의 모든 것을 걸었다. 시인들은 낮에 빚어진 분열과 상처를 치유하고 봉합해줄 수 있는 새로운 말이 "어둠의 입"을 통해 전달되리라고 믿었으며, 신화의 오르페우스처럼 밤의 가장 어두운 곳으로 걸어들어가 죽은 것들을 소생시키려 했다."(220)
- 「낮에 잃은 것을 밤에 되찾는다」(2003) 중에서

[14] "어디에나 사람이 있다. (...) 내가 버린 쓰레기도 사람이 치워야 하고 내가 만들어내는 소음도 사람의 귀가 들어야 한다."(244)
- 「어디에나 사람이 있다」(2004) 중에서

[15] "이 신들은 우리와 함께 살아왔고, 우리와 함께 그 영검이 깊어졌으며, 또한 우리 운명의 많은 부분을 지배했다. 그것들은 우리와 숨결을 교환하고 냄새를 교환했다. 그것들은 우리의 고독한 몸을 세상의 만물과 이어주는 연결선이며, 그렇게 맺어온 관계의 흔적들이며, 세상과 사랑을 나누는 내력들이며, 우리 마음속 깊은 곳에 남은 기억의 시간들이었다."(252)
- 「귀신들 이야기」(2003)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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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2-03-01 20: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황현산님 글 정말 좋아요. 기억에 대한 작가님 글들 공감합니다. 초란공님 정성 가득한 서평도 👍

초란공 2022-03-01 21:06   좋아요 1 | URL
항상 관심갖고 좋은 말씀 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