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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와 하녀 -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마이너리티의 철학
고병권 지음 / 메디치미디어 / 2014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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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쓰며 내가 떠올린 수신인은 "매일 매일을 살아가는 우리"였다. "철학이 일상에게" 그리고 일상이 철학에게 보내는 편지 나는 그런 걸 떠올렸다. 그리고 처음부터 알 고 있었다. 이 편지들은 잔잔한 것일 수밖에 없음을.
철학은 일상에게 대단한 구원의 메시지를 전할 수 없고 일상은 철학에게 드라마틱한 영웅담을 말하지 않을 것이다. 천국으로의 구원은 신의 몫이고 스펙타클한 영웅담은 극장에나 걸리는 것. 다만 철학은 지옥에 함께 있어주겠다는 말을 일상에게 전할 뿐이며 일상은 창백하게 떠도는 철학의 말들에 한 방울의 피. 다시 말해 하나의 체험을 선사할 뿐이다. 그런데 이것이 얼마나 대단한 선물의 교환인지를 이제야 어렴풋이 알 것 같다.
사실은 "그"가 "나"였다. " 왜 지금 여기서 철학을 공부해야 하느냐"고 물었던 사람 말이다. 나 역시 스스로에게 여러 번 그 물음을 던져왔다. 나는 철학을 전공한 사람도 아니고 철학자임을 보증하는 어떤 자격증도 갖고 있지 않다. 철학이란게 단지 그런 지식과 자격증에 대한 이름이라면 나는 언제든 그 이름을 버릴 준비가 되어 있다. 내가 사랑하는 철학 내가 고마움을 느끼는 철학은 누군가의 표현처럼 언제나 내 정신에 찬물 한바가지를 끼얹는 그런 것이었다. 그 물 한바가지를 뒤집어 쓰고서야 나는 삶을 다시 볼 수 있었다. 나 역시 안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대는 정서들에 머리채가 잡혀 이리저리 휘둘리며 살았고 바깥의 스펙터클한 풍경에 눈이 팔려 삶의 소중한 것들을 소홀히 해왔다. 그나마 내가 이렇게라도 살아가는 것은 때로는 책 속에서 때로는 책 바까에서 내 정신의 등짝을 후려쳐 둔 이들 덕분이다. 그 경험이 내게는 철학이다. 이 책을 읽는 당신에게도 철학이 그런 친구이기를 바란다.
프롤로그... 에서
세상에 말들이 부족하지 않다. 누군가는 페스트푸드처럼 빨리 사라지는 말들의 운명을 걱정한다고 하지만 우리 삶을 가꾸는 데 필요한 좋은 말들은 인류의 역사가 부지런히 생산해온 위대한 인물들 덕분에 여전히 정신의 계주를 이어오고 있다. 내가 걱정하는 말의 운명은 다른 것이다. 언어학자의 관점과 철학자의 관심은 여기서 나뉘는 걸까 말들의 수량과 수명보다 내게 더 중요해 보이는 것은 "말들의 방황"이다. 한마디로 "겉도는 말"의 문제이다.
책을 읽거나 강연을 들을 때 우리는 소위 "좋은 글 좋은 말씀"을 많이 접한다. 나 역시 누군가에게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 ' 선생님 좋은 말씀 정말 감사합니다"그런데 강연이나 원고지에서 만난 그"좋으느 말씀"들 때로는 무릎을 치게 하고 때로는 가슴에 와닿아 어딘가에 적어두기까지 한 그 "좋은 말씀"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내 안에서 잠시 머물기도 했던 것 같기는 한데 지금 그것들의 행방을 알지 못한다. "선생님의 말씀"으로 들어와:선생님의 말씀"으로 머물다가 애초에 그것이 선생님의 것이었음을 확인하듯 내게서 떠나가 버린 말들. 누군가 건네준 빵 한조각도 금세 피가 되고 살이 되는 데 왜 "선생님"의 그 "좋은 말씀"들은 순간의 짜릿함만을 안기는 탄산음료처럼 그냥 그때뿐인걸까?
아마도 우리가 그 좋은 말들을 위장으로 직접 소화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우리는 그 말들을 진지하게 믿지 않았다. 소크라테스나 공자, 예수와 석가의 아름다운 말들을 구경만 했을 뿐 그것들을 진지하게 체험하지 않았다. 우리가 믿는 것은 그들의 권위였지 그 말들이 아니다. 말을 믿었다면 우리는 벌써 그것을 행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자신의 믿음을 말의 실천이 아니라 그 말을 한 사람에 대한 숭배로 나타낸다. 즐 우리가 믿는 것들은 말이 아니라 그들이 우리와는 다른 특별한 존재라는 점이다. 바로 이런 식이다 "나는 그가 특별한 존재임을 믿습니다"
그러니 예수를 믿는 사람. 그 믿음을 과시하는 사람은 많아도 예수처럼 사는 사람은 드물다. 니체가 예수만이 유일한 기독교도였다고 한 것은 그런 뜻에서였다. 천국은 예수의 실천속에 있는데도 사람들은 그것이 예수에 대한 믿음에 달렸다고 착각한다. 물론 이는 기독교만의 문제가 아니다 좋은 말씀을 듣고 읽는 우리 모두의 문제다. 우리는 무소유 정신을 갈파한 어느 스님의 책을 백만 권 넘게 사지만 정작 무소유를 실천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좋은 말을 박물관이나 명승지를 관람하듯 그저 듣고 구경하면서 입장료로 책값을 내는 것이다.
그렇다면 앎은 어떻게 해서 우리의 피가 되는가? 앎은 언제 우리의 삶을 구원하는가? 실로소피 즉 철학은 "지혜에 대한 사랑:이 라는 말뜻에서 알 수 있듯이 " 앎을 통한 삶의 구원"을 확신하는 학문이다. "악덕은 무지에서 나온다"고 했던 소크라테스부터 "아는 것이 힘:이라고 했던 계몽주의 철학자들까지 모두 그랬다. 철학자들이 싸운 것은 다만 그 '앎"의 내용에 해서였다. 하지만 좋은 "앎"은 자동으로 우리'삶"을 구원하는가? 만약 그렇다면 공자님 말씀을 틀어놓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 모두가 알 듯 그것이 그렇지가 않다. 앞서 말한 것처럼 "좋은 말씀"들은 내게 잠시 머물다 금새 사라져 버린다. 왜 그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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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무리 대단한 권의를 가진 사람의 말이라 할지라도 그리고 그 말이 아무리 올바른 것일지라도 환자가 체험하지 못하는 것은 아무런 효과가 없다. 앞서 말한 것처럼 치료의 관건은 환가가 현재의 증상을 유발하는 과거의 사건으로 돌아가는 것에 있으며 거기서 그 사건을 과거와는 다르게 체험해야한다. 즉 과거를 반복하지만 다르게 반복하는 것이 핵심이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치료만이 아니라 깨우침 일반이 그렇다, 과거에 내가 저지른 일을 그대로 떠올리지만 그것을 달리 느끼고 달리 대할 수 있을 때 우리는 뭔가를 꺠우친 것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좋은 말은 그저 좋은 말일 뿐이다. 그것이 내 것이 되려면 내 안에서 다시 체험되어야 한다. 내가 내 식으로 체험하지 않은 말이란 한낱 떠다니는 정보에 불과하다. 세상에는 여전히 옳은 말들을 찾아 나서는 사람들이 많지만 나는 세상에 옳은 말들은 부족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그것들이 정처 없이 여기저기 흘러다니고 있을 뿐이다.
요즘 잘 나가는 선생들의 인문학 강연장에는 사람들이 넘쳐난다고 한다. 책도 많고 강년도 많다. 그러나 그 대부분의 말들은 모두가 쓰고 버리는 심지어 써보지도 못하고 버리는 상품처럼 되었다. 누군가에게 좋은 말을 들었다면 최소한 한번은 내 목소리로 그것을 다시 들어야 한다.그때만이 그것은 내 피가 된다. "높이 오를 생각이라면 그대들 자신의 발로 오르도록 하라" 차라투스트라가 자신을 구원해달라며 찾아온 이들에게 던진 말이다. 확실히 그렇다. 내 발로 오르지 않은 산은 풍문과 구경거리로만 존재하는 산이다. 그러니 산에 오르려면 스스로 오르는 수밖에 없다.
책을 마무리 하다보니 세상에 내보내는 말들이 결국 내게 돌아오는 걸 느낀다. 나는 내 말을 얼마나 체험했던가? 내 글은 정말로 내 피로 쓴것인가 부끄러움을 솔직히 고백하고 노력하는 수 밖에.. 철학하는 이가 끝까지 놓지 말아야 하고 끝까지 사랑해야 할 운명이 저 물음이기 때문이다.
에필로그... 에서
빌린 책에는 줄을 그을 수도 없고 함부로 접은 표시를 할 수 없었다.
모든 구절에 줄을 긋고 접어두는 것도 부질없어 보였다.
이 책이 어떻게 내 눈에 들어왔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20년도 전에 교양과목으로 들었던 철학개론을 연상케 하면서 그때 글로만 배웠던 철학이 어떻게 우리 현실에 적용되고 사람에게 들어와 어떤 작용을 일으키는지를 이 책은 솔직하고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앎이란 내 지식의 폭이나 깊이를 넓히는 일이 아니라 내게 용기를 낼 수 있게 하는 것
지금 이순간 여기에서 시작하를 말
죄의식으로 시간을 헛되이 보내지 말고 그때 그때 반성하고 마주하면서 다시 새롭게 시작하라는 말
모두가 여기서 새롭게 알게 된 것도 아니고 어딘가에서 읽고 어딘가에서 들었던 좋은 말씀이고 글귀였다. 그럼에도 이 책에 씌여진 이 말들이 왜 이토록 가슴을 치며 다가왔을까
저자는 철학이 단순히 생각하고 지식과 사고를 확장하는 것이 아니라 결국은 행동이고 그 행동을 할 수 있게 하는 용기라고 한다.
지금 이순간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면서 하루하루를 채워살아내는 일이 바로 철학이라고 말하고 있다.
아는 것이 전부는 아니라는 걸 알고는 있었다. 책을 많이 읽으면 그냥 책을 많이 읽는 어른이 되는 것뿐이라고도 알고 있다. 읽는다는 행위는 그다음 책장을 덮고 문을 열고 나가거나 누군가와 대화를 하며 내가 잘못할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다는 걸 받아들이며 행동하는 것이다.
많은 곳에 밑줄을 그을 수 없는 책이어서 결국 플롤로그와 에필로그만을 적어두기로 한다.
더운 날 얼음처럼 차가운 물 한바가지를 뒤짚어 쓴 기분.
책을 덮으며 그런 서늘함을 경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