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생이 생긴 첫 아이에 관한 그림책 동화책 그리고 육아서적은 있는데

이미 형 누나 언니 오빠가 있는 상태에서 태어난 둘째에 관한 이야기는 없을까?

 

큰 아이가 폐위된 왕의 입장이라면

둘째는 태어나면서 누군가와 경쟁해야하는 각박한 환경에 던져진다.

이유없이 억울했고 화가 났고 무언가 참고 눌러야 한다는 본능은 둘째라는 숙명일지 모르겠다.

태어나며 나누어야 하고 나누어 주는 대상에게 감사해야했고 나를 미워하는 누군가에게 잘보이기 위해 귀여워야 하고 사랑스러워야 함을 장착해야 한다.

내가 주장하면 동생이라 철이없다거나 둘째 특유의 욕심이라고 한다.

나의 행동과 태도는 나의 개성이 아니라 둘째가 갖는 특성이라는 안경을 통해 판단이 된다.

나는 내가 아니라 그저 둘째였다.

 

그런 둘째에게 위안이 되는 이야기는 없을까

 

아이를 둘 낳으면서 둘째를 보면서 그 아이의 이유없는 투정과 짜증과 토라짐에 이유가 있음을 안다

그 아이의 행동은 예전에 내가 했던 그 행동들이었다.

같은 둘째로 동질감을 느끼지만.. 동시에 엄마가 언니가 둘째를 미워했던 건 아니었다는 걸 깨닫기도 하고 아무래도 조금은 뒤로 처지고 손이 안간다는데 무심해지는 내 모습을 보기도 한다.

어떻게 해야 예쁨 받는지 눈치로 알아야 하고 그게 생존본능이 되어버린... 그래서 내가 원치 않은 내 모습이 칭찬 받는 내모습이라는 걸 몸에 익히면서 억울하고 어딘가 어정쩡했던 기분들을 나도 가지고 있었다.

나도 그렇게 서럽고 외롭게 자랐는데

아이의 모습에서 내 모습을 보면서도 그렇게 손이 안가는게 다행이라고만 여기는 내가 있다

입장이 바뀌는 시각이 바뀌는 걸까?

태어나면서 사랑받고 으시대며 자라다가 동생이 생기면서 모든 것을 나누고 양보해야하는 큰아이의 짠함 만큼 태어나니 이미 모든 걸 반쪽에 만족해야하는 둘째가 있다.

누가누가 더 억울한가 내기하려는 건 아니지만

각각 힘듬이 있다는 걸 알아주면 좋겠다.

나도 나의 둘째에게 미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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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쉬우면서 어려운 배려는

상대가 원치 않은 것을 하지 않은 것이다,

내가 무엇을 해줄까 어떻게 해줄까

이런 것들이 중요한게 아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된다,

아무런 행동을 하지 않아도 되고

무언가를 주려고 애쓰지 않아도 된다

다만 원하지 않는다고 말했다면 행동으로 보였다면 불편한 기색을 보였다면

그걸 하지 않은 것이 최고의 배려이다,

가장 쉬운 일처럼 보이지만 절대 쉽지 않더라

 

누구나 배려하고 공감하려고 사랑을 보여주고 싶어서  표현하고 싶어서

뭔가를 해주고 싶어한다

그는 이런 음식을 좋아하는데

이런 곳에 같이 온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런 것들이 필요할 텐데

함께 걱정해주고 울어주고 이야기 해주고 충고해주고 그렇게 위로를 해주려고 하는데

사랑하니까 아끼니까 딸같고 자식같고 동생같고 가족같아서

격려해주고 위로해주고 친근함의 표시를 하고 싶어서

사람은 사람사이의 금을 넘어버린다,

관계속에 가장 편하고 안전하게 생각하는 사람 사이의 금을 쉽게 넘는다

내가 다가가는 건 폭력이 아니다, 사랑이다, 애정이다 관심이다.. 라고 쉽게 여긴다,

내가 이렇게 사랑하는데 이렇게 관심이 있는데

그래서 내가 희생해가며 손해를 봐갸며 뭔가를 해주려고 하는데

이마음을 몰라주다니 이 정성을 내팽개치다니

나는 뭐 이런게 마냥 좋은 줄 아나...

내가 마냥 좋지 않으면 안해도 된다 누구도 원망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무언가를 주고 싶다면 적어도 안주면 죽을거 같아서 주고 싶다면 주고 그만 잊든지

주기 전에 물어보든지 정말 원하는게 뭔지 알아보는 정성이라도 보여주란 말이다,

 

내가 주고 내가 상처받고 내가 미워하고

내가 주고 혼자 만족하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상대를 타박하고 화를 내고

가끔 그렇게 배푼다는 생각이 폭력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못한다,

 

부하직원이 일을 잘 하니 너무 이뻐서

제자가 사랑스럽고 도와주고 싶어서

후배가 잘 되라는 마음으로

나는 그래도 돼

누구나 그래왔고 그래도 아무탈이 없었고

내가 주겠다는데 안받는게 이상하고 까탈스럽고 그렇게 살면 사회생활을 어떻게 하려고 그러나 걱정되고

그정도로 내가 다가갔다고 조금 만졌다고 닳는 것도 아니고 탈이 나는 것도 아닐텐데

뭐 좋게 좋게 넘어가야지

내 마음이 아니라는데 내가 괜찮다는데 좋은 마음이라는데....

 

그건 사랑도 도움도 격려도 배려도 아무것도 아니다,

되려 간섭이고 폭력이다,

 

용기내어 원하는 걸 말할때는 모르쇠로 일관하면서

지멋대로 주고싶다고 격려하고 싶다고 사랑하고 싶다고 쉽게 툭툭 뱉고 다가오고 하는 짓은

배운사람이 할 짓은 아닙니다

저리로 꺼져주세요.  ㅆ 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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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프리쿠키 2018-02-03 17: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 사람들이 많죠.
건강한 식습관의 기본이 몸에 좋은 음식을 챙기는 것보단, 몸에 해로운 음식을 멀리하는 게 중요한 것처럼
건강한 사랑이란 상대방이 무엇을 싫어하는지 끊임없이 살펴주고 배려하는 세심함 또한 중요한 요소가 아닐까합니다.
푸른희망님께서 말씀하신것처럼 배려는 사랑의 중요한 속성인데도 현실의 사랑에선 크게 부각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것같아요~
 

슬기로운 감빵생활 13화에서 한양을 신고한 건 엄마였다는게 밝혀졌다.

그동안 연인인 지원이 신고했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엄마였다.

그 사실을 알게된 한양은 중얼거렸다.

엄마가 왜? 엄만데.... 엄마가 어떻게....

 

그 드라마 기사에 댓글이 달렸다.

엄마니까... 엄마니까 할 수 있는 일이야... 엄마라서 할 수 밖에 없는...

 

엄마라는게 어떤 존재인지 말하려는 건 아니다.

그래도 드라마를 실시간으로 보면서 나도 그렇게 중얼거렸다,

이놈아 엄마니까 한거야.. 그래도 엄마니까 신고할 수 있었던 거야.

너 잘되라고... 제발 약하지 말라고.. 독하게 마음 먹은 거라고

그 엄마도 어려서 돈 버느라 외롭게 내버려둔 아들이 저절로 잘 큰 줄 알았을 것이다.

어디에 내놔도 빠지지 않은 인물이고 공부도 잘했고 좋은 대학을 갔고 아마 좋은 직업을 가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아이는 저절로 크는 줄 알았을 것이다.

내가 일에 바빠 신경쓰지 않아도 무어라 하지 않았을 것이고 (아니 어쩌면 뭐라고 계속 요구했지만 묵살했을 것이다) 아무 탈없을 거라고 믿었을 것이다.

사람은 아주 가까운 사이에서도 말하지 않으면 알 수 없다.

내 속도 내가 모르는데 나 아닌 타인은 내가 낳은 자식이라도 알 수 없다. 당연하다.

말없는 소년이었던 한양은 그렇게 왕따가 되고 친구가 없어도 혼자만 삮였을 것이다.

어린 시절 배고프다는 말에 끓여놓은 라면이나 먹으라는 엄마에게 말을 해도 표현을 해도 소용없다는 것이 학습되었을 테니 말하지 않고 그냥 묵혀두는게 더 편하고 쉬운 방법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지원을 만나고 좋아하고 사랑하고 약을 한다.

그리고 엄마 역시 아들에게 어떤 표현없이 신고하고 그대로 방치한다.

아들을 위해서라지만 그래서 밤마다 술로 눈물로 시간을 보내지만 아들은 그 속을 모른다.

말하지 않았으니까

그냥 배신감일것이다.

엄마니까 할 수 있었던 건 우리 시청자는 양쪽 상황을 다 아니까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지만

당사자들은 서로 상대의 마음을 모르니까

외로웠던 마음을 몰랐고 미안했던 마음을 몰랐으니까 서로 오해하고 갈등만 깊어진다.

뭐 남은 3회에 잘 봉합되겠지만 현실이라면 쉽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내가 인정하고 싶은 부분은 엄마가 과감하게 아들을 신고했다는 것이다.

아들의 잘못 그리고 누군가에게 피해를 줄 수도 있다는 생각이 그렇게 엄마를 행동하게 했다.

 

 

 

 

<현남오빠에게>의 김이설의 단편이 떠올랐다.

참 현실적으로 끝까지 이야기를 몰아갔다. 너라면 어쩔건데? 너라면 별 수 있을까 라고  숨쉴틈을 주지 않고 몰아갔다.

내 아들이 그것도 중학생 아들이 섹스를 했다. 나만 빼고 모두가 알고 있었다.

모범생에 우등생이고 학교에 학원에 영재원 수업까지 어느 시간 허투루 쓸 수 있는 여유조차 없던 아들이 단지 섹스를 위해 여학생들을 만나고 그 것만이 목적이란다.

엄마는 아득했을 것이다.

아들에게 어떻게 말해야 하나

그러나 아들의 답변은 정말 정답이다. 해답은 아니지만 정답이다. 어디 하나 반격할 수 없이 말은 잘한다.

서로 동의하에 했고 강압적인 것은 없었고 콘돔을 사용해서 책임질 일은 만들지 않았고

그렇다고 내가 성적이 떨어지거나 할일을 하지 않은 적이 있었냐고?

청소년의 성적 자기 결정권까지 가지 않더라도 이건 분명히 아닌데 아들의 말에 틈을 잡을 수 없다. 나는 엄마가 원하는대학에 갈 수 있으니 나에게도 숨쉴 틈을 달라고.. 내게 숨쉴 수 있는 여유는 여학생들과 섹스하는 그 순간이라고 말하는 아들에게 엄마는 할말이 없다.

그렇게 엄마에게 조목조목 말하는 순간에도 해야할 과제를 먼저 생각하고 시간을 배분하는 이성적이고 냉정한 아들이다.

엄마의 고민은 시작이다.

이게 분명히 잘못된 일인데 뭐라고 말해야 하나

고작 여동생은 알게 하지 말라거나.. 제 할일을 해야한다고 하면 다인가?

남편은 한 술 더 뜬다.

남자라면 그렇 충동을 겪을 나이고 제어하지 못하고 사고치는 것도 아니고 콘돔까지 쓴다니 얼마나 영리하냐고... 그나이 남자라면 누구나 겪는 일이라고 쉽게 말한다.

그럼 그 상대는 그 상대 여학생들도 그게 목적이라서 깔끔하게 치부하고 넘어갈까

엄마는 자꾸 그 여학생들이 걸리지만 그들에게 어떻게 해야할지는 모른다.

사과를 해야할 일인데 그들이 나서서 잘못했다고 따지지도 않고 학교에서도 조용하고 말이 없다.

분명 문제는 일어났는네 누구하나 나서지 않고 잘못이라고 하지 않는다.

남편은 한 술 더 보탠다.

잘나고 똑똑한 내 아들한테 가랭이 벌리고 달려든 년들이 헤픈거지 내 아들은 잘못이 없다.

결국 합의하에 했든 어쨌든 아들은 처신을 잘한 영리한 놈이 되고  여학생들은 헤벌레하고 헤프로 괜찮은 남자면 몸으로 부딪치는 그렇고 그런 여자가 된다.

게다가 친한 엄마에게 들은 이야기는 뒤통수를 강타한다.

성적을 위해 작정하고 경쟁자들에게 몸으로 덤비는 여학생들이 있다고

그렇게 작정하고 덤비면 순진한 남학생들은 넘어갈 수 밖에 없다고 한다.

이건 어느나라 어느 시대 논리인가?

세상의 여학생은 공부밖에 모르는 순진한 여학생 ( 이기적이고 성적만 아는 여학생_

아이돌에 미쳐 아무 생각없는 여학생  이렇게 밖에 없다

그걸 누가 정하지?

아들 가진 부모가 결정하고 아들이 배우고 또 그렇게 상대를 판단한다.

똑똑해서 극악스럽거나 단순해서 무지하거나

이건 성녀거나 창녀거나와 다를게 없다.

엄마는 계속 고민한다. 그 아이들에게 사과하고 싶다. 미안하다고 해야할 일이다.

 

 

         

 

비슷하게 정이현의 소설에도 이런 이야기가 있다.

미성년자와 성매매를 하고 돌아가던 도중 교통사고가 나고 그 상대 미성년자가 사망을 하고 아들은 다쳤다. 아들이 옳은 일을 한게 아니니 어쩌면 법적인 처벌을 받아야 할지도 모르지만 이미 상대는 죽어버렸고 그 아이가 그런 짓을 한다는 걸 아무도 몰랐다면....

그저 돈으로 막을 수 있는 데까지 막고 없던 일로 되돌리던 섬뜻하고 건조한 이야기

그리고 또 하나

고등학교 딸아이의 임신을 알게 되고 출산까지 하게 되지만 엄마는 누구에게도 그 사실을 알리지 않고 없던 일로 되돌리기로 한다. 상대 남자엄마에게는 책임을 나누기 위해 뭔가 따지기 위해 연락을 하지만 누구이게도 심지어 남편에게도 알지 못하게 다시 예전으로 만들수 있다고 믿는다.

 

이것이 옳은 일이 아니라고 머리로 알고 있는 것들이 많다

배워서 알고 살아가면서 알게 되고 몸으로 부딪치니 내게 하등 도움이 되지 않아서 알게 되는 많은 옳음과 그름들이 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 옳고 그름이 개인에게 가서 부딪칠 때 참 미묘하게 바뀌는 경우가 생긴다. 원래 그렇긴 하지만 사람의 일이라는게 뭐 그렇게 원칙대로 떨어지나? 하는 마음이 드는거

마약하는 일이 나쁜 일이라는 걸 알지만 그래도 그게 내 자식이면 보석금으로 풀려나게 하는게 부모의 도리가 아닐까

미성년이 성관계를 하고 그것도 사랑이 아닌 습관적인 성관계를 한다는 것이 옳지 않고 상대에게 상처가될 수도 있다는 걸 알지만 누구도 뭐라는 사람이 없고 지금 내 앞에 손해를 밨다고 상처를 입었다고 나타나는 사람도 없는데 괜히 긁어서 부스럼을 만들지 않아야 하지 않을까

두 눈 감고 술로 밤을 지새더라도 아들을 고발해 버린 엄마가 있고

상대 아이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보면서 그들에게 사과해야한다고 마음 먹은 엄마가 있다.

그렇게 행동하면 뭐가 달라지나?

 

 

사실 아들은 다시 마약에 손을 대고 말았고

아마  다른 어린 아들은 엄마의 행동이 성가시고 쓸데없다고만 여길것이다.

누구도 동의하지 않지만 정의라서 해야하는 것일까

일이 벌어졌고 예전으로 되돌릴 수 없다고 믿고 정면으로 부딪치겠다고 마음먹고 행동하는 일과

그건 한때의 치기였고 실수였으니 없던 일로 되돌리겠다고 이건 지워질 수 있는 낙서일 뿐이라고 고개를 돌려버리는 일.....

어떤 일이 옳고 그런게 아니라

더 남는 장사가 될까.. 그것이 지금 세계를 돌리는 기준이 되고 있는지 모르겠다.

 

 

사실 엄마에 대한 페이퍼를 쓰려는게 아니었다.

누구나 가지고 있는 삶의 기준에 대해 말하고 싶었다. 그건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닐지도 모르겠지만 결국 드러난 행동의 결과는 옳고 그름으로 나뉘게 되기도 한다.

약을 하는 아들을 감싸는 것도 모성이고 꼰지르는 것도 모성이다.

문란한 성관계를 갖는 아들을 이해하고 넘어가는 것도 사랑이고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여기도록 하는 것도 사랑이다.

내 아이의 잘못을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실수(?)를 감싸 안고 내 사랑의 상처를 들여다 보는 것도 필요한 일이지만 그 잘못을 직면하고 반성하게 하거나 다시 생각해보게 하는 일도 필요하다.

타인의 일에는 냉정하고 담담하게 말하고 평가할 수 있지만

그것이 내문제로 다가오거나 내가 해결하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에서 사람은 쉽게

내가 편하고 눈을 감는 방향으로 끌릴 수 밖에 없다. 물론 안 그런 사람들도 있겠지만...

그때 그걸 옳다 그러다고 할 수 있을까 물론 할 수 있고 해야한다.

모두가 가지고 있는 상황이라는 것을 살피고 이해하고 공감할 수는 있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

동정해서 판단을 흐릴 수는 없는 일이다

그 선이 쉽지 않다.

 

결국 한양은 다시 마약에 손을 대서 가족을 만나지도 못하고 도로 경찰차를 탔고

한양의 엄마는 어쩌면 차라리 처음에 보석금을 내주고 봐줄걸... 이라며 다시 한탄하며 불면의 밤을 보낼지도 모른다.

 

이야기 속의 엄마는 서성거리고 이미 자기가 당연하게 여긴 완벽한 가정의 기준이 무너졌음을 알게 되거나 더 이상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음을 알지만 모른척 하기도 한다.

 

용기있게 한 발을 내딛였으나 그 용기에 대한 보답조차 없이 오히려 원망만 가득하고 상처만 남았을 때  그래도 한 발 내디딘 용기를 발판 삼아 다시 한 발 더 앞으로 갈 것인가? 그래 세상은 그런거야. 나만 튀어봐야  소용없지 다들 그렇게 살아가는 걸.. 맞춰사는 세상이야.. 하고 그대로 다시 되돌아갈지는 내게 달려있다.

그러나.

한 발을 내 디뎠다면 다시 한 발 더 가도 괘찮다고 스스로에게 말하고 싶다.

어쩌면 한 발만 더 가면 거긴 나보다 먼저 발을 디딘 사람이 조금 서성이며 따라올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을 수도 있으니까 그래서 함께 갈 수도 있지 않을까?

 

드라마의 엄마 그리고 소설속의 엄마를 보며

남 같지 않아서.... 그리고 따뜻하게 괜찮다고 말해주고 싶어서 두서없이 끄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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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가 꽤 괜찮은 어른이 되는 게 아닐까 합니다.

 

내가 아직도 덜 자라서 유치하고 어린데 그걸 감추느라 전전긍긍하면서

모성이 강한 엄마  자상하고 친구같은 아빠가 되려고 할게 아니라

스스로 괜찮은 사람이 되어서 말하고 행동하고 반성하고 표현하는 일

그게 결국 좋은 부모라는 생각을 합니다.

 

자식 이야기는 늘 끝이 없고 답이 없고 어떤 상황도 늘 새로워서 전전긍긍하게 되네요

남의 자식일은 그렇게 쉽게 눈에 보이고 판단이 서는데

내 자식의 문제는 앞이 뿌옇고 흐려서 한발자국도 내디딜 수가 없습니다.

 

내가 과연 건강한 사람인가  건전한 사람인가

그걸 먼저 생각해 봐야겠습니다.

조금 이기적이긴 하지만 부모지만

아이들만을 위해 살 수는 없습니다,

아이에게 무슨일이 생길때 그 아이를 위해 죽을 수는 있지만

삶 전체를 아이만을 위해 살 수는 없지 않나요

내 삶을 주인공으로 살면서 나이들어감에 따라 어른이 되어가는 것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부모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왜 모성이 없을까

왜 아이들이 이렇게 귀찮고 힘들기만 할까

내가 뭐가 문제일까 너무 이기적인가?

그건 결국 내가 아직 내 속에 작은 아이를 키우지 못한 반쪽 어른이라서.. 깨닫습니다.

 

그냥 좋은 부모 이전에

좋은 어른이 되고 싶습니다.

나이 50이 가까우면 진짜 어른이 되어야 할 나이이니까요...

이 나이 먹도록  동안이고 어리고 발랄하기만 한건.. 좀 징그럽지 않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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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이의 걱정인형이 되고 싶었다.

아이가 나에게 자기 고민을  울면서 화를 내면서 후회하면서 털어놓는 순간 내가 그 걱정을 모두 흡수해서 아이는 다시 뽀송뽀송하고 무지하고 순수해졌으면 좋겠다.

아이가 나에게 말을 건네는 순간 그 말을 통해 그의 걱정이 나에게로 옮겨왔으면 좋겠다

걱정인형에게 모든 걱정을  맡겨버린 아이는 이제 아무런 거침이 없으면 좋겠다.

 

타인의 걱정따위는 관심도 없는 이기적인 사람이지만

아이의 걱정만큼은 내가 안고 싶었다.

그럴 수만 있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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