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디로 정의하자면 "어정쩡" 이 딱이다.
어정쩡...
이렇지도 않고 그렇다고 저렇지도 못한 중간에 끼어서 뭐라고 정의내리기 참 애매한 존재.
내가 살아온 날들을 돌아봐도 그렇다.
이렇다 할만큼 똑 부러지게 뭔가를 한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마냥 천사표처럼 허허거리면서 순진하게 살았던 것도 아니다. 그저 적당히 위악도 떨었고 적당히 비굴하게 착하척도 하면서 그렇게 살았는데 운이 좋았는지 별 어려움이 없이 지금까지 나이 먹었다.
내 아이들만 그런지 모르겠지만 가끔 내게 묻는다.
"엄마가 내 나이때 꿈이 뭐였어?"
"꿈?"
이 질문 큰 아이가 6살때부터 줄기차게 받아온 질문이다.
처음에는 이랬다
"엄마는 꿈이 뭐야? 지금부터 꿈을 꾸어야 뭐라도 되지 않겠어?"
처음 그 질문을 받았을 때 가슴에서 뭔가가 쿵하고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그때는 마흔도 되지 않았는데 이미 모든게 지나갔다고 생각했던 시기라 그랬던거 같다.
지금 내가 무엇을 꿈꿀 수 있을까
하지만 그 질문을 했던 여섯살 짜리가 이미 열네살이 되어버린 지금 생각하면 그땐 뭐든 꿈꿀 수 있었던 때였구나 싶다.
속된 말로 지금이 내가 살아갈 가장 젊은 순간이라는 것
그걸 알지만 지금도 가끔 어릴적 꿈이 뭐였는지 지금이라도 돌아간다면 무얼 하고 싶은지 물어보면 질문이 떨어지기 무섭게 대답할 수 있는 건 없다. 그렇다고 깊이 고민을 해도 대답할 수 있는 게 없을 거같다.
슬프다.
결국 나란 사람은 그렇게 그때나 지금이나 "어정쩡" 이 가장 적당한 대답이다.
뭐가 되고 싶다는 당찬 꿈도 허황된 망상도 없었다.
어쩌면 일찍 철이 들었던 거 같기도 하다. 뭔가를 꿈꾼다고 다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걸 이미 알았고 세상에는 내가 노력해서 얻을 수 있는 것들보다는 얻을 수 없는게 더 많다는 것도 알았고 그리고 맘대로 살아도 되는 건 아니지만 그냥저냥 게을러도 살아가는데 지장없는 나름 여유있는 부모도 있었던 까닭이었다.
난 뭐가 되고 싶었을까
뭐랄까 그 무엇이라는 것이 직업이라면 나는 구체적으로 꿈꾼 직업들이 없는 건 아니다.
기자가 되고 싶었고 선생님도 되고 싶었고 작가도 되고 싶었다.
어쩌면 어떤 일을 하건 내 일에서 프로가 되고 싶었고 그 일이 글쓰기랑 관련이 있었으면 하기도 했다. 참.. 한때 카피라이터가 되고 싶었던 적도 있었다.
그렇게 준비하다가 덜컥 은행에 입사하게 되면서 그냥 접었다.
그때 모든걸 거기에 걸었던 친구는 지금 그 길을 가고 있다. 크게 성공한건 아니지만 지금 후회하는지는 모르지만 자기의 꿈을 이루기는 했다.
그런데 나는 뭔가를 꿈꾸다가도 신포도를 앞둔 여우처럼 늘 변명을 했고 이유를 찾았고 조금은 쉬운길로 방향을 틀어갔다.
운이 좋았는지 그나마 재능이 있었는지 그 시작은 항상 잘풀렸지만 끝이 엉망이었다.
시작은 하되 끝을 본 건 하나도 없다.
젊은 천재가 가장 불행하다는 건 맞는말이다.
그렇다고 내가 천재씩이나 되는 것도 아니지만 뭔가 초반 운이 잘 풀리는 만큼 그것을 지속하는 끈기나 독기가 부족했다.
늘 어정쩡 좋은 것도 아니고 싫은 것도 아니고 잘 하는 것도 아니고 잘 못하는 것도 아닌
모든 걸 알고는 있지만 제대로 알지 못하는 상황이 내 상황이다.
세상을 나혼자 잘먹고 잘 산다는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하면서 내 주위의 상황에 눈물을 흘리긷 하지만 돌아서면 나도 명품백을 매고 거리낌없이 백화점을 돌아다니고도 싶었다.
잘 나가는 브런치 카페에도 아는 척을 해야하고 소외받는 이웃에 대해서도 깊이있는 성찰을 보이고 싶었다. 두 가지가 상반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다만 나는 뭐든 잘나고 싶었던 것일뿐 뭐하나 깊이있게 빠지지도 못했다.
여기가면 저기가 걸리고 저기 가면 여기가 그리웠다.
누군가가 나를 강하게 이끌어준다면 그대로 끌려가고 싶으면서도 막상 뭔가에 끌리는 순간엔 주저하고 간을 보고 의심하기가 끝이 없었다.
책을 읽는 이유도 그랬다.
뭔가 사회를 사람을 알고 싶었고 소통하고 싶었다. 내가 모르는 세상이 없었으면 하고 바랬다면 그건 욕심일 뿐일까
책모임에서 김중미의 '괭이부리말 아이들:"을 읽으면서 누군가가 그랬다.
이 책을 나쁘다고하지는 않겠지만 이렇게 막막하고 마음아픈 이야기는 내 아이에게 권하고 싶지 않다고 .. 굳이 이런 이야기를 아이에게 읽히고 싶지 않다고 했다.
그때 순간 반발이 들었고 내생각은 그랬다.
내가 아이에게 이 책을 꼭 읽어야 한다고 권할 필요는 없지만 아이가 이 책을 궁금해하고 관심을 가진다면 나는 기꺼이 권하겠다. 아이에게 권하기는 할것이다. 그리고 읽느냐 마느냐는 아이가 결정할 일이지만 나는 아이에게 내가 모르는 세상을 보게 하는 기회를 뺏고 싶지 않다고..
내가 모르는 세상에 대한 책을 한두권 읽는다고 사람이 변하지는 않는다.
아니 모든 사람이 변하지는 않는다.
내가 모르는 일이라 이해를 못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고 마음아파하고 눈물을 흘리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몇몇에게는 또다른 행동까지 이끌어낼 수도 있을 것이다.
그건 사람에 따라 다른 거니까.. 그걸 마음아프니까 막막하고 기분이 좋지 않으니 막아야 한다는 건 아니라도 생각했다.
나역시 김중미를 읽고 김애란을 읽고 누군가가 동화로 쓴 용산이야기를 읽으면서 마음이 몹시 아팠다. 아팠고 미안했고 또 미안했다.
나도 이제는 기성세대가 되어버려서 그저 미안한 사람이 되어있었다.
내가 그런 것도 아니지만 내가 전혀 책임이 없는 것도 아닌.. 어쩌면 어정쩡했던 모래알같았던 내 일상의 무심함이 모여서 뭔가를 저질렀을지도 모른다는 죄책감이 들었다.
미안했고 가만 있는 것도 힘들었다.
무언가를 행동할 수도없었고 하지도 못했으면서 그저 읽고 또 읽으면서 마음아파할 뿐이었다.
그런데..
어정쩡한 삶은 그게 전부였다. 부끄럽지만..아직도 읽고 있을 뿐이다. 나는..
아직도 나는 읽고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