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장 퀴어 정동이론의 3.항에서는 주디스 버틀러의 이론을, 4.항에서는 사라 아메드의 이론을 설명한다. 이 정동이론에 대한 내용이 상당히 인상적이라 밑줄을 많이 그었다. 분석해서 재정리할 능력이 안 되어 밑줄긋기로 대신한다.. 


6장 퀴어 정동 이론


3. 애도의 정치윤리학 : 주디스 버틀러

 1) 슬픔의 정치화


 "타자의 고통에 대한 반응이 피상적 수준에서만 그치"(519쪽)는 경우에 생기는 문제들 


첫째, 저 타자들을 고통스러운 상황에 처하게 만든 구조를 은폐하고 개인의 불운이나 인성 문제로 축소시킨다.

둘째, 동정받을 대상과 동정하는 주체를 구분한다. (...)

셋째, 공감은 늘 선택적이고 언제든 철회될 수 있는 변덕스러운 것이다. (...) 성폭력 피해자에 연대해야 하고 2차 가해는 나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중에서도 성노동자가 겪은 성폭력 피해에 대해서는 '당해도 싸다'는 태도로 신상을 털고 2차 가해를 저지르는 이들이 많다. 이런 사태는 선택적 공감에 기댄 슬픔의 (탈)정치화가 윤리적 바탕으로 삼기에 적절치 않은 수준을 넘어 반-윤리적일 수 있음을 보여준다.  - 520쪽


 2) 취약성의 두 차원을 함께 사유하기 

  (1) 취약성의 실존적 차원 : 나는 너와 나의 관계다 

    

   시혜적.선택적.한시적인 동정이나 공감은 '나'와 '타자'가 확실한 경계로 구분되고 '나'가 혼자서 독립적이고 자율적으로 살 수 있는 주체라고 가정한다. (...) 이와 달리 버틀러는 보다 근본적 차원에서 주체를 타자와의 관계 그 자체로 정의하며, 취약성을 이러한 주체의 실존적 조건으로 이론화 한다. - 521쪽


    당신이 없다면 나는 누구'인가'? 우리를 구성하는 이런 인연 중 몇몇 인연을 상실할 때 우리는 내가 누구인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지 못한다 . 어떤 층위에서 나는 '당신'을 잃어버렸다고 생각하지만 '나' 역시도 사라졌음을 알게 될 뿐이다. 또 다른 층위에서는 아마도 내가 당신 '안에서' 잃어버린 것, 그걸 설명할 어떤 어휘도 내가 미리 갖춰놓지 못했던 그것은, 오직 나만을 이루고 있는 것도 아니고 당신만을 이루고 있는 것도 아닌 관계성, 나와 당신이란 항을 구별 짓고 연결하는 유대[혹은 속박, the tie]라고 표현할 만한 관계성이다.  - 521쪽, 버틀러 재인용 


   '네가 없으면 나도 없다'는 말은 로맨스 장르에서나 나올 법한 낯간지러운 고백으로 들리지만 주체의 실존에 대한 진실이라 부를 만한 것을 담고 있다. (...) 이 "타자의 우선성"을, 라플랑슈는 타자로부터 유아에게 작용하여 '나'의 형성에 등록되고 나중에 나의 욕망으로 흡수되는 수수께끼 같은 신호들인 "원초적 충돌"로, 레비나스는 "전(前)존재론적" 차원에서 일어나는 "박해persecution" 또는 "수동성 이전의 수동성"으로 이론화한다. (...) 이런 이론들은 가장 원초적 층위에서 그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는 방식으로, 어쩌면 평생 이해할 수도 소화할 수도 없는 방식으로 나보다 우선하는 타자들과의 접촉을 통해 형성되는 '나'의 불투명한 기원을 설명하려는 노력이다. '나'는 "처음부터 양도되어 있었음having been given over from the start"이라는 원초적인 경험으로부터 후속적으로 출현하는 것이고, 따라서 타자는 항상 '나만의 것'이라는 영역(소유 자산은 물론이고 내 자아, 정체성, 젠더, 섹슈얼리티 등등)보다 선행하여 그 영역을 가능케 하는 조건이다. 이런 근본적 조건들은 자기 자신에 대한 설명에서 불투명성으로 출현하면서 완벽하게 일관된 서사를 구성하려는 주체의 노력을 번번이 좌절시킨다. - 525, 526쪽 



  근대적 주체는 책임을 자율성-독립성-행위성-선택의 연쇄에 얽어놓는다. 그리고 이 연쇄는 '주체는 독립적이고 자율적으로 선택하는 자이다', '주체는 모든 것을 다 알고 선택했다', '자기 선택에 책임을 져야 한다'로 이어져 모든 맥락과 권력 위계들을 무시한 채 '남자랑 단둘이 술 마시고 모텔 가면 무슨 일이 벌어질 줄 알만한 나이의 여자가 따라갔으니 성폭력 아니고 화간'이라는 식의 결론으로 빠지는 식으로, 바로 그 은폐된 권력 위계를 강화하는 데 기여해왔다.  - 527쪽 


  버틀러는 지금까지 논했던 무지, 불투명성, 취약성과 같은 우리의 한계를 책임감과 윤리의 바탕으로 사유하자고 제안한다. (...) 또한 이 책임감은 우리의 무지, 불투명성, 취약성과 같은 한계들이 우리를 사회적 몸으로 만들고 연결시킨다는 깨달음을 바탕으로 한다. (...) 나아가 내가 알지도 못하는 지구 반대편 타자들의 삶에까지 내가 연루되어 있음을 자각함으로써 나는 내가 하지 않은 일에 대한 책임 또한 이미 나에게 있음을 알게 된다. 이 꺠달음을 통해 나의 상실과 당신의 상실, '우리'의 상실과 슬픔을 어떤 방향으로 정치화할 수 있을까?  - 528, 529쪽 



  (2) 취약성의 구조적 차원 : 탈인간화의 틀 


  버틀러는 전 세계적으로 자행되는 폭력의 불평등한 분배가 슬픔고 애도의 불평등한 분배와 맞물려 있다는 점에 주목한다. 누구의 죽음만이 애도되며 누구의 삶이 파괴될 때만 슬픔과 안타까움이 표현되는가? (...) 이런 질문들은 취약성이 불평등하게 분배된다는 문제뿐만 아니라, 그러한 불평등한 분배를 당연시하거나 인식조차 못 하도록 만드는 '틀'이 존재한다는 문제를 폭로한다.  - 530, 531쪽


  기득권을 쥔 규범적 주체들이 스스로를 인간의 기준으로 삼는 동시에 자신이 타자에게 휘두르는 폭력을 정당화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행하는 일이 '폭력'이 아니어야 하고 자신이 탄압하는 저들은 '인간'이 아니어야 한다. 이렇게 규범적 주체는 자신을 인간으로 구성하기 위한 외부로서 다른 이의 탈인간화를 필요로 한다. "탈인간화가 인간의 생산에 조건"이 되는 것이다.  - 535쪽 



 3) 재현의 실패를 드러내는 재현


  그 어떤 타자도 남김없이 다 재현할 수 있는 틀이 존재할 수 있나? (...)

  타인과 나의 고통을 같은 척도로 잴 수 없음을 인정하고, 내가 타인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음을 인정하고, 내가 타인을 완전히 대변하거나 재현할 수 없음을 인정하고, 내가 타인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고 재현할 수 있다는 생각이 나를 기준으로 하는 동일성의 논리에 타인을 끼워 맞추는 인식론적 폭력이 될 수 있음을 인정하고, 내가 타인에 대해서도 나 자신에 대해서도 완전히 다 알지 못하며 이것은 노력해서 없앨 수 있는 무지가 아님을 인정하는 것이다. 우리는 재현의 실패를 재현에 담아냄으로써, 인간적인 것을 우리가 완전히 재현할 수 없음을 인정함으로써, 인식론적 겸손의 자세를 통해 인간이 무엇인지를 다시 사유하는 작업을 계속해야 한다.  - 539-541쪽



4. 감정의 문화 정치학 : 사라 아메드


 1) 고통의 정치학 : 너만 아프냐 내가 더 아프다 


  고통에 대한 아메드의 논의는 '고통은 당사자만이 알 수 있는 사적인 경험이다'라는 통념을 의문시하면서 시작한다. 타인의 고통을 함부로 재단하지 말라는 의미에선, 이 말은 맞다. (...) 다만 아메드가 문제제기하는 건 좀 다른 측면이다. 고통을 '사적인' 것이라고 단정하기엔, 고통이 항상 이미 끊임없이 공적 담론에 소환되고 유통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고통은 어떤 식으로 공적 담론에 소환.유통되고 있는가? (...) 고통은 불평등한 구조를 따라 불평등하게 생산되고 분배될 뿐만 아니라 불평등하게 재현된다. 그리고 그 불평등한 재현은 다시금 불평등의 재생산에 이바지한다. 아메드는 공적 담론에서 고통이 어떻게 재현되는지를 탐구함으로써 이 악순환의 구조를 파훼하고자 한다.  - 544, 545쪽


 첫째, 고통에 대한 공적 담론은 고통을 생산하는 구조를 은폐하거나 구조 혹은 공동체를 핑계로 가해자를 은폐하는 방식을 통해 가해 책임을 회피하는 경향이 있다. (545쪽)

 둘째, 타자의 고통은 선량한 주체를 돋보이게 하기 위한 들러리로 쉽게 소비된다. (546쪽)

 셋째, 이 적선의 구도에서 타자의 고통이 소비될 때, 주체가 도와줄 마음이 들 만틈 괴롭고 불행해야 하므로 타자의 고통은 늘 과도하게 재현된다. (547쪽)


   (...) 어떤 고통과 괴로움이 더 많은 발언권을 얻는가의 문제, 즉 고통의 형식과 내용을 인정하느냐 여부를 둘러싼 차별은 "권력 분배의 핵심적 기제"다. "공적 자원에 더 많이 접근할 수 있는 주체일수록 공적 영역 안에서 상처의 서사를 동원할 능력에 더 많이 접근"할 수 있는 것이다. 타자들이 자신의 고통을 인정받기 위한 자격 조건을 두고 고군분투하는 동안 규범적 주체 위치를 점한 자들은 너무도 쉽게 고통의 진정성을 인정받는다.  - 550쪽 



 2) 증오의 정치학 : 남 탓의 정당화


   우리는 감정을 통해 "사회적 규범들에 투자"한다. (...) 감정은 국가나 종교 같은 커다란 구조에 자신을 동일시하여 자아를 수립할 수 있는 각본을 제공한다. (...) 여기서 주목할 것은 이 증오라는 감정의 작동에 '사랑'과 '피해자 의식'이 딸려온다는 점이다. 증오와 혐오를 쏟아내는 집단들은 자기네가 하는 것이 '혐오'가 아니라 '사랑'이라고 주장한다. (...) 이 자기애적 각본에서 규범적 주체들은 '나는 좋은 사람인데 너 때문에 이렇게 됐다'는 식으로, 내 안에 끓어오르는 이 증오 감정의 원인을 타자에게 귀속시킴으로써 스스로를 피해자화한다. 

 (...) 증오의 대상을 특정할 수 없어서 증오하지 못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는다. 반대로 증오의 대상을 특정할 수 없기 때문에 증오가 일상화된다. 언제 닥칠지 모르는 위협에 대비해 모든 사회적 타자를 적으로 간주하고 방어 태세로 있어야 한다는 것이 바로 증오가 작동하는 방식인 것이다.  - 554~557쪽


 

 3) 행복과 불행의 정치학 

  (1) "부적절한 방식으로 행복할 자유"

   

   (...) "불행할 자유는 부적절한 방식으로 행복할 자유를 포함할 것이다." 

   (...) 아메드는 행복을 우리가 반드시 쟁취해야 할 궁극의 목표로 여기지 말고 그저 우리가 삶에서 마주칠 수 있는 수많은 가능성 중 하나로 보자고 제안한다. 그리고 불행은 단순한 상태가 아니라 자신에게 부과되고 강제되는 것들을 판단하여 거기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뜻을 정서적으로 피력하는 의사표시로 보자고 제안한다. "괴로워한다는 건, 좋다고 판단되어왔던 것들에 당신은 동의하지 않는다고 느낀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고통은 "행동할 역량을 고양시킬 수 있는 감수성"이 될 수 있다.  - 562쪽 



 4) 슬픔의 정치학 : 타자의 고통을 가로채지 않는 애도의 윤리 


  타자의 슬픔과 고통을 내 것인 양 빼앗거나 대상화하지 않기 위해선 무엇보다도 "불가능한 것을 듣는 법을 배워야" 한다. (...) 적어도 최소한 지켜야 할 조건이 있다. "우리가 우리 것이라 주장할 수 없는 고통에 반응할 수 있"어야 하고, "타자들의 고통이 마치 우리의 감정에 관한 것인 양, 혹은 타자들의 기분을 느낄 수 있는 우리의 능력에 관한 것인 양 증언을 타자들로부터 떼어놓는 방식이어서는 안 된다."  - 572쪽 



 각주144) (...) 아이러니한 것은 성폭력 범죄의 남성 가해자가 붙잡힐 때마다 등장하는 '모범적인 사람' 담론이다. 범죄자가 겉보기에 모범적인 학생이나 직장인이라면, 모범적으로 보이는 그 어떤 남자라도 사실은 성폭력.성착취 가해자가 될 수 있다는 사회적 경각심을 갖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텐데 이 담론은 정반대로 가해자를 비호하는 데 사용된다. '그토록 모범적인 사람이 그런 짓을 할 리가 없다'면서 피해 사실 자체를 부인하는 식으로 기능하는 것이다. 또한 이는 '그 짓만 빼면 훌륭하고 모범적인 사람'이란 메시지를 강력히 전달하면서 여성 대상 범죄를 '실수'로 축소하고, 피해자들이 정당한 처벌과 피해보상을 생각할 수도 없게 가해자와 합의하고 고소를 취하하도록 여론을 몰아가는 역할을 한다. '정신질환자'와 '모범적 사람'이란 재현은 서로 모순되어 보여도, 남성 일반이 집단적으로 벌여온 여성 혐오(그리고 이와 긴밀한 연관이 있는 성소수자 혐오) 폭력의 구조적 문제를 효과적으로 은폐하는 공통된 효과를 낳는다.  - 606, 60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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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어 이론 산책하기
전혜은 지음 / 여성문화이론연구소(여이연)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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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저런 예를 들어가며 쉽게 설명하려는 저자의 노력이 돋보이는 책. 원문이 문젤까 번역이 문젤까 내가 문젤까를 고민할 필요 없는 잘 쓴 우리말 학술서를 읽는 기쁨도 컸다. 완독 자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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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2-02-07 18:3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독서괭 님의 완독을 축하합니다 👏👏👏👏👏

새파랑 2022-02-07 18:5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완독 축하! 드려요~!!

책읽는나무 2022-02-07 21:1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ㅋㅋㅋ넘 귀여워 버리시면 어떡하나요?
완독 자축!!!ㅋㅋㅋㅋ
귀여워서 축하하는 거에요^^

독서괭 2022-02-07 23:4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축하 감사합니다~~^^ 지난해 7월에 시작해서 드디어 완독을..!!😆

- 2022-02-08 13:5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꾸준히 읽으신거 저도 지켜봤어요ㅋㅋ 자축을 축하합니다!!

독서괭 2022-02-08 15:24   좋아요 2 | URL
흐흐 지켜봐주셔서 감사요♥

단발머리 2022-02-10 18:2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완독 축하해요, 독서괭님!!!!!!!!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라라 진 시리즈 2권이다.

1권에서 라라 진은 피터와 야외온탕에서 로맨틱한 키스를 나눈다. 그러나 스키캠프에서 돌아오는 길, "라라진과 피터가 야외온탕에서 섹스했다"는 소문이 퍼졌고, 이로 인해 라라진과 피터는 크게 싸우게 된다. 

2권은 새해를 맞이하며 시작된다. 피터와 화해하고 싶은 라라진은 편지를 써서 언제 보낼까 궁리하며 하루를 보내고, 결국 피터와 만나 화해한다. 그러나 야외온탕의 시련은 끝나지 않았으니, 누군가 야외온탕 키스장면을 찍었고 그 동영상을 인터넷에 공개했다! 문제는 그들은 키스만 했을 뿐인데 마치 섹스를 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거였다. 이 동영상 문제로 인해 라라진은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게 되는데, 이 문제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일들은 '둘이서 벌이는 일'에 대해 여성에게만 처벌이 가해지는 부당함을 잘 보여준다. 그리고 이 소설의 최고 장점은, 라라 진이 이 문제를 헤쳐나가는 데 피터 못지 않게 자매들과 여자친구, 다른 여성(요양원 할머니들)이 좋은 조언자와 지지자가 되어준다는 점이다. 


언니가 말했다. "사람들은 여자가 섹스하면 잡아먹을 듯 굴면서 남자가 섹스하면 격려해주잖아. 댓글만 봐도 그래. 다들 라라 진을 걸레니 뭐니 하면서 피터한텐 아무도 뭐라 하지 않아. 피터도 동영상에 같이 찍혔는데 말이야. 정말 웃기는 이중잣대라니까."  - 79/515쪽(전자책 기준)

요런 언니 마고의 예리한 지적. 

그리고 아래의 이어지는 둘의 대화는 너무 귀엽다. 


나는 심호흡을 했다. "그래, 감당할 수 있어. 내 말은, 뜨거운 섹스 좀 하면 어때. 안 그래? 그건 인생의 한 부분이잖아. 안 그래? (...)"

언니는 깊이 감명받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빨리 슬픔의 다섯 단계를 통과하는 사람은 처음 본다. 믿기 힘들 정도로 놀라운 회복력이야."

"고마워." 나는 약간 뿌듯해졌다.  - 87/515쪽 

로맨스 비중 못지 않은 자매애의 비중. 이 시리즈를 좋아하는 내 첫번째 이유. 


피터와의 이별은 캐서린 송 커비가 열 살이 되는 일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 419/515쪽 


요양원 할머니의 현명한 조언. 

-삶이 성을 차별하잖니. 


할머니가 내 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말했다. "라라진, 명심해라. 관계를 어디까지 끌고 갈지는 여자가 결정하는 거야. 남자는 생각할 때 머리 대신 다른 걸 쓰거든. 네가 냉정을 유지하면서 너 자신을 보호해야 해."

"잘 모르겠어요, 할머니. 그건 좀 성차별적이지 않아요?"

"삶이 성을 차별하잖니. 임신하면 인생이 바뀌는 건 너라고. 남자한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 사람들이 뒷말을 할 때도 너에 대해서만 뭐라고 할 거고. 그 <틴 맘>이란 프로그램 안 봤니? 남자들은 하나같이 쓸모가 없어. 전부 쓰레기야!"  - 201/515쪽

라라 진과 피터의 험난한 연애는 동영상 문제에 피터의 전여친 제너비브가 얽히면서 이별의 위기까지 간다. 그 와중에 라라 진이 '과거 좋아했던 남자들' 중 한 명인 존 매클래런이 다가온다. 존 매클래런.. 난 솔직히 이쪽이 더 마음에 들었는데. 피터도 괜찮은 녀석이긴 하지만, 내 옛 절친과 오랫동안 사귀고 전교생이 그 애와 피터가 깊은 관계라는 걸 아는 상황이라니. 게다가 피터랑 전 여자친구는 '친구'라면서 계속 고민상담인지 뭔지를 한다고 만나고 있다니! 정말 싫다. 피터가 바람을 피운 것도 아니고 여친이기 전에 친구인 사람을 저버리는 게 인간적으로 좋은 건 아니지만, 피터를 비난할 수 없는 것과 별개로 나는 그 상황을 용납하지 못할 것 같다. 순결을 유지하고 있는 존 매클래런 쪽이 맘도 편하고 좋지 않겠니..?(심지어 외모는 '젊은 시절 로버트 레드포드'라는데..) 온갖 로맨틱한 장면도 존과 펼쳐지는데 말이다. 


그래도 어쨌든 피터도 현실에서 찾아보기 힘들 이상적인 10대 남자애다. 예를 들어 이런 장면. 


키스하던 중 피터가 갑자기 물었다. "잠깐, 그럼 너랑 나는 절대 안 하는 거야? 영원히?"

"절대 안 한다곤 안 했어. 지금은 안 한다는 얘기지. 내가 완전히 확신할 수 있을 때까지 말이야. 알았어?"

피터가 웃음을 터뜨렸다. "알았어. 그럼 이 버스를 운전하는 사람은 너구나. 하긴 처음 부터 그랬어. 나는 부지런히 따라갈 뿐이고."  - 260,261/515쪽

라라 진처럼 이렇게 확실하게 섹스에 대한 자기 생각을 말할 수 있도록 아이를 키워야겠다고. 그리고 이걸 흔쾌히 받아들일 수 있는 상대를 만나라고 말해줘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라라 진은 피터와 진지하게 연애를 시작하면서 '관계의 지속', 그리고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을 수 있는 힘을 갖는 관계라는 게 어떤 것인지 깨달아 간다. 


관계를 지속해나가는 데 그리 큰 노력이 필요한 게 아니라는 걸 이제야 깨달았다. 그건 약간의 관심, 작은 노력만으로도 충분히 가능한 것이었다. 그리고 피터의 마음에 상처를 줄 수 있는 힘과 그 상처를 낫게 해줄 수 있는 힘이 내게 어느 정도 있다는 사실 또한 깨달았다. 이런 사실을 깨닫고 나니 마음 한구석이 불안하고 이상했다. 하지만 무엇 때문에 불안한 건지 정확히 설명하기는 어려웠다.  - 297/515쪽 

피터도, 존도 모두 라라 진을 좋아하고 라라 진 역시 둘 모두를 좋아한다. 하지만 사랑은 공평하지 않은 것, 어느 한쪽에 무게가 쏠릴 수밖에 없다. 선택을 해야만 한다. 


남편은 나보다 일하는 시간이 길고 자유롭게 조정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아이들과 보내는 시간이 나에 비해 현저히 적다. 그렇다면 온전히 아이들과 보낼 수 있는 일요일만큼은 아이들과 더 열심히 함께해 주었으면 싶다. 아이들도 평소에 많이 놀지 못한 만큼 일요일에는 아빠와 충분히 놀면 좋겠다. - 이건 내 생각이고, 

토요일에도 하루종일 같이 있던 나에게, 아이들은 일요일에도 여전히 매달린다. 목욕도 엄마가, 간식 주는 것도 엄마가, 똥 치우는 것도 엄마가, 재우는 것도 엄마가. 내가 한명만 데리고 병원 등을 가야할 일이 생기니, 서로 "누나는 아빠 좋아하잖아" "네가 아빠를 더 좋아하잖아" 하며 아빠를 떠넘기는 사태까지 발생했다. 듣고 있는 아빠 생각도 해야지 얘들아... 


참으로 사랑은 공평하지 않은 것이다. 엄마랑 평소에 더 많이 놀았다고 남은 시간은 아빠랑 놀아야지, 하는 생각은 사랑에 걸맞지 않는다. 사랑에 논리와 계산은 통하지 않는다. 논리와 계산이 통하지 않는 그 사랑이 정말로 고맙지만, 사양하고 싶을 때도 가끔은 있다... 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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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넬로페 2022-02-07 16:5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올려주신 책의 문장들이 넘 좋고 용기를 얻어요. 사랑은 공평하지 않아요, 정말 그런것 같아요^^
지금은 아이들이 어려서 그런데 좀 더 크고 사춘기가 되면 그땐 아빠의 역할이 더 커질거예요~~그때까지 아자아자^^

독서괭 2022-02-07 23:47   좋아요 1 | URL
오오 페넬로페님 격려 감사합니다. 크면서 아빠랑 노는 시간이 늘어난다고는 하더라고요. 남편 업무시간이 좀 줄어야 할텐데 ㅠ 희망을 가져봅니다!

단발머리 2022-02-07 19:41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독서괭님!! 아침에는 로스 페이퍼 올려주시더니 라라진 페이퍼라니요!!! 이거 정말, 일거양득, 일석이조, 일타쌍피, 엎친데 덮친격이에요!!!
저는 이 시리즈 세 권 다 읽었구요. 이 작가의 다른 책 샀는데, 그건 다 못 읽고 보관만 하고 있어요.
중간 중간 인생의 진리 같은 명언이 속출해서 넘 좋았지만, 셀럼 포인트 역시 무시할 수 없겠네요.
너무 즐겁게 잘 읽고 갑니다^^

제가 생각해보니 사람은 역시나, 같은 책 읽는 사람을 좋아하는 거 같아요 ㅋㅋㅋㅋㅋㅋ 1) 같은 책을 사는 사람을 좋아하고 2) 같은 책을 읽는 사람을 좋아하고 3) 같은 책에 대해 리뷰 쓴 사람을 좋아하고 4) 같은 느낌을 갖게 된 사람을 좋아하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이들 아빠 좋아하게 만드는 법.... 있기는 있는데 좀 아쉬운 포인트가 있어서요. 어떻게.... 알려 드려요?

독서괭 2022-02-07 23:50   좋아요 2 | URL
이야 단발머리님 1)에서 4)까지 정리해주신 거 완전 공감합니다😆 라라진 시리즈 저도 이제 3권 시작은 했는데 스트레스 심할 때 읽으려고 아껴뒀어요 ㅋ 이 작가 다른 책은 검색 안 해봤는데 있군요! 그냥 그런 틴에이저로맨스로 읽기에는 아까운 소설 같아요. 특히 가족-자매 이야기가 많아서 좋아요^^ 단발님과는 잭리처시리즈에서 시작해 착착 애정을 쌓아가는군요 히히
아빠 좋아하게 만드는 법에 아쉬운 포인트는 뭘까요.?? 궁금한데 알려주세요!

새파랑 2022-02-07 19:4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줄거리만 보면 완전 재미있을거 같아요 ^^ 그런데 제가 이런 책을 읽으면 왠지 안될거 같은 기분이 듭니다 ㅎㅎ 사랑은 원래 공평한게 아닌가봐요~!!

독서괭 2022-02-07 23:51   좋아요 2 | URL
세계고전문학 마니아 새파랑님ㅎㅎ 이런 책을 읽으시면 아니될 건 없지만 섣불리 권하지는 못하겠네요^^ 혹 영어 공부 하실거면 원서 읽어보시는 건 좋을 듯요!

mini74 2022-02-07 19:5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삶이 성을 차별하잖니. 버스를 운전하는 사람은 너잖니 ㅎㅎ 와닿는 문장들이네요. 저도 제가 일하면서 거의 혼자 아이를 카웠어요. 남편은 아이가 지가 알아서 큰 줄 알아요. 본인은 뭘 한 게 없으니 ㅎㅎㅎ

독서괭 2022-02-07 23:53   좋아요 1 | URL
미니님 혼자 거의 키우시다니 고생 많으셨네요 ㅠㅠㅠ 저희 아빠도 보면 신생아가 밤에 계속 깬다는 것도 모르시더라고요;; 남편은 그래도 살림육아에 많이 힘쓰는 편인데 한계가 있네요😓

책읽는나무 2022-02-07 21:4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전 라라진 이야기 넷플 영화로 봤어요.
등장인물들 하는 행동들이 넘 귀여워서 시즌2 까지 봤었는데 아~~이게 책이랑 영화랑 확실히 느낌이 다르군요?
삻이 성을 차별한다!!!
이런 명언들 하나도 기억 안나네요!!
내가 자막을 놓친 걸 수도 있겠지만요^^
책을 읽게 된다면 시즌 2가 더 좋은 대사들을 많이 읽게 될 것같군요!!

아가들이 엄마를 더 많이 좋아하나 보군요??
저는 고 시기 때 넘 힘들어서 아빠한테 가보라고~맨날 맨날 애들 등을 밀어줬었어요.
무슨 일만 생기면 맨날 ˝어머! 아빠 어디 있어?˝
˝아빠 또 숨었나 보네? 아빠 찾으러 가자!˝
˝아빠 또 자는 척 하네? 간지럽히러 가자!˝
˝아빠한테 해달라고 해볼까?˝.....
메구짓 많이 했네요ㅋㅋㅋ
아주 그냥 아빠 소리를 달고 살았었어요^^

독서괭 2022-02-07 23:56   좋아요 0 | URL
저도 영화를 볼까 하다가 피터 얼굴 보고 실망할까봐? ㅋㅋㅋ 안 봤어요. 근데 영화도 재밌나보네요^^ 영화에 그런 세세한 부분까지 나올지는 모르겠네요. 아무래도 책이 더 자세하겠죠?
저도 아빠한테 가보라고 아빠한테 해달라고 하라고 많이 하는데 거부당할 때가 많아서^^;;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계속 밀어봐야겠습니다..! 나무님은 안 그래도 종일 보는데 아빠 있을 때까지 매달리면 더 힘드셨겠죠 ㅠㅠ

기억의집 2022-02-07 22:4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라라진이 내가 사랑했던 남자들인가 그 여주 아닌가요? 작품속 대화가 옳은 말만 하는데요!!! 책은 시리즈로 있나 보군요!!

독서괭 2022-02-07 23:58   좋아요 0 | URL
내가 사랑했던 남자들에게 맞습니다^^ 책은 3권까지 있더라고요. 라라진 캐릭터가 귀여워요. 로맨스보담.. 가족물/성장물인 게 좋아서 봅니당☺️
 
에브리맨
필립 로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0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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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소설은 주인공인 '그'의 장례식 장면에서 시작된다. 독자는 죽은 이를 애도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이 저마다 풀어놓는 추억과 감정들을 맛본 뒤, 이어지는 '그'의 생애를 보게 된다. 그는 이미 죽었다. 그런데 그의 이야기는 다른 사람이 아닌 그 자신의 목소리로 전해진다. 1인칭 시점은 아니고 '그'로 표현되지만 거의 1인칭이나 마찬가지다. 그런데 이 전환이 너무 자연스러운 나머지, 그가 죽었다는 걸 알고 시작되는 이 이야기를 읽어나가며 나는 그가 마지막 수술 뒤에 죽을까,를 궁금해 했다. 심지어 이 소설이 그의 아버지의 장례식에서 시작되었다고 잠시 착각했다. 


(...) 다른 여느 장례식보다 더 흥미로울 것도 덜 흥미로울 것도 없었다. 그러나 가장 가슴 아린 것, 모든 것을 압도하는 죽음이라는 현실을 한 번 더 각인시킨 것은 바로 그것이 그렇게 흔해 빠졌다는 점이었다.
몇 분이 안 되어 모두 가버렸다. 지친 표정으로 눈물을 흘리며 우리 종(種)이 가장 좋아하지 않는 활동으로부터 떠나가 버렸다.
그리고 그는 뒤에 남았다. 물론 다른 누가 죽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많은 사람들이 비통해 했지만, 어떤 사람들은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거나 자기도 모르게 안도했다. 또는 좋은 이유는 나쁜 이유는 진정으로 기뻐하기도 했다.
 - P23


이 얇은 책 속에는 수많은 죽음이 담겨 있다. 소년 시절 입원했던 병실에서 옆 침대에 누워 있던 다른 소년의 죽음, 전쟁으로 인한 이름 모를 선원의 죽음, 그림교실에 오던 학생의 죽음, 아버지의 죽음, 어머니의 죽음. 그 모든 죽음들 사이를 지나 계속 살아가는 그 역시 노화와 건강 악화로 수술, 입원을 반복하며 죽음을 향해 간다. 바로 옆에서 죽음이 벌어져도 내게 벌어질 줄은 몰랐던 젊은 시절을 지나, 이제 언제 그것이 닥쳐올지 몰라 벌벌 떠는 노년의 삶. 우리 모두에게 예정된 결말. 


"창피할 일 전혀 없습니다."

"있어요, 있어요." 그녀는 울었다. "자신을 돌볼 수 없다는 거, 궁상맞게 위로를 받아야 한다는 거..…"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그런 건 전혀 창피한 게 아니죠."
"그렇지 않아요. 선생님은 몰라요. 의존, 무력감, 고립, 두려움…… 그게 다 아주 무섭고 창피해요. 통증이 있으면 자신을 겁내게 돼요. 그 완전한 이질감이 정말 끔찍해요."
 - P96

무엇보다 그를 괴롭게 하는 것은 그의 욕망이다. 그는 첫 번째 결혼에서 실패하고 두 아들의 증오를 얻었으나, 두 번째 결혼에서는 헌신적인 아내와 상냥한 딸을 얻었다. 그러나 자제하지 못한 그의 욕망으로 두 번째 결혼도 파국을 맞는다. 그 욕망의 대상과 맺은 세 번째 결혼 생활은 완전히 실패였다. 결국 늙고 병든 그는 홀로 살게 되는데, 그 와중에도 젊은 여자를 향한 그의 욕망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나 제 아무리 잘나갔던 그라도 일흔의 나이에 이삼십대 여성에게 수작을 거는 것은 무리수였다... 

그는 전 직장동료 중 한 명은 암투병 중이고 한 명은 정신병원에 입원한 사실을 알게 되어 전화를 건다. 그는 이제 노년이라는 "대학살"이 진행 중임을 실감한다.


그는 어머니와 아버지와 전화를 하고 이야기를 나누어 자신의 에스프리를 소생시키고 싶었다. 그러나 그가 알게 된 것은 삶의 종말이라는 피할 수 없는 맹공격이 가져온 결과 전체와 비교하자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가 긴 직장생활 동안 사귄 모든 사람의 괴로운 사투를 알았다면, 각각의 사람들의 후회와 상실과 인내가 담긴, 공포와 공황과 고립과 두려움이 담긴 고통스러운 이야기를 알았다면, 이제 그들이 떠나야 할 것, 한때 그들에게 생명과도 같았던 그 모든 것을 알았다면, 그들이 체계적으로 파괴되어가는 과정을 알았다면, 그는 하루 종일, 또 밤늦도록 계속 전화기를 붙들고, 전화를 적어도 수백 통은 해야 했을 것이다.
노년은 전투가 아니다. 노년은 대학살이다.
 - P162

리뷰를 쓰기 위해 다시 보니 볼수록 잘 쓴 소설이라는 생각이 든다. <에브리맨>이라는 제목처럼 모든 사람에게 닥쳐오는 노년의 삶 - 질병, 무직, 홀로살기, 체력감퇴, 성적매력감퇴(!!) - 을 '죽음'이라는 주제를 중심으로 압축적으로 엮어 낸 한 사람의 일생을 통해서 보여주는 방식이 영리하고, 무엇보다 재미있다. 죽음을 전면에 내세웠다는 점에서 보부아르의 <아주 편안한 죽음>과 톨스토이의 <이반 일리치의 죽음>이 떠오르는데, 일단 재미 면에서는 가장 뛰어나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은 한 편의 우화같고 교훈적인 반면, <에브리맨>과 <편안한 죽음>은 훨씬 개별적이고 구체적이다. 두 작품 중에는 <편안한 죽음>이 더 읽기가 힘들었는데, 더 좋은 쪽도 <편안한 죽음>이다. 


뭘까? 분명 잘 썼고 재미도 있는데 왜 좋아지지 않을까? 

뭔가 그럴싸한 이유가 없나 곰곰이 생각해 봤지만, 이런 설명밖에 못 하겠다. 그러니까, 

이 작품은 뭔가, 중/노년 아저씨들이 많이 하는, "내가 왕년에는 말이야~"의 냄새가 풍긴다.

자기 욕망을 좇아 거침없이 살던 남자가 힘 빠지고 곁에 사람 없으니 지난 리즈시절을 그리워하며 한탄하는 느낌? 

그게 다는 물론 아니고 노년과 죽음에 대한 인간의 절망과 공포를 잘 그려낸 건 맞는데, 아, 뭔가.. 뭔가가.. 이입이 안 돼!! 


마치 질식을 시키려는 듯이 그의 얼굴에 에테르 마스크를 씌우던 그 공포의 순간에 그 의사가, 그가 누구였건, 이렇게 소곤거렸다고 그는 맹세라도 할 수 있었다. "자, 이제 널 여자로 바꿔주마."  -P36


이런 대목 때문일까? 이건 예시일 뿐이지만, 이 책의 제목이 <에브리'맨'>이듯이, 물론 영어로는 이게 모든 사람이란 의미겠지만 어쨌든 '맨'이니까, 몹시 남성적이어서?


다양한 욕망을 품고 있었지만 그것을 참아 내기 위해 엄마는 온 힘을 쏟아야 했고, 그 과정에서 분노를 느껴야만 했다. 엄마는 유년 시절 내내 규범과 금기라는 갑옷을 두른 채 몸과 마음, 정신을 억압당했다. 그리고 스스로를 끈으로 옭아매도록 교육받았다. 그런 엄마의 내면에는 끓어오르는 피와 불같은 정열을 지닌 한 여인이 살아 숨 쉬고 있었다. 그러나 그 여인은 뒤틀리고 훼손된 끝에 자기 자신에게조차 낯선 존재가 되어 버린 모습이었다.  - <아주 편안한 죽음>, P58


보부아르의 어머니가 <에브리맨>의 '그'보다 훨씬 먼저 태어난 사람이고 둘다 나보다 과거 세대 사람들이지만, 결혼을 하고도 욕망에 좆아 사는 사람보다 억압당하며 산 어머니의 삶 쪽이 나 개인적으로 이입이 더 잘 되기 때문일까?


자연스러운 죽음은 없다. 인간에게 닥친 일 가운데 그 무엇도 자연스러운 것은 없다. 지금 이 순간 인간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것, 이는 그 자체로 세상에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다. 모든 인간은 죽는다. 하지만 각자에게 자신의 죽음은 하나의 사고다. 심지어 자신이 죽으리라는 걸 알고 이를 사실로 받아들인다 할지라도, 인간에게 죽음은 하나의 부당한 폭력에 해당한다.  - <아주 편안한 죽음>, 153쪽 


흠, 두 책에서 인상적이었던 명제들, 

"노년은 대학살이다"와 "죽음은 하나의 부당한 폭력이다", 둘 중에 어느 쪽이 마음에 드시나요? 


그는 그들 모두를 너그럽게 대하려고 노력했다. 심지어 가망 없는 사람들에게도, 보통 그런 사람들이 수업에 들어오자마자 바로 "멋진 하루를 보냈습니다. 오늘은 영감을 받고 왔어요" 하는 이야기를 하곤 했다. 마침내 그 소리가 지겨워지자 그는 척 클로스가 어떤 인터뷰에서 한 말을 기억나는 대로 들려주었다. 영감을 찾는 사람은 아마추어이고, 우리는 그냥 일어나서 일을 하러 간다. - P86

"(...) 하지만 거짓말이라니…… 거짓말은 정말 경멸스러운 방식으로 값싸게 다른 사람을 통제하려는 거야. 다른 사람이 불완전한 정보에 따라 행동하는 걸 지켜보는 거야. 다른 사람이 수모를 겪는 걸 지켜보는 거라고, 거짓말은 아주 흔하지만, 당하는 쪽이 되어보면, 그건 정말 경악스러운 거야. 당신 같은 거짓말쟁이들에게 배신을 당하는 사람들은 점점 많은 수모를 겪게 돼. 그러다 보면 마침내 당신도 그 사람들을 전보다 하찮게 여길 수밖에 없어, 안 그래? 당신처럼 능숙하고 집요하고 사악한 거짓말쟁이들은 언젠가는 틀림없이 자신에게 심각한 한계가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거짓말을 하는 상대한테 그런 한계가 있다고 생각하게 될 거야. (...)" - P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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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2-02-07 06:5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는 필립 로스, 이 양반한테 열광했다가, 좋아했다가, 그저 그랬다가, 이젠 <유령 퇴장> 이후에 더 이상 안 읽습니다.
심지어 미국 문학판의 유대인 마피아가 밀어주기로 결심을 한 거 아냐, 라고 의심까지 하는 지경입니다.
저도 이런 제가 싫습니다. ㅠㅠㅠㅠㅠ

잠자냥 2022-02-07 09:57   좋아요 3 | URL
ㅋㅋㅋㅋ 유대인 마피아 개입설 ㅋㅋㅋㅋㅋ

독서괭 2022-02-07 12:36   좋아요 3 | URL
ㅎㅎ 골드문트님이 <유령 퇴장> 이후 안 읽겠다고 하신 글 본 기억이 나요. 유대인 마피아 ㅎㅎ 그런데 한때는 열광하셨다니 필립 로스에게 매력이 있는 건 분명한가 봅니다.
그렇다고 왜 스스로를 싫어하시나요 ㅎㅎ

새파랑 2022-02-07 07:1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골드문트님 처럼 계속 읽다보면 필립 로스가 싫어질까요? ㅜㅜ
전 소설은 편식을 안한다고 생각해서 이런 시원시원한 문체도 좋더라구요. 좀 마초적인 느낌이 있어서 호불호가 갈릴거 같긴 합니다.

전 <에브리맨>만 읽어봐서 <아주 편안한 죽음>과 비교는 못하겠지만 그래도 <에브리맨> 좋았어요 ㅋ

독서괭 2022-02-07 12:37   좋아요 2 | URL
새파랑님 말씀처럼 정말 호불호가 갈리는 작가인가 봐요. 저는 한권 읽은 것 뿐이라 단정하긴 어렵지만 그동안 이래저래 들었던 평가들의 이유는 좀 알겠더라고요. 마초적인 느낌이라는 게 맞는 것 같아요.
그래도 몇 권 더 읽어보려고요~^^

기억의집 2022-02-07 08:1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 책은 안 읽었지만 그의 다른 작품들 몇 권 읽었는데,,., 딱히 매력적인 거 모르겠더라구요. 필립 로스의 책이 2010대 초반에 번역되어 나와 한참 리뷰어들 사이에 입이 올라 커다란 기대감을 갖고 읽어서인지…저는 그들의 삶에 공감 하기가 힘들었던 기억이 나요. 휴맨스테인과 미국의 목가 네메시스 읽었네요. 지금 잠깐 검색해 보니… 공감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었던 것 같어요.

독서괭 2022-02-07 12:40   좋아요 1 | URL
<휴먼스테인>과 <네메시스>는 읽어볼 생각인데, 기억님께는 전부 별로였군요! 하도 호불호가 갈리니 궁금해서라도 읽어보긴 해야겠습니다 ㅎㅎ 미국, 백인, 남성이라는 입장이 너무 강하게 드러나는 걸까요. <에브리맨>만 읽은 저로서는 다른 건 모르겠지만 남성적이라는 느낌은 많이 받아서 이입이 안 됐던 것 같습니다.

단발머리 2022-02-07 09:5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는 한 때 필립 로스의 책을 다 읽겠다는 각오로 사정없이 읽었구요. 비교적 최근에 나온 두세권 뺴고 다 읽었는데, 저에게는 무척 복잡한 감정을 남긴 작가라서요. 사랑하고 미워하는. 피하고 싶으면서도 원하는... 뭐, 그런 맘이에요.
<에브리맨>이랑 <아주 편안한 죽음>을 이렇게 비교 대조하면서 읽을 수 있다는 건 몰랐어요. 아침부터 크게 감탄하고 갑니다.
근데, 어쩌죠. 또 필립 로스 읽고 싶네요. (먼 산)

독서괭 2022-02-07 12:42   좋아요 1 | URL
사정없이..!! 제가 필립 로스에 대해 북플에서 받은 인상들이 단발머리님, 다락방님, 잠자냥님, 골드문트님 영향인 것 같아요. 되게 잘 쓰는데, 마초적이고, 이걸 읽어야돼 말아야돼.. 요런 느낌? ㅋㅋ
저는 읽은 책이 많지 않다보니 최근 읽은 <아주 편안한 죽음>이 많이 떠올랐습니다^^ 느낌이 많이 다르더라고요.
필립 로스 또 읽고 싶다고 하시는 걸 보니 단발머리님에게는 아직 사랑이 더 많이 남아있는 모양입니다. 단발머리님의 필립 로스 원픽이 궁금해요!

잠자냥 2022-02-07 09:5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ㅎㅎ 괭님이 지적하신 그 부분 때문에 제가 필립 로스를 많이 읽지 못하게 된 것 같아요.....
특히 <포트노이의 불평> 읽고 급 싫어짐; ㅋㅋㅋㅋ

독서괭 2022-02-07 12:43   좋아요 2 | URL
오! 자냥님이 공감해 주시니 기쁘네요^^ 저는 이 느낌이 맞나 확인해보기 위해 몇권 더 읽어보려고요 ㅋ <네메시스>, <울분>, <휴먼스테인> 정도 생각하고 있어요. <포트노이의 불평>은 안 읽을래요 ㅋㅋ

mini74 2022-02-07 14: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 이때까진 좋았어요. 그래봤자 몇 권 안되지만. 이 책도 읽으려고 찜해놔서 실눈 뜨고 본. ㅠㅠ 호불호가 갈리는군요. 마초적인 느낌 음. 뭔지 알것 같기도 합니다 ~~

독서괭 2022-02-07 23:45   좋아요 1 | URL
ㅎㅎ 이미 주인공이 죽으며 시작해서 사실 스포할 것도 딱히 없습니다^^ 미니님은 좋아하시는군요! 전 더 읽어봐야겠어요🤔
 
에브리맨
필립 로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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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듣던 대로)잘 쓴, (듣던 대로)야한, (듣던 대로)남성적인 소설. 필립 로스의 책은 처음인데 이 얇은 책만으로도 들리던 말들의 이유는 알 것 같다. <에브리맨>은 화자가 평범하다는 뜻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죽음은 닥쳐온다는 뜻에서 붙인 제목인 듯. 잘 썼지만 어쩐지 정은 안 가서 별 네 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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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2-02-02 00:10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죽어가는 짐승> 읽으시면 더 놀랄수도 있습니다~! 호불호가 나뉠수 밖에 없는 작가인거 같아요 😅

독서괭 2022-02-03 22:18   좋아요 1 | URL
아, 그 책은 엄청나다는 말은 들었습니다 ㅋㅋㅋ <에브리맨>은 야한 거 나올 거라고 생각도 못하고 읽다가 좀 놀랐어요. 사실 분량은 얼마 안 되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