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장 퀴어 정동이론의 3.항에서는 주디스 버틀러의 이론을, 4.항에서는 사라 아메드의 이론을 설명한다. 이 정동이론에 대한 내용이 상당히 인상적이라 밑줄을 많이 그었다. 분석해서 재정리할 능력이 안 되어 밑줄긋기로 대신한다.. 


6장 퀴어 정동 이론


3. 애도의 정치윤리학 : 주디스 버틀러

 1) 슬픔의 정치화


 "타자의 고통에 대한 반응이 피상적 수준에서만 그치"(519쪽)는 경우에 생기는 문제들 


첫째, 저 타자들을 고통스러운 상황에 처하게 만든 구조를 은폐하고 개인의 불운이나 인성 문제로 축소시킨다.

둘째, 동정받을 대상과 동정하는 주체를 구분한다. (...)

셋째, 공감은 늘 선택적이고 언제든 철회될 수 있는 변덕스러운 것이다. (...) 성폭력 피해자에 연대해야 하고 2차 가해는 나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중에서도 성노동자가 겪은 성폭력 피해에 대해서는 '당해도 싸다'는 태도로 신상을 털고 2차 가해를 저지르는 이들이 많다. 이런 사태는 선택적 공감에 기댄 슬픔의 (탈)정치화가 윤리적 바탕으로 삼기에 적절치 않은 수준을 넘어 반-윤리적일 수 있음을 보여준다.  - 520쪽


 2) 취약성의 두 차원을 함께 사유하기 

  (1) 취약성의 실존적 차원 : 나는 너와 나의 관계다 

    

   시혜적.선택적.한시적인 동정이나 공감은 '나'와 '타자'가 확실한 경계로 구분되고 '나'가 혼자서 독립적이고 자율적으로 살 수 있는 주체라고 가정한다. (...) 이와 달리 버틀러는 보다 근본적 차원에서 주체를 타자와의 관계 그 자체로 정의하며, 취약성을 이러한 주체의 실존적 조건으로 이론화 한다. - 521쪽


    당신이 없다면 나는 누구'인가'? 우리를 구성하는 이런 인연 중 몇몇 인연을 상실할 때 우리는 내가 누구인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지 못한다 . 어떤 층위에서 나는 '당신'을 잃어버렸다고 생각하지만 '나' 역시도 사라졌음을 알게 될 뿐이다. 또 다른 층위에서는 아마도 내가 당신 '안에서' 잃어버린 것, 그걸 설명할 어떤 어휘도 내가 미리 갖춰놓지 못했던 그것은, 오직 나만을 이루고 있는 것도 아니고 당신만을 이루고 있는 것도 아닌 관계성, 나와 당신이란 항을 구별 짓고 연결하는 유대[혹은 속박, the tie]라고 표현할 만한 관계성이다.  - 521쪽, 버틀러 재인용 


   '네가 없으면 나도 없다'는 말은 로맨스 장르에서나 나올 법한 낯간지러운 고백으로 들리지만 주체의 실존에 대한 진실이라 부를 만한 것을 담고 있다. (...) 이 "타자의 우선성"을, 라플랑슈는 타자로부터 유아에게 작용하여 '나'의 형성에 등록되고 나중에 나의 욕망으로 흡수되는 수수께끼 같은 신호들인 "원초적 충돌"로, 레비나스는 "전(前)존재론적" 차원에서 일어나는 "박해persecution" 또는 "수동성 이전의 수동성"으로 이론화한다. (...) 이런 이론들은 가장 원초적 층위에서 그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는 방식으로, 어쩌면 평생 이해할 수도 소화할 수도 없는 방식으로 나보다 우선하는 타자들과의 접촉을 통해 형성되는 '나'의 불투명한 기원을 설명하려는 노력이다. '나'는 "처음부터 양도되어 있었음having been given over from the start"이라는 원초적인 경험으로부터 후속적으로 출현하는 것이고, 따라서 타자는 항상 '나만의 것'이라는 영역(소유 자산은 물론이고 내 자아, 정체성, 젠더, 섹슈얼리티 등등)보다 선행하여 그 영역을 가능케 하는 조건이다. 이런 근본적 조건들은 자기 자신에 대한 설명에서 불투명성으로 출현하면서 완벽하게 일관된 서사를 구성하려는 주체의 노력을 번번이 좌절시킨다. - 525, 526쪽 



  근대적 주체는 책임을 자율성-독립성-행위성-선택의 연쇄에 얽어놓는다. 그리고 이 연쇄는 '주체는 독립적이고 자율적으로 선택하는 자이다', '주체는 모든 것을 다 알고 선택했다', '자기 선택에 책임을 져야 한다'로 이어져 모든 맥락과 권력 위계들을 무시한 채 '남자랑 단둘이 술 마시고 모텔 가면 무슨 일이 벌어질 줄 알만한 나이의 여자가 따라갔으니 성폭력 아니고 화간'이라는 식의 결론으로 빠지는 식으로, 바로 그 은폐된 권력 위계를 강화하는 데 기여해왔다.  - 527쪽 


  버틀러는 지금까지 논했던 무지, 불투명성, 취약성과 같은 우리의 한계를 책임감과 윤리의 바탕으로 사유하자고 제안한다. (...) 또한 이 책임감은 우리의 무지, 불투명성, 취약성과 같은 한계들이 우리를 사회적 몸으로 만들고 연결시킨다는 깨달음을 바탕으로 한다. (...) 나아가 내가 알지도 못하는 지구 반대편 타자들의 삶에까지 내가 연루되어 있음을 자각함으로써 나는 내가 하지 않은 일에 대한 책임 또한 이미 나에게 있음을 알게 된다. 이 꺠달음을 통해 나의 상실과 당신의 상실, '우리'의 상실과 슬픔을 어떤 방향으로 정치화할 수 있을까?  - 528, 529쪽 



  (2) 취약성의 구조적 차원 : 탈인간화의 틀 


  버틀러는 전 세계적으로 자행되는 폭력의 불평등한 분배가 슬픔고 애도의 불평등한 분배와 맞물려 있다는 점에 주목한다. 누구의 죽음만이 애도되며 누구의 삶이 파괴될 때만 슬픔과 안타까움이 표현되는가? (...) 이런 질문들은 취약성이 불평등하게 분배된다는 문제뿐만 아니라, 그러한 불평등한 분배를 당연시하거나 인식조차 못 하도록 만드는 '틀'이 존재한다는 문제를 폭로한다.  - 530, 531쪽


  기득권을 쥔 규범적 주체들이 스스로를 인간의 기준으로 삼는 동시에 자신이 타자에게 휘두르는 폭력을 정당화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행하는 일이 '폭력'이 아니어야 하고 자신이 탄압하는 저들은 '인간'이 아니어야 한다. 이렇게 규범적 주체는 자신을 인간으로 구성하기 위한 외부로서 다른 이의 탈인간화를 필요로 한다. "탈인간화가 인간의 생산에 조건"이 되는 것이다.  - 535쪽 



 3) 재현의 실패를 드러내는 재현


  그 어떤 타자도 남김없이 다 재현할 수 있는 틀이 존재할 수 있나? (...)

  타인과 나의 고통을 같은 척도로 잴 수 없음을 인정하고, 내가 타인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음을 인정하고, 내가 타인을 완전히 대변하거나 재현할 수 없음을 인정하고, 내가 타인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고 재현할 수 있다는 생각이 나를 기준으로 하는 동일성의 논리에 타인을 끼워 맞추는 인식론적 폭력이 될 수 있음을 인정하고, 내가 타인에 대해서도 나 자신에 대해서도 완전히 다 알지 못하며 이것은 노력해서 없앨 수 있는 무지가 아님을 인정하는 것이다. 우리는 재현의 실패를 재현에 담아냄으로써, 인간적인 것을 우리가 완전히 재현할 수 없음을 인정함으로써, 인식론적 겸손의 자세를 통해 인간이 무엇인지를 다시 사유하는 작업을 계속해야 한다.  - 539-541쪽



4. 감정의 문화 정치학 : 사라 아메드


 1) 고통의 정치학 : 너만 아프냐 내가 더 아프다 


  고통에 대한 아메드의 논의는 '고통은 당사자만이 알 수 있는 사적인 경험이다'라는 통념을 의문시하면서 시작한다. 타인의 고통을 함부로 재단하지 말라는 의미에선, 이 말은 맞다. (...) 다만 아메드가 문제제기하는 건 좀 다른 측면이다. 고통을 '사적인' 것이라고 단정하기엔, 고통이 항상 이미 끊임없이 공적 담론에 소환되고 유통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고통은 어떤 식으로 공적 담론에 소환.유통되고 있는가? (...) 고통은 불평등한 구조를 따라 불평등하게 생산되고 분배될 뿐만 아니라 불평등하게 재현된다. 그리고 그 불평등한 재현은 다시금 불평등의 재생산에 이바지한다. 아메드는 공적 담론에서 고통이 어떻게 재현되는지를 탐구함으로써 이 악순환의 구조를 파훼하고자 한다.  - 544, 545쪽


 첫째, 고통에 대한 공적 담론은 고통을 생산하는 구조를 은폐하거나 구조 혹은 공동체를 핑계로 가해자를 은폐하는 방식을 통해 가해 책임을 회피하는 경향이 있다. (545쪽)

 둘째, 타자의 고통은 선량한 주체를 돋보이게 하기 위한 들러리로 쉽게 소비된다. (546쪽)

 셋째, 이 적선의 구도에서 타자의 고통이 소비될 때, 주체가 도와줄 마음이 들 만틈 괴롭고 불행해야 하므로 타자의 고통은 늘 과도하게 재현된다. (547쪽)


   (...) 어떤 고통과 괴로움이 더 많은 발언권을 얻는가의 문제, 즉 고통의 형식과 내용을 인정하느냐 여부를 둘러싼 차별은 "권력 분배의 핵심적 기제"다. "공적 자원에 더 많이 접근할 수 있는 주체일수록 공적 영역 안에서 상처의 서사를 동원할 능력에 더 많이 접근"할 수 있는 것이다. 타자들이 자신의 고통을 인정받기 위한 자격 조건을 두고 고군분투하는 동안 규범적 주체 위치를 점한 자들은 너무도 쉽게 고통의 진정성을 인정받는다.  - 550쪽 



 2) 증오의 정치학 : 남 탓의 정당화


   우리는 감정을 통해 "사회적 규범들에 투자"한다. (...) 감정은 국가나 종교 같은 커다란 구조에 자신을 동일시하여 자아를 수립할 수 있는 각본을 제공한다. (...) 여기서 주목할 것은 이 증오라는 감정의 작동에 '사랑'과 '피해자 의식'이 딸려온다는 점이다. 증오와 혐오를 쏟아내는 집단들은 자기네가 하는 것이 '혐오'가 아니라 '사랑'이라고 주장한다. (...) 이 자기애적 각본에서 규범적 주체들은 '나는 좋은 사람인데 너 때문에 이렇게 됐다'는 식으로, 내 안에 끓어오르는 이 증오 감정의 원인을 타자에게 귀속시킴으로써 스스로를 피해자화한다. 

 (...) 증오의 대상을 특정할 수 없어서 증오하지 못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는다. 반대로 증오의 대상을 특정할 수 없기 때문에 증오가 일상화된다. 언제 닥칠지 모르는 위협에 대비해 모든 사회적 타자를 적으로 간주하고 방어 태세로 있어야 한다는 것이 바로 증오가 작동하는 방식인 것이다.  - 554~557쪽


 

 3) 행복과 불행의 정치학 

  (1) "부적절한 방식으로 행복할 자유"

   

   (...) "불행할 자유는 부적절한 방식으로 행복할 자유를 포함할 것이다." 

   (...) 아메드는 행복을 우리가 반드시 쟁취해야 할 궁극의 목표로 여기지 말고 그저 우리가 삶에서 마주칠 수 있는 수많은 가능성 중 하나로 보자고 제안한다. 그리고 불행은 단순한 상태가 아니라 자신에게 부과되고 강제되는 것들을 판단하여 거기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뜻을 정서적으로 피력하는 의사표시로 보자고 제안한다. "괴로워한다는 건, 좋다고 판단되어왔던 것들에 당신은 동의하지 않는다고 느낀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고통은 "행동할 역량을 고양시킬 수 있는 감수성"이 될 수 있다.  - 562쪽 



 4) 슬픔의 정치학 : 타자의 고통을 가로채지 않는 애도의 윤리 


  타자의 슬픔과 고통을 내 것인 양 빼앗거나 대상화하지 않기 위해선 무엇보다도 "불가능한 것을 듣는 법을 배워야" 한다. (...) 적어도 최소한 지켜야 할 조건이 있다. "우리가 우리 것이라 주장할 수 없는 고통에 반응할 수 있"어야 하고, "타자들의 고통이 마치 우리의 감정에 관한 것인 양, 혹은 타자들의 기분을 느낄 수 있는 우리의 능력에 관한 것인 양 증언을 타자들로부터 떼어놓는 방식이어서는 안 된다."  - 572쪽 



 각주144) (...) 아이러니한 것은 성폭력 범죄의 남성 가해자가 붙잡힐 때마다 등장하는 '모범적인 사람' 담론이다. 범죄자가 겉보기에 모범적인 학생이나 직장인이라면, 모범적으로 보이는 그 어떤 남자라도 사실은 성폭력.성착취 가해자가 될 수 있다는 사회적 경각심을 갖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텐데 이 담론은 정반대로 가해자를 비호하는 데 사용된다. '그토록 모범적인 사람이 그런 짓을 할 리가 없다'면서 피해 사실 자체를 부인하는 식으로 기능하는 것이다. 또한 이는 '그 짓만 빼면 훌륭하고 모범적인 사람'이란 메시지를 강력히 전달하면서 여성 대상 범죄를 '실수'로 축소하고, 피해자들이 정당한 처벌과 피해보상을 생각할 수도 없게 가해자와 합의하고 고소를 취하하도록 여론을 몰아가는 역할을 한다. '정신질환자'와 '모범적 사람'이란 재현은 서로 모순되어 보여도, 남성 일반이 집단적으로 벌여온 여성 혐오(그리고 이와 긴밀한 연관이 있는 성소수자 혐오) 폭력의 구조적 문제를 효과적으로 은폐하는 공통된 효과를 낳는다.  - 606, 60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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