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사랑스러운 방해자>- 이 제목 봤을 때, 우리 집에도 있어, 방해자! 이건 내 얘기일 거야, 라고 생각하신 분 손 드세요. 저요(손). 이 책은 창조적 직업을 가진 여성들의 이야기를 통해 '창조성'과 '모성'의 충돌과 그 사이를 헤쳐나가며 "숲속에서 길을 잃고 스스로 길을 발견하는"(53쪽) (주로) 작가들에 관한 이야기다. 나는 엄밀히 말해 '창조'하는 직업을 가지고 있지 않지만, 창조의 개념을 넓게 볼 때 어느 정도는 일상적으로 창조를 위해 애쓰고 있는 사람/어머니로서 - 업무에도 일정 부분 창조성이 필요하다, 또한 리뷰 하나를 쓰기 위해 끙끙대는 시간들 - "내 이야긴데?" 하는 지점들을 다수 발견한다.
예컨대 이런 부분.
양육의 경험은 종종 분열(disintegration)처럼 느껴질 때가 많다. (...) 버레이처는 "아이가 가하는 지속적인 공격"이 양육을 한층 복잡하게 만든다고 말한다. 이 같은 공격은 그야말로 "엄마의 말하기"와 "사고하고 성찰하고 잠자고 이동하고 맡은 일을 완수하는 것을 끊임없이 방해받아 구멍이 숭숭 난 자기 서사" 안으로 난입한다. 결국 근본적으로 일관성 없는 일련의 분절된 경험만이 덩그러니 남게 된다. (38쪽)
'분열'이야말로 일하는 엄마가 되면서 내가 느낀 가장 심각한 변화다. 나는 내 자아가 쪼개지는 것을 느낀다. 한쪽에는 사회 속에 내 자리를 가진 직업인으로서의 내가, 한쪽에는 아이의 똥을 닦아주며 동요를 불러주는 내가 있다. 아이가 없는 경우에도 업무와 사생활을 똑 부러지게 분리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는 퇴근 후에도 업무 연락을 받거나 업무에 관해 고민하고, 출근 후에도 이런저런 사적인 고민을 놓지 못한다. 그런데 아이가 생기면 그 분리는 거의 불가능해지는데, 위 인용문에서 말한 "공격"이라는 표현이 적합하다. 나의 생각이나 고민, 일 처리가 아이에 의해 수시로 방해를 받는 것은 물론이고, 회사에 출근해서도 어린이집에서 걸려온 전화에 가슴이 덜컥하거나 학원 일정을 조율해야 하는 등 내가 임의로 미루거나 조절할 수 없는 방해가 일상적으로 일어난다. 더 큰 문제는, 행위에 있어서는 분리가 더 어려우면서도, 존재에 있어서는 양자가 더 멀어져 있다는 점이다. 즉, 직장인인 나와 일상의 나 사이의 간격보다 직장인인 나와 엄마인 나 사이의 간격은 훨씬 넓다. 그 넓은 간격 사이를 수시로 왔다 갔다 하는 것은, 전혀 다른 두 가지 업무를 수시로 지시받아 교차수행할 때와 비슷하게 심한 피로감과 효율성 저하를 불러온다.
그로 인해 나타나는 가장 좋지 않은 결과가 "죄책감"이다. 이 부정적인 감정은 "구멍이 숭숭 난 자기 서사" 안에 쉽게 침입해 들어온다. 내가 어쩌자고 아이를 낳았을까? 내가 얼마나 잘났다고 아이에게 최선을 다하지 못한 채 일에 매달려 있나? 아이가 어딘가 잘못되면, 그건 다 아이 곁에 없었던 내 탓이 아닐까?
그리고 이런 내용.
"모성은 하나의 정체성이다. 모성으로 나아가는 과정은 성인기에 발생하는 정체성 변화 가운데 가장 심대하다." <부모와 다른 아이들>의 저자 앤드루 솔로몬은 2013년에 발표한 심리학 박사논문에서 부모가 된 여성이 두 가지 새로운 관계에 대처하게 된다고 지적한다. 첫째는 아이와의 관계이고, 둘째는 엄마가 된 스스로와 맺는 관계다. 이 같은 관계를 형성하는 일, 나아가 창작자 엄마로서 자기 직업과 맺는 관계를 재구축하는 일은 한 인간으로서 아이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으며 모성에 대한 기대는 어떤 것인지 자기 자신을 재정의하는 일과 연관된다. (52쪽)
자기 자신을 재정의하는 일. 한마디로 다시 태어나는 일이다.
권정민 작가의 <엄마도감>의 첫 장면은 이렇게 시작한다.
"엄마가 태어났습니다. 나와 함께."
사람은 일생 동안 나이에 따라, 상황에 따라 변화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그런데 '사람'에서 '엄마'가 되는 일은 뭐가 더 어려울까? 옛날처럼 집안에서 여러 형제가 함께 자라며 동생들을 돌보고 집안일을 하다가 바로 시집 가서 아이를 낳고 키우면 더 수월했을까? 어떤 면에서는 그랬을 것이다. 기대하는 역할, 수행하는 역할이 일치하니까. 반면, 양육과 전혀 관계 없는 삶을 살던 사람이 엄마가 되는 일은 앞서 말한 '격차' 때문에 낯설고 어려울 수 있다. 많은 이들이 새삼 깨닫는다. 내가 이렇게 혼자 있고 싶어하는 사람이었나? 내가 이렇게 조용한 시간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었나? 내가 이렇게 고차원의 대화와 우아한 식사시간을 그리워하는 사람이었나?
약 1년 전 쓴 글에서 고백한 바 있다. 어렵게 마련한 나의 소중한 아침시간을 방해하는 둘째에 대해서. 하지만 둘쨰의 방해 자체를 루틴의 하나로 받아들이기로 마음먹고 나니 마음이 편안해졌다고. 그렇지만 <나의 사랑스러운 방해자>에서 버레이처가 던진 화두, "부단한 탐사를 거쳐 재발견된 환경"에서 벌어지는 모성적인 무언가와의 분투는 나름대로 생산적인 것이 아닐까?"(39쪽)에 대하여, 나는 다소 회의적인 눈길을 보낸다. 그렇게 행해진 '분투'에서 분명 뭔가를 얻을 수는 있다. 자기 자신에 대한 새로운 자각, 나아가 아이와 보내는 시간 자체를 통해서 얻을 수 있는 신선한 시각과 영감. 그렇지만, 자각과 시각과 영감을 모아 무언가를 창조해 내기 위해서는 결국 고독이 필요하다... 자유가... 그리고 (고독하며 자유로운)시간!! 시간이 필요하다. 절대적으로.
이 책 서두에서 보여준 "코르크판으로 모든 틈을 막은 방에 처박혀 침대에서 글을 끼적인 프루스트. 자기만의 탑에서 내려오다가 본인의 두 자녀와 마주치고는 의아하다는 듯 이렇게 물은 예이츠. '얘들은 누구지?', 음식 냄새의 미묘한 변화마저 사고를 방해할까 봐 수 주 동안 스위스 치즈 샌드위치만 먹은 비트겐슈타인."(25,26쪽)의 이미지는 직업인과 엄마 사이의 간격보다 더 넓은, 어질어질 해질 정도의 격차를 ('모성'과 사이에) 느끼게 한다.
그런데 내가 더 많은 글을 읽고 쓸수록 한 가지 사실이 점차 명확해졌다. 양육과 창조성이 만나는 장소는 정체성들의 교차점이 아니라 일종의 네거티브 공간, 즉 불가능성의 자리처럼 보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 정신분석 이론가 리사 버레이처가 말한 "지적인 노동과 모성적 노동(maternal labor)은 왜 서로를 지워버리는 것처럼 보이는지 그 이유에 대한 난제"와 마주한 것이다. (30,31)
이 책에서는 "창조적 모성"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왜 '모성'이어야 하는가? 양육이 문제라면, 양육을 담당하는 부성 또한 창조력과 씨름하게 되지 않을까? 나는 어느 정도는 그럴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임신과 출산에서부터 이어지는 일련의 과정 속에서 모체가 담당하는 역할(수정을 제외하면 전부다)을 생각할 때, 나아가 '모성'과 '어머니'에 대한 사회의 기대치와 아이의 기대치를 생각할 때, '모성'과 '부성'을 동등한 자리에 놓기는 무리다. 특히 이 책은 1900년대에 주로 활동한 여성 작가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고, 애초에 임신과 출산에 있어서 선택의 가능성이 지금보다 훨씬 적었기 때문에, 이들의 작품을 이해할 때에는 '모성'의 개념으로 접근하는 편이 나을 수 있다.
이 책이 하려는 이야기 중 하나는 어떻게 모성이 우발적 사고이자 의무에서 하나의 선택이 되었으며, 그것이 여성들의 삶에 얼마나 심오한 영향을 끼쳐왔는지에 관한 것이다. 여성 작가들의 커리어에 관해 읽을 때, 그들이 얼마나 적은 선택지를 갖고 있었는지 기억하는 것은 필수다. 앨리스 닐이 그녀의 첫 결혼에 관해 말했던 것처럼, "처음에 나는 아이들을 원치 않았다. 아이들은 그냥 생겼다." (67쪽)
가장 처음 등장하는 예술가는 화가 '앨리스 닐(1900~1984)'이다. 자세한 내용은 나중에 다시 정리하기로 하고, 이 파격적이고 자유로운 영혼에게도 결혼과 출산, 양육은 끊임없는 투쟁의 연속이었음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앨리스 닐은 점차 주변 가족들을 자신의 예술에 동참하게 하면서, 예술과 모성을 조화롭게 유지하는 방법을 찾아낸 것 같다.
토니 모리슨의 <술라>에서는 흑인 여성과 딸이 기차 여행을 하던 중, 흑인출입이 가능한 화장실을 찾지 못해 노상에쭈그려 소변을 보는 장면이 나온다. 흑인들은 더했겠지만, 백인 여성들에게도 어려움이 있었던가 보다. 공중화장실 출입이 페미니즘 이슈였던 시절, 앨리스는 한 학술대회에서 치마를 들어 올리고 바닥에 오줌을 누면서 급한 볼일 때문에 안절부절하는 상황을 즉석 시위로 전환시키기도 했다."(110쪽)
이 책의 라인업은 화려하다.
앨리스 닐을 시작으로, 도리스 레싱, 어슐러 르 귄, 오드리 로드, 수전 손태그, 앨리스 워커, 앤절라 카터.
이들이 창조를 위해 어떤 분투를 했는지 살펴볼 앞으로의 여정이 몹시 기대된다.
'엄마'와 '영웅'이라는 단어를 함께 입에 올리면, 대부분은 자기희생의 이미지를 당연하다는 듯이 떠올릴 것이다. 그러나 창조적 모성은 그런 종류의 이야기가 아니다. 투쟁이나 구원에 대한 이야기도 아니다. 창조적 모성은 자기발견의 여정에 나선 어느 중심인물의 이야기다. 그녀는 빵 부스러기(그러니까 일화와 종잡을 수 없는 여러 순간)로 표시한 길을 따라 나선 뒤로 지하 세계까지 떨어졌다가 되돌아온다. 숲속에서 길을 잃고 스스로 길을 발견하는 주인공이다. (...) 그리하여 나는 반란의 정신으로, 말소에 대한 거부로, 제 어머니를 알아보지 못한 젊은 오이디푸스를 향한 일격으로, 엄마들의 이야기를 영웅담으로 써내려 가려고 애썼다. (5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