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름을 꿰뚫는 세계사 독해 - 복잡한 현대를 이해하기 위한 최소한의 역사
사토 마사루 지음, 신정원 옮김 / 역사의아침(위즈덤하우스)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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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세계사에도 무지하다. (도대체 아는 게 없다) 덜컥 집어든 책이었는데, 세계사 책이 이렇게 재밌을 줄이야. 채사장이 세계사 책을 썼다면 이렇지 않았을까? 간결하고 명쾌할뿐더러 단번에 핵심을 푹 찌른다.

 

왜 역사를 공부하는가? 현대를 인식하기 위해서다. 사토 마사루는 세계사를 아날로지로 해석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아날로지란 유비또는 유추로 해석된다. 역사는 반복된다. 역사의 흐름을 아날로지적으로 바라볼 수 있다면 앞으로 전개될 국제정세 역시 내다 볼 수 있다. 사토 마사루가 제시하는 아날로지적 사고 훈련에는 또 다른 목적이 있다. 전쟁을 저지하기 위해서다. 사토 마사루가 파악한 아날로지적 관점으로 보자면 곧 세계 전쟁이 터질 것이다. 가라타니 고진, 유발 하라리 등 전 세계 석학들이 약속이나 한 듯 합창이다. 세계 전쟁이 임박해 있다고.

 

나치에 의해 유대인 600만 명이 학살되길 원했던 사람들은 몇 명이나 될까? 6.25 전쟁 전후에 이승만, 미군정에 의한 백 만명의 민간인 학살을 원했던 사람들은 몇 명이나 될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학살을 원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사건은 일어나고야 말았다.

 

그런 유아적인 발상을 갖고 살아도 용납되지 않는,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은 일어납니다. 과거에도 그랬고, 현재도, 또 앞으로도 일어날 것입니다. 그래서 현실과 타협할 작정입니까? 어차피 힘 있는 자들의 세상인데 미련하게 사서 고생하느니 속 편하게 안주하는 얼뜨기가 되겠습니까?”

 

- 사사키 아타루, <춤춰라, 우리의 밤을, 그리고 이 세계에 오는 아침을 맞이하라> P138.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듯 일어나서 안 될 일은 일어났고, 지금도 일어나고 있고, 앞으로도 일어날 것이다. 자신이 원하지 않는다고 해서 현실을 거부하는 태도가 과연 옳은 일일까? 임박한 전쟁의 위협을, 단지 SF소설로 치부하는 이들. 사사키 아타루의 표현을 빌리자면 얼간이.

 

그렇다면 세계전쟁이 임박해 있다는 사토 마사루의 근거는 도대체 뭘까? 사토 마사루는 네 가지 이유를 꼽는다. 신제국주의의 발흥, 자본주의의 위기, 되살아나는 내셔널리즘, 종교 분쟁.

 

사토 마사루는 현재를 신제국주의의 시기로 파악한다. 사토 마사루에 따르면, 2008년 이후 본격적인 신제국주의의 시기로 접어들었다. 리먼 브라더스의 파산 이후 미국의 패권이 약화되었다. 반면에 이를 틈타 러시아와 중국이 부상한다. 2008년은 리먼 브라더스가 파산한 해일뿐 만 아니라 러시아-조지아 전쟁이 발발한 해이기도 하다. 이 해를 기점으로 피너클 제도(센카쿠 열도), 스프래틀리 제도, 파라셀 제도를 둘러싼 중국의 영유권 주장, 우크라이나 내전, 러시아의 크림 반도 합병 등의 사건이 벌어졌다.

 

(스프래틀리 제도의 경우, 중국, 타이완, 말레이시아, 배트남, 브루나이 필리핀이, 파라셀 제도의 경우 중국, 타이완, 배트남이 각기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다. 20162월 미국은 중국이 남중국해에 방공식별구역을 설정하지 말 것을 경고한 바 있다.)

 

사토 마사루에 따르면, 패권국가의 약화가 제국주의를 불러온다. 작금의 국제 정세는 영국이 약해지자 독일과 미국이 대두, 구제국주의 시대가 도래했던 것과 비슷한 상황이라는 것이다. (이후 제 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자본주의의 위기

 

마르크스에 따르면 자본주의는 필연적으로 공황을 불러온다. 실제로 1873년 대불황이 구미를 덮쳤다. 불황은 1896년까지 이어졌다. 대불황을 계기로 구미 열강에 제국주의가 급속히 형성되어갔다. 공황을 피하기 위한 가장 손쉬운 해결책은? 당연히 전쟁이었다. 현재 역시 전 세계적인 공황 상태다. 완곡히 표현하면 저성장. 두 번째 해결책은 보호주의였다. 사토 마사루에 따르면, 현재 모든 강대국이 입으로만 자유무역이지 실제로는 보호주의를 도모하고 있다고 본다.

 

내셔널리즘의 부활


2014년 우크라이나 내전이 발발했다. 우크라이나 서부와 동부, 남부는 역사가 완전히 다르다고 한다. 폴란드에 인접한 우크라이나 서부는 18세기만 해도 폴란드에 속했다. 종교도 우니아트교(동방귀일교회)를 믿는다. 반면 우크라이나 동부와 남부는 러시아에 인접해 있어, 종교 역시 러시아정교를 믿는다. 서부는 독립을 주장하고 EU에 편입되길 원하고, 반면 동부와 남부는 러시아에 통합되기를 바란다.

 

거의 북아일랜드와 잉글랜드의 경우와 판박이다. 2014년 스코틀랜드 독립에 대한 찬반 주민투표가 있었다. 투표 결과 스코틀랜드는 계속 잉글랜드와 통합을 유지하게 된다. 스코틀랜드 문제는 나중에 다시 살펴보겠다.

 

종교 분쟁

 

 

이슬람 수니파 무장집단인 IS가 문제다. 이슬람 과격파는 대부분 수니파인 한발리파에 속한다고 한다. 이 한발리파 가운데 와하브파가 있다. 이 와하브파와 결합된 국가가 사우디아라비아다. 북아프리카의 이슬람 마그레브 알카에다, 체첸의 테러 단체,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 등 이슬람 과격파는 모두 와하브파 계통이라고 한다.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를 지배하는 수니파 원리주의 과격파인 하마스의 사상 역시 IS와 탈레반과 같다.

 

EU는 단순히 유럽경제 연합체라고만 알고 있었건만. EU에는 코퍼스 크리스티아눔이라는 개념이 있다. 번역하자면 기독교 공동체. 그래서 러시아나 터키의 가입이 여의치 않았던 것이다.


 

자 그럼 이 책을 기반으로 최근에 벌어진 국제 정세를 정리해 볼까? 세계 전쟁의 기미는 완화되었는가

불행하게도 전혀 그렇지 않다.

 

1. 브렉시티

 

영국이 EU에서 떨어져 나갔다. 이 브렉시티 건은 신제국주의의 부상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민자 문제에 따른 극우주의, 자본주의의 위기 등등. 그러나, 가장 심각한 것은 내셔널리즘의 부활이다. 영국을 신호탄으로 여러 나라들이 독일 중심의 EU를 탈퇴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영국만 해도 골치 아프다. 당장 북아일랜드가 독립을 원하고 있고, 스코틀랜드 역시 독립에 대한 찬반 재투표를 요구하고 있다. 영국이 완전히 쪼개지기 일보 직전이다. 왜 이것이 문제일까?

 

영국의 경제학자 J.A 홉슨은 그의 저서 <제국주의론>에서 일정한 조건 하에서라면 전쟁을 피할 수 있다고 말했다. 홉슨은 제국주의국가 사이의 세력 균형을 지향한다면 전쟁을 막을 수 있다고 보았다. 앵글로색슨연합, 범게르만연합, 범슬라브연합, 범라틴연합과 같이 제국주의 국가 연합이 형성된다면 각각의 세력의 균형에 의해 전쟁에 이르지 않을 것이라는 것. EU는 경제적으로 보자면 독일 제국주의였다. 이 연합이 깨졌다. 종교적으로 보자면 기독교 연합이 깨진 것이다. 반면에 이슬람 연합은 공고하다. IS 탈레반 하마스 등등.

 

2. 남중국해 위기

 

스프래틀리 제도, 파라셀 제도, 이른바 남중국해에서 중국은 영유권을 주장해왔다. 올해 712일 네덜란드 헤이그 상설재판소는 필리핀의 손을 들어줬다. 중국은 닭 쫓던 개 된 것? 전혀 그렇지 않다. 중국은 판결에 승복하길 거부했다. 남중국해 상공으론 전투기를 띄우고 해상에는 핵잠수함을 띄웠다. 심지어 주권을 침해했다며 필리핀 어선의 조업을 막았다.

 

미국과 중국의 패권싸움이 점입가경이다.

 

3. 일본, 전쟁국가로

 

710일 실시된 참의원 선거에서 자민당이 압승했다. 일본은 알려진 대로 전쟁을 할 수 없는 나라다. 평화헌법 9조 때문인데, 아베는 이 평화헌법 9를 뜯어 고치려 발악을 해왔다. 불행히도 이번 선거에서 자민당이 압승했기에, 이제 곧 개헌에 들어갈 것이고, 개헌이 된다면 일본은 전쟁을 일으킬 수 있다. 미국 입장에서야 러시아와 중국이 하도 설치니, 사냥개 일본의 목줄을 풀어 놓을 수밖에. 일본은 곧장 중국과 러시아를 향해 달려들까? 그보다 약한 북한이 있는데??

 

4. 한국의 사드 배치

 

여러 군사전문가와 지식인들이 누누이 얘기해왔지만 사드 배치는 북한과 눈곱만큼도 관련이 없다. 국민을 바보로 아나. 북한 때문에 사드를 놓아야 한다는 사람을 뭐라 부른다? 얼간이라고 부른다. 설령 북한이 한국을 향해 미사일을 쏘더라도 사드로는 막을 수가 없다고. 이 멍청한 것들아!! 사드는 100% 중국과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한 미국의 조치다. 아무리 미국의 속국이라지만 외교를 이따위로 하나? 사드배치는 한국의 국익에 눈곱만큼도 도움이 안 된다. 도움은커녕 전쟁의 위험성만 높이는 짓거리다. 이승만은 허구헌날 북진통일론을 부르짖었다. 북한군 쳐들어오자 어떻게 했더라? 지 혼자 도망가고, 다리 폭파해 수 만명을 폭살시켰다.


 

한국인들이야말로 최근의 국제 정세에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이제 전쟁은 더 이상 남의 일이 아니다. 사드 배치가 실현된다면 한반도에서 강대국의 대리전이 벌어질 확률이 높다. 그렇다면 1950년과 마찬가지로 한반도는 폐허가 될 지도 모른다. 당시 미군은 한반도에 핵폭탄 40개를 심어논 걸로 알려져 있고, 트루먼, 아이젠하워, 맥아더는 한반도에서 핵폭탄을 터트릴 것을 고려했었다. 만일 이번에 한반도에서 전쟁이 터진다면 굳이 핵폭탄을 쓰지 않아도 핵은 누출될 것이다. 1950년 대에 없었던 핵발전소가 수도 없이 깔려있기 때문에.

 

나는 새누리당이 내년 대선을 포기한 것 같아 섬찟하다. 도대체 뭘 믿고? 사드 배치 시기가 묘하다. 만일 새누리당이 대선에서 승리할 수 없다면?? 625전쟁을 일으킨 김일성과 이승만은 전쟁 후에 정적들을 해치우고 오히려 체제를 더욱 더 공고히했다. 그래서인가? 찢어죽여도 시원찮을 이승만을 국부로 떠드는 건?? .

 

남북 간의 화해는 동아시아 평화에 굉장히 중요한 요인이다.

새누리당과 박근혜 정부는 개성공단을 폐쇄하면서 오히려 남북 간의 위기를 조장하기 바쁘다.


한국의 사드 배치는 무조건 막아야 한다.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막아야한다.


세계 전쟁이 여전히 딴 나라 얘기처럼 들린다면.....

이 책을 읽으시라.

 

그래서 저는 다음에 일어날 세계 전쟁을 막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다음에 일어날 전쟁은 자본과 국가가 생존을 위해 일으키는 것이니까 그것을 막는 것은 곧 자본과 국가의 연명을 저지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평화 운동과 혁명 운동은 별개라고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제가 말하는 평화는 단지 전쟁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칸트가 말하는 영구평화와 마찬가지로 국가 간의 적대성이 없어진 상태, 즉 국가가 지양된 상태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한 평화를 실현하는 것이 바로 세계동시혁명입니다.


미국이 물러서지 않으면 동아시아의 재구축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뒤집어 보면 미국은 그 점을 가장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언제나 중국과 북한의 군사적 위협을 부추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단순히 반미 운동을 하는 것만으로는 미국을 아시아에서 내쫓을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 동아시아에서 미국 이외에 전쟁의 위기를 초래하는 요소는 없다고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상태를 적극적으로 만들어내야 합니다. 예를 들어 남북의 대립을 해소하는 것은 동아시아 전체로 보았을 때 매우 중요합니다.

 

- 가라타니 고진, <가능성의 중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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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5. 영국 역사가 에릭 홉스봅은 프랑스혁명이 일어난 1789년부터 1914년까지를 장기 19세기’, 1914년부터 소련이 붕괴한 1991년까지를 단기 20세기라고 명명하였다. 장기 19세기는 계몽의 시대, 진보의 시대를 가리킨다.

 

나아가 홉스봄은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을 아울러 ‘20세기의 31년 전쟁이라 파악했다. 31년 전쟁이 벌어진 기간은 유럽과 미국의 자유주의와 민주주의가 심각한 위기를 맞이한 시대였다.

 

p19. 2001911일 미국에서 일어난 동시다발테러, 2003년 이라크전쟁을 기점으로 전개된 시리아 내전과 우크라이나 위기, IS의 위협에 이르기까지 인류가 전쟁과 분쟁을 일으키지 않았던 시기는 한순간도 없었다. 2008년의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유럽 사회도 점차 불안정해지는 추세다. 2014522일부터 25일까지 EU 28개국에서 진행된 유럽의회 선거 결과, 프랑스의 국민전선, 영국의 영국독립당, 덴마크의 덴마크 인민당 등 반이민과 반EU를 기치로 내건 극우세력의 의석이 늘었다. 영국에서는 스코틀랜드 독립 문제가 불거졌고, 벨기에에서도 남북 대립이 격렬해지면서 북부인 플랑드르 지방 독립을 꾀하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일본 또한 영토 문제를 둘러싸고 주변 국가들과 긴장을 높여가는 중이다. 특히 오키나와 현의 센카쿠 열도를 둘러싼 오해와 도발을 계기로 중국과 일본이 무력 충돌할 위험이 있다.

 

P19. 핵 이외의 병기를 써서 전쟁을 해도 사망자는 나온다. 우크라이나 분쟁으로 2014년에 약 2,500명이 죽었다. 2008년의 가자 지구 공습에서도 2,000명 정도의 사망자가 나왔다.

 

P46. 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17, 레닌의 지도하에 러시아 혁명이 일어났다. 러시아혁명으로 소련식 사회주의체제가 완성되면서 자본주의도 다시금 변모했다. 구체적인 예로 냉전 시대의 자본주의를 들 수 있다. 무슨 뜻인가 하면, 제국주의로 거듭난 자본주의 국가들은 전쟁이 끝난 후 사회주의혁명을 저지하기위해 복지정책이나 실업대책 등 자본의 순수한 이윤 추구에 제동을 거는 정책을 마지못해 도입하게 되었다. ......이와같이 국가가 자본에 강력히 개입하는 자본주의를 마르크스 경제학에서는 국가독점자본주의라고 부른다.

 

실제로 냉전 시기인 1950년대부터 1970년대에 걸쳐 자본주의 진영은 전례없는 경제적 전영을 맞이했다. 홉스봄은 이 시대를 황금 시대라 부르는데, 황금 시대는 동시에 복지국가의 시대이기도 했다. 국가의 대규모 공공사업과 인심 후한 복지정책을 바탕으로 실업률은 낮아지고 수많은 노동자가 풍족한 생활을 누릴 수 있게 된 것이다. ....일부 독자들은 사회주의가 자본주의에 대항하는 개념이라는 이미지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결과를 놓고 보자면, 사회주의는 자본주의가 스스로 개혁할 수 있도록 촉진하는 역할 또한 담당했다.

 

그러나 소련이 붕괴하면서 동서 냉전이 종결된 1991년 이후 상황은 크게 달라졌다. 이때부터 미국의 패권이 완전히 확립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시기부터 인력과 자원이 국경을 초월해 자유로이 이동하는 세계화가 점차 속도를 높여갔다. 구체적으로 보면 복지국가 노선이 막다른 길에 다다르자 신자유주의가 주도권을 쥐게 되었다.

 

신자유주의란, 정부에 의한 사회보장과 재분배는 극도로 배제하고 기업과 개인의 자유경쟁을 추진함으로써 최대한의 성장과 부의 효율적인 분배가 달성된다고 보는 경제학적인 입장을 가리킨다.

 

개인적으로 2008년 즈음을 경계로 국제정세의 조류가 달라지면서 신제국주의 시대로 돌입했다고 생각한다. 리먼 브라더스 사태가 벌어지기 직전인 20088월에 러시아 조지아 전쟁이 발발했다.

 

2008년을 경계로 세계가 신제국주의 시대로 돌입했다는 증거는 얼마든지 꼽을 수 있다. 피너클 제도(센카쿠 열도)와 스프래틀리 제도, 파라셀 제도를 둘러싼 중국의 영유권 주장과 방공식별구역 설정이 구체적인 사례다. 우크라이나 위기, 러시아의 크림 반도 합병도 마찬가지다.

 

(스프래틀리 제도의 경우, 중국, 타이완, 말레이사아, 배트남, 브루나이 필리핀이, 파라셀 제도의 경우 중국, 타이완, 배트남이 각기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다. 20162월 미국은 중국이 남중국해에 방공식별구역을 설정하지 말 것을 경고한 바 있다.)

 

오바마 정권도 눈에 보이지 않는 제국주의의 길 위에서 돌진하는 중인데, 그 상징적인 지역이 남수단과 미얀마. 2011년 석유 자원이 풍부한 남수단을 독립시킨 것은 오바마 정권의 공작이었다. 중국이 남수단의 석유 이권을 무리하게 개발하려 하자 오바마 정권이 남수단에 미국의 괴뢰국가를 세웠던 것이다.

 

중일전쟁에서 일본은 장제스 정권의 중국과 전쟁을 벌였다. 장제스가 이끄는 국민정부는 일본군에 눌려 내륙인 충칭으로 이동했는데, 당시 원장 루트라 불리는 물자 수송로를 통해 병기, 식량 등이 영국령 인도제국에서 충칭으로 운반되었다. 그 가운데는 미얀마를 거치는 루트도 있었다. 요컨대 오바마 정권은 미얀마를 친미 국가로 삼아 지난날의 원정루트를 틀어막았고, 미국의 양해 없이는 중국이 서쪽에 있는 인도양으로 나갈 수 없도록 했으며, 이란에서 파이프라인을 끌어오는 것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P59.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사회의 본질이 무엇이라고 생각했을까? 노동력의 상품화가 그 답이다. 노동력이 상품이 되려면 이중의 자유가 있어야 한다. 첫 번째로는 신분 제약이나 토지의 구속에서 벗어나 자유로이 이동할 수 있어야 한다. 이는 계약을 거부할 자유가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두 번째로는 자신의 토지와 생산수단을 가지고 있지 않아야 한다. 이를 생산수단으로부터의 자유라 부른다. 토지에 얽매여 있지 않아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다. 하지만 토지나 생산수단은 가지고 있지 않다.

 

P64. 이 흐름에 변화가 생긴 것은 1600년에 동인도회사가 설립되어 인도와 무역을 시작하면서다. 그 후 인도에서 캘리코라 불리는 면직물이 수입되어 17세기 후반부터 영국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영국에서도 캘리코에 대항하기 위해 면직물을 만들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캘리코와 경쟁해서 이길 수 있으려면 대량으로 생산해 싸게 팔아야만 했다. 이 캘리코라는 수입 제품과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시작된 것이 산업혁명으로, 이후 면직물을 생산하기 위한 방적기와 직기가 잇다랑 발명되었다.

 

P65 1873년에 시작된 대불황은 소규모의 공황을 반복하며 1896년까지 이어졌다.

 

공황을 설명하는 이론은 과잉생산설이라든가 과소소비설 같은 다양한 설이 존재한다. 더 오래된 설로는 태양흑점설도 있다.....그 가운데 내가 보기에 가장 설득력이 높은 것은 우노 고조가 주장한 자본과잉설이다.

 

(임금 상승, - 기술 혁신- 호황 또 다시 임금 상승 공황)

 

공황은 사회적인 부담을 가중시킨다. 따라서 어떻게 해야 공황을 피할 수 있을 것인지가 근대 자본주의의 과제가 된다. 가장 손쉬운 공황 회피책은 전쟁이다. 2차 세계대전 후 미국에서 본격적인 공황이 발생하지 않은 이유는 미국의 공공사업에 전쟁이 편입되었기 때문이다.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은 미국의 공공사업이었고, 그에 협력한 일본 또한 적어도 버블이 붕괴하기 전까지는 공황에 가까운 불황을 겪지 않았다.

 

현재 미국, 영국, 독일 프랑스 등과 같은 선진 자본주의국가는 겉으로 자유무역체제 옹호를 외치면서도 보호주의로의 전환을 교활하게 도모하고 있다.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푸틴 총리는 유라시아공동체 창설을 제창하고 있는데, 이는 이른바 대동아공영권형태의 경제블록이다.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 또한 본질은 블록경제다.

 

P71 <상설세계사>영국과 독일의 패권 다툼을 제1차 세계대전의 커다란 원인으로 지적하고 있다.

 

러시아의 역사 교과서에서는 전쟁 원인의 대부분이 독일, 오스트리아 블록에 존재한다고 명확히 단정하고 있다.

 

P 75. 레닌은 세계대전이 불가피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레닌이 <제국주의론>을 저술하는 데 토대가 되었던 영국의 경제학자 J.A 홉슨의 <제국주의론>에는 일정한 조건에서라면 전쟁을 피할 수 있다고 적혀 있다......그가 제시한 시나리오는 제국주의국가 사이의 세력 균형을 지향하는 것이었다. 이를테면 앵글로색슨연합, 범게르만연합, 범슬라브연합, 범라틴연합과 같이 광역화된 제국주의 국가연합을 형성해 세계적인 규모에서 세력 균형을 취한다는 발상이다.

 

P82. 역사에는 독일어로 게쉬히테Geschichte’히스토리에Historie’라는 두 가지 개념이 존재한다. 히스토리에는 연대에 따라 사건을 객관적으로 기술하는 편년체를 가리킨다. 이와 달리 게쉬히테는 역사상의 사건의 연쇄에는 반드시 의미가 있다는 태도에 입각해 기술한다.

 

2장 민족문제를 독해하는 비결. 내셔날리즘

 

p94. 정리하면 영국, 프랑스, 스페인, 포르투칼 등 서유럽은 비교적 이른 단계에 주권국가로서의 조건을 갖추기 시작했다. 그러나 중, 동유럽을 포함한 15세기 말의 신성로마제국(독일)은 서유럽과 달리 혼돈 상태였다. 신성로마제국은 네덜란드, 벨기에, 프랑스 동부, 스위스, 오스트리아, 체코 등 상당히 넓은 지역을 아울렀는데, 그 실태는 이름뿐인 국가였다. 황제는 있으나 권력이 없었다. 제국 안에 수백이나 되는 영방국가가 분립되어 있는 상태였다.

 

절대주의 시대가 시작되는 16세기는 합스부르크 가문이 세계사의 중심을 차지한 시대다. 합스부르크 가문은 원래 스위스 동북부의 약소 귀족으로, 통치하는 영토도 변변하지 않았다. 그런데 1273, 합스부르크 가문의 계승자인 루돌프 1세가 느닷없이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선제후들이 루돌프 1세를 왕으로 고른 이유는, 무난하면서도 다루기 쉬운 인물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능력이 뛰어난 인간을 왕으로 삼고 싶어 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들의 부정적인 기대와는 정반대로, 루돌프 1세는 황제로 활약했다. 루돌프 1세의 황제 취임을 기점으로 합스부르크 가문은 역사의 전면에 등장했다. 그리고 1438년 이후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는 사실상 합스부르크 가문이 세습하게 되었다.

 

p97. 루터에서 시작된 가톨릭교회를 향한 비판운동은 유럽 전역을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로 갈랐으며, 이는 내전과 전쟁으로 발전했다. 그 정점에 선 전쟁이 신성로마제국을 무대로 1618년에 시작된 30년 전쟁이다.

 

요컨대 30년 전쟁은 가톨릭 대 프로테스탄트라는 종교 전쟁과, 합스부르크가 대 부르봉가의 대립이라는 두 가지 측면을 지닌 국제전쟁으로 확대되었던 것이다. 30년 전쟁이 끝난 1648년에 종전 처리를 위한 강화회의가 독일 북서부인 베스트팔렌 지방에서 열렸다. 여기서 체결된 조약이 베스트팔렌조약이다.

 

베스트팔렌 조약은 주권국가에 의해 구성되는 유럽이라는 세계의 질서를 창출하고, 전쟁을 초래한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의 긴 대립에 종지부를 찍음으로써 중세와 근대를 가르는 명실상부한 기준점이 되었다.

 

근대적인 네이션은 1789년 프랑스혁명 당시 탄생했다.

 

독일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나폴레옹에게 정복당한 국가들에서는 민족의식과 국민의식의 각성을 촉구하는 내셔널리즘이 싹트기 시작했다.

 

합스부르크가의 오스트리아제국은 현재의 헝가리를 포함하는 당시 최대의 다민족국가였다. 오스트리아제국의 영토는 독일인, 마자르인(헝가리인), 체코인, 폴란드인, 루마니아인, 슬로바키아인, 우크라이나인, 세르비아인, 마케도니아인 등 다수의 민족을 아울렸다. 이들 민족이 19세기의 내셔널리즘 안에서 자치와 독립을 요구하는 움직임을 강화했던 것이다.

 

헝가리는 1867년에 자치를 인정받아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이 성립했다.

 

1877년부터 이듬해까지 벌어진 러시아 튀르크전쟁에서 오스만제국은 남하정책을 펴는 러시아제국에 패했고, 이후 루마니아와 세르비아, 몬테네그로가 오스만제국에게서 독립했다.


1908년에는 오스만제국에서 일어난 혁명의 혼란을 틈타 불가리아가 오스만제국에게서 독립했다. 같은 해 오스트리아가 보스니아 헤르체코비나를 병합했는데, 보스니아 헤르체코비나에는 슬라브족인 세르비아인이 다수 거주했기 때문에 세르비아는 이 병합에 반발했다. 그 후에 발발한 발칸전쟁이 제1차 세계대전의 불씨가 되는데, 러시아 제국을 리더로 하는 범슬라브주의와 독일, 오스트리아제국을 중심으로 하는 범게르만주의 사이의 민족적인 대립이라는 구도를 띠었다.


 













p105. 세계사 교과서나 참고서는 결코 가르쳐주지 않는 강력한 무기를 소개하겠다. 바로 베네딕트 앤더슨, 어니스트 겔너, 앤서니 스미스 세 사람의 내셔널리즘론이다.

 

p106. 먼저 앤더슨의 논의를 소개하겠다. 내셔널리즘 문제를 생각할 때, 원초주의와 도구주의라는 상반되는 두 가지 사고가 있다. 원초주의란, 일본 민족은 2,600년 동안 이어졌다든가 중국 민족의 역사는 5,000년이라든가 하는 식의, 민족에게는 근거가 되는 구체적인 원천이 있다는 실체주의적인 사고다. 이때 구체적인 근거로 거론되는 것은 언어, 혈통, 지역, 경제생활, 종교, 문화적 공통성 같은 것들이다.

 

도구주의는 민족이란 개념을 엘리트들이 만들었다고 보는 사고다. 다시 말해 국가 엘리트가 통치 목적을 위한 도구로 내셔널리즘을 이용한다는 것이다. 이 도구주의의 대표적인 학자가 앤더슨이다. 앤더슨에 따르면, 국민이란 마음속에 이미지로 그려지는 상상의 정치적 공동체다. 이미지일뿐 실체적인 근거는 없다. 우리는 같은 민족이라는 이미지를 모두가 공유함으로써 국민의식이 성립한다는 것이 앤더슨의 생각이었다.

 

그렇다면 같은 민족이라는 이미지는 어떻게 공유되는가? 앤더슨이 강조한 것은 표준어 사용이다. 표준어는 자연스럽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표준어는 어떻게 만들어지는 것일까? 앤더슨은 출판자본주의의 힘이라고 답한다.

 

앤더슨의 논의에서 하나 더 중요한 개념으로 관주도 내셔널리즘official nationalism’이 있다. 이는 도구주의와 관련이 있다.

 

다음으로 소개할 어니스트 겔너 역시 도구주의의 대표적인 학자다. 그의 주요 저서인 <민족과 민주주의><상상의 공동체>와 더불어 내셔널리즘론의 명저다.

 

내셔널리즘 사상이 있고 나서 내셔널리즘 운동이 생겨난 것이 아니라, 내셔널리즘 운동이 있고 나서 내셔널리즘 사상이 생겨났다는 것이다. 그 결과 민족 또는 국민이라 번역되는 네이션이 탄생했다.

 

겔너는 왜 내셔널리즘을 근대 특유의 현상이라고 여겼을까? 산업사회가 아니고서는 문화적인 동질성이 생겨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일본에서 앤더슨이나 겔너만큼의 인지도는 없으나, 앤서니 스미스의 주저인 <내셔널 아이덴티티><네이션의 종족적 기원>은 획기적인 내셔널리즘론이다.

 

스미스는 근대적인 네이션을 형성하는 무언가가 있다고 보았다. 무언가를 나타내는 개념이 고대 그리스어인 에스노스 또는 현대 프랑스어인 에스니ethnie. 그렇다면 에스니란 무엇인가? 스미스는 에스니란 공통의 조상, 역사, 문화, 어떤 특정 영역과의 결합을 지니며 내부에서의 연대감을 소유한, 이름을 가진 인간 집단이라고 정의했다. 스미스에 따르면 근대적인 네이션은 반드시 에스니를 가지고 있다.

 

근대에 체코 민족이 형성된 것은 중세에 체코라는 에스니가 있었기 때문이다. 후스는 그것을 결정화하는 역할을 완수했다. 후스는 스스로를 근대적인 체코 민족이라 여기지 않았다. 체코라는 출신지, 체코어라는 언어와 결합된 자의식이 있었을 따름이다.

 

에스니는 민족의식이 탄생한 후 역사적인 근거로서 사후에 발견된다. 에스니를 발견한 것은 문화 엘리트였다. ....요컨대 에스니가 있기 때문에 네이션이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네이션이 생겨났기 때문에 에스니가 발견되는 것이다.

 

 

 

p125.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했다. 그 결과 오스트리아와 헝가리는 분리되었고, 1918년에 헝가리는 독립했다. 제국은 해체되었으며 체코슬로바키아와 유고슬라비아가 독립했다. 헝가리 왕국의 동부 지역은 루마니아가 차지했다. 앤더슨은 관주도 내셔널리즘의 본질을 민중적 내셔널리즘에 대한 권력 집단의 응전이라고 말한다. (사실 이승만 초기에 대중들에게 인기있었던 체제는 사회주의, 공산주의였다. 그래서 기회주의자 박정희도 빨갱이가 된 것이다. 민중적 내셔널리즘을 대항한 이승만의 응전이 반공주의였던 것) 

 

보헤미아는 오스트리아제국 내에 있는 슬라브족의 연대를 주장했는데, 이를 오스트리아슬라브주의라고 일컫는다. 오스트리아슬라브주의가 드러난 전형적인 사례가 팔라츠키 서간이다.

팔라츠키는 체코의 역사가이자 민족운동의 지도자다.

 

(독일 통일에 대한)입장은 두 가지로 나뉘었다. 오스트리아를 중심으로 독일을 통일하려는 대독일주의, 오스트리아와 나뉘어서 프로이센을 중심으로 통일하려는 소독일주의였다. 보헤미아의 팔라츠키에게도 대독일주의 대표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회의에 참석하라는 요청이 있었다. 이 참석 요청을 거부한 서간이 팔라츠키 서간으로, 체코의 민족운동을 논할 때 가장 중요한 자료다.

 

(팔라츠키)의 주장은 오스트리아에서 독일을 분리해 체코인, 슬로바키아인, 폴란드인, 슬로베니아인과 같은 슬라브계 민족의 연방으로 오스트리아를 재편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것이 오스트리아슬라브주의. 따라서 같은 슬라브족이라 해도 세계 제국을 지향하는 러시아와의 연대는 거부했다. 또한 독일은 독일 내부에서 통합되어야 한다고 여겼으며, 그 과정에 오스트리아제국은 관여하지 않기를 바랐다.

 

p130. 러시아 제국 시대까지의 중앙아시아는 국가가 존재하지 않는 땅이었고, ‘투르키스탄이라 불렀다. ......스탈린은 1920년대부터 1930년대에 걸쳐 투르키스탄에 자의적인 분할선을 그었다.

 

나아가 레닌은 잠재적인 피억압민족으로 중앙아시아의 캅카스의 소수민족을 눈여겨보았고, 무슬림 공산주의자라는 개념을 만들어냈다. 이 무슬림 공산주의자에게 중앙아시아에서 사회주의 혁명을 실행하게 한다는 것이 레닌의 속셈이었다.

 

스탈린은 이슬람원리주의혁명이 확대되는 것에 점점 더 위기를 느꼈다. 그래서 1920년대부터 1930년대까지 위에서부터 여러 민족을 만들어냈다. 다시 말해 투르키스탄을 타지키스탄, 우즈베키스탄, 키리기스, 투르크메니스탄, 카자흐스탄 이렇게 다섯의 민족 공화국으로 분할했다.

 

1990년대의 타지키스탄 내전과 같이 국가가 분열하고 민족별로 국가가 등장해, 서로 지독한 살육을 자행하는 형태로 민족의식이 높아지고 말았다. 이는 내셔널리즘이 인간을 살해하는 사상이 되었음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우크라이나에서 일어난 이 혁명에 이어 20143월에는 우크라이나의 크림자치공화국에서 주민투표가 실시되었으며, 러시아 편입을 요구했다. 그리고 러시아는 크림자치공화국의 편입을 결정했다. 20144월 이후에는 친러파 세력이 우크라이나 동부를 장악하고 분리독립을 주장했다. 그러자 새 정권은 치안 부대를 투입했으나 사태는 점점 더 혼미해지는 가운데 내전으로 발전했다. 20149, 도네츠크 주와 루간스크 주를 실효 지배하는 친러파와 우크라이나 중앙정부 사이에서 정전협정이 체결되었으나, 무력 충돌이 완전히 종결된 것은 아니다.

 

 

우크라이나 서부의 중심인 갈리시아 지방은 원래 야기에우워 왕조 시기 폴란드왕국의 영토였다. 폴란드는 18세기에 접어들자 지방 귀족의 대립에 주변국이 개입하게 되었고, 결국 18세기 후반 인접 국가였던 러시아,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삼국에 의해 분할되었다. 이때 갈리시아 지방은 오스트리아 제국(훗날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의 합스부르크령이 되었는데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이 제 1차 세계대전에서 패하면서 1918년에 붕괴된 후, 다시 폴란드령이 되었다. 2차 세계대전 때는 독일과 소련이 잇달아 침공했는데, 갈리시아 지방이 정식으로 소련령 우크라이나에 통합된 것은 제2차 세계대전 후의 일이었다. 그때까지는 러시아에 한 번도 지배받은 적이 없던 땅이었다.

 

우크라이나 동부의 역사는 서부와 완전히 다르다. 동부 지역은 17세기에 러시아제국령으로 편입되었고, 1차 세계대전과 러시아혁명을 틈타 독립을 선언했다. 그러나 그 후 내전 상태에 빠졌으며 1920년에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으로 편입되었다. ....종교도 러시아와 마찬가지로 러시아정교회를 믿는다.

 

이와 달리 서부의 우크라이나인들은 우리는 결코 러시아인이 아니며 우크라이나인이다라는 우크라이나 민족의식이 강하다. .....우니아트 교회(동방규일교회, 동방전례가톨릭교회)신자가 다수였다.

 

서우크라이나 루흐(운동)는 기본적으로 우크라이나가 독립하면 핵무기를 보전하면서 대국으로서 러시아에 대항하겠다라는 강경 노선을 채택했다. 서부의 민족주의자들은 러시아의 영향을 배제하고 EU와의 연대를 강화하고자 하는 반면, 동부, 남부는 러시아에 강한 친근감을 나타내며 우크라이나에서의 분리독립에도 긍정적인 주민이 다수 존재한다.

 


여기에는 자기 자신이 영국의 일원이라고 느끼는 유니오니스트(아일랜드 자치에 반대하는 통일당원) 이언과 아일랜드인이라는 사실에 강한 민족 정체성을 가지는 내서널리스트 패트릭이라는 대조적인 두 사람의 청취자 모델이 등장한다.

 

제 이름은 이언입니다. 저는 유니오니스트입니다. 저는 제가 영국의 일원이라고 느끼고 있으며, 아일랜드가 영국의 일부로 계속 존재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저는 패트릭이라고 합니다. 저는 내셔널리스트입니다. 저는 북아일랜드가 영국의 지배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19세기가 되자 아일랜드는 영국의 정식 식민지가 되었다. 19세기 중반에 아일랜드를 덮친 기근으로 약 100만 명이 굶어 죽었지만, 영국 정부는 냉담한 태도를 보였을 따름이다. ...1922년 북부 아일랜드(얼스터 6)는 영국의 일부로 잔류하고 나머지 지역은 아일랜드자유국(1949년에 아일랜드 공화국으로 개칭)으로 독립했다.

 

2014918일에 시행된 스코틀랜드 독립에 대한 찬반을 묻는 주민투표에서도 앞서 살펴본 우크라이나 및 아일랜드와 똑같은 구도를 발견할 수 있다. 1707년의 연합법에 따라 스코틀랜드는 잉글랜드(웨일스 포함)에 병합되었다. 그때까지 스코틀랜드는 독립된 왕국이었다.

 

가령 스코틀랜드가 독립을 가결했다면 어떠했을까? 북해 유전은 스코틀랜드의 배타적 경제수역 내에 있다. 따라서 스코틀랜드가 독립할 경우, 영국은 북해 유전을 상실한다. 영국이 이를 순순히 받아들였을리는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전쟁이 발발하거나, 또는 스코틀랜드 내부에서 잉글랜드 통합파와 스코틀랜드 독립파가 충돌을 빚게 될 것이다.

 

그리스어에는 크로노스카이로스라는 두 가지의 서로 다른 시간 개념이 존재한다. 크로노스란, 매일 흘러가는 시간을 가리킨다. 연표나 시계열로 나타낼 수 있는 시간은 크로노스다. 이와 달리 카이로스는 어느 사건이 일어나기 전과 일어난 후 의미가 달라지는, 크로노스를 잘라내는 시간이다. 영어로는 타이밍(시기)에 해당한다.

 

 

스코틀랜드의 주민투표를 통해 잉글랜드인과 스코틀랜드인은 서로 카이로스가 다르다는 점이 가시화되었다. 주민투표가 시행될 즈음, 영국 정부뿐 아니라 여당과 야당 모두가 독립에 반대했고, ‘독립하면 경제적으로 곤궁해질 것이라며 스코틀랜드에 압력을 가했다. 영국의 이러한 대응에 수많은 스코틀랜드인들은 자신들이 차별당하고 있다는 인식을 품었다.

 

신제국주의가 진행되고 있는 현재, 내셔널리즘이 다시금 소생하고 있다. 합리성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내셔널리즘은 근현대인의 종교라고도 할 수 있다. 종교인 이상, 누구든 무의식 차원이라 하더라도 내셔널리즘을 각자의 내면에 품고 있다. 내셔널리즘의 폭주를 저지하기 위해 역사에는 다양한 견해가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P159. 20146월 이후, 이슬람 수니파 무장집단인 ISIS(이슬람, 시리아 이슬람국가, 이후 이슬람국가 IS로 개칭)가 국제정세를 크게 뒤흔들었다. IS의 확대는 시리아 정세와 관계가 깊다. 시리아 정세를 읽을 때 중요한 키워드가 알라위파다. 시리아의 바샤르 알아사드 정권은 알라위파가 설립했다. 일본 언론들은 알라위파가 시아파 가운데 하나라고 보도했으나, 이 둘은 완전히 다르다. 알라위파는 기독교와 토착 산악종교 등 다양한 요소가 섞여 있는 특수한 토착 종교다. 시리아 국민의 70%는 수니파이며, 알라위파는 10%정도다. 소수에 불과한 알라위파가 시리아를 지배할 수 있었던 이유는 프랑스가 시리아를 위임, 통치하던 시대의 영향 때문이다.

 

1차 세계대전 후 시리아는 프랑스의 위임통치령이 되었다. 프랑스는 시리아를 지배하기 위해 알라위파를 중용했고, 현지 행정과 경찰, 비밀경찰에 알라위파를 임명했다. 식민지를 지배할 때 소수파를 우대하는 것은 상투적인 수단이다. 다수파 민족이나 종교집단을 우대하면 독립운동으로 번질 수 있기 때문에 소수파를 우대함으로써 종주국에 의존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1994년에 제노사이드가 벌어진 르완다에서도 종주국인 벨기에는 소수파인 투치족르 다수파인 후투족보다 더 우대한 바 있다.

 

P161. 그러나 시리아에는 무슬림동포단이 없었다. 현재 알아사드 대통령의 부친인 하페즈 알아사드 전 대통령이 몰살시켰기 때문이다. 사정이 그러한 까닭에, 반체제운동이 일어났어도 통일성을 갖출 기미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결국 시리아는 내전 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나아가 알아사드의 지원을 받아 레바논에서 들어온 시아파의 과격파 무장세력인 헤즈볼라(레바논 이슬람 저항을 위한 신의 당)가 혼란을 가속화시켰다. 덕분에 알아사드 쪽은 세력을 회복할 수 있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시아파에 대항하기 위해 알카에다계 사람들이 시리아에 들어와서 대 혼란에 빠졌다. 여기에 편승한 것이 IS.

 

 

IS는 반체제파를 공격해 자금과 무기를 획득하고, 시리아 북부를 제압해 이라크로 세력을 확대했다. 왜 이라크였을까? 지정학적으로보면 이라크에는 유전이 있다.

 

후세인 정권 시절 이라크는 이란과 대립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독재 치하였다고는 하나 기본적으로는 이라크인이라는 국민의식이 존재했다. 수니파인지 아니면 시아파인지는 그다지 큰 문제가 아니었다. 그런데 신생 이라크에서는 다수파인 시아파가 권력을 쥐었고 수니파는 푸대접을 받았다. IS는 바로 그 지점을 파고들었고, 이라크의 수니파도 IS에 복종하기 시작했다.

 

이 시리아 문제와 이라크 문제가 중동 정세에 어떠한 변화를 가져올 것인가? 핵심은 미국과 이란의 접근에 있다.

 

IS의 침공을 받은 시점에 이라크를 통치하고 있었던 말리키 정권은 쉽게 말해 미국의 괴뢰정권인데, 종교적으로는 이란의 국교인 시아파와 같은 뿌리였던 것이다. 그런 까닭에, 이란 입장에서 현재의 이라크는 지원해야 할 대상이다. ....이란은 반미정권으로 알려져 있으나 온건파인 로하니 대통령이 집권한 후로는 미국에 양보하고 다가서는 자세를 보였다. 그리하여 이번 이라크 문제에서 미국과 이란 양쪽이 이라크를 지원하는 보기 드문 상황이 벌어졌던 것이다.

 

러시아와 미국의 대립이 깊어질수록 IS의 기쁨도 커진다.

 

P164. IS나 알카에다로 대표되는 이슬람원리주의의 특징은 앞서 서술했듯이 단일 칼리프가 지배하는 세계제국 수립을 지향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세계제국 수립을 위한 행동은 반드시 성공을 거둔다. .....이슬람 원리 주의를 위해 행동한 이슬람 혁명이 성공하면, 당연히 성공한 것이다. 한편 그 과정에서 전사하더라도 알라를 위해 싸우다 순교한 셈이므로 저세상에서 행복을 얻는다. 따라서 이 또한 성공한 것이다. 이처럼 이슬람원리주의 교의에 따른다면, 혁명에 참여할 경우 반드시 승리하게 되어 있다.

 

20132, 바티칸에서는 이례적인 사건이 있었다. 교황 베네딕토 16세의 생전 퇴위였다. 같은 해 3월에는 아르헨티나 출신의 새 교황 프란치스코가 즉위했다. ....교황의 생전 퇴위는 1415년 그레고리우스 12세 이후 598년 만에 일어난 사건이다.

 

후스를 화형에 처한 후, 교회는 정립 상태에 있던 교황들을 모두 퇴위시키고 새로운 교황인 마르티노 5세를 선출해 교회의 통일을 회복했다. 따라서 2013년 베네딕토 16세의 퇴위는 가톨릭교회가 당시와 필적할 만한 위기를 인식하고 있음을 시사하는 사건이다.

 

1958년에 요한 23세가 교황에 취임했다. 개혁파였던 요한 23세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를 개최했다. 이는 역사상 처음으로 전 세계 5대륙에서 모인 회의로, 이후 교회개혁의 기점이 되기도 했다. 이 공의회를 통해 이슬람, 프로테스탄트, 무신론자, 공산주의와 대화하겠다는 대화 노선으로 방향이 바뀌었다.

 

2차 바티칸공의회에서 도출된 대화 노선은 폴란드 출신인 요한 바오로 2세가 1978년에 교황에 취임하며 다시 한 번 크게 바뀐다. 그는 중유럽과 동유럽의 사회주의 국가에서 배출된 첫 번째 교황이라는 점에서 커다란 주목을 받았다.

 

바티칸의 세계 전략 첫 단계는 요한 바오로 2세 시대에 공산주의를 붕괴시키는 것이었다. 이 전략은 1991년 소련 붕괴로 실현되었다. 두 번째 단계는 이슬람에 대한 전략이다.

 

바티칸이 이슬람원리주의를 봉쇄하기 위해 내놓은 수단은 대화. ....먼저 이문화와의 대화를 통해 이슬란 온건파를 아군으로 삼는다. 그리고 아군이 된 이슬람교도가 테러 행위를 벌이는 과격파로 인해 우리 이슬람교가 세계의 적으로 몰려서는 안된다. 그러므로 과격파가 물러나기를 바라자라고 여길 수 있도록 유도한다. 대략 이런 시나리오를 그리고 있는 것이다.

 

한편 바티칸 입장에서 이슬람 과격파 다음으로 성가신 존재가 중국이다. 중국 정부는 자국 내 가톨릭 교회의 고위 성직자 인사권이 바티칸에 있음을 인정하지 않는다.

 

 

전근대적인 사고의 특징은 보이는 세계를 통해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보는 것이다. 우리를 포함한 근대인이 보이는 세계를 중시하는 까닭은 이 시대가 존재하는 방식 자체가 근대적인 사고의 제약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경제가 대표적이다.

 

인간의 노동력도 상품화되고,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서 만들어진 상품도 전부 돈응로 환산되며, 그렇게 환산된 돈을 증식하는 일을 목적으로 삼는 것이 자본주의 경제다. 그 같은 자본주의 경제에 젖어들면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를 향한 상상력이나 사고력이 고갈되고 만다. 요컨대 초월적인 것을 사고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초월성의 결여를 메우는 것이 내셔널리즘이다. 인간과 초월성을 적당히 결합하는 것, 다시 말해 초월성으로 가는 지름길이 종교적 원리주의다. 때로는 초월성이 살인을 쉽게 저지르게 만든다.

 

 

P171. 먼저 헤브라이인을 알아야 하는데, 그들은 유일신 야훼에 대한 신앙을 굳게 지키고 있었으며, 그들에게서 선민 사상과 구세주 출현을 바라 마지않는 유대교가 확립되었다. 헤브라이 왕국은 기원전 1000년경에 세워졌다. 이 왕국은 다윗 왕과 솔로몬 왕 치하에서 번영을 구가한 후, 이스라엘 왕국과 유다왕국으로 분열되었다. 이슬라엘 왕국은 기원전 722년에 아시리아에 의해 멸망했다. 유다왕국 또한 신바빌로니아제국의 공격으로 기원전 586년에 멸망했고, 유다왕국의 주민들은 바빌론으로 끌려갔다. 바빌론은 현재의 이라크 중앙에 해당하는 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이것이 바빌론유수라고 불리는 유명한 사건이다.

 

바빌론으로 끌려간 헤브라이인들은 서아시아를 통일한 아케메네스왕조의 페르시아에 의해 해방되었고, 팔레스타인으로 되돌아왔다. 그리고 야훼 신전을 재건했다. 이는 대체로 로마공화정이 시작되는 무렵과 맞물리는 동시에, 유대교가 확립되었다고 보는 시기이기도 하다. 그러나 얼마 못 가 유대교는 율법을 엄격히 지키는 바리새인이 권력을 장악했다. 그들은 로마의 지배하에서 무거운 세금을 부과해 유대 민족을 고통에 빠뜨렸다. 사정이 그러했던 까닭에 민중 사이에 구세주를 바라는 기운이 고조되었다. 그때 등장한 것이 바로 예수였다.

 

로마 제정하에서 기독교는 계속해서 확대되었고, 313년 밀라노칙령에 의해 공인되었을 무렵에는 신자가 300만 명 안팎까지 늘어났다. ....현재 전 세계의 기독교 신자는 대략 20억명이으로 추정된다. 기독교라는 종교를 창출한 사람이 바로 바울이다.

 

문자로 이루어진 헌법은 없으나 영국인들은 헌법이 확실히 존재한다는 감각을 가지고 있다. 그 감각이 저마다의 시대 상황에 맞게 구체적인 문서 형태로 표현되는 것이다. 그렇게 표현된 것인 1215년의 마그나카르타이고, 1689년의 권리장전(국회의 의회의 권리를 명시한 문서)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르네상스는 복고운동이지만 그 중심에는 이성에 대한 신봉이 있었으며, 그러한 의미에서 보았을 때 르네상스는 계몽주의로 이어지는 측면이 있다. 그리고 르네상스에 의해 합리주의적인 요소가 가톨릭으로 들어왔던 것이다. 그런데 16세기 종교개혁에는 계몽주의로 이어지는 요소가 없었다. 도리어 반지성적인 운동으로 보는 편이 옳다. ......종교개혁을 통해 예수가 주창한 소박한 원시 교회로 돌아가자는 것이 16세기의 종교운동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종교개혁은 복고유신 운동인 것이다.

 

예수회는 이 군사력을 바탕으로 프로테스탄트 타도를 목표로 프로테스탄트 정벌 십자군을 준비했다. 그들의 군사력은 막강했던 터라, 보헤미아와 슬로바키아를 석권해 프로테스탄트를 모조리 몰아낸 후 러시아정교회가 있는 우크라이나까지 진입했다.

 

러시아정교회가 그들의 관습을 지키고자 계속해서 저항했기 때문에 교황청은 타협안으로 특별종파를 창설했다. ....이렇게 탄생한 것이 동방전례가톨릭교회, 동방귀일교회, 우니아트교회 등이라 불리는 교회다.

 

현재 러시아는 우니아트 교회에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러시아와 바티칸의 관계가 여전히 긴장 상태에 놓여 있는 것은 이 우니아트 교회를 통해 가톨릭이 러시아 내부를 침식할 가능성을 러시아정교회가 크게 경계하고 있기 때문이다.

 

슐라이어마허는 칸트나 헤겔에 견줄만큼 중요한 인물로 근대 프로테스탄트 신학의 아버지라고도 불린다. 그는 종교의 본질이 직관과 감정이라고 주장했다. 즉 하느님은 마음속에 있다고 여겼던 것이다.

 

신학적으로 슐라이마허가 주창한 신은 마음속에 있다라는 설을 깨뜨린 사람이 현대 신학의 아버지인 칼 바르트다. ......인간은 신이 아니므로 신에 대해 아무것도 알 수 없다. 그러나 설교를 하는 목사는 신을 이야기해야 한다. 그러한 까닭에 신학이란 불가능의 가능성에 도전하는 일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P193. 무함마드가 사망한 후 이슬람교도는 선거를 통해 최고 통치자로서 칼리프를 선출한다. 칼리프란 신의 사도의 대리인이라는 의미다. 4대 칼리프에 선출된 알리는 무함마드의 사촌 동생이자 사위였다. 네 명의 칼리프 중에서 혈통상 무함마드와 가장 가깝다. 이를 근거로 알리와 그의 자손이 진짜 후계자라고 주장하는 당파가 나타났는데, 바로 시아파다. 처음에는 알리의 시아라 불렀으나 알 리가 빠지고 시아로만 불리게 되었다. 이러한 시아파와 달리 수니파는 역대 칼리프를 정통이라 간주하는 이슬람의 다수파다. 무함마드의 관행을 뜻하는 수나에 따르는 자를 의미한다.

 

시아파에서 최고 지도자를 이맘이라 부른다. 알 리가 초대 이맘이며, 알리의 자손이 그 뒤를 이은 이맘이 된다. ......시아파의 주류는 이란에서 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12이맘파다. 열한번째 이맘이 9세기에 죽었을 때, 열두 번째 이맘이 등장했으나 금세 모습을 감추고 말았다. 이렇게 사라진 이맘이 구세주로 나타나 이 세상을 구하리라 교의를 핵시믕로 하는 종파가 12이맘파다.

 

12이맘파의 교의는 현재의 국세정세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바로 이란의 핵무기 문제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핵을 써서 공격해도 사라진 이맘이 나타나 이란을 지켜줄 것이 분명하다고 이란의 지배층이 믿고 있다면, 핵무기 개발과 관련해 이란이 폭주할 가능성도 있다.

 

 

한편 이슬람 과격파는 대부분 수니파인 한발리파에 속해있다. ...이 한발리파 가운데 하나로 와하브파가 있다. 와하브파는 18세기 중반에 중교개혁가인 와하브가 창시했다. 와하브는 사우디아라비아 국왕과 협력해 와하브 왕국을 세웠고, 와하브왕국은 훗날 사우디아라비아왕국의 바탕이 되었다. 그러한 까닭에 사우디아라비아의 국교는 와하브파다.

 

와하브파는 <코란>과 무함마드의 언행록인 <하디스>만 인정한다. 성인 숭배나 참배도 하지 않는다. 무함마드 시대의 원시 이슬람교로 회귀할 것을 주창하며 극단적인 금욕주의를 내세운다. 알카에다가 이 와하브파의 무장단체이며, IS 또한 마찬가지다. 북아프리카의 이슬람 마그레브 알카에다, 체첸의 테러단체, 아프가니스탄의 탈리반 등 이슬람 과격파는 모두 와하브파 계통이다.

 

와하브파와 가까운 것이 프로테스탄트인 칼뱅파다.

 

기독교의 세계관에서 지상은 죄 있는 자로 가득 차 있으므로, 인간 세계에 차별, 억압, 질병, 고통, 빈곤이 존재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상태라 여긴다. 반면 이슬람교의 경우 이라는 영적인 존재가 악한 행위를 저지른다고 여긴다. 내부에 존재하는 악에 대한 반성이 없으므로, 이슬람교를 믿기만 한다면 어떠한 폭력이라도 긍정되는 것이다.

 

16세기, 이슬람의 역사에 중요한 전기가 찾아온다. 1501년 이란에 사파비왕조가 들어선 것이다. 이 사파비왕조는 시아파인 12이맘파를 국교로 정했다. 그 전에는 모로코에서 신장위구르까지가 하나의 이슬람 벨트로 이어져 있었다. 그런데 시아파가 이란을 장악하면서 이 벨트가 끊기고 말았다. 사파비왕조 서쪽에는 오스만제국, 동쪽에는 무굴제국이 자리하고 있었는데, 둘 다 수니파였다. 요컨대 사파비왕조는 수니파의 대국 사이에 샌드위치처럼 낀 형태였다.

 

그렇다면 왜 사파비왕조는 시아파를 국교로 삼았던 것인가? 페르시아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서였다.

전후 이란에서는 친미 성향의 팔레비 국왕이 강권적으로 근대화 정책을 취하며 세속화를 진행했다. 이를 백색혁명이라고 부른다. 백색혁명으로 경제는 성장했으나 격차 확대와 지배층 부패 등 국민의 불만도 커져갔다. 그 결과 시아파 지도자 호메이니의 주도로 이란 혁명이 일어났다. .그 결과, 1979년에 이슬람교를 국가 원리로 하는 이란이슬람공화국이 성립했다.

 

지금의 이란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12이맘파의 이슬람원리주의와 페르시아 제국주의라는 두 가지 측면을 모두 살펴보아야 한다.

 

이란이 수니파 원리주의를 내세운 팔레스타인 무장단체 하마스와 양호한 관계를 구축한 것도 종교적인 동기보다는 페르시아 제국주의적 발상에 기초한 것이다.

 

P199. 팔레스타인은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 모두에게 성지인 곳이다. 지중해 동쪽 연안에 위치한 팔레스타인은 기원전 1000년경에 유대인이 왕국을 건설한 지역의 명칭이다. 옛날에는 가나안이라고도 불렀다.

 

바빌론 유수에서 해방된 이후, 유대인은 팔레스타인에 있는 도시 예루살렘에 신전을 재건했다.

 

기독교입장에서 팔레스타인이 성지인 이유는, 예수가 십자가에 매달렸던 골고다가 예루살렘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슬람교에서는 왜 예루살렘이 성지인가? 이는 무함마드의 승천이라 일컬어지는 전승에서 유래한다. 이슬람 전승에 다르면, 무함마드는 어느 날 밤 천사 가브리엘의 인도를 받으며 예루살렘에 있는 커다란 바위에서 천마에 올라타고 승천해 알라를 알현했다고 한다. 즉 무함마드의 승천 체험의 출발점을 예루살렘이라 여기는 것이다.

 

대부분의 시기에 세 종교는 평화적으로 병존했다. 이곳에서 종교 분쟁이 일어나는 것은 1948년 이슬라엘 건국 이후의 일이다.

 

건국과 동시에 이스라엘과 아랍의 여러 국가 사이에서 제1차 중동전쟁이 일어났고 이스라엘이 승리했다. 그러자 이스라엘은 더욱 영토를 확장했으며, 팔레스타인에서 국가는 오직 이스라엘뿐인 상황이 되었다. 이를 기점으로 네 차례에 이르는 전쟁과 여러 교섭을 거쳐, 지중해에 면한 가자 지구와 내륙의 요르단 강 서안 지구에 팔레스타인 자치구가 생겨났다.

 

현재 이 지역의 가장 큰 문제는, 가자 지구를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수니파 원리주의 과격파인 하마스다. 하마스의 사상은 IS나 탈레반과 같다.

 

가자 지구에 거주하는 일부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하마스에 매료되었다. 하마스와 같은 이슬람원리주의 내부에는 복지를 중시하는 사람들이 다수 존재한다. 그들은 알라 앞에서 인간이 모두 평등하다고 생각하므로 무척 검소하며 가진 것을 동포에게 나누어 준다.

 

현재 하마사의 전략은 요르단 국왕을 타도하는 데 맞추어 있다. 요르단에는 수많은 팔레스타인 난민들이 있기 때문에 하마스는 그들을 동원해 요르단에서 분쟁을 일으키고자 한다. 왜 그런가? 현재 요르단 왕실은 이스라엘과 양호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만약 요르단 왕제가 전복된다면 사우디아라비아, 아랍에미리트 등 페르시아 만 연안의 왕제도 함께 동요할 것이다. 하마스는 그 기회를 틈타 IS와 손을 잡고 중동에 세계 이슬람혁명을 수출할 거점 국가를 건설하려는 것이다.

 

EU의 본질을 이루는, 라틴어로 코퍼스 크리스티아눔이라는 개념이 있다. 코퍼스 크리스티아눔이란 유대 기독교의 일신적 전통, 그리스 고전철학, 로마법의 세 가지 요소로 구성된 이른바 문화 종합체를 가리킨다. 번역하자면 기독교 공동체라는 의미다.

 

EU가 러시아나 우크라이나로 뻗어가지 않은 것은 기독교 공동체가 가톨릭, 프로테스탄트 문화권의 산물이어서 정교회 문화권을 포섭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터키의 EU가입이 여의치 않은 것은 기독교 공동체라는 가치관을 공유하고 있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EU가 탄생한 가장 큰 목적은 내셔널리즘 억제에 있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거치며 너무나도 막대한 규모의 희생자가 나오고 말았다. 독일인이든 프랑스인이든 전쟁만큼은 하고 싶지 않다는 강한 염원이 EU라는 형태의 결정체로 나타난 것이다.

 

P210. 먼저 이슬람원리주의의 신앙 대상과 관습을 존중하고 마찰이 일어나지 않도록 한다. 스탈린은 이슬람법인 샤리아를 존중할 것을 강하게 주장했다. 두 번째로 이슬람계 여러 민족에 존재하는 에스니를 자극해 이슬람교에 대한 귀속의식보다도 민족의식을 강화한다. .....즉 에스니를 자극함으로써 이슬람원리주의의 침투를 막는다는 점이다.

 

P212. 또 하나의 보조선은 소련형 사회주의가 붕괴한 후 자본주의국가가 돈에 대한 통제를 상실하고 있는 상황이다. 사회주의라는 눈에 보이는 위협이 존재했을 때 자본주의국가는 자국에서의 혁명을 저지하기 위해 부유층에게 집중되는 부를 누진세나 법인세로 흡수해 중하층에게 재분배했다. 그러나 공산주의 국가가 붕괴함에 따라 재분배의 필요성이 사라졌다. 그 결과 상위 일부에게 부가 집중되는 극심한 격차가 자본주의 국가를 덮쳤다.

 

이상의 정보를 종합해보자. 먼저 제 1차 세계대전을 통해 제국주의국가가 장악하고 있었던 식민지와 부가 요동쳤다. 그다음으로 사회주의국가가 붕괴함에 따라 자본주의국가의 돈에 대한 통제가 흔들리고 있다. 어느쪽이든 권력기반이 불안정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러시아의 크림 반도 편입과 지금도 여전한 미국의 합리주의 신봉을 보면, 냉전 시대의 양대 대국이 현재 제1차 세계대전 전후의 상황과 흡사한 국면에 놓였음을 이해할 수 있다.

 

첫 번째는 다시 한번 계몽으로 회귀하는 것이다. 인권,존엄,사랑,신뢰 같은 손때 묻은 개념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계속 이야기해야 한다. 즉 바르트가 말하는 불가능의 가능성을 추구하는 것이다. ......계몽주의의 귀결을 반성하고 모든 이념과 개념을 상대화한 결과, 사람들은 아무것도 믿지 못하고 동물적으로만 행동하게 되고 말았다. .....여기서 말하는 근대의 힘이란 앞서 말한 계몽주의다.

 

두 번째는 전근대의 정신, 바꾸어 말하자면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감각을 연마하는 것이다.

 

P222. 그러고는 분필로 칠판에 점을 잔뜩 찍은 뒤 선을 그어 점들을 이은 다음, 후지시로 선생은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 여기에 그린 그림의 의미가 무엇인지 이해하겠습니까? 이 점들은 인간 한 사람 한 사람입니다. 그 인간 하나하나가 저마다 다양한 이들과 서로 관계되어 있어요. 이 세상 안에서 생을 부여받은 사람을 한 명이라도 제외한다면 역사는 성립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헤겔이 말했듯 절대정신이 변증법으로 발전한다는 식의 단순한 흐름을 취하지 않아요. 역사는 훨씬 복잡한 현상입니다. 타인의 마음이 되어 생각하는 것, 타인을 추체험하는 것을 얼마나 거듭했느냐에 따라 역사에 대한 이해의 깊이가 달라집니다. 그리고 역사는 아날로지를 통해 이해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아직 젊으니 제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잘 모를 것입니다. 헤겔이나 마르크스처럼 강력한 세계관에 기초해서 역사를 역동적으로 독해하는 수법에 매력을 느끼리라고 봅니다. 그러나 그러한 철학이나 신학이 어딘가에서 구체적인 인간을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저는 염려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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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사 산책 1950년대편 1권 - 6.25 전쟁에서 4.19 전야까지 한국 현대사 산책 3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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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은 톱질전쟁으로 불렸다. 톱질하듯 왔다갔다하면서 점령과 후퇴를 반복했다는 뜻이다. 전선이 왔다갔다 하면서 죽어나는 건 민간인들이었다.

 

11일 중국군 6개 군단이 38도선을 돌파하여 남하하기 시작한다. 유엔군의 견벽청야작전이 시작된다. 유엔군은 후퇴하면서 서울의 웬만한 곳은 모두 다 불을 질렀다.

 

14일 공산군이 서울에 입성했다. 당시 서울에는 가난하고 오갈 데 없는 노인들 뿐이었다. 치안 공백을 틈타 또 다시 학살이 벌어졌다. 1월 강화도에서 최소 200여명의 민간인이 우익 청년단체에 의해 학살당한다. 부산에서의 피난민의 삶도 아비규환이었다.

 

맥아더는 원자탄 26개를 폭파할 계획을 워싱턴 합참에 요청하지만 트루먼은 거부한다. 워커의 후임으로 리지웨이가 유엔군을 이끌고 반격에 나선다. 리지웨이의 몰살작전이 시작된다. 추위와 굶주림으로 중국군 병사들이 죽어나간다.


 

이승만 정부는 국민방위군 설치법을 공포해, 국민방위군 50만 명을 모집한다. 50만 명을 어떻게 후송할 것인가? 답은 걸어서였다. 징집당한 국민방위군은 군복도 없었고, 제대로 된 식사조차 제공받지 못했다. 행군이 계속되면서 동사, 아사, 병사, 낙오자들이 속출했다. 국민방위군의 모습을 본 리영희는 이렇게 증언한다.

 

인간을, 포로도 아닌 동포를, 이렇게 처참하게 학대할 수 있을까 싶었다. 6.25전쟁의 죄악사에서 으뜸가는 인간 말살 행위였다. 이승만 정권과 그 지배적 인간들, 그 체제 그 이념의 적나라한 증거였다.”

 

이승만 정권과 우익 단체들은 국민 방위군 예산 55억을 빼돌렸다.

 

430국민방위군 설치법 및 비상시 향토방위령의 폐지에 관한 법률안이 상정되어 통과되었다. ‘해골의 행렬을 시켜놓고 이제 귀환하라는 것이었다.

 

7월 김윤근, 윤익헌, 강석한, 박창원, 박기환 등 5명이 사형을 당했다. 국민방위군 예산이 국회 내 이승만 지지세력 및 정부 고위층, 군부 내 간부 등에 정치자금으로 유출되거나 뇌물로 상납되었다는 주장들이 제기되었지만 사건 당사자들이 너무 빨리 사형당하는 바람에 사건의 진상은 밝혀지지 않았다.


한국 병사는 어머니를 부르는 대신 하고 죽었다고 한다. 가진자들은 자식을 군대에 보내지 않았고 빽 없는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만 전쟁터로 나가 총알받이가 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함평에서 524명을 학살한 11사단의 학살극은 2경남 거창군 신원면에서 또 다시 발생했다. 11사단 9연대 3대대는 거창에서 민간인 719명을 학살한다. 3대대장 소령 한동석은 대현리, 중유리, 와룡리 주민 1천여 명을 신원국민학교로 소집했다. 성인 남자들은 이미 피신을 한 뒤라, 대개 노약자, 부녀자, 어린아이들 뿐이었다. 11사단은 주민들을 박산 골짜기로 끌고 가 기관총으로 집단 학살 후, 휘발유를 뿌려 불태우고 다이너마이트로 폭파시켰다.

 

거창 사건은 <뉴욕 타임스> 보도로 전 세계에 알려지게 된다. 이승만은 신성모를 국방장관에서 해임시키지만 이후 주일 한국대표로 임명한다. 군법회의는 연대장 오익경에게 무기징역, 대대장 한동석에게 징역 10, 김종원에게 징역 3년을 선고한다. 그러나 다음해 이들은 사면받고 복권된다.

 

2004년 한나라당이 발의한 거창 사건 등 관련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조치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괘했으나 정부의 거부권 행사로 보상의 길이 막힌다. 정부의 거부 이유는 100만 명으로 추산되는 다른 한국 전쟁 민간인 피해자와의 형평성 문제와 보수 단체의 반발 때문이었다.

 

314일 국군과 미군이 공동묘지로 변한 서울을 재탈환한다. 이승만과 맥아더는 연일 북진을 주장하였다. 트루먼은 411일 맥아더를 해임시킨다.

 

이승만과 한국의 많은 반공주의자들은 맥아더가 핵폭탄을 투하하지 않은 걸 안타깝게 생각한다. 그러나 한홍구에 따르면, 맥아더의 만주 폭격 구상이 실현되었다면 즉각 제 3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질 일이었다.

 

소련과 미국, 중국, 북한의 이해에 따라 710일 정전 협상이 시작된다. 휴전 협상이 진행되던 시기에 미군은 북한을 폭격하기 바빴고, 북한군 잔류 세력을 빨치산 투쟁으로 바빴다. 미군의 쥐잡기 작전이 시작된다. ‘쥐잡기 작전이후에도 빨치산 토벌은 계속된다.

 

53918일 남부군 총사령관 이현상이 사살된다. 이현상은 빨치산 투쟁을 하긴 했지만 남북 그 어느쪽에도 속하지 못한 중간파적인 성격이 농후했다.

 

마지막 여자 빨치산으로 알려진 지리산의 전설정순덕이 입산 12년 만인 6311월에 체포된다.

 

이승만은 자유당을 창당한다. 자유당 창당의 대업은 이범석이 맡았다. 1217일 이범석을 중심으로 한 자유당이 탄생한다. 그러나 1223일 소장파 의원들을 중심으로 또 다른 자유당이 탄생한다.

 

전쟁 중에도 학교는 열렸다. 대학 강의도 임시대학에서 계속 되었다. 대학생의 경우 징집을 피할 수 있었다. 과연 이 당시 대학생이라면 어떤 계층의 사람들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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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7-17 12: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시이소오 2016-07-17 12:45   좋아요 2 | URL
심지어 가진자들 자식들은 전쟁전ㅇㅔ 이미 유학을 떠난걸로 보아 한국전쟁은 애초에 기획된걸로 보입니다.

이래저래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만 죽어난거죠

yureka01 2016-07-17 12: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광기의 시대죠..미치광이의 시대. 관심법으로 죽이던 시대..

시이소오 2016-07-17 12:56   좋아요 2 | URL
미친 나라였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네요.
국익을 위해 사드를 놓는다? 정신병자죠.이게 인간일까요. 새누리당과 박그네는 전쟁 일으키려고 작정한듯 보입니다.

겨울호랑이 2016-07-17 12:5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거창사건 특별조치법 개정안에 대한 거부권 행사 정부는 시기적으로 노무현 정부인 것 같네요.. 다른 민간인 피해자와의 형평성을 고려했다면 이를 받아들이면서 포괄적인 논의를 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시이소오 2016-07-17 12:59   좋아요 3 | URL
노무현 대통령은 한국 대통령 중 최초로 43위령제에도 참석하고 국가 차원의 사과말씀도 하셨는데 왜 그런것일까요? 팩트체크를 해봐야겠네요^^

겨울호랑이 2016-07-17 13: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네 저도 공부를 해봐야 겠네요^^ 시이소오님 덕분에 개인적인 과제가 하나 생겼습니다 ㅋ 학교 때 과제는 부담이었는데, 졸업 후 과제는 흥미롭네요^^

시이소오 2016-07-17 13:08   좋아요 2 | URL
거창도희생자 위문공원이조성된걸로 보아 국가가 책임을 인정하긴 했는데요. ^^;

겨울호랑이 2016-07-17 13:1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당시 한겨레 신문에는 이 법 통과 시 유사사례에 대한 예상 총액이 당시 돈으로 25조라고 하네요. 예산 문제도 무시하지 못할 것 같아요^^

시이소오 2016-07-17 13:16   좋아요 2 | URL
허걱 25조라니, 이승만 국부라는 놈들한테 돈 받아내면 되겠네요.

겨울호랑이 2016-07-17 13:2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천문학적인 배상액도 무시못하는 것을 이해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무고한 국민의 피해에 대한 엄격한 배상기준의 확립이 선결되어야 할 것 같아요. 차후 이 같은 일이 재발되지 않으려면요..

시이소오 2016-07-17 13:38   좋아요 2 | URL
이승만이 학살한 국민만 백만명, 거기다 625때 억울하게 돌아가신분들까지 합하면 족히 이백만명이 넘겠네요. 액수가 많다고 배상못한다는건 말이 안되죠. 박정희가 국가배상법을 막아놨어요. 이후 군대에서 죽으면 개값된다고 했죠.
이거 빨리 뜯어고쳐야한다고 봅니다.

겨울호랑이 2016-07-17 13: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네 시이소오님 말씀처럼 국가배상에 대한 전면적인 재검토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야 배상액이 무서워라도 허튼 짓을 못하겠지요. 한 걸음 더 나가 제조업 등 기업 위주의 정책과 법률에 대한 검토도 필요한 시점이라 생각합니다. 국민과 소비자를 위한 포괄적인 장책 입안이 새시대로 가는 출발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시이소오 2016-07-17 13:53   좋아요 2 | URL
자칭 보수라는 것들이 정권을 잡은 이후 나라가 실로 개판돼버렸네요.

겨울호랑이님 말씀처럼 하나하나 고쳐 새시대를 만들어야겠습니다^^

기억의집 2016-07-17 13: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이소오님 대단하시네요. 저는 이 책 읽으면 분노로 미쳐버릴 것 같은데...정리를 너무 잘하세요. 한 눈에 들어오네요. 이 페이퍼 읽으니 지난 번에 제가 본 영화는 이 시대의 장면이 아닐까 싶습니다. 아직도 기억이 드문드문 나는 게 평지에 죽은 사람들이 엄청 났었거든요. 한편으로 제 기억이 맞는지 의문스러운 게 독재 시대때 그런 영화를 심의 상영 허가 했을까 싶기도 하고. 이 글 읽으면서 지식인들이 얼마나 교활한지...제가 누구를 위한 화해인가 읽고 있는데 정말 말장난 하나 싶을 정도입니다. 박유하나 일본 정부나.... 있는 자식들은 군대는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네요.

시이소오 2016-07-17 14:02   좋아요 0 | URL
ㅋ ㅋ 기억의 집님도 열정적이시네요. 이승만 찢어죽이고, 이승만을 국부라 하는것들, 어찌나 찢어죽이고 싶던지요.

모르긴 몰라도 그 영화는 아마 민간인 학살을 인민군으로 묘사하지 않았을까요. 실제로 인민군에 의한 학살도 있었으니까요. 김일성이나 이승민이나 찢어죽일것들이 우상화로 지가 왕인줄알고 살았다는게 역사의 비극이네요

 
한국 현대사 산책 1950년대편 1권 - 6.25 전쟁에서 4.19 전야까지 한국 현대사 산책 3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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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이전, 이승만 정권은 약 10만 명의 민간인을 학살했다. 제주 4. 3 사건과 여순사건 외에도 수많은 학살극이 도처에서 벌어졌다.

 

491224경북 문경 산북명 석봉리 석달마을, 육군 제 2사단 25연대 3대대 7중대, 2,3 소대 병사들이 주민들 86명을 학살한다. 86명 중 여자가 41, 65세 이상 노인이 10, 12살 까지의 아이가 26명이었다. 돌도 되지 않은 아이들이 5명이나 있었다.

 

미군과 이승만은 왜 이렇게 힘없고 연약한 국민들을 학살해야만 했을까.


 

625이전, 이승만과 정부의 허풍과 거짓말로 인해 공갈 때리다는 새로운 말이 생겨났다고 한다.

 

5/30 총선은 민국당과 이승만의 참패였다.

 

6.25 직전 남한은 완전 무방비 상태였다. 무방비 상태를 넘어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너무 많아서 남침 유도설을 낳았다.

 

북학의 남침 위협 정보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국군은 6. 25 직전인 610일 부로 일선 사단장들의 대규모 인사 이동을 단행했다. 북한 남침 위협을 심각하게 판단했다면 절대로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624, 육본 정보국이 북의 대규모 병력이 38선에 집결했다는 보고를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군 수뇌부는 바로 그날 비상경계를 해제하였다. 또한 절반에 해당하는 병력이 외출했다.

 

625일 새벽 440, 북한은 남침을 개시한다.

 

이승만은 627일 아무도 몰래 새벽 2시에 대전행 특별 열차를 타고 서울을 빠져 나간다. 9시에 대전방송국에서 서울중앙방송국으로 전화가 걸려온다. 이승만 담화를 전화로 받아 방송하라는 것이었다.

 

정부는 대통령 이하 전원이 평상시와 같이 중앙청에서 집무하고 국회도 수도 서울을 사수하기로 결정하였으며, 일선에서도 충용무쌍한 우리 국군이 한결 같이 싸워서 오늘 아침 의정부를 탈환하고 물러가는 적을 추격 중이니 국민은 군과 정부를 신뢰하고 조금도 동요함이 없이 직장을 사수하라. ”

 

이 방송은 밤 10시부터 11시까지 서너 차례 녹음으로 방송되었다.



 

이승만과 수뇌부는 28일 새벽 230분경 한강다리를 폭파하였다. 이 폭파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는지 아무도 모른다. 눈뜨고 볼 수 없는 아비규환의 참상이었다. 500명에서 4천 명의 사람들이 다리 위에서 폭사했다. 왜 이승만은 조기에 한강 다리를 폭파해 인명을 살상한 것은 물론이고 병력과 물자 수송에도 막대한 피해를 끼친 걸까.



 

628일 북한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한다.

 

이승만은 수원에서 대전, 대전에서 대구, 대구에서 다시 대전으로, 대전에서 이리, 이리에서 목포, 목포에서 부산으로 도망친다. 북진통일론은 부르짖던 이승만은 왜 이리 도망다니기에 급급했을까.

 

이승만은 714일 맥아더에게 한국군의 작전지휘권을 맡긴다. 북한군은 720일 대전, 전주 23일 광주, 26~27일 여수를 점령 하는 등 파죽지세로 남한을 장악해 나간다.

 

716일 미군은 대형 폭격기 b 29 50대 이상을 동원해 1시간 가까이 서울 용산 일대를 폭격한다. 미군 폭격에 의해 사망한 서울 시민은 4250, 부상자는 2413명이었다. 8월 중순을 넘기며 서울의 식량난은 절정에 달한다.

 

  

6.25가 터지자 제일 먼저 벌어진 뿌리뽑고 씨 말리기는 국민보도연맹 가입자들을 대상으로 벌어진다. 507~8월 수원 이남 전역에서 자행된 학살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는지 아무도 모른다. 적어도 최소 20만 명이상이 학살 되었다.

 

626일부터 전주형무소 수감자 13400여 명을 포함 전주 지역에서 남한 경찰, 헌병, 방첩대에 의해4500명이 학살 당한다.

 

속칭 나주부대함정 학살사건도 있었다. 나주 부대란 나주경찰서 경찰관들이 주축이 돼 결성한 100여 명 규모의 임시부대였다. 이들은 강진, 해남, 완도, 진도 등지로 후퇴하면서 이상한 짓거리를 저지른다. “우리는 인민군이다라고 알린 후, 인민군으로 위장, 인민군 만세를 외치는 사람들을 사살한다.

 

726, 미군의 명령에 따라 500여 명의 피난민이 인근 마을 노근리에 당도한다. 미군 전투기 2대가 나타나 철로위를 걷던 주민들을 향해 무차별 사격을 가하기 시작한다. 간신히 살아남은 사람들은 철로 밑 굴다리로 숨었으나, 미군의 총질은 계속되었다. 726일부터 34일간 미군의 인간 사냥으로 300여 명이 죽어간 노근리 사건이다.


 

노근리 사건은 999월 미국 AP 통신이 보도해 세계적 이슈가 되고 나서야 한국에서도 알려지게 되었다.

 

미군은 왜 피난민을 향해 무차별 학살을 자행한걸까? 미 제25사단 일지에는 사단장 킨 장군이 전투 지역에 있는 민간인들을 적대시하고 사살해야 한다는 결정을 내렸다고 적혀 있었다. 노근리 사건 이후에도 피난민에 대한 무차별 사격은 계속 일어났다.

 

도대체 미국은 왜 그런 결정을 내린 걸까. 강준만은 미국의 인종 차별 주의를 원인으로 꼽는다. 단지 그것 때문에? 한 미군 병사는 노근리 사건이 터진 지 49년 후에 이런 말을 남겼다.

 

아직도 바람 부는 시절이 되면 어린아이들의 울부짖는 소리가 들린다.”

 

이승만 정부는 629일 이후 학도의용군을 모집한다. 15~17살 사이의 소년병도 있었다. 3천 명이 참전하여 2400명이 전사했다. 북한은 남한 지역에서 소년들을 끌고가 의용군이라는 이름으로 전선에 투입했다. 남한 지역 출신 의용군과 국군의 소년 지원병이 싸우는 경우도 있었다.

 

914일 밤 10, 맥아더의 지휘 아래 인천상륙작전이 감행된다.


928일 서울이 수복된다. 피난을 갔던 도강파는 개선장군처럼 당당했고, 정부 말을 믿고 서울에 남은 잔류파는 빨갱이, 불순분자, 부역자라는 의심을 받는다.

 

국회는 이승만에게 사과문을 발표하라고 의결한다. 그러나, 이승만은 거절한다.


내가 국민 앞에 왜 사과를 해. 사과할 테면 당신들이나 해요.” 사과는 고사하고 이승만은 잔류파를 빨갱이로 몰아 부역자 재판으로 학살한다. 사학자 김성칠은 정부의 적반하장에 대해 이렇게 토로한다.

 

그리고 어리석고도 멍청한 많은 시민은 정부의 말만 믿고 직장을 혹은 가정을 사수하다 갑자기 적군을 맞이하여 90일 이상 굶주리고 천대받고 밤낮없이 생명의 위협에 떨다가 천행으로 목숨을 부지하여 눈물과 감격으로 국군과 유엔군의 서울 입성을 맞이하니 뜻밖에 많은 남하한 애국자들의 호령이 추상 같아서 정부를 따라 남하한 우리들만이 애국자이고 함몰 지구에 그대로 남아있는 너희들은 모두가 불순분자이다하여 곤박이 자심하니 고금 천하에 이런 억울한 노릇이 또 있을 것인가.”

 

북한 인민군 역시도 전쟁 중 학살을 자행한다. 서울 미아리 고개는 9.28 수복 때 북으로 쫓겨가던 인민군이 수많은 사람들을 북으로 끌고 가면서 뒤처진 사람들을 지금의 성신여대 뒷산에서 학살해 한 많은 미아리 고개가 되었다. 학살은 악순환의 게임이었다. 경기도 고양 금정굴 민간인 학살 사건도 그러한 예이다. 좌익 세력이 우익 단체 단원 50여 명을 처형했다. 9.28 수복 후 국군과 치안대의 보복이 이루어졌다. 이때의 희생자가 1천여 명이 넘는 것으로 추산된다.

 

이승만은 930일 국군에게 38선 돌파 명령을 내린다. 유엔군은 묵인한다. 중국 외상 주은래는 중국 인민은 이웃 나라가 제국주의 국가로부터 침략을 받을 경우 가만있지 않을 것이다.라고 경고했다.

 

102일 맥아더는 워커에게 38선 돌파 명령을 내렸다.. 맥아더는 북한에 대해 무조건 항복을 요구했지만 김일성은 거절한다.

 

1015일 맥아더는 트루먼에게 만주 폭격을 요구하지만 트루먼은 3차 세계 대전의 발발을 염려해 반대한다.

 

1019일 국군과 유엔군은 평양을 점령한다. 국군과 우익 청년단체들의 약탈이 시작된다.

 

남한에서 시작된 학살극은 북한에서 또 다시 재현된다. 북한 정부는 평양에서 철수하면서 1800명에 달하는 우파를 학살한다. 북한은 미국과 국군에 의해 17만 명의 북한 주민이 학살당했다고 발표한다. 가장 널리 알려진 학살은 신천 학살 사건이다. 미군은 1017일부터 127일 까지 52일 동안 황해도 신천군에 머물면서 군 인구의 4분의 135천 여명을 학살한다. ‘신천 학살 사건은 피카소가 그린 <한국에서의 학살>이라는 그림을 통해 유명해졌다.






 

황석영의 <손님>에 의하면, 신천학살사건은 좌우대립에 의한 학살이었다. 20024월 방영된 MBC<이제는 말할 수 있다 망각의 전쟁편>을 제작한 PD 조문묵에 따르면, 신천학살 사건은 주로 반공청년단에 의해 저질러졌다.

 

1950년 가을, 미군 폭격기 B 29 80대 이상이 연사흘 신의주를 폭격했다. 신의주 20만 인구의 3분의 2의 사람이 타 죽고, 도시의 80%가 잿더미가 되었다. 전쟁초기 미 극동군 공군사령관을 지낸 에멋 오도넬은 511월 중순 미 상원 청문회에서 이렇게 증언하였다.

 

한국에는 더 이상의 폭격 목표가 없다. 모든 것이 파괴되었다. 전 한반도는 단지 끔찍한 잿더미일 뿐이다.”

 

중국은 108일 참전을 결정한다. 이로써 전쟁은 미중전쟁으로 전환하게 된다.

 

중국군의 승리 가능성이 높아지자 소련이 11월에 참전하다. 중국군의 인해전술은 오해였다. 중국군은 신출귀몰 식의 유격 전술을 썼다. 중국군의 반격으로 유엔군은 121일부터 후퇴한다. 중국군은 126일 평양을 회복한다.

 

1130일 트루먼은 기자회견에서 원자탄 사용을 적극 검토하고 있다고 선언했다. 도쿄 맥아더 사령부 정보처 특수계획과정이었던 필립 코르소의 증언에 따르면, 한반도에는 이때 이미 40개의 원자탄이 배치돼 있었다. 원자탄 사용 발언에 놀란 영국 수상 애틀리가 미국으로 건너가 트루먼과 회담을 가졌다.

 

전쟁 중 끔찍한 민간인 학살은 도처에서 행해졌다. 1117일 공비 토벌 작전을 하던 국군은 전북 남원 강석리 마을을 습격, 마을 주민 90명을 학살한다. 12월 초순에는 전남 함평 지역에서 국군에 의한 대량 학살이 자행된다. 11사단 20 연대 사병 두 명이 빨치산 습격으로 전사하자, 5중대 군인들은 마을 주민들에게 보복을 했다.

 

군인들은 126일 함평군 월야면 정산리 장교마을에서 20여 명을 사살, 동촌마을에서 30 여명 사살한다. 127일에는 월야면 월악리 내동, 송계, 동산 등 7개 마을을 덮친다. 군인들은 아이들을 시켜 집집마다 불을 지르게 하고 주민 700여명을 동산 마을의 남산뫼에 집결시킨다.


 

11사단 5중대 군인들은 월야면 외치리 외치마을, 나산면 이문리 사정마을, 해보면 상곡리 모평마을, 쌍구룡 , 나사면 우치리 소재마을 등, 모두 여덟 차례에 걸쳐 524명을 학살하고 가옥 1454동을 불태운다. 도대체 왜 이렇게 자국민을 학살한 걸까. 권복기는 또 다른 원인을 말한다.

 

“11사단 최덕신 준장이 내놓은 견벽청야(堅壁淸野)라는 작전 개념이 그것이다. 견벽청야는 중국 한나라 때 변경 지역 방어를 위해 사용된 전술 개념으로 성밖을 말끔하게 치워버리고 성을 굳게 지키면서 적이 오기를 기다린다는 뜻이다.....초토화작전과 비슷하다. 이 작전은 함평 사건이 난 뒤 60여일 뒤 거창에서도 쓰였다. 거창에도 최덕신의 11사단 병력이 투입됐다.

 

당시 9연대는 예하 대대에, 작전지역 내 인원은 전원 총살하라, 공비들의 근거지가 되는 건물은 전부 소각하라, 적의 보급품이 될 수 있는 식량과 기타 물자는 안전 지역으로 후송하거나 불가능할 경우 소각하라는 세 가지 지침을 내렸다.

 

여기에다 군 지휘부에서 각 부대에 내린 것으로 보이는, ‘하루에 공비 50명 이상 사살, 무기 50점 이상 노획이라는 목표가 군인들에게 민간인 학살이라는 손쉬운 전과를 택하도록 했을 가능성도 큰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군인들은 민간인을 학살하고 괭이와 삽을 수거해 노획품으로 보고하기도 했다고.


견벽청야는 실제로 11사단 작전명령 5호였다. 나산면장 이오섭의 개입이 없었다면 더 많은 사람이 살해당했을 것이다. 나산면장 이오섭은 함평경찰서 나산지서장 나병오를 설득해 같이 5중대장 대위 권준옥을 찾아가 항의했다. 이오섭은 권준옥과 그의 부하들에게 몰매를 맞았다. 그러나 이 장면을 본 20연대장은 불갑산 주변의 다른 마을들을 초토화시킬 계획을 포기한다.

 

129일 맥아더에 의해 흥남 철수 명령이 내려진다. 흥남 부두는 아비 규환이었다. 밟혀 죽는 사람이 부지기수였다. 추위에 못이겨 얼어죽은 시체가 매일 밤 수없이 버려졌다. 사람들이 흥남 부두로 몰려든 것에는 미군의 원폭 투하 소문이 큰 영향을 끼쳤다. 마지막 배가 출항하자 미군은 적에게 아무것도 남겨주지 않기 위해 항구에 대규모 함포 사격과 공중 폭격을 가했다. 이 포격으로 죽은 사람들도 부지기수였다.

 

1950419, 미국 보스턴 마라톤 대회에서 함기용, 송길윤, 최윤칠이 나란히 1,2,3등을 차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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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6-07-16 14: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희 작은 할아버지와 할머니께서도 강진에서 인민군에게 죽음을 당하셨는데, 인민군에 의한 죽음이 아니었을 수도 있었겠네요..

시이소오 2016-07-16 14:59   좋아요 3 | URL
에효. 그런 비극이 있었군요. 명복을빕니다.

전쟁통에 너무 많은 국민들이 희생했네요.

두번 다시 그런 비극이 없어야 할텐데요ㆍ

겨울호랑이 2016-07-16 15:0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네 그렇습니다. 시이소오님 덕분에 아픈 과거를 빠르게 리뷰합니다. 그리고 우리 후손들에게는 이런 아픔을 주지 않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네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시이소오 2016-07-16 15:08   좋아요 3 | URL
우리 아이들에게 두번다시 한국전쟁 같은 비극을 물려주지 말아야겠습니다. 응원 감사합니다 ^^

루쉰P 2016-07-16 21: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시생 끝내고 시험 합격함 돈 모아서 이거 현대사 전집으로 살거에요 정말 사고 싶은 책!!!

시이소오 2016-07-16 21:04   좋아요 0 | URL
저도 사고 싶어요 ㅎ ㅎ
합격 기원합니다 ^^

2016-07-16 22: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시이소오 2016-07-17 11:40   좋아요 1 | URL
독재자들, 왜 국립묘지에 묻는걸까요. 부관참시도 관대한 대접이거늘.

법을 고쳐야 겠습니다.
 
한국 현대사 산책 1940년대편 2 - 8.15 해방에서 6.25 전야까지, 개정판 한국 현대사 산책 2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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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일부터 반민특위의 검거 작업이 시작된다. 화신 재벌 박흥식, 250명의 독립투사를 밀고한 <대한일보> 사장 이종형, 최린, 친일 변호사 이승우, 남작 이풍한, <매일신보> 사장 이성근, 친일 경찰 노덕술, 이광수, 최남선 등이 검거되었다.

 

노덕술을 총애한 이승만은 노덕술의 석방을 요구하나, 반민특위는 거절한다.



 

124일 테러리스트 백민태가 서울지검을 찾아가 암살 음모 사건을 고발한다. 반민 특위 간부 15명을 38선까지 유인해 살해한 뒤 월북하려 해 사살한 것으로 위장하라는 지시를 받았다는 것. 친일파들의 암살 음모는 미수로 그쳤으나, 이후 친일파들의 공작은 계속 된다.

 

내각 구성에서 이승만에게 배신당한 한민당은 신익희와 지청전 세력을 흡수 2, 10일 민주국민당 (민국당)으로 다시 태어난다.

 

이승만은 곧이어 학도호국단을 창설한다. 대한민국 국적이 있는 18세 이상 모든 남녀는 모두 국민회에 가입해야 했고, 성년 여성은 대한부녀회, 청년은 대한청년단, 학생은 학도호국단에 가입해야만 했다. 이승만은 국민회비를 내지 않으면 식량배급 통장이나 물자의 배급을 중지한다고 위협했고, 청년단비를 내지 않으면 38선에 보낸다고 위협했다. 학도호군단은 안호상이 맡았다.

 

1월 중순, ‘수원청년단 사건이 발생한다. 이 사건은 이른바 대한 관찰부가 저지른 것이었다. 현대의 국정원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을까. 대한관찰부100여 명의 무고한 민간인을 대통령 암살 혐의로 체포, 고문했을 뿐만 아니라 경찰과 군에까지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하였다. 대한관찰부는 487월부터 493월까지 9개월 동안 21천여 만원의 예산을 썼다. 이 당시 상공부 예산이 2억 원이었다고.

 

520, 반민특위에서 주도적으로 활동하던 소장파 의원, 이문원, 이구수, 최태규 등이 체포되었다. 이들이 남로당과 연결되어 국회에서 프락치 활동을 했다는 혐의였다. 이른바 국회 프락치사건. 친일파들은 반민특위를 빨갱이 집단으로 악선전한다.

 

66, 중부경찰서장 윤기병이 지휘하는 무장경찰이 반민특위를 습격, 반민특위 요원 35명을 체포한다. 이승만은 그 전에 반민특위 위원장 김상덕의 집을 직접 찾아갔다. 김상덕은 이승만의 청을 거절한다. , 반민특위 습격은 이승만의 보복이었던 셈.

 

국회 프락치 사건은 재탕, 확대된다. 앞으로도 누누이 보게 되지만 이승만은 좌, 우를 구분하지 않고 토사구팽을 이어간다. 이문원은 한독당원이자 대동청년단원, 노일환, 친일파로 호남 지주 출신의 한민당원, 박윤원은 광복청년단 지방가부, 강욱중, 민족청년단원, 김병회는 독립촉성국민회원, 김약수는 한민당 간부였다.

 

이승만 정권과 친일세력은 공소시효를 49831로 단축하는 반민법 개정안을 국회에 상정, 통과시킨다. 77일 반민특위 전원이 사임한다. 반민특위는 출발 당시 반민자 7천여 명을 파악해 놓고 있었지만 기소는 221건에 불과했고, 재판이 종결된 것도 38건에 지나지 않았다.

 

강준만의 말처럼 반민특위는 너무 늦게 시작되었다. 해방 후 3년 여동안 친일파는 막강한 기득권 세력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친일파들은 전혀 반성의 기미가 없었다. 반민특위 제 1조사부장 이병홍은 이렇게 증언했다.

 

친일 거두의 집에서 흔히 일본 황제의 사진이 벽상에 조심스럽게 걸려 있는 것이 발견되었다. ....그리고 어떠한 자는 태연하게 우리들 앞에서 이완용의 위대한 민족애를 강조하고 동상 건립의 필요를 역설까지 하였다. ”

 

65일 이승만은 국민보도연맹을 만든다. 보도연맹을 직접 입안안 인물은 친일파 검사 오제도였다. 보도연맹 가입을 거부하면 폭력과 테러는 물론 형사처벌을 받아야 했다. 경찰과 우익청년단체 특히나 대한청년단은 지역마다 할당된 인원수를 채우기 위해 온갖 패악질을 저지른다. 가입비 300, 회비 200원을 거두기도 했고, 서울에서는 5만원을 받는 곳까지 있었다.

 

6.25 전쟁 때 학살된 보도연맹의 수는 최소 20만 명이 될 것이라 한다.



 

626, 김구가 경교장 2층 거실에서 현역 육군 소위 안두희에게 암살 당한다. 김구의 국민장엔 100만 명이 넘는 문상객이 조의를 표했고 장례일에 서울에서만 40~50만 명의 인파가 운집했다.

 

김구 암살 이후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한독당 간부 7명에게 살인교사죄로 구속영장이 발부된 것. 이상하지 않은가. 박근혜가 암살당했는데, 새누리당 의원 7명에게 살인교사죄를 적용한 것과 마찬가지. 김구 암살은 이승만 정권 정보장교였던 김창룡이 작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안두희는 6.25가 발발하자 육군 소위로 복직한다. 51년엔 대위로 진급한다. 소령으로 예편했으며, 예편뒤에는 군납업자로 상당한 재산을 모았다. 안두희가 복직된 후에 이승만은 이 사람의 인사이동은 내 허락이 없이는 하지 말라는 지령을 내렸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2001년 발굴돼 공개된 미국 정보장교 소령 조지 실리의 보고서는 미국 배후설을 강하게 부각시켰다.

 

49년 대한민국은 인권유린의 천국이라고 불린다.

 

수사 기관이 십 여개 난립하면서 서로 건수 만들기 경쟁을 벌였다. 어느 경찰서에서 취조를 받았다는 것이 알려지면 다른 경찰서에서도 데려갔다. 이른바 뺑뺑이 취조라 불린다. 감옥은 죄수들로 흘러 넘쳤다. 모든 형무소는 정원보다 몇 배 많은 인원을 수용했다.

 

형무소 바깥도 편안한 건 아니었다. 서민들이 내야 하는 세금 종류만 무려 40여 종이나 됐다.

 

현금을 받아가는 것이 대한부인회비, 대한청년단비, 대한청년단 작어비, 민보단비, 지서수리비, 지서방야비, 비상경비, 본도비상사태대책위원회 기본보도 비상대책비, 국방협회비, 발란비, 소방협회비, 사회교육협회비, 가축할가축보전비, 축구공제 특별가축비, 농화비, 후생협회비, 수구비, 순가 혹 사망에 경하는 비용, 그 다음에는 국세에 정한 국세의 비용이 가옥세, 차량세, 면새 기타 10여 점, 또 그 다음에 현물로 받아 가는 것이 원공출수량은 내야 됩니다.”

 

그 공출 수량을 뺏긴 뒤에는 군용곡량이라고 하고 보리하고 나락을 받아갑니다. 소학교에 대한 선생을 또 무어한다고 보리하고 나락을 받아갑니다. 소학교.....그리고 중학교도 역시 보리와 나락을 양차로 받아 갑니다. 또 도정료 무어라 해서 보리와 나락을 받아 갑니다. 또 구장료 무어라고 해서 보리와 나락을 받아 갑니다. 또 선생을 구제한다고 보리와 나락을 받아 갑니다. 도 산림계에서 환료경제한다고 매 가호에서 700원씩 그 화구라고 하는 것을 만들어 가지고 받아갑니다. 종종보면 심지어 대통령 사진 비용까지도 받아 갑니다. ....무병잡비용이 스물한 가지, 국세애 대한 비용이 열 한가지, 40여 종의 부담입니다.”

 

이외에도 서민들은 기부금을 내야했다. 권력기관이나 그 근처 단체들은 수건과 비누등을 강매하고 안 사면 공산당이라 위협했다. 극장표를 무더기로 맡기거나 식량을 내게 하기도 했다. 기부금을 안 내면 협박, 구타, 감금, 침입수사 등이 이러졌고, 군까지 가세했다.

 

서민들은 기부해야 했고 공출당했으며 고문당했고, 또한 이승만을 숭배해야만 했다. 학교마다 이승만 초상화가 내걸리고, 이승만 생일에 집집마다 태극기를 게양해야 했다.

 

이 당시 유행한 말이 사바사바. 물가는 엄청나게 치솟아 올랐다. 물가 폭등은 모리배들에겐 일확천금의 기회이기도 했다. 그래서 사바사바는 갈수록 더 성행했다.

 

통역 정치의 다른 한쪽엔 기독교 정치특히 개신교 정치가 있었다. 개신교 신자는 10만 명 인구 대비 비율 0. 52%에 지나지 않았지만 46년 미군정 최고위직에 임명된 한국인 50명 가운데 35명이 개신교 신자였다. 이승만, 김구, 김규식이 모두 개신교 신자였다.

 

한국기독교청년 연합회(기청)은 서북 청년회와 연합한다. 영락교회 청년회는 서북청년단 발족을 주도하기도 한다. 일제 강점기에 개신교는 귀축미영(귀신과 짐승인 미국과 영국)을 박멸하자를 목이 터져라 외친, 가장 강력한 반미 세력이었다고 하는데, 해방 후엔 어쩌다가 친미로 돌아선 것일까.

 

오기영은 개신교가 일제 치하에서 하느님과 돈과 일본이라고 하는 삼위를 섬겼다고 비판한다.

 

신사 참배 문제가 일어났을 때에.....예수교에서 얼마나 많은 대일협력자를 내었는가. 얼마나 많은 미영타도의 용감한 투사를 내었는가. 그뿐이 아니다. 진실로 그뿐이 아니다. 서로 일본에 친하기 위하여, 그 앞에 무릎을 꿇기 위하여 서로 싸우고 모해하며 서로 더 황민화의 공적을 나타내기에 노력하지 아니 하였는가.”

 

일제 강점기엔 반미를 부르짖던 친일파 개신교가 해방 후엔 친미파로 변신한 것은 하느님의 하심을 역사하신 걸까.

 

49년 봄부터 38선 근처에선 무력충돌이 빈번하게 이뤄졌다. 이승만은 연일 북진통일론을 외쳐댔다. 1230일 기자회견에서 이승만은 우리는 새해에 통일을 이룩해야 하며 할 수 있다고 믿는다.”고 말했다. 북한에선 48년 가을 이후 모택동 군대에서 싸운 수천명의 조선인 병력이 북한으로 돌아왔다. 504월에만 약 12천명의 조선인 병사들이 돌아왔다. 북한은 치밀하게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다. 반면 남한엔 탱크 한 대도 없었다

 

이승만의 도발에 의해, 한국전쟁은 일어날 수 밖에 없었다.

 

이 전쟁에서 사망자, 부상자, 실종자를 포함한 인명 손실은 300만 명으로 전체 인구의 10분의 1이나 되었으며, 1천만 명이 가족과 헤어졌고 500만 명은 난민이 되었다. 이 전쟁은 ”20세기의 그 어떤 전쟁보다도 민간인 희생 비율이 높은 더러운 전쟁이었다.“ 이 전쟁은 그 잔인성에 있어서 20세기의 국제전이나 내전 과정에서 발생한 다른 어떤 학살을 능가하였으며, ”인간이 인간에게 얼마나 잔인해질 수 있는지를 보여준 전쟁 백화점이었으며, 인간의 존엄성이 얼마나 무참하게 파괴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 살아 있는 인권 박물관이자 교과서였다.“ 전쟁 중 이승만은 너무도 무능했고 부패했고 잔인한 모습을 원없이 보여주었다. 과연 이승만 정권은 국가였을까? ”

 

지옥을 살아가고 있던 한국의 국민들과 북한의 국민들,

그들 앞엔 그 누구도 상상치 못한 더 끔찍한 지옥이 아가리를 벌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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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6-07-15 12: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시이소오님은 역사 연표를 잘 만드실 것 같습니다. 만약에 역사 연표 같은 알라딘 굿즈가 나온다면, 그거 사지 마세요. ㅎㅎㅎ

시이소오 2016-07-15 12:07   좋아요 0 | URL
ㅎ 저야 강준만 쌤 책을 정리하고 있을 뿐입니다 ^^

yureka01 2016-07-15 13: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승만에 대해 알아가면 갈수록 화딱지나는 인물은 드물듯..

시이소오 2016-07-15 13:47   좋아요 2 | URL
동감입니다. 이게 과연 인간일까 싶어요.

이승만을 국부라는 것들도 인간같지가 않아요. 무슨 흡혈귀가 아니고서야 ~~

겨울호랑이 2016-07-15 15: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짜여진 각본처럼 모든 것이 맞물려 전쟁으로 몰아가는 거 같네요. 이런 삶속에서 전쟁이라는 탈출구 선택은 자연스러운 흐름 같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시이소오 2016-07-15 15:13   좋아요 2 | URL
이 당시의 상황이 현재랑 비슷한것 같아요. 누군가 사드 배치로 지옥문이 열렸다고 표현했는데 동감입니다. 사드 배치이후 두번째 한국전쟁이 발발할 조건들은 완벽히 갖춰지게됩니다. 한국 지식인들과 정치인들이 전쟁을 막을 수 있을까요?

회의적이네요. 한국전쟁으로 손해본 정권은 아무도 없습니다.
심지어 이승만, 김일성도 체제를 더 공고히 할수 있었던건 전쟁 덕분이었거든요.

아무죄없는 국민들만 수백만명이 학살당했죠.

사드배치는 미친짓이에요.

한국에서 또다시대리전 하겠다는건데, 사드배치에 찬성하는 국민이 있다니 통탄할 일입니다.

겨울호랑이 2016-07-15 15: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네 맞습니다. 아울러 지금 동유럽에서 NATO와 러시아 갈등, 남중국해에서 미국(필리핀)과 중국간의 갈등이 고조되는 등 세계적으로 불안하네요. 더구나, 우리나라는 중국, 러시아 vs 미국, 일본 구조라 2배로 걱정이네요. 더구나 우리 나라 마음대로 전쟁을 하거나 멈출수도 없으니 참담합니다.....

시이소오 2016-07-15 15:25   좋아요 2 | URL
지금 세계 정세가 정말 심상치가 않아요.

삼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도 전혀 이상하지 않아요. 문제는 어디냐는건데, 한반도도
분명 강력한 후보지들 중 하나라고 봅니다 .

겨울호랑이 2016-07-15 15: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네 최근 들어 정부에서 국민들 정치의식과 역사의식을 많이 함양해 주어서 참 고마워하면서 내년 대선을 기다리고 있는데, 기회를 안 주는 거 같네요...

시이소오 2016-07-15 15:33   좋아요 2 | URL
섬찟한건 새누리당이 내년 대선은 포기한것처럼 보인다는거죠. 대선을 포기하면서도 낄낄대는 이유가 뭘까요?

단지 저 혼자만의 착각이었으면 좋겠어요



2016-07-15 15: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시이소오 2016-07-15 15:59   좋아요 2 | URL
단지 그것뿐이라면 다행입니다만, 거기서 그칠것 같지가않아요.

중국, 러시아가 미쳐날뛰니 미국은 일본이란 사냥개 목줄을 풀었습니다. 일본이 북한의 목을 물어 뜯으면 중국이 달려올거고 미국도 뛰어들겠죠.
또 다시 미중 전쟁이 한반도에서 이뤄지겠죠.

애초에 강대국은 한반도 통일을 원하는게 아니니, 38선 유지한채로 또다시 휴전, 한반도 사는 사람들만 개죽음 당하겠죠. 에효

겨울호랑이 2016-07-15 16: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 맞습니다. 시이소오님 말씀이 충분히 근거가 있고 그렇게 흘러가는 것 같아요. 다만, 그렇게 안 되길 바라야겠지요. 다만, 제가 지금 할 수 있는 것은 지금 현재를 바라보고 판단을 바로하는 것 같아요. 나머지는 하늘에 맡겨야 할거 같네요^^

시이소오 2016-07-15 16:09   좋아요 2 | URL
중요한 말씀 이네요. 전쟁을 막기위해 우리들 각자가 무엇을 해야하는지, 무엇을 할수 있을지 고민해봐야 겠습니다 ^^

겨울호랑이 2016-07-15 16: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네 시이소오님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항상 과거를 통해 현재를 돌아보게 하는 좋은 글에 감사드립니다^^ 행복한 하루 되세요

시이소오 2016-07-15 16:13   좋아요 2 | URL
저도 감사합니다. 겨울호랑이님도 즐거운 불금되시길 ^^

2016-07-16 22: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시이소오 2016-07-17 11:37   좋아요 1 | URL
정신병자라는 말에동의합니다. 오죽하면 미군도 일국의 대통령을 정신과 의사와 상담시키려 했을까요. 지금 박그네도 제가 보기엔 정신병자. 치료가 시급합니다. 엄마. 아빠. 다 총 맞아 죽은 이후로 미쳤어요.
저런 ㅁㅊㄴ을 대통령 시켜 놨으니 나라도 미쳐가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