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현대사 산책 1950년대편 1권 - 6.25 전쟁에서 4.19 전야까지 한국 현대사 산책 3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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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이전, 이승만 정권은 약 10만 명의 민간인을 학살했다. 제주 4. 3 사건과 여순사건 외에도 수많은 학살극이 도처에서 벌어졌다.

 

491224경북 문경 산북명 석봉리 석달마을, 육군 제 2사단 25연대 3대대 7중대, 2,3 소대 병사들이 주민들 86명을 학살한다. 86명 중 여자가 41, 65세 이상 노인이 10, 12살 까지의 아이가 26명이었다. 돌도 되지 않은 아이들이 5명이나 있었다.

 

미군과 이승만은 왜 이렇게 힘없고 연약한 국민들을 학살해야만 했을까.


 

625이전, 이승만과 정부의 허풍과 거짓말로 인해 공갈 때리다는 새로운 말이 생겨났다고 한다.

 

5/30 총선은 민국당과 이승만의 참패였다.

 

6.25 직전 남한은 완전 무방비 상태였다. 무방비 상태를 넘어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너무 많아서 남침 유도설을 낳았다.

 

북학의 남침 위협 정보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국군은 6. 25 직전인 610일 부로 일선 사단장들의 대규모 인사 이동을 단행했다. 북한 남침 위협을 심각하게 판단했다면 절대로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624, 육본 정보국이 북의 대규모 병력이 38선에 집결했다는 보고를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군 수뇌부는 바로 그날 비상경계를 해제하였다. 또한 절반에 해당하는 병력이 외출했다.

 

625일 새벽 440, 북한은 남침을 개시한다.

 

이승만은 627일 아무도 몰래 새벽 2시에 대전행 특별 열차를 타고 서울을 빠져 나간다. 9시에 대전방송국에서 서울중앙방송국으로 전화가 걸려온다. 이승만 담화를 전화로 받아 방송하라는 것이었다.

 

정부는 대통령 이하 전원이 평상시와 같이 중앙청에서 집무하고 국회도 수도 서울을 사수하기로 결정하였으며, 일선에서도 충용무쌍한 우리 국군이 한결 같이 싸워서 오늘 아침 의정부를 탈환하고 물러가는 적을 추격 중이니 국민은 군과 정부를 신뢰하고 조금도 동요함이 없이 직장을 사수하라. ”

 

이 방송은 밤 10시부터 11시까지 서너 차례 녹음으로 방송되었다.



 

이승만과 수뇌부는 28일 새벽 230분경 한강다리를 폭파하였다. 이 폭파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는지 아무도 모른다. 눈뜨고 볼 수 없는 아비규환의 참상이었다. 500명에서 4천 명의 사람들이 다리 위에서 폭사했다. 왜 이승만은 조기에 한강 다리를 폭파해 인명을 살상한 것은 물론이고 병력과 물자 수송에도 막대한 피해를 끼친 걸까.



 

628일 북한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한다.

 

이승만은 수원에서 대전, 대전에서 대구, 대구에서 다시 대전으로, 대전에서 이리, 이리에서 목포, 목포에서 부산으로 도망친다. 북진통일론은 부르짖던 이승만은 왜 이리 도망다니기에 급급했을까.

 

이승만은 714일 맥아더에게 한국군의 작전지휘권을 맡긴다. 북한군은 720일 대전, 전주 23일 광주, 26~27일 여수를 점령 하는 등 파죽지세로 남한을 장악해 나간다.

 

716일 미군은 대형 폭격기 b 29 50대 이상을 동원해 1시간 가까이 서울 용산 일대를 폭격한다. 미군 폭격에 의해 사망한 서울 시민은 4250, 부상자는 2413명이었다. 8월 중순을 넘기며 서울의 식량난은 절정에 달한다.

 

  

6.25가 터지자 제일 먼저 벌어진 뿌리뽑고 씨 말리기는 국민보도연맹 가입자들을 대상으로 벌어진다. 507~8월 수원 이남 전역에서 자행된 학살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는지 아무도 모른다. 적어도 최소 20만 명이상이 학살 되었다.

 

626일부터 전주형무소 수감자 13400여 명을 포함 전주 지역에서 남한 경찰, 헌병, 방첩대에 의해4500명이 학살 당한다.

 

속칭 나주부대함정 학살사건도 있었다. 나주 부대란 나주경찰서 경찰관들이 주축이 돼 결성한 100여 명 규모의 임시부대였다. 이들은 강진, 해남, 완도, 진도 등지로 후퇴하면서 이상한 짓거리를 저지른다. “우리는 인민군이다라고 알린 후, 인민군으로 위장, 인민군 만세를 외치는 사람들을 사살한다.

 

726, 미군의 명령에 따라 500여 명의 피난민이 인근 마을 노근리에 당도한다. 미군 전투기 2대가 나타나 철로위를 걷던 주민들을 향해 무차별 사격을 가하기 시작한다. 간신히 살아남은 사람들은 철로 밑 굴다리로 숨었으나, 미군의 총질은 계속되었다. 726일부터 34일간 미군의 인간 사냥으로 300여 명이 죽어간 노근리 사건이다.


 

노근리 사건은 999월 미국 AP 통신이 보도해 세계적 이슈가 되고 나서야 한국에서도 알려지게 되었다.

 

미군은 왜 피난민을 향해 무차별 학살을 자행한걸까? 미 제25사단 일지에는 사단장 킨 장군이 전투 지역에 있는 민간인들을 적대시하고 사살해야 한다는 결정을 내렸다고 적혀 있었다. 노근리 사건 이후에도 피난민에 대한 무차별 사격은 계속 일어났다.

 

도대체 미국은 왜 그런 결정을 내린 걸까. 강준만은 미국의 인종 차별 주의를 원인으로 꼽는다. 단지 그것 때문에? 한 미군 병사는 노근리 사건이 터진 지 49년 후에 이런 말을 남겼다.

 

아직도 바람 부는 시절이 되면 어린아이들의 울부짖는 소리가 들린다.”

 

이승만 정부는 629일 이후 학도의용군을 모집한다. 15~17살 사이의 소년병도 있었다. 3천 명이 참전하여 2400명이 전사했다. 북한은 남한 지역에서 소년들을 끌고가 의용군이라는 이름으로 전선에 투입했다. 남한 지역 출신 의용군과 국군의 소년 지원병이 싸우는 경우도 있었다.

 

914일 밤 10, 맥아더의 지휘 아래 인천상륙작전이 감행된다.


928일 서울이 수복된다. 피난을 갔던 도강파는 개선장군처럼 당당했고, 정부 말을 믿고 서울에 남은 잔류파는 빨갱이, 불순분자, 부역자라는 의심을 받는다.

 

국회는 이승만에게 사과문을 발표하라고 의결한다. 그러나, 이승만은 거절한다.


내가 국민 앞에 왜 사과를 해. 사과할 테면 당신들이나 해요.” 사과는 고사하고 이승만은 잔류파를 빨갱이로 몰아 부역자 재판으로 학살한다. 사학자 김성칠은 정부의 적반하장에 대해 이렇게 토로한다.

 

그리고 어리석고도 멍청한 많은 시민은 정부의 말만 믿고 직장을 혹은 가정을 사수하다 갑자기 적군을 맞이하여 90일 이상 굶주리고 천대받고 밤낮없이 생명의 위협에 떨다가 천행으로 목숨을 부지하여 눈물과 감격으로 국군과 유엔군의 서울 입성을 맞이하니 뜻밖에 많은 남하한 애국자들의 호령이 추상 같아서 정부를 따라 남하한 우리들만이 애국자이고 함몰 지구에 그대로 남아있는 너희들은 모두가 불순분자이다하여 곤박이 자심하니 고금 천하에 이런 억울한 노릇이 또 있을 것인가.”

 

북한 인민군 역시도 전쟁 중 학살을 자행한다. 서울 미아리 고개는 9.28 수복 때 북으로 쫓겨가던 인민군이 수많은 사람들을 북으로 끌고 가면서 뒤처진 사람들을 지금의 성신여대 뒷산에서 학살해 한 많은 미아리 고개가 되었다. 학살은 악순환의 게임이었다. 경기도 고양 금정굴 민간인 학살 사건도 그러한 예이다. 좌익 세력이 우익 단체 단원 50여 명을 처형했다. 9.28 수복 후 국군과 치안대의 보복이 이루어졌다. 이때의 희생자가 1천여 명이 넘는 것으로 추산된다.

 

이승만은 930일 국군에게 38선 돌파 명령을 내린다. 유엔군은 묵인한다. 중국 외상 주은래는 중국 인민은 이웃 나라가 제국주의 국가로부터 침략을 받을 경우 가만있지 않을 것이다.라고 경고했다.

 

102일 맥아더는 워커에게 38선 돌파 명령을 내렸다.. 맥아더는 북한에 대해 무조건 항복을 요구했지만 김일성은 거절한다.

 

1015일 맥아더는 트루먼에게 만주 폭격을 요구하지만 트루먼은 3차 세계 대전의 발발을 염려해 반대한다.

 

1019일 국군과 유엔군은 평양을 점령한다. 국군과 우익 청년단체들의 약탈이 시작된다.

 

남한에서 시작된 학살극은 북한에서 또 다시 재현된다. 북한 정부는 평양에서 철수하면서 1800명에 달하는 우파를 학살한다. 북한은 미국과 국군에 의해 17만 명의 북한 주민이 학살당했다고 발표한다. 가장 널리 알려진 학살은 신천 학살 사건이다. 미군은 1017일부터 127일 까지 52일 동안 황해도 신천군에 머물면서 군 인구의 4분의 135천 여명을 학살한다. ‘신천 학살 사건은 피카소가 그린 <한국에서의 학살>이라는 그림을 통해 유명해졌다.






 

황석영의 <손님>에 의하면, 신천학살사건은 좌우대립에 의한 학살이었다. 20024월 방영된 MBC<이제는 말할 수 있다 망각의 전쟁편>을 제작한 PD 조문묵에 따르면, 신천학살 사건은 주로 반공청년단에 의해 저질러졌다.

 

1950년 가을, 미군 폭격기 B 29 80대 이상이 연사흘 신의주를 폭격했다. 신의주 20만 인구의 3분의 2의 사람이 타 죽고, 도시의 80%가 잿더미가 되었다. 전쟁초기 미 극동군 공군사령관을 지낸 에멋 오도넬은 511월 중순 미 상원 청문회에서 이렇게 증언하였다.

 

한국에는 더 이상의 폭격 목표가 없다. 모든 것이 파괴되었다. 전 한반도는 단지 끔찍한 잿더미일 뿐이다.”

 

중국은 108일 참전을 결정한다. 이로써 전쟁은 미중전쟁으로 전환하게 된다.

 

중국군의 승리 가능성이 높아지자 소련이 11월에 참전하다. 중국군의 인해전술은 오해였다. 중국군은 신출귀몰 식의 유격 전술을 썼다. 중국군의 반격으로 유엔군은 121일부터 후퇴한다. 중국군은 126일 평양을 회복한다.

 

1130일 트루먼은 기자회견에서 원자탄 사용을 적극 검토하고 있다고 선언했다. 도쿄 맥아더 사령부 정보처 특수계획과정이었던 필립 코르소의 증언에 따르면, 한반도에는 이때 이미 40개의 원자탄이 배치돼 있었다. 원자탄 사용 발언에 놀란 영국 수상 애틀리가 미국으로 건너가 트루먼과 회담을 가졌다.

 

전쟁 중 끔찍한 민간인 학살은 도처에서 행해졌다. 1117일 공비 토벌 작전을 하던 국군은 전북 남원 강석리 마을을 습격, 마을 주민 90명을 학살한다. 12월 초순에는 전남 함평 지역에서 국군에 의한 대량 학살이 자행된다. 11사단 20 연대 사병 두 명이 빨치산 습격으로 전사하자, 5중대 군인들은 마을 주민들에게 보복을 했다.

 

군인들은 126일 함평군 월야면 정산리 장교마을에서 20여 명을 사살, 동촌마을에서 30 여명 사살한다. 127일에는 월야면 월악리 내동, 송계, 동산 등 7개 마을을 덮친다. 군인들은 아이들을 시켜 집집마다 불을 지르게 하고 주민 700여명을 동산 마을의 남산뫼에 집결시킨다.


 

11사단 5중대 군인들은 월야면 외치리 외치마을, 나산면 이문리 사정마을, 해보면 상곡리 모평마을, 쌍구룡 , 나사면 우치리 소재마을 등, 모두 여덟 차례에 걸쳐 524명을 학살하고 가옥 1454동을 불태운다. 도대체 왜 이렇게 자국민을 학살한 걸까. 권복기는 또 다른 원인을 말한다.

 

“11사단 최덕신 준장이 내놓은 견벽청야(堅壁淸野)라는 작전 개념이 그것이다. 견벽청야는 중국 한나라 때 변경 지역 방어를 위해 사용된 전술 개념으로 성밖을 말끔하게 치워버리고 성을 굳게 지키면서 적이 오기를 기다린다는 뜻이다.....초토화작전과 비슷하다. 이 작전은 함평 사건이 난 뒤 60여일 뒤 거창에서도 쓰였다. 거창에도 최덕신의 11사단 병력이 투입됐다.

 

당시 9연대는 예하 대대에, 작전지역 내 인원은 전원 총살하라, 공비들의 근거지가 되는 건물은 전부 소각하라, 적의 보급품이 될 수 있는 식량과 기타 물자는 안전 지역으로 후송하거나 불가능할 경우 소각하라는 세 가지 지침을 내렸다.

 

여기에다 군 지휘부에서 각 부대에 내린 것으로 보이는, ‘하루에 공비 50명 이상 사살, 무기 50점 이상 노획이라는 목표가 군인들에게 민간인 학살이라는 손쉬운 전과를 택하도록 했을 가능성도 큰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군인들은 민간인을 학살하고 괭이와 삽을 수거해 노획품으로 보고하기도 했다고.


견벽청야는 실제로 11사단 작전명령 5호였다. 나산면장 이오섭의 개입이 없었다면 더 많은 사람이 살해당했을 것이다. 나산면장 이오섭은 함평경찰서 나산지서장 나병오를 설득해 같이 5중대장 대위 권준옥을 찾아가 항의했다. 이오섭은 권준옥과 그의 부하들에게 몰매를 맞았다. 그러나 이 장면을 본 20연대장은 불갑산 주변의 다른 마을들을 초토화시킬 계획을 포기한다.

 

129일 맥아더에 의해 흥남 철수 명령이 내려진다. 흥남 부두는 아비 규환이었다. 밟혀 죽는 사람이 부지기수였다. 추위에 못이겨 얼어죽은 시체가 매일 밤 수없이 버려졌다. 사람들이 흥남 부두로 몰려든 것에는 미군의 원폭 투하 소문이 큰 영향을 끼쳤다. 마지막 배가 출항하자 미군은 적에게 아무것도 남겨주지 않기 위해 항구에 대규모 함포 사격과 공중 폭격을 가했다. 이 포격으로 죽은 사람들도 부지기수였다.

 

1950419, 미국 보스턴 마라톤 대회에서 함기용, 송길윤, 최윤칠이 나란히 1,2,3등을 차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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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6-07-16 14: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희 작은 할아버지와 할머니께서도 강진에서 인민군에게 죽음을 당하셨는데, 인민군에 의한 죽음이 아니었을 수도 있었겠네요..

시이소오 2016-07-16 14:59   좋아요 3 | URL
에효. 그런 비극이 있었군요. 명복을빕니다.

전쟁통에 너무 많은 국민들이 희생했네요.

두번 다시 그런 비극이 없어야 할텐데요ㆍ

겨울호랑이 2016-07-16 15:0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네 그렇습니다. 시이소오님 덕분에 아픈 과거를 빠르게 리뷰합니다. 그리고 우리 후손들에게는 이런 아픔을 주지 않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네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시이소오 2016-07-16 15:08   좋아요 3 | URL
우리 아이들에게 두번다시 한국전쟁 같은 비극을 물려주지 말아야겠습니다. 응원 감사합니다 ^^

루쉰P 2016-07-16 21: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시생 끝내고 시험 합격함 돈 모아서 이거 현대사 전집으로 살거에요 정말 사고 싶은 책!!!

시이소오 2016-07-16 21:04   좋아요 0 | URL
저도 사고 싶어요 ㅎ ㅎ
합격 기원합니다 ^^

2016-07-16 22: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시이소오 2016-07-17 11:40   좋아요 1 | URL
독재자들, 왜 국립묘지에 묻는걸까요. 부관참시도 관대한 대접이거늘.

법을 고쳐야 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