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한국 현대사 산책 1940년대편 2 - 8.15 해방에서 6.25 전야까지, 개정판 ㅣ 한국 현대사 산책 2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6년 11월
평점 :
1월 8일부터 반민특위의 검거 작업이 시작된다. 화신 재벌 박흥식, 250명의 독립투사를 밀고한 <대한일보> 사장 이종형, 최린, 친일 변호사 이승우, 남작 이풍한, <매일신보> 사장 이성근, 친일 경찰 노덕술, 이광수, 최남선 등이 검거되었다.
노덕술을 총애한 이승만은 노덕술의 석방을 요구하나, 반민특위는 거절한다.
1월 24일 테러리스트 백민태가 서울지검을 찾아가 암살 음모 사건을 고발한다. 반민 특위 간부 15명을 38선까지 유인해 살해한 뒤 월북하려 해 사살한 것으로 위장하라는 지시를 받았다는 것. 친일파들의 암살 음모는 미수로 그쳤으나, 이후 친일파들의 공작은 계속 된다.
내각 구성에서 이승만에게 배신당한 한민당은 신익희와 지청전 세력을 흡수 2월, 10일 민주국민당 (민국당)으로 다시 태어난다.
이승만은 곧이어 학도호국단을 창설한다. 대한민국 국적이 있는 18세 이상 모든 남녀는 모두 국민회에 가입해야 했고, 성년 여성은 대한부녀회, 청년은 대한청년단, 학생은 학도호국단에 가입해야만 했다. 이승만은 국민회비를 내지 않으면 식량배급 통장이나 물자의 배급을 중지한다고 위협했고, 청년단비를 내지 않으면 38선에 보낸다고 위협했다. 학도호군단은 안호상이 맡았다.
1월 중순, ‘수원청년단 사건’이 발생한다. 이 사건은 이른바 ‘대한 관찰부’가 저지른 것이었다. 현대의 국정원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을까. 대한관찰부는 100여 명의 무고한 민간인을 대통령 암살 혐의로 체포, 고문했을 뿐만 아니라 경찰과 군에까지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하였다. 대한관찰부는 48년 7월부터 49년 3월까지 9개월 동안 2억 1천여 만원의 예산을 썼다. 이 당시 상공부 예산이 2억 원이었다고.
5월 20일, 반민특위에서 주도적으로 활동하던 소장파 의원, 이문원, 이구수, 최태규 등이 체포되었다. 이들이 남로당과 연결되어 국회에서 프락치 활동을 했다는 혐의였다. 이른바 ‘국회 프락치’ 사건. 친일파들은 반민특위를 ‘빨갱이 집단’으로 악선전한다.
6월 6일, 중부경찰서장 윤기병이 지휘하는 무장경찰이 반민특위를 습격, 반민특위 요원 35명을 체포한다. 이승만은 그 전에 반민특위 위원장 김상덕의 집을 직접 찾아갔다. 김상덕은 이승만의 청을 거절한다. 즉, 반민특위 습격은 이승만의 보복이었던 셈.
국회 프락치 사건은 재탕, 확대된다. 앞으로도 누누이 보게 되지만 이승만은 좌, 우를 구분하지 않고 토사구팽을 이어간다. 이문원은 한독당원이자 대동청년단원, 노일환, 친일파로 호남 지주 출신의 한민당원, 박윤원은 광복청년단 지방가부, 강욱중, 민족청년단원, 김병회는 독립촉성국민회원, 김약수는 한민당 간부였다.
이승만 정권과 친일세력은 공소시효를 49년 8월 31로 단축하는 ‘반민법 개정안’을 국회에 상정, 통과시킨다. 7월 7일 반민특위 전원이 사임한다. 반민특위는 출발 당시 반민자 7천여 명을 파악해 놓고 있었지만 기소는 221건에 불과했고, 재판이 종결된 것도 38건에 지나지 않았다.
강준만의 말처럼 반민특위는 너무 늦게 시작되었다. 해방 후 3년 여동안 친일파는 막강한 기득권 세력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친일파들은 전혀 반성의 기미가 없었다. 반민특위 제 1조사부장 이병홍은 이렇게 증언했다.
“친일 거두의 집에서 흔히 일본 황제의 사진이 벽상에 조심스럽게 걸려 있는 것이 발견되었다. ....그리고 어떠한 자는 태연하게 우리들 앞에서 이완용의 위대한 민족애를 강조하고 동상 건립의 필요를 역설까지 하였다. ”
6월 5일 이승만은 국민보도연맹을 만든다. 보도연맹을 직접 입안안 인물은 친일파 검사 오제도였다. 보도연맹 가입을 거부하면 폭력과 테러는 물론 형사처벌을 받아야 했다. 경찰과 우익청년단체 특히나 대한청년단은 지역마다 할당된 인원수를 채우기 위해 온갖 패악질을 저지른다. 가입비 300원, 회비 200원을 거두기도 했고, 서울에서는 5만원을 받는 곳까지 있었다.
6.25 전쟁 때 학살된 보도연맹의 수는 최소 20만 명이 될 것이라 한다.
6월 26일, 김구가 경교장 2층 거실에서 현역 육군 소위 안두희에게 암살 당한다. 김구의 국민장엔 100만 명이 넘는 문상객이 조의를 표했고 장례일에 서울에서만 40~50만 명의 인파가 운집했다.
김구 암살 이후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한독당 간부 7명에게 살인교사죄로 구속영장이 발부된 것. 이상하지 않은가. 박근혜가 암살당했는데, 새누리당 의원 7명에게 살인교사죄를 적용한 것과 마찬가지. 김구 암살은 이승만 정권 정보장교였던 김창룡이 작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안두희는 6.25가 발발하자 육군 소위로 복직한다. 51년엔 대위로 진급한다. 소령으로 예편했으며, 예편뒤에는 군납업자로 상당한 재산을 모았다. 안두희가 복직된 후에 이승만은 “이 사람의 인사이동은 내 허락이 없이는 하지 말라”는 지령을 내렸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2001년 발굴돼 공개된 미국 정보장교 소령 조지 실리의 보고서는 미국 배후설을 강하게 부각시켰다.
49년 대한민국은 ‘인권유린의 천국’이라고 불린다.
수사 기관이 십 여개 난립하면서 서로 건수 만들기 경쟁을 벌였다. 어느 경찰서에서 취조를 받았다는 것이 알려지면 다른 경찰서에서도 데려갔다. 이른바 ‘뺑뺑이 취조’라 불린다. 감옥은 죄수들로 흘러 넘쳤다. 모든 형무소는 정원보다 몇 배 많은 인원을 수용했다.
형무소 바깥도 편안한 건 아니었다. 서민들이 내야 하는 세금 종류만 무려 40여 종이나 됐다.
“현금을 받아가는 것이 대한부인회비, 대한청년단비, 대한청년단 작어비, 민보단비, 지서수리비, 지서방야비, 비상경비, 본도비상사태대책위원회 기본보도 비상대책비, 국방협회비, 발란비, 소방협회비, 사회교육협회비, 가축할가축보전비, 축구공제 특별가축비, 농화비, 후생협회비, 수구비, 순가 혹 사망에 경하는 비용, 그 다음에는 국세에 정한 국세의 비용이 가옥세, 차량세, 면새 기타 10여 점, 또 그 다음에 현물로 받아 가는 것이 원공출수량은 내야 됩니다.”
“그 공출 수량을 뺏긴 뒤에는 군용곡량이라고 하고 보리하고 나락을 받아갑니다. 소학교에 대한 선생을 또 무어한다고 보리하고 나락을 받아갑니다. 소학교.....그리고 중학교도 역시 보리와 나락을 양차로 받아 갑니다. 또 도정료 무어라 해서 보리와 나락을 받아 갑니다. 또 구장료 무어라고 해서 보리와 나락을 받아 갑니다. 또 선생을 구제한다고 보리와 나락을 받아 갑니다. 도 산림계에서 환료경제한다고 매 가호에서 700원씩 그 ‘화구’라고 하는 것을 만들어 가지고 받아갑니다. 종종보면 심지어 대통령 사진 비용까지도 받아 갑니다. ....무병잡비용이 스물한 가지, 국세애 대한 비용이 열 한가지, 40여 종의 부담입니다.”
이외에도 서민들은 기부금을 내야했다. 권력기관이나 그 근처 단체들은 수건과 비누등을 강매하고 안 사면 공산당이라 위협했다. 극장표를 무더기로 맡기거나 식량을 내게 하기도 했다. 기부금을 안 내면 협박, 구타, 감금, 침입수사 등이 이러졌고, 군까지 가세했다.
서민들은 기부해야 했고 공출당했으며 고문당했고, 또한 이승만을 숭배해야만 했다. 학교마다 이승만 초상화가 내걸리고, 이승만 생일에 집집마다 태극기를 게양해야 했다.
이 당시 유행한 말이 ‘사바사바’다. 물가는 엄청나게 치솟아 올랐다. 물가 폭등은 모리배들에겐 일확천금의 기회이기도 했다. 그래서 ‘사바사바’는 갈수록 더 성행했다.
‘통역 정치’의 다른 한쪽엔 ‘기독교 정치’ 특히 ‘개신교 정치’가 있었다. 개신교 신자는 10만 명 인구 대비 비율 0. 52%에 지나지 않았지만 46년 미군정 최고위직에 임명된 한국인 50명 가운데 35명이 개신교 신자였다. 이승만, 김구, 김규식이 모두 개신교 신자였다.
한국기독교청년 연합회(기청)은 서북 청년회와 연합한다. 영락교회 청년회는 서북청년단 발족을 주도하기도 한다. 일제 강점기에 개신교는 “귀축미영(귀신과 짐승인 미국과 영국)을 박멸하자”를 목이 터져라 외친, 가장 강력한 반미 세력이었다고 하는데, 해방 후엔 어쩌다가 친미로 돌아선 것일까.
오기영은 개신교가 일제 치하에서 하느님과 돈과 일본이라고 하는 삼위를 섬겼다고 비판한다.
“신사 참배 문제가 일어났을 때에.....예수교에서 얼마나 많은 대일협력자를 내었는가. 얼마나 많은 미영타도의 용감한 투사를 내었는가. 그뿐이 아니다. 진실로 그뿐이 아니다. 서로 일본에 친하기 위하여, 그 앞에 무릎을 꿇기 위하여 서로 싸우고 모해하며 서로 더 황민화의 공적을 나타내기에 노력하지 아니 하였는가.”
일제 강점기엔 반미를 부르짖던 친일파 개신교가 해방 후엔 친미파로 변신한 것은 하느님의 ‘선’하심을 역사하신 걸까.
49년 봄부터 38선 근처에선 무력충돌이 빈번하게 이뤄졌다. 이승만은 연일 ‘북진통일론’을 외쳐댔다. 12월 30일 기자회견에서 이승만은 “ 우리는 새해에 통일을 이룩해야 하며 할 수 있다고 믿는다.”고 말했다. 북한에선 48년 가을 이후 모택동 군대에서 싸운 수천명의 조선인 병력이 북한으로 돌아왔다. 50년 4월에만 약 1만 2천명의 조선인 병사들이 돌아왔다. 북한은 치밀하게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다. 반면 남한엔 탱크 한 대도 없었다.
이승만의 도발에 의해, 한국전쟁은 일어날 수 밖에 없었다.
“이 전쟁에서 사망자, 부상자, 실종자를 포함한 인명 손실은 300만 명으로 전체 인구의 10분의 1이나 되었으며, 1천만 명이 가족과 헤어졌고 500만 명은 난민이 되었다. 이 전쟁은 ”20세기의 그 어떤 전쟁보다도 민간인 희생 비율이 높은 ‘더러운 전쟁’이었다.“ 이 전쟁은 ”그 잔인성에 있어서 20세기의 국제전이나 내전 과정에서 발생한 다른 어떤 학살을 능가하였“으며, ”인간이 인간에게 얼마나 잔인해질 수 있는지를 보여준 전쟁 백화점이었으며, 인간의 존엄성이 얼마나 무참하게 파괴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 살아 있는 인권 박물관이자 교과서였다.“ 전쟁 중 이승만은 너무도 무능했고 부패했고 잔인한 모습을 원없이 보여주었다. 과연 이승만 정권은 ‘국가’였을까? ”
지옥을 살아가고 있던 한국의 국민들과 북한의 국민들,
그들 앞엔 그 누구도 상상치 못한 더 끔찍한 지옥이 아가리를 벌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