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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사 산책 1950년대편 1권 - 6.25 전쟁에서 4.19 전야까지 ㅣ 한국 현대사 산책 3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4년 7월
평점 :
한국전쟁은 ‘톱질전쟁’으로 불렸다. 톱질하듯 왔다갔다하면서 점령과 후퇴를 반복했다는 뜻이다. 전선이 왔다갔다 하면서 죽어나는 건 민간인들이었다.
1월 1일 중국군 6개 군단이 38도선을 돌파하여 남하하기 시작한다. 유엔군의 ‘견벽청야’작전이 시작된다. 유엔군은 후퇴하면서 서울의 웬만한 곳은 모두 다 불을 질렀다.
1월 4일 공산군이 서울에 입성했다. 당시 서울에는 가난하고 오갈 데 없는 노인들 뿐이었다. 치안 공백을 틈타 또 다시 학살이 벌어졌다. 1월 강화도에서 최소 200여명의 민간인이 우익 청년단체에 의해 학살당한다. 부산에서의 피난민의 삶도 아비규환이었다.
맥아더는 원자탄 26개를 폭파할 계획을 워싱턴 합참에 요청하지만 트루먼은 거부한다. 워커의 후임으로 리지웨이가 유엔군을 이끌고 반격에 나선다. 리지웨이의 몰살작전이 시작된다. 추위와 굶주림으로 중국군 병사들이 죽어나간다.
이승만 정부는 ‘국민방위군 설치법’을 공포해, 국민방위군 50만 명을 모집한다. 이 50만 명을 어떻게 후송할 것인가? 답은 걸어서였다. 징집당한 국민방위군은 군복도 없었고, 제대로 된 식사조차 제공받지 못했다. 행군이 계속되면서 동사, 아사, 병사, 낙오자들이 속출했다. 국민방위군의 모습을 본 리영희는 이렇게 증언한다.
“인간을, 포로도 아닌 동포를, 이렇게 처참하게 학대할 수 있을까 싶었다. 6.25전쟁의 죄악사에서 으뜸가는 인간 말살 행위였다. 이승만 정권과 그 지배적 인간들, 그 체제 그 이념의 적나라한 증거였다.”
이승만 정권과 우익 단체들은 국민 방위군 예산 55억을 빼돌렸다.
4월 30일 ‘국민방위군 설치법 및 비상시 향토방위령의 폐지에 관한 법률안’이 상정되어 통과되었다. ‘해골의 행렬’을 시켜놓고 이제 귀환하라는 것이었다.
7월 김윤근, 윤익헌, 강석한, 박창원, 박기환 등 5명이 사형을 당했다. 국민방위군 예산이 국회 내 이승만 지지세력 및 정부 고위층, 군부 내 간부 등에 정치자금으로 유출되거나 뇌물로 상납되었다는 주장들이 제기되었지만 사건 당사자들이 너무 빨리 사형당하는 바람에 사건의 진상은 밝혀지지 않았다.
한국 병사는 ‘어머니’를 부르는 대신 ‘빽’하고 죽었다고 한다. 가진자들은 자식을 군대에 보내지 않았고 빽 없는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만 전쟁터로 나가 총알받이가 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함평에서 524명을 학살한 11사단의 학살극은 2월 경남 거창군 신원면에서 또 다시 발생했다. 11사단 9연대 3대대는 거창에서 민간인 719명을 학살한다. 제 3대대장 소령 한동석은 대현리, 중유리, 와룡리 주민 1천여 명을 신원국민학교로 소집했다. 성인 남자들은 이미 피신을 한 뒤라, 대개 노약자, 부녀자, 어린아이들 뿐이었다. 11사단은 주민들을 박산 골짜기로 끌고 가 기관총으로 집단 학살 후, 휘발유를 뿌려 불태우고 다이너마이트로 폭파시켰다.
거창 사건은 <뉴욕 타임스> 보도로 전 세계에 알려지게 된다. 이승만은 신성모를 국방장관에서 해임시키지만 이후 주일 한국대표로 임명한다. 군법회의는 연대장 오익경에게 무기징역, 대대장 한동석에게 징역 10년, 김종원에게 징역 3년을 선고한다. 그러나 다음해 이들은 사면받고 복권된다.
2004년 한나라당이 발의한 ‘거창 사건 등 관련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조치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괘했으나 정부의 거부권 행사로 보상의 길이 막힌다. 정부의 거부 이유는 100만 명으로 추산되는 다른 한국 전쟁 민간인 피해자와의 형평성 문제와 보수 단체의 반발 때문이었다.
3월 14일 국군과 미군이 ‘공동묘지’로 변한 서울을 재탈환한다. 이승만과 맥아더는 연일 북진을 주장하였다. 트루먼은 4월 11일 맥아더를 해임시킨다.
이승만과 한국의 많은 반공주의자들은 맥아더가 핵폭탄을 투하하지 않은 걸 안타깝게 생각한다. 그러나 한홍구에 따르면, 맥아더의 만주 폭격 구상이 실현되었다면 즉각 제 3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질 일이었다.
소련과 미국, 중국, 북한의 이해에 따라 7월 10일 정전 협상이 시작된다. 휴전 협상이 진행되던 시기에 미군은 북한을 폭격하기 바빴고, 북한군 잔류 세력을 빨치산 투쟁으로 바빴다. 미군의 ‘쥐잡기 작전’이 시작된다. ‘쥐잡기 작전’ 이후에도 빨치산 토벌은 계속된다.
53년 9월 18일 남부군 총사령관 이현상이 사살된다. 이현상은 빨치산 투쟁을 하긴 했지만 남북 그 어느쪽에도 속하지 못한 중간파적인 성격이 농후했다.
‘마지막 여자 빨치산’으로 알려진 ‘지리산의 전설’ 정순덕이 입산 12년 만인 63년 11월에 체포된다.
이승만은 자유당을 창당한다. 자유당 창당의 대업은 이범석이 맡았다. 12월 17일 이범석을 중심으로 한 자유당이 탄생한다. 그러나 12월 23일 소장파 의원들을 중심으로 또 다른 자유당이 탄생한다.
전쟁 중에도 학교는 열렸다. 대학 강의도 임시대학에서 계속 되었다. 대학생의 경우 징집을 피할 수 있었다. 과연 이 당시 대학생이라면 어떤 계층의 사람들이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