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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일 오전에 (실상과 다르더라도) 느긋한 마음으로 '이주의 저자'를 고른다. 세 권 이상의 책을 낸 저자나 역자가 대상인데, 이주에는 이탈리아 작가 안토니오 타부키(1943-2012)와 중국의 일본사상사 연구자 쑨거, 그리고 오랜만에 책을 낸 자칭 '전직 출판평론가' 표정훈씨를 무대에 올려놓는다.

 

 

먼저 국내 독자들에겐 생소한 편인 안토니오 타부키의 책이 '인문서가의 꽂힌 작가들' 시리즈로 세 권이 한꺼번에 나왔다(이 시리즈의 다른 작가로는 조르주 페렉이 있다). '안토니오 타부키 선집'을 꾸릴 기세인데, 8권 정도가 기획돼 있다. 이번에 나온 <꿈의 꿈>, <플라톤의 위염>, <수평선 자락>은 주로 1990년대 전후에 발표된 에세이들이다. 현대 이탈리아 작가들 중에서도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는 그의 문학적 개성이 우리에겐 어떤 인상으로 남을지 궁금하다. 가령 <꿈의 꿈> 같은 건 작가가 사랑한 스무 명의 창조적 개인들의 꿈을 기술하고 있는데, '작가이자 의사, 안토 체호프의 꿈'을 보니 체호프의 전기와 작품이 재료가 돼 실제로 꾸었을 법한(그리고 잊어먹을 수도 있는) 꿈 이야기가 펼쳐진다. 독특한 발상인 것만은 틀림없다.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타부키의 포르투갈 사랑이다. 포르투갈 작가 페르난두 페소아의 작품을 번역하고 연구서까지 낸 경력이 있는데, 그 정도는 그 사랑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타부키는 이탈리아에서 태어나 교육을 받았지만 평생 포르투갈을 사랑했고 포르투갈 여자를 아내로 삼았으며 포르투갈의 문화를 연구하고 소개했다. 피사대학에서 포르투갈 문학을 전공했고 리스본의 이탈리아 대사관에서 일했으며 시에나 대학에서 포르투갈 문학을 가르쳤고 페르난두 페소아의 작품을 번역했다. 또 그의 작품들 상당수는 문학, 예술, 음식에 이르기까지 포르투갈의 흔적들로 채워져 있다. 포르투갈은 그에게 영혼의 장소, 정념의 장소, 제2의 조국이었다.

작년 봄 그는 포르투갈의 리스본에서 세상을 떠났고 고국 이탈리아에 묻혔다고 한다. 포르투갈에서 문화훈장이라도 주어야 마땅하지 않을까 싶다.

 

 

타부키의 소설로는 <페레이라가 주장하다>(문학동네, 2011)가 이미 나와 있다. 그리고 페소아의 책으론 <불안의 책>(까치, 2012)이 작년에 소개된 바 있는데, 이 방대한 분량의 책에 대한 관심이 다시금 생긴다(물론 책은 구입했지만 현재로선 어디에 두었는지 찾을 수 없다). 잠 못 드는 봄밤에는 '타부키와 함께 페소아를' 읽어보아도 좋겠다... 

 

 

 

두번째 저자는 <아시아라는 사유공간>(창비, 2003), <다케우치 요시미라는 물음>(그린비, 2007)이란 책으로 소개됐던 중국의 연구자 쑨거. 1955년생이고 현재는 중국사회과학원의 연구원으로 있다.

 

 

이번에 논문집 <사상이 살아가는 법>(돌베개, 2013)과 함께 번역자이자 같은 동아시아 연구자인 윤여일과의 대담 <사상을 잇다>(돌베개, 2013)가 나란히 출간됐다. 연배로 치면 '다케우치 요시미-쑨거-윤여일'이라는 고리도 가능하다. 어떤 물음, 어떤 사상이 이어지고 있는가. 소개에 따르면 '동아시아 문제'와 '사상의 번역' 등이 공통의 화두다.

 

 

다케우치 요시미는 <루쉰>(문학과지성사, 2003)과 <일본과 아시아>(소명출판, 2004)에 이어서 재작년에 두 권의 선집 <고뇌하는 일본>과 <내재하는 아시아>가 출간됐는데, 이 두 권 모두 윤여일의 번역이다. 늘 마루야마 마사오와 함께 거론된다는 다케우치는 마루야마와는 달리 학계의 변방에 있었고 '학문적 이방인'이었다. 그렇지만 특이하게도 중국학자 쑨거에게서 자신의 계보를 얻는다. 말하자면 '루쉰-다케우치 요시미-쑨거'라는 계보다.

다케우치 요시미는 일본 사상계에서 아직 ‘전통’으로 자리 잡지 못한 특이한 사상가이다. 그를 자리매김하는 것, 계승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의미다. 그는 학술적인 방식으로 글을 쓰지 않았기에 엄밀한 의미에서 ‘학자’가 아니었다. 평론가였고, 늘 문학을 자신의 영혼이 돌아갈 거처로 삼았다. 그럼에도 일본근대사상사의 중요한 모든 과제에 관심을 기울였고, 역사에 그 흔적을 남겼다. 하지만 다케우치 요시미는 일본이 아닌 중국에서 사상의 동반자인 루쉰(1881-1936)을 만났고, 그의 사후에도 쑨거라는 이방의 계승자를 얻는다.

 

한국에서 이 계보는 거의 전적으로 윤여일의 번역 작업으로 소개될 수 있었다. 흥미로운 일이면서 주목할 만한 업적이라고 생각한다. 젊은 연구자의 <여행의 사고>에 뒤이은 <사상의 여정> 또한 기대해봄직하다.

 

 

표정훈의 <철학을 켜다>(을유문화사, 2013)은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지만 입문서이고 가이드북이다. 제임스 러브록, 맬컴 엑스, 마틴 루서 킹, 마르코스 부사령관 같은 인물들도 포함돼 있지만 대략적으로는 '철학에 관한 책'이거나 '철학 인물지'에 해당한다. 저자는 '타자의 문제'라는 화두로 고대 그리스에서 20세기에 이르는 '철학자들'의 사상과 행적을 추적하고 요약한다. 하룻밤에 읽기엔 분량이 좀 되지만 이틀밤 정도라면 읽어봄 직하다. <하룻밤에 읽는 동양사상>(랜덤하우스코리아, 2010)이나 저자의 스승 강영안 교수와의 대담 <철학이란 무엇입니까>(효형출판, 2008)과 같이 읽어봐도 좋겠다. 어느 순간 생각이 'ON AIR' 상태가 될지도 모를 일이다...

 

13. 04. 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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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랭 드 보통이 니얼 퍼거슨을 만난다는 착상은 나의 것이 아니다. 로먼 크르즈나릭의 <원더박스>(원더박스, 2013)를 두고 로버트 켈시란 이가 "알랭 드 보통이 니얼 퍼거슨을 만났다고 생각하라... 일상생활에 관한 번뜩이는 아이디어들과 사회사가 적절하게 만난 기막힌 책이다."라고 평했다(책 제목이 <원더박스>인데, 출판사도 원더박스인 걸 보면 아마도 이 책에 꽂혀서 책을 내기 시작한 곳인가 보다. 이제까지 세 권의 책을 냈고 폴 우드러프의 <아이아스 딜레마>는 관심도서다). 

 

 

로버트 켈시는 <무엇 때문에 망설이는가?>란 책의 저자로 나오는데, 국내에 소개된 바 없는 듯하니 별로 의미가 없다. 하지만 <원더박스>란 책에 대한 관심을 부추기는 데에는 부족함이 없어서 나는 망설임 없이 책을 펼쳐들었다. 오호, 더 강력한 추천사가 버티고 있었다!

"지난 3,000년 역사를 활용하지 못하는 사람은 하루살이 같은 인생을 살 뿐이다." -괴테

물론 괴테가 이 책을 추천한다는 건 난센스이지만, 효과는 같다. 저자가 말하길 이 책은 괴테의 생각에 대한 경의의 표시이기 때문이다. 곧 고대 그리스부터 현대까지 최근 3,000년을 살펴보면서 열두 가지 주제에 대한 성찰을 얻는다는 것이 그의 발상이다. 그걸 뭉뚱그리자면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성찰이다.

 

 

주제 면에서 보자면, 작년에 나온 사라 베이크웰의 <어떻게 살 것인가>(책읽는수요일, 2012)에 이어진다고 할까. 아, 유시민의 <어떻게 살 것인가>(아포리아, 2013)도 있다. 역사가 아닌 철학에서 도움을 얻고자 한다면, 제임스 밀러의 <성찰하는 삶>(현암사, 2012)도 같은 계열이다. 요컨대 이런 책들에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원더박스>의 독자이기도 하다는 것.

 

 

제목 '원더박스'는 무슨 뜻인가. 얼핏 진기한 물건들을 모아놓은 상자처럼 보이는데, 상자보다는 규모가 더 클 수도 있다. 저자의 설명이다.

나는 역사를 르네상스 시대 '호기심의 방'과 유사한 '원더박스'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독일인들은 이를 분더캄머(Wunderkammer)라고 불렀는데, 쉽게 말하자면 수집가들이 여기저기서 모은 매혹적이고 진기한 물건들을 전시하는 공간이었다.(...) 역사도 마찬가지로 각종 문화의 보고이다. 역사를 통해 흥미로운 이야기와 사상이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전해진다. 르네상스 시대 분더캄머는 집안의 유물이었지만 역사는 인류가 공유하는 유산으로서 훨씬 더 많은 사람에게 개방되어 있다. 말하자면 역사는 누구나 의지만 있으면 마음대로 선택해서 숙고하여 교훈을 뽑아낼 수 있는 흥미진진한 인류의 유산이다.

문득 드는 생각은 이 책의 역사학 개론의 참고문헌으로도 활용될 수 있겠다는 것이다. '역사의 효용'을 설명하기에 적당하지 않을까. 혹은 역사의 매력?

 

 

 

역사의 의미와 효용, 그리고 매력 등에 마음이 끌린다면 크라카우어의 <역사: 끝에서 두번째 세계>(문학동네, 2012)와 앤 커소이스 등의 <역사, 진실에 대한 이야기의 이야기>(작가정신, 2013), 그리고 최근에 나온 하위징아의 <역사의 매력>(길, 2013)과 나란히 꽂아두어도 되겠다. 우리는 역사에서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

역사로부터 배운다 함은 어찌 보면 선조들의 세상살이 방식 중에 가장 바람직하고 설득력 있는 것들을 찾아내고 실천한다는 의미다. 하지만 동시에 (스스로도 모르는 새에) 과거로부터 물려받은 다양한 사고방식과 태도를 깨닫고 인식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

과거와 현재의 연결점을 찾아내어 인간관계에 깊이를 더하고, 먹고사는 방식을 재고하고, 세상과 자아를 탐구하는 새로운 방식을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이게 해줄 상상의 다리를 만들어내자는 것이 이 책의 취지다.

이 정도면 '프롤로그'로서도, 그리고 구미를 자극하는 에피타이저로서도 충분하다. 첫 장으로 넘어가도 좋겠다.

 

 

 

그런데, 로먼 크르즈나릭이란 이름과는 초면이 아니다. 알랭 드 보통이 참여한 '인생학교' 시리즈의 <일>(쌤앤파커스, 2013)의 저자가 크르즈나릭이다(보통은 <섹스>를 맡았다). <원더박스>에서 다루는 열두 가지 주제 가운데 하나가 '일'이므로 얼마간 겹치지 않을까 싶다. 그러니까 <인생학교>의 연장선상에서 읽을 수도 있겠다. 

 

 

 

퍼거슨은 어떤 퍼거슨으로 할까. <시빌라이제이션>(21세기북스, 2011)이 먼저 떠오르지만, '돈'이란 주제와 관련해서는 <금융의 지배>(민음사, 2010)나 <로스차일드>(21세기북스, 2013)의 저자와 비교해볼 수 있겠다. 식품업계의 용어로 하면 '니얼 퍼거슨 향'이 난다고 해야 할까. 그러니까 알랭 드 보통과 니얼 퍼거슨이 만난다는 말은 '보통 맛 + 퍼거슨 향' 정도로 이해할 수 있겠다.

 

이제는 당신이 고리를 잡고 박스를 열어볼 차례다...

 

13. 04. 06.

 

 

 

 

P.S. '인생학교'에 견줄 만한 시리즈는 최근에 나온 '삶의 기술' 시리즈다. 나는 에릭 로너건의 <돈이란 무엇인가>(파이카, 2013)와 토드 메이의 <죽음이란 무엇인가>(파이카, 2013)를 일단 구입했는데, 읽어보고 괜찮으면 나머지 주제들에 대해서도 손을 대볼 생각이다. 현재 여섯 권이 나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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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나온 교육 관련서로 눈에 띄는 책은 만프레드 슈피처의 <디지털 치매>(북로드, 2013)와 나이토 아사오의 <이지메의 구조>(한얼미디어, 2013)다. 리뷰를 검색해보니 <디지털 치매>에 대해선 기사가 많이 나와 있어서 군말을 덧붙일 필요가 없을 듯하지만, '머리를 쓰지 않는 똑똑한 바보들'을 양산해내는 디지털 시대의 교육에 대해 다시금 경각심을 가질 필요가 있겠다 싶어서 언급한다. 

 

 

 

경영컨설턴트인 니콜라스 카도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청림출판, 2011)에서 비숫한 경고를 해준 바 있는데, <디지털 치매>는 그 연장선상에서 읽어도 좋겠다. '서장'은 "구글은 우리를 바보로 만들고 있는가?"란 기고문 제목을 인용하면서 시작한다. 이 기고문의 저자가 바로 '니컬러스 카'다. 독일의 뇌과학자인 슈피처는 문제가 더 심각하다고 생각한다.

단순히 멍청해지는 것만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현대 뇌과학의 연구 결과, 디지털 미디어에 너무 많이 노출될 경우 심각한 문제를 초래할 수 있다는 사실이 속속 입증되고 있다. 우리의 뇌는 지속적인 변화 과정을 겪고 있기 때문에, 디지털 미디어를 날마다 이용할 경우, 그나마 요행이 따른다면 아무런 (나쁜) 영향도 받지 않게 된다.

마지막 문장은 가정으로 읽어야 한다. 뇌가 디지털 미디어에 '적응'하여(자연계에서라면 진화적 시간이 걸린다) 디지털 환경에 맞게 최적화가 된다면 또 별 문제이겠지만(그때의 뇌도 여전히 뇌라고 부를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뇌의 종말에 더 가깝지 않을까?) 현재로선, 현재의 뇌로선 디지털 환경에 과도하게 노출되는 것이 치명적이라는 얘기다. 학교 교과서를 전자 교과서로 모두 대체하겠다는 발상도 교육 당국에서는 하고 있는 모양인데, 슈피처는 학습용 컴퓨터를 영화에 비유하여 이렇게 경고한다.  

"우리는 이 영화를 사랑했다. 한 시간 동안 생각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교사들은 이 영화를 사랑했다. 한 시간 동안 수업을 하지 않아도 됐기 때문이다. 학부모들도 이 영화를 사랑했다. 자녀들이 다니는 학교가 기술적으로 최고 수준에 이르렀음을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아무것도 배우지 못했다."

다음 세대를 생각하는 교사나 학부모라면 함부로 생각하지 말아야 할 경고다.

 

 

 

이지메 혹은 집단따돌림 현상은 학교폭력과 함께 교육현장의 골칫거리이자 숙제다. '왜 인간은 괴물이 되는가'란 부제를 달고 있는 <이지메의 구조>는 이지메 원산지의 전문가가 쓴 책이란 점에서 눈길을 끄는데, 저자 나이트 아사오는 현재 메이지대학 교수로 재직 중인 사회학자로 <이지메의 사회이론>, <이지메학의 시대>, <이지메와 현대사회> 등의 저작을 갖고 있다. 한마디로 '이지메학' 전문가.

 

저자는 이지메가 학교에서만 발생하는 현상이 아니라 온갖 사회집단에서 관찰되는 보편적인 현상이라고 보며 그 심층적 메커니즘을 추출해내려고 한다. 이를 위해 '중간집단전체주의'란 개념을 제안하는데, 그 정의는 이렇다.

"개개인의 인간 존재가 공동체를 강요하는 집단이나 조직에 전적으로 흡수되어야만 하는 강제적인 경향이 어떤 제도, 정책적인 환경 조건하에서 구조적으로 사회에 번성하고 '긴타로 엿'처럼 사회에 편재되어 있으면, 그 사회를 중간집단전체주의 사회라고 할 수 있다."

 

긴타로 엿은 일본의 전설적인 영웅 긴타로의 얼굴이 새겨진 엿으로 어디를 잘라도 단면에 그 얼굴이 나타난다고 한다. '천편일률적인 현상'을 가리킨다고 하는데, 그런 획일성이 강제되는 사회의 새로운 유형이 중간집단전체주의 사회다. 이러한 분석의 유효성과 한국 사회에 대한 적용 가능성 등은 책을 읽으면서 더 생각해볼 문제다.

 

한 가지 흠을 적자면, 책에서는 3장 제목인 '치유로써의 이지메'도 그렇고 '-로서의'라고 해야 할 대목을 모두 '-로써의'라고 오기하고 있다(그러니 실수가 아니라 신념이다). 편집자의 무지 탓인지, 아니면 무심 탓인지 알 수 없으나 책에 대한 신뢰를 잠식한다. 오탈자 때문에 독서가 방해받지 않도록 신경을 좀 써주었으면 싶다...

 

13. 04. 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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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의 책'을 미리 골라놓는다. 타이틀은 니시오카 쓰네카즈의 <나무에게 배운다>(상추쌈, 2013)에서 가져왔다. 발행일이 4월 5일로 돼 있는데, 물론 '식목일'을 염두에 둔 것이겠다. 이주의 책을 고르면서 나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은 흔적도 없지만 예전에 <나무의 마음 나무의 생명>(1996)이란 제목으로 나왔었다 한다. 일본 목수 장인의 지혜와 성찰을 담은 책.

 

 

두번째 책은 도쿠무라 아키라의 <숲에서 배우다>(고인돌, 2013). 저자가 "에서 새롭게 살며 도시의 기계 문명으로 망가진 몸을 치유하면서 배우고 깨우친 이야기들"이다. 세번째 책은 일본 철학자 이즈쓰 도시히코의 <의식과 본질>(위즈덤하우스, 2013). <의미의 깊이>(민음사, 2004)의 저자가 쓴 책이라 관심이 가서 바로 주문했다. 저자는 "불교·선불교·노장사상·공맹사상·신유학·힌두교·탄트라·이슬람·카발라 등 동양철학에 속해 있는 갖가지 종교와 민족의 수많은 사상의식을 ‘본질’이라는 서양철학의 키워드를 빌려 동양철학을 관통하는 하나의 흐름을 제시한다."

 

 

네번째 책은 하버드대학 교수이면서 동서양 비교의학사의 최고 권위자라는 시게히사 구리야마의 <몸의 노래>(이음, 2013). "대 그리스 의학과 한의학이 구축한 몸과 의료에 대한 서로 다른 시각을 다룬 연구서"다. 동서양 비교의학사라는 게 어떤 분야인지 궁금하다. 다섯번째 책은 요네하라 마리 여사의 <언어 감각 기르기>(마음산책, 2013). 일본의 명사 11인과 나눈 대화를 담았다. 언제나처럼 유쾌한 지식과 감각의 성찬이 벌어지지 않을까 한다. 이번주에는 일본인(일본계) 저자의 책만으로도 다섯 권을 거뜬히 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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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에게 배운다- 비틀린 문명과 삶, 교육을 비추는 니시오카 쓰네카즈의 깊은 지혜와 성찰
니시오카 쓰네카즈 구술, 시오노 요네마쓰 엮음, 최성현 옮김 / 상추쌈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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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에서 배우다- 숲 문화와 숲 속 학교
도쿠무라 아키라 지음, 소진열 옮김 / 고인돌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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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과 본질
이즈쓰 도시히코 지음, 박석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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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몸의 노래- 동양의 몸과 서양의 몸
구리야마 시게히사 지음, 정우진 외 옮김 / 이음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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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주말판에 실린 '로쟈의 번역서 읽기'를 옮겨놓는다(이 연재는 대략 5주에 한번씩 게재된다). 프란츠 카프카의 <소송>에 대한 간략한 소감을 적었다. 인용한 대목 번역은 내가 갖고 있는 예닐곱 권의 책을 모두 참고했는데, 대동소이한 걸 제외하고 몇 개만 나열한 것이다. 기사에서는 K를 '케이'라고 음역했는데, 독어식으로 하면 '카'라고 읽어주어야 한다. 아예 '요제프 카'라고 옮긴 번역본들도 있다... 

 

 

 

한겨레(13. 04. 06) 인간이란 사실이 죄가 될 수 없다면 나도 무죄다

 

“누군가 케이(K)를 중상모략한 게 분명했다. 아무런 나쁜 짓도 하지 않았는데 이날 아침 느닷없이 그가 체포되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세계 문학사의 유명한 서두 가운데 하나일 <소송>의 서두이다. 어느 날 느닷없이 체포되는 ‘케이’(K)와 마찬가지로 아무런 잘못도 없는 독자도 작품을 손에 드는 순간 케이의 부조리한 ‘소송 이야기’에 휘말리게 된다. 흥미로운 건 미완성 소설임에도 카프카가 마지막 장 ‘종말’을 ‘체포’라고 제목을 붙인 첫 장과 함께 써두었다는 점. 서른한번째 생일 전날 밤에 찾아온 두 남자에 의해 채석장으로 이끌려간 케이는 순순히 칼에 찔려 죽는다. “개 같군!”이란 말을 내뱉지만 그가 죽어도 치욕은 남을 것만 같았다는 게 마지막 문장이다.

 

아무런 나쁜 짓도 하지 않은 케이가 자신의 무죄를 입증하고 중상모략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까? 숙부의 권유에 따라 변호사도 선임해보지만 소송은 지지부진하게 진행된다. 그러다 도움을 얻기 위해 만난 화가는 케이가 법원에 대해 잘 모른다고 꼬집으면서 석방의 세 가지 가능성을 설명해준다. 실제적 무죄 판결, 외견상의 무죄 판결, 그리고 판결 지연이 그것이다. 이 중 실제적 무죄 판결은 유례가 없기에 가능한 선택지가 아니다. 남은 건 외견상의 무죄 판결을 받거나 판결을 지연시키는 것뿐인데, 이를 위해서는 피고인이나 그 조력자가 법원과 끊임없이 사적으로 접촉해야만 한다.

 

판사나 법원 관계자들과의 사적인 연줄이 중요하기에 변호사는 의뢰인보다도 우월하게 행세한다. 케이는 지지부진한 소송 진행에 책임을 물어 변호사를 해임하러 간 자리에서 자신과 같은 처지의 상인이 변호사의 환심을 사려고 구차하게 행동하는 걸 본다. ‘변호사의 개’나 다를 바 없었다. 영문을 모르더라도 일단 체포된 상황이라면 결국 두 갈래 선택지만 남는다. 외견상의 무죄 판결이나 판결 지연을 위해 힘을 써주겠다는 변호사의 ‘개’가 되거나, 그런 변호를 포기하고 개 같은 죽음을 죽거나. 분명 부조리해 보이지만 이 부조리가 소설 속 이야기만은 아니라는 데 이 작품의 문제성이 있다. 부조리의 보편성이라고 할까.

 

 

 

<소송>의 클라이맥스는 ‘법 앞에서’라는 우화가 포함된 ‘대성당에서’ 장이다. 교도소 전속 신부는 케이와 자리를 마련하고 소송의 경과가 좋지 않다고 일러준다. 사람들은 케이의 죄가 이미 입증된 걸로 생각하기에 상급 법원으로 넘어가지도 않을 거라면서. 케이는 한번 더 자신이 죄가 없다고 항변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도대체 어떻게 인간이 무죄일 수 있을까요?”(홍성광 옮김·펭귄클래식) 이 대목은 보통 다르게 번역된다. “도대체 인간이라는 사실이 어떻게 죄가 될 수 있단 말입니까?”(권혁준 옮김·문학동네) “사람이 어떻게 죄를 짓겠습니까?”(김재혁 옮김·열린책들) “도대체 인간이 어떻게 죄가 될 수 있단 말입니까?”(이주동 옮김·솔)

 

무죄를 주장하는 케이의 논거는 특이하게도 자신이 ‘인간’이라는 점이다. 우리는 모두 인간이며 인간이라는 사실 자체가 죄가 될 수 없다면 자신도 무죄라는 것이다. 이것은 거꾸로 케이가 유죄라면 인간도 유죄라는 뜻도 된다. 그런 점에서 케이는 ‘단독적 보편성’을 체현하는 인물이다. <소송>을 읽으며 아무래도 좋지 않은 소송에 말려든 느낌이다.

 

13. 04. 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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