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실이나 베란다에 빨래를 널 때마다
그리고 걷을 때마다
이건 아니었지 싶다
빨래건조대에 집게도 없이 널었다가
거두어들이는 빨래라니

빨래란 모름지기 옥상에다 널어야 하는 것
손빨래 대신 세탁기를 돌린다 해도
빨래는 옥상에서 말려야 하는 것
마치 식물처럼
빨래한테도 햇볕과 바람이 필요하기에

햇볕 받으며 마른 빨래는 촉감이 다르지
바람에 한껏 부풀어올랐던 빨래는
생각의 품도 다를 거야
흰 빨래는 그렇게 다시 희어지고
젖은 삶은 그렇게 생기를 되찾고

언젠가 옥상에 널었던 빨래가
소나기에 흠뻑 젖은 날도 있었지
부리나케 뛰어갔지만
소나기를 따라잡을 수는 없었어
거둬다가 세탁기에 도로 넣을 수밖에

하지만 마음은 즐거웠지
다시금 헹궈지면서 빨래도 즐거웠을까
인생은 모험이란 걸 알게 되었으니 말이야
그래서 빨래는 옥상에 널어야 하는 거지
집게로 집어서 빨랫줄에 널어야 하는 거지

그랬던 시절이 있었지
빨래건조대에 누워 있는 것 같은 날
나는 옥상이 그리워진다네
이건 아니었지 싶으면서
햇볕과 바람과 소나기가 그리워진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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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ngles 2018-11-06 0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건조된 옷이 머금은 햇볕과 바람냄새 참 좋지요~^^ 하지만 요즘은 건조기가 다 해준다는..ㅋ

로쟈 2018-11-06 22:02   좋아요 0 | URL
편리해지면서 잃어버리는 것들도 많아지고 있네요.
 

국경을 지나니 아침이었다
가슴에 손을 대 패스포트를 확인하고
다시 눕는다
지나온 날들이 모두
되돌아갈 수 없는 나라
무단잠입한 경우는 있었지
영원한 반복은 믿을 수 없어도
어쩌다 반복은 가능하니까
두번째 스물이 가능하고 두번째
서른이 가능한 것처럼
그때도 슬픈 서른일까
반복은 감정을 무디게 한다네
괴테의 모든 사랑은 첫사랑의 반복이었지
되돌려받으려는 몸짓이었지
사랑은 얼마나 지루한 것일까
그 많은 사랑이 사랑의 무덤일 것이니
눈 뜨면 나는 전철을 타고 있네
서울역에서 청량리까지
지하철이 첫 운행한 날도 있었지
그날은 대통령도 지하철을 탔지
모두가 가슴이 벅찬 날이었지
세월이 지나 아침 전철은 지옥철이 되었지
그 아침에 나는
어제 넘은 국경을 떠올린다
모두가 쉽게 넘어온 건 아니다
언젠가 나도 넘어질 날이 오겠지
모든 죽음이 첫 죽음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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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사랑해도 잃을 수가 있다
내가 잊은 것인가 잊힌 것인가
책은 자주 보이지 않기로 작정하고
나는 책에게 약점을 잡힌다
사랑에 빠진 자들은 굽신거린다
보이지 않는 것들을 당할 수는 없다
나는 수시로 책을 잃어버린다
나는 무엇을 찾고 있는가
잃어버리고서야 시작되는 사랑
아, 어떤 책은 절판된 뒤에야!

사랑은 무엇이건 공백을 만든다
공백은 확고하다 비누칠이라도 하고 싶다

언제가 나 또한 누군가의 공백이 되리
아끼던 비누를 당신에게도 빌려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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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wo0sun 2018-10-29 22: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있으나 잃어버린(못찾는) 책이 어떤 책 이길래~
~을이 아닌 ~들을 사랑하시니 (너무 많은 ~들을)
그(들)의 소심한? 복수가 아닐런지요.
작정하고 보이지 않기로ㅎ

로쟈 2018-10-31 07:56   좋아요 0 | URL
심지어 작당.~

탐서가 2018-10-31 14: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춘천 데미안책방서 발견했었던 책~^^
 

너는 어디에 어느 뜨락에
어느 탁자에 너는 눈을 뜨고
새장의 문을 열고 너는 기지개를 켜고
너는 아침의 신호가 되고 너는
어디에서건 너다운 표정을 완성해야
하기에 너는 포장된 미소를 뜯어서
오늘을 위해 남겨둔 말들과 나란히
걸어두고 너의 걸음은 유난히

유난스럽지 않은 소리를 내며
활보할 차비를 하지

그날이 마지막 날이었을 테지

너는 어디에서건
존재할 준비가 되어 있었지
이제는 어느 뜨락에 뜬 달처럼
어디에서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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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별에도 예식이 있지
나뭇잎이 가지를 떠날 때
정해진 날짜에 이사를 떠나는 것처럼
가지는 나뭇잎을 떠나보낼 채비를 하고
웅크린 나뭇잎은 마지막 인사를 남기고
밖에서 문을 닫고
안에서 문을 닫아걸고
마지막 포옹은 어디에서 나눈 건지
생각에 잠길 즈음
이미 나뭇잎은 길바닥에서 몸을 떤다
인연은 그렇게 완성된다는 듯이

무성한 인연들이 한여름 푸르렀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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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제트50 2018-10-02 07: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리하여 가지는 안으로 더 단단해지고
마침내 나뭇잎은 해방되었겠죠~

며칠전 설교에서
새는 하늘에서 자유롭고
물고기는 물에서 자유롭고
인간은 신 안에서 자유롭다 하셨는데..
그 와중에 니체, 고독한 영혼에
마음 쓰였다는...

로쟈 2018-10-02 16:02   좋아요 0 | URL
나뭇잎이 심정을 가질 리는 없고 그렇게 보는 거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