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에서 기획특집 '민주화 20년, 지식인의 죽음'에서 지난주부터 '우리사회의 담론 풍경'을 다루고 있다. '지식인의 죽음'과 직접 관련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주도적인 담론의 변화과정이 한국사회사의 축도가 되기도 한다는 점에서 한번쯤 읽어봄 직하다. 이번주 '동아시아론'까지 옮겨놓는다.  

경향신문(07. 07. 14) [민주화 20년, 지식인의 죽음]Ⅳ-(1)우리사회의 담론 풍경:총론

2007년 여름, 새로운 밀레니엄이 열린 지 오래이건만 우리 사회에서 이제 한 시대가 끝나고 있다는 느낌은 나만의 것일까. 그것은 두 가지 이유, 민주화시대 20년과 이를 결산하는 12월 대통령 선거가 주는 함의 때문인 듯하다. 해방 이후 60여년간 숨가쁘게 달려온 건국, 산업화, 민주화가 이렇게 한 순환을 마감하고 있다. 우리 사회는 어디에 서 있고 어디로 가고 있는가. 실존적 거점과 전략적 방향에 대한 질문에 지식 사회는 어떤 응답을 하고 있는가.

지난 20년 동안 우리 사회 담론의 역사는 민주화 과정에 못지않게 드라마틱하다. 1980년대가 사회 구성체 논쟁으로 대표되는 마르크스주의와 민족해방주의의 분출로 특징지어진다면, 1990년대는 ‘문화의 시대’의 도래와 외환위기의 충격에 대한 대응이 담론의 흐름을 주도해 왔다. 2000년대에 들어와 우리 사회 담론의 지형은 이제까지 제출된 이론적 테제와 경험적 분석들이 심화되고 분화되는 경향을 보여 왔다.

주목할 것은 최근 우리 사회 담론의 지형이 좌파 대 우파, 보수 대 진보의 이분법적 구도를 넘어서 복합 구도를 형성해 왔다는 점이다. 그것에는 이념적 구도와 탈이념적 구도가 혼재하며, 서구주의와 비서구주의가 공존한다. 세계주의 대 민족주의, 현대 대 탈현대, 시장주의 대 국가주의, 개인주의 대 공동체주의, 개발주의 대 생태주의 등 복합 구도가 현재 우리 인문·사회과학 담론의 풍경을 이루고 있다.



# 세계주의 대 민족주의

세계주의와 민족주의의 충돌은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인문·사회과학 전반을 이끌어온 구도다. 오늘날 세계화가 우리 삶과 사회를 송두리째 변화시키고 있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세계주의 담론은 이중적 속성을 갖는다. 한 편에서 그것은 ‘글로벌 스탠더드’로 표현되는 보편주의를 강조하지만, 다른 한 편에서는 서구 제도 및 가치를 특권화하는 오리엔탈리즘, 다시 말해 서구중심주의를 내포한다.



민족주의는 세계주의에 맞서는 담론이다. 우리 민족주의 담론은 서구의 그것과는 사뭇 다르다. 우리에게 민족주의는 이른바 ‘근대의 발명품’ 이상의 것이며, 무엇보다 제국주의에 맞서는 민족해방주의의 전통을 이어 왔다. 문제는 민족주의에 내재된 집단주의 성향과 과잉 애국주의 경향이다. 이 점에서 ‘민족주의는 없다’는 일각의 주장은 예각적이지만 여전히 음미할 만하다.

민족주의와 세계주의의 충돌에서 주목할 것은 동아시아(또는 동북아시아) 담론이다. 민족국가와 세계체제 사이에 존재하는 지역체제로서의 동아시아의 역사와 사회를 새롭게 이론화하려는 동아시아론은 동도서기(東道西器)론의 21세기 버전이자, 팍스 아메리카나(Pax Americana)의 대항 담론이다. 동아시아론은 우리 안의 보편주의와 특수주의, 현대주의와 전통주의, 오리엔탈리즘과 옥시덴탈리즘의 모순적 공존과 새로운 화해에 대해 진지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 현대 대 탈현대

현대와 탈현대 사이의 논쟁 또한 현재진행형이다. 돌아보면 90년대 초반 문화의 시대와 더불어 촉발된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토론만큼 격렬한 논쟁은 없었다. 한편에서는 한국적 특수성을 주목해 포스트모던 논의들을 가치 없는 발상이라고 비판해 왔다면, 다른 한편에서는 포스트모더니즘의 한국적 적용 가능성을 모색해 왔다. 그 결과 ‘미완의 과제’로서의 현대성을 옹호하려는 흐름과 ‘총체성의 폭력’에 저항하려는 흐름이 팽팽히 맞서 왔다.



현재의 시점에서 보면 90년대 초반 포스트모더니즘론의 등장은 시기상조였던 것처럼 보인다. 무엇보다 90년대 중반 외환위기의 충격은 담론의 중심을 문화에서 경제로 이동시켰다. 하지만 세계화, 정보사회와 결합된 포스트모던 현상은 꾸준히 증가해 왔으며 영화, 음악, 미술 영역에서 자신의 영향력을 늘려 왔다. 제도는 여전히 현대적 질서 안에 있되, 의식 및 문화는 빠른 속도로 포스트모던화되는 ‘제2의 현대’ 또는 ‘성찰적 현대’가 우리 사회의 자화상일지도 모른다.

# 시장주의 대 국가주의

지난 40년간 우리 사회 산업화를 지탱해 온 패러다임은 발전국가론이다. 추격산업화 과정에서 국가의 역할을 부각시킨 발전국가론은 시장, 시민사회보다는 국가를 중시하는 이론을 유포시켰다. 전통적 유교 사상과도 잇닿아 있는 국가주의는 초기 산업화 과정에서 국가의 적극적인 역할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일견 타당했던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산업화가 어느 정도 진행되면 민주화의 요구가 분출하는, 이른바 자본주의에 내재한 ‘민주주의 효과’와는 양립하기 어려운 담론이기도 했다.



시장주의가 부상한 것은 이런 맥락이다. 시장주의는 시장에서의 경쟁 메커니즘이 경쟁력 및 효율성을 높임으로써 합리성을 제고한다고 주장한다. 세계화 시대가 무한경쟁의 시대인 한 시장주의는 거부하기 쉽지 않은 패러다임이다. 하지만 시장주의는 결과적으로 공공성을 훼손하고 사회적 연대를 위협하게 되는 자기파괴적 속성을 안고 있다. 오늘날 이런 신자유주의 논리는 기업과 대학은 물론 정치사회와 시민사회 등 우리 사회 전 영역에서 지배집단의 새로운 담론의 정전(正典)으로 자리잡고 있다.

‘민주적 시장경제론’은 시장의 효율성과 국가의 공공성을 결합하려는 담론이다. 김대중 정부의 국정철학으로 제시된 민주적 시장경제론은 사회민주주의를 갱신하고자 한 서유럽 ‘제3의 길’의 한국적 버전이라 할 만하다. 문제는 민주적 시장경제론이 최근 새로운 시험대 위에 올라 서 있다는 점이다. 세계화 시대 점증하는 사회적 양극화를 어떻게 해소하고 훼손된 사회적 연대를 어떻게 복원할 것인가에 대해 민주적 시장경제론은 응답해야 한다.

# 개인주의 대 공동체주의

개인과 공동체 가운데 무엇을 더 중시할 것인가는 오랜 철학적 질문이다. 인간이 사회적 존재인 한 우리 내부에는 개인적 정체성과 공동체적 정체성이 공존한다. 개인주의가 양도할 수 없는 개인의 자율과 책임에 기반한 근대 자유민주주의의 발전을 가져왔다면, 공동체주의는 사회적 약자를 보호할 수 있는 사상적 지반을 제공해 왔다. 문제는 개인주의든 공동체주의든 과잉에 있다. 개인주의를 과도하게 강조하면 사회는 ‘만인 대 만인의 투쟁’에 빠지게 되며, 공동체주의를 과도하게 강조하면 개인의 자유가 억압되고 권위주의가 강화된다.



이른바 ‘공동체 자유주의’는 이에 대한 대안으로 제출된 담론이다. 서구적 자유주의와 동아시아적 공동체주의를 결합한다는 점에서 이 담론은 80년대 이후 서구 신보수주의 철학을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이 담론 역시 문제가 없지 않다. 개인주의를 실현해야 할 영역에 권위주의 통치로 돌아가고 공동체주의를 구현해야 할 영역에 시장적 경쟁을 강제하는 모순적 혼합물이 될 가능성이 존재한다. 개인적 자율과 사회적 연대를 어떤 생산적인 방식으로 결합할 것인가는 여전히 중대한 철학적 숙제이자 사회과학적 과제다.

# 개발주의 대 생태주의

개발주의와 생태주의의 충돌은 민주화 과정에서 형성된 또 하나의 구도다. 생태주의는 인간과 자연, 사회와 자연간의 새로운 공존을 모색하려는 패러다임이다. 생태주의는 근대 문명에 의한 환경의 의식적, 무의식적 파괴가 현재 감당하기 어려운 재앙의 부메랑으로 되돌아오고 있음을 경고한다.



우리 사회에서 추진된 압축적 산업화 과정을 돌아볼 때 생태주의의 진단과 경고는 지극히 타당하다. 하지만 문제가 간단치 않은 것은, 생태 위기를 가져온 개발주의가 여전히 적잖은 국민들에게 친화적이며, 특히 세계화 시대를 맞이하여 성장주의 내지 물질주의 전략이 다수 시민들에게 호소력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개발주의와 생태주의 사이에 어떤 가교를 놓을 수 있을지에 대해 우리 인문·사회과학은 새로운 모색을 요구 받고 있다.

# 담론의 탄생을 기대하며

지식사회 담론은 현실의 문제를 반영하는 동시에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통로다. 담론의 영역에서 다양한 구도가 공존한다는 사실은 우리 사회가 복합사회 또는 다원사회로 변화돼 왔음을 증거한다.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강화되는 추세 속에서도 이에 맞서는 다양한 이론과 대안들이 담론의 경쟁 및 투쟁을 펼치고 있다.



문제는 대안이다. 산업화와 민주화 시대를 마감하는 현재, 우리 사회는 새로운 사상적·담론적·정책적 거점과 전략을 요구한다. 바로 이점에서 우리 사회 담론들은 두 가지 과제를 안고 있다. 첫째, 성찰적 사유와 상상력을 좀더 발휘해야 한다. 성찰성은 타자의 논리를 통해 자신의 논리를 돌아봄으로써 설명력과 설득력을 높일 수 있다. 둘째, 지속가능하고 실현가능한 미래에 대해 좀더 치열하게 고민해야 한다. 새로운 정책은 새로운 비전에서 비롯되며, 새로운 비전은 새로운 담론에서 태어날 수 있다.(김호기|연세대 교수·사회학)

경향신문(07. 07. 21) [민주화 20년, 지식인의 죽음]Ⅳ-(2) 동아시아론

# 담론과 현실 사이의 좁혀지지 않는 ‘갭’

주식 좀 한다는 사람치고 최근 중국 증시의 활황과 관련해서 차이나펀드에 관심을 가져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골프를 좋아한다면 저렴한 가격의 중국이나 동남아 골프투어 패키지가, 쇼핑에 관심이 많다면 도쿄나 홍콩으로의 쇼핑여행이 괜찮은 여름 휴가의 대안이 될지도 모른다. 이처럼 오늘날 동아시아는 지식인들의 고담준론 속에서보다 평균적 한국인의 일상적 경험 속에 더 빠른 속도로 뿌리를 내려가고 있다. 오늘날 동아시아는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자본이 축적되고 순환되는 곳이며 그런 의미에서 발전과 성장의 자본주의적 시간이 가장 빠른 속도로 흘러가는 곳이기도 하다. 동아시아를 이 폭발적 변화 속에서 다루는 한 담론은 늘 현실에 뒤처지게 마련이며, 지식은 현실에 대한 스스로의 무능력을 자인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러나 동아시아 담론이 생생한 현실의 필요에서 출발하는 한 이 주제는 논의성과와는 별도로 쉽사리 도외시되거나 도태될 수 없다. 동아시아 담론의 ‘긴 생명력’과 지지부진한 ‘아웃풋’이 공존할 수 있는 비밀은 여기에 있는 셈이다.



# 동아시아 담론의 대두와 그 배경

한국의 지식지형에서 동아시아 담론이 등장한 것은 1990년대 초중반의 일이다. 87년 민주화 항쟁 및 ‘북방정책’의 성과로 사회주의권 국가와의 교류가 시작되면서 지식인 사회를 옥죄었던 이념 콤플렉스가 해소되기 시작한 시기였다. 사회주의는 우리 앞에 맨 얼굴을 드러내기 무섭게 스스로 간판을 내리게 된다. 레닌의 동상이 끌어내려지고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는 사태 속에서 우리의 사고와 행동을 지배해 왔던 냉전은 종식을 선언한다. 세계적 차원에서 진행된 이 새로운 변화에 대해 기존의 비판적 진영이 주목하고 대응해야 할 필요가 비판적 지식집단에서 제기된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미국, 일본만이 아니라 중국과 러시아를 포함하는 보다 넓은 주변의 지정학적 구도 속에서 한국과 한반도의 위상을 다시 자리매김하는 작업이 요청되었다.



# ‘창비 그룹’과 동아시아 담론의 제기

이 문제를 하나의 화두로서 비판적 지식계에 제시한 것은 ‘창비 그룹’의 지식인들을 첫 손에 꼽을 수 있다. 이들은 ‘분단체제와 세계체제’라는 패러다임을 빌려 한반도의 현실을 설명하고자 했다. 자본주의도 사회주의도 오래 전부터 형성되어온 자본주의 세계체제라는 더 큰 틀의 부분적 구성요소에 불과하다는 월러스틴의 세계체제론은 사회주의의 실패를 받아들일 수 없었던 비판적 지식인들에게 좋은 이론적 탈출구이자 역사발전이 종착점에 도달했다는 후쿠야마식의 역사 허무주의를 반박할 수 있는 매력적인 이론이었다. 그러나 냉전구도의 세계적 해체에도 불구하고 냉전에 기댄 한국사회의 억압적 질서는 여전히 건재했다. 비판적 지식인의 근본 과제를 분단체제의 극복으로 보는 백낙청을 위시한 ‘창비 그룹’ 지식인들은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보편성과 한반도 분단현실의 특수성이라는 양자 간의 거리와 차이를 넘어설 가능성을 찾는 작업이 시급했다. ‘동아시아’는 양자를 매개하는 ‘중간수준’의 범주로서 제기되었다.



# 탈근대적 상상력과 문명적 대안으로서의 동아시아

그러나 이들이 제기한 동아시아론은 ‘과학적 사회주의’와 ‘운동’에 익숙했던 진보적 지식진영의 ‘본류’에게는 크게 어필하지 못했다. 동아시아론이 갖는 진보 담론의 자기쇄신이라는 측면은 묻히게 되고, 반응은 예상치 못한 방향에서 나타난다. 예컨대 잡지 ‘상상’은 서구 중심주의를 넘어서는 새로운 상상력의 원천으로 동아시아를 진지하게 문제 삼았다. 서구 중심적 사유로는 포착될 수 없는 동아시아 고유의 가치관과 문화적 정체성에 대한 발견의 중요성이 강조되었다. 여기서 동아시아론은 근대적 가치에 대한 회의와 그 극복방안을 모색하는 일종의 ‘탈근대 담론’으로서 다루어진다. 창비의 문제제기에 전제되었던 정치적 성격은 탈각되면서 문화론, 문명론적 접근이 이를 대체하였다. 이러한 이면에는 보수적 입장의 문화 민족주의가 자리하고 있었다.



# 전통적 가치와 동아시아의 경제 발전의 상관성

동아시아 신흥공업국(NICs)의 경제적 성공 원인을 유교의 전통적 가치관에서 찾는 유교자본주의론은 서구의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동아시아의 지속적 경제성장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었다. 여기에는 동아시아 유교 전통의 계승과 현대사회에서의 창조적 활용을 내세우는 ‘신유가(新儒家, New Confucianism)’의 철학 및 윤리관과 밀접하게 연관된다. 사상체계로서의 신유가 혹은 현실에 대한 설명모델로서의 유교자본주의론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특징은 그 속에 함축된 보수주의적 현실관이다. 유교자본주의론의 한국적 수용 또한 현실에 대한 보수적 긍정에서 출발한다. 예컨대 유석춘은 정경유착과 연고주의 등 유교전통에서 파생된 문화적 토양이 장기적이고 안정적인 경제의 발전에 장애요소가 되기보다 오히려 발전을 촉진시켰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논리에는 어떤 발전이 바람직한가를 따지는 ‘가치의 문제’ 이전에 경제적 성공이라는 ‘사실의 문제’로 논의의 초점을 이동하자는 현실에 대한 보수적 긍정론이 전제되어 있었다.



# 외환위기와 동아시아 지역주의의 발흥

그러나 이러한 보수주의적 현실긍정론은 97년 외환위기를 계기로 근본적인 도전에 직면했다. 거래비용을 줄이고 경쟁력을 강화하는 데 기여한다고 높이 평가되었던 ‘아시아적 가치’가 한국경제를 나락에 빠뜨리는 주범으로 일순간에 내몰리게 된 것이다. 동아시아 담론 또한 시스템의 총체적 위기상황과 긴밀히 연동된다. 서구의 금융 패권 앞에 동아시아는 공동의 운명에 놓여있음을 자각하게 되면서 ‘아시아통화기금’ 같은 금융협력체 구상도 등장하게 된다. 이같은 경험의 축적을 통해 지역 내부의 연대에 대한 관심이 증대되었으며 이는 동아시아 담론이 문화적 공동유산에서 국가의 생존과 발전의 전략적 비전과 연결되는 계기가 되었다. 세계경제의 글로벌한 통합과 더불어 경제의 지역화·블록화 경향의 동시적 진행을 특징으로 하는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파도는 동아시아에서의 지역주의의 전진에 걸림돌이 되기보다 촉진제가 되었다.



# 국가와 기업, 동아시아 담론의 새로운 생산자

외환위기 이후의 동아시아 지역통합론은 국가의 주도 아래 진행되었다. 그러나 다국적기업 역시 이 문제에 관한 한 국외자일 수 없었다. 특히 지역경제의 성장엔진으로서 중국 경제가 갖는 막강한 파워는 동아시아에 대한 기업의 관심에 촉매제로 작용하였다. 국책연구소와 더불어 대기업 산하의 경제연구소가 동아시아 담론의 새로운 생산주체로 등장하였다. 막대하게 쏟아져 나오는 보고서들은 동아시아를 바라보는 국가와 기업의 시각을 우리에게 생생히 전달해 준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지식인이 주도하는 공공적 담론영역의 의제는 국가에 의해 주도되는 거버넌스와 무관할 수 없으며, 국민경제에 미치는 거대기업의 영향력이 증대되어감에 따라 개별 기업의 문제가 공적 담론장의 중심에 놓이는 일도 빈번하다. 한국 경제의 현주소를 일본과 중국 사이에 낀 신세로 갈파한 어느 재벌 그룹 회장의 세칭 샌드위치 위기론은 그 타당성 여부와 무관하게 어떤 지식인의 담론보다 강력한 권위와 대중적 파급력을 가진다. 이러한 사례는 우리에게 동아시아 담론이 더 이상 지식인 사회 내부에서 폐쇄적이고 고립적인 방식으로 생산·유통될 수 없게 된 담론 생태의 변화를 보여준다.



# 비판적 지식담론으로서 동아시아론의 열린 가능성

동아시아 담론은 유행 담론이 급속이 교체되는 한국 지식사회의 풍토 속에서도 지속적으로 영향력을 확대해 왔다. 참여정부의 ‘동북아중심국가론’은 국가적 아젠다로까지 확산된 동아시아 담론의 현주소를 보여준 사례이다. 그렇다면 정작 오늘날 여전히 비판적 입장에 서고자 하는 지식인에게 동아시아 담론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문제를 지속적으로 책임감 있게 다루어 ‘창비 그룹’의 지식인들은 ‘동아시아적 시각’(최원식)에 대한 강조에서 한 걸음 나아가 지식과 사유를 반추하는 ‘지적 실험으로서의 동아시아’(백영서)를 제창한다. 국가나 기업의 ‘현실주의적’ 동아시아 담론과 구분되는 지식인 고유의 성찰적 면모가 두드러진다.

그런데 최근 이들의 지적 행보에는 미묘한 중심이동이 감지된다. 비판적 싱크탱크 집단의 형성을 지향하는 입장에서 동아시아를 ‘한반도의 미래구상’이라는 전략적 목표와 직접 연결시키고 있다. 국가 및 시장(기업)에 대해 취해온 ‘비판적’ 거리의 소멸에 대한 우려가 없을 수 없다. 진보 개혁 담론의 위기가 운위되는 오늘, 동아시아라는 화두는 비판적 지식인들로 하여금 현실에의 적극적 개입과 고유의 비판적 입지의 확보라는 어려운 두 가지 과제를 동시에 밀고 나가는 중요한 시험대가 아닐 수 없다. 향후 이 논의에 세대와 입장을 달리하는 다양한 주체들이 더욱 적극적으로 참여함으로써 동아시아 담론이 갖는 현실적 의미가 보다 풍부하게 드러나기를 기대해 본다.(이정훈|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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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7-07-21 09:25   좋아요 0 | URL
로쟈님 말씀대로 오늘 집을 나서면서는, 한겨레와 더불어 경향신문도 사보려고요. 한국일보는 아침에 집으로 배달되고. 경향에도 읽어볼 게 많은거 같군요.

로쟈 2007-07-21 09:46   좋아요 0 | URL
주말판은 북리뷰들도 들어있기 때문에 본전 이상을 뽑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