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달 책&(419호)에 실은 '로쟈의 주제별 도서소개'를 옮겨놓는다. 주제는 '디지털 치매'인데, '로그아웃' 혹은 '디지털 다이어트'의 필요성을 다룬 책들을 같이 골랐다. '디지털 치매'에 대해서는 만프레드 스피처의 <디지털 치매>와 함께 (따로 언급하지 않았지만) 니콜라스 카의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청림출판, 2011)이 기본서이다.

 

 

 

책&(13년 6월호) 디지털에도 다이어트가 필요하다

 

컴퓨터와 스마트폰, 비디오게임, 텔레비전과 없는 생활을 상상할 수 있을까. 세대가 아래로 내려갈수록 점점 어려워질 법한 상상이다. 길지 않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디지털 미디어는 우리의 일상을 근본적으로 바꾸어놓고 있다. 기술혁신이 가능하게 만든 새로운 라이프스타일이라고 박수를 치며 환영해야 할까. 그럴 수만 있다면 문제는 간단하다. 하지만 스마트한 일상의 도래와 함께 우리의 뇌는 점점 퇴화하고 있다는 것이 디지털화된 세상의 불편한 진실이다. 무엇이 문제이고 어떤 대책이 필요한가.


먼저 독일의 뇌과학자이자 정신의학자 만프레드 슈피처의 <디지털 치매>(북로드, 2013)의 경고에 주의를 기울여보는 게 좋겠다. 사실 디지털 치매에 대한 경고는 멀리에서 찾을 것도 없다. “세계적으로 정보기술을 주도하고 있는 한국의 의사들은 이미 5년 전에 기억력 장애와 주의력 결핍 장애는 물론, 감수성 약화를 겪는 어린이와 청소년들이 점점 늘고 있다고 발표했다”는 게 저자의 인용이기 때문이다. ‘디지털 치매’란 말의 원산지가 한국인 셈이다.


교육당국에서는 흔히 ‘교실에서의 디지털 혁명’을 주창하면서 전자교과서를 사용하는 ‘교과서 없는 교실’이 미래의 학교인 것처럼 얘기하지만 저자의 생각은 다르다. 컴퓨터 중독과 인터넷 중독이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는 현실에서, 아이들을 새로운 미디어에 적응시키려고 하는 것은 마치 알코올과 니코틴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길러주기 위해서 유치원에서부터 이에 노출시켜야 한다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디지털 환경에 일찍 접근하는 것이 왜 디지털 치매를 유발할 정도로 부정적인가. 그것은 우리 뇌의 신경세포가 학습을 통해서만 효과적으로 기능하지만, 디지털 환경은 이에 필요한 자극과 부하를 제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복사하기와 붙이기가 읽기와 쓰기를 대신하고 뇌에 저장하는 것이 아니라 클라우드에 옮겨놓는 식이라면, 스마트해지는 환경과 정확히 반비례하여 우리는 ‘머리를 쓰지 않는 똑똑한 바보’가 되어갈 뿐이다.


존 팰프리와 우르스 가서의 <그들이 위험하다>(갤리온, 2010) 역시 디지털 시대의 그늘을 폭로하는 책이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디지털 세대’의 그늘을 염려하는 책이다. 어떤 세대인가. “지하철에서 아이팟으로 음악을 들으며 미친 듯이 휴대전화 문자 메시지를 날리는 십대 소녀”와 “모든 종류의 비디오 게임은 물론, 키보드 타이핑 속도에서도 도저히 당해낼 재간이 없는 여덟 살 난 꼬마”가 바로 새로운 세대, ‘디지털 네이티브’다. 디지털 혁명은 분명 세상을 더 살기 좋은 곳으로 변모시켰지만 자칫 길을 잃을 수도 있다는 게 저자들의 우려다. 표류할 수 있는 디지털 환경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사생활을 보호하며 필요한 정보를 취사선택하는 일이 디지털 네이티브에게 떠안겨진 과제다.


가령 교육에 한정하자면 디지털 네이티브의 문제는 정보 부족이 아니라 정보 과부하이다. 매년 1인당 6톤의 책에 해당하는 정보가 쏟아져 나오는 디지털 정보의 홍수 속에서 살아야 하는 일상은 분명 인류가 이전에 경험해보지 못한 것이다. 저자들은 아이들이 이 문제를 정확하게 인식하는 것과 함께 멀티태스킹을 하지 않고 집중할 경우 멀티태스킹을 했을 때보다 효율성을 더 높일 수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게 중요하다고 말한다. 어떻게 하면 한 번에 여러 가지 일을 하지 않고, 한 가지 일에 집중할 수 있는지 배우는 것이 디지털 네이티브에게는 오히려 더 중요한 공부다. 더불어 디지털 세계를 벗어날 수 있는 능력을 키우는 것도 중요한 과제다. 뇌만 둔해지는 것이 아니라 생활도 정신없이 흘러간다면 말이다.

 

 


<두 남자의 미니멀 라이프>(책읽는수요일, 2013)의 공저자 조슈아 필즈 밀번의 적절한 비유를 인용하자면, “사탕을 먹는 게 죄악이 아니듯, 인터넷을 하는 것은 죄악이 아니다. 하지만 다른 음식은 입에 대지도 않고 오로지 사탕만 먹는다면 그건 문제다.” 그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저자는 목적이 분명할 때만 인터넷을 한다는 원칙을 세운다. 집에서까지 인터넷을 할 필요가 없다는 결론에 인터넷 회선을 끊은 그는 유튜브 동영상, 영화 예고편, 우스운 사진 등을 보며 자신도 모르게 흘려보냈던 시간을 되찾는다.


독일의 저널리스트 알렉스 뮐레의 <달콤한 로그아웃>(나무위의책, 2012)의 주제도 ‘인터넷 없이 생활하기’와 ‘진짜 인생 되찾기’다. 하루 평균 60-80통의 이메일을 받고, 50통을 보내는 전형적인 인터넷과 이메일 중독자였던 저자는 6개월간 인터넷을 끊는 실험을 해보기로 하고 그 과정을 일기로 적어나간다. 여느 중독과 마찬가지로 처음엔 금단 현상으로 고통 받았지만 아날로그적 삶의 ‘평온한 느낌’을 회복하는 데는 성공한다. 그리고 디지털 세상을 다스리는 내면의 힘은 그런 금단의 경험을 통해서 길러진다는 것을 깨닫는다. 수잔 모샤트의 <로그아웃에 도전한 우리의 겨울>(민음인, 2012) 역시 한 가족이 6개월간 전자 매체의 플러그를 뽑은 경험담이다. 무엇을 배웠을까? 저자가 얻은 십계명 가운데 제1조는 “따분함을 두려워하지 말지니라”이다. 하긴 따분함이 없다면 우리의 뇌는 아무런 흥미로운 것도 고안해내려고 애쓰지 않을 것이다. 정작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은 온갖 재미와 정보로 인해 심심하거나 따분하지 않은 삶이라고 해야 할까.

 

13. 06. 1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번주 주간경향(1030호)에 실은 북리뷰를 옮겨놓는다. 위르겐 오스터함멜과 닐스 페테르손의 <글로벌화의 역사>(에코리브르, 2013)가 다룬 책이다. 평소보다 훨씬 부족한 시간에 읽고 쓰느라 분량도 짧아졌다. 최근에 다시 나온 월러스틴의 <근대세계체제1,2,3>(까치, 2013)과 같이 읽어도 좋겠다 싶다.

 

 

 

주간경향(13. 06. 18) ‘세계경제’는 어떻게 출현했나

 

글로벌화란 무엇인가. “세계적 범위로 연결되는 관계의 팽창과 집중화, 그리고 가속화”라는 일반적 정의를 수용하면, 즉각적으로 찬반 양론이 제기된다. 지지하는 쪽에서는 글로벌화가 성장과 번영의 새시대를 뜻한다면, 그 비판자들이 보기에는 서구 거대 기업에 의해 주도되는 지배체제의 출현과 그에 따른 민주주의와 노동권의 침해, 생태계의 파괴 등을 의미할 따름이다. 이는 신자유주의에 대한 찬반 양론과도 비슷하다. 글로벌화란 곧 ‘글로벌 자본주의화’로 이해하는 게 우리의 통념일 듯싶다.

하지만 독일의 역사학자들이 쓴 <글로벌화의 역사>에 따르면 문제는 좀 더 복잡하다. 일단 제목에서도 암시되지만 ‘글로벌화’는 ‘글로벌 자본주의’와 구별된다. 중복될 수는 있지만 포함관계로 치자면 더 넓은 의미를 갖는다. 더불어 글로벌화가 글로벌 자본주의보다 더 오랜 역사를 지닌 만큼 글로벌 자본주의는 글로벌화의 한 단계 내지는 한 양상 정도로 이해할 수 있겠다.

글로벌화의 역사에 대한 ‘짧은’ 소개를 목표로 하면서 저자들은 네 가지 시기 구분을 제시한다. 첫 번째 시기는 18세기 중반까지로 제국의 건설, 무역, 종교적 결속 등이 규모의 팽창과 함께 대륙간의 교환을 촉진했다. 두 번째 시기는 1750∼1880년의 시기로 아메리카와 유럽에서 일어난 정치혁명이 제국주의 경쟁을 격화시켰고 교통과 통신, 이주, 상업 따위의 네트워크를 창출했다.

세 번째 시기는 1880년대에서 1945년, 곧 2차 세계대전 종전까지로 이 시기의 중요한 특징은 글로벌화의 정치화이다. 제국주의 강국들의 패권 경쟁이 결국 세계 분할로 나타나고 1930년대와 1940년대 초에 이르러서는 글로벌화가 파멸적 붕괴상황에까지 이르렀다. 거꾸로 이러한 위기는 말 그대로 세계적 규모로 전개됐다는 점에서 글로벌화의 힘을 보여준다. 1918∼1919년에 전 세계적으로 유행하면서 전쟁으로 인한 사망자 수보다 더 많은 인명을 앗아간 인플루엔자는 글로벌화가 어떤 결과를 낳는지 보여주는 한 가지 사례다.

글로벌 역사는 세계사와 어떻게 다른가. 저자들에 따르면 세계사는 “문명의 내적인 역학과 그것을 상호비교하며 기술하는 다양한 문명에 관한 역사”인 반면에 글로벌 역사는 “문명간의 접촉과 상호작용에 관한 역사”다. 그러한 글로벌 역사에 대한 관심을 부추긴 것은 미국 사회학자 이매뉴얼 월러스틴의 ‘근대 세계체제’론이다. 1500년 전후 유럽에서 글로벌 자본주의 경제가 발생했다고 보는 그의 관점은 민족-국가 단위의 역사가 아닌 새로운 시각에서 역사를 바라보게 했다.

<글로벌화의 역사>의 저자들은 기본적으로 글로벌화가 수천 년의 역사를 갖고는 있지만 16세기에 포르투갈과 에스파냐 식민제국의 출현과 함께 새로운 단계로 진입했다는 점에서는 월러스틴과 의견을 같이한다. 이 시기의 탐험과 정규무역이 유럽, 아프리카, 아시아, 아메리카의 직접적인 접촉을 역사상 처음으로 가능하게 했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렇게 대륙간 네트워크가 만들어지면서 ‘세계경제’도 출현하게 된다. 동시에 민족-국가라는 형태를 포함한 유럽식 제도와 서구사상이 세계 전역에 수출된다.

1945년 이후 대량생산, 대량소비, 그리고 대중매체의 글로벌화는 현재도 진행 중이다. 과연 글로벌화는 아무런 도전도 받지 않는가? 저자들은 1965년 베트남 전쟁이 글로벌화에 대한 반대, 곧 로컬화에 대한 요구를 결집시킨 계기였다고 본다. 글로벌한 환경문제에 대한 문제제기도 60년대 저항문화의 결과라는 것이다. 글로벌화의 미래를 점쳐보기 위해서라도 음미해볼 만한 견해다.

 

13. 06. 1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번주 한겨레의 '로쟈의 번역서 읽기'를 옮겨놓는다.(지지난 주부턴가 한겨레의 북섹션이 월요일로 옮겨갔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 <해변의 카프카>(문학사상사)와 그에 대한 신랄한 비판서인 고모리 요이치의 <무라카미 하루키론>(고려대출판부, 2007)을 읽고 적은 것인데(고모리 요이치의 책은 부제가 '<해변의 카프카>를 정독하다'인데, 주로 가출 소년의 사적인 이야기를 군국주의 전쟁이라는 공적인 과거사와 무매개적으로 병치시켜놓고, 결과적으론 역사/기억을 소거시키는 텍스트 운동을 문제 삼는다), 분량상 '복잡한 내용'은 생략하고 간단한 얼개만 언급했다. 현재 대학로에서는 연극 <해변의 카프카>가 공연중이기도 한데, 관람 여부는 아직 결정하지 못했다...

 

 

 

한겨레(13. 06. 10) 복잡하여 거부감도 드는 ‘카프카’

 

“내가 지닌 모든 것을 쏟아 부은 가장 만족스런 작품이다.” <해변의 카프카>를 두고 무라카미 하루키가 한 말이다. 하지만 이 작품을 일독한 독자라면 또한 이 세계와 저 세계를 넘나드는 이 복잡한 이야기에 매혹과 불만을 동시에 느낄지도 모른다. 굉장히 길고 현란한 이야기가 전개되지만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것인지 불분명해 보이기 때문이다. 선택은 다시 읽거나 내던지거나 둘 중 하나다. 하긴 ‘일독’은 문학작품을 읽는 올바른 방식은 아니다. 나보코프의 말대로라면 우리의 선택지는 ‘읽고 또 읽기’이거나 ‘읽고, 읽고 또 읽기’여야 하니까.

 

복잡해 보이는 소설을 읽는 한 방법은 단순하게 읽는 것이다. 단순한 것에서 복잡한 것이 나온다고 믿기에. 다시 하루키를 인용하면 그는 열다섯 살 소년의 이야기를 써보고 싶었다고 한다. 아직 변화할 가능성이 많고 정신상태가 고착되어 있지 않다는 데 주목해서란다. 작품에서 그 소년의 이름이 ‘다무라 카프카’다. 그는 ‘세상에서 가장 터프한 열다섯 살 소년’이 되기 위해 열다섯 번째 생일날 가출한다. 한때의 치기는 아니다. 그에겐 남다른 동기가 있다. 어머니가 네 살배기 자신을 남겨둔 채 누나만 데리고 집을 떠났기 때문이다.

 

어머니한테 버림받은 것도 외상적 충격인데, 더 감당하기 어려운 것은 누나가 양녀라는 사실이다. 어머니가 그런 누나만 데리고 가출했으니 그는 철저하게 버림받은 게 된다. 따라서 주인공이 떠안게 되는 물음은 “왜 어머니는 나를 사랑해주지 않았을까? 나에겐 사랑을 받을 만한 자격이 없었던 것일까?”일 수밖에 없다. 그 의문이 그의 영혼을 좀먹으며 그를 속이 텅 빈 껍데기로 만든다. 자신에게 사랑받을 만한 무엇도 없다고 생각하는 인간은 ‘공허한 인간’이다.

 

 

다무라 카프카는 어떻게 상처를 치유할 수 있을까. 어떻게 ‘공허한 인간’에서 ‘터프한 인간’으로 변신할 수 있을까. <해변의 카프카>에서 그것은 그가 어머니로 설정한 사에키를 용서한다고 말함으로써 가능해진다. 사에키는 스무 살에 연인을 잃은 상처와 죄책감을 평생 떠안고 살아온 여성이다. 버림받았다는 사실은 지울 수 없지만 용서한다고 말함으로써 자존감을 회복할 수는 있다. ‘용서의 주체’가 됨으로써 다무라 카프카는 공허한 인간에서 탈피한다. 그리고 비로소 새로운 세계의 일부가 된다. 터프한 세상에 맞설 수 있는 터프한 인간이 되는 것이다.

 

하루키는 이러한 성장소설적 골격에 신화와 역사를 덧입힌다. 다무라 카프카는 아버지로부터 “너는 언젠가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누나와 육체관계를 맺는다”는 예언을 주입받으며 그로부터 벗어나려고 한다. 오이디푸스 왕의 이야기를 겹쳐놓은 것이다. 게다가 태평양전쟁의 상흔이 각인돼 있는 나카타 노인의 이야기를 다무라 카프카의 이야기와 병치해놓았다. 그리고 상처를 입은 영혼들이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 또 다른 세계를 현실 세계에 인접시켜놓았다. 이러한 인위적 설정이 <해변의 카프카>를 복잡하게 만들면서 흥미를 끌게 하지만, 동시에 거부감을 일으키기도 한다. 모든 걸 쏟아붓지 않아도 만족스런 작품을 써냈으면 더 좋았을 뻔했다.

 

13. 06. 0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번주 시사IN(299호)에 실은 서평을 옮겨놓는다. 노순택의 사진 에세이 <사진의 털>(씨네21북스, 2013)을 골랐는데, 오랜만에 읽은 사진책이었다. 작가의 독특한 사진론이 인상적이다.

 

 

 

시사IN(13. 06. 08) 용역 깡패의 솜털 가득한 팔

 

르포 사진작가로 잘 알려진 노순택의 사진 에세이 <사진의 털>(씨네21북스) 프로필에는 저자의 직함이 ‘장면채집자’로 돼 있다. 이어서 “지나간 한국전쟁이 오늘의 한국사회에서 어떻게 살아 숨 쉬는지를 탐색하고 있다”는 소개를 보면 그가 주로 어떤 장면들을 ‘채집’하는지 어림할 수 있다. 한국 사회의 온갖 질곡의 기원에 놓여 있는 건 전쟁과 분단의 상처이고 모순이다. “분단권력은 남북한에서 작동하는 동시에 오작동하는 현실의 괴물”이라고 노순택은 적시한다. 이 괴물과 어떻게 싸울 것인가.


자신의 작업을 ‘장면채집’이라고 한정한 것에서도 알 수 있지만 노순택은 사진을 과신하지도 과대평가하지도 않는다. 사진으로 할 수 있는 것과 사진으로는 할 수 없는 것 사이의 경계는 엄연하다. 줄여 말해서, 사진은 대단한 게 아니다. 그렇지만 동시에 그는 사진을 과소평가하지도 않는다. 대단한 것은 아니지만 대단한 것에 관해 이야기할 수는 있을지 모른다는 게 그의 기대다. 사진은 분명 몸통이 아니다. 깃털이건 개털이건 그냥 털이다. 하지만 ‘사진이라는 털’은 몸통을 암시할 수 있다. 세상이라는 몸통을 들여다보게 해주는 통로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딱 그만큼이 사진의 몫이라는 게 노순택의 사진론이다. “사진으로 세상을 바꾼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지만, 우리가 사는 세상이 어떤 지경인지 왜 이 지경인지 사고를 촉구할 수는 있을 것”이라는 게 그의 믿음이다.   

 

 


노순택의 사진은 주로 한국사회의 부조리한 모순의 현장, 특히 용산과 평택, 그리고 강정마을의 모습을 많이 담고 있지만 결정적 순간을 포착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그는 은근하게 암시하고 비유적으로만 말한다. 사진으로 할 수 있는 건 그 정도가 최대치라고 보는 듯싶다. 사진은 털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는 그는 아예 ‘솜털’을 찍기도 한다. 실례를 보자. 2009년 4월 용산참사 현장에서 철거민들을 진압하기 위해 투입된 한 ‘용역깡패’를 피사체로 찍으면서 노순택은 환한 봄볕에 보송보송한 솜털마저 눈부신 팔을 찍었다. 문신이라도 새겨지거나 ‘노가다 근육’을 자랑하는 팔이 아니라 가늘고 연약해 보이기까지 한 팔이다. 부유층의 아이가 용역 깡패로 나섰을 리는 없기에, 이 젊은이는 자기 부모 형제와 저치가 별로 다르지 않은 사람들에게 종주먹을 들이대기 위해 현장에 서 있는 셈이다. 그렇게 사진에 보이는 건 가볍게 주먹을 쥐고 서 있는 한 젊은이의 뒷모습뿐이지만 그 이미지는 안타까움과 슬픔과 분노 등 복합적인 정서를 자아낸다.

 

 

복합적인 정서를 이끌어낸다는 점에서는 고 김근태를 찍은 사진도 인상적이다. 그가 세상을 떠난 뒤, 인터뷰까지 한 적이 있는 작가는 필름 더미에서 고인의 사진을 찾았지만 이상하게도 고인의 사진을 찾지 못했다고 한다. 하지만 용산참사 관련 사진들을 정리하다가 우연히도 농성장에서 철거민 가족들과 함께 비옷을 입고 조용히 앉아 있는 김근태를 발견한다. 2009년 6월에 찍힌 사진이었다. 앞자리에 앉은 철거민 가족들은 고개를 숙인 채 망자의 영정을 가슴에 안고 있고, 바로 한 줄 뒤에서 김근태는 물끄러미 전방을 바라보며 조용히 앉아 있다. 주변에는 전경들이 에워싸고 있다. 무거운 침묵이 현장을 감싸고 있고 카메라 조명만 아니면 칠흑같이 어두운 밤이다. 군더더기 설명 없이도 정치인 김근태를 가장 잘 말해주는 사진처럼 보인다. 노순택은 그렇게 조용히 싸운다.

 

13. 06. 0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번주 '프레시안 books'에 실린 '3인 1책 전격수다'를 옮겨놓는다(전문은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50130531173010&section=03). 가라타니 고진의 <세계사의 구조>(도서출판b, 2012)를 읽고 나눈 수다다. 묵직한 책이어서 오래 묵혔다가 다루게 됐다.

 

 

 

프레시안(13. 05. 31) 일하지 않고, 소비하지 않고, 국가를 전복할 권리!

 

이현우 : 가라타니 고진은 국내에 이미 많은 책이 번역된 저자입니다. 도서출판b에서 나오는 '가라타니 고진 컬렉션'의 10권 리스트에 이 <세계사의 구조>가 포함되었고, 컬렉션 리스트 외에도 몇 권이 더 나올 예정이라 알고 있습니다. 그동안 푸코나 들뢰즈 등의 유럽 철학자들이 대표적으로 많이 소개되었는데, 동아시아권에서는 고진이 압도적으로 많이 읽히지 않았나 싶습니다.

 

고진이 한국에 처음 수용될 때는 국문학 연구자 중심이었습니다. <일본근대문학의 기원>(박유하 옮김, 도서출판b 펴냄)이 많은 영향을 끼쳤죠. 2004년 계간지 <문학동네>에 실린 '근대문학의 종말'이라는 논문이 실렸을 때부터 한국문단 안팎으로 큰 논쟁을 불러왔는데, 그걸 확장시킨 책 <근대문학의 종언>(박유하 옮김, 도서출판b 펴냄)도 상당한 화제가 되었습니다. 국내에 소개된 비평집 중에는 가장 많이 팔린 책이라고 알고 있어요. 가라타니 고진의 근대문학 종언론에 대해 우호적으로 동의한다기보다 비판적인 견해가 국내 문단에선 더 많은데, 오히려 문단 바깥의 독자들에게는 더 큰 공감을 얻고 있는 듯합니다.

 

다른 한편으로, 고진은 이전까지 자기 자신을 비평가로 칭했는데 <세계사의 구조>는 좀 예외적입니다. 사상가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다는 자부심이랄까,(웃음) 그런 게 좀 보이는 책이죠. 대신 고진의 '비평' 역시 좀 특이한 성격을 띱니다. <트랜스크리틱>(송태욱 옮김, 한길사 펴냄)에서도 썼는데, 그는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읽어내는 게 비평이라고 생각해요. 경제학과 출신이라는 배경에서 출발했겠지만, 독특하고 자극적이죠. 지금껏 개별 텍스트를 치밀하게 해설하는 게 비평이라고 여겨졌지만, 그의 발상과 스케일이 남다릅니다.

 

저는 맨 처음 <탐구>(권기돈 옮김, 새물결 펴냄)라는 책을 읽으면서 뭐 이런 사람이 다 있나 싶어 경악했습니다. 그 이후 국내 소개된 고진의 모든 책을 읽었죠. 그는 일본 내에서도 거의 유일무이한 수준의 비평가이며, 60년대 말의 전공투 세대가 아닌 60년대 초반의 안보 세대로 분류되는 1941년생입니다. 아사다 아키라 등의 '제2의 고진', '제3의 고진' 같은 인물들이 계속 소개되고 있지만, 고진은 극히 예외적이고 독특한 입지의 비평가라 할 수 있습니다.


<세계사의 구조>의 전작 <세계공화국으로>(조영일 옮김, 도서출판b 펴냄)와 <트랜스크리틱>에서부터 이미 가라타니 고진의 독창적인 교환양식론이 소개됩니다. 마르크스는 생산양식이라는 관점에서 세계사를 해석하고 사적 유물론을 정립했는데, 고진은 그걸 보완해서 교환양식론으로 보는 세계사를 얘기했지요. 그리고 그 주장을 해명하는 탄탄한 이론적 뒷받침이 바로 이 <세계사의 구조>입니다. 고진 독자에게도 충분히 흥미로운 책이기도 하지만, 마르크스의 독자라든가 자본주의와 국가주의에 비판적인 견해를 갖고 있더라도 대안이 막막한 독자들에게 충분한 지적 자극을 줄 수 있는 책이 아닌가 싶습니다. 한 가지 문제라면 이게 그냥 읽으면 되는 책인지라…(웃음) 어떤 말을 덧붙여야 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얘기 나누면서 이슈를 찾아가보지요. 먼저 읽은 소감을 한 마디씩 해주신다면요.

 

이권우 : <세계사의 구조>의 요약본이 <세계공화국으로>라고 하시니 그걸 읽으셔도 될 것 같은데, 제 생각엔 이 책은 맨 앞의 서문과 329쪽의 어소시에이셔니즘 파트부터 읽는 것으로도 주요 핵심은 파악됩니다. 다만 꾸준하게 교양적 차원에서 논의됐던 책들을 따라온 독자라면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는데, 그런 사전지식이 없다면 어렵게 느껴진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모스의 증여론, 마르크스의 자본론, 월러스틴의 근대세계 체제와 칼 폴라니까지 읽은 분들이라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책이에요. 그들의 문제의식을 수용하면서 고진이 독자적으로 자기 사유를 펼치는 부분은 아주 흥미진진합니다. 이런 책은 오히려 틈틈이 읽으면 무슨 말인지 모르고요, 내리 읽어야 합니다.(웃음)

 

문제의식은 아주 선명하고 탁월해요. 동원되는 이론가들에 대한 이해도 놀랍고. 다만 대안이 무엇인가를 중점적으로 찾는 분들에게는 결말 부분이 좀 허탈할 수도 있습니다. 거꾸로 현재 협동조합 운동을 하시는 분들은 이 책을 꼭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분배적 정의에서 벗어나 교환적 정의, 그러니까 격차를 낳는 시스템의 폐기를 새롭게 얘기하니까요.

 

고진은 칸트를 매우 집중적으로 살피는데, 칸트를 재해석하여 정의론을 펼친 사람이 존 롤스고, 롤스로 상징되는 선진자본주의가 분배적 정의라는 흐름을 따라갈 수 있다면 가라타니 고진이 결국 교환의 정의를 새롭게 얘기한다는 걸 이해할 수 있습니다. 고진은 교환양식C, 즉 자본주의적 강고한 체계를 극복하는 대안으로 협동주의 방식을 높이 평하고 그에 따라 프루동도 새롭게 재평가하지요. 오늘날 우리가 자본주의적 교환양식을 벗어날 수 있는 기반이 무엇인가를 물을 때 그 대안이 협동조합이라는 점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할 만한 책입니다.

 

김용언 : 부끄러운 고백을 해야 하는데요. 대학교 3학년 때 이후로 마르크스 관련 이론서를 한 권짜리로 제대로 읽은 게 이번이 처음이라서 굉장히 힘든 독서였습니다. 제가 제대로 이해했는지 확신도 서지 않고 감히 코멘트를 할 입장이 못 되는 듯합니다. 오늘은 무조건 배우겠다는 자세로 경청하겠습니다.


다만 아까 이현우 선생님이 말씀하신 것과 관련하여, 저는 책 후반부의 '네이션'의 구성과 '세계공화국'의 가능성에 가장 관심을 가졌는데요. 고진은 책 304쪽에서 "네이션의 감성적인 기반은 혈연적·지연적·언어적 공동체"라면서 그 공동체 내에서 "가족이나 부족공동체 안의 사랑과는 다른, 오히려 그와 같은 관계로부터 이탈한 사람들 사이에서 생겨나는 새로운 연대의 감정"이라고 네이션의 감정을 설명하는데요. "호수(互酬, reciprocity)적 교환에서 유래하는 채무감정은 돈으로 변제가 되지 않는 것이어서 경제적으로는 그야말로 '경제합리성'을 결여한 것이다. 네이션이 '감정'으로서 나타난다는 것은 네이션이 국가나 자본과는 다른 교환양식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라고 썼습니다. 그리고 430쪽에 이르면 국가연방은 교환양식 C 위에 교환양식A를 회복하는 것, 그럼으로써 "새로운 세계시스템을 창설"하고 "증여의 호수성"을 회복하기를 주장합니다.

 

 

 

이 부분은 충분히 흥미롭지만, 아까 이현우 선생님 말씀처럼 고진이 일본 내에서도 소수의 예외적인 존재라고 하신 게 실감난 건 얼마 전 SNS 상에서 발생한 '아즈마 히로키 사건' 때문입니다.(웃음) 아즈마 히로키는 그동안 국내에서 <일반의지 2.0>(안천 옮김, 현실문화 펴냄),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이은미 옮김, 선정우 감수, 문학동네 펴냄), <게임적 리얼리즘의 탄생>(장이지 옮김, 선정우 감수, 현실문화연구 펴냄) 등으로 잘 알려진 일본의 젊은 평론가입니다.

 

그가 오사카 시장 하시모토 토오루의 위안부 발언에 대해 "'위안부는 필요했다'가 문제발언인가?" "한창 때의 남성을 전장에 밀어 넣고 실컷 사람 죽이라고 시키고, 전투가 끝났으니 상큼하게 일반시민처럼 욕망과 폭력성을 억제하고 살라고 해봤자, 생물적으로 당연히 무리한 일. 그런 무리를 전제로 삼아 논의를 해본들 무슨 소용이 있나 싶다" 등으로 트위터에 글을 써 일본 내에서도 많은 비판을 받았는데요.

 

아즈마 히로키는 1971년생입니다. 이 논쟁을 보면서 젊은 전후세대가 갖고 있는 역사의식의 박약함에 굉장히 놀랐습니다. 일본인 중 일부는 아직도 자신들이 전쟁 피해자라는 점만을 강하게 의식하고 있는 것 같은데,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담당했던 역할과 아시아 각국에 끼쳤던 악영향에 대해 철저하게 되짚어보고 사죄하고 그것을 되풀이하지 않도록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는 당위에 대해서는 거의 의식하지 않는 발언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니까 고진 식의 호수적 관계는 바로 이런 실제 역사에 대한 근본적 죄책감을 해소하려는 증여의 노력에서부터 시작될 텐데, 그 부분에 있어서는 여전히 위험스러울 정도로 준비가 되어있지 않기 때문에 가라타니 고진의 이 같은 지적 성과도 크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떠오르더라고요. <세계사의 구조>와는 크게 관계없는 부분을 얘기한 것 같아 죄송합니다.(웃음)

 

이현우 : 여담을 덧붙이자면, 아즈마 히로키가 아까 얘기한 '제3의 고진'이었거든요.(웃음) 20대의 나이에 데리다 철학을 종횡하며 쓴 데뷔작 <존재론적, 우편론적-자크 데리다에 관하여>는 놀라운 책이었는데, 그 이후 철학과 거리를 두고 오타쿠 문화로 비평의 방향을 돌리면서 정치적 의식이 퇴행한다는 느낌을 받고 있습니다. 70대의 가라타니 고진보다도 노후해 보이죠.

 

고진은 대단히 격렬한 반국가주의 쪽입니다. 국민국가를 절대적으로 지양해야 한다는 입장이죠. 그의 자부심 중 하나는 일본 헌법 제9조, 즉 평화헌법입니다. 고진에게는 그게 국민국가를 지양할 수 있는 일종의 모델이에요. 그런데 지금 일본 쪽 극우의 움직임은 그 헌법조항을 폐지하고 소위 '정상국가'로 가겠다는 입장입니다.

 

생산양식에서 교환양식으로

이현우 : <세계사의 구조>의 핵심은 역시 교환양식론입니다. 제가 아는 범위 내에선 이걸 들고 나온 사상가는 고진이 처음이었어요. 네 가지 교환양식을 잠깐 설명하자면, A형은 증여와 답례로 이뤄지는, 선물을 교환하고 주고받는 호수입니다. B형은 약탈과 재분배, 국가의 지배적인 교환 양식이지요. 화폐를 매개로 한 상품 교환이 세 번째 C형 교환양식인데, 이게 자본주의의 지배적인 교환양식입니다.

 

중요한 건 그 사이의 이행입니다. A형이 사라진 다음 B형이 출현하는 게 아니라, 세 가지가 공존하면서 어떤 사회에서는 A형이, B형이, C형이 지배적이라고 봐야 합니다. 이를테면 소규모 공동체 사회에서의 교환양식인 호수가 국가 체제의 교환양식으로 어떻게 넘어갔는가, 또 국가의 교환양식은 어떻게 자본제적 교환양식에 주도권을 내주게 되었나 그 이행과정을 해명하는 것이 '사상가' 고진의 과제였고, 그걸 성취한 책이 <세계사의 구조>입니다. 사실 해명을 제외한 이론적 골자는 이전 책들에 제시되었기 때문에, 개인적으로는 해명 부분이 가장 흥미로웠습니다.


이권우 : <세계사의 구조>를 읽으면서 1980년대 읽은 책들이 많이 기억나더라고요. 사회구성체라는 단어가 참 자주 등장했죠.(웃음) 사회구성체 안에는 여러 요소가 상존하고 있으나 지배적인 양식이 있습니다. 쉽게 말해서 자본주의 내에도 소작 관계가 있을 수 있는데, 대신 자본주의 상태에서 좀 다르게 변형된다는 뜻이죠. 사회구성체에 관한 예전 책들을 좀 보신 분들에게는 <세계사의 구조> 이해가 쉬울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현우 선생님이 방금 얘기하신 대로 교환양식 A형에서 증여하고 답례하는 과정만을 되풀이하면 국가가 탄생하지 않는다는 설명이 인상적이었습니다. B형에선 국가가 지배만 하는 게 아니라 보호한다는 걸 강조하고요. C형에선 중요한 건, 지금까지 노동자가 자본에 의해 종속되어 생산에만 집중하는 사회계급으로 얘기되었는데, 고진은 상품을 사는 노동자의 출현도 함께 아우릅니다. 상품을 사는 노동자의 출현이야말로 D형으로 넘어가는 사회구성체 요소가 되니까요.

 

다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이 책의 핵심적인 용어인 국가와 자본, 네이션, 스테이트 등에 대한 해설이 없다는 점입니다. 번역자께서 고생을 많이 하셨겠지만, 네이션이나 스테이트 등이 사전적 의미로서 쓰이는 게 아니기 때문에 해설을 따로 붙여주는 쪽이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김용언 : 저도 첫 페이지부터 그 용어들에서 멈칫했습니다. 고진 전작을 죽 보아온 사람에게는 이미 자주 보아 익숙한 용어기 때문에 그냥 넘어갈 수 있을까요?

 

이현우 : 어려운 문제지요. 고진이 '네이션'이라고 그대로 썼기 때문에 역자도 고심했던 걸로 압니다. '네이션'은 한국말에선 어떨 땐 민족이고 어떨 땐 국민이라 번역되는데, 특히 민족의 경우 한국에선 단군 이래 죽 이어져 내려왔다는 표상을 갖고 있고, 고진이 말하는 민족은 근대 이후, 절대 왕정 국가 이후에 탄생한 공동체기 때문에 쉽게 일대 일로 번역하기가 어렵습니다. 어쩔 수 없이 독자들이 읽어가면서 정리해야 하는 부분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권우 : 용어 해설까지 있었다면 훨씬 더 잘 읽힐 수 있는 책이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에 아쉽네요. 다시 책으로 돌아가자면, <세계사의 구조>의 핵심은 마르크스와 칸트입니다. 특히 예전에 <윤리 21>(송태욱 옮김, 사회평론 펴냄)을 읽으면서도 칸트에 대한 고진의 해석에 상당히 공감했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 다시금 칸트의 영구평화론을 수용하며 국가를 넘어선 사유를 펼치는 것에 감탄했습니다.

 

이현우 : <트랜스크리틱>에서도 비슷한 횡단 작업을 했습니다. 칸트와 마르크스를 접속시키는 작업, 칸트로 마르크스를 읽고 마르크스로 칸트를 읽는 게 자신의 비평이며 이론적 작업이라고 했지요. 고진에 자주 비교되는 사람이 지젝인데요. 그는 헤겔과 라캉을 '트랜스크리틱'했지요. 두 저자가 2000년대 이후 한국 인문학, 정확하게는 학계 바깥 인문학 독자들과 비평 쪽에 가장 압도적인 영향을 미친 철학자라고 생각합니다. 우연한 유행이라기보다 이들의 작업이 보여주는 독특한 문제의식과 이론적 상상력이 많이 어필한 게 아닐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여담이지만, 고진이 객원교수로 예일대학에 잠깐 머무른 적이 있었는데, 당시 예일학파의 거두였던 폴 드 만으로부터 격려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일본 내에서조차 고진의 작업을 알아주는 사람이 없었는데 폴 드 만이 격려를 해주었으니 기운을 낼 만했지요. 머리를 올려주었다고 할까요. 고진의 말에 따르면 자신의 작업을 그 이전과 이후로 나눈 매우 중요한 순간이었다고 합니다.(웃음)

 

(...)

 

13. 06. 0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