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주 한겨레의 '로쟈의 번역서 읽기'를 옮겨놓는다.(지지난 주부턴가 한겨레의 북섹션이 월요일로 옮겨갔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 <해변의 카프카>(문학사상사)와 그에 대한 신랄한 비판서인 고모리 요이치의 <무라카미 하루키론>(고려대출판부, 2007)을 읽고 적은 것인데(고모리 요이치의 책은 부제가 '<해변의 카프카>를 정독하다'인데, 주로 가출 소년의 사적인 이야기를 군국주의 전쟁이라는 공적인 과거사와 무매개적으로 병치시켜놓고, 결과적으론 역사/기억을 소거시키는 텍스트 운동을 문제 삼는다), 분량상 '복잡한 내용'은 생략하고 간단한 얼개만 언급했다. 현재 대학로에서는 연극 <해변의 카프카>가 공연중이기도 한데, 관람 여부는 아직 결정하지 못했다...

 

 

 

한겨레(13. 06. 10) 복잡하여 거부감도 드는 ‘카프카’

 

“내가 지닌 모든 것을 쏟아 부은 가장 만족스런 작품이다.” <해변의 카프카>를 두고 무라카미 하루키가 한 말이다. 하지만 이 작품을 일독한 독자라면 또한 이 세계와 저 세계를 넘나드는 이 복잡한 이야기에 매혹과 불만을 동시에 느낄지도 모른다. 굉장히 길고 현란한 이야기가 전개되지만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것인지 불분명해 보이기 때문이다. 선택은 다시 읽거나 내던지거나 둘 중 하나다. 하긴 ‘일독’은 문학작품을 읽는 올바른 방식은 아니다. 나보코프의 말대로라면 우리의 선택지는 ‘읽고 또 읽기’이거나 ‘읽고, 읽고 또 읽기’여야 하니까.

 

복잡해 보이는 소설을 읽는 한 방법은 단순하게 읽는 것이다. 단순한 것에서 복잡한 것이 나온다고 믿기에. 다시 하루키를 인용하면 그는 열다섯 살 소년의 이야기를 써보고 싶었다고 한다. 아직 변화할 가능성이 많고 정신상태가 고착되어 있지 않다는 데 주목해서란다. 작품에서 그 소년의 이름이 ‘다무라 카프카’다. 그는 ‘세상에서 가장 터프한 열다섯 살 소년’이 되기 위해 열다섯 번째 생일날 가출한다. 한때의 치기는 아니다. 그에겐 남다른 동기가 있다. 어머니가 네 살배기 자신을 남겨둔 채 누나만 데리고 집을 떠났기 때문이다.

 

어머니한테 버림받은 것도 외상적 충격인데, 더 감당하기 어려운 것은 누나가 양녀라는 사실이다. 어머니가 그런 누나만 데리고 가출했으니 그는 철저하게 버림받은 게 된다. 따라서 주인공이 떠안게 되는 물음은 “왜 어머니는 나를 사랑해주지 않았을까? 나에겐 사랑을 받을 만한 자격이 없었던 것일까?”일 수밖에 없다. 그 의문이 그의 영혼을 좀먹으며 그를 속이 텅 빈 껍데기로 만든다. 자신에게 사랑받을 만한 무엇도 없다고 생각하는 인간은 ‘공허한 인간’이다.

 

 

다무라 카프카는 어떻게 상처를 치유할 수 있을까. 어떻게 ‘공허한 인간’에서 ‘터프한 인간’으로 변신할 수 있을까. <해변의 카프카>에서 그것은 그가 어머니로 설정한 사에키를 용서한다고 말함으로써 가능해진다. 사에키는 스무 살에 연인을 잃은 상처와 죄책감을 평생 떠안고 살아온 여성이다. 버림받았다는 사실은 지울 수 없지만 용서한다고 말함으로써 자존감을 회복할 수는 있다. ‘용서의 주체’가 됨으로써 다무라 카프카는 공허한 인간에서 탈피한다. 그리고 비로소 새로운 세계의 일부가 된다. 터프한 세상에 맞설 수 있는 터프한 인간이 되는 것이다.

 

하루키는 이러한 성장소설적 골격에 신화와 역사를 덧입힌다. 다무라 카프카는 아버지로부터 “너는 언젠가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누나와 육체관계를 맺는다”는 예언을 주입받으며 그로부터 벗어나려고 한다. 오이디푸스 왕의 이야기를 겹쳐놓은 것이다. 게다가 태평양전쟁의 상흔이 각인돼 있는 나카타 노인의 이야기를 다무라 카프카의 이야기와 병치해놓았다. 그리고 상처를 입은 영혼들이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 또 다른 세계를 현실 세계에 인접시켜놓았다. 이러한 인위적 설정이 <해변의 카프카>를 복잡하게 만들면서 흥미를 끌게 하지만, 동시에 거부감을 일으키기도 한다. 모든 걸 쏟아붓지 않아도 만족스런 작품을 써냈으면 더 좋았을 뻔했다.

 

13. 06. 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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