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주 시사IN(299호)에 실은 서평을 옮겨놓는다. 노순택의 사진 에세이 <사진의 털>(씨네21북스, 2013)을 골랐는데, 오랜만에 읽은 사진책이었다. 작가의 독특한 사진론이 인상적이다.
시사IN(13. 06. 08) 용역 깡패의 솜털 가득한 팔
르포 사진작가로 잘 알려진 노순택의 사진 에세이 <사진의 털>(씨네21북스) 프로필에는 저자의 직함이 ‘장면채집자’로 돼 있다. 이어서 “지나간 한국전쟁이 오늘의 한국사회에서 어떻게 살아 숨 쉬는지를 탐색하고 있다”는 소개를 보면 그가 주로 어떤 장면들을 ‘채집’하는지 어림할 수 있다. 한국 사회의 온갖 질곡의 기원에 놓여 있는 건 전쟁과 분단의 상처이고 모순이다. “분단권력은 남북한에서 작동하는 동시에 오작동하는 현실의 괴물”이라고 노순택은 적시한다. 이 괴물과 어떻게 싸울 것인가.
자신의 작업을 ‘장면채집’이라고 한정한 것에서도 알 수 있지만 노순택은 사진을 과신하지도 과대평가하지도 않는다. 사진으로 할 수 있는 것과 사진으로는 할 수 없는 것 사이의 경계는 엄연하다. 줄여 말해서, 사진은 대단한 게 아니다. 그렇지만 동시에 그는 사진을 과소평가하지도 않는다. 대단한 것은 아니지만 대단한 것에 관해 이야기할 수는 있을지 모른다는 게 그의 기대다. 사진은 분명 몸통이 아니다. 깃털이건 개털이건 그냥 털이다. 하지만 ‘사진이라는 털’은 몸통을 암시할 수 있다. 세상이라는 몸통을 들여다보게 해주는 통로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딱 그만큼이 사진의 몫이라는 게 노순택의 사진론이다. “사진으로 세상을 바꾼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지만, 우리가 사는 세상이 어떤 지경인지 왜 이 지경인지 사고를 촉구할 수는 있을 것”이라는 게 그의 믿음이다.
노순택의 사진은 주로 한국사회의 부조리한 모순의 현장, 특히 용산과 평택, 그리고 강정마을의 모습을 많이 담고 있지만 결정적 순간을 포착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그는 은근하게 암시하고 비유적으로만 말한다. 사진으로 할 수 있는 건 그 정도가 최대치라고 보는 듯싶다. 사진은 털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는 그는 아예 ‘솜털’을 찍기도 한다. 실례를 보자. 2009년 4월 용산참사 현장에서 철거민들을 진압하기 위해 투입된 한 ‘용역깡패’를 피사체로 찍으면서 노순택은 환한 봄볕에 보송보송한 솜털마저 눈부신 팔을 찍었다. 문신이라도 새겨지거나 ‘노가다 근육’을 자랑하는 팔이 아니라 가늘고 연약해 보이기까지 한 팔이다. 부유층의 아이가 용역 깡패로 나섰을 리는 없기에, 이 젊은이는 자기 부모 형제와 저치가 별로 다르지 않은 사람들에게 종주먹을 들이대기 위해 현장에 서 있는 셈이다. 그렇게 사진에 보이는 건 가볍게 주먹을 쥐고 서 있는 한 젊은이의 뒷모습뿐이지만 그 이미지는 안타까움과 슬픔과 분노 등 복합적인 정서를 자아낸다.
복합적인 정서를 이끌어낸다는 점에서는 고 김근태를 찍은 사진도 인상적이다. 그가 세상을 떠난 뒤, 인터뷰까지 한 적이 있는 작가는 필름 더미에서 고인의 사진을 찾았지만 이상하게도 고인의 사진을 찾지 못했다고 한다. 하지만 용산참사 관련 사진들을 정리하다가 우연히도 농성장에서 철거민 가족들과 함께 비옷을 입고 조용히 앉아 있는 김근태를 발견한다. 2009년 6월에 찍힌 사진이었다. 앞자리에 앉은 철거민 가족들은 고개를 숙인 채 망자의 영정을 가슴에 안고 있고, 바로 한 줄 뒤에서 김근태는 물끄러미 전방을 바라보며 조용히 앉아 있다. 주변에는 전경들이 에워싸고 있다. 무거운 침묵이 현장을 감싸고 있고 카메라 조명만 아니면 칠흑같이 어두운 밤이다. 군더더기 설명 없이도 정치인 김근태를 가장 잘 말해주는 사진처럼 보인다. 노순택은 그렇게 조용히 싸운다.
13. 06. 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