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반의 책을 옮겨놓고 나머지 책은 쌓아놓는 바람에 낯익은 서재도 낯설게 느껴진다. 열 권도 안 되는 책만이 꽂혀 있는 책장도 나로선 좀처럼 보기 드문 광경이다. 임시방편으로 컴퓨터를 다시 연결해서 페이퍼를 적는다. 당분간은 밤마다 유사 난민 생활을 해야 할 듯싶다. 일단, 이번달 책&(428호)에 실은 '키워드로 읽는 인문학 서재'를 옮겨놓는다. 거짓말에 관한 책 몇 권이 눈에 띄기에 고른 주제가 '거짓말'이었다. 거짓말의 심리학을 다룬 책 두 권 얘기다. 한 권 더 다뤘다면 <거짓말을 간파하는 기술>(21세기북스, 2013)도 후보였다.

 

 

책&(14년 6월호) 크고 작은 거짓말 속에서 사는 우리

 

거짓말을 하는 것은 나쁜 일이라고 생각하는 건 우리의 통념이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많은 거짓말 속에서 살아간다. 여기서 거짓말은 남에게 큰 손해를 끼치는 사기 같은 범죄는 제외하고 하는 말이다. 우리는 정직을 높이 평가하지만 언제 어디서건 본심을 말하는 게 최상의 방책인 것은 아니다. 가령 자신이 싫어하는 사람이 만나자고 할 때 선약이 있다는 핑계를 대는 대신에 ‘나는 당신이 싫고 그래서 만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 언제나 옳은 행동일까. 적당한 거짓말이 사회생활에서는 불가피할뿐더러 때로는 필수적인 것으로 보인다. 그런 관점에서 거짓말의 의의와 심리를 탐색한 책 두 권을 묶어서 이달에는 읽어보기로 하자.  


일본의 심리학자 사이토 이사무의 <사람은 왜 거짓말을 할까?>(스카이)는 제목 그대로 사람들은 왜 거짓말을 하는 걸까란 질문을 던지고 이에 답한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로서 집단생활을 하면서도 개인의 자존심도 만족시키고자 한다. 저자에 따르면 이 두 가지 욕구를 동시에 만족시키려는 전략이 거짓말이다. 보통 커뮤니케이션은 정보의 올바른 전달을 목적으로 한다. 그럼에도 그런 정확성과는 거리가 먼 거짓말이 자주 사용되는 것은 다른 목적을 갖고 있어서이다. 바로 양호한 인간관계를 유지한다는 목적이다. 저자는 이러한 목적을 갖고서 일상생활에서 흔히 쓰이는 다양한 거짓말의 사례를 살펴보고 그 심층심리를 분석한다. 심층심리라고는 하지만 거짓말의 여러 양상과 숨은 의도에 따른 유형들을 제시하는 쪽에 가깝다.


그런 유형학보다 흥미로운 건 남자와 여자의 거짓말이 어떻게 다른가에 대한 설명인데, 저자는 거짓말의 성차가 진화심리학적 근거를 갖는 것으로 본다. 그에 따르면, 남자는 눈앞의 이익을 위해 임기응변으로 거짓말을 하는 경향이 있고, 여자는 상대의 기분이나 관계를 고려해서 거짓말을 하는 경향이 있다. 즉 남성은 자신의 이익을 우선시하기 위한 전략으로 거짓말을 활용하는 반면에 여성은 상대의 입장을 우선시하고 배려하기 위한 거짓말을 주로 많이 한다. 거짓말에 대한 대처법에서도 남성과 여성은 차이를 보이는데, 상대방이 거짓말을 했을 때 남성은 상대를 비난하고 상황을 자신한테 유리하게 만들기 위해 애쓴다. 관계 회복이 아니라 권력과 정의의 회복에 주안점을 둔다. 반면에 여성은 상대와의 인간관계를 유지하는 데 초점을 맞추면서 상대가 왜 그런 거짓말을 했는지 이해하려고 한다. 관계 유지를 중시하는 여성의 입장에서 보면 권력이나 정의는 부차적이다. 가령 남성이 여성에게 하는 가장 대표적인 거짓말은 “전화할게” “사랑해” “너뿐이야”라고 하는데, 이런 거짓말의 진의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자주 속아 넘어가는 것은 여성이 어리석어서가 아니라 그 말을 믿고 싶기 때문에 믿는 척하는 것이라는 게 저자의 지적이다.  


독일의 긍정심리학자이자 베스트셀러 작가 우테 에어하르트가 남편과 함께 쓴 <거짓말의 힘>(청림출판)도 거짓말에 대한 편견을 재고하게끔 한다. 저자의 문제의식은 간명하다. 거짓말은 최고의 지적능력이며, 삶의 일부이고 소통의 필수 요소라는 것이다.

 

통계에 따르면 우리는 하루에 다섯 번에서 이백 번까지 ‘작은 핑계’를 이용한다. 사소한 거짓말은 거의 일상적이라고 해도 과장이 아니겠다. 저자는 이 거짓말을 긍정적인 자기기만이라는 관점에서 해명한다. 예컨대, 이런 가정을 해보자. 친한 친구로부터 사기를 당했다, 앞으로 살 날이 겨우 한 달밖에 안 남았다, 부모가 사실은 친부모가 아니다 등등. 이런 사례들의 공통점은 진실의 인지가 엄청난 정신적 부담과 고통을 안겨다 준다는 것이다. 그래서 흔히 사실을 직시하기보다는 회피하거나 변명하고자 한다. 그것은 고통을 최소화하려는 본능적인 성향의 결과다. 다르게 말하면, “모든 진실이 항상 소화 가능한 건 아니다. 우리는 모든 진실을 알고자 하는 건 아니다.”


여기서 진실보다 우선적인 가치로 등장하는 것이 행복이다. 이 행복을 위해서는 자신을 속이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스스로에게 거짓말을 할 수 있으면 행복하다는 것이다. 너무 거창하게 생각할 것도 없다. 저자는 매일 일기장에 좋은 일을 적으면 삶의 만족도가 올라간다는 사실을 예시한다. 그런 식으로 우리는 마음의 방향을 조종할 수 있다.

 

가령 다이어트를 해야 할 때 음식을 의도적으로 박하게 평가하는 것도 자신을 속이는 한 가지 방식이다. 좋아하지 않는 일을 할 때에도 긍정적 자기암시를 활용할 수 있는데, 쓰레기 수거 아르바이트를 하는 대학생이 무거운 쓰레기통 운반을 매우 좋은 운동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일례다. 이러한 낙관 편향적 태도를 저자는 ‘성숙한 방어’라고 부른다. “비현실적이거나 비도덕적이지 않으면서 자신을 속이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물론 낙관편향과는 반대적인 태도도 가질 수 있다. 비관적인 사람도 실수를 발견하는 데 뛰어난 능력을 발휘한다. 그러나 그것이 행복에는 크게 도움이 되지는 않는다는 게 저자의 생각이다. 거짓말이 없다면 삶은 너무 암울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14. 06. 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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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잡지 '라라'에서 비평을 주제로 교양강좌를 연다(http://www.lara.kr/?p=51447). 7월 2일부터 9월 3일까지 10주간 매주 수요일 저녁(19:00-21:00) 방배유스센터에서 진행되는데(나는 '서평'을 맡았다) 다양한 분야의 비평가들이 두루 망라돼 있다. 비평에 관심이 있는 분은 참고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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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 시사IN(351호)에 실은 리뷰를 옮겨놓는다. 최근에 번역돼 나온 프리모 레비의 마지막 책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돌베개, 2014)를 읽고 적은 것이다.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의 마지막 저작이라는 점에서 충분히 예상할 수 있듯이 마음을 적잖이 무겁게 만드는 책이다. 그럼에도 시선을 돌릴 수 없는 건 그러한 역사가 다시는 반복되어서는 안 되겠다는 경각심 때문이다. 레비의 바람도 그런 것이었다고 믿는다.

 

 

시사IN(14. 06. 07) '생존자' 레비 당신의 유서

 

우리에겐 따로 연상되는 바가 있어서 제목부터 마음을 무겁게 하는 책이 출간됐다. 프리모 레비의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이다.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레비가 1987년 자살하기 한 해 전에 발표한 것이니 그가 남긴 유서라고 해도 무방하다. 1947년 <이것이 인간인가>를 발표한 이래 나치 절멸수용소에서의 경험을 낱낱이 해부하고 성찰해온 그의 증언을 압축하고 있다.

 

애초에 레비는 첫 책의 제목을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라고 붙이려고 했다. 하지만 <이것이 인간인가>의 편집자의 제안에 따라 제목이 바뀌었고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는 한 장의 제목으로만 들어갔다(<이것이 인간인가>에서 ‘익사한 자와 구조된 자’라고 옮겨진 장이다). 레비와 인터뷰한 한 비평가의 표현을 빌면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라는 최초의 제목은 표지 위로 올라오기까지 39년을 기다리게 되었다.”

 


무엇이 그로 하여금 그리도 고통스러운 경험의 증언을 40년 동안이나 하게끔 만들었을까. “우리는 우리의 개인적 경험을 넘어 집단적‧근본적으로 중요하고 예기치 못한 사건의 증인”이라는 자각이다. ‘우리’는 물론 나치 수용소의 생존자를 가리킨다. 인류사에서 강제수용소나 대량학살은 적잖이 존재했지만 “나치 수용소의 체계는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유일무이한 것”이라는 판단이 거기에는 깔려 있다. 도저히 일어날 수 없고 일어나서도 안 되는 일이 자행됐기에 생존자들의 증언은 믿기지 않을 위험이 있다.

 

심지어 SS(나치 친위대)의 군인들은 이 점을 미리 예견하기까지 했다. 그들은 포로들을 향해 “이 전쟁이 어떤 식으로 끝나든지 간에, 너희와의 전쟁은 우리가 이긴 거야. 너희 중 아무도 살아남아 증언하지 못할 테니까. 혹시 누군가 살아 나간다 하더라도 세상이 그를 믿어주지 않을 걸.”이라고 말하며 즐거워했다고 한다. 레비의 증언은 이러한 냉소에 대한 저항이다. 이와 같은 사건이 또다시 일어날 수도 있다는 가능성에 대한 지속적인 경고이기도 하다. “산발적이고 사적인 일화들에서, 또는 국가가 저지르는 불법의 형태로” 우리 주변에 널려 있는 온갖 폭력들이 그에겐 불길한 전조로 여겨진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이 책을 쓴 동기 중에 하나가 아우슈비츠에 대한 극단적인 단순화라고 밝혔다. <이것이 인간인가>를 읽은 독자들이 문제를 박해자(괴물)와 희생자(무구한 사람들) 사이에서 벌어진 걸로 생각하는데,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다. 수용소의 신입 수감자들에게 먼저 가해졌던 것은 같은 동료라고 생각한 다른 수감자들의 폭력이었다. 수용소에는 0.5리터의 죽을 더 받기 위해, 혹은 얼마간의 생존을 더 보장받기 위해서 포로이면서 하위 관리자로 부역한 포로들이 적지 않았다.

 

대표적인 것이 아우슈비츠의 특수부대(존더코만도스)였다. ‘화장터의 까마귀’라 불린 그들은 대부분 유대인이었고 가스실 희생자들의 뒤처리를 담당했다. 유대인을 가스실로 집어넣고 시체를 빼내는 일도 유대인이 떠맡았던 것이다. 레비가 보기에 특수부대의 조직은 나치의 가장 악마적인 범죄였다. 그것은 자신들의 악행을 희생자들에게 떠넘긴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희생자들은 가스실로 가기 전에 인간적 존엄성은 물론 영혼마저도 파괴됐다.


저항도 없지는 않았다. 작업을 거부한 특수부대원 전체가 독가스에 살해당하기도 했고, 반란을 일으켜 화장터를 폭파하고 SS와 교전을 벌이다 죽임을 당한 사례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그러한 저항 대신에 학살과정에 협조한 ‘비참한 학살 실행자들’을 쉽게 단죄할 수 없다고 레비는 말한다. 자살은 동물의 행위가 아니라 인간의 행위이지만, 수용소에서의 삶은 인간 이하의 동물적 삶이었기 때문이다. 레비의 경우도 그렇지만 자살은 생존자로서 인간적 삶을 되찾은 이후에나 가능했다.

 

14. 06.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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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 한겨레의 '로쟈의 번역서 읽기'를 옮겨놓는다. 요즘 존 스타인벡의 대표작들을 읽고 있어서 고른 책이 <분노의 포도>(민음사, 2008)이다. 헨리 폰다가 주연한 존 포드 감독의 <분노의 포도>와 비교해봐도 좋은 작품이다. 아카데미 감독상까지 수상한 영화이지만 정치적으로 보수적이었던 존 포드는 원작을 읽지도 않았다고 한다. 샤론의 로즈가 굶주린 남자에게 젖을 물리는 마지막 장면도 영화에서는 배제됐다.

 

 

 

한겨레(14. 05. 26) 굶주린 남자에게 물린 젖의 의미

 

“굶주린 사람들의 눈 속에 점점 커져가는 분노가 있다. 분노의 포도가 사람들의 영혼을 가득 채우며 점점 익어간다.” 존 스타인벡의 <분노의 포도>에 나오는 유명한 구절이다. 1930년대를 배경으로 한 이 사회소설은 미국 중부 오클라호마에서 서부 캘리포니아로 이주해간 조드 일가의 여정을 따라간다. 고향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건 오랜 가뭄과 모래폭풍 때문이다. 대출받은 돈을 갚을 수 없게 되자 담보로 맡긴 농지는 은행으로 넘어가고 농민들은 일거에 생활터전을 잃고 나앉게 된다. 일꾼을 모집한다는 전단을 유일한 희망으로 삼아서 이들은 캘리포니아로 이주를 결심한다. 그렇게 이주민 대열에 나선 농민들이 30만 명에 이르며, <분노의 포도>는 스타인벡이 이들과 동행한 경험을 바탕으로 쓴 작품이다.

 

 

주인공 톰 조드를 비롯한 조드 일가의 사람들이 낡은 중고차에 타고 66번 도로를 따라서 캘리포니아로 가는 길에 동승한 이는 케이시 목사다. 목사라고는 하지만 자신에게 더 이상 성령이 없다고 생각해서 설교까지 그만둔 상태다. 그는 자신이 황야로 나갔던 예수처럼 지쳤다고 말한다. 하지만 인간에 대한 사랑과 믿음만은 잃지 않는다. 그가 사랑하는 인간은 전체로서의 인간이다. 그는 모든 사람이 하나의 커다란 영혼을 이루고 있으며 인류가 하나일 때 거룩해진다고 생각한다. ‘나’에서 ‘우리’로 변화할 때 인간은 거룩해진다는 것이다. 그러한 변화를 가로막는 것이 사적 소유이다.

 

캘리포니아는 조드 가족이 기대했던 ‘약속의 땅’이 아니었다. 이주민들이 계속 몰려들자 품삯은 점점 떨어졌고 사람들의 눈빛은 굶주림과 분노로 채워졌다. 하지만 기업들은 노동자들의 품삯을 더 올려줄 수도 있을 돈을 노동자들의 연대를 분쇄하기 위해 썼다. 독가스와 총을 사들이고 공작원과 첩자를 고용했다. 노동운동에 나선 케이시는 블랙리스트에 오르고 기업의 하수인들에게 희생된다. 곡괭이 자루를 들고 달려드는 그들에 맞서 케이시가 “너희들은 지금 자기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몰라”라고 한 말은 다시금 그를 예수의 모습과 중첩되게 만든다.

 

<분노의 포도>의 케이시는 작가 스타인벡의 인식과 성찰을 대변하는 인물로 보인다. 비록 그는 비명횡사를 당하지만, 톰은 그의 유지를 계승한다. 그는 어머니에게 케이시가 하던 일을 계속 해나가겠다는 결심을 말한다. “저는 사방에 있을 거예요. 어머니가 어디를 보시든. 배고픈 사람들이 먹을 걸 달라고 싸움을 벌이는 곳마다 제가 있을 거예요. 경찰이 사람을 때리는 곳마다 제가 있을 거예요.” 바로 그렇게 톰은 케이시처럼 말하고 행동하게 된다. 마치 케이시에 빙의된 것처럼.

 

사실 톰의 그러한 결심으로 소설은 마무리될 수 있었을 터인데, 스타인벡은 이 ‘남성적 결말’에 상응하는 ‘여성적 결말’을 덧붙인다. 톰의 여동생 샤론의 로즈가 아이를 사산하고 굶주림에 죽어 가는 남자에게 젖을 물리는 유명한 마지막 장면이 그것이다. 남자들이 무력하게 바라보고만 있는 상황에서 어머니 조드와 샤론의 로즈는 서로 눈빛을 주고받으며 예기치 않은 결단을 내렸던 것이다. 얼핏 두 가지 결말 모두 가족애의 사회적 확장과 연대로 수렴되는 듯싶지만, 차이도 없지 않다. 남자들은 단계별로 인생을 살아가는 데 반해서 여자들은 삶 전체를 하나의 흐름으로 살아간다는 어머니 조드의 말이 시사하는 만큼의 차이다.

 

14. 05.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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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달 책&(427호)에 실은 '키워드로 읽는 인문학 서재'를 옮겨놓는다. 5월임을 염두에 두고 고른 키워드가 '결혼'이었는데, 앨런 맥팔레인의 <잉글랜드에서의 결혼과 사랑>(나남, 2014)이 출간된 걸 계기로 관련서를 더 골라보았다. 결혼의 간략한 역사이면서 삐딱한 역사라고 할 수잔 스콰이어의 < I don't>(뿌리와이파리, 2009)부터 시작하는 걸로 잡았다.

 

 

 

책&(14년 5월호) 결혼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 그것이 문제로다!

 

‘오월의 신부’가 되는 것은 많은 미혼 여성들이 꿈꾸는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결혼생활이 달콤한 꿈으로만 채워질 수 없다는 것도 모두가 아는 일이다. 그래서 어쩌면 결혼을 앞둔 예비부부도 각자가 결혼의 손익에 대해서, 즉 결혼의 비용과 혜택에 대한 대차대조표를 만들어볼지도 모른다. 거슬러 올라가면 결혼의 역사 또한 그렇게 시작되지 않았을까. 굉장히 긴 이야기가 될 수도 있지만 결혼의 역사를 이끌어온 동인과 쟁점은 무엇인지 몇 권의 책을 통해 짤막하게 살펴보기로 하자.


가볍게 시작하기에 좋은 책은 수잔 스콰이어의 < I don’t>(뿌리와이파리, 2009)다. 제목의 ‘아뇨!(I don’t)’는 결혼서약에서 “이브, 그대는 이 남자 아담을 당신의 합법적인 남편으로 맞이하겠습니까?”라는 주례자의 질문에 대한 대답이다. 통상 ‘예(I do!)’라고 대답함으로써 신랑과 신부의 자발적인 동의하에 결혼이 이루어졌다고 선포되지만, ‘아뇨!’라고 답한다면 사정이 달라진다. 저자가 기혼자임에도 불구하고 저자가 결혼에 선뜻 동의할 수 없다는 제목을 내건 것은 결혼의 역사를 16세기까지만 다루기 때문이다. 16세기는 중요한 전환점으로 사랑을 중시하는 결혼관이 대세로 자리 잡은 시기다. 반면에 그 이전의 역사는 여성에게 일방적으로 불리한 잔혹사였다는 게 저자의 판단이다.


창세기의 구절부터가 좀 불길했다.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기독교적 전통에 따르면 여성은 철저한 통제의 대상이 되었다. 가부장제 결혼과 정절에 대한 남성 편의적 이중 잣대, 그리고 여자를 집에 가둬놓기 등이 서양사를 관통해온 남자들의 여성 통제 전략이었다. 이러한 결혼관에 혁신적인 변화를 가져온 것이 루터의 종교개혁이다. 루터와 프로테스탄트는 동지애를 가장 우선시하고 자녀출산과 정절이 그 뒤를 잇게 함으로써 결혼의 의미를 혁명적으로 바꿔놓았다.

 


고대세계에서 2000년대까지 서술의 범위를 확장하고 있는 메릴린 옐롬의 <아내의 역사>(책과함께, 2012)에서도 16세기는 전환점으로 간주된다. 사랑을 중요하게 여기는 결혼관은 16세기 영국에서 시작돼 17세기 청교도들이 이주하면서 미국으로 전파됐고 18세기 후반에는 중류층에서 유행하기 시작했다. 당사자들의 감정이 결혼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된 것이다. 우리도 사정이 다르지 않지만 근대 이전에는 아내는 성적 즐거움, 자식, 양육, 요리, 가사 노동을 제공해야 했고 남편에게 신체를 학대를 받지 않으면 축복이라고 여겼다. 아내는 남편에게 봉사하고 복종해야 하며 남편은 아내를 때려도 좋다는 낡은 믿음은 부부가 서로를 동반자로 여기는 결혼 형태가 확산되면서 서서히 힘을 잃어갔다. 19세기 이후로 여성의 교육과 취업 기회가 많아지고, 더불어 사회적‧정치적 참여가 빈번해지면서 남편과 아내는 좀더 평등한 관계가 되었다.

 

이러한 흐름에 예기치 않은 진전을 가져온 것은 2차 세계대전이었다. 대공황기만 하더라도 남자의 일자리를 뺏는다는 이유로 비난의 대상이 되던 ‘일하는 아내’가 거꾸로 칭송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전쟁 전에는 미혼의 젊은 여성들이 일자리를 독점했지만 전후에는 기혼자와 중년 여성이 태반을 차지했다. 경제적으로 더 이상 남편에게 의존하지 않아도 되는 아내는 남편의 예속적인 존재가 아니다. 오늘날 미국과 유럽의 많은 부부는 권리와 권위를 서로 공유한다. 아니 변화는 더 급속하다. 성별에 관계없는 시민결합이 결혼의 한 형태로 인정받기까지 하니까. 


지금도 결혼식장에서 통용되는 의례는 1552년 영국 국교회의 기도서를 따른 것이다. 그런 점에서 영국은 결혼과 결혼서약의 원조 국가라 할 만한데, 영국의 사회인류학자 앨런 맥팔레인의 <잉글랜드에서의 결혼과 사랑>(나남, 2014)은 바로 1300년에서 1840년까지 영국의 결혼의 역사를 깊이 있게 다룬 책이다. 저자는 토마스 맬서스가 <인구론>에서 제시한 가정들을 근거로 한 결혼관을 ‘맬서스주의적 결혼체제’라고 부른다. 이러한 결혼체제의 기원과 전망까지를 포괄적으로 다룸으로써 근대의 지배적 결혼관이 어떤 가정과 계산에 의해 지탱되어 왔는지 이해하도록 해준다. ‘결혼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 그것이 문제로다!’라고 고민하는 이들이라면 진지하게 읽어봄직하다.

 

14. 05.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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