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주 한겨레의 '로쟈의 번역서 읽기'를 옮겨놓는다. 요즘 존 스타인벡의 대표작들을 읽고 있어서 고른 책이 <분노의 포도>(민음사, 2008)이다. 헨리 폰다가 주연한 존 포드 감독의 <분노의 포도>와 비교해봐도 좋은 작품이다. 아카데미 감독상까지 수상한 영화이지만 정치적으로 보수적이었던 존 포드는 원작을 읽지도 않았다고 한다. 샤론의 로즈가 굶주린 남자에게 젖을 물리는 마지막 장면도 영화에서는 배제됐다.

 

 

 

한겨레(14. 05. 26) 굶주린 남자에게 물린 젖의 의미

 

“굶주린 사람들의 눈 속에 점점 커져가는 분노가 있다. 분노의 포도가 사람들의 영혼을 가득 채우며 점점 익어간다.” 존 스타인벡의 <분노의 포도>에 나오는 유명한 구절이다. 1930년대를 배경으로 한 이 사회소설은 미국 중부 오클라호마에서 서부 캘리포니아로 이주해간 조드 일가의 여정을 따라간다. 고향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건 오랜 가뭄과 모래폭풍 때문이다. 대출받은 돈을 갚을 수 없게 되자 담보로 맡긴 농지는 은행으로 넘어가고 농민들은 일거에 생활터전을 잃고 나앉게 된다. 일꾼을 모집한다는 전단을 유일한 희망으로 삼아서 이들은 캘리포니아로 이주를 결심한다. 그렇게 이주민 대열에 나선 농민들이 30만 명에 이르며, <분노의 포도>는 스타인벡이 이들과 동행한 경험을 바탕으로 쓴 작품이다.

 

 

주인공 톰 조드를 비롯한 조드 일가의 사람들이 낡은 중고차에 타고 66번 도로를 따라서 캘리포니아로 가는 길에 동승한 이는 케이시 목사다. 목사라고는 하지만 자신에게 더 이상 성령이 없다고 생각해서 설교까지 그만둔 상태다. 그는 자신이 황야로 나갔던 예수처럼 지쳤다고 말한다. 하지만 인간에 대한 사랑과 믿음만은 잃지 않는다. 그가 사랑하는 인간은 전체로서의 인간이다. 그는 모든 사람이 하나의 커다란 영혼을 이루고 있으며 인류가 하나일 때 거룩해진다고 생각한다. ‘나’에서 ‘우리’로 변화할 때 인간은 거룩해진다는 것이다. 그러한 변화를 가로막는 것이 사적 소유이다.

 

캘리포니아는 조드 가족이 기대했던 ‘약속의 땅’이 아니었다. 이주민들이 계속 몰려들자 품삯은 점점 떨어졌고 사람들의 눈빛은 굶주림과 분노로 채워졌다. 하지만 기업들은 노동자들의 품삯을 더 올려줄 수도 있을 돈을 노동자들의 연대를 분쇄하기 위해 썼다. 독가스와 총을 사들이고 공작원과 첩자를 고용했다. 노동운동에 나선 케이시는 블랙리스트에 오르고 기업의 하수인들에게 희생된다. 곡괭이 자루를 들고 달려드는 그들에 맞서 케이시가 “너희들은 지금 자기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몰라”라고 한 말은 다시금 그를 예수의 모습과 중첩되게 만든다.

 

<분노의 포도>의 케이시는 작가 스타인벡의 인식과 성찰을 대변하는 인물로 보인다. 비록 그는 비명횡사를 당하지만, 톰은 그의 유지를 계승한다. 그는 어머니에게 케이시가 하던 일을 계속 해나가겠다는 결심을 말한다. “저는 사방에 있을 거예요. 어머니가 어디를 보시든. 배고픈 사람들이 먹을 걸 달라고 싸움을 벌이는 곳마다 제가 있을 거예요. 경찰이 사람을 때리는 곳마다 제가 있을 거예요.” 바로 그렇게 톰은 케이시처럼 말하고 행동하게 된다. 마치 케이시에 빙의된 것처럼.

 

사실 톰의 그러한 결심으로 소설은 마무리될 수 있었을 터인데, 스타인벡은 이 ‘남성적 결말’에 상응하는 ‘여성적 결말’을 덧붙인다. 톰의 여동생 샤론의 로즈가 아이를 사산하고 굶주림에 죽어 가는 남자에게 젖을 물리는 유명한 마지막 장면이 그것이다. 남자들이 무력하게 바라보고만 있는 상황에서 어머니 조드와 샤론의 로즈는 서로 눈빛을 주고받으며 예기치 않은 결단을 내렸던 것이다. 얼핏 두 가지 결말 모두 가족애의 사회적 확장과 연대로 수렴되는 듯싶지만, 차이도 없지 않다. 남자들은 단계별로 인생을 살아가는 데 반해서 여자들은 삶 전체를 하나의 흐름으로 살아간다는 어머니 조드의 말이 시사하는 만큼의 차이다.

 

14. 05.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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