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주 시사IN(351호)에 실은 리뷰를 옮겨놓는다. 최근에 번역돼 나온 프리모 레비의 마지막 책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돌베개, 2014)를 읽고 적은 것이다.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의 마지막 저작이라는 점에서 충분히 예상할 수 있듯이 마음을 적잖이 무겁게 만드는 책이다. 그럼에도 시선을 돌릴 수 없는 건 그러한 역사가 다시는 반복되어서는 안 되겠다는 경각심 때문이다. 레비의 바람도 그런 것이었다고 믿는다.

 

 

시사IN(14. 06. 07) '생존자' 레비 당신의 유서

 

우리에겐 따로 연상되는 바가 있어서 제목부터 마음을 무겁게 하는 책이 출간됐다. 프리모 레비의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이다.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레비가 1987년 자살하기 한 해 전에 발표한 것이니 그가 남긴 유서라고 해도 무방하다. 1947년 <이것이 인간인가>를 발표한 이래 나치 절멸수용소에서의 경험을 낱낱이 해부하고 성찰해온 그의 증언을 압축하고 있다.

 

애초에 레비는 첫 책의 제목을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라고 붙이려고 했다. 하지만 <이것이 인간인가>의 편집자의 제안에 따라 제목이 바뀌었고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는 한 장의 제목으로만 들어갔다(<이것이 인간인가>에서 ‘익사한 자와 구조된 자’라고 옮겨진 장이다). 레비와 인터뷰한 한 비평가의 표현을 빌면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라는 최초의 제목은 표지 위로 올라오기까지 39년을 기다리게 되었다.”

 


무엇이 그로 하여금 그리도 고통스러운 경험의 증언을 40년 동안이나 하게끔 만들었을까. “우리는 우리의 개인적 경험을 넘어 집단적‧근본적으로 중요하고 예기치 못한 사건의 증인”이라는 자각이다. ‘우리’는 물론 나치 수용소의 생존자를 가리킨다. 인류사에서 강제수용소나 대량학살은 적잖이 존재했지만 “나치 수용소의 체계는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유일무이한 것”이라는 판단이 거기에는 깔려 있다. 도저히 일어날 수 없고 일어나서도 안 되는 일이 자행됐기에 생존자들의 증언은 믿기지 않을 위험이 있다.

 

심지어 SS(나치 친위대)의 군인들은 이 점을 미리 예견하기까지 했다. 그들은 포로들을 향해 “이 전쟁이 어떤 식으로 끝나든지 간에, 너희와의 전쟁은 우리가 이긴 거야. 너희 중 아무도 살아남아 증언하지 못할 테니까. 혹시 누군가 살아 나간다 하더라도 세상이 그를 믿어주지 않을 걸.”이라고 말하며 즐거워했다고 한다. 레비의 증언은 이러한 냉소에 대한 저항이다. 이와 같은 사건이 또다시 일어날 수도 있다는 가능성에 대한 지속적인 경고이기도 하다. “산발적이고 사적인 일화들에서, 또는 국가가 저지르는 불법의 형태로” 우리 주변에 널려 있는 온갖 폭력들이 그에겐 불길한 전조로 여겨진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이 책을 쓴 동기 중에 하나가 아우슈비츠에 대한 극단적인 단순화라고 밝혔다. <이것이 인간인가>를 읽은 독자들이 문제를 박해자(괴물)와 희생자(무구한 사람들) 사이에서 벌어진 걸로 생각하는데,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다. 수용소의 신입 수감자들에게 먼저 가해졌던 것은 같은 동료라고 생각한 다른 수감자들의 폭력이었다. 수용소에는 0.5리터의 죽을 더 받기 위해, 혹은 얼마간의 생존을 더 보장받기 위해서 포로이면서 하위 관리자로 부역한 포로들이 적지 않았다.

 

대표적인 것이 아우슈비츠의 특수부대(존더코만도스)였다. ‘화장터의 까마귀’라 불린 그들은 대부분 유대인이었고 가스실 희생자들의 뒤처리를 담당했다. 유대인을 가스실로 집어넣고 시체를 빼내는 일도 유대인이 떠맡았던 것이다. 레비가 보기에 특수부대의 조직은 나치의 가장 악마적인 범죄였다. 그것은 자신들의 악행을 희생자들에게 떠넘긴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희생자들은 가스실로 가기 전에 인간적 존엄성은 물론 영혼마저도 파괴됐다.


저항도 없지는 않았다. 작업을 거부한 특수부대원 전체가 독가스에 살해당하기도 했고, 반란을 일으켜 화장터를 폭파하고 SS와 교전을 벌이다 죽임을 당한 사례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그러한 저항 대신에 학살과정에 협조한 ‘비참한 학살 실행자들’을 쉽게 단죄할 수 없다고 레비는 말한다. 자살은 동물의 행위가 아니라 인간의 행위이지만, 수용소에서의 삶은 인간 이하의 동물적 삶이었기 때문이다. 레비의 경우도 그렇지만 자살은 생존자로서 인간적 삶을 되찾은 이후에나 가능했다.

 

14. 06.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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