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출판문화협회에서 펴내는 월간지 출판문화(587호)에 실은 초대석 칼럼을 옮겨놓는다. 수년 전 독서에세이를 연재한 적이 있는데, 이번에 다시 청탁을 받아 내년에도 격월로 독서에세이를 연재할 예정이다. 이 칼럼은 그 맛보기라고 해야겠다.

 

 

출판문화(14년 10월호) 책은 여전히 우리의 미래다

 

굳이 해보지 않아도 아는 일이 있는 것처럼 굳이 읽어보지 않아도 어림할 수 있는 글이 있다. 서평가가 <출판문화>의 초대석 지면에 쓸 수 있는 글이 그런 종류일 것이다. 책을 읽자, 라는 빤한 얘기. 그렇다, 흥미로울 게 전혀 없는 고정 레퍼토리다. 우리가 독서량 조사에서 매번 꼴찌를 맴도는, 다시 말해서 어지간히 책을 안 읽는 국민이라는 것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을 좀 읽어야 하지 않을까라는 염려 섞인 제안. 이 글은 그런 기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임을 미리 밝힌다. 늘 반복하는 주장에 한두 마디 더 얹을 수 있다면 나로선 최선이겠다.

 

책이 거의 모든 것이라고 생각하는 축에 속하지만 그렇다고 책에 대한 열혈 신자는 아니다. ‘독서 천국 부독서 지옥을 설파할 생각은 없다는 얘기다. 책에서 배운 것인지는 몰라도 내 나름으론 관용적이다. 다른 가능성에 대해서도 얼마든지 고려한다. 어떤 가능성인가? 어차피 책과 담을 쌓기로 한 것이 우리의 결연한 태도이자 문화라면(이건 비독서 문화라고 해야겠다), 그리고 책을 안 읽는 게 우리가 가장 잘할 수 있는 것 가운데 하나라면 그런 장기를 살리는 것도 한 가지 방책은 되지 않겠느냐는 것. 자문해보자. 잘하지 못하거나, 별로 하고 싶지 않은 일을 억지로 해서 좋은 결과를 얻은 경우가 과연 얼마나 되던가. 다른 선택지에 대한 기회비용까지 계산하면 역시나 좋은 선택은 아니었다는 결론이 나올 것이다. 소질이 없다면 일찍 접는 것도 차선은 된다. 어쩌면 한국인에게 독서 또한 그런 없는 소질은 아닐까.

 

예부터 책읽기를 즐겨온 자랑스러운 전통을 우리는 갖고 있다고도 말한다. 일리가 없지 않지만 딱히 맞는 말도 아니다. ()보다 문()을 숭상했던 조선조 선비들이 그 전통의 주역일 터이지만 문제는 책을 읽을 줄 아는 선비들이 결코 전체 인구의 다수는 아니지 않았느냐는 반론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일제 강점기 때 식민지 조선의 문해율이 30퍼센트를 넘지 않았다면 조선의 문해율 인구가 그보다 높았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즉 아무리 한쪽에는 독서를 즐기는 선비들이 있었다고 해도 인구의 절대 다수는 책과는 거리가 먼 문맹이었을 것이다. 책을 읽어온 내력 못지않게 안 읽어온 내력도 무시 못한다고 해야 온당하다.

 

물론 문해율만 놓고 보자면 사정은 달라진다. 어려운 한문 대신에 한글을 쓰게 된 덕이 크지만, 오늘날 한국인의 문해율은 세계 최고 수준이다. 곧 한글 문장을 읽지 못하는 한국인은 거의 없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다. 30퍼센트 미만이던 문해율 인구가 거의 100퍼센트에 육박한다고 하면 말 그대로 뽕나무밭이 푸른 바다로 변한 수준이다. 그렇다, 나름 대단한 일이고 자부심을 가질 만하다. 그런데 그런 자부심이 자기도취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한 가지 의문도 해결해야 한다. 어째서 그런 높은 문해율에도 불구하고 한국인의 독서량은 형편없이 적은가라는 의문이다.

 

나는 두 가지 답변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한 가지 답변은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불분명하지만, 우리가 분명 책을 읽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안 읽기로 작정했다는 것. 운전면허를 갖고 있지만, 운전을 하지 않는 사람이 있고, 가수 뺨치는 소질을 갖고 있지만, 노래만은 극구 사양하는 사람도 있다. 마찬가지로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책을 읽을 수 있지만 다른 일에 손댄다는 것이다. 그것이 개인적인 선택이라면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겠으나 집단적으로 그런 선택을 했다고 하면 그 이유는 연구과제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답변은 문해력이 곧바로 독서력, 곧 책을 읽을 수 있는 능력을 보증해주는 것은 아니라는 것. 다시 말해서 문해력과 독서력이 일치하는 건 아니라는 설명이다. 그래야 높은 문해율과 낮은 독서량 사이의 불일치가 설명된다. 이 경우 사람들은 책을 안 읽는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실상은 책을 읽을 능력이 부족해서 못 읽는 게 된다. 어느 쪽이 진실에 가까울까?

 

만약에 전자라면, 즉 다들 책을 읽을 수 있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읽지 않는 것이라면 문제의 해법은 관심을 독서로 돌리게끔 하는 것이다. 어떤 유인책이 효과적일지는 궁리해봐야겠지만 해법 자체가 복잡한 건 아니다. 물을 먹이기 위해 말을 강가로 데려가듯이, 어떻게든 책을 접하기 쉬운 곳으로 자주 데려가다 보면 어느 시점에서인가 국민의 절대다수가 독서국민으로 탄생하는 기적이 연출될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만약 후자라면, 즉 문해력은 습득했지만 독서력이 갖춰지지 않아서 책을 못 읽는 거라고 한다면, 문제는 좀 복잡하다. 일단 책은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읽을 수 있다는 착각에서 벗어나야 한다. 우리가 책을 안 읽는 것이 아니라 못 읽는 것이라는 현실 직시가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그 다음 단계에서 독서력을 갖추기 위한 독서가 이루어져야 한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독서력을 갖춘다는 게 대단한 수고를 요구하는 힘든 일은 아니라는 점이다. 비유컨대 그것은 반복적인 독서를 통해서 우리 뇌에 독서근육을 만드는 일에 해당하다. 꾸준한 운동이 우리의 근력을 키워주는 것과 마찬가지로 꾸준한 독서는 우리의 독서근육을 발달시킨다. 책은 기분으로 읽는 게 아니라 근육으로 읽는다. 얼마만큼의 독서량이 있어서 독서근육이 만들어지는가에 대해서는 확정적으로 말할 수 없지만 대략 150권가량의 독서가 권장된다. 1~2, 혹은 길게 잡아도 3~4년에 걸쳐서 그 정도 분량의 책을 읽는다면 자연스레 독서근육이 길러질 수 있다. 그리고 일단 독서근육이 형성된 다음이라면, 독서는 한결 수월하고 재미있는 일이 될 것이다. 그러니까 이 경우에도 선후관계는 바뀔 수 있는데, 책은 재미있어서 읽는다기보다는 읽다 보면 재미있어진다.

 

독서력을 갖춘 독서국민이 되는 방도에 대해 적어보았는데,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자면 왜 굳이 그래야 할까란 회의도 검토해보아야겠다. 성인의 일 년 평균 독서량이 열권에도 미치지 못하는 현실에서, 온 국민이 책을 읽는 독서강국으로 가는 길은 너무 멀고도 험한 여정일 수밖에 없다. 왜 그런 고난을 감수해야 하는가. 몇몇 선진국의 사례가 있다손 치더라도 우리의 형편과 소질을 고려하지 않고 무작정 따라하기에 나서는 것은 몰주체적 행태 아닌가. 귤이 회수를 건너면 탱자가 된다는 말이 있듯이 남의 나라의 좋은 문화가 항상 우리에게도 좋은 문화가 되는 건 아니다. 다른 나라의 훌륭한 도서관시설과 독서문화가 부럽다지만, 과거에 우리가 토착 민주주의라고 불렀던 한국형 민주주의가 따로 있었던 것처럼, 한국형 비독서 문화도 충분히 가져봄직하다. 어쩌면 그것이 한강의 기적을 낳은 성공신화의 밑바탕이었는지도 모를 일 아닌가?

 

나로선 이런 회의도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세계에서 최초로 금속활자를 발명했다곤 하지만 우리에게 그 용도는 똑똑한 백성을 만드는 데 있지 않았다. 책을 널리 보급하여 누구라도 책을 읽을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 우리의 이상도 아니었다. 책은 읽어온 내력보다 안 읽어온 내력이 양적으로는 오히려 더 본질적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책을 읽자고 제안한다면 뭔가 대단한 비전이라도 제시해야 할 듯싶지만, 나의 동기는 소박하다. 우리가 잘 안 해본 걸 한번 해보자는 것.

 

책을 안 읽는 건 너무도 오랫동안 줄기차게 해왔다. 부독서가 우리의 적성에 맞는지도 모르겠다. 그뿐 아니다. 책을 직접 구매한 독자의 경우도 대략 15퍼센트 정도만 완독한다고 하니까 우리의 비독서는 상당한 스펙트럼을 자랑한다. 책이 없어서 안 읽을뿐더러 있어도 안 읽는 것이니 말이다. 때문에 식상하다. 여전히 책을 읽는 사람이 신기하다고 생각할 게 아니라 꾸준히 책을 안 읽는 사람이 식상하다고 생각해보는 건 어떨까. 그래서 좀 덜 식상한 선택을 해보는 건 어떨까. 그래서 놀라운 반전의 드라마를 써보는 건 어떨까. 한국인들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는 드라마!

 

 

이게 아주 이상한 드라마는 아니다. 디지털 시대의 구루였던 스티브 잡스의 사례만 하더라도 그렇다. 잡스는 애플사의 아이패드가 출시되던 날 아이들의 반응은 어떠냐는 기자의 질문에 자기 아이들은 써본 일이 없다고 대답했다. 그가 선호했던 건 아이들과 식탁에 앉아 책과 역사에 대한 대화를 나누는 것이었다. 그가 아이들에게 권한 건 아이패드가 아니라 책이었다. 인터넷 시대에 책은 너무 낡은 것 아니냐는 낡은 생각을 뒤집을 필요가 있다. 독서국민은 우리가 아직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것이며 책은 여전히 우리의 미래다.

 

14. 10.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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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 한겨레의 '로쟈의 번역서 읽기'를 옮겨놓는다. 햇수로는 4년이 된 듯한데, 연재를 마무리지으며 조이스의 <젊은 예술가의 초상>을 골랐다. 다수의 번역본이 출간돼 있고, 몇 대목은 댓 종의 번역본을 참고했다.

 

 

 

한겨레(14. 10. 06) 예술가의 영혼 ‘대장간’을 살짝 엿보다

 

제임스 조이스의 <젊은 예술가의 초상>은 아일랜드에서 성장한 주인공 스티븐 디덜러스가 예술가의 길을 선택하고 유럽 대륙으로 떠나기까지 과정을 그린 자전적 소설이다. 여느 자전소설과 다른 점은 개인적인 기록 이상의 의미를 거느리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이 고향을 떠나려고 하는 이유 혹은 명분을 밝히고 있는 소설의 마지막 대목에서 스티븐은 이렇게 적는다. “삶이여, 오라, 나는 이제 백만 번씩이라도 경험의 현실과 만나러, 내 영혼의 대장간에서 아직 창조되지 않은 내 종족의 의식을 벼려 내러 간다.”

 

스티븐은 두 가지를 말한다. 삶과 만나겠다는 것과 창작(영혼의 대장간)을 통해 자기 종족의 의식을 벼려내겠다는 것. ‘종족의 의식’은 ‘민족의 양심’으로도 번역된다. 흥미로운 것은 자기 자신의 의식을 벼려내는 게 아니라 종족의 의식을 벼려내는 게 목적으로 제시된다는 점이다. 조이스가 파리로 건너가서 쓰게 되는 <더블린 사람들> 연작을 염두에 둔 것으로 생각되지만, ‘젊은 예술가’ 시절 그가 생각한 예술가의 소명이 어떤 것인지 알게 해준다.

 

스티븐은 그가 더 이상 믿지 않는 것을 섬기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그게 내 집이든, 조국이든, 교회든.” 그는 어머니를 사랑하지만 부활절 성찬을 받으라는 어머니의 요구는 받아들일 수 없다. 조국을 사랑하지만 “제 새끼를 잡아먹는 늙은 암퇘지” 같은 아일랜드는 조국으로 섬길 마음이 없다. 조이스의 아일랜드는 한 사람의 영혼을 가로막는 훼방꾼에 불과했다. 그래서 그는 떠나고자 한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장인(匠人) 다이달로스가 날개를 만들어 크레타의 미노스왕의 궁전에서 탈출한 것처럼. 다이달로스는 스티븐 디덜러스란 이름에 새겨진 그의 운명이자 모델이다. 바닷가에서 다이달로스의 이름과 함께 그 형체를 떠올리면서 스티븐은 예술가로 재탄생한다. “삶이 자신의 영혼을 부르는 소리”에 반응한다.

 

 

이 소설에서 가장 아름다운 부분은 예술가로서 영혼의 자유와 힘을 발견한 스티븐이 자신의 역량을 처음 체험하는 대목이다. 그의 앞에서 바다를 응시하고 있던 한 소녀가 “이상하고 아름다운 바닷새의 모습”으로 보이고, 그녀의 얼굴에서는 “인간의 아름다움이 가지는 경이로움”이 느껴졌다. 이러한 지각은 물론 그의 예술가적 힘이 빚어낸 것이다. 이 힘은 사소한 장면에서조차 경탄을 이끌어낸다. 소녀가 한쪽 발로 개울물을 휘저으며 찰랑거리게 만드는 모습을 보자 스티븐은 이렇게 외친다. “오, 이런!” 번역본에 따라서는 “오, 이럴 수가!”, “오, 하느님!”, “하늘에 계신 하느님!”으로 옮겨진 경탄이다.

 

독자로서는 스티븐의 이례적인 발견과 경탄이 새로운 발견과 경탄의 대상이다. 이 장면은 예술가가 가진 영혼의 대장간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아무리 사소한 물건이라도 어떻게 멋지게 벼려지는지 살짝 엿보게 해주는 듯싶다. 이제 스티븐은 예술가의 길로 나설 준비가 되었다. “살고, 실수하고, 타락하고, 승리하고, 삶으로부터 삶을 재창조하는 것”이 과제라는 걸 그는 안다. 그는 곧 <율리시스>라는 걸작을 써내게 될 것이다.

 

14. 10. 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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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오라비 2023-03-19 2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젊은 예술가의 초상> 번역서 중 두 권만 추천해 주신다면요?

로쟈 2023-03-26 09: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강의에선 문동판과 열린책들판을 썼습니다.

해오라비 2023-06-18 13: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학속의 철학>읽고 제임스 조이스에 푹 빠져 있습니다.
좋은 글 계속 부탁드려요~ 감사합니다!!
 

중앙일보에 실은 '삶의 향기' 칼럼을 옮겨놓는다. 문성재의 <처음부터 새로 읽는 노자 도덕경>(책미래, 2014)과 새뮤얼 아브스만의 <지식의 반감기>(책읽는수요일, 2014)를 빌미로 삼아서 쓴 칼럼이다.

 

 

 

중앙일보(14. 09. 30) 독서의 반감기

 

전 세계에 『성경』 다음으로 널리 알려진 책이 노자의 『도덕경』이라고 한다. 서양어로도 80여 종의 번역본이 나와 있을 만큼 동서를 막론한 고전이다. 2500여 년 전에 성립된 책이 그토록 오랫동안 많은 독자에게 읽혀왔다는 사실도 놀랍지만, 한편으로 『도덕경』은 가장 많이 오독된 책들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분량은 5000여 자에 불과하지만 노자의 실체에 대해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도덕경』의 해석을 놓고 의견이 분분하다.

거슬러 올라가면 『사기』에 ‘노자열전’을 쓴 사마천조차도 노자로부터 400년 후대의 인물이고, 가장 강력한 주석본을 펴낸 삼국시대 위나라의 왕필도 무려 1000년 뒤의 사람이다. 통상 왕필본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통행본’으로 읽히지만 1973년 중국 후난성 마왕퇴 고분에서 출토된 백서본만 하더라도 순서가 우리가 아는 것과 다르다. 현재로선 『도덕경』의 원형을 가장 충실히 보존하고 있는 걸로 평가되는 백서본을 왕필은 참고할 수 없었으니 그의 견해만 신주 모시듯 따르는 것은 결코 상책이 되기 어렵다.

중문학자 문성재의 『처음부터 새로 읽는 노자 도덕경』이란 책을 접하면서 든 생각이다. 처음부터 새로 읽는다는 게 무슨 뜻인가? 가령 이런 차이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도덕경』의 첫 대목 ‘도가도 비상도(道可道 非常道)’부터 보자. 백서본을 포함한 춘추전국시대의 판본에는 ‘비상도’가 ‘비항도(非恒道)’라고 나온다. ‘항(恒)’자가 ‘상(常)’자로 바뀐 것인데, 이는 한나라의 제3대 황제 효문제 유항(劉恒)의 이름을 피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래서 왕필의 통행본에도 ‘상’자만 등장하지 ‘항’자는 보이지 않는다. 비슷한 뜻의 단어이긴 하지만 ‘상’이 특정 대상의 불변성을 가리킨다면 ‘항’은 그 영속성에 방점이 놓인다고 한다. 왕필 이래로 ‘도가도 비상도’를 흔히 “도를 도라고 하면 그것은 늘 그러한 도가 아니다”라는 식으로 풀이해 온 것은 혹 이러한 차이 때문에 빚어진 것은 아닐까.

문성재는 통상적인 해석에 의문을 제기하며 ‘도가도 비항도’를 “도는 법도 삼아 따를 수는 있어도 영원한 도인 것은 아니다”라고 새롭게 풀이한다. ‘도’를 어떤 실체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규칙이나 법도란 뜻으로 이해한 것이다. 불교식으론 ‘법(法)’과 거의 같은 개념이라는 견해다. 사실 이 구절을 “말로 표현할 수 있는 도는 영원한 도가 아니다”라는 식으로 해석하게 되면 도에 관한 노자의 모든 언명이 논리상 모순적이게 된다. 『도덕경』 자체가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말해놓은 게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새로운 해석에 기대면, 노자는 언어가 ‘영원한 도’에 미치지 못한다고 경계한 것이 아니라 “세상에는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는 지혜를 설파한 게 된다. 이런 새로운 해석이 타당하다면 우리가 읽어온 『도덕경』의 3분의 1 이상을 다시 고쳐 읽어야 한다. 어쩌면 노자와 『도덕경』에 대해 알고 있는 우리의 상식을 폐기해야 할지도 모를 일이다.

잘 안다고 생각해 온 책을 처음부터 다시 읽어야 한다면 좀 당혹스러울 수 있겠지만 자연스러운 일이기도 하다. 모든 지식은 끊임없이 성장하고 또 붕괴하기 때문이다.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는 말은 의당 지식에도 적용된다. 가령 50년대 중반까지만 하더라도 인간의 체세포에 들어 있는 염색체 수가 48개라는 게 정설이었다. 물론 오늘날에는 중학생만 되더라도 그 수가 46개라고 배운다. 과학은 객관적이고 확실한 지식의 누적이라고 생각하기 싶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가 않다. 심지어 ‘지식의 반감기’라는 말이 나올 정도다.

쓸모 있는 지식으로서 효력을 상실하게 되면 더 이상 지식이라는 이름에 값할 수 없게 된다. 정보과학자들이 분석한 결과 물리학에서 반감기는 10년 정도였다. 더 하위 분야로 내려가면 원자핵물리학은 5.1년, 플라스마물리학은 5.4년이 반감기였다. 새로운 논문이라도 그 정도 시간이 지나면 더 이상 인용되지 않아 낡은 논문으로 폐기된다는 뜻이다. 독서 또한 마찬가지 아닐까. “옛날에 읽어봤지”라는 무용담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독서의 반감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다시 읽고 새로 읽을 필요가 있다. 세상 모든 일이 그러하듯이 독서 또한 녹록지 않다.

 

14. 09. 30.

 

P.S. 지면에는 '한나라의 제3대 황제 효문제 유항'이라고 나갔지만, 착오로 밝혀져 '제5대 황제'라고 수정했다. 확인해보니 <처음부터 새로 읽는 노자 도덕경>에 "한나라 제3대 황제인 효문제 유항"(61쪽)이라고 오기돼 있다. 덩달아 본의 아니게 일간지에 '오보'를 냈다... 

 

P.S.2. 효문제 유항이 전한의 3대 황제냐 5대 황제냐 문제를 놓고 역자가 직접 해명의 글을 보내왔다. 최종적으로는 아직 정리된 사안이 아닌 듯싶은데, 요는'제3대 황제'라고 한 것이 '오기'가 아니며 그렇게 보는 관점도 존재한다는 내용이다. 역자의 의견을 존중해서, 어차피 책에서 인용한 거라 칼럼에서도 다시 '제3대 황제'라고 돌려놓는다.

1. 유항 직전에 황제가 둘 있기는 했으나 세칭 제3대 유공은 6살에 즉위후 곧 사망하고
2. 제4대 유홍 역시 어린나이에 즉위했다가 곧 폐위당합니다.
3. 이 두 황제의 재위기간동안 섭정으로 실질적인 권력행사는 제1대 황제 고조 유방의 황후 여치에 의해 이루어졌습니다.
4. 두 황제는 형식적으로 '전소제(前少帝)', 후소제(後少帝)'로 각각 일컬어지기는 하지만 엄밀하게 보면 황제임을 나타내고 인증하는 '묘호'를 정식으로 부여받지 못했습니다.
5. 물론 그렇게 된 것은 권력욕에 사로잡힌 여치가 유공을 폐하고 유홍을 즉위시키고 다시 유홍을 폐하고 새로 유영을 즉위시키는 정치결정을 내린 데 따른 결과입니다.
6. 때문에 중국에서도 폐위된 이 두 어린이를 황제로 포함시키느냐를 두고 일각에서 논란이 있고 그래서 이들을 생략하고 그 다음 황제 효문제 유항을 제3대 황제로 치기도 합니다.
7. 물론 저는 폐위,묘호 등의 문제를 들어 후자의 입장을 지지해서 그렇게 기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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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 공지다. 한겨레교육문화센터에서 진행하는 '로쟈의 세계문학클럽: 노벨문학상 수상작 읽기'의 마지막 시즌 강의가 10월 21일부터 12월 9일까지 8주간 진행된다(매주 화요일 저녁 7:30-9:30). 2004년 수상자인 엘프리데 옐리네크에서 2013년 수상자 앨리스 먼로까지 노벨상 작가들의 대표작을 읽어보는 강의다(http://www.hanter21.co.kr/jsp/huser2/educulture/educulture_view.jsp?&category=academyGate9&tolclass=0001&lessclass=0003&subj=F91646&gryear=2014&subjseq=0001&booking=). 구체적인 일정과 작품은 아래와 같다.

 

로쟈의 세계문학클럽 : 노벨문학상 수상작 읽기 4 (2004~2013)

 

1강 10월 21일_ 엘프리데 옐리네크, <피아노 치는 여자> - 2004(오스트리아)

 


2강 10월 28일_ 오르한 파묵, <내 이름은 빨강> - 2006(터키)

 

 

3강 11월 04일_ 도리스 레싱, <다섯째 아이> - 2007(영국)

 

 


4강 11월 11일_ 르 클레지오, <황금물고기> - 2008(프랑스)

 


5강 11월 18일_ 헤르타 뮐러, <숨그네> - 2009(독일)

 


6강 11월 25일_ 바르가스 요사, <염소의 축제> - 2010(페루)

 


7강 12월 02일_ 모옌, <개구리> - 2012(중국)

 


8강 12월 09일_ 앨리스 먼로, <디어 라이프> - 2013(캐나다)
 

 

 

14. 09.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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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 수정 공지다. 협동조합 가장자리에서 진행하는 '로쟈의 베스트셀러 세계문학 읽기'(http://gajangjari.net/?p=4540) 일정이 한 주 순연되면서 4주 강의로 조정됐다(홈페이지에서도 수정 공지가 다시 나갈 예정이다. 강의는 9월 23일부터 10월 14일까지 4주간 진행되며 구체적 일정은 아래와 같다(순서도 약간 바뀌었다).

 

1강 9월 23일_ 밀란 쿤데라 <무의미의 축제>

 

 

3강 9월 30일_ 무라카미 하루키 <여자 없는 남자들>

 

 

 

3강 10월 07일_ 파울로 코엘료 <불륜>

 

 

4강 10월 14일_ 요나스 요나손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

 

 

 

14. 09.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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