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중앙도서관에서 발행하는 월간 '오늘의 도서관'(234호)에 실은 글을 옮겨놓는다. '디지털 시대의 책 추천, 서평쓰기'라는 특집의 한 꼭지다. 아무래도 서평에 관한 글이어서 <글쓰기의 힘>(북바이북, 2014)에 실린 '서평 쓰기는 품앗이다'와 내용이 일부 중복된다. 그밖에 <나는 작가가 되기로 했다>(메디치미디어, 2015)에 실린 인터뷰도 참고할 수 있다. 최근에 나온 서평 쓰기 가이드북으로는 김민영, 황선애의 <서평 글쓰기 특강>(북바이북, 2015)이 있다.

 

 

오늘의 도서관(15년 7-8월호) 독자를 위한 서평, 독자에 의한 서평

 

비평과 서평, 그 간격에 대하여
어떻게 하면 좋은 서평을 쓸 수 있을까. ‘좋은 서평’의 기준을 어떻게 정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을 터인데, 그러자면 먼저 서평이란 무엇인가부터 정의해야 할 듯싶다. 서평은 책에 대한 품평을 이르는 말로 비평의 한 갈래에 속하지만, 용도에 있어서 비평과는 구분된다. 비평이 독자들이 같은 책을 두 번 읽게끔, 다시 읽게끔 하는 것이라면, 서평은 어떤 책을 한번 읽을 것이냐 말 것이냐를 판단하는 자료를 독자에게 제공하는 것에서 그치기 때문이다. 즉 비평이 재독의 권유라면, 서평은 일독의 제안이다. 비평과 서평은 상대하는 독자가 다르다고 해야 할까.


비평은 어떤 책을 이미 읽은 독자를 상대한다. 반면에 서평은 아직 읽지 않은 독자를 대상으로 쓰인다. 아직 읽지 않은 독자에게라면 비평은 서평으로 읽히고, 한번 읽은 독자에게 서평은 비평으로 다가갈 수 있다는 뜻도 된다. 그렇게 독자에 의해서 비평과 서평이 나뉜다면, 비평의 한 갈래에 속하면서도 오늘날 비평의 점차적인 위상 하락과 대비되어 서평의 역할이 부상하고 있는 것은 나름대로 해명이 가능한 현상이다. 비평을 떠받쳐야 할 독자층이 점점 엷어지고 있는 현실에 기인한 것이기 때문이다. 같은 책을 읽은 독자들이 점점 줄고 있다면 비평이 상대할 독자가 엷어지는 것이니 그 역할이 축소되는 것은 당연한 결과다.


서평의 부상은 비평의 쇠퇴의 이면이다. 아무리 책을 많이 읽는 독자라 하더라도 해마다 읽은 책보다 읽지 않은 책의 숫자가 훨씬 더 많을 수밖에 없는 게 현재의 독서 현실이다. 점점 많은 책들에 대해 우리는 ‘읽지 않은 독자’가 될 수밖에 없다. 책은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나지만 우리의 독서량은 산술급수적으로만 증가할 뿐이니까. 그럼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최대한 가려서 읽되 읽지 않은 책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가늠해두는 게 최선일 것이다. 서평은 바로 그러한 필요에 대응한다.

 

좋은 서평의 기준을 이야기하다
서평의 기능은 이러한 필요에서 도출된다. 어떤 책을 읽고 싶도록 하거나, 읽은 척하게 하거나, 안 읽어도 되도록 해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좋은 서평의 기준은 이러한 기능에서 찾아볼 수 있겠다. 즉 어떤 책을 읽고 싶거나 안 읽어도 되도록 하는 데 기량을 발휘하는 글이 좋은 서평이다. 또 어떤 책을 안 읽어도 읽은 척할 수 있을 만큼 핵심을 잘 짚어준다면 이 역시 좋은 서평으로 분류할 수 있겠다.


먼저 ‘이건 읽어보고 싶다’거나 ‘이건 안 읽어도 되겠어’라는 판단이 가능하게끔 하는 것이 서평의 중요한 역할이라면, 서평의 가치는 독자에 의해서 결정된다. 독자가 처분권을 갖는다는 점에서 서평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타인’을 위한 것이다. 서비스(봉사) 정신이라고 불러도 좋을 만한 철저한 독자 지향성이 서평의 핵심이다. 그래서 원칙적으로 말해, 서평의 효과를 유발하는 한 서평은 어떤 종류이건 무방하다. 어떻게 써도 좋다는 말이다. 단 한두 문장의 언급으로도 좋은 서평이 될 수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독자에게 강렬한 인상을 심어줌으로써 독서에 대한 흥미를 유발하거나 그 반대로 독서의 필요로 제거해준다면(수준 미달의 책까지 우리가 억지로 읽을 필요는 없으므로) 서평으로서는 충분하다.


어떻게 써도 무방하다면, 서평 쓰기의 노하우가 따로 있을 리 없다. 독자의 반응을 끌어낼 수만 있다면 주관적 서평이건, 객관적 서평이건 상관이 없다. 하지만 읽은 척하게 해주는 용도라면 몇 가지 요건은 생각해볼 수 있겠다. 가장 우선적인 것은 서평자가 책을 제대로 소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서평은 책에서 자신이 읽고 소화한 것을 글로 적는 것이니 일차적으로는 독서력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읽고 소화한 만큼 쓸 수 있으며, 서평의 몫은 그것을 다른 독자에게 요령껏 전달하는 일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책이 어떤 주제의 내용을 어떤 시각에서 다루고 있으며 주요한 메시지는 무엇이고 이것이 우리에게 갖는 의의는 또 무엇인가를 짚어주어야 한다. 물론 모든 서평이 그러한 요건들을 꼼꼼하게 다 갖춰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책의 성격이나 필요, 그리고 서평의 분량 등을 고려하여 적당하게 조절할 수 있다.

 

디지털 시대, 서평의 다양화와 다변화
바야흐로 디지털 시대이고, 책의 형태가 변화하는 만큼 독서의 방식도 변화하고 있다. 디지털화된 책, 곧 전자책을 단말기나 스마트폰을 통해서 읽는 독자도 늘어나고 있다. 디지털 시대 달라진 독서 풍경일 텐데, 서평 역시 지면에 실리는 ‘오프라인 서평’의 형식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이미 인터넷 서평은 일반화되어 있으며, SNS를 통한 독서정보의 공유도 서평과 그 역할이 겹친다. 그뿐 아니다. 글이 아닌 말로 이루어진 서평도 이제는 낯설지 않다. 방송이나 팟캐스트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책 소개도 서평에 포함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말 그대로 서평이 다양화, 다변화되고 있다.


하지만 형식은 다양화될지언정 서평의 핵심 역할에 근본적인 변화가 있는 건 아니지 싶다. 독서에 대한 흥미를 유발하거나 책에 대한 균형 있는 정보를 제공함으로써 독서를 가장하게 해주는 게 그 역할이라면 말이다. 다만 서평의 구성이나 주안점에는 변화가 있을 수 있다. 글로 된 서평이 어느 정도 체계와 일관성을 갖추어야 하는 것에 비하면 SNS나 말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서평은 그러한 요건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롭다. 구성방식에서도 선조적(순차적)이지 않고 병렬적인 방식이 채택될 수 있다. 책의 인용에 있어서도 훨씬 넓은 허용범위를 가질 수 있다.


그렇게 자유로운 방식 속에서도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책이 놓여 있는 맥락이다. 책이 놓여 있는 자리, 혹은 책들 둘러싼 맥락은 다양한 층위를 가진다. 저자에게서 그 책이 어떤 의미를 갖는가, 전작과는 어떤 연관성이 있는가 등을 생각해볼 수 있다. 그 다음 시대. 책이 발표된 시점이 오래전이라면, 그 시점에서 가졌던 의의와 현재적 의의를 구분해서 살펴볼 수 있겠다. 또한 비슷한 시기에 나온 다른 책들과의 연관성 속에 자리매김함으로써 책이 갖는 시의성도 부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주제. 전무후무한 책은 세상에 많지 않다. 대부분은 앞뒤의 책들과 연결돼 있으며 주제에 따라 계보를 형성한다. 흥미로운 주제의 책을 읽었다면 같은 주제를 다룬 책을 두세 권 더 떠올려보는 것도 좋겠다. 독자에게 유익한 정보가 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역설적일 수 있지만 좋은 서평은 서평에 대한 부담을 줄이는 데서 시작될 수 있다. 서평을 쓰는 일 자체에 대해 과도하게 흥분할 필요가 없으며 너무 많은 기대를 갖는 것도 좋지 않다. 멋진 문장보다는 간결하고 명료한 문장이 바람직하며 화려한 수사에 대한 고민도 자제하는 게 낫다. 예술적인 글을 쓰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읽을 만한 책을 감별하고 권장하는 게 서평의 주된 역할이라면 그것은 한두 사람의 몫으로 돌릴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독자라면 모두의 일이고 모두가 나서서 자기 몫을 거들어야 하는 일이다. 서평은 자발적인 품앗이에 가깝다.


서평쓰기에 대한 부담은 줄이는 대신에 더 자주 서평을 쓰려는 노력은 필요하다. 비평과 달리 서평은 그 질 못지 않게 양이 중요하다. 한편의 공들인 서평도 의미가 있겠지만 그 공을 나누어 여러 편의 서평을 작성하는 일이 더 권장할 만하다. 간혹 불멸의 가치를 갖는 일들이 있다지만 서평은 예외이며 ‘불멸의 서평’이란 말은 모순이다. 우리에겐 늘 읽어야 할 또 다른 책이 있다는 사실을 언제나 명심해야 한다. 서평은 독자로서 우리가 책의 바다에서 익사하지 않기 위해 벌이는 생존투쟁이다.

 

15. 06.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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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 시사IN(406호)에 실은 리뷰를 옮겨놓는다. 레나타 살레츨의 <불안들>(후마니타스, 2015)을 다뤘다. 이 원고를 바탕으로 지난 금요일에는 강연을 진행하기로 했다. 책은 다양한 영역에서의 불안을 다루고 있지만 서평은 분량상 불안과 환상의 차이에 집중했다. 번역본으로는 먼저 나온 <선택이라는 이데올로기>(후마니타스, 2014)는 <불안들>의 후속작이기에 순서상으로는 그렇게 읽어도 좋겠다.

 

 

시사IN(15. 06. 27) 당신과 나의 본질에 대하여

 

슬로베니아 정신분석학파의 일원으로 활동한 살레츨은 슬라보예 지젝, 믈라덴 돌라르 등 다른 구성원들과 마찬가지로 독일 관념론 및 비판이론과 라캉 정신분석학을 공통의 이론적 지주로 삼는다. 이들 저작이 소개될 때마다 흥미롭게 읽는 것은 개인적인 관심 때문이지만 <불안들>은 좀더 널리 읽힐 만하다. 우리가 ‘불안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면 말이다.


물론 불안이 어제오늘의 느낌은 아니다. 하지만 살레츨은 우리가 앞선 시대의 불안과는 다른 새로운 불안을 경험하고 있다고 진단하는데, 그 주원인이 사회적 역할, 정체성을 바꾸려는 끊임없는 욕망, 행동의 지침 부재 등과 더 관련된다고 생각해서다. 그렇다고 불안이 부정적인 의미만 갖는 것은 아니다. 불안을 행복의 장애물로 여기고 통제 대상으로 보는 것이 오늘날의 주된 관점이지만 살레츨은 정신분석의 관점을 빌려 불안이 인간의 본질적 조건이기도 하다는 점을 다시 환기시킨다.


불안에 관한 정신분석의 이론은 무엇인가. 프로이트는 불안은 리비도의 억압이나 거세에 대한 두려움과 관련지어 설명했다. 뒤를 이어서 라캉은 불안을 주체와 대타자 사이의 관계로 설명하면서 이를 정교화했다. 대타자란 주체가 ‘말하는 존재’로서 진입하게 되는 사회적‧상징적 네트워크를 가리킨다. 이 ‘상징계’로 진입할 때 주체는 상징적 거세를 겪는다. 이 과정을 거쳐서 주체는 상징적 질서 속에서 특정한 자리를 차지하며 권력이나 지위를 얻는다. 가령 경찰은 아무것도 아닌 존재이다가도 제복을 입는 순간 권력을 가진 자가 된다.


문제는 대타자 자체도 비일관적이며 분열되어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대타자가 무엇을 욕망하는지, 그리고 우리는 대타자의 욕망에 비추어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지 확실하게 말할 수 없다. “그래서 대타자의 결여에 대해 주체는 자신의 결여로 답할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불안은 바로 주체가 자신의 결여나 대타자의 결여를 다루는 방식이다.


대타자는 주체에게 늘 불안을 유발하며 ‘대타자에게 나는 누구인가?’란 질문을 끊임없이 던지게 만든다. 어떻게 할 것인가. 가장 일반적인 사례로 신경증자들은 환상을 통해서 자신의 결여를 가리고자 한다. 환상이란 주체에게 일관성을 제공해주는 시나리오다. 주체가 욕망의 대상과 특정한 관계를 맺도록 해주는 것이 환상이다. 환상은 주체의 불안을 막아준다. 환상을 통해서 주체는 자기 삶이 일관적이고 안정적이라고 생각하며 사회적 질서 또한 아무런 적대 없이 일관적이라고 인식한다. 다시 말해 환상은, 주체가 전적으로 결여를 특징으로 하며 사회는 여전히 적대를 그 특징으로 한다는 사실을 은폐한다.


그렇게 불안에 대한 보호막으로서 환상이 우리는 편안하게 만든다면, 불안은 우리를 불편하게 만든다. 불안은 우리를 잠식하며 마비시킬 수도 있다. 하지만 다른 한편 불안은 환상이 갑작스레 깨질 때 우리가 봉착할 수 있는 파국에 미리 대비하게 해주는 효과가 있다. 불안을 외상으로부터 주체를 보호하려는 신호로도 간주하는 이유다. 대중매체는 흔히 불안을 주체의 안녕을 방해하는 궁극적인 장애물로 그리지만, 불안을 없애거나 통제하는 일이 능사는 아닌 것이다.


살레츨은 주체가 불안을 경험하는 것은 “주체가 개인의 특징인 결여 및 사회의 특징인 적대와 특정한 방식으로 씨름하는 징후”로 간주할 수 있다고 말한다. 불안한 사회도 문제지만 불안이 배제된 사회라고 해서 더 나은 것도 아니다. 전투를 앞둔 병사들이 불안에 떠는 것도 문제지만 아무런 불안도 느끼지 않는 병사들이 더 공포스럽다는 한 미군 지휘관의 말은 불안이 갖는 의의가 무엇인지 잘 시사한다. 곧 불안이 없는 사회도 우리가 살아가기에는 똑같이 위험한 곳이다. 이렇듯 불안의 정체와 구조에 대해서 이해한다면, 환상과 불안 사이에서 좋은 균형을 잡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15. 06.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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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초 방송대신문에 실은 칼럼을 약간 수정하여(오탈자를 바로잡아) 옮겨놓는다. 독서의 유익함을 주제로 한 시론을 청탁받아 쓴 것으로 마침 요나스 요나손의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열린책들, 2013) 에 대해서 강의한 김에 그에 대해 적었다. 찾아보니 요나손의 신작으로 <스웨덴 왕을 구한 여자>(2013)가 나왔다(영어판 제목이 그렇다), 고 생각했지만 <셈을 할 줄 아는 까막눈이 여자>(열린책들, 2014)로 번역된 책이다. 세번째 책을 기다려본다...  

 

 

 

방송대신문(15. 06. 01) 요나손이 그려낸 독서의 힘

 

스웨덴 작가 요나스 요나손의 베스트셀러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의 주인공 알란 칼손은 매우 낙천적인 인물이다. 그가 낙천적인 것은 모든 것이 다 잘될 거라는 기대를 가져서가 아니라 인생에서 별로 바라는 게 없어서다. 누워 잘 수 있는 침대와 세 끼 밥과 할 일, 그리고 이따금 목을 축일 수 있는 술 한 잔 정도라면 그는 모든 것을 견딜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렇잖아도 파란만장한 인생 경험의 소유자인 그가 소련의 강제수용소 생활에도 적응할 수 있었던 것은 그런 태도 덕분이었다. 비록 5년 넘게 술을 마시지 못하는 바람에 결국에는 떠날 결심을 하게 되지만 알란에게 강제수용소의 나날은 특별히 불만스러울 게 없었다. 규칙적인 일과에다 식사량이 충분했기 때문이다. 무엇이 더 필요하단 말인가.

 


어떤 이에겐 일용할 양식으로 세 끼의 식사와 한권의 책이 필요하다고 하겠지만, 부모를 일찍 잃고 3년밖에 학교에 다니지 않아 기본적인 읽기쓰기만을 배운 알란에게 책에 대한 갈증은 그와 무관했다. 대신에 한 잔의 포도주면 족했다. 그는 노동자 계급 출신으로 부르주아를 타도하기 위해 러시아로 떠났다가 객사한 아버지와도 전혀 닮지 않았다. 그의 아버지는 짧은 인생을 살면서 여러 번 정치적 입장을 바꾸었는데, 사회주의자로 러시아에 가서는 엉뚱한 지인들을 만나 차르의 숭배자가 되고 종국에는 토지 소유를 금지한 레닌과 부동산 분쟁을 벌이다 생을 마감한다. 아버지를 반면교사로 삼은 알란은 정치적 신념을 가진 이들을 모두 한통속으로 보며 혐오한다. 도대체 이념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폭약 제조와 폭파의 전문가인 알란은 스페인 공화주의자인 친구를 따라서 스페인으로 건너가지만 세상을 바꾸는 일은 그의 관심사가 아니다. 다만 따로 친구가 없었을 뿐인데, 정작 파시스트를 박살내자던 그의 친구는 스페인 내전이 터지자마자 처음 발사된 박격포탄에 목숨을 잃는다. 어이없는 죽음일 따름이고, 알란은 더더욱 혁명 따위에는 무관심해진다. 심지어 그는 공화파의 적인 프랑코 총통의 목숨을 의도치 않게 구하는 바람에 은인으로 환대까지 받는다. 푸짐한 식사와 포도주를 마음껏 제공받은 것이다. 이어지는 알란의 삶은 이러한 우여곡절과 해프닝의 반복이다. 그와 함께 한 세기의 역사가 흘러갔다.

 


그리고 마침내 백세를 맞은 알란은 생일 파티를 피해 양로원 창문 밖으로 도망친다. 예기치 못한 일들의 연속 끝에 그는 인도네시아의 발리 섬에서 사랑하는 여인 아만다를 만나 마지막 행복한 여생을 맞는다. 알란과 아만다의 결합은 종교와 이념에 관한 얘기라면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 사람과 이념이라는 말의 뜻조차 모르는 사람의 이상적인 결합이다. 작가 요나손은 이러한 결말을 통해서 이념과 극단적 대립의 시대였던 20세기와 어떻게 작별할 것인가란 문제를 유쾌하면서도 통렬하게 제시한다. 그렇다,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알란처럼 그냥 살아남는 일인지도 모른다.


사실 알란은 사람들이 그토록 서로를 죽이려고 애쓰는 이유도 이해하지 못한다. 진득하게 기다리면 결국은 다 죽게 되지 않느냐는 게 그의 생각이니 말이다. 단순하지만 일리가 없지 않은 지혜다. 알란은 굳이 책을 두루 섭렵하지 않더라도 그러한 지혜에 일찌감치 도달한다. 알란의 모범을 따르자면, 인생에서 책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요나손 자신은 이 작품을 쓰기 위해 광범위한 자료 조사를 하고 굉장히 많은 책을 읽었다. 독서의 유익함에 대해서 군말을 덧붙이고 싶지 않다. 요나손의 독서가 없었다면 유쾌한 알란의 삶은 그려지지 않았을 것이다. 독서가 없다면 우리는 알란의 삶과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알란이 한 잔의 술을 마실 때 우리에게 필요한 건 한권의 책이다.

 

15. 06.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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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보생명에서 발행하는 다솜이친구(174호)에 실은 '감각의 도서관' 꼭지를 옮겨놓는다. 쥘 르나르의 <박물지>와 중국의 고전 <산해경>을 비교해달라는 주문을 받고 쓴 것이다. '올재 클래식스'판으로 <박물지>와 <산해경>이 다시 나온 게 계기인데, 알라딘에서는 판매되지 않는 책이기에 이미지는 다른 판본으로 올려놓는다.

 

 

다솜이 친구(15년 6월호) 동서양의 자연세계를 보는 눈

 

동물들에 대한 이야기도 동서양에 차이가 있을까. 표본적인 비교는 아니지만 인문고전으로 다시 나온 프랑스 작가 쥘 르나르의 <박물지>와 중국의 신화집 <산해경>은 그러한 차이를 엿보게 한다. 혹은 동서양의 차이와 무관하게 실제로 눈에 보이는 동물들에 대한 묘사와 상상의 동물들에 대한 기록으로 대비시켜볼 수도 있겠다. 아니 차라리 한 개인의 관찰기와 집단적 상상력의 집적으로 비교해야 할까?


<박물지>의 원제는 ‘자연사(自然史)’다. ‘자연의 이야기’라고 부르는 것도 가능한데, 과거 ‘자연학’을 ‘박물학’이라고 부른 것처럼 ‘박물지’란 이름으로 소개되었다. 1896년에 초판이 간행되고 1904년에 결정판이 나온 이 책은 <홍당무>란 소설로 유명한 작가가 전원이나 동물원에서 볼 수 있는 수많은 동식물에 대해서 쓴 일종의 관찰기다.

 

작가 자신은 ‘영상(映像)의 사냥꾼’을 자임하는데, 그가 아침 일찍 잠자리에서 일어나 자연으로 나갈 때 사냥총은 놔두고 가는 대신에 크게 뜬 두 눈을 챙기기 때문이다. 눈이 일종의 그물이어서 그는 시야에 잡히는 모든 것을 포획한다. 움직이는 밀밭과 식욕을 돋우는 개자리풀, 지나는 길의 종달새와 방울새가 포획물들이다. 집으로 돌아와서 그런 영상들을 되새겨보며 다시금 선명하게 떠오르는 영상들을 글로 옮겼다. <박물지>의 탄생이다.


<박물지>라고 해서 파브르의 <곤충기>나 시튼의 <동물기>처럼 정밀한 관찰과 끈질긴 묘사를 앞세우지 않는다. 르나르는 주로 동물인 대상을 묘사하면서 한편으론 자신이 받은 인상을 부각시킨다. 당나귀를 ‘어른이 된 토끼’에 비유하다거나 뱀에 대해서는 그 묘사를 ‘너무나 길구나’라는 한 줄로 압축한다. 비유와 시정(詩情)이 그의 보조적인 ‘사냥 도구’다. 그의 이미지 사냥은 주로 간단한 에피소드를 낳지만 짧게 응축될 때 더 흥미롭다. “무슨 일이 일어났나? 밤 9시인데 아직 그 집에 불빛이 보이네”는 개똥벌레에 대한 심상이고, “꾸아(Quoi 뭐야)? 꾸아? 꾸아? -아무것도 아니야.”는 까마귀에 대한 기술이다. 자세하게 묘사하지 않더라도 아주 정확하다. <박물지>를 읽는 재미라고 할 수 있다.


<산해경>은 중국 최고(最古)의 대표 신화집이다. 산경(山徑)과 해경(海經)을 합해서 ‘산해경’이라고 부른 것이니 얼핏 지리서의 모양새를 갖추었다. 신화집이면서 지리서인 셈인데, 가령 첫머리를 장식하는 ‘남산경’은 작산을 출발점으로 하여 다시 동쪽으로 300리를 가면 당정산이 있고, 다시 동쪽으로 380리를 가면 원익산이 있으며, 거기서 다시 동쪽으로 370리를 가면 유양산이란 곳이 나온다는 식으로 서술된다. 그런데 초점은 이러한 지리의 소개와 설명보다는 그 지역 특유의 동식물에 대한 묘사에 두어진다. 곧 산천의 형세를 말한 다음에 그곳에서 산출되는 광물 및 동식물, 특이한 괴물이나 신령에 대해서 언급하고 제례(祭禮)를 덧붙인다.


문제는 <산해경>에 등장하는 갖가지 괴물들에 대한 묘사가 너무 황당무계하고 허망할 정도로 신비롭다는 점이다. 사마천이 “감히 말할 수 없다”고 평한 것이 결코 과장이 아닐 정도의 기서(奇書)가 <산해경>이다. 가령 소요산에 사는 어떤 짐승에 대해서 “생김새가 긴꼬리원숭이 같은데 귀가 희고 기어다니다가 사람 같이 달리기도 한다. 이름을 성성(狌狌)이라고 하고 이것을 먹으면 달음박질을 잘하게 된다”고 서술하며, 저산에 사는 어떤 물고기에 대해서는 “생김새가 소 같은데 높은 언덕에 살고 있다. 뱀꼬리에 날개가 있으며 그 깃은 겨드랑이 밑에 있는데 소리는 유우(留牛)와 같다. 이름을 육(鯥)이라고 하며 겨울이면 죽었다가 여름이면 살아나고 이것을 먹으면 종기가 없어진다”고 소개한다.


이렇듯 곧이곧대로 믿기 어려운 이야기들의 퍼레이드가 <산해경>이니 오늘의 기준으로는 신화집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다. 상상동물 이야기라고 해야 할까. 언제 누구에 의해 이루어졌는지 불분명하지만 <산해경>은 대체로 기원전 3-4세기경에 무당들에 의해 쓰였고 무당들의 지침서라는 설이 유력하다고 한다. 물론 오늘날 그런 지침서로는 유효하지 않다. 그럼에도 동아시아적 상상력의 뿌리이자 보고(寶庫)라는 평가는 <산해경>을 다시 들여다보게 하는 동기가 된다. 우리 곁에는 눈에 보이는 동식물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하게끔 해준다.

 

15. 05.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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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연 공지다. 레나타 살레츨의 <불안들>(후마니타스, 2015) 출간 기념강연을 제안받아서 진행하게 되었다. <불안들>은 출간을 기다렸던 책이었는데, 강연까지 맡게 돼 감회가 없지 않다. 인연인 모양이다.

 

<불안들> 출간을 기념해 로쟈 이현우 님의 특강을 마련했습니다. 슬로베니아 학파 하면 많은 사람들이 지젝만을 알고 있는데, 이 슬로베니아 학파의 학자들, 좀 더 자세히는 ‘슬로베니아 라캉학파’의 학자들은 ‘동유럽의 기적’이라 불릴 만큼 새로운 철학적 분석과 이론적 분석을 내놓고 있다고 합니다. 그 학자들이 레나타 살레츨이고, 믈라덴 돌라르, 알렌카 주판치치, 미란 보조비치입니다. 이번 특강을 통해 ‘레나타 살레츨’이라는 한 매력적인 학자에 대해 알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입니다. 특히 <선택이라는 이데올로기>와 <불안들>을 통해 그녀의 고유한 관심과 문제 의식을 살펴봅니다.

 

l 일시: 2015년 6월 19일(금) 저녁 7시 30분
l 장소: 푸른역사 아카데미 청사홀
l 신청: ymjang@naver.com
l 문의: 02-722-9960

 

15. 05.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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