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초 방송대신문에 실은 칼럼을 약간 수정하여(오탈자를 바로잡아) 옮겨놓는다. 독서의 유익함을 주제로 한 시론을 청탁받아 쓴 것으로 마침 요나스 요나손의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열린책들, 2013) 에 대해서 강의한 김에 그에 대해 적었다. 찾아보니 요나손의 신작으로 <스웨덴 왕을 구한 여자>(2013)가 나왔다(영어판 제목이 그렇다), 고 생각했지만 <셈을 할 줄 아는 까막눈이 여자>(열린책들, 2014)로 번역된 책이다. 세번째 책을 기다려본다...  

 

 

 

방송대신문(15. 06. 01) 요나손이 그려낸 독서의 힘

 

스웨덴 작가 요나스 요나손의 베스트셀러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의 주인공 알란 칼손은 매우 낙천적인 인물이다. 그가 낙천적인 것은 모든 것이 다 잘될 거라는 기대를 가져서가 아니라 인생에서 별로 바라는 게 없어서다. 누워 잘 수 있는 침대와 세 끼 밥과 할 일, 그리고 이따금 목을 축일 수 있는 술 한 잔 정도라면 그는 모든 것을 견딜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렇잖아도 파란만장한 인생 경험의 소유자인 그가 소련의 강제수용소 생활에도 적응할 수 있었던 것은 그런 태도 덕분이었다. 비록 5년 넘게 술을 마시지 못하는 바람에 결국에는 떠날 결심을 하게 되지만 알란에게 강제수용소의 나날은 특별히 불만스러울 게 없었다. 규칙적인 일과에다 식사량이 충분했기 때문이다. 무엇이 더 필요하단 말인가.

 


어떤 이에겐 일용할 양식으로 세 끼의 식사와 한권의 책이 필요하다고 하겠지만, 부모를 일찍 잃고 3년밖에 학교에 다니지 않아 기본적인 읽기쓰기만을 배운 알란에게 책에 대한 갈증은 그와 무관했다. 대신에 한 잔의 포도주면 족했다. 그는 노동자 계급 출신으로 부르주아를 타도하기 위해 러시아로 떠났다가 객사한 아버지와도 전혀 닮지 않았다. 그의 아버지는 짧은 인생을 살면서 여러 번 정치적 입장을 바꾸었는데, 사회주의자로 러시아에 가서는 엉뚱한 지인들을 만나 차르의 숭배자가 되고 종국에는 토지 소유를 금지한 레닌과 부동산 분쟁을 벌이다 생을 마감한다. 아버지를 반면교사로 삼은 알란은 정치적 신념을 가진 이들을 모두 한통속으로 보며 혐오한다. 도대체 이념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폭약 제조와 폭파의 전문가인 알란은 스페인 공화주의자인 친구를 따라서 스페인으로 건너가지만 세상을 바꾸는 일은 그의 관심사가 아니다. 다만 따로 친구가 없었을 뿐인데, 정작 파시스트를 박살내자던 그의 친구는 스페인 내전이 터지자마자 처음 발사된 박격포탄에 목숨을 잃는다. 어이없는 죽음일 따름이고, 알란은 더더욱 혁명 따위에는 무관심해진다. 심지어 그는 공화파의 적인 프랑코 총통의 목숨을 의도치 않게 구하는 바람에 은인으로 환대까지 받는다. 푸짐한 식사와 포도주를 마음껏 제공받은 것이다. 이어지는 알란의 삶은 이러한 우여곡절과 해프닝의 반복이다. 그와 함께 한 세기의 역사가 흘러갔다.

 


그리고 마침내 백세를 맞은 알란은 생일 파티를 피해 양로원 창문 밖으로 도망친다. 예기치 못한 일들의 연속 끝에 그는 인도네시아의 발리 섬에서 사랑하는 여인 아만다를 만나 마지막 행복한 여생을 맞는다. 알란과 아만다의 결합은 종교와 이념에 관한 얘기라면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 사람과 이념이라는 말의 뜻조차 모르는 사람의 이상적인 결합이다. 작가 요나손은 이러한 결말을 통해서 이념과 극단적 대립의 시대였던 20세기와 어떻게 작별할 것인가란 문제를 유쾌하면서도 통렬하게 제시한다. 그렇다,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알란처럼 그냥 살아남는 일인지도 모른다.


사실 알란은 사람들이 그토록 서로를 죽이려고 애쓰는 이유도 이해하지 못한다. 진득하게 기다리면 결국은 다 죽게 되지 않느냐는 게 그의 생각이니 말이다. 단순하지만 일리가 없지 않은 지혜다. 알란은 굳이 책을 두루 섭렵하지 않더라도 그러한 지혜에 일찌감치 도달한다. 알란의 모범을 따르자면, 인생에서 책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요나손 자신은 이 작품을 쓰기 위해 광범위한 자료 조사를 하고 굉장히 많은 책을 읽었다. 독서의 유익함에 대해서 군말을 덧붙이고 싶지 않다. 요나손의 독서가 없었다면 유쾌한 알란의 삶은 그려지지 않았을 것이다. 독서가 없다면 우리는 알란의 삶과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알란이 한 잔의 술을 마실 때 우리에게 필요한 건 한권의 책이다.

 

15. 06.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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