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주 시사IN(406호)에 실은 리뷰를 옮겨놓는다. 레나타 살레츨의 <불안들>(후마니타스, 2015)을 다뤘다. 이 원고를 바탕으로 지난 금요일에는 강연을 진행하기로 했다. 책은 다양한 영역에서의 불안을 다루고 있지만 서평은 분량상 불안과 환상의 차이에 집중했다. 번역본으로는 먼저 나온 <선택이라는 이데올로기>(후마니타스, 2014)는 <불안들>의 후속작이기에 순서상으로는 그렇게 읽어도 좋겠다.

 

 

시사IN(15. 06. 27) 당신과 나의 본질에 대하여

 

슬로베니아 정신분석학파의 일원으로 활동한 살레츨은 슬라보예 지젝, 믈라덴 돌라르 등 다른 구성원들과 마찬가지로 독일 관념론 및 비판이론과 라캉 정신분석학을 공통의 이론적 지주로 삼는다. 이들 저작이 소개될 때마다 흥미롭게 읽는 것은 개인적인 관심 때문이지만 <불안들>은 좀더 널리 읽힐 만하다. 우리가 ‘불안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면 말이다.


물론 불안이 어제오늘의 느낌은 아니다. 하지만 살레츨은 우리가 앞선 시대의 불안과는 다른 새로운 불안을 경험하고 있다고 진단하는데, 그 주원인이 사회적 역할, 정체성을 바꾸려는 끊임없는 욕망, 행동의 지침 부재 등과 더 관련된다고 생각해서다. 그렇다고 불안이 부정적인 의미만 갖는 것은 아니다. 불안을 행복의 장애물로 여기고 통제 대상으로 보는 것이 오늘날의 주된 관점이지만 살레츨은 정신분석의 관점을 빌려 불안이 인간의 본질적 조건이기도 하다는 점을 다시 환기시킨다.


불안에 관한 정신분석의 이론은 무엇인가. 프로이트는 불안은 리비도의 억압이나 거세에 대한 두려움과 관련지어 설명했다. 뒤를 이어서 라캉은 불안을 주체와 대타자 사이의 관계로 설명하면서 이를 정교화했다. 대타자란 주체가 ‘말하는 존재’로서 진입하게 되는 사회적‧상징적 네트워크를 가리킨다. 이 ‘상징계’로 진입할 때 주체는 상징적 거세를 겪는다. 이 과정을 거쳐서 주체는 상징적 질서 속에서 특정한 자리를 차지하며 권력이나 지위를 얻는다. 가령 경찰은 아무것도 아닌 존재이다가도 제복을 입는 순간 권력을 가진 자가 된다.


문제는 대타자 자체도 비일관적이며 분열되어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대타자가 무엇을 욕망하는지, 그리고 우리는 대타자의 욕망에 비추어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지 확실하게 말할 수 없다. “그래서 대타자의 결여에 대해 주체는 자신의 결여로 답할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불안은 바로 주체가 자신의 결여나 대타자의 결여를 다루는 방식이다.


대타자는 주체에게 늘 불안을 유발하며 ‘대타자에게 나는 누구인가?’란 질문을 끊임없이 던지게 만든다. 어떻게 할 것인가. 가장 일반적인 사례로 신경증자들은 환상을 통해서 자신의 결여를 가리고자 한다. 환상이란 주체에게 일관성을 제공해주는 시나리오다. 주체가 욕망의 대상과 특정한 관계를 맺도록 해주는 것이 환상이다. 환상은 주체의 불안을 막아준다. 환상을 통해서 주체는 자기 삶이 일관적이고 안정적이라고 생각하며 사회적 질서 또한 아무런 적대 없이 일관적이라고 인식한다. 다시 말해 환상은, 주체가 전적으로 결여를 특징으로 하며 사회는 여전히 적대를 그 특징으로 한다는 사실을 은폐한다.


그렇게 불안에 대한 보호막으로서 환상이 우리는 편안하게 만든다면, 불안은 우리를 불편하게 만든다. 불안은 우리를 잠식하며 마비시킬 수도 있다. 하지만 다른 한편 불안은 환상이 갑작스레 깨질 때 우리가 봉착할 수 있는 파국에 미리 대비하게 해주는 효과가 있다. 불안을 외상으로부터 주체를 보호하려는 신호로도 간주하는 이유다. 대중매체는 흔히 불안을 주체의 안녕을 방해하는 궁극적인 장애물로 그리지만, 불안을 없애거나 통제하는 일이 능사는 아닌 것이다.


살레츨은 주체가 불안을 경험하는 것은 “주체가 개인의 특징인 결여 및 사회의 특징인 적대와 특정한 방식으로 씨름하는 징후”로 간주할 수 있다고 말한다. 불안한 사회도 문제지만 불안이 배제된 사회라고 해서 더 나은 것도 아니다. 전투를 앞둔 병사들이 불안에 떠는 것도 문제지만 아무런 불안도 느끼지 않는 병사들이 더 공포스럽다는 한 미군 지휘관의 말은 불안이 갖는 의의가 무엇인지 잘 시사한다. 곧 불안이 없는 사회도 우리가 살아가기에는 똑같이 위험한 곳이다. 이렇듯 불안의 정체와 구조에 대해서 이해한다면, 환상과 불안 사이에서 좋은 균형을 잡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15. 06.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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