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도와 우울증
푸슈킨의 죽음을 애도함
레르몬토프의 고독

고교 독서평설에 실은 글을 옮겨놓는다. '이별에 대처하는 두 가지 방법'은 부제이고, 제목은 '푸시킨 VS. 레르몬토프'이다. 러시아 두 낭만주의 시인의 사랑시(실연시)를 애도적 유형과 우울증적 유형으로 비교한 글이다. 개인적으론 '푸슈킨'이란 표기를 선호하지만 지면에는 외국어 표기안에 따라 '푸시킨'으로 표기됐다.    

고교 독서평설(09년 3월호) 푸시킨 VS. 레르몬토프

영원한 문학의 주제, 사랑
“아, 누가 그 아름다운 날을 가져다줄 것인가/그 첫사랑의 날을/아, 누가 그 아름다운 시절의 오로지 한 조각만이라도 돌려줄 것인가.”라며 첫사랑과 청춘에 대한 애틋한 그리움을 노래했던 시인 괴테(1749~1832). 그러나 그는 지난 세월에 대한 영탄으로만 생의 말년을 채우진 않았다. 전 생애에 걸쳐 여인들과의 사랑을 통해서 문학적 영감을 얻었던 그는 74세의 나이에 19세의 처녀 울리케 폰 레베초와 사랑에 빠져, 주위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청혼을 결심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이 만년의 사랑은 맺어지지 못했고, 괴테는 천국에서의 만남을 기약하며 「마리엔바트의 비가(悲歌)」를 남겼다. “꽃이 모두 져 버린 이날/다시 만나기를 희망할 수 있을까?/천국과 지옥이 네 앞에 두 팔을 벌리고 있다./사람의 마음은 얼마나 변덕스러운지!/더 이상 절망하지 말라! 그녀가 천국의 문으로 들어와/두 팔로 너를 안아 주리라.” 

사랑의 기쁨과 그 상실의 슬픔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시인들의 단골 소재이자 시적 영감의 가장 강력한 원천이었다. 자연스럽게 흘러넘치는 감성을 예찬하며 숭배했던 낭만주의 시인들에겐 두말할 나위가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모든 시인이 사랑의 열병을 앓으면서 똑같이 들뜨고 똑같이 슬퍼했던 것은 아니다. 그들은 각자의 개성과 품성에 따라 사랑을 노래했으며 상실의 슬픔을 위로하였다. 러시아 낭만주의의 대표적인 두 시인 알렉산드르 푸시킨(1799~1837)과 미하일 레르몬토프(1814~1841)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두 시인은 이유는 서로 달랐지만 모두 결투로 세상을 떠났다. 낭만주의 시대의 시인다운 죽음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남긴 사랑의 시들은 여러모로 대조되며, 각각 사랑과 실연에 대한 두 가지 태도를 대표한다. 무엇이 다르며 어떤 차이를 보이는지 살짝 들여다보기로 하자. 



사랑은 움직이는 것 - 애도적 유형
정신 분석학의 창시자 프로이트(1856~1939)는 「애도와 우울증」이란 글에서 상실에 대한 반응 태도를 ‘애도적 유형’과 ‘우울증적 유형’으로 구분했다. 이 두 유형은 사랑의 대상에 대한 정서적 몰입과 그 대상의 상실로 인한 정서적 충격을 어떻게 처리하느냐에 따라 나뉜다. 애도적 유형의 경우에는 일단 사랑하는 대상이 이젠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그래서 대상에 쏟아 부었던 모든 감정적 에너지를 거둬들여야 한다는 현실의 요구를 수용하며, 그럼으로써 상실의 충격에서 차츰 벗어나게 된다. 반면 우울증적 유형의 경우에는 상실한 대상과 자신을 무의식적으로 동일시하기 때문에, 대상 상실이 자아 상실로 전환된다. 이는 이미 상실한 대상에 대한 강한 집착을 낳고, 자기 자신, 곧 자아에 대해서는 애증의 감정으로 발전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반응 태도는 과연 시에서 어떻게 구현되고 있을까?  

 

먼저 모든 아름다운 여인과의 사랑을 자신의 의무로 간주하기도 했던 시인 푸시킨의 경우를 보자. 사랑의 상실 또는 사랑의 종결을 다루고 있는 시들 가운데 「모든 것이 끝났다」(1824)는 이런 내용이다. 

모든 것이 끝났다 ; 우린 아무 관계도 아니다.
마지막으로 너의 무릎을 껴안고,
나는 애처롭게 호소했었지.
모든 것이 끝났어요 - 너의 대답을 듣는다.
다시는 나 자신을 기만하지 않을 것이다,
너를 우수로 괴롭히지도 않을 것이다,
지난 일들은 아마도 다 잊게 되겠지 -
사랑이 날 위해 만들어진 것도 아니고.
넌 젊고, 너의 영혼은 아름다우니,
또 많은 사람들이 널 사랑하게 되리.


전체 10행으로 이루어진 이 시는 내용상 ‘우리의 사랑은 모두 끝났다.’(1~4행), ‘나는 너와의 사랑을 잊을 것이다.’(5~8행), ‘다른 사람들이 너를 사랑해 주길 바란다.’(9~10행)로 구분된다. ‘나’와 ‘너’의 사랑은 이미 끝났으므로, 이 시의 화자는 이렇게 종결된 관계를 다시 회복한다거나 계속 유지시켜 나가려는 의지가 없다. 이러한 체념의 바탕에서, ‘너’는 아직 젊고 아름다우므로 (‘나’ 말고도) 다른 많은 사람으로부터 사랑받게 되리라고 ‘나’는 기대한다. 바로 이런 식의 단계적 진행을 밟는 것이 전형적인 애도적 유형의 시다. 이 공식을 전형적으로 구현하고 있는 또 다른 시가 푸시킨의 대표작 중 하나로 꼽히는 「나는 당신을 사랑했소」(1829)다.

나는 당신을 사랑했소, 어쩌면 사랑은 아직도,
내 가슴에서 아직 다 꺼지지 않았는지도.
하지만 그 사랑이 당신을 더는 괴롭히지 않을 거라오.
나는 당신을 무엇으로도 슬프게 하고 싶지 않소.
나는 당신을 사랑했소, 말없이, 아무런 희망 없이,
때론 수줍게, 때론 질투에 괴로워하며.
나는 당신을 사랑했소, 그토록 진실하게, 그토록 부드럽게,
신이 당신을 다른 이에게도 사랑받게 해 주길 바랄 만큼.

이 시에서 세 차례 반복되는 동사 ‘사랑했다’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사랑’이라기보다는 ‘했다’라는 과거 시제다. ‘나’의 ‘사랑’은 한때 ‘당신’에게 집중되었던 열정이 이미 식어 가기 시작했지만, 아직 조금 남았다는 걸 확인하는 정도의 사랑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사랑이 당신을 더 이상 괴롭히지는 않을 거라는 서정적 화자의 진술은 이타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론 그의 의지와는 무관하다.  

어떤 행동의 원동력이 되기에 ‘다 꺼져 가는 사랑’은 너무 모자라는 사랑이다. 이 모자라는 사랑의 다른 이름이 시의 끝부분에서 진술되고 있는 관대한 사랑이다. “신이 당신을 다른 이에게도 사랑받게 해 주길 바랄 만큼”의 사랑 말이다. 요컨대, 이 시에서 부각되고 있는 것은 시인의 겸손하고 부드러운 사랑의 방식이다. 사실상 시에서 ‘당신’에 대한 묘사는 거의 부재하며, 전체 내용은 “나는 이러이러하게 당신을 사랑했소.”라는 한 문장으로 수렴된다. 그렇다면 ‘도덕적으로 가장 숭고한 시’라는 일부의 평가는 좀 과장된 게 아닐까도 싶다.   

사랑은 결코 변하지 않는다 - 우울증적 유형 
이러한 푸시킨의 사랑의 시학(詩學)과 대조되는 작품이 레르몬토프의 「우리는 헤어졌지만」(1837)이다. 이 시는 푸시킨의 「나는 당신을 사랑했소」에 대한 직접적인 반박으로도 읽히기에 흥미롭다. 시의 전문은 이렇다.

우리는 헤어졌지만, 너의 초상을
나는 가슴에 간직하고 있다.
좋은 날들의 창백한 환영처럼
그것은 내 영혼을 들뜨게 한다.

그래서 새로운 열정에 빠졌어도
나는 그 초상을 그만 사랑할 수 없었다.
버려진 사원도 여전히 사원이고,
쓰러진 우상도 여전히 신이니까!


이 시는 「나는 당신을 사랑했소」와 마찬가지로 8행으로 되어 있지만, 2연으로 나누어져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 시에 간결하게 공식화되어 있는 레르몬토프의 사랑의 공식은 어떠한가? 먼저, 1연의 처음 두 행 “우리는 헤어졌지만, 너의 초상을/나는 가슴에 간직하고 있다.”에서, ‘너의 초상’은 ‘너’를 대신하는 부분 대상이다. 이는 ‘너’의 흔적이자 ‘나’에게 남긴 일종의 각인이다. 이 각인 때문에, ‘우리’는 헤어졌지만 완전히 헤어진 게 아닌 이중적인 상황에 놓이게 된다. 곧 ‘나’는 ‘너’를 상실했지만 ‘우리’의 사랑은 아직 끝나지 않았고, 이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 ‘너의 초상’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행에서는 그것이 갖는 효과를 진술한다. ‘너의 초상’은 “좋은 날들의 창백한 환영처럼” ‘나’를 즐겁게 하고 들뜨게 만든다. ‘너’는 이제 없지만, ‘너’의 효과는 그대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2연을 시작하는 접속사 ‘그래서’는 1연에서의 효과가 계속 이어짐을 뜻한다. ‘우리’가 헤어진 뒤에 ‘나’는 새로운 상대를 만나서 열정에 빠졌지만, 여전히 ‘나’는 ‘그것(너의 초상)’을 내버릴 수 없다. 아니, 오히려 새로운 열정은 지난날의 열정을 더욱 강하게 환기시키는 역할을 한다. 그리하여 버려진 사원이 여전히 사원이고, 쓰러진 우상도 여전히 신인 것처럼, 떠나간 ‘너’는 여전히 ‘나’의 사랑이라는 게 이 시의 최종적인 고백이다.  

“나는 당신을 사랑했소.”라고 다소간 열정적으로 시작한 푸시킨의 시는 결국엔 사랑의 종결을 확인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이와 달리 단도직입적으로 ‘우리는 헤어졌소.’라고 사랑의 종결을 선언하면서 시작한 레르몬토프의 시는, 역설적으로 종결되지 않는 사랑에 대한 확인으로 끝난다. 여기서 두 시의 차이, 더 나아가 두 시인의 사랑관의 차이가 드러난다. 통속적인 어법으로 비교하자면, 푸시킨이 “사랑은 움직이는(변하는) 거야!”라고 암묵적으로 주장하는 데 반해서, 레르몬토프는 “사랑이 어떻게 변할 수 있니?”라고 반박하는 식이다. 푸시킨의 ‘성숙’은 레르몬토프에게는 ‘배신’을 의미하고, 레르몬토프의 ‘영원한 사랑’은 푸시킨에게는 ‘미숙함’의 표지다. 둘은 사랑을 읽는 코드가 서로 다른 셈이다. 내친 김에 레르몬토프가 짧은 생애의 막바지에 쓴 「아니야, 나는 너를 열렬히 사랑하지 않아」(1841)까지 읽어 보자.

아니야, 나는 너를 열렬히 사랑하지 않아,
너의 빛나는 아름다움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야 ;
네게서 내가 사랑하는 건 과거의 고통과
스러져 간 나의 젊음이야.

때때로 너의 눈동자를 오랫동안 응시하며
내가 너를 바라볼 때,
나는 비밀스런 대화를 나누지만,
나는 너에게 진심을 말하지 않는다.

나는 어린 시절의 여자 친구와 말한다.
너의 모습에선 다른 모습들을 찾고,
살아 있는 입술에선 오래전부터 말이 없는 입술을,
눈동자에선 이미 꺼져 버린 눈빛을 찾는다.
 

이 시는 표면적으로는 현재의 ‘너’를 사랑하지 않음을 말하고 있지만, 심층적으로는 부재하는 과거와 과거의 연인에 대한 사랑을 고백하고 있다. 말하자면, 이 시에서의 사랑은 푸시킨의 경우처럼 ‘변화하는 움직이는 사랑’이 아니라, ‘변치 않는 고정된 사랑’이다. ‘나’의 사랑은 이미 지나가 버린 과거에 붙박여 있다. 이를 압축하고 있는 부분이 바로 1연이다. ‘나’는 ‘너’를 사랑하지만, 그건 ‘너’를 통해서 ‘나’의 ‘과거의 고통’과 ‘스러져 간 젊음’을 사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재의 ‘너’는 사랑의 대상이 아니라 매개다. 곧 ‘나’는 ‘너’의 눈동자를 바라보지만, 정작 내가 대화를 나누는 이는 ‘너’가 아니다.  

이어서 3연에는 1연의 내용이 반복되고 있는데, 이 부분에서 ‘내’가 사랑하는 ‘과거의 고통’이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다. 그것은 사랑의 실패와 상실에 따른 고통으로, 사랑의 대상은 ‘어린 시절의 여자 친구’로 지목된다. 어린 시절로 한정되어 있는 ‘그녀’와의 사랑은 그 시절로의 회귀만큼이나 불가능하다. 하지만 중요한 점은 그렇다고 해서 그 사랑이 포기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나’는 현재 연인의 모습에서 끊임없이 과거의 흔적과 상처를 찾아 나선다. 그런 의미에서 ‘너의 모습’과 ‘입술’, ‘눈동자’는 모두 부재하는 사랑의 대상을 대신하는 부분 대상이고, 그 흔적들이다. 이 시에서는 사랑의 대상이 두 가지 등장하는데, 이 둘이 겹쳐지면서 궁극적으로 단일한 대상에 대한 집요한 사랑을 드러낸다. 현실적인 실현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점에서 그것은 우울증적 사랑이다.  

몇 편의 제한된 사례를 통해서이긴 하지만, 푸시킨과 레르몬토프의 시에 나타난 사랑과 그 상실에 대한 시적 형상화가 각각 애도적 유형과 우울증적 유형에 대응한다는 것을 살펴보았다. 간단히 공식화하자면, 애도적 유형은 ‘상실 → 슬픔 → 위안’의 단계를 거치고, 우울증적 유형은 ‘상실 → 각인 → 우울’의 경로를 따른다. 이렇듯 사랑과 이별에 대처하는 방식에 최소한 두 가지 유형이 있다는 것 정도는 알아두면 좋겠다. 그러면 자신의 감정만을 절대화하는 오류에서 혹시 자유로울 수도 있을지 모르니까 말이다.   

09. 03.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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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애도적 유형의 이별시
    from Emergence 2009-03-22 17:57 
    모든 것이 끝났다 ; 우린 아무 관계도 아니다 마지막으로 너의 무릎을 껴안고 나는 애처롭게 호소했었지 모든 것이 끝났어요 - 너의 대답을 듣는다 다시는 나 자신을 기만하지 않을 것이다 너를 우수로 괴롭히지도 않을 것이다 지난 일들은 아마도 다 잊게 되겠지 사랑이 날 위해 만들어진 것도 아니고 넌 젊고, 너의 영혼은 아름다우니 또 많은 사람들이 널 사랑하게 되리. 이 시는 푸시킨의 (1824)이다. 로쟈님이 프로이트의 이별 유형에..
  2. 푸슈킨과 레르몬토프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11-08-31 00:55 
    새로 책을 냈다. 새로 쓴 것은 아니고 박사학위논문을 단행본으로 단행본으로 다듬어서 펴낸 것이다. 제목은 <애도와 우울증>(그린비, 2011)이고, '푸슈킨과 레르몬토프의 무의식'이 부제다. 모두 편집자의 제안에 따른 것으로 원래는 <푸슈킨과 레르몬토프의 비교시학: 문학적 태도로서의 애도와 우울증>(2004)이란 제목으로 제출됐던 논문이다. 이번에 편집자와 여러 사람의수고로 깔끔하게 예쁘게 출간돼 반갑고 다행스럽다. 그들의 공이 크
 
 
다락방 2009-03-21 23: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로쟈님.
푸시킨의 시도, 레르몬토프의 시도 너무 좋아요. 봄이고 게다가 밤이기도 한 지금 읽어서 그런걸까요. 이참에 푸시킨의 시집을 한권 사봐야 겠어요. 아, 정말 좋아요.

로쟈 2009-03-22 00:01   좋아요 0 | URL
번역은 직역에 가까워서 시에는 못 미치는데요.^^; 아무래도 봄밤이어서...

바라 2009-03-22 0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의 주전공이시군요^^ 제가 고등학생 때 이런 글을 봤다면 문학을 전공하게 되었을지도 모르겠어요ㅎㅎ

로쟈 2009-03-22 14:48   좋아요 0 | URL
네, '주전공'이 그런데, 요즘은 돌볼 새가 없네요.^^;

2009-03-22 04: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3-22 14: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무해한모리군 2009-03-23 09: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푸쉬킨의 시를 읽으니 우리네 사랑이 참으로 매번 다른듯 하면서도 참으로 닮았나보다 싶습니다. 아 밤에 읽었으면 더 좋았을텐데요 ^^

로쟈 2009-03-24 00:22   좋아요 0 | URL
보편성이라는 게 있으니까요...

글샘 2009-03-25 19: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주전공이라 재미있게 잘 쓰셨네요. ^^
근데... 황무지는... 싫어욧! ㅠㅜ 문학책에 가끔 나오는데, 저도 넘 어려워서 모른답니다. ^^

로쟈 2009-03-26 01:26   좋아요 0 | URL
앗, 4월달 원고에서 다룬 책이 <황무지>인데, 벌써 읽어보셨나요?..

글샘 2009-03-26 22:29   좋아요 0 | URL
그럼요. 매달 오면 로쟈님 글부텀 읽는다는... 믿거나 말거나 ㅎㅎ

로쟈 2009-03-26 23:38   좋아요 0 | URL
네, 믿기진 않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