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2월 10일은 러시아의 문호 알렉산드르 세르게예비치 푸슈킨(1799-1837)의 서거 170주기가 되는 날이다. 러시아신문을 뒤져보니까 추모기사들이 떠 있는데, 올해는 날짜가 2월 9일인 모양이다. 구력으로 푸슈킨이 사망한 것은 1837년 1월 29일의 일이다. 이걸 신력으로 환산하면 대략 2월 10일쯤인데, 하루 정도는 왔다갔다 하는 듯하다(이 계산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나는 모른다). 지난달 말부터 염두에 두고 있었지만 이틀이 지나서야 몇 마디 적게 된다(날짜가 지나서 제사를 지내는 것 같군).
사실 그의 결투와 죽음에 관해서 내가 할 얘기는 '푸슈킨과 도스토예프스키' 같은 페이퍼에 적어놓았기 때문에 특별히 덧붙일 말은 없다. 그래서 국내에 관련기사가 있는지 검색해봤는데, 오래전 세계일보에 실린 것이 눈에 띈다. '철의 실크로드' 기행연재물의 한 꼭지가 '시인 푸슈킨의 고향 모스크바'를 다루고 있었던 것이다. 옮겨놓으면서 몇 가지 이미지를 덧붙여둔다(*아래는 푸슈킨의 결투 장소).
세계일보(01. 08. 20) 詩人 푸슈킨의 고향 모스크바
"굳이 문학도가 아니라도 러시아인이라면 누구나 푸슈킨의 시 한 두 편쯤은 암송할 수 있습니다. '예브게니 오네긴'이나 '스페이드의 여왕' 같은 장-단편소설의 줄거리와 등장인물까지도 훤히 들 압니다. 그만큼 푸슈킨은 누구에게나 친숙한 작가입니다."
통역을 겸해 취재진을 안내한 조현용(25)씨는 러시아에서 8년간 살면서 느낀 점들을 기자에게 들려주었다. 이곳에서 고교를 다니고 모스크바 국립대의 러시아 어문학 석사학위까지 받은 그지만 러시아인들과 얘기를 나누다 보면 그들의 문화적 소양에 깜짝깜짝 놀란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다고 한다. 문학을 즐기고 오페라와 연극 발레를 많이 보아서인지 여기선 웬만한 일반 시민도 한국의 학식 있는 문화예술인이나 문학 교수 못지않게 해박하다는 것이다.
특히 알렉산드르 S. 푸슈킨(1799∼1837)의 작품은 러시아인들에게 폭넓게 사랑받고 있다. 그는 시와 소설 등 각 장르에 걸쳐 새로운 전범이 될 작품을 많이 남김으로써 '러시아 근대문학의 스승'으로 추앙받는다. 그를 기리는 기념관만도 러시아 전역에 20군데가 넘는다. 붉은 광장에서 가까운 아르바트 거리에는 푸슈킨이 신혼시절 살았던 집이 기념관으로 남아 있다.
취재진은 이곳을 잠시 둘러본 뒤 다시 프레치스첸크 거리에 있는 푸슈킨 박물관을 찾았다. 박물관 건물은 웅장하고 현대적인데다 전시물도 다양하다. 푸슈킨이 태어나기 전후의 시대상과 풍물, 당시 모스크바 시가지의 모습에서부터 작가의 육필원고와 스케치화, 저작물, 오리깃털 펜에 이르기까지 갖가지 개인용품과 주변인물, 관련자료 등으로 그 삶의 궤적을 두루 보여준다.
"푸슈킨은 모스크바의 유서 깊은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는 상트페테르부르크 근교의 차르스코예 셀로(황제의 마을사회주의 혁명 이후 이 지명은 푸슈킨을 기념해 '푸슈킨고로트'로 바뀌었다)의 귀족학습원의 학생시절부터 빼어난 시작(詩作)으로 주목받았다. 졸업후 그는 시를 쓰면서도 의회민주주의를 신봉하는 데카브리스트의 혁명적인 애국주의 사상에 심취했다. '자유' '차다예프에게' 등의 정치시를 쓴 것이 화근이 돼 그는 남러시아로 추방된다. 하지만 유형지의 외로운 생활 속에서도 개성의 자유를 노래하며 '보리스 고두노프' 같은 사실주의적인 드라마 작품을 많이 썼다. 근위병들이 황제에 반기를 든 데카브리스트 사건이 터진 뒤 그들과 무관함이 밝혀진 1826년에야 그는 유형에서 풀려나 모스크바로 돌아왔다."
푸슈킨 박물관의 안내인은 작가의 아내 나탈리야와 단테스의 그림 앞에 이르자 취재진에게 시간을 할애해 젊은 작가의 장렬한 최후를 들려주었다. 작가의 삶은 그 자체로도 소설처럼 극적이고 열정적이었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 모든 것 순간에 지나가고 지나간 일은 사랑스러우리라"고 했던 시는 그의 삶 속에서 우러난 것이기도 했다.
그는 32세 되던 1831년 13세 연하의 나탈리야 곤차로바와 결혼했다. 일찍이 그가 "현기증을 느꼈다"고 했을 만큼 빼어난 미모의 여성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 결혼으로 엄청난 대가를 치른다. 궁핍한 장모에게는 빚까지 내가며 거액의 혼수금을 쥐어줘야 했다. 게다가 유행을 좋아하고 사교계의 여왕으로 각광받게 된 아내 때문에 갈수록 큰 돈이 들었다. 늘어가는 빚과 사교계의 번잡함 속에서 그는 정서불안에 시달렸다. 숨지기 3년 전인 1935년 무렵 그는 황제에게 매수당했다는 비난을 각오하고 니콜라우스 1세로부터 3만루블을 빌리게 된다. 그만큼 그로서는 경제적으로 힘든 처지였다.
이 와중에 프랑스 출신 청년 근위병 조르주 단테스와 그의 아내 나탈리야의 염문이 불거졌다. '간통한 여자의 남편'이라는 익명의 편지에 분개한 그는 '연적'과 담판을 지어야 했다. 1837년 1월 27일 오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검은 강가에서 둘은 결투를 벌였다. 열 발짝 떨어져서 서로 권총을 쏘되 죽을 때까지 싸운다는 냉혹한 조건으로. 푸슈킨은 상대가 쏜 첫 발에 이미 복부에 치명상을 입고 눈밭에 쓰러졌으나 그의 총탄은 단테스의 팔목에 상처를 입혔을 뿐이었다. 이틀 뒤 그는 숨을 거두었다. 아직 37세의 젊은 나이였다.
당국은 사전에 이 결투를 알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나탈리야를 좋아했던 황제 니콜라우스 1세는 이를 간섭하지 않고 내버려두었다. 푸슈킨을 '눈엣가시'처럼 여겨온 세도가들도 단테스와 나탈리야의 염문으로 그가 타격을 입는 것을 즐기는 입장이었다. 푸슈킨의 시신은 당국의 명령으로 비밀리에 미하일로프스코예의 한 수도원에 보내져 새벽에 매장됐다. 그의 대중적 인기 때문에 혹시 불상사가 벌어질까 우려한 당국은 일반인의 장례 참가를 금했고 '과격한' 추도사를 쓰지 못하도록 엄명했다. 작가의 데드 마스크는 눈을 감은 채 두툼한 입술을 굳게 다물고 있다. 이승을 떠난 무심한 표정이었다.
"나탈리야요? 그녀는 한동안 언니 알렉산드라와 아이들과 함께 칼루가 현에 있는 양친의 영지에서 살다가 후일 황제의 권유로 다시 궁정에 복귀하지요. 1844년 그녀는 표트르 란스코이와 재혼했습니다. 황제는 가족의 빚을 갚아주고 푸슈킨 아이들의 교육을 책임졌습니다. 푸슈킨을 죽인 단테스는 그 뒤 러시아인들에게 짐승처럼 손가락질당하며 그늘진 삶을 살았습니다."
짧지만 열정적으로 살다 간 그는 자신의 삶에 긍지를 갖고 있었다. '나는 인간의 손으로 만들어지지 않는 기념비를 세웠다'며 푸슈킨은 자신의 미래를 이렇게 써 놓았다(*'기념비'란 시이다). "나는 완전히 죽지 않으리라친숙한 시 속에 깃들인 영혼은/ 나의 재보다 오래 살아남을 것이며, 부패되지 않으리라/ 그리고 나는 찬양받으리라, 지구상에/ 단 한 명의 시인이라도 살아 있는 한."(차준영 문화전문위원)
07. 02. 11.
P.S. 푸슈킨의 결투와 죽음에 관한 기사의 소개는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이나 아직 확증적인 것은 아니며 그의 죽음을 둘러싼 많은 수수께끼들은 아직 해명되지 않은 채 남아 있다(황제 니콜라이의 '음모설'을 나는 더 지지하는 편이다). 아래는 1880년에 모스크바에 세워진 푸슈킨의 동상. 러시아 전역에 200여개가 넘는 그의 동상들 가운데 최초이자 가장 유명한 동상이다. 배경으로는 과거 모스크바영화제가 개최되던 '러시아극장'이 보인다. 자주 가보던 곳인데, 벌써 오래전 일처럼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