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전 손택의 <우울한 열정>(이후, 2005)에서 벤야민에 관한 장을 다시 읽어보려고 찾았으나 눈에 띄지 않는다(참고로, 나는 이 책에 관해서 몇 차례 페이퍼를 쓴 바 있다). 원저인 <토성의 영향 아래>를 내가 안 갖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데 생각이 미치자(도서관에서 주로 빌려 읽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게 되었다. 책을 찾아보려는 열정 역시 이럴 땐 '우울한 열정'이다(손택은 벤야민이 우울증적 기질의 비평가였음을 지적한 바 있다).
곁다리로 고유명사 표기에 대해 지적하자면, 처음에 '수잔 손탁'으로 소개돼던 'Susan Sontag'을 '수전 손택'으로 읽는 건 현지음을 고려한 탓인 듯하나 그런 식으로라면 우리가 표기만으로 읽을 수 있는 이름은 거의 없다(가령 영국식과 미국식 영어의 차이는 어떻게 반영할 것인가?). '마샬 맥루한(Marshal Mcluhan)'의 경우는 점입가경인데, '마셜 맥루언'으로 바뀌더니 최근엔 아예 '마셜 매클루언'이란 표기까지 등장했다. 이유는 역시나 '현지음'인가? 하지만 관행 파괴적인 '동인이명'이 이런 식으로 점차 늘어난다면 소통가능성은 그와 반비례하여 점점 줄어들게 될 것이다(하긴 유식의 과시는 애당초 소통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 아니지만). 우울하게도 말이다.
그런 우울 모드는 오전부터 간간이 붙들고 있는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길, 2007)에도 빚지고 있다. 야심차게 출간되기 시작한 이 선집이 적어도 한국어 정본의 역할을 해줄 것으로 기대했지만 내가 읽기에 독어본이나 영어본 등 다른 판본의 도움 없이 국역본만으로 벤야민을 읽고 이해하기는 여전히 지난해 보인다. 비록 가독성을 경계해 마지 않았던 아도르노만큼은 아니더라도 벤야민 읽기 역시 팍팍한 여정이다.
걸음을 지체시키는 원인은 번역자들이 원칙으로 삼은 듯이 보이는 '직역주의'에 있다. 원저에 대한 '충실성'이 이유인 듯한데, 덕분에 한국어 독자는 들러리에 머문다는 인상을 받는다. 하지만 의문스러운 건 벤야민에 대한 충실성이 부자연스럽거나 어색한 한국어까지 정당화하느냐는 것이다(벤야민 자신이 그런 어색하고 부자연스러운 독일어 문장을 구사한다면 물론 '정당화'될 수 있다. 하지만 독일 최고의 문학비평가를 자임했던 벤야민이 과연 그런 식의 독일어를 구사한 것인지?).
아직 이번에 나온 국역본들을 전반적으로 훑어보진 않았기 때문에 내가 사안을 침소봉대하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벤야민의 가장 대표적인 '논문'의 경우는 사실 지난 1983년에 나온 반성완 교수의 번역보다 더 낫다고 말하지 못하겠다(내가 읽을 수 있었던 대여섯 종의 우리말 번역본들을 고려할 때 그렇다). 물론 반성완본의 여러 오역들에 대해서는 여러 후학들이 지적하고 있는 것이지만 나는 우리말 문장력에서만큼은 반성완본이 가장 낫다고 생각하는 쪽이다(그래서 차라리 반성완 교수가 개역판을 내는 게 최선이지 않을까라고도 생각한다). 예컨대, 벤야민의 에피그라프격으로 인용하고 발레리의 첫문장은 이렇다.
"제반 예술이 정초되고 그것들의 여러 유형이 생겨난 것은 우리의 시대와는 판이하게 달랐던 시대에서 시작되었고, 사물과 상황에 대한 그 권력이 우리 시대에 비하면 미미하기 짝이 없던 사람들에게로 거슬러 올라간다."(최성만, 99쪽)
"예술이라는 개념과 예술의 여러 상이한 형식은 오늘날의 시대와는 크게 다른 시대, 즉 사물과 상황을 제어하는 힘이 우리들의 힘과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미미한 시대에 생겨났다."(반성완, 197쪽)
여기서 무엇이 맞는 번역이냐는 부수적이다. 다만 나의 관심은 문장이고 문체이다. 그리고 어차피 이 대목의 원문은 불어이기에 두 판본 모두 '중역'이다(벤야민이 불어 문장을 그대로 인용한 게 아니라면). 그러니까 여기서 문제되는 것은 벤야민에 대한 충실성이 아니라 발레리에 대한 충실성이며 불문학쪽에서도 뛰어난 문장가로 꼽히는 발레리라면 보다 유려한 문장을 구사하지 않았을까. 인용문의 끝문장을 읽어본다.
"우리는 엄청난 혁신들이 예술의 테크닉 전체를 변모시키고, 그로써 발명 자체에 영향을 끼치며, 결국에는 예술의 개념 자체를 가장 마법적인 방식으로 변화시키는 데까지 이를지 모른다는 점을 각오하지 않으면 안된다."(최성만)
"따라서 우리는, 위대한 신발명들이 예술형식의 기술 전체를 변화시키고 또 이를 통해 예술적 발상에도 영향을 끼치며 나아가서는 예술개념 자체에까지도 놀라운 변화를 가져다주리라는 것을 예상하지 않으면 안된다."(반성완)
발레리가 말하는 '엄청난 혁신들' 혹은 '위대한 신발명들'(영역으로는 'great innovations')이 벤야민의 문맥에서는 '기술복제'나 '영화'를 가리키게 된다. 이러한 혁신/발명이 초래하게 된 '놀라운 변화'가 사실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이 초점을 맞추고 있는 상황이기도 하고. 한데, 인용문의 '발명 자체'는 무엇인가? 반성완본에서 '예술적 발상'이라고 하면 이해가 되지만 '발명 자체'만으로는 무엇을 지시하는지 알기 어렵다. 이걸 영역본에서는 'artistic invention'으로 옮겼고, 내가 갖고 있는 러시아어본에서는 '창작 과정 자체'라고 옮겼다. 모두 '발명 자체'보다는 뜻이 통한다. 이어서 마르크스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머리말.
"카를 마르크스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에 대한 분석을 기도하려고 했을 때 자본주의는 아직 초기 단계에 있었다. 마르크스는 그의 연구를 착수할 때 그 결과가 진단적 가치를 지닐 것을 염두에 두었다. 그는 자본주의 생산의 근본 상황으로 되돌아가서 그 상황을 그로부터 추후 사람들이 자본주의에서 기대할 수 있는 것이 생겨나도록 서술하였다. 그로써 생겨난 것은, 사람들이 자본주의에 대해 점점 더 심화되는 무산계급의 착취를 예상할 수 있다는 점뿐만 아니라 결국에는 자본주의 자체의 폐지를 가능케 할 조건들이 만들어지리라는 것을 기대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최성만)
"마르크스가 자본주의적 생산방식을 분석하는 일에 착수했을 때는 자본주의적 생산방식은 아직도 그 초기단계에 머물러 있었다. 마르크스는 그의 분석이 예언적 가치를 가질 수 있도록 하였다. 그는 자본주의적 생산방식의 기본관계에까지 소급하면서, 이 기본관계로부터 자본주의의 미래적 양상이 어떻게 될 것인가를 서술하였다. 마르크스의 결론은, 자본주의하에서는 앞으로 프롤레타리아트의 착취가 점점 더 날카롭게 심화될 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자본주의 자체의 폐지를 가능하게 할 제(諸)조건이 마련될 것이라는 것이었다."(반성완)
일단 "기도하려고 했을 때"보다는 "기도했을 때"가 우리말로 자연스럽다(벤야민이 그런 식의 독일어를 구사하는가?) 물론 반성완본의 '생산방식'보다는 '생산양식'(영역으로는 'mode of production')이 더 적합한 역어인 것으로 안다. 그러나 '진단적 가치'라는 건 문맥에 맞지 않다(다음 쪽에 나오는 '진단적 요구'도 마찬가지다). 독어에서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우리말에서 '진단'은 보통 'diagnosis'에 상응하는데, 여기서 쓰인 단어는 영어본이나 러시아어본에서 모두 'prognosis'이고 이건 의학용어로 '예후'라고 번역되는 용어다('pro'라는 접두사가 이미 암시해주듯이 '예측' '조짐' 등을 가리킨다). 마르크스가 한 일은 자본주의 초기단계를 분석하면서 향후 자본주의의 종말까지를 예측한 것이니 '진단'이라고만 하는 건 부족하다.
그리고 "사람들이 자본주의에서 기대할 수 있는 것이 생겨나도록 서술하였다"라는 표현은 이해하기 어렵다. 자본주의의 미래가 이미 초기의 맹아에 새겨져 있다는 것과 "사람들이 자본주의에서 기대할 수 있는 것"이 동일한 것인지? 영역본에 따르면 이 대목은 수동태 구문이다: "Going back to the basic conditions of capitalist production, he presented them in a way which showed what could be expected of capitalism in the future." 다른 번역들을 둘러봐도 '생겨나도록'의 출처는 찾기 어렵다. '그로써 생겨난 것은'이라고 이어지는 걸 보면 역자는 '생겨난 것'에 상당히 주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머리말에 이어지는 1절의 첫문장도 부자연스럽기는 마찬가지다(정확하게 말하면 '오역'이다). "예술작품은 원칙적으로 항상 복제가 가능했었다."(100쪽) 왜 '가능했다'가 아니라 '가능했었다'인가? 우리말에서 '가능했었다'라고 하면 '현재는 가능하지 않지만'이란 뜻을 함축한다. 물론 벤야민이 뜻하는 바는 아니다. 2절에서도 첫문장은 좀 어색하다.
"가장 완벽한 복제에서도 한 가지만은 빠져 있다. 그것은 예술작품의 여기와 지금으로서, 곧 예술작품이 있는 장소에서 그것이 갖는 일회적인 현존재이다."(최성만, 103쪽)
"아무리 완벽한 복제라고 하더라도 거기에는 한가지 요소가 빠져 있다. 그 요소는 시간과 공간에서 예술작품이 갖는 유일무이한 현존성, 다시 말해 예술작품이 위치하고 있는 장소에서 그 예술작품이 지니는 일회적 현존성이다."(반성완, 200쪽)
완벽한 복제에서도 빠져 있는 한가지는 '현존재'가 아니라 '현존성'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현존재'라는 말을 고집하더라도 '현존재성'이라고 해야 타당하다는 게 내 생각이다. 그것은 존재 자체라기보다는 존재가 갖는 어떤 '속성'이기 때문이다.
물론 가장 완벽한 번역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복제와 마찬가지로 원저가 갖고 있는 현존성, 곧 아우라를 갖지는 못한다. 다만 근접해보고 싶을 따름이다. 번역에 대한 불만은 그런 근접에의 욕망이 불가피하게 빚어내는 '착시 효과'일 수도 있다. 보기에 따라서는 무난하게 읽힐 수도 있는 대목들에 대해 괜한 투정을 부리는 것일 수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욕망은 언제나처럼 끝간 데를 알지 못하는 법. 해서 "사람들이 번역에서 기대할 수 있는 것이 생겨나도록" "번역 자체를 가장 마법적인 방식으로 변화시키는 데" 이를 때까지 이런 투정은 결코 끝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07. 12. 30.
P.S. 내가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을 처음 읽은 건 20년쯤 전이다. 도서관에서 노트에 정리해가며 읽었던 기억이 있는데, 텍스트 자체가 어렵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내가 당시에 가장 어려워한 텍스트는 루카치의 <소설의 이론>이었고, 우연찮게도 내가 읽은 루카치와 벤야민의 번역자는 똑같이 반성완 교수였다. 하지만 20년이 지나서 세 가지 언어의 번역본들을 펼쳐놓고 읽는 벤야민은 어찌된 영문인지 예전보다 더디 읽힌다. 반성완본이나 최성만본이나 채플린의 영화 <황금광시대(The Gold Rush)>(1925)를 <골드러시>로 표기한 것도 이젠 불만스러워 하는 것이니 달라진 건 나의 지성이 아니라 감성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