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보니 옛날에 쓴 시가 생각났다. 97년 대선보다도 더 전이니까 아주 오랜 '옛날'이다.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이란 제목은 박완서 선생의 소설 제목에서 따왔으니까(물론 원출처를 따지자면 김현승의 시 '눈물'로까지 거슬러올라가겠지만) 최소한 94년 이후에 씌어진 것이다. 이런저런 할일들에도 불구하고 의욕이 저하된 상태에서 물끄러미 주말과 휴일을 보내다보니 생각난 시인 듯도 하다. 무엇이 너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이냐, 라고 묻는 뜻에서. 생각난 김에 창고에 넣어둔다.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 1

쩌다 그런 생각, 좀처럼 그런 생각을 벗지 못한다.
무엇이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이냐에 대해
나의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남겨두면, 바로 그 목숨
이전의 마지막 보루, 나의 빤스. 마치 목숨의 경계인 듯
빤스는 나와 함께 반생(半生)을 뛰고 또 뛰었다, 어떤 날은
빤스만 입고 뛰었다(호루라기에 맞춰). 억울할 그 무엇도
없는 날들이 나의 빤스를 젖게 했고 닳게 했고
닳아빠지게 했다. 닳아빠지도록 한 사람 곁에 머문다는 것은
보기 드문 미덕이며, 미덕의 승리이어야 한다. 보라,
온몸의 때를 씻고 씻어내고 우리가 가장 먼저 하는 일,
새 빤스를 입는 일! 금방 빤 듯한 빨아서 말린 듯한
새 빤스, 의 노곤한 감촉이여 갱생의 의지여
(요즘 빤스는 잘 찢어지지도 않는다.)
오, 삶의 이유 있는 살 만함이여
몸에 꼭 맞는 빤스를 여러 장 가진 내게 부러워할 그 무엇이
있을 것인가,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들의 순종과
더불어 나는 늙어가리라, 는 생각.
(이건 점차 확신이 되어가는 것인데.)
좀처럼 그런 생각을 벗어나지 못한다, 어쩌다 그런
흐뭇한 생각이 나를 거울 앞에 서게 한다.
빤스만 입고-

무엇이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이냐에 대해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한다, 빤스! 라고, 아직은.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 2

무엇이 정말, 당신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이냐고
자꾸자꾸 물어보는 녀석은 한 대 패주고 싶다!
나는 거듭, 단도직입적으로 말한다, 빤스! 라고, 
덧붙여 말하거니와 세상은 빤스 이전과 빤스 이후로 나뉘는데
빤스 이후의 삶이란, 다름아닌 빤스의 로테이션일 뿐!



07. 11. 05.

P.S. 왜 이 시가 뜬금없이 생각났는지 알겠다. <이론-이후-삶>(민음사, 2007)에서 데리다와의 패널토론을 읽던 중이었기 때문이다. '이후(after)'란 말의 뜻에 대해 깊이 따져묻는 내용이다. '이론 이후의 삶'에서 '빤스 이후의 삶'을 떠올렸던 것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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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onta 2007-11-05 0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대 맞지 않으려면 조용히 추천만 하고 가야겠네요. 시 잘봤습니다.^^

로쟈 2007-11-05 17:19   좋아요 0 | URL
팬서비스 차원으로 읽어주시길.^^

소경 2007-11-05 09: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푸흡~ 이런 저도..조용히 추천만. 지옥을 바라볼 용기가 없네요

로쟈 2007-11-05 17:19   좋아요 0 | URL
'빤스 지옥'이요?^^

와넬 2007-11-05 15: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위의 시를 읽다가 생각났는데, 군대에 가면 종종 빤스의 로테이션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친구들이 있었다지요.

로쟈 2007-11-05 17:20   좋아요 0 | URL
삶이 헐벗은 게지요...

이리스 2007-11-05 21: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몸에 꼭 맞는 빤스.. 라는 대목에서 부러워졌다는.. (이유는 묻지 마세요.. 후다닥~)
-.-

로쟈 2007-11-05 22:31   좋아요 0 | URL
'꼭 맞는'이란 표현도 우스개인데, 빤스야 '대충' 다 맞는 거지요(고무줄이나 스판이니까). 그래도 안 맞으신다면 이유야 뻔해보이지만 묻지는 않겠습니다.^^

섬나무 2007-11-05 22: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하된 의욕이 보충되기에 적절한 시어로 보입니다.^^

로쟈 2007-11-06 00:37   좋아요 0 | URL
적절하지만 충분하지는 않네요.^^;

Joule 2007-11-06 14: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빤스 이후의 삶이란, 다름아닌 빤스의 로테이션일 뿐!

마지막에 느낌표는 마음에 좀 안들긴 하지만. 위와 같은 문장을 쓸 수 있는 사람이 저의 이상형입니다. 이제 겨우 절반쯤 산 것 같은데 이상형을 두 명이나 찾았으니 죽기 전에 셋은 채우겠지요. 역시 운수 좋은 삶이에요.

로쟈 2007-11-07 21:19   좋아요 0 | URL
느낌표에 대한 예리한 지적이십니다. 한데, 앞에서 이미 남발했기 때문에 쿨하게 끝낼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메 2007-11-06 15: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빤스'라는 시어를 보니까, 장석남 시인의 '목돈'도 생각나네요. ^^
시 잘 읽었습니다.

로쟈 2007-11-07 21:21   좋아요 0 | URL
목돈으로 빤스를 사는 시던가요?^^

우와한맘 2019-11-07 2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근엄하신 선생님 얼굴을 떠올리며...잘 읽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