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주가 소위 '인문주간'이다. 인문학 위기 담론과 함께 작년에 마련된 프로그램이니까 올해가 두번째 행사인 셈이다. 대부분의 일반인들에게는 아직 생소할 듯한데(나도 참여해본 적이 없으니 생소하지 않다고 해서 사정이 달라지는 건 아니다), 간략한 뉴스보도를 인용하면 이런 것이다.
교육인적자원부와 한국학술진흥재단이 주최하는 '2007 인문주간' 행사가 '열림과 소통의 인문학'이라는 주제로 오늘 서울대에서 개막식과 함께 시작됐습니다. 인문학자들은 개막식에서 문명의 횃불을 밝히는 동력으로서 과학기술과 산업이 중요한 것처럼, 사람다운 삶의 길을 넓혀 가는 지혜와 통찰력 또한 중요하다고 강조하고, 이런 내용의 인문선언을 발표했습니다. 또 물량적 성장 위주의 산업화와 신자유주의적 경쟁 논리가 헤게모니를 장악한 구도 속에서 인간성을 경제적 효율성의 하위 가치로 전락시킨 우리 사회의 위기가 인문학의 위기를 가져왔다고 분석했습니다.
오늘부터 오는 14일까지 부산과 광주를 비롯한 전국 8개 도시에서 계속되는 이번 인문주간 행사 기간 동안 학술제와 대중강좌, 문화체험, 공연, 전시 등 74개의 모두 프로그램이 진행될 예정입니다. 지난해에 이어 두번째로 열리는 이번 인문주간 행사는 인문학에 대한 대중적인 관심과 참여를 끌어 올려 인문학의 부흥을 꾀하자는 취지에서 마련된 것입니다.(YTN뉴스)
'인문학 부흥'을 위해서 나대로 애쓴다고는 생각하지만 인문주간 행사와 관련하여 내가 힘을 보탠 건 전혀 없고 이런저런 일정상 참여할 수 있는 행사도 없을 듯하다. 다만 오늘 지난번에 언급한(http://blog.aladin.co.kr/mramor/1598990) 무크지 <소문>(민음사, 2007)을 받아서 예전에 기고한 글을 다시 한번 읽어보고(오래전 글이라 좀 낯설었다!) 마침 '인문주간'이기도 해서 겸사겸사 옮겨놓기로 했다. 타이틀이 또 '인문학, 맨주먹으로 일어서다!'이기도 하고(내가 쓴 문구지만 좀 낯설게 느껴진다!). 이게 저작권과도 관계가 있으므로 마지막 두 문단은 생략했다. 결말이 궁금하신 분들은 서점에서 살짝 들춰보시길. 다소 의외의 모양새이긴 하나 멀쩡한 글들과 인터뷰 꼭지들(방송인 손석희 교수, 민세원 KTX 여승무원 노조지부장)이 실려 있으므로 사보셔도 좋겠다. 그럼, 로쟈의 '인문학 근심기'를 읽어보도록 한다.
“당신이 신춘문예 당선자든 뭐든 상관없다. 말초신경을 자극할 수 있게만 써라. 이래 가지고 꼴리겠어.” 한 중앙일간지 등단시인이 무작정 상경하여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해 야설(야한 소설)까지 쓰다가 에로배우 겸 사무원인 여직원에게 들었다는 얘기이다. 한데, 이거 야설 쓰는 동네 얘기로만 치부하기엔 뭔가 찜찜하다. 요즘 위기라는 문학 동네나 인문학 동네라고 해서 사정이 다를까, 싶어서이다.
특히 인문학, 요즘 애로가 많다. 잘나가던 인문학, 한때 독서 대중의 중추신경을 자극하여 그이들의 인생 자체를 바꿔 놓기도 했다지만, 이제는 꼬이는 인문학, 인생 망친다는 푸념을 더 자주 듣는다.(“아니, 어쩌다 인문학을 하셨어요?”) 그렇다고 앉아서 당할 수만은 없는지라 사회적 관심과 무관하게 자력 구제에라도 나서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다. 시대가 어떤 시대인가? 세계를 평평하게 해 준다는 디지털 시대. 그 디지털 시대의 인문학은 무엇으로 사는가? 변신을 해야만 한다면, 그 인문학의 변신은 무죄인가? 그걸 좀 따져 보고 싶다.
지난 1990년대 인문학 동네를 도배한 가장 대표적인 구호는 ‘문학에서 문화 연구로’였다. 구닥다리 같은 문학 연구 그만 하고 문화 연구로 관심을 확장하자, 라는 게 취지였다. 한데, 이 문화 연구, 비록 나중에는 새로운 직업군으로서의 문화비평가들을 양산해 내는 일에나 이바지하게 되지만, 태생은 좌파 정치학이다. 대중문화의 숨겨진 이데올로기 따위를 폭로하자는 계몽적 시각이 기본적인 입지점이었기에 말이다. 그러나 시대는 바뀌었다. 문화 연구라는 간판을 단 교양서들이 좀 뜸하게 나오는 듯싶더니 이윽고 쏟아지기 시작한 건 문화산업 관련서들이다. ‘문화 연구에서 문화산업으로’가 2000년대의 새로운 구호가 된 것이다. 그리고 그 ‘문화산업’이라는 명칭이 너무 나이브하다고 하여 간판에 페인트칠을 좀 한 것이 이름하여 ‘문화 콘텐츠’이다.(이거 본토에서는 잘 안 쓰는 말이라고 한다.)
‘문화’라 불리던 것의 간판이 ‘문화 콘텐츠’로 바뀌면 그 이름만 바뀌는 게 아니라 정치적 행보 또한 좌에서 우로 게걸음 치게 된다. 디지털 시대에 오직 ‘돈 되는 문화’, ‘돈 버는 문화’만이 ‘문화 콘텐츠’라는 이름에 걸맞은 자격을 얻는 것이다. 같은 취지의 국가 진흥기관까지 설립되니 이건 아주 노골적이지 싶다. 그러고는 인문학의 ‘비즈니스’에 대해 묻는다. 인문학, 너는 뭐 할래? 제법 존중해 주는 것인가? 글쎄다. “인문학이 뭐 별건가, 인문학 콘텐츠가 인문학 아냐?”라는 계산을 파일 공유 하듯이 나눠 가진다면 그나마 알아주는 게 고맙긴 하다. 중과부적인 주제에 “이건 아니잖아!”라고 딴죽을 걸 수도 없는 노릇이고. 궁여지책의 변명은 이런 거다. “제가 좀 게으르잖아요.”
이런 인문학 스토리를 늘어놓자니 초라해 보이기도 하지만, 이 또한 인문학의 유구한 위엄이기도 하다. ‘니 주제를 알라’(소크라테스)거나 ‘니 운명을 사랑하라’(니체)는 게 인문학적 정언명령이기 때문이다. 그럼, ‘완전소중’은 아니지만 ‘대략만족’ 정도는 된다. 해서, “아무리 개 같은 짓이라도 (인)문학으로 먹고 살자.”라는 결심 정도는 가질 수 있겠지. 그리하여 상경한 우리의 시인, 인터넷에서 ‘야설 작가 모집’ 광고를 보고 찾아갔다. 그러고는 수십 편의 야설을 썼지만 원고료는 한 푼도 못 받았단다. 되레 봉변만 당했단다. 다시 문제는 무엇인가?
문제는 리얼리즘이 아니라 스토리텔링이다. ‘스토리’가 아니라 ‘스토리텔링’. 언제부턴가 인문학 동네에 스토리텔링의 유령이 배회하고 있다. 데이터베이스를 검색해 보니 스토리텔링 관련 논문들이 집중적으로 나오기 시작한 게 2000년 이후이다. 인문학 논문에도 ‘드래건(dragon)’과 ‘소드(sword)’가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인문학의 미래를 여는 화두로 ‘컴퓨터 게임과 문학’이 회자되기 시작하고, ‘디지털 스토리텔링’이 키워드로 부상한다. 이건 대세인가?
아마 그럴지도 모른다. 스토리텔링 전도사들의 두 가지 사례를 들어 보자. 먼저, 바츠 해방 전선에서 혁명에 헌신하고 있는 사용자(user)-전사들: “<리니지2>의 사용자 스토리는 약한 사람들의 정의와 자유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체험의 존엄성을 환기시킨다. 이러한 존엄성은 굴욕과 반대되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을 주눅 들게 하고 타락하게 하는 사회적 구조에 반대하는 행동으로부터 태어난다. (...) 한국 온라인 게임은 사이버 공간에서 진행되는 미래의 인간 커뮤니케이션들이 어떤 윤리를 스스로 만들어 내는가를 보여 주는 인류사의 시금석이다.”(이인화, 『한국형 디지털 스토리텔링』)
한데, 이러한 행동과 윤리가 온라인에서만 가능하다고 믿는다면 오산이다. ‘천재적인 이야기꾼’ 빈 라덴의 경우: “빈 라덴은 공격을 성공시키기 위해 치밀하게 시나리오를 짜고 수십 번, 수백 번에 걸쳐 연습했다. 잘 짜인 대본에 피나는 연습으로 이루어진 공연이 방송을 통해 전 세계에 퍼졌을 때 세계인들은 엄청난 반향을 보였다. 그것이 슬픔이든 경악이든 기쁨이든 간에 어떤 예술이 이만큼의 효과를 낼 수 있을까? 빈 라덴은 스토리텔링의 효과를 철저히 활용한 것이다.”(최혜실, 『문화콘텐츠, 스토리텔링을 만나다』)
하여, 스토리텔링 만세다! 그러니 ‘문화에서 문화 콘텐츠로’라는 구호에 상응하여 ‘스토리에서 스토리텔링으로’라고 목청껏 외쳐 대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럽다. 그런데, 사실 따져 보면, 스토리 이전에 스토리텔링이 먼저 있었다. 어린 시절 우리는 이야기를 읽을 수 있기 전에 먼저 잠자리에서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조금 거창하게 말해서 구술 문화에서 문자 문화로, 다시 디지털 문화로 인류 문명의 패러다임이 변천해 왔다고 할 때, 그 디지털 문화의 환경이 지금 다시 만나는 것은 ‘오래된 미래’로서의 구술 문화이다. 그리하여 과거 문자의 도입이 전래의 ‘이야기’에 혁신적인 변화를 가져왔다면 디지털 기술이라는 새로운 환경은 또 거기에 걸맞은 새로운 이야기 방식, 곧 새로운 스토리텔링을 필요로 하게 된다. 한데 이 ‘새로운 이야기’는 ‘포스트모던은 새로운 중세’(움베르토 에코)라는 진단이 무색하지 않게 어떤 ‘오래된 이야기’와 조우하고 있다는 기시감을 불러일으킨다.
둘러보면 어느 틈엔가 우리는 다시금 그리스․로마의 신화들과 중세적 판타지와 마술적 이야기들의 포로가 된 지 오래다. 우리의 주인공은 해리 포터이고, 우리의 연대기는 나니아 연대기이며, 우리의 이야기는 언제나 모든 난관들을 극복해 나가는 모험 서사이다. 이미 오래전에 러시아 민담학자 프로프가 정리한 바대로 이러한 판타지적 모험 서사에서 인물은 캐릭터로, 행동은 기능으로 환원/축소되지만 그러한 평면성은 3D 입체 공간 속에서 새로운 깊이를 부여받는다. 아니 그런 것으로 가장/가정된다. 하지만, 과연 그런 것일까?
이러한 근심은 디지털 스토리텔링과는 또 다른 스토리텔링에 관해서도 이어진다. ‘리더십 스토리텔링’이라 이름 붙일 만한 이것은 기업 경영에서의 성공 신화와 관련된 스토리텔링이다. 이 스토리텔링은 허구적 상상의 세계나 온라인을 기반으로 하는 게 아니라 실제적인 현실을 무대로 하며, 스토리텔링은 그 무대에서의 퍼포먼스다. 무엇을 위한? 사람들의 마음을 변화시키기 위한. 사람들의 마음을 변화시킬 수 있는, 그리하여 기업의 혁신을 끌어낼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설득력 있고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라는 게 이 리더십 스토리텔링 전도사들이 주장하는 바다. 아무리 정확하고 통찰력 있는 분석이라 하더라도 그 커뮤니케이션 효과 면에 있어서는 감동적인 이야기에 미치지 못한다는 것이다.
거꾸로 스토리텔링은 무미건조한 데이터들을 생생한 현장성과 현재성을 기반으로 한 강력한 이미지들로 전환시키며 이를 통해 설득력에 힘을 실어 준다. 그런데 이때 중요한 것은 스토리가 쉽고 단순하게 전달되어야 한다는 것. 청중에게 불씨만을 제공해야 더 효과적인 까닭에 너무 자세한 디테일(세부사항)을 묘사하는 것은 권장되지 않는다. 그것이 성공적인 스토리텔링의 비결이란다. 그리하여 들려오는 성공학적 정언명령. ‘스토리텔링으로 성공하라!’
“이야기를 좋아하면 가난하게 산다.”라는 이야기가 있었다. 옛날 이야기다. 요즘은 어디서나 이야기 좀 달라고 한다. 이야기가 중요하다고 부추긴다. 나름 ‘이야기의 보고(寶庫)’로서 (인)문학도 덩달아 우쭐거릴 만한가? 하지만 사정은 또 그렇지만도 않다. 구술 문화(전근대)와 디지털 문화(탈근대)의 합종연횡으로 말미암아 도토리 신세가 된 건 문자 문화(근대)이다. 그리고 모험 서사와 성공 신화의 틈바구니 속에서 오리알 신세가 된 건 근대 최고의 발명품 중 하나인 소설이다.
근대 소설이란 무엇인가? 짚신 두 짝이다. 한 짝은 디지털 스토리텔링에서 버려진 리얼리티(현실)이고, 다른 한 짝은 리더십 스토리텔링에서 버려진 디테일(세부 묘사)이다. 그 리얼리티와 디테일의 조합으로 근대 소설은 인간은 무엇으로 사는가에 대해서 질문하고 반성하고 탐구했다. 우리가 ‘재미’로만 사는 것도 ‘돈’으로만 사는 것도 아니라는 걸 보여 주었다. 인간으로서의 위엄에 대해 생각해 보도록 만들었다. 하지만 그런 시대는 이미 지나간 것인가. 스토리텔링이 번창하는 시대에 이야기 문학의 최고 정점으로서의, 하지만 ‘세르반테스의 절하된 유산’(밀란 쿤데라)으로서의 근대 소설이 점차 찬밥 신세가 된다는 건 아이러니컬한 일이다...(하략)
07. 10. 08.
P.S. 사실 나는 '문화콘텐츠'나 '스토리텔링'이 부각되고 있는 작금의 인문학 현황에 대한 소회를 몇 자 적으려고 했을 뿐이고, '인문학, 맨주먹으로 일어서다!'란 '선정적인' 제목을 제안한 건 편집자이다. 그 카피성 문구를 말미에 쓴 건 나지만. 그나저나 이런 '궁상맞은' 이야기가 인문학에 대한 관심을 오히려 꺾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그리하여, 떠오른 카피 하나. "인문학, 음란과 궁상 사이에서 길을 잃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