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 리포베츠키의 <제3의 여성>(아고라, 2007)을 잠시 펼쳐들었는데(이 책에 대해서는 http://blog.aladin.co.kr/mramor/1570797 참조), 1장이 '사랑이란 이름의 수수께끼'이고, 이렇게 시작한다: "사람의 감정과 인간관계, 그리고 행복에 가장 커다란 영향을 미치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사랑'이다. 남녀의 고귀하고 이상적인 것으로 칭송받기 시작한 것은 12세기부터이다."(17쪽) 

물론 12세기 때 발명됐다는 사랑, 혹은 사랑의 모체는 '궁정식 사랑'이고 이에 관해서는 예전에 책들이 나온 게 있다, 고 적으려고 이러저리 검색해보지만 뜨지 않는다. 앙드레 카펠라누스의 <궁정식 사랑기법>(현음사, 1992)만이 생각난다. 문화사를 다룬 책들 중에 더러 이 '사랑의 발명'이란 테마를 다룬 책들이 분명 있을 터이다. 궁정식 사랑의 메카니즘에 대해서는 지젝의 설명(<향락의 전이>)이 가장 자세하며 깊이 있는 게 아닌가 싶은데, 그에 대해서는 예전에 정리해둔 페이퍼들을 참조하시길.

-궁정식 사랑의 마조히즘적 연극(http://blog.aladin.co.kr/mramor/974481)

-궁정식의 '도착적인 새끼 악마'(http://blog.aladin.co.kr/mramor/978175)

-궁정식 사랑의 변종들(http://blog.aladin.co.kr/mramor/986399)

-궁정식 게임에서 '크라잉 게임'으로(http://blog.aladin.co.kr/mramor/986869)

리포베츠키의 이어지는 설명: "사람들이 처음으로 '사랑'이라는 감정에 주목했을 때, 그것은 궁정의 유희일 뿐이었다. 사랑은 왕과 귀족들만 하는 특별한 행위였다. 당시 사랑과 결혼은 별개의 것으로 취급되었고, 성적 충동은 경시되었다. 중세 교회 시대의 사랑은 비범한 재능을 가진 사람들만의 것이었다. 그리고 현대에 들어서 사랑은 비합리적이고 모순적인 열정이 되었고, 사랑이라는 스스로의 근거만으로 정당성을 갖게 되었다."

이 마지막 문장에는 첫번째 미주가 붙어 있는데, 바로 니클라스 루만의 <열정으로서의 사랑>이다. 왜 아직까지 번역되지 않는지 기이하게 생각되는 책 중의 하나(였지만 번역돼 나왔다. <열정으로서의 사랑>(새물결, 2009)). <웃음의 해석학, 행복의 정치학>(한나래, 1994)의 한 장인 '사랑의 사회학: 민족주의와 에로티즘의 융합을 위하여'에서 처음 소개받은 듯하니까 어느새 십수 년 전이다. 앤소니 기든스의 <현대사회의 성, 사랑, 에로티시즘>(새물결, 1996)과 함께 필독서로 제시된 책이었다(기든스 책의 원제는 국역본의 부제인 '친밀성의 구조변동'이다).  

아무튼 이후에 "사랑은 중세의 '완전한 사랑'에서 고전주의의 '고귀한 사랑'으로, 그리고 낭만주의적 사랑을 거쳐 20세기의 자유로운 사랑으로 이어져갔다."(18쪽) 

낭만적 사랑에 대한 정이현의 소설 표제가 되기도 한 재크린 살스비의 <낭만적 사랑과 사회>(민음사, 1985)이다, 정도까지 생각하다가 떠올린 책이 스티븐 컨의 <사랑의 문화사>(말글빛냄, 2006)이다. 쇠뿔은 단 김에 빼는 성격이어서(물론 책에 대해서만이다) 동네의 시립도서관에 가서 대출해왔다. 사랑에 대해서 이만한 두께의 문화사는 드문 경우가 아닌가 싶다. 필리프 아리에스 등이 엮은 <성과 사랑의 역사>(황금가지, 1996)도 두꺼운 책은 아니었다.  

주로 문학작품들에 나타난 사랑을 다룬다는 점에서 나탈리 에니크의 <여성의 상태>(동문선, 1999), 아니 골드만의 <잃어버린 사랑의 꿈>(한국문화사, 1996), 그리고 크리스테바의 <사랑의 역사>(민음사, 1995)를 같이 읽어볼 수 있겠다(크리스테바의 책은 <사랑 이야기들>로도 번역될 수 있다. 불어에서 '이야기'는 '역사'란 뜻을 중의적으로 갖기에). 

다시 리포베츠키로 돌아가면, "그때부터[12세기부터] 이 '사랑'이라는 존재가 사람들의 욕망을 부채질하고, 그들에게 위대한 사랑을 해야 한다는 꿈을 안겨주고, 남자와 여자의 존재방식을 변화시켰다." 그리고 1,000년에 가까운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남자와 여자의 존재방식'을 변화시키는 것은 '사랑 이야기'나 '사랑의 문화사'를 읽는 것이 아니라 사랑에 빠지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책이나 읽도록 하겠다(나는 책을 사랑하니까?)...

07. 10. 07.

P.S. 작년 봄에 출간된 <사랑의 문화사>에 관한 리뷰를 하나 참고로 읽어둔다.  

매일경제(06. 05. 26) 사랑도 진화해왔다 '사랑의 문화사'

첫키스는 남녀관계에서 굉장히 중요한 순간이다. 상대가 어떻게 나올지 모르는 불안한 상태에서 좀더 친밀한 사이로 나아가는 과감한 첫걸음이기 때문이다. 어느 시대나 키스를 할 때는 두려움과 긴장을 느끼지만, 거기에도 역사가 있다. 키스 역사를 살피는 방법 중 하나는 문학작품에 묘사된 장면들을 비교해보는 것이다.

예컨대, 피츠 제럴드의 '천국의 이편'(1920)과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1847)을 보면 두 시대, 즉 빅토리아 시대와 현대의 키스가 전혀 달랐음을 알 수 있다. '천국의 이편'의 연인 아모리와 로잘린드는 만난 지 단 5분 만에 키스에 대해 말하고, 실제로 키스를 한다. 하지만 '폭풍의 언덕'의 히스클리프는 4년이나 기다린 끝에 캐서린과 키스한다. 빅토리아시대에는 키스할 때 눈을 감는 것이 남녀간 예의였다는 점도 재미있다. 히스클리프는 5분에 걸친 격렬한 키스 끝에 캐서린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게 다시 입맞춤을 해주오. 그러나 그 눈은 보게 하지 말아 주오."

미국 문화사학자 스티븐 컨의 저서 '사랑의 문화사'는 예술작품을 통해 보는 사랑과 연애 역사다. 빅토리아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구체적으로는 19세기 중엽부터 20세기 초반까지 수많은 문학과 미술작품을 종횡무진 누비며 사랑의 의미와 변천사를 분석한다. TV 드라마와 통속소설, 실용적 연애 지침서에 이르기까지 흔히 접하는 '사랑'이 이 책에서는 치밀하고 철저한 성찰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이는 추상적인 이론에 파묻힌 건조한 성찰이 아니라, 문학과 미술의 다양한 일차 자료를 곁들여서 생생한 실감을 전해주는 성찰이다.

책은 사랑의 성립과 소멸에 이르는 단계를 '기다림-만남-조우-육화(肉化)-욕망-언어-폭로-입맞춤-젠더-힘-타인들-질투-자아성-청혼-결혼식-섹스-결혼생활-종말' 등 18단계로 나눈다. 그리고 각 단계에 맞는 예술작품들을 예로 들며 시대별 모습을 살핀다. 이 책을 읽는 것은 쉽지 않다. 하이데거의 '본래성-비본래성'과 같은 철학적 개념들이 수시로 등장하고, 700여 쪽에 달하는 분량도 부담스럽다.

미리 숙지해야 할 소설과 그림들도 많다. '폭풍의 언덕' '제인 에어' '주홍글씨' '레 미제라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아들과 연인' '전망 좋은 방' '위대한 개츠비' 등 저자가 분석한 소설은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 정도다. 미술에 대해 말하자면 마네 드가 클림트 뭉크 칸딘스키 달리 피카소 뒤샹 등 근현대 대가들의 대표작 정도는 머리에 담아둬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충분히 매력적이다. 저자가 보여주는 박학과 깊이가, 재미있고 발랄하되 누구나 아는 얘기를 그럴듯하게 포장했을 뿐인 시중 연애지침서와는 차원을 달리 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랑에 대한 의미있는 '내공'을 쌓기 원하는 독자들에게 일독을 권한다.(노현 기자)


댓글(3) 먼댓글(1) 좋아요(2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 낭만적이고 전략적인 사랑의 코드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09-10-22 04:41 
    독일의 거물 사회학자 니클라스 루만의 <열정으로서의 사랑>(새물결, 2009)이 번역되었기에 관련기사를 검색해보다가 작년에 나온 <낭만적이고 전략적인 사랑의 코드>(푸른숲, 2008)에 뒤늦게 주목하게 됐다. 미처 몰랐는데, 저자가 루만의 <열정으로서의 사랑>에 영감을 얻어서 쓴 책이라고("비개인화된 사회에서 개인적 소통을 원활하게 하기 위한 소통 코드로서 사랑을 규정한 니클라스 루만의
 
 
hemiola 2007-10-07 22: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책(사랑의 문화사) 굉장히 재밌어요. ㅎㅎ^^ - 얼마전에 이 블로그를 발견했는데 와우, 대단합니다. 즐겨찾기 했습니다~

로쟈 2007-10-07 22:54   좋아요 0 | URL
<희생>의 한 장면을 이미지로 쓰시네요. 반갑습니다.^^

섬나무 2007-10-08 18: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개인적으론 참으로 시의적절한 유익한 포스트입니다.^^ 하지만 존재방식을 변화시키는 일에 입 닥치고 책이나 읽는 일이 어떻게 유익한 지 이해되는 처지에선 굳이 기대지 않아도 좋겠습니다.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