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에 옮겨놓는 것은 지젝의 <향락의 전이> 제4장 '궁정식 사랑, 혹은 물(物)로서의 여성'(Courtly Love, or Woman as Thing)의 새 번역이다. 제목 자체를 '고상한 사랑, 또는 물로서의 여성'이라고 옮겨놓고 있는 '고상한' 국역본의 오류에 대해서는 더 언급하지 않겠다. 다만, 지젝이 재미있는 통찰들이 사장되는 게 유감스러웠던 차에 또다른 번역문을 인터넷상에 발견하고 반가웠다.  

 

 

  

 

해서 몇달전에 스크랩해놓았었는데, 내용을 편하게 읽을 수 있도록 이미지 버전을 만들어 올려놓도록 한다. 역자들은 <성관계는 없다>(도서출판b, 2005)를 우리말로 옮긴 바 있다. 분량상 일단은 '궁정식 사랑의 마조히즘적 연극'이란 절만을 옮겨놓는다. 다른 대목들은 시간이 허락하는 대로 옮겨놓을 예정이다(본문중의 이미지와 강조, 군말은 모두 나의 것이다). 

궁정식 사랑의 마조히즘적 연극

궁정식 사랑과 관련하여 우리가 피해야 할 첫 번째 함정은 귀부인(the Lady)을 숭고한 대상으로 간주하는 잘못된 관념이다. 대체로 우리는 여기서 영성화(spiritualization)의 과정, 즉 미숙하고 감각적인 갈망에서 고양된 영성적인 소망으로의 이행을 환기한다. 그리하여 귀부인은 우리를 더 높은 종교적 엑스터시의 영역으로 인도하는, 단테의 베아트리체라는 의미에서 일종의 영적인 가이드로 받아들여진다.

이러한 생각과는 대조적으로, 라캉은 그러한 영성화와는 상반되는 일련의 특징들을 강조한다. 사실상, 궁정식 사랑에서의 귀부인은 구체적인 특성을 잃고 있으며 추상적인 이상으로서 언급된다. 그래서 ‘작가들은, 모든 시인들이 마치 같은 사람을 언급하고 있는 듯하다고 기록했다. 이런 시적 장(poetic field)에서 여성적 대상은 모든 실제적인 실체성을 결여하고 있다.’(라캉, <정신분석의 윤리>, p.149) 그러나 귀부인의 이러한 추상적 성격은 영혼의 정화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오히려 그것은 차갑고 거리가 있는 비인간적인 파트너에 어울리는 추상작용을 지시한다. 즉 귀부인은 결코 따뜻하고 동정심 많으며 이해심 있는 동료가 아니다.

"예술에 고유한 승화의 형식을 수단으로 하여, 시적 창작은 내가 오직 끔찍하고 비인간적인 파트너로서 기술할 수 있을 뿐인 대상을 정립하는 것에 있습니다. 귀부인은 그녀의 어떤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미덕, 즉 지혜, 신중함, 혹은 심지어는 능력으로 특징지어지지 않습니다. 그녀가 현명하다고 기술된다면, 그것은 오로지 그녀가 비물질적인 지혜를 구현하고 있거나 그것들을 실행하는 것 이상으로 그것의 기능들을 표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반대로, 자신의 하인에게 할 수 있는 한 제멋대로 시험을 부과합니다."(라캉, <정신분석의 윤리>, p.150) 

그러므로 귀부인에 대한 기사의 관계는, 무의미하고 흉폭하며 불가능하고 자의적이며 변덕스러운 시련을 강요하는 봉건영주의 주권에 대한 농노와 가신의 관계다. 이러한 시련의 비영성적 본질을 정확히 강조하기 위해 라캉은 하인에게 자기 엉덩이를 문자 그대로 핥으라고 요구하는 귀부인에 관한 시를 인용한다. 시는 하인을 그 아래에 대기하게 만든(우리는 중세에 개인위생의 비참한 상태에 대해 알고 있다) 악취에 대한, 그가 그의 임무를 완수할 때 귀부인이 그의 머리에 오줌을 싸리라는 절박한 위협에 관한 시인의 불평으로 이루어져 있다.

따라서 귀부인은 어떠한 종류의 정화된 영성(靈性)으로부터도 가능한 한 멀리 떨어져 있다. 그녀는 우리의 욕구와 욕망과는 비교될 수 없을 만큼 전적으로 다른 근본적인 타자성이라는 의미에서, 비인간적인 파트너로 기능한다. 그런 식으로, 그녀는 또한 일종의 자동기계, 즉 의미 없는 요구 사항들을 마구잡이로 말해오는 하나의 기계이다.

귀부인에게 섬뜩하고 괴물스러운 성격을 부여하는 것은 절대적이고 불가해한 타자성과 순수한 기계의 이러한 일치다. 귀부인은 우리의 ‘동료’가 아닌 큰 타자다. 다시 말해, 그녀는 어떠한 공감의 관계도 나누는 가능하지 않은 그 누구(someone)이다. 이러한 외상적인 타자성은 라캉이 프로이트의 용어 ‘das Ding’을 빌려 물(物; the Thing)이라고 지칭한 바 있는 바로 그것, 즉, ‘항상 그 자리로 돌아오는’, 상징화에 저항하는 견고한 중핵인, 실재(the Real)이다. 귀부인의 이상화, 즉 그녀를 영적인 천상적 이상으로 승격시키는 것은 따라서 엄격히 이차적인 현상으로서 인지되어야 한다: 그것은 그녀의 외상적 차원이 보이지 않도록 만드는 [남성의] 나르시시즘적 투사(projection)이다.

이러한 정확하고 한정된 의미에서, 라캉은 “궁정식 사랑의 이데올로기에서 명확히 찾아낼 수 있는 이상화하는 찬미의 요소는 확실히 논증되었는데, 그것은 근본적으로 그 특성상 나르시시즘적인 것입니다”라고 인정한다. 모든 실제적 실체성을 박탈당한 채로, 귀부인은 주체가 그의 나르시스적 이상을 투사하는 하나의 거울로서 기능한다. 달리 말해 - <예술가의 스튜디오에서>라는 소네트에서 가브리엘 로제티와 그의 귀부인 엘리자베스 시달의 관계를 말하는 크리스티나 로제티의 말로 하자면 - ‘귀부인은 그녀 자신으로서[그녀가 그녀 자신일 때]가 아니라, 그의 꿈을 채움으로써[채울 때] 나타난다.’

그러나 라캉에게 있어 중요한 강조점은 다른 곳에 있다. “거울은 때때로 나르시즘의 기제를 함축하며, 특별히는 우리가 후에 조우하게 될 파괴 혹은 공격성의 차원을 함축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다른 역할을 수행합니다, 한계로서의 역할 말입니다. 그것은 넘어서지지 않는 한계입니다. 그것이 참여하는 유일한 체제는 대상에 대한 접근 불가능성이라는 체제일 뿐입니다.[그것은 오로지 대상에 접근하지 못하게 하는 그런 방식으로써 어떤 한계로서의 자기 역할을 수행합니다]”(라캉, 앞의 책, 151쪽)

따라서 궁정식 사랑에서 어떻게 귀부인이 실제의 여성들과 관계되는가에 대한, 그리고 어떻게 그녀가 살과 피를 가진 여성에 대한 굴욕을 포함하는 남성의 나르시시즘적 투사를 대표하게 되는가에 대한 진부한 문구를 포괄하기 이전에 우리는 다음의 질문에 답변해야 한다. 그러한 텅빈 표면은 어디에서 유래하는가, 투사를 가능하게 하는 공간을 열어젖히는 그 차갑고 중립적인 스크린은 어디에 있는 것인가? 즉 만약에 남성들이 그들의 나르시시즘적 이상을 거울에 투사하려고 한다면, 침묵하는 거울 표면은 이미 거기에 존재할 것이다. 이러한 표면은 일종의 현실의 블랙홀로서, 그것의 너머(Beyond)에 접근할 수 없는 하나의 한계로서 기능한다.

 

궁정식 사랑의 또 다른 핵심적인 특징은 그것이 철저하게 예절과 에티켓의 문제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것은 모든 장벽들을 뛰어넘으며 사회적 규칙으로부터 면제되어 있는 그런 기본적 열정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다. 우리는 엄밀한 허구적 공식을, 즉 한 남성이 그의 애인이 접근할 수 없는 귀부인임을 가장하는 ‘마치~처럼(as~if)'의 사회적 게임을 다루고 있다. 그리고 궁정식 사랑과, 그 사랑과는 조금도 관련이 없은 듯이 보이는 하나의 현상 사이의 연결고리를 확립하는 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이 정확히 이러한 특징이다.

 

 

 

 

즉 지난 세기 중반에 자허 마조흐(Sacher-Masoch)의 문학작품과 삶의 실천에서 처음으로 명확하게 표현된 성도착의 특수한 형태로서 마조히즘이 바로 그것이다. 질 들뢰즈는 마조히즘에 대한 유명한 연구에서, 마조히즘이 사디즘의 단순한 대칭적 역전으로 파악될 수 없음을 논증한다. 사디즘과 그의 희생자는 결코 상보적인 ’사도-마조히스트‘ 커플을 형성하지 않는다. 들뢰즈가 사디즘과 마조히즘의 비대칭성을 증명하기 위해 환기하는 그러한 특징들 중에서 핵심적인 것은 부정(negation)의 양태의 대립이다. 사디즘에서 우리는 직접적인 부정, 폭력적 파괴 및 고문과 조우하는 반면, 마조히즘에서의 부정은 부인의 형태, 즉, 가장의 형태, 현실을 중단시키는 ‘마치 ~처럼’의 형태를 취한다(*마조흐의 주저인 <모피를 입은 비너스> 들뢰즈의 <매저키즘(인간사랑, 1996) 외에도 <모피를 입은 비너스>(과학과사상, 1996)로 번역돼 있다).

이러한 첫 번째 대립에 밀접하게 의존하는 대립은 제도와 계약의 대립이다. 사디즘은 제도의 논리, 즉 희생자를 고문하고 희생자의 무기력한 저항 속에서 쾌락을 얻는 제도적 폭력의 논리를 따른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사디즘은 그 그림자로서 필연적으로 ‘공적인’ 법을 배가시키고 동반하는 외설적인 초자아 이면 속에서 작동한다. 반대로 마조히즘은 희생자의 조처(measure)로 이루어진다. 주인과의 계약을 개시하고, 그녀[주인]에게 그녀가 적절하다고 간주하는 어떠한 방법으로든 그를 능멸할 수 있도록 하는 권한을 부여하고, 주권자인 귀부인의 변덕에 따라 행위할 수밖에 없도록 그 자신을 속박하는 것은 희생자(마조히즘적 관계에서는 하인)인 것이다. 그는 자신의 예속을 상연한다.

사디즘과 반대되는 마조히즘의 더 차별적인 특징은 그것이 내재적으로 연극적이라는 점이다. 폭력은 대부분 가장되고, 그것이 ‘실제적’일 때조차도 폭력은 장면의 구성요소로서, 연극적 상연의 일부분으로서 기능한다. 게다가 폭력은 결코 실행되지도 않고 결론을 맺지도 않는다. 그것은 항상 중단된 제스처의 끝없는 반복으로서 중지된 채로 남겨진다.

우리로 하여금 마조히즘적 태도의 근본적인 역설을 파악할 수 있게 하는 것은 정확히 이러한 부인(disavowal)의 논리다. 다시 말해, 전형적인 마조히즘적 장면은 어떻게 보이는가? 남성-하인은 냉정하고 사무적인 방식으로 여성-주인과 계약 사항들을 설정한다. 그것은 이런 것들이다. 그녀가 그에게 무엇을 하는가, 어떤 장면이 끊임없이 시연(試演)되어야 하는가, 그녀는 무슨 옷을 입는가, 그녀는 실제적이고 육체적인 고문의 명령에서 얼마나 더 나아가야 하는가(그녀는 그를 어떻게 모질게 채찍질하고 정확히 어떤 방식으로 그를 사슬에 묶으며 어디에서 하이힐의 끝으로 그를 찍어 누르는가 등).

그들이 결국 고유한 마조히즘적 게임으로 넘어갈 때, 마조히스트는 끊임없이 일종의 반성적 거리를 유지한다. 그는 결코 실제로 그의 감정에 굴복하거나 그 자신을 게임에 완전히 내어주지 않는다. 게임의 중간에 그는 갑자기 적어도 ‘환영을 파괴함’이 없이 정확한 지시(그 지점을 더 세게 누르시오, 그 운동을 반복하시오...)를 내리는 무대 연출자의 입장을 취할 수 있다.

일단 게임이 끝나면, 마조히스트는 다시 존경스러운 부르주아의 태도를 채택하고 평범하고 사무적으로 주권자 귀부인과 대화하기 시작한다. “당신의 호의에 감사드립니다. 다음 주 같은 시간에 볼 수 있습니까?” 등등.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은 마조히스트의 가장 내밀한 열정의 완전한 자기-외부화(self-externalization)이다. 가장 내면적인 욕망이 계약의 대상이 되고 협상을 구성한다. 마조히즘적인 연극의 본성은 따라서 완전히 ‘비(非)심리학적’이다. 사회적 현실을 중단시키는 초현실적이고 열정적인 마조히즘적인 게임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쉽게 일상적 현실과 조화를 이룬다.

 

그런 이유로, 마조히즘이라는 현상은 라캉이 정신분석은 심리학이 아니라고 여러 번 주장했을 때 그가 염두에 두었던 것을 가장 순수한 형태로 예증한다. 마조히즘은 우리로 하여금 ‘허구’의 질서로서의 상징적 질서라는 역설에 직면하게 한다. 마스크 밑에 감추어져 있는 것에서보다, 우리가 쓰고 있는 마스크에, 우리가 벌이고 있는 게임에, 우리가 복종하고 따르는 ‘허구’ 속에 더 많은 진리가 있다는 역설 말이다. 그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는 그 상연중인 게임 속에서, 마조히스트의 존재의 중핵은 외부화된다.

그리고 폭력의 실재(the Real)는 정확히 마조히스트가 히스테리화될 때 분출한다. 주체가 그 자신의 타자의 향락의 대상-도구의 역할을 거부할 때, 그가 타자의 시선 속에서 대상 a로 환원될 것이라는 예감으로 인해 공포에 떨 때 말이다. 이런 교착상태로부터 탈출하기 위해서, 그는 '행위로의 이동'에, 즉 타인을 겨냥한 부조리한 폭력에 호소한다. 제임스의 <죽음의 취향(Taste for Death)>의 말미쯤에 살인자는 범죄의 환경을 기술하는데, 그의 망설임을 해결하고 그를 행위(살인)로 이끄는 요소가 희생자(폴 베론 경)의 태도임을 보여준다.

 

 

 

 

-그는 죽기를 원했어. 신은 그를 부패시켰고, 그는 그것을 원했어! 그는 실제로 그것을 요구했지. 그는 날 멈추게 하려고 애쓰고 탄원하며 논쟁하고 싸움을 할 수도 있었어. 자비를 구걸할 수 있었지. “안 돼요, 제발, 그러지 마세요, 제발!” 내가 그에게 원했던 것은 그것이 다였어. 오직 그 말 한 마디…… 그는 경멸감으로 날 쳐다보았지. 그때 그는 알았어. 물론 그는 알고 있었어. 그리고 내가 심지어 반쪽짜리 인간인 양 그가 내게 말하지 않았더라면 난 그 짓을 하지 않았겠지.

 

 

 

 

-그는 심지어 놀란 것으로 보이지도 않았지. 그가 공포에 질릴 것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그는 그 일이 일어나는 것을 막아야 할 의무가 있었어…… 그는 마치 “당신이로군. 당신이어야 한다는 건 참 이상하군.”이라고 말하듯이 날 쳐다볼 뿐이었지. 마치 이런 것처럼, 난 선택권이 없어. 도구일 뿐이야. 어리석은. 그러나 난 선택했어. 그리고 그 역시 그랬지. 제길, 그는 날 멈출 수도 있었어. 그는 왜 날 멈추지 않았지?

 

 

 

 

죽기 며칠 전, 폴 베론 경은 상징적 죽음과 유사한 ‘내적인 몰락’을 경험하였다. 그는 장관직을 사퇴하고 모든 ‘인간적 유대’를 절단함으로써, 어떤 상호주체적인 공감의 관계를 배제하는 성인이라는 ‘배설물적’ 위치, 즉 대상 a의 위치를 취하였다. 이런 위치는 살인자가 참을 수 없는 것이었다. 살인자는 $, 즉 분열된 주체로서의 그의 희생자에게 접근했다. 다시 말해 그는 희생자를 죽이기를 원했으나 동시에 희생자로부터 두려움과 저항의 기호를, 살인자가 행위를 완수하지 못하게 막는 기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희생자는 살인자를 (분열된) 주체로 인정함으로써 살인자를 주체화시키게 될 어떠한 기호도 제공하지 않았다. 폴 경의 비저항과 무관심한 분노의 태도는 살인자를 큰 타자의 의지의 도구로 환원함으로써 그를 객체화하고, 그에게 어떠한 선택도 남기지 않았다. 간단히 말해, 살인자가 행위하도록 강제한 것은 희생자를 죽이려고 하는 그의 욕망과 희생자의 죽음충동을 일치시키는 경험이었다.

 

이러한 일치는 히스테리컬한 남성 ‘사디스트’가 여성에 대한 자신의 구타를 정당화하는 방식을 환기시킨다. “그녀는 왜 내가 그 짓을 하게 만드는가? 그녀는 실제로 내가 자기에게 상처를 입히기를 원하고, 내가 그녀를 때려 그녀가 그것을 즐기게끔 나를 몰아간다. 그래서 나는 그녀를 시퍼렇게 멍이 들도록 때릴 것이며, 나를 화나게 하는 것이 실로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그녀에게 가르칠 것이다!”

우리가 여기에서 조우하는 것은 희생자에 대한 야만적인 행위의 오(지각)된 효과가 사후적으로 그 행위를 정당화하게 만드는 일종의 고리(loop)이다. 다시 말해, 나는 그녀를 때리기 시작했는데, 내가 그녀를 완전히 지배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때 그 지점에서, 나는 실제로는 그녀의 노예임을 깨닫는다.- 왜냐하면 그녀가 구타를 원하고 내가 그렇게 하기를 자극했기 때문에 - 나는 실제로 미쳐서 그녀를 때렸다...(*'궁정식의 도착적인 새끼 악마’로 이어질 것이다.)

06. 10.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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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6-10-22 22: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글을 보면서 사드 후작의 작품 <소돔 120일>이 떠오릅니다. 아직 다 읽지 않았지만.

로쟈 2006-10-23 12: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마도 <미덕의 불운>이나 <규방철학>이 재미는 더 있을 거 같네요...

마태우스 2006-10-23 17: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사가 무릎꿇은 그림은 워터하우스 거 아닌가요??

로쟈 2006-10-23 22: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궁정식 사랑의 '이미지'만 보여주려고 했지 출처는 상관이 없었는데요, 찾아보니까 Edmund Blair Leighton란 화가의 'The Accolade'(작위수여식)이란 그림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