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젝의 '궁정식 사랑, 혹은 물(物)로서의 여성'의 마지막 두 절을 옮겨놓는다. 영화 <크라잉 게임> 얘기가 공통적이고, 이 새 번역에서 '<크랑잉 게임>이 동쪽으로 가다'란 마지막 절에는 일부 번역이 누락돼 있기 때문에 그냥 같이 묶어놓는 게 좋을 듯하다. 지젝의 정치론/혁명론에 대한 이야기들을 적어놓기 위해서라도 '궁정식 사랑' 이야기는 빨리 마무리짓는 게 좋겠다. 내가 갖고 있는 초판본 <향락의 전이>의 200-213쪽, 그리고 영어본의 102-109쪽이 이 새 번역에 대응한다(본문 중의 강조는 나의 것이다).

 

 

 

 

궁정식 게임에서 <크라잉 게임>으로

닐 조던의 <크라잉 게임>이 거둔 예상치 못한 특별한 성공의 열쇠는 그것이 궁정식 사랑의 모티프에 가한 결정적인 변주에 있을 것이다. 이야기의 개요를 상기해보자. 포로가 된 영국 흑인 병사를 감시하는 IRA의 단원인 퍼거스는 그 병사와 친해진다. 병사는 사살되기 전에 그에게 런던의 교외에 살고 있는 자기 여자 친구 딜을 찾아가 마지막 안부를 전해달라고 부탁한다. 병사가 죽은 뒤 퍼거스는 IRA에서 탈퇴해  런던으로 이주하고, 병사의 연인이었던 아름다운 흑인 여성을 방문한다. 그는 그녀와 사랑에 빠졌으나 딜은 그에 대해 모호하고 아이러니한 독립적인 거리를 유지한다. 결국 그녀는 그의 접근을 허용하지만 그들이 침대로 가기 전 그녀는 잠깐 나가서 투명한 잠옷을 입고 돌아온다. 퍼거스는 그녀의 몸에 갈망하는 시선을 던지는 한편, 갑자기 그녀의 페니스를 지각한다. ‘그녀’는 복장도착자였던 것이다.

그는 구역질을 하면서 그녀를 잔인하게 밀쳐낸다. 딜은 떨면서 눈물에 젖어 자신은 일이 어떻게 된 것인지(주인공은 그녀에 대한 강박관념에 빠져 있었기에 그들이 늘상 만난 술집이 복장도착증자들의 회합장소였다는 사실을 포함하여 증가가 되는 일련의 세세한 것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가 항상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고 말한다. 이러한 실패한 성적 만남의 장면은 프로이트가 페티시즘의 원초적인 트라우마라고 언급한 장면의 정확한 역전으로 구조화된다. 성기 쪽으로 여성의 벗은 몸을 훑어 내려가는 아이의 시선은 무언가(페니스)를 보기를 기대했던 그곳에서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하고 충격을 받는다. <크라잉 게임>의 경우, 충격은 시선이 아무것도 기대치 않았던 그곳에서 무언가를 발견했을 때 야기된다.     

이러한 고통스러운 폭로 이후에 둘의 관계는 역전된다. 이제 딜은 그녀의 사랑이 불가능한 것임을 알면서도 퍼거스와 열정적인 사랑에 빠져 있다는 것으로 밝혀진다. 그녀는 변덕스럽고 아이러니하며 군주스러운 여인에서, 절망적으로 사랑에 빠져 있는 섬세하고 상처받기 쉬운 소년과 같은 애처로운 인물로 변모한 것이다. 진정한 사랑, 즉 엄밀하게 라캉적인 의미에서 은유로서의 사랑이 솟아오르는 것은 오직 바로 이 지점이다. 우리는 사랑받는 자(eromenos)가 그녀의 손을 뻗어 ‘사랑을 되돌려 줌으로써’ 사랑하는 자(erastes)로 변모하는 숭고한 순간을 목격하는 것이다.

이 순간은 사랑의 ‘기적’을, ‘실재의 대답(answer of the Real)’의 순간을 보여준다. 이것으로써 우리는, 라캉이 주체 그 자체는 실재의 대답이라는 지위를 갖는다고 주장했을 때, 그가 염두에 두었던 것을 포착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말을 바꾸자면, 이러한 전도 이전까지는 사랑받는 자는 [아직까지는 주체가 아니며] 하나의 대상의 지위를 갖는다는 얘기다. 사랑받는 자는 ‘그 안에 있는 그 자신 이상의’ 것 때문에 사랑받는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모른다. 나는 그 질문, 즉 나는 타인에게 하나의 대상으로서 어떤 존재인 걸까? 그는 내 안에서 과연 어떤 (그로 하여금 나를 사랑하게 만드는) 것을 보는 것일까? 라는 질문에 결코 대답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따라서 비대칭성에 직면한다. 주체와 대상 사이의 비대칭성이라는 측면뿐만 아니라, 각각의 사랑하는 이가 사랑받는 이에게서 보는 것과 사랑받는 이 각각이 알고 있는 그 자신의 모습 사이에서 발생하는, 보다 더 근본적인 의미에서의 부조화에 의한 비대칭성 말이다.

우리는 여기서 사랑받는 이의 위치(position)을 정의해야 하는 피할 수 없는 교착상태를 발견한다. 타인은 내 안에서 무언가를 보고, 내게서 그것을 원한다, 그러나 나는 내가 갖고 있지 않은 것을 그에게 줄 수는 없다, 혹은 라캉이 지적한 것처럼, 사랑받는 이가 갖고 있는 것과 사랑하는 이가 결여하고 있는 것 사이에는 아무런 관련도 없다. 사랑받는 이가 이러한 교착을 빠져나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사랑하는 이에게 손을 뻗어 ‘사랑을 되돌려주는’ 일 뿐인데, 말하자면, 은유적인 몸짓으로, 사랑받는 이로서의 그의 지위를 사랑하는 이의 지위로 교체하는 것이다. 이러한 역전은 주체화의 지점을 표시한다. 사랑의 부름에 대답하는 순간, 사랑의 대상이었던 것[사람]이 주체로 전환되는 것이다.

그리고 진정한 사랑은 바로 이런 역전에 의해서만 솟아오른다. 내가 단지 타인 속의 아갈마(agalma)에 의해 매혹당했을 때에는 나는 진정으로 사랑에 빠진 것이 아니다, 그러나 내가 타인을, 즉 사랑의 대상을, 연약하고 [무언가를] 상실한 것, 즉 ‘그것’을 결여하고 있는 것으로 경험할 때, 그 때 나는 진정 사랑에 빠진다. 나의 사랑은 이 상실을 견뎌내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이러한 역전의 핵심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 각별히 주의해야만 한다. 비록 우리가 이제는 사랑하는 자와 사랑받는 자라고 하는 처음의 이중성 대신에 두 명의 사랑하는 주체를 갖게 되었지만, 비대칭은 여전히 존속한다. 왜냐하면, 주체화되면서 그 자신의 결여를 고백했던 것은 바로 대상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이 역전 속에는 무언가 매우 당황스럽고 정말 스캔들스러운 것이 존재하는데, 신비롭고 매혹적이며 잡히지 않는 사랑의 대상이 그 자신의 교착[상대방이 원하는 것을 나는 갖고 있지 않다는 난관]을 폭로하고, 그로써 또 다른 주체의 지위를 획득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호러소설들에서 동일한 역전과 만난다.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에서 가장 숭고한 순간은 괴물이 주체화되는 순간, 즉 (무자비한 살인 기계로 묘사되어 온) 괴물-대상이 일인칭으로 그 자신의 불행한, 동정을 불러일으키는 실존을 드러낼 때가 아닌가? 셸리의 프랑켄슈타인에 근거한 영화들이 이러한 주체화의 몸짓을 회피해 온 것은 매우 징후적이다. 그리고 아마도, 궁정식 사랑에 있어서는, 귀부인이 하인에게 자비(Gnade)를 베풀 때, 오랫동안 고대되어온 최고의 충족 순간은 여인의 항복, 즉 성행위를 갖는 것에 그녀가 동의하는 순간도, 어떤 신비로운 입사식도 아니며, 여인 편에서 보내는 사랑의 사인(sign), 즉, 대상(Object)이 애원하는 이에게 그 자신의 손을 뻗어 대답했다는 그 ‘기적’인 것이다.  

그러면, <크라잉 게임>으로 돌아가 보자. 딜은 이제 퍼거스를 위해 무엇이든 할 준비가 되어 있고, 퍼거스는 점점 더 자신에 대한 그녀의 사랑이 갖는 절대적이고 무조건적인 성격에 감동받고 매료당해 그녀에 대한 혐오를 극복하고 그녀를 지속적으로 위로한다. 마침내 IRA가 그를 다시 테러행위에 연루시키고자 할 때, 심지어 그는 딜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고 그녀가 저지른 살인에 대한 책임을 떠맡는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그녀가 다시 도발적으로 유혹적인 여성으로 옷을 차려입고 그를 방문한 감옥에서 벌어지는데, 면회실의 모든 남자들은 그녀의 외양에 자극받는다. 퍼거스가 사천 일 이상 - 수감일 총계 - 을 견뎌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기꺼이 기다리겠다고 맹세하고 그를 정규적으로 면회한다…

여기서 외부적 장애물 - 어떠한 육체적 접촉도 막는 감옥의 유리 칸막이 - 은 궁정식 사랑에서 대상으로의 접근을 막는 장애물과 정확히 등가를 이룬다. 따라서 그것[유리 칸막이] 때문에, 이 사랑의 내재적인 불가능성에도 불구하고, 즉 그는 철저한 이성애주의자고 그녀는 동성애적 의상도착자이기 때문에 그들의 사랑은 결코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사랑은 절대적이고 무조건적인 성격을 갖게 된다. 출간된 영화 각본의 서론에서 닐 조던은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이야기는 일종의 행복과 더불어 끝난다. 난 일종의 행복, 이라고 말했다. 왜냐하면, 그 행복 안에는 감옥이라고 하는 분리(separation)와 그 외의 더 심원한 분리들이, 즉 인종적, 민족적, 성적 정체성의 분리들이 포함되어 있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저 연인들에게 있어서는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을 구분(division)하는 것들이 그들을 웃을 수 있게 만들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우리의 구분에는 여전히 희망이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웃을 수 있게 하는 구분 - 극복할 수 없는 장벽 - 이란 것은 궁정식 사랑의 가장 간명한 메커니즘이 아니겠는가? 우리 앞에 놓여 있는 것은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불가능한’ 사랑이다. 오로지 입장한 관객들의 응시를 매혹시키기 위해 고안된 가장(假裝)된 광경으로서만 실현될 수 있는 사랑, 실현에 대한 기대가 끝없이 연기(延期)되는 것으로서만 실현될 수 있는 사랑 말이다. 이 사랑이 계급, 종교, 인종의 장벽뿐만 아니라 성적 지향성과 성적 정체성의 장벽이라고 하는 궁극적인 장벽조차도 뛰어넘는 한, 이 사랑은 분명히 절대적인 사랑이다. 여기에 이 영화의 역설이 존재하며, 또 동시에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이 함께 존재하는 것이다. 이성애적 사랑을 남성적 억압의 산물로서 거부하지 않고, 이러한 사랑이 오늘날 절대적이고 무조건적인 성격을 보유할 수 있게 되는 딱 들어맞는 환경을 표현해내고 있다는 점 말이다.    

<크라잉 게임>이 동쪽으로 가다

크라잉 게임에 대한 이런 독해는 곧장 라캉 이론에 대한 표준적인 비난 중 하나를 떠올리게 한다. 여성적 비일관성[모순], 그리고 기타 등등에 대한 그의 모든 이야기들에서, 라캉은 오직 남성적 담론 속에서 나타나거나 거울반사되는 여성에 대해서만, 그리고 여성들에게는 비친화적인 매체에서 그녀들이 왜곡되어 반영되는 모습에 대해서만 다룰 뿐, 여성 그 자체에 대해서는 결코 다루지 않는다는 비난 말이다. 일찍이 프로이트에게도 그랬듯, 라캉에게도 역시 여성 섹슈얼리티는 ‘어두운 대륙’으로 남는다[고 비난자들은 말한다]. 이 비난에 답할 때, 우리는 만약 반영성에 대한 헤겔의 근원적 역설이 어디에선가 유효하다면, 그것이 유효한 곳은 바로 여기라는 것을 단호하게 강조해야만 한다. 여성-그-자체로부터 거리를 두고 물러나서, 부재하는 원인(absent Cause)으로서의 여성이 어떻게 남성적 담론을 뒤트는가에 주목해야만 우리는 ‘여성적 본질’에 훨씬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는 말이다.

말하자면, ‘여성’이란 궁극적으로는 단지 남성적 담론을 뒤틀리게 하고 굴절되게 하는 것을 가리키는 명칭이 아닌가? '여성-그-자체‘라는 유령은 이러한 뒤틂의 능동적 원인이기 보다는, 차라리 그 뒤틂의 물화-물신화된 효과인 것이 아닌가? 이 모든 질문들은 그 부제를 ’<크라잉 게임>이 중국으로 가다‘라고 붙여볼 만한 영화 <마담 버터플라이M. Butterfly>에서 함축적으로 언급된다.[이하 <마담 버터플라이>에 대한  개괄적 설명이 이어지는 4개의 단락(영어본 pp.105-107) 생략]

영화의 고통스러운 마지막 장면은 주인공이 그의 죄를 완전히 인정한다는 것을 드러낸다. 감옥에서 주인공은 속물적이고 소란한 동료 죄수들 앞에서 연극을 상연한다. 그는 나비부인처럼 차려입고(일본 기모노를 입고 얼굴에는 짙게 화장을 하고) 푸치니의 오페라를 발췌하여 그의 이야기를 고쳐말한다. “화창한 날에 우리는 보리라”라는 절정에서 그는 면도칼로 자신의 목을 그어 죽어버린다. 이렇게 여장을 하고 공개적으로 자살하는 남자의 장면은 오래고도 훌륭한 역사가 있다. 히치콕의 <살인Murder>을 언급하는 것으로도 충분한데, 그 영화에서 살인자 핸들 페인이 여자 곡예사의 복장으로 그의 차례가 끝난 후 혼잡한 집에서 목을 매단다.

<살인>에서와 마찬가지로 <마담 버터플라이>에서도 이 행위는 엄밀히 윤리적인 성격을 지닌다. 두 경우 모두 주인공은 그의 사랑의 대상과의, 즉 그의 증환(존재하지 않는 여성, 즉 ‘버터플라이’라는 종합적 형성물)과의 정신병적 동일시를 상연한다. 다시 말해, 그는 대상 선택으로부터 대상과의 직접적인 동일시로 ‘퇴행’한다. 이러한 동일시의 해소되지 않는 곤궁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은 궁극적인 행위로의 이행(passage à l'acte)으로서의 자살이다. 주인공은 자살 행위를 통해 죄의식을, 그리고 대상이 그의 환상의 틀 바깥에서 그에게 주어졌을 때 그 대상에 대한 그의 거부를 보상한다.

물론 구식 반론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예컨대, 궁극적으로, <마담 버터플라이>는 여성과의 진정한 관계가 아니라 여성에 대한 남성 판타지의 희비극적인 혼합물 덩어리를 제공하는 것 아닌가? 영화의 모든 행동들은 남성들 사이에서 일어난다. 플롯의 그로테스크하고도 믿을 수 없는 성격은 우리가 다루고 있는 것이 의상도착자에 대한 동성애적 사랑의 사례라는 사실을 감추면서 동시에 드러내는 것 아닌가? 하는 식의 반론 말이다. 영화는 정말 솔직하지 않으며, 이러한 뻔한 사실을 인정하길 거부한다[즉, 이 영화는 이러저러한 구식 논리로는 다 설명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해설'은 <마담 버터플라이>의 (그리고 <크라잉 게임>의) 진정한 수수께끼를 다루는 데 실패한다. 어떻게 해서 남자 주인공과 여장 남자인 그의 파트너 사이의 희망 없는 사랑이, [남성의] 여성과의 일반적인 관계보다 훨씬 더 ‘본래적으로(authentically)’ 이성애적 사랑의 관념을 [이들 영화에서처럼] 실현할 수 있는가? 라는 수수께끼 말이다. [물론, 이들의 사랑이 이성애적 사랑보다 더 이성애적인 이유는 그 안에 궁정식 사랑의 논리가 깔려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 지젝의 답변일 것이다]

자 그렇다면, 우리는 궁정식 사랑의 모체가 이렇게 보존되고 있는 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이것[궁정식 사랑의 모체가 보존되고 있다는 것]은 동시대 페미니즘이 어떤 교착상태에 빠져 있다는 것의 증거이다. 맞다, 그의 여인에게 봉사하는 남성의 궁정식 이미지는 남성 지배의 현실을 감추는 하나의 가상(semblance)이다. 맞다, 마조히스트의 연극은 남성의 사회적 지배에 의해 짐 지워진 죄의식을 보상하기 위해 고안된 하나의 사적인 연출[미장센]이다. 그리고 맞다, 여성을 숭고한 사랑의 대상으로 격상시키는 것은 그녀를 수동적 재료로, 혹은 남성적 자아-이상의 나르시즘적 투사를 위한 스크린으로 가치 저하시키는 것과 동일한 것이다. 라캉 그 자신, 궁정식 사랑이 성행했던 바로 그 시기에, 남성적 권력 놀음 속에서 교환의 대상들로 존재한 여성의 실제 사회적 지위는 아마도 최하였으리라고 지적한 터다.

그러나 그의 여인을 섬기는 남성의 바로 이러한 외양은 여성에게 그들의 정체성의 환상-실체를 제공하며, 그것의 효과는 실제적인[현실적인] 것이다. 그것은 그들에게 소위 ‘여성성’이라고 하는 것을 구성하는 모든 특질을 제공하며, 여성을 그녀의 여성적 향락(jouissance féminine) 속에서 존재하는 여성으로서가 아니라, 남성과의 (잠재적) 관련 속에서 그녀가 그녀 자신을 참조하는 방식으로서, 즉 그의 욕망의 대상으로서 정의한다는 것이다. 거의 공황에 가까운 (남성들뿐만 아니라 많은 여성들의) 반작용들이 이 환상-구조로부터 일어나, 여성들에게서 그녀들의 바로 그 ‘여성성’을 박탈해버리기를 원하는 페미니즘으로 도약한다. ‘가부장적 지배’에 반대함으로써, 동시에 여성들은 그들 자신의 여성적 정체성의 환상-밑받침을 침식하는 것이다.

문제는, 일단 두 성 간의 관계가 대칭적이며 상호보완적이고 자발적인 협력 혹은 계약으로 간주되면, 궁정식 사랑에서 처음으로 발생한 환상 모체(the fantasy matrix)는 권력 속에 남게 된다는 것이다. 왜? 성적 차이가 상징화를 거부하는 실재적인 것인 한, 성적 관계는 비대칭적인 비-관계로 남도록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 비-관계 안에서 타자는, 즉 주체가 되기 이전의 우리의 파트너는 하나의 물(Thing), 즉 ‘비인간적인 파트너’이다. 그래서, 성적 관계는 순수한 두 주체 간의 대칭적 관계로 옮겨질 수 없다.

동등한 주체들 간의 계약이라는 부르주아적 원칙은 오로지 도착적-마조히즘적-계약의 형태로서만 섹슈얼리티에 적용될 수 있다. 그 계약 속에서, 역설적이게도, 균형 잡힌 계약의 바로 그 형식이 지배관계를 구성하는 데 봉사한다. 소위 대안적인 성적 실천(‘사도 마조히즘적인’ 레즈비언 그리고 게이 커플) 속에서 주인-과-노예 관계가 마조히즘적 연극의 모든 요소들을 포함한 채로 심각하게 재등장한다는 것은 우연이 아닌 것이다. 말을 바꾸면, 우리는 궁정식 사랑이라는 모체를 대체할 만한 어떤 새로운 ‘공식’도 발명해 낼 수가 없다.

그런 까닭에, <크라잉 게임>을 사생활로 도피하는 반정치적인 이야기로 독해하는 것은 잘못이다. 다시 말해, 이 영화를 정치적 파워게임의 잔인함에 환멸을 느껴 개인적 실현, 즉 진정한 실존적 충족의 유일한 영역으로서 성적 사랑을 발견하는 혁명가의 주제의 변종으로 읽는 것은 잘못이다. 이 영화는 정치적으로, 그 내적인 배경으로 작용하는 아일랜드적 대의에 충실하다. 역설은 주인공이 안전한 천국을 발견하기를 원했던 바로 그 사생활의 영역 속에서, 그는 훨씬 더 현기증 나는 혁명을 그의 가장 내밀한 개인적 태도 속에서 완수하도록 강요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크라잉 게임>은 ‘정치적 파워게임으로부터 면제된 진정성의 섬으로서 사생활’ 대 ‘정치적 활동의 여전히 또다른 영역인 섹슈얼리티’라는 통상적인 이데올로기적 딜레마를 피해간다. 그보다 영화는 공적인 정치적 활동과 사적인 성적 도착 사이의 적대적 복합성을(*'복합성'은 '공모성complicity'의 오역이다) , 즉 정치적 혁명의 궁극의 성취로서 성적 혁명을 요구한 사드에게서 작동하고 있는 그 적대를 볼 수 있게 한다. 간단히 말해, <크라잉 게임>의 부제는 “아일랜드인들이여, 당신이 공화주의자가 되기를 원한다면 또다른 노력을 해라!”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06. 10.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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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mmer 2006-10-30 01: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지막 명령문을 곱씹어 보다가 이런 의미가 아닐까 하고 생각이 모아지네요. "공화주의자의 주체로 탄생하기 위해서는 주권의 역설- 인민에 기반을 두면서도 거기서 벗어나려고 하는-을 '주체와 대상'이라는 '가면 놀이'라는 역할극이 수시로 상연되어야 하는 것은 아닌지, 그것도 연애라는 무대 위에서 말이죠..."

로쟈 2006-10-30 21: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시 보니까 마지막 문단에는 오역이 포함돼 있습니다(번역을 제가 다 확인해보지는 않았습니다). 마지막 멘트를 저는 좀더 단순하게 생각하는데, 정치적 혁명이 다가 아니다. 성적 혁명이 더 필요하다(yet another effort), 라는 것이죠. "Irishmen, yet another effort, if you want to become republican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