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제부터 단연 화제가 되고 있는 뉴스는 미국 버지니아공대에서 일어난 총기 난사사건이다. 볌인이 재미교포 한국인 학생이어서 특히나 충격을 주는데, 그가 언론사에 보낸 '선언문'과 사진, 동영상 등이 오늘(19일) 공개됨으로써 사건의 윤곽이 얼마간 밝혀졌다. 관련기사 두어 가지를 옮겨놓는다.
재작년 6월 전방 GP에서의 총기난사 사건에 대한 소감을 적으면서 '엘리펀트에 대하여'란 제목을 단 적이 있다(http://www.aladin.co.kr/blog/mylibrary/wmypaper.aspx?PaperId=696609). 물론 그때의 '엘리펀트'란 말은 지난 1999년 미국 콜럼바인고교의 총기 난사사건을 다룬 구스 반 산트의 영화 <엘리펀트>(2003)에서 가져온 것이었다. 같은 사건을 다룬 마이클 무어의 <볼링 포 콜럼바인>과 이 영화를 함께 묶어서 이번 사건의 의미를 조명하고 있는 프레시안의 기사를 먼저 옮겨놓았는데, (그 기사보다 나중에 밝혀진 것이지만) 실제 범인 조승희의 '선언문'에서 콜럼바인 사건의 두 주모자 에릭과 딜란이 '순교자'처럼 언급되고 있다(그 자신은 스스로를 '예수 그리스도'에 비유했다). 그러니 이 두 사건은 동일한 맥락 속에 있는 것이다.
예단이긴 했지만 그래서 '버지니아 엘리펀트'이다. 이미 너무 많은 말들과 분석들이 이 사건과 관련하에 제시된지라 따로 덧붙일 말은 없다(한가지, 이번 사건을 두고 "9.11 이후의 가장 통쾌한 사건'이라며 오버하는 반응은 한국인으로서 사죄해야 한다는 반응과 마찬가지로 꼴사납고 역겹다. 나 자신 '네티즌'으로 활동하고 있지만 인터넷과 지적/인격적 성숙은 무관하다는 생각을 더욱 굳히게 된다. 내가 존경하는 이들이 대부분 인터넷을 가까이 하지 않는다는 점을 다시금 상기하게 된다).

프레시안(07. 04. 18) 콜럼바인, 버지니아텍을 미리 보여주다
콜럼바인고교 총기난사사건이 일어난지 8년만에, 이번에는 미국 역사상 최악의 교내 총기사건이라 불릴만한 사건이 버지니아공대에서 일어났다. 현재까지 확인된 사망자 수만 33명. 게다가 범인은 한국계로 밝혀졌다. 도대체 이러한 비극은 왜 생겨나는 것일까? 어떻게 총기를 난사해 그 많은 사람을 죽일 행동을 한 것인가? 왜 다른 나라 총기 소유 허가국에서는 일어나지 않는 일이 미국에선 그토록 빈번한 것일까? 혹은, 20세 이상의 남자 성인이라면 누구나 군대에 가 사격술을 훈련 받아야 하고 비공식적인 밀수 총기가 퍼져있다고 하는 한국에서는 일어나지 않는 일이 미국에서는 왜 일어나는 것일까?
이런 질문들에 대해 100% 만족할 만한 답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 수긍할 만한 답변을 주는 영화 두 편을 떠올릴 수 있다. 하나는 마이클 무어 감독의 <볼링 포 콜럼바인>이고, 또 하나는 구스 반 산트의 <엘리펀트>이다. 두 영화 모두 둘 다 1999년 콜럼바인고교 총기난사 사건을 모티프로 삼고 있는 영화들로, 다큐멘터리인 <볼링 포 콜럼바인>은 콜럼바인고교 총기난사 사건을 계기로 총기난사 사건을 '부추기는' 미국의 사회 시스템을 분석하고, 극영화인 <엘리펀트>는 외롭고 상처입은 두 10대 소년의 일상을 건조하게 응시한다.

<엘리펀트>에서 구스 반 산트 감독은 분노와 외로움, 상처로 가득찬 두 소년의 황량한 내면과, 표면적으로는 남들과 별 다를 것 없는 이들의 일상을 그려낸다. 우리는 여전히, <엘리펀트>에서 그 평화롭고 따사롭던 오후에 두 주인공이 친구들을 향해 총질을 시작하는 명시적이고 논리적인 이유를 발견하지는 못한다. 그러나 현대를 살아가는 상처입은 사람들이 모두 살인을 저지르는 것도 아니며, 더욱이 자신과 아무 상관없는 사람들에게 무차별적으로 총을 쏴대지는 않는다.
마이클 무어가 <볼링 포 콜럼바인>에서 신랄하게 비판했듯, 미국은 개인의 총기 소유를 법적으로 보장하면서도 이에 대한 관리와 규제에는 매우 허술하며 총기 소지가 매우 쉽다. 물론 마이클 무어가 조롱했던 것처럼 은행에 계좌만 개설하면 사은품으로 총기를 주는 수준은 아니지만(이것은 총기 구입이 그만큼 쉽다는 마이클 무어식 비아냥일 뿐, 사실은 아니다.), 버지니아공대 사건의 범인 역시 학교 근처 총기상에서 신분증 세 개를 보이는 것만으로 아주 쉽게 범행 무기를 구입했다고 한다. 사용 용도가 무엇인지 설명하거나 신고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단순히 총기를 쉽게 구할 수 있다고 해서 그만큼 총기 난사 사건도 빈번히 일어나는 것일까? 역시 총기 소지가 법적으로 보장된 캐나다에서 연간 일어나는 총기난사 사건은 미국에 비하면 훨씬 적다. 마이클 무어는 <볼링 포 콜럼바인>에서, 미국이라는 국가 자체가 공포를 확대재생산하면서 공격이 최선의 방어임을 설파하는 시스템이라고 분석한다. 빈부의 격차가 크고 양극화된 사회 현상과 이로 인한 사회적 불만과 불안 등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이, 약자와 가난한 자에 대한 복지와 이로 인한 최소한의 생활 안정이 아니라, 끊임없이 미국 외부의 적을 규정하고 적에 대한 공포와 적개심을 재생산함으로써 사회적 불만을 무마하는 것, 그리하여 미국이라는 사회를 유지하는 동력 자체를 공포와 분노에 두고 있다는 것, 이른바 '공포로 통치하는 사회'라는 사실이 이러한 비극을 계속 발생케 한다는 것이다(*'공포로 통치하는 사회'가 미국에 국한되는 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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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열되고 파편화된 세상이 문제
만약 이번 사건이 영화의 한 장면이었다면 우리는 주인공의 행동에 대한 심리적 개연성이 없다며 비판할 것이고, 혹자들은 하필 범인을 한국인으로 상정한 것에 대해 감독이 혹시 인종차별주의자인지 의심할 수도 있을 것이다. 대체로 우리는 "이것은 영화에 불과하다"며, 더욱이 "바다 건너 먼 나라를 배경으로 한 이야기"라며 안심하고 편안한 마음으로 잊어버릴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인간이란 이성과 논리에 근거에 행동하려 하고, 그런 끔찍한 일을 저지르는 사람은 우리와는 다른 매우 특수한 사람, 우리가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라 믿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인간 고유의 의지가 아니라 악마가 들려서, 혹은 귀신이 씌여서,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어서라는 등등 수많은 바깥의 이유들을 찾고 싶어한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내 옆에 있는 사람이 실제로 어떤 사람일지 모르며 내 자신조차 어떤 일을 저지를지 모른다는 불신과 공포, 불안에 휩싸이기 때문이다(*기자는 '우리 모두가 조승희이다'라는 결론을 암시하려는 듯한데, 그건 과잉 일반화이며 희생자들에 대한 모욕이 될 수 있다. 가해자-피해자의 관계를 그저 우연적인 것으로 만들 것이기 때문이다. '조승희도 인간이다'에 나는 동의하지만 '모든 인간/한국인은 조승희다'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현실에서 실제로 사건이 일어났을 때 우리는 좀더 공포를 느끼지만 그것이 '총기 난사' 사건인 경우, 총기 소지가 법적으로 허용되는 남의 나라 현실이라 믿으며 애써 무관심한 척할 수도 있다. 사실 총기가 엄격히 금지된 한국사회에 속한 사람들에게 미국에서 빈번히 일어나는 총기난사 사건은 낯설고 두려운, 이해하기 힘든 사건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번 버지니아공대에서 일어난 총기난사 사건은 범인이 한국계로 밝혀지고 범행동기가 (누구나 평생 무수히 겪는) 여자친구와의 불화 때문인 듯하다는 잠정 수사결과가 전해지면서, 우리는 더 이상 '남의 나라 총기난사 사고'에 무관심할 수만은 없게 되었다.
누구나 살아가면서 한두 번씩은 자신이 저지를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일탈의 경험을 하고, 이에 대한 죄책감 한두 가지씩을 안고 살아간다. 그러나 이러한 일탈이 누구나, 그리고 언제나 '범죄'의 수준으로까지 발전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확실한 사실들은 분명히 있다. 이런 비극은 분명 사람이 저지르는 것이고, 그 사람은 그가 속한 사회 시스템의 영향을 받는다는 것. 우리는 과거 그 어느 때보다도 풍요로운 세상에 살고 있지만, 이러한 풍요는 모두에게 주어진 것도 아니며, 물질의 풍요로움이 마음의 풍요로움으로 이어지지도 않는다.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외롭고 힘든, 분절되고 파편화된 세상, 각종 통신수단은 눈부시게 발달했지만 여전히 (혹은 오히려 더욱 심화된) 소통의 어려움을 겪는 세상을 견디어나가고 있다.
이 고통을 타인에 대한 공포와 적개심 탓으로 돌릴 때, 그리고 타인이 더 이상 사람이 아니라 나와 상관없는 '사물'로 여겨질 때, 그 사회는 위험 수위로 가까이 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이런 사건에 정말로 공포를 느끼는 이유는, 한국사회를 포함해 전세계 거의 모든 사회가 이미 이런 위험 수위에 다달은 현대사회라는 점을 우리가 알고있기 때문이다(*이번 사건의 경우에 범인은 '외톨이'로서 갖는 사회적 적개심을 여러 차례 징후적으로 드러낸 바 있다. 만사지탄이지만 주변에서 그러한 '신호들'에 좀더 적극적으로 대응했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런 유사한 '신호들'에도 불구하고 가까운 친구의 자살을 막지 못했던 기억이 겹쳐진다).
그런 상황에서 오로지 생명을 해할 목적으로 만들어진 무기가 주변에 널려 있어 누구나 쉽게 손에 넣을 수 있다면, 이런 비극은 몇번이고 반복해서 발생할 수 있다(*짐작에 한국에서 총기 소지가 허영된다면 미국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빈번하게 '총기난사사건'과 접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우리가 이런 종류의 비극을 보며 지나치게 범인을 동정할 필요도, 그럼에도 그저 정신나간 특정인의 소행으로만 돌리며 나와 전혀 상관없는 사건으로 치부하고 무관심할 수 없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말도 제대로 통하지 않는 먼 나라에서 벌어진 일일지라도 우리가 희생자들을 추모하고 유가족들에게 위로를 전할 수밖에 없는 이유 역시 마찬가지다.(김숙현 기자)

경향신문(07. 04. 20) 고립된 자아·폭력문화가 빚은 ‘저주의 복수극’
버지니아 공대 총기 난사 사건이 새로운 각도에서 주목 받고 있다. 조승희씨(23)가 NBC에 보낸 우편물에서 ‘콜롬바인 총기난사’ 등 과거 참사들과의 유사성이나 영화·게임 등 대중문화의 폭력적 요소들이 곳곳에서 감지되면서다. 미국 언론들은 조씨가 동영상·사진·텍스트 등 다양한 미디어를 동원한 점에서 ‘multimedia manifesto(복합미디어 선언문)’로 이름짓기도 했다. 고립된 자아와 폭력문화가 결합한 ‘병리(病理)적’ 모방범죄일 가능성이 제기되는 대목이다. 이에 따라 조씨의 ‘선언문’과 행적에서 드러난 4가지 모방성을 살펴봤다.

◇ 유나보머 테러…범죄 합리화 ‘우편물 발송’유사
조씨의 범행수법이 ‘유나보머(Unabomber) 테러’로 불리는 연쇄 편지폭탄 테러범 시어더 카진스키와 흡사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하버드대 출신의 수학 천재로 버클리대 교수였던 카진스키는 1978년부터 1995년까지 16차례에 걸친 소포폭탄 테러로 3명을 숨지게 하고 23명에게 부상을 입혀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문명혐오주의자인 그는 ‘유나보머 선언문’으로 명명된 ‘산업 사회와 미래’라는 제목의 편지로 자신의 범행이 현대기술 문명의 위험성을 경고하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주로 과학기술과 관련 있는 대학(University)과 항공사(Airline)에 폭탄을 보내 ‘유나보머’란 별명이 붙었다(*국내에는 '유나바머'라고 소개됐다).
조씨가 ‘선언문’에서 현대사회의 ‘물질만능’과 ‘탐욕’, ‘쾌락주의’에 대한 징벌을 범행의 명분으로 삼았다. 조씨는 “너는 벤츠로도 부족했지. 속물 덩어리 너는 금목걸이로도 만족하지 못했어. 보드카, 코냑도 충분하지 않았고 그 모든 향락에도 너는 만족하지 않았어. 이 모든 것이 너의 쾌락의 요구를 충족시키지 못했던 거야”라고 주장했다. 따라서 ‘너(You)’는 미국 사회를 지칭한 것으로 보는 해석이 많다. 조씨가 범행 전 언론 매체에 범행의 명분을 주장하는 ‘선언문’ 형태의 우편물을 보낸 수법도 유사하다. 그 점에서 전문가들은 “조씨가 오랫동안 고립된 채로 생활하면서 세상을 자신만의 좁은 시각에서 보는 편집증이 있었을 것”이라고 진단했다.(김광호기자)

◇ 영화 ‘올드보이’…증오찬 표정·망치 사진 흡사
‘복수’를 모티브로 한 한국영화 ‘올드 보이’ 장면들과의 유사성에 주목하는 시각도 있다. 뉴욕타임스는 18일 ‘조씨가 NBC에 보낸 사진 중 가장 불가해한 사진의 영감은 칸영화제 대상을 받은 한국영화에서 온 것 같다’고 전했다. 바로 조씨가 ‘망치’를 들고 위협하는 사진이다. 실제 조씨의 사진과 영화 속 주인공 대수(영화배우 최민식)의 사진은 망치를 치켜든 손의 위치와 방향, 팔의 각도, 증오가 가득 찬 표정 등이 놀랍도록 닮았다. 뉴욕타임스는 “두 사진의 포즈는 유사하고, 영화의 구성(plot)은 더 살펴볼 가치가 있을 만큼 음울하다”고 평가했다.
영화는 평범한 회사원 대수가 납치를 당해 15년간 감금당한 뒤 풀려나, 감금 당한 이유를 더듬어가면서 복수하는 과정을 담고 있다. 영화의 마지막은 조씨가 권총 자살을 암시한 사진처럼 영화의 또 다른 주인공이 머리 관자놀이 부분에 권총을 쏘아 자살을 하는 것으로 끝난다. 뉴욕타임스는 평론가 마놀라 다기스의 말을 인용, “영화의 사망자 수와 가학적 폭력은 고급 예술과 저급 예술의 차이를 분간하지도 원하지도 않는 컬트 영화광들에게 어필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또 NBC는 조씨가 총을 겨누는 장면이 영화 ‘택시 드라이버’의 로버트 드니로를 연상시킨다고 보도하는 등 미국 언론들은 조씨의 사진들이 대부분 각종 영화 장면을 모방한 것으로 분석했다. ‘택시 드라이버’는 외롭고 소외된 주인공이 결국 분노를 폭발시킨다는 내용이다(*조승희는 범행 몇 주 전부터 머리를 짧게 깎고 근육을 단련했다고 한다). 버지니아 공대 폴 해릴 교수는 두 장면의 유사성을 통해 조씨가 32명을 죽이는 데까지 이르도록 한 것인지에 대해 관심을 갖기를 바랐다고 뉴욕타임스는 전했다.(김광호기자)

◇ 콜롬바인 총기사건…범행 당일 행동 태연
조씨는 ‘선언문’에서 1999년 4월 발생한 콜롬바인 고교 총기사건의 주범인 에릭 해리스와 딜란 클레볼드를 ‘순교자(martyr)’로 표현했다. 바로 오는 21일이 이 사건의 8주기 추모일이기도 하다. 그 점에서 조씨의 범행은 계획적인 것일 가능성이 커 보인다. 미국 콜로라도주 콜롬바인 고교에서 일어난 사건 당시 평범한 고교생이던 에릭과 딜란은 도서관에서 900여 발의 총알을 난사, 학생 12명과 교사 1명을 죽이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특별한 이유는 찾을 수 없었다. 조씨가 사건 당일 아침 평소처럼 평온한 일상을 시작한 것처럼 에릭과 딜란도 사건 당일 오전 태연하게 볼링 수업을 듣기도 했다.
영화 ‘화씨 9·11’의 감독 마이클 무어는 2002년 이 점에 착안, 다큐멘터리 영화 ‘볼링 포 콜롬바인’을 만들었다. 사건의 뿌리가 미국 정부의 느슨한 총기 규제에 있다는 점을 정면 비판하면서, 공포를 조장해 권력을 유지하는 미국 정치의 폭력성을 고발했다. 동영상 곳곳에서 조씨가 “너는 내 가슴을 짓밟고 영혼을 능욕했으며, 양심을 불로 지졌다”고 알 수 없는 폭력과 모욕, 고통을 호소한 대목과 묘하게 중첩된다. 따라서 조씨는 에릭과 딜란에 대한 언급을 통해 이들에 대한 정서적 공감을 표시한 것으로 풀이된다. 물론 영화의 프리즘을 통해 걸러진 관점에서다. 실제 조씨는 ‘선언문’에서 “나는 약자들과 스스로를 방어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처럼 죽는다”고 스스로를 순교자로 묘사했다.(김광호기자)

◇ 비디어 FPS게임…가상공간의 사격게임 하듯이 몰입
권총 두 자루를 휴대하고 눈에 띄는 대로 상대방을 살해한 조승희씨의 범행 방식은 국내·외에서 큰 인기를 끌고 있는 FPS게임(First Point Shooting, 1인칭 사격 게임)과 유사하다. FPS게임이란 게이머가 주인공이 되어 화면에 나타나는 적을 제거하는 사격 게임의 일종으로 1인칭 시점으로 게임이 진행되기 때문에 마치 자신이 가상공간 안에서 직접 전투를 벌이는 듯한 몰입감이 특징이다.
미 경찰은 16일 오전 7시15분쯤 기숙사에서 두 사람을 살해한 조씨가 600여m 떨어진 노리스 홀(공학부 건물)에서 2차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보고 있다. 오전 9시46분쯤 노리스 홀에 들어선 조씨는 206호 강의실을 시작으로 복도와 강의실을 휘저으며 30여분동안 동안 엄청난 양의 탄약을 쏟아부으며 기계적으로 발포했다. 목격자들은 조씨가 “탄창이 주렁주렁 매달린 조끼를 입고 있었으며 시종일관 침착하게 범행을 저질렀다”고 당시 상황을 전했다.
이번 사건이 미로처럼 굽어진 복도와 복잡한 방들을 지나 상대방을 ‘섬멸’하는 것이 목적인 FPS게임과 닮았다는 지적이 나오는 것도 바로 이 부분이다. 장갑을 끼고 쉴 새 없이 탄창을 갈아끼워가며 권총을 난사하는 이른바 ‘쌍권총 모드(mode)’다. 공교롭게도 조씨가 범행에 사용한 글록 9㎜ 권총은 FPS게임에서 소(小)화기로 큰 인기를 끌고 있는 모델이기도 하다. 범행 당일 NBC사에 보내진 조씨의 영상과 사진이 공개된 뒤 인터넷에서는 ‘유명 FPS게임의 테러범 복장과 유사하다’는 네티즌들의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다.(이호준기자)
07. 04. 18-19.
P.S. 참고로, 조승희씨의 지도교수는 “그는 내게 너무 외롭다고 했다. 최선을 다했지만 안타깝게도 그를 막을 수 없었다.”고 증언한다(http://news.hankooki.com/lpage/world/200704/h2007041918355222470.htm). 그리고 한 정신과 의사의 분석은 http://www.ohmynews.com/articleview/article_view.asp?at_code=4053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