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자 한겨레에 저명한 번역자 김석희씨의 이야기가 기획기사로 실렸기에 옮겨놓는다. 비록 소설가로서는 문명을 드높이지 못했지만 일급의 번역자로서 그의 능력과 태도는 귀감이 될 만하다. 번역에 너무도 많은 걸 빚지고 또 의지하고 있는 우리의 현실에서 (그런 현실과는 전혀 걸맞지 않게) 한편으론 번역을 홀대하는 문화적 풍토가 바뀌어야 한다는 문제의식은 (여러 차례 강조한 바 있지만) 다시금 공유하도록 한다. 

한겨레(07. 04. 13) “번역이 살아야 학문도 출판도 살지요”

소설가 가와바타 야스나리(1899~1972)가 1968년 <설국>으로 노벨문학상을 받았을 때, 많은 사람들이 이 일본 소설을 영어로 옮긴 미국 번역가 에드워드 사이덴스티커의 공로에 주목했다. 그의 번역을 놓고 이러저러한 말들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의 번역문이 <설국>에 묘사된 탐미주의적이고 허무주의적인 풍경을 탁월하게 형상화했다는 데는 이견이 없었다. 일본어 원문보다 더 낫다는 평판을 얻은 영어판 <설국>이 아니었더라면, 서구인들이 가와바타의 작품 세계를 제대로 들여다보기 어려웠을 것이다. 번역은 일종의 문화 간 통로였던 것이다.

한국 출판 시장에서도 번역은 통로 구실을 한다. 그러나 더 정확히 말하면, 통로라기보다는 병목에 가깝다. 단행본 출판물의 4분의 1이 번역서이고, 자비 출판이 아닌 시장을 상대로 한 출판물만 따로 놓고 보면 번역서의 비율은 이보다 훨씬 더 높다. 번역서의 비중이 이렇게 큰데도, 역량 있는 번역 전문가는 손가락에 꼽을 정도로 적다. 문장의 표층뿐만 아니라 심층까지 책임지는 번역가가 드물다보니, 마음 놓고 즐길 번역서를 찾기도 쉽지 않다. 오문으로 점철돼 무슨 뜻인지 알아먹을 수 없는 책들이 겉포장만 그럴 듯하게 꾸며져 독자를 유혹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번역서는 쏟아져 나오는데 믿을 만한 번역서는 찾기 어려운 것, 번역이 통로가 아니라 병목인 이유다.

김석희(56)씨는 이런 황량한 번역 풍토에서 자기 세계의 꽃을 피운 드문 번역가 가운데 한 사람이다. 통상의 번역가가 영어면 영어, 일본어면 일본어, 어느 한 언어를 번역 품목으로 삼고 있는 것과는 달리 그는 영어·일본어·프랑스어에 두루 능통하다. 지금까지 번역한 책이 150종, 200권 남짓 되는데, 그 가운데 50%가 일본어 책, 30%가 영어 책, 나머지 20% 가량이 프랑스어 책이다. “서울대 불문과를 졸업하고 국문과에 편입한 뒤 대학원에서 한국 근·현대시를 공부했는데, 근·현대시를 연구하려면 일본어로 된 1차자료를 읽어야 한다. 일본어를 그때 익혔다.” 그의 일본어 번역 실력은 <로마인 이야기>(전 15권)로 정평이 나 있다. 시오노가 직접 한국인 독자에게 이야기하듯 생생하고 자연스런 문장은 <로마인 이야기>가 인기를 얻은 또 하나의 이유다.

그는 속전속결의 번역가로도 유명하다. 웬만한 두께의 책도 잡았다 하면 한 달을 넘기지 않는다. “<로마인 이야기> 마지막 권을 받은 게 지난해 12월 17일이었는데, 번역을 끝내고 원고를 출판사에 넘긴 게 1월 7일이었다. 200자 원고지로 쳐 1800장을 번역하는 데 딱 20일 걸린 셈이다.” 번역가 정영목씨는 “번역이란 머리나 손으로 하는 게 아니라 엉덩이로 하는 것”이라고 말한 바 있는데, 김석희씨도 그 말에 적극적으로 동의하는 사람이다. 그는 20년 가까이 ‘8·8·8’의 생활 수칙을 지키고 있다. 하루를 셋으로 나눠 8시간은 잠을 자고 8시간은 쉬고 8시간은 책상 앞에 앉아 번역 일을 한다. “번역이란 게 자기관리 못하면 무너지는 일이다. 나에게 번역은 직업이다. 8시간 노동제를 어떻게든 지키려 한다.”(*이런 경우를 '프로'라고 할 터이다.) 

출판 편집자들이 하는 일 가운데 가장 큰 것이 번역문을 매끄럽게 다듬은 일이다. 비문을 바로잡고 거친 문장을 솔질하고 앞뒤가 앉맞는 문장을 가려내는 것이 편집자들이 늘상 하는 일이다. 이 점에서 보면 김석희씨는 예외적 존재다. 편집자들 사이에서 그는 완성도 높은 문장을 구사하는 사람으로 이름이 높다. 번역 원고를 그대로 조판해 책으로 만들어도 문제 없을 만큼 그의 문장은 빈틈이 없다. 편집자들이 그의 문장에 손을 대는 건 일종의 금기다. “바른 문장을 쓰고 맞춤법, 외래어 표기법을 지키는 건 글쓰는 사람의 기본 의무다. 그걸 편집자들에게 맡겨선 안 된다.”

서양사학자 박상익 우석대 교수는 좋은 번역을 이루는 성분을 “외국어 실력 30%, 해당 분야 지식 30%, 그리고 한국어 실력 40%”라고 이야기하는데, 김석희씨가 그런 경우다. 그의 번역문이 잘 읽히는 것은 그가 한국어로 능숙하게 글을 쓰기 때문이다. 전문 번역가로 나서기 전에도 그리고 그 후로도 한 동안 그의 꿈은 소설가였다(*내게도 '소설가 김석희'가 먼저였고, '번역'은 그의 부업으로 알았다. 이젠 거의 '전업 번역가'라 해야겠지만. 초창기 번역으로 기억에 남는 건 데즈몬드 모리스의 <털없는 원숭이>(정신세계사, 1991). 김석희씨는 모리스의 자서전도 우리말로 옮겼다).

문학청년 시절 시와 소설을 썼고, 1988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소설 부문에 당선돼 등단하기도 했다. 소설 쓰기로 다진 한국어 문장 실력을 번역에서 펼쳐 보이고 있는 것이다. “번역을 하다보면 원서의 저자가 힘주어, 공들여 쓴 단락을 만나는 경우가 많다. 이럴 땐 문장을 뛰쫓아가는 식으로 번역하지 않고, 전체 문단을 숙지한 뒤 우리 말로 다시 써본다. 그러면 문장이 훨씬 명확하고 유려해진다.”

1급 번역가인 그가 볼 때 한국은 번역을 홀대하는 나라다. “가장 문제가 큰 쪽은 학계다. 전공 분야의 고전을 번역해도 연구업적으로 대접을 안 해준다. 짜깁기 논문 하나 쓰는 게 더 점수가 높다. 그러다 보니 비전공자가 고전을 번역해 망쳐놓는 경우가 적지 않고, 그런 허술한 번역서를 읽느니 차라리 원서를 읽겠다고 낑낑거리는 게 현실이다. 먼저 학계에서 용기를 내야 한다. 전문 분야 번역을 대우해줘야 학문도 살고 출판도 산다.”

그는 일본의 예를 강조했다. “일본은 번역을 통해 근대화를 이룬 나라다. 이미 개화기 때 일본어 번역판이 나온 책 가운데 상당수가 아직도 우리말로 나오지 않았다. 번역을 우습게 알다보니, 우리 책을 외국어로 번역할 때도 똑같은 잘못을 범한다. 아무리 질 높은 작품도 고등학생 수준으로 번역해 놓으면, 그쪽 사람들은 ‘겨우 그 수준이야’ 하는 식으로밖에 인식 못한다. 가와바타의 <설국>을 서구에 알린 사람은 결국 사이덴스티커였다.” (고명섭 기자)

07. 04. 12.

P.S. 내가 소장하고 있는 책은 아니지만 기사를 읽다 보니까 기억에 떠오르는 책은 <북마니아를 위한 에필로그 60>(한길사, 1997)이다. 저자가 60권의 번역서를 낸 걸 기념하여 역자후기만을 모아놓은 책으로 기억된다. 그리고 10년이 지난 지금 150종, 200권 남짓을 번역했다고 하니까 지난 10년간 최소 90종의 책을 더 번역한 셈이다. <북마니아를 위한 에필로그 150> 정도의 증보판이 나올 만하다. 아마도 이윤기, 안정효 선생과 자웅을 겨룰 만하지 않나 싶다. '번역의 달인'들이 따로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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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04-12 23: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독일어도 능통한게 틀림없습니다. 제가 지금 읽고 있는 책(프로이트, 문명 속의 불만)도 김석희씨가 번역한 것이더군요. 이런 우연이!

다소 2007-04-12 23: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아, 김석희씨 말씀 절대 공감이에요. 번역을 홀대하는 나라..ㅠㅠ
제대로 된 보수를 주지도 않고, 대우도 해주지 않으니 기껏 공들여 번역해봤자 헛수고며 그게 지속되니 '대충' 번역하게 되고...에휴;
근데 이제는 그런게 너무 만연해있다보니 제대로 된 번역자는 가뭄에 콩나듯 하고, 정말 '발로 번역했냐?'고 소리치고 싶을 만한 책이 산더미에요. 그에 대해 글로 끄적끄적 한소리 하면 '그럼 그렇게 잘난 니가 번역해!'란 초딩같은 댓글이 달리지를 않나.-_- 어처구니 없죠.
저도 그렇지만 언어 전공하고서도 이 길이 힘들다는 걸 아니까 이쪽은 아예 생각도 안 하는 친구들 보면서 참 암담했는데, 모쪼록 제대로 된 번역문화가 자리 잡혔으면 좋겠어요.
(추천 꾸욱!!)

마노아 2007-04-13 00: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사 깊이 공감하며 읽었어요. 김석희씨 참 대단해요. 그분의 이름이 새겨진 책이라면 깊은 신뢰가 가지요.

2007-04-13 00: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열매 2007-04-13 02: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명속의 불안>(열린책들)은 독일어가 아니라 스트레치의 standard판을 번역한 것입니다. 역자 해설에 밝힌 것인데, 자신의 인터뷰대로 한다면 '비전공자가 고전을 번역'하는 셈이 됩니다. 실제로 그 해설에는 '오랜 망설임끝에 작업에 착수하고 나서도, 과연 제대로 번역하고 있는지, 의미나마 제대로 읽고 있는지 자신있게 대답할 수 없다'고 밝혀 제 돈 내고 산 사람을 불안케 만들었습니다. 열린책들 '프로이트전집'말고도 번역으로 문제만든 것이 한 두 번이 아니니...

2007-04-13 08: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7-04-13 08: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열매님/ 맞습니다. 영역본을 옮긴 것이죠. 전문용어의 문제만 해결된다면 저는 전공자들의 번역보다 전문번역가들의 번역이 더 읽을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한국어'라서요...
햇빛비둘기님/ 네, 드디어 나왔네요. 특히나 1권이 <알키비아데스>여서 더 반갑습니다. 푸코가 <주체의 해석학>에서 다루고 있는 책이어서요...
**님/ 제가 풀기엔 너무 난해한 수수께끼입니다.^^;

마늘빵 2007-04-13 09: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번역자를 제대로 대접해줘야합니다. 요새 시간강사 처우 개선하자는 이야기도 나오던데, 진작에 그랬어야할 것들이 너무 늦었습니다. 학부시절 시간강사 샘으로부터 그런 이야기를 듣고 아 할 게 못되는구나 학문의 길은. 그런 생각 했더랬는데.

2007-04-13 09: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7-04-13 1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프락사스님/ 그게 좀 문제적인 대목이죠. 여러 가지가 꼬여 있는 사회적 불평등의 문제이기도 하고...
**님/ 그런데, 질문은 그 여인이 '누구'인지에 대한 것인가요? 그게 아니라 단순히 어떻게 번역되는지를 물으신 거라면, Itary는 Italy로 봐서 "이탈리아에서 그녀는 종종 단순한 노부인 이상이었다"쯤인데요...

2007-04-13 10: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해적오리 2007-04-13 12: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퍼가요. 동생이 번역일에 관심있어 하는데 읽히고 싶네요. ^^

2007-04-13 15: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7-04-13 23: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해적님/ 한편으론 관심을 꺾지나 않을까 걱정되네요.^^;
**님/ 별 말씀을요.^^

자꾸때리다 2007-04-13 18: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요번에 얇은 책 한 권 번역해보려고 하는데요... 번역가의 고통을 한 번 느껴봐야겠군요.

2007-04-17 00:48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