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저명한 언어학자이자 인지심리학자 스티븐 핀커의 새로운 책이 출간됐다. 아직 리뷰들이 뜨지 않은 것으로 보아 지난주 후반에 깔린 책인 듯하다(내지는 출판사가 언론홍보라는 간접적인 방식보다는 독자와 먼저 대면하는 정공법을 택했는지도).

<마음은 어떻게 작동하는가>(소소, 2007)가 이번에 나온 책이며 원제는 'How the Mind Works'(1997), 제목 그대로이다(다만 저자명 '핀커Pinker'가 '핑커'로 바뀌었다. 굳이 그럴 필요가 있는지는 의문이다). 원서가 나온 지 10년만에 한국어본이 나온 셈인데, 기억엔 지난번 <빈서판>(사이언스북스, 2004)이 출간되던 때쯤 핀커의 주요 저작들 몇 권을 한꺼번에 구입할 때 사들였던 책 중의 하나이다(박스에 들어가 있는지라 '소장도서'란 말이 무색하지만).  

사실 출세작이기도 한 <언어본능>(그린비, 1998)이 출간되었을 때(2004년에 소소에서 개정판이 출간됐다) 내가 저자인 스티븐 핀커(1954- )에 대해 알고 있던 내용은 MIT의 동료인 촘스키와 함께 대중적으로 가장 '유명한' 언어학자라는 게 전부였다(그는 가장 탁월한 '촘스키 전도사'였다). 그렇더라도 <언어본능> 이후에 나는 '핀커의 모든 책'이란 분류항을 머릿속 서재에 마련해놓고 있다.  

본래 심리학 전공으로 출발하여 언어학과 인지과학쪽으로 연구영역을 확장해간 핀커는 21년간 MIT의 교수로 재직하다가 2003년 이후에는 하버드대학에서 주로 언어심리학진화심리학을 강의하고 있다 한다. 적어도 그 두 분야를 '조인트'해놓은 영역에서만큼은 독보적인 역량을 발휘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빈서판>은 한 예증일 터인데, 그런 명망가에게라면 '마음'에 대한 강의를 한번쯤 들어봄 직하지 않은가?

<언어본능>, <빈 서판> 등으로 알려진 스티븐 핑커의 마음에 대한 탐구서. 마음이란 무엇이고, 어떻게 진화했으며, 마음을 통해 우리가 어떻게 보고, 생각하고, 느끼고, 웃고, 교류하고, 예술을 즐기고, 인생의 신비를 음미하는지를 신경과학에서부터 경제학과 사회심리학에 이르는 다양한 분야들을 동원해 설명한다. 총8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마음을 ‘역설계’(역설계란 대상을 분해하고 구조를 분석하여 그 설계로 거꾸로 파악해가는 기법을 말한다)하는 과정을 보여 주면서, 자연선택에 의해 우리의 마음이 어떻게 진화해 왔는지를 제시하고 있다. 최근 많은 담론으로 둘러쌓여 있는 인간 마음에 대한 기본적인 인식의 틀을 제공해주는 책.

'인간의 마음에 대한 기본적인 인식의 틀을 제공해주는 책'이라고 하니까 말하자면 '기본서'이다. 한데 분량은962쪽이다(원서 자체가 672쪽의 방대한 분량이다). 학문을 책두께로 승부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이만한 분량의 책들을 몇 년에 한권씩 턱 턱 써제끼는 역량 자체는 경탄할 만하다(문제는 그런 학자들이 적지 않다는 사실이다. 거기에 비하면 한국의 학자들은 얼마나 겸손한 것인지!).

해서 어쨌거나 다소 부담스런 분량과 가격이지만 하버드대학의 강의를 한 학기 수강하는 셈치고 구입한 다음에 2주에 한 장씩 읽어나감으로써 본전을 뽑는 방법도 나쁘진 않겠다(소프트카바의 원서 자체는 물론 국역본보다 훨씬 저렴한 가격에 구입할 수 있다). 그만한 비용과 수고로 '마음은 어떻게 작동하는가'에 대한 밑그림을 얻을 수 있다면 한 학기 소득으로는 바꿔치기할 만하다(하지만 나는 정말 그런 시간을 낼 수 있을까?).  

핀커의 주요 저작으로 아직 번역되지 않은 또 다른 책(역시나 몇년 전에 구입했지만 박스 속에 묻어두고 있는 책)은 <단어와 규칙>(1999)이다. <마음은 어떻게 작동하는가>(1997)에 바로 뒤이어 출간된 것인데, 국역본도 그 순서에 따르는 것인지는 모르겠다. 그럴 경우 우리는 2009년쯤에 국역본을 얻게 되는 것인지? 그때쯤이면 한국어로도 "스티븐 핀커를 좀 읽었다"고 말할 수 있게 될 것이다. 필요한 게 주변에 없다면 옆집에서 꾸어오는 일이라도 열심히 할 필요가 있다...

07. 03. 25. 

P.S. <마음은 어떻게 작동하는가>가 부담스럽다면 개리 마커스의 <마음이 태어나는 곳>(해나무, 2005)부터 읽어보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겠다(<클루지>(갤리온, 2008)도 마커스의 책이다). '몇 개의 유전자에서 어떻게 복잡한 인간 정신이 태어나는가'란 부제를 갖고 있는 이 책의 저자 자신이 MIT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전도유망한 학자라는데, 스티븐 핀커의 추천사에 따르면 "마커스는 생각하는 인간, 말하는 인간에 대해 우리들이 알고 있는 지식들을 새로운 방식으로 종합하여 보여준다. 재능이 넘치는 독창적인 이 책은 과학을 대중화하는 데, 그리고 과학 그 자체에 기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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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7-03-25 12:49   좋아요 0 | URL
심리철학과 연관하여 볼 만한 책들이군요. 학부시절 심리철학을 접하고 꽤 관심있었는데, 졸업 이후 멀어지고 있습니다. 그보다 봐야할 것들이 많아서. 보관함에 담아갑니다.

로쟈 2007-03-25 13:22   좋아요 0 | URL
'심리철학'도 걸쳐 있지만 짐작에 좀더 실제적인 쪽 같습니다. '뇌과학'과 진화심리학에 좀더 가까운...

비연 2007-03-25 20:43   좋아요 0 | URL
보관함에 넣어두었습니다^^ 항상 좋은책 알려주셔서 넘 감사해요~!

딸기 2007-03-26 07:06   좋아요 0 | URL
정말 부담스런 분량과 가격...입니다만 일단 보관함에 넣어두어야겠어요. 감사~

자꾸때리다 2007-03-26 12:25   좋아요 0 | URL
언어 본능 번역 상태 괜찮나요?

로쟈 2007-03-26 14:16   좋아요 0 | URL
오류들을 수정한 개정판까지 나온 것으로 보아(개정판을 보지 못했습니다만) 읽을 만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사실 저로선 처음 국역본을 읽을 때 원본을 갖고 있지 않았습니다.^^;

marine 2007-03-27 21:14   좋아요 0 | URL
갑자기 읽고 싶은 생각이 확 당기는군요 "빈 서판" 도 700페이지에 달하는 두꺼운 분량이었지만 워낙 쉽게 쓰여져서 소설책 읽는 기분으로 쭉 읽어 나갔거든요 좋은 책 소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