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를 학교에 보내고 모닝커피 한잔 마시면서(정신도 차릴 겸) 신문들을 훑어보는데, 문학기사 하나가 눈에 띈다. 계간 '세계의 문학' 봄호에 실린 문학평론가 천정환의 '2000년대 한국 소설의 독자'에 대한 리뷰기사인데 이전에 읽었던 리뷰들과 초점이 전혀 달라서이다(참고로, 이번 봄에 가장 많은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평문이다). 

책이 출간되기 이전부터 나온 리뷰들의 초점은 문학독자층이 변화하고 있다는 그닥 새롭지도 않은 얘기였는데(사실 <근대의 책읽기: 독자의 탄생과 한국근대문학>(푸른역사, 2003)의 저자인 천정환씨는 한국 근/현대문학 독자층 연구라는 '블루오션'의 개척자이기도 하다), '한국소설 중간계급 전유물 전락'이라고 타이틀을 뽑게 되면 이건 좀 다른 이야기인 것이다. 다시금 다른 언론의 리뷰들을 찾아보니까 '25-35세 여성이 문학시장 움직인다' '엘리트 독자 가고 대중 독자가 왔다' 같은 타이틀이 붙어 있다. 거의 '라쇼몽' 수준 아닌가? 가히 '독자의 시대'가 도래한 걸 입증해주는 듯도 하다. 당신이 무얼 쓰든지 간에 독자는 자기 구미에 맞는 것만 읽어내는 시대! 나는 가장 최근의 리뷰를 편들고 싶다. 세 편의 리뷰를 자료삼아 옮겨놓는다.

경향신문(07. 03. 12) 한국소설 중간계급 전유물 전락

“하위계급의 남성 및 여성 독자와 상층계급의 남성 독자는 소설로부터 이탈했다. 남은 건 엽기·추리·무협 등 하위 서사장르를 소비하는 남성 중간계급 일부와 여성 중간계급뿐이다.”

문학평론가 천정환씨(성균관대 국문과 교수)가 계간 ‘세계의문학’(민음사) 봄호에서 ‘2000년대의 한국 소설 독자’에 대해 분석했다. 그는 “한국인 작가가 한국어로 쓴 소설을 읽는 독자는 점점 더 줄어들고 있지만 번역된 외국소설을 읽는 독자가 차지하는 비중은 늘어나고 있다”면서 ‘한국 소설의 독자’와 ‘한국의 소설 독자’는 구분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는 한국 소설의 독자가 줄어드는 것을 한국의 소설 독자가 줄어드는 것으로 생각하면 안된다는 뜻이다. 또 한국 소설의 독자에게만 집착하는 현재 문단의 구조에 대한 간접적 비판도 담고 있다.

천씨는 “한국 소설이 잘 읽히지 않는다면 이는 교육과 훈련, 배제와 선택을 통해 걸러진 ‘한국 소설’ ‘한국 작가’가 독자들의 삶·취향과 불화의 상태에 있는 것”이라면서 “상·하위 계층을 거의 잃어버린 주류 한국 소설은 프티부르주아 여성과 여학생, 문학청년 이외의 문화 수용자들의 관심을 잘 끌고 있지 못하다”고 밝혔다.

그에 따르면 1950~60년대를 거치면서 엘리트 독자와 대중독자로 재편된 한국 소설 독자 가운데 엘리트 독자인 상층계급 남성들은 문학을 떠났다. ‘교양’의 발로로 소설을 읽던 이들은 현재 계간지 시스템으로 유지되는 한국문학 질서의 근간이기도 하다. 저자는 소설 애호가로 알려진 정치학자 최장집씨나 80년대까지 신문 문학월평을 꼼꼼히 챙겨봤다는 노회찬 국회의원을 이 범위의 독자로 들었다.

그러나 386세대 이후 이같은 엘리트 독자는 사라졌다. 아직까지 소설을 읽고 있는 엘리트 독자는 최후의 근대적 독자일 뿐 탈근대의 독자는 아니라는 게 저자의 진단이다. 인문학 전공자와 문학 연구자조차 연구는 할 망정 소설 독자로 움직이지는 않는다.

대중독자 가운데서는 전통적 의미의 노동계급이 완전히 떨어져 나갔고 남성 중간계급과 남학생 일부, 여성 중간계급과 여학생층이 남았다. 그런데 남성 중간계급과 남학생 일부는 주로 엽기·추리·무협 등 하위 서사장르 소비의 주역들로, 순수·본격을 추구하는 한국문학이 이들을 놓고 영화·만화·게임과 싸우기에는 역부족이란 지적이다. 그렇다면 남은 독자는 여성 중간계급과 여학생층인데 이들은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같은 칙 릿,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이 일으킨 공지영 신드롬, 그리고 일본소설 수입붐의 주역들이다.

천씨는 “소설에서의 일류(日流)에 드러난 초국적·무국적의 소설 향유는 세계화한 삶이 소설 향유에 미치는 영향으로 막기 힘든 대세이며, 80만부가 팔려나간 ‘우행시’의 성공에 대해서도 문단은 스스로 반성하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면서 소설 독자가 사라진다는 것은 빈사상태의 한국문학이 독자에게 투사한 자기모습일 뿐 그들이 모르는 독자층은 여전히 존재한다고 결론을 맺었다.(한윤정기자)

한국일보(07. 02. 27) 25-35세 여성이 문학시장 움직인다

'칙릿(chic lit)을 잡아라.' 젊은 여성(chic)들을 위한, 그녀들의 문학(literature)이 21세기를 호령할 태세다. 문학ㆍ출판계가 그 같은 변동상에 감응하고 있다. <내 이름은 김삼순> <브리짓 존스의 일기>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등 젊은 여성들 사이에 인기를 끈 영상물의 성공에서 확인되는 추세에 대한 문학의 대응이다. 신간 일본 소설은 보다 직설적이다. <워킹 걸 워즈>. 매일 전쟁 치르듯 살아 가는 30대 전후의 여성 직장인들을 속도감 있게 그린 소설이다(랜덤하우스).

성균관대 국문과 천정환 교수는 계간 <세계의 문학>을 통해 "25~35세의 비물질 노동 종사 여성들은 문화적 소비에서 일종의 전위 부대"라며 "지난해 출판계 전체의 화두였던 칙릿은 향후에도 한국 소설의 유력한 독자층으로 남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상층 계급 및 남성 독자의 상당 부분이 소설 독자에서 이탈한 현재, 순수ㆍ대중의 장벽을 허물며 21세기 초 문화계의 화두로 등장한 칙릿 층은 고학력 중간층이라는 외형적 공통점을 지닌다. 천 교수는 그러나 "그들의 상당수는 불완전 고용 상태에 놓여 있다"며 그들의 현실적 입지를 외면하지 말 것을 당부했다.

고학력 전문직이지만 사실상 직종 내부에서 성별로 분업화하고 저임금과 비정규직으로 차별화한 노동에 투입되기 십상인 현실을 가리키는 말이다. 노동과 소비의 불일치, 출신 계급(부모의 계급)과 소속 계급(자신의 현실)의 불일치 등 현실에서의 이중적 지위가 따라서 엄존한다는 지적이다. 본디 근대 소설의 가장 중요한 독자층이었던 여성 중간 계급과 여학생 층은, 최근 가족과 결혼의 문제에서 결정권이 강해짐에 따라 더욱 큰 지분과 역할을 부여받게 됐다는 것.

천 교수는 "성공한 대중 소설은 독자의 취향과 의식의 평균치에 대해 과감히 도발하는 소설"이라며 관련 작가의 분발을 촉구했다. 그는 <나의 달콤한 도시>에 대해 "TV나 영화 같은 데서 심심찮게 본 것 같은 기분"이라고 한 네티즌의 서평을 인용, 기시감과 상투성을 극복할 것을 작가들에게 요청했다. 천 교수는 서사가 매우 비현실적이긴 하지만 상식을 비트는 박현욱의 <아내가 결혼했다>는 성공한 작품에 속한다고 평했다.

천 교수는 "1990년대 이후 문학 독자의 재생산 구조는 상당히 달라졌다"며 "소설의 전통적 독자가 이탈하고 재구성되면서 우리 눈앞에서는 문명사적 전환이 벌어지고 있다"고 분석했다. 2000년대 한국 소설의 독자를 주제로 펼쳐진 논의에서 천 교수는 "하위 계층과 젊은 세대는 블로그와 UCC 등 인터넷을 통한 산 지식 습득과 향유에만 집중, 독서 문화에서 이탈하는 경향이 뚜렷하다"며 "이들이 문학을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우리 문학의 미래가 바뀔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했다. 한편 국립국어원은 최근 문화 지형도를 바꿔 놓고 있는 칙릿을 '꽃띠 문학'으로 부르자고 제안하기도 했다.(장병욱 기자) 

 

동아일보(07. 02. 23) 엘리트 독자 가고 대중 독자가 왔다

■ 세계의 문학 ‘2000년대 표준 독자’ 분석

서울 거주 22세 여대생 김모 씨. 한 달에 한두 번 시내 중심가 대형 서점에 가며 ‘에쿠니 가오리’류의 소설을 사 본다. 베스트셀러 목록이나 인터넷 독자 서평을 살펴보긴 하지만 구매를 결정하는 것은 책의 내용을 직접 확인하고 나서다. 대학 도서관이나 대여점, 친구들에게서 빌려 읽을 때도 있다. 독서 시간은 잠들기 전 1시간 정도. 인터넷 이용 시간이 훨씬 많고 개봉 영화 무료 시사회를 알뜰히 챙기는 영상 세대지만 재미있는 소설이라면 기꺼이 손에 잡는다.

다음 주 출간되는 ‘세계의 문학’ 봄호에 소개되는 ‘2000년대 표준 문학 독자’의 모습이다. ‘세계의 문학’은 특집 ‘누가 문학을 읽는가’에서 한국의 문학 독자가 어떻게 바뀌고 있는지를 짚었다. 결론은 ‘엘리트 독자가 물러난 자리를 대중 독자들이 채우고 있다’는 것.

○ 엘리트 독자가 쇠하다

이 특집에서 성균관대 천정환 교수는 ‘2000년대 한국소설 독자 Ⅱ’라는 기고를 통해 엘리트 독자가 사라져 간다고 선언한다. 그는 직접 인터뷰한 모델 독자 G, C, Y 씨를 통해 엘리트 독자가 어떻게 변하고 있는지를 보여 준다.

사회과학을 전공한 40대 초반의 남성 교수. 주요 한국소설 작품과 김윤식 백낙청 등 대가급 평론가의 저작을 읽었다. ‘창작과 비평’ 등 문예지를 읽고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 한국 현대소설 사상 최고의 유산이라고 믿는다. 젊은 작가들의 작품에 대해선 ‘한국문학의 대안’인지 모르겠다며 유보적이다.

인문학 출판사의 40대 남성 주간. 문예지는 안 보지만 우리 작가의 주요 작품집과 장편을 꾸준히 읽는다. 천명관의 ‘고래’, 박민규의 ‘카스테라’ 같은 30대 작가들의 작품을 재미있게 읽었고 ‘좋은 문학적 역량을 갖고 있다’고 평한다.

문학박사 학위를 소지한 30대 초반 여성 대학강사. 한국소설 중 어떤 작품이 대중적으로 읽히는지, 평단에서 회자되는지에 대해선 잘 알고 있다. 그렇지만 실제로 현장의 한국문학 작품은 거의 읽지 않는다. “재미가 없을 것 같고, 안 읽어도 세상 사는 데 별 문제가 안 되기 때문”이다.

독자 G 씨는 우리 문학 교육과 인문학 제도가 길러 낸 가장 모범적인 엘리트 독자다. C 씨는 성실한 엘리트 독자이긴 하지만 G 씨에 비해 문학의 변화를 보는 태도가 유연하다. 천 교수는 “Y 씨는 문학도이면서도 G, C 씨와 같은 선배 엘리트 독자의 명맥을 잇지 못하는 독자”라면서 “전통적 의미의 엘리트 독자가 단절되고 있음을 보여 준다”고 밝혔다.

○ 재미난 이야기를 찾는 대중 독자들

그렇다고 문학 독자 자체가 사라지는가? 이 특집에 따르면 엘리트 독자의 뒤를 잇는 것은 들끓는 대중 독자다. 출판문화연구소 백원근 책임연구원은 특집 기고 ‘통계로 본 소설 독자’에서 지난해 ‘국민 독서실태 조사’(성인 1000명, 초중고교생 3000명 대상)를 꼼꼼하게 분석했다. 그 결과 남성보다는 여성이, 세대별로는 20대가, 대학생과 화이트칼라 직업군이 소설을 많이 읽으며, 소설 독자들이 다른 문학 장르 독자들보다 영화를 많이 본다는 등의 자료를 토대로 ‘서울 거주 22세 대학생 김모 씨’라는 2000년대 표준 문학 독자의 초상을 뽑아냈다.

이들에게는 앞선 엘리트 독자들처럼 한국문학 작품을 읽거나 최소한 알아야 한다는 ‘충성심’이 없다. 일본소설이나 영미권 치크리트(chick-lit) 등 국적을 가리지 않고 읽으며 소설의 선택 기준은 ‘재미와 오락’이다. 백 연구원은 이 같은 대중 독자들 때문에 “소설 판매량은 안정적이고 견실하며, 다양한 방식을 통해 여러 사람이 한 권의 소설을 읽는 경향이 있다”면서 소설은 힘센 장르라고 밝혔다. 다른 한편으로 그는 “이 조사에 따르면 한국소설은 엔터테인먼트 경쟁력 제고가 필요한 조정 국면”이라는 지적도 잊지 않았다.(김지영 기자)

07. 03.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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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우스 2007-03-12 09: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표준 독자가 미모는 떨어지는군요. 근데 에쿠니 가오리 책, 그거 두시간이면 다 읽지 않나요? 그럼 한달에 15권 읽어야 하는데....

비로그인 2007-03-12 1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쩐지 민음사가 <세계의문학>를 통해 자기변호를 하는듯한 인상이군요.

열심히 개기면서 한국소설을 쓰는 작가들에겐 맥 빠지는 일이겠고요. 이게 현상이고 이게 대세다. 독자 입장에선 작가가 무얼 쓰든 꼴리는 대로 읽는 게 맞고, 작가 입장에선 독자가 무얼 읽든 꼴리는 대로 쓰면 안 되는 건가 하는 의문 하나. 작가와 독자의 불화, 작가와 시대의 불화, 이 어긋남들이 결국 문학의 힘이긴 할 텐데.

많은 수를 거느린 작가가 있으면 그렇지 않은 작가도 있을 테고요. 더이상 루카치식 리얼리즘을 고수하는 소설가는 요즘엔 없던데, 작가들이 더더욱 세련되고 감각적이 되라는 것 같네요. 하위장르의 구분은 이미 허물어진지 오래여서, 기성작가들이 낡은 소설문법으로 쓰는 소설에 입맛이 안 당기는 건 너나할 것 없겠죠.

암튼 민음사가 <세계의문학>을 폐간하지 않고 펴내는 게 용하다 싶은데, 그건 아마도 문학정신이 있어서라기보담은 자본 덕분이겠죠. 문학지형의 변화를 읽기에 좋은 자료들, 로쟈님, 감사...^^

기인 2007-03-12 10: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퍼갑니다. 천정환 선생님이 '문학평론가'로 호명되는 것도 신기하네요. ㅋ 등단을 한 적도, 전통적 의미에서의 문학'평론'을 한 적도 없는데.. 역시 싸잡아서 '문학평론가'인지.. 정말 주위를 둘러보면. 국문학도들도 요즘 소설 잘 안 읽는 것 같습니다. 등단한 분들을 빼고는 말이죠. 저도 일년에 '본격' 한국소설 10권정도 읽나 싶습니다. 계간지 제외하고 말이죠...

2007-03-12 10: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biosculp 2007-03-12 11: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학의 독자애기 보니 미술애기하나 적겠습니다.
집에다 타일로 판넬을 만들어서 복사된 그림을 붙여놓고 가끔 갈고 보고있는데
애들 미술공부에 좋다고 하니 옆집에서도 몇몇이 따라하더군요.
옆집은 판넬로 만들어져나온 그림을 가져다 붙여놓았는데
친구분들 두분이 오셔셔(속칭 사회적으로 사자들어가는 사모님들)
하시는 말씀, 이거 직접그리신거예요.
그 그림은 고호의 해바라기 였습니다.
과도한 일반화 같지만 그 애기듣고(나중에 다른 그림붙여놓은 이번에는 마티스 그림였는데 그렇게 물어보는 분이 있다고 하더군요) 부동산이나 재태크로 먹고 살만한
경제적 여유층들의 교양 수준이라는게 어떨지 참참참 이런생각이 들더군요.
보는 그림도 그런데 하물며 읽는 문자는 어떨런지.
와이프한테는 이런 과제를 주었는데요.
애편네들 모여 수다떨때 좀 이제 엎그레이드좀 하지.
창비에서 나온 한국 단편전집이 있으니 일주일에 한권씩 사서
그 책중에 한편만이라고 골라서 읽고 수다떨때 애기좀 하지.
그리고 강조한 말, 나중에 애들 논술할때 어짜피 사야되는 책이니 다해야 50권 1년이면 책도 사고 수다 질도 높이고 애들한테 모범도 되고(뭔짓을 해도 공부와 연관시켜야 씨알이 먹히는 세상이라서요.)

로쟈 2007-03-12 12: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태우스님/ 워낙에 표준 이상의 (가오리를 읽는?) 미녀들만 만나시니.^^
까마귀님/ 저널이나 출판사들에서 '체질' 개선에 들어간 지는 꽤 되는 것 같은데요, 작품들이 제때 못받쳐주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문학시장'의 얘기가 빠진 <문학개론>들도 반성해야 할 거 같고...
기인님/ 하다못해 저도 '문학평론 하시는...'이라고 소개받을 때가 있으니까요.^^;
**님/ '문학에서 문학으로'라는 구호 자체가 좀 식상한 구호죠. 90년대 구호였으니...
biosculp님/ 그게 '사자들어가는 사모님들'의 비결이 아니었을까요? 엉뚱한 문학 읽고 삶에 회의를 가져서는 곤란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비로그인 2007-03-12 15: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체질' 개선으로 체질이 좋아지지 않은 듯해서. 문지, 창비의 자기갱신이야 그렇다 치고 민음사의 문학 갇다버리기는 도가 지나친 측면이 있지요. 홈쇼핑에서 마진을 엄청 줄이면서 덤핑판매로 군소출판사의 목줄을 쥐는 것도 명망 있는 출판사로선 할 짓이 아니고. 안타까워서 이런 글 쓰게 되네요.

먹고살기 힘든 작가들에게 "당신들 앞으로 이렇게 소설을 써야 팔려!" 하는 해묵은 주문을 옹알이하는 것과 진배없으니. 문제가 단순하지 않은데, 독자와 작가 사이의 관계, 독자의 취향 같은 몇몇 변수로 한국소설을 가름하기에는 사태가 복잡해서 무리가 따르지 않나 싶습니다. 독자와의 소통이 중요하지만, 언제나 대중이 옳은 건 아니니까.

세상에, "2000년대 표준 독자"라니, 무슨 근거로 그런 말을 하나? 소설의 판매량이 그 근거라는 건데, 상품으로서의 예술작품, 저버릴 수 없는 문제겠지만,그래도 이건 아니잖아, 싶네요. 한국소설이 썩 재미있는 건 아니지만, 외국소설과 다른 활력도 엄연히 존재하고, 그게 언젠가 맞아떨어지는 날도 있겠죠. 어차피 한국출판사 역시  엔터테인먼트 사업처럼 도박논리로 움직이고, 그래서 역동성도 나오는 것일 테니까요.

류시화가 그렇듯, 공지영이란 작가도 흥행성적을 깔고앉아 대중적 영향력으로 고평가를 받는군요. 그런데 요즘 논리에 따르면, 류시화(시인) 공지영(소설가)은 2000년대의 표준작가가 되는 건가? 억울하면 팔리는 작품을 쓰시라. 것도 맘대로 되진 않겠지만!  이렇게 쓰고 보니, 고군분투하는 한국작가들이 생산하는 물건들을 편견을 걷어버리고 봐야겠다는 생각, 한국문학의 독자로 성실함을 좀더 길러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물론 여전히 꼴리는 대로 외국소설 열심히 찾아보겠지만.

아무튼 수사학, 그 기묘한 말장난은 경탄스럽습니다. 한국의 소설독자, 한국소설의 독자...라...


맑음 2007-03-12 17: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개인 독자의 취향도 한몫하지만, 자본주의 시대이니 광고도 비중을 크게 차지한다고 봅니다. 일간지 신문에서도 하루 여러 컷 책광고가 실리지만, 주로 대형출판사의 외국문학이죠. 같은 한국 소설이라도 일반 출판사 문학상보다 세계일보문학상 작품이 잘 팔리는 현상을 볼 때도... 텍스트와 독자 선호도의 부합 여부보단, 일반 독자들은 1억 원 고료란 타이틀에 더 시선이 가기 때문이 아닐까란 생각을 합니다. 소극적인 독자들은 수동적으로 주어지는 광고(인터넷 서점의 메인 광고, 베스트셀러 목록, 오프라인 서점의 매대 진열, 주위 사람이나 권위있는 사람들의 평 등등)에 익숙하게 구매력을 행사하니까요.^-^

니브리티 2007-03-17 21: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작가들도 신자유주의 행보에 맞춰 3% 퇴출을 해야 한다는 말씀이시겠죠. 어쨌거나 믿음 이전에 문학은 계속 될 겁니다. 평론가씨들은 출판시장에 대한 걱정은 출판사에 맡기시고 일단 많이들 읽으시고 적절한 평가를 내려주시는 게 본연의 길이 아닐까 싶습니다.

로쟈 2007-03-26 14: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까마귀님/ 덕분에 한국소설들을 더 챙기게 되신다면 '수사학'을 탓할 일도 아닌 거 같습니다. 오기로라도 더 읽어주마!^^
맑음님/ 공급자가 문제냐 소비자가 문제냐, 는 원론적인 질문이 나올 수도 있을 텐데, 사실은 같이 가는 것이고 모두가 공모하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해서 반성이 필요하다면 모두 자기반성에서 출발해야 하지 않을까 싶고...
니브리티님/ 말씀대로, 문학은 계속 연명할 거라는 데 저도 동감합니다. 문제는 '어떤 문학'이냐에도 걸려있는 거겠지요. 아시겠지만, 사실 동업자들끼리도 잘 안 읽지 않습니까?^^;

니브리티 2007-03-26 13: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 뉘앙스 비틀기가 또 로쟈님의 특기시군요.
<문학이 계속 될 것이다/연명할 것이다>는 뉘앙스가 너무 다르군요. 공통점이라면 계속 쓰여진다는 것 뿐이로군요. <어떤 문학>이냐의 문제는 거기에 문학을 바라보거나 평가하는 기준과 가치가 개입되는 것인데, 기준이나 가치를 논하려면 먼저 균형있고 '세심한 눈'이 필요하겠죠. 거기에 부합하는 눈을 가진 평론가가 몇이나 되는지 저는 잘 감이 안오는군요. <동업자끼리도 서로 잘 읽지 않는다>(오타 치셨군요..^^)는 말은 <소설가끼리도 서로의 소설을 잘 읽지 않는다>라는 말로 제게 반문을 하시는 것 같군요(평론가들도 잘 읽지 않지만 소설가들도 잘 읽지 않는다). 그런데 소설이라는 창작자의 입장과 그 창작물을 '비평'하는 비평가들을 그렇게 동일한 잣대로 말해서는 안되겠죠. 그런 잣대로 말해버리면 결론은 다음 두 가지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1.너희들도 잘 안읽는데 비평가라고 재미없는 것을 읽어야 하느냐? 우리도 관심가는 것만 읽을 권리가 있다.
2. 비평가가 읽지 않는다고 비판하지만 너희도 읽지 않으니 오십보 백보 아니냐. 너희는 그런 불만을 표출할 권리가 없으니까 입닥치고 열심히 글이나 써라. 혹 내 마음에 들면 우리가 띄워줄수도 있느니라...ㅋㅋㅋ

로쟈 2007-03-26 14: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오타가 있었네요. '잘 안 읽지 않습니까?'로 수정했습니다.^^ 니브리티님의 문제의식은 평론가들이 게으를 뿐더러 작품을 보는 안목이 없다, 는 것인가요? 사실, 다른 나라 문학사들에서도 '저주받은 거장'들이 심심찮게 나오는 걸 보면, 그러한 오판/오독은 불가피한 것이 아닌가란 생각도 듭니다. 모두에게 공평한 비평이란, 그런 사랑만큼이나 불가능한 게 아닌가, 싶기도 하고. 믿을 건 '미래'의 독자들이겠죠...

니브리티 2007-04-03 17: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요. 작품 보는 안목이 없다고 말하면 <저같이 주목 못받는 사람들의 푸념>으로 들릴 게 뻔한데 제가 왜 그런 말을 하겠습니까. 문제가 되는 부분은 <게으르다>일 것이고, 그 게으름에 부수적으로 따라 붙는 것이 폭넓은 독서를 하지 못한다는 것..이겠죠. 물론 <게으름>은 또한 계산된 게으름이라는 것도 압니다.... 믿을 것이 '미래'의 독자라는 말도 참 이상하군요. <독자가 선택한 것=명작>일 가능성이 높다는 뜻인지요? 기본적으로 비평이 공평하리라고 믿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비평은 의미를 부여하는 일이고, 의미를 부여하는 일이란 필시 어떤 기준에 의해 재단될 수밖에 없는 일이니까요. 문제는 <비평-대상에 대한 공평성>이 아니라 바로 <비평-기준의 공정성>이 되겠죠. 그 부분이 바로 비평가들이 '윤리'에 대해 숙고해야 할 가장 현실적인 지점일테구요.
같은 작가의 텍스트를 같은 비평가가 잡지 기준에 맞춰서 어떤 곳에서는 칭찬을 하고 어떤 곳에서는 자의식이 없다는 식으로 비난한다면 그 기준을 누가 신뢰할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