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사를 준비하느라 하루종일 책을 빼내고 (일부는 날라다놓고) 녹초가 되었다. 육체노동으로 치면 큰일은 아니지만 나로선 일년에 두세 번 하는 ‘막노동‘이다. 내일 하루의 일이 더 남아있지만 책을 빼내 묶고 쌓으면서(온가족이 동원된다) 든 몇 가지 생각.
먼저, 일부를 제외하면 앞으로 다시 볼 가능성이 없을 터이니 책과의 인연도 무상하다는 것. 옷깃만 닿아도 인연이라는 말에 기대면 모두 한때는 인연이었던 책이다(한순간 인연을 포함하여). 어떤 책들은 이미 읽었음에도 책장에 두었고 또 어떤 책들은 읽었기 때문에 이삿짐으로 분류했다. 이런 일에도 합리적인 기준보다는 ‘연줄‘이 작용한다.
더불어 내가 어떤 책들을 (과도하게) 많이 샀는지도 알게 되었다. 과도하다는 건 나의 관심이나 필요에 비해서라는 뜻인데, 뇌과학과 기후변화에 관한 책들, 경제학과 미래학, 생태학, 우주론 분야에 속하는 책들이 그렇다. 절반 이하로 줄여도, 심지어 분야별로 열 권만 남겨도 좋았겠다는 생각이다. 아마도 이 분야에 대해선 내가 강의를 하거나 책을 쓸 일이 없을 거라는 판단이 깔려 있으리라.
자질구레하지만 바퀴벌레처럼 살아남는 책들도 한 부류에 해당한다. 강의라는 연줄 때문에 쉽게 내놓지 못하는 것인데 이번에는 여행 관련서도 앞으로 예상되는 필요 때문에 많이 살아남았다(책 선별작업이 곧 숙청작업?). 그리고 좀 희귀할 것 같은 책들도 잔류 확률이 높았다(내일 한 차례 더 빼낼 터라 아직 확실치는 않다).
오늘 하루 분명 1000권 이상 빼내서 거실에 쌓아놓았음에도 책방들의 상황은 크게 개선되지 않았다. 내일 얼마나 더 빼낼지 모르겠지만 바닥에 쌓인 책들을 다 없앨 수 있을지 의문스럽다. 비정한 숙청작업을 진행중이지만 비유를 달리하면 군살빼기라고 할 수도 있다. 최대한 빼내면 장서 다이어트 효과를 기대할 수 있겠다. 어찌 되었건 좀 가벼운 ‘체중‘으로 새봄을 맞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