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나온 책들 가운데 가장 '도발적인' 것은 뜻밖에도 가장 오래된 고전 <장자>의 재번역본이다. 한겨레의 기사 타이틀은 아예 "왜곡·오역의 ‘장자’는 불태워라"인데, 그간에 나온 <장자>의 번역들이 왜곡과 오역으로 도배돼 있으니 다 불태워 마땅하다는 것. 역자인 기세춘 선생의 일갈을 옮기면 “지금까지 우리가 읽어온 장자는 장자가 아니다.” 나도 몇 권의 번역서를 갖고 있는지라(비록 지금은 다 박스에 들어가 있지만), 그리고 가장 좋아하는 동양 고전인지라 관심을 안 가질 수 없는데(내가 처음 접한 건 허세욱 선생이 옮긴 범우문고판 <장자>였다), '네가 읽은 건 장자가 아니다!'란 소리니까 더 없이 도발적인/충격적인 발언임에 틀림없다. 소위 '전문가들'의 신뢰할 만한 리뷰들을 읽어봐야 상황판단이 가능할 듯싶지만, 일단은 역자와의 인터뷰 기사를 옮겨놓는다(책은 보관함에 넣어두었다). 아마도 내일자 신문에 게재되는 모양이다.

경향신문(07. 01. 27) ‘장자’ 재번역한 기세춘씨

“노·장자의 기본 ‘캐릭터’가 완전 변질됐습니다. 저항성이 사라지고 지배 담론으로 윤색됐어요. 그 본 모습을 제대로 보기 위해선 고증학적 작업을 거친 재번역이 필요합니다.”

기존 학계에 기세춘씨(72)는 ‘불편한 존재’다. “시중의 동양고전 번역서를 모두 수거해 불살라 버려야 한다”는 ‘과격한 발언’을 서슴지 않기 때문이다. 동양고전 번역서가 왜곡과 변질, 오역으로 넘쳐나고 있다는 게 기씨의 주장. 그가 “칠십 노인의 망령기와 당돌함으로 만용을 부려” 나선 재번역의 첫 결실로 ‘장자’(바이북스)를 내놓은 건 이때문이다.



“학계에선 아무도 경종을 울리지 않습니다. 저야 강단학계의 학맥이나 스승이 없어 자유로우니까 욕 좀 하겠다는 겁니다.” 기씨에 따르면 노장사상은 도교가 일어나 황제와 노자를 교조로 삼으면서 신비학으로 왜곡됐고, 정치권력에 의해 체제에 순응하는 은둔과 청담의 사상으로 변질됐다. 왜곡의 뿌리는 2~3세기 중국 위진(魏晉)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조조에 의해 등용된 왕필이 당시 반란의 중심이었던 도교 세력의 민중성을 거세하기 위해 ‘노자 도덕경’과 ‘장자’에 나타난 반체제성과 저항성을 제거해 체제순응적이고 권력친화적인 내용으로 왜곡했다는 것이다. 기씨는 “국내에 출간된 노장 주해 및 해설서들은 왕필의 주해를 근간으로 삼은 탓에 이러한 왜곡을 답습한 것들”이라고 비판했다.

번역자의 오역도 ‘장자’의 본 모습을 훼손했다. 시대와 문화, 언어 등의 차이로 인한 변질과 오해 가능성조차 제대로 검증하지 않은 채 번역했다는 것이다. 기씨는 “은미하고 철학적인 담론이 치졸한 처세훈이 되고, 서사적인 우화는 그 핵심을 놓치고 초점을 그르쳐 다른 길로 빠져버린 엉뚱한 이야기가 되어버렸다”고 꼬집었다.

그가 ‘장자’의 오역으로 꼽는 예를 살펴보자. 내편(內篇) ‘대종사(大宗師)’에 ‘죽일 자를 풀어주는 것이오(綽乎其殺之)’로 해석해야 할 것을 ‘여유있게 죄인을 죽이는 것이다’로, ‘잘못을 행해도 형벌로 다그치지 말라(爲惡無近刑)’로 해석되는 부분을 ‘어쩌다 악한 일을 하더라도 형벌에 저촉되지 않게 하라’로 옮긴 게 대표적. “권력 저항적이고 무정부주의인 노장 사상에서 어떻게 이런 해석이 나올 수 있느냐”는 게 그의 분노 섞인 한탄이다.

기존의 모든 가치체계를 전면 부정하는 혁명적 담론인 ‘동심론(童心論)’도 왜곡됐다고 지적했다. 특히 도올 김용옥 교수가 동심론을 기공술(氣功術)로 해석해 어린아이처럼 부드러운 피부를 가꾸어 젊음을 되찾자고 한 것은 “한심하다”고까지 말했다.

기씨는 “중국 고전의 경우 수천년 묵은 고문자이므로 우리나라에서 오늘날 사용되는 뜻으로는 해석이 불가능하다”고 지적했다. 또 “고전은 내용이 포괄적이므로 신학, 철학, 정치, 경제, 사회 등 광범위한 소양이 요구된다”며 “자기 깊이가 그걸 담을 수 있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이제 밥술이라도 먹게 됐으니까 적어도 동·서양 고전은 우리가 제대로 번역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학문은 비판정신이 생명입니다. 그냥 그대로 답습하려면 왜 합니까.”(김진우 기자)

07. 01. 26.

 

 

 

 

P.S. 참고로, 교수신문에 연재됐던 고전번역비평 <최고의 고전번역을 찾아서>(생각의나무, 2006)에서는 안동림과 오강남 역주의 <장자>가 전문가들로부터 가장 많은 지지표플 얻었지만 반론도 만만찮은 것으로 소개돼 있다. 지난 1963년 최초의 완역본이 출간된 이래 60여 종 이상의 번역본이 출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영문학자와 종교학자의 번역이 가장 '읽힐 만한' 번역으로 추천되었다는 것도 특이한 일이다. 거기에 '재야' 고전학자의 새 번역본이 보태진 셈이다. '정역본'으로 공인받을 수 있을지 궁금하다. 장자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에 관하여 전문가의 조언을 같이 옮겨둔다.

교수신문(05. 07. 04) 장자, 어떻게 읽을 것인가

‘장자’는 천의 얼굴을 가진 고전이다. 시대를 넘나드는 해석의 다양성은 모든 고전에서 발견되는 보편적인 특징이기는 하지만, ‘장자’의 경우 이 점은 특히 두드러진다. 따라서 ‘장자’를 펼칠 때는 먼저 어떤 시각에서 읽을 것인가를 분명히 해야 한다. 그것은 각박한 현실로부터 삶의 거리를 두게 만드는 번득이는 지혜로 가득 찬 우화집으로 읽힐 수도 있고, 특유의 도가적 상상력으로 포장된 신화적인 사유의 보고로 다가올 수도 있으며, 또 그런 주제들을 탁월한 레토릭으로 버무려낸 한 편의 뛰어난 문학작품으로 자리매김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형형색색의 얼굴에도 불구하고 거기에 들어 있는 문제의식들의 면면을 감안한다면 ‘장자’의 본령은 역시 철학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장자’의 뼈대를 이루는 사유들이 조형된 시기가 중국철학의 황금기인 ‘戰國’ 시대라는 점도 이런 판단에 설득력을 더한다. 그러므로 ‘장자’에 대한 제대로 된 독법은 그것을 한 권의 철학서로 읽는 것이다.

‘장자’를 철학서로 읽고자 할 때 그 종잡을 수 없는 사유의 늪에서 길을 잃고 방황하지 않으려면 적어도 다음의 세 가지 측면에 대한 선이해가 준비돼 있어야 한다. 첫째, ‘장자’에서 구사되는 언어적 표현들의 특징을 이해해야 한다. 통상 ‘장자’에서 주로 사용되는 언어구사 방식은 크게 ‘우언(寓言)’과 ‘중언(重言)’과 ‘치언(癡言)’, 세 가지로 나뉜다고들 말한다. ‘우언’은 말 그대로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다른 말 속에 은폐시켜 전달하는 방식이고, ‘중언’은 사회적으로 그 권위가 이미 확립된 사람의 입을 빌리는 이중의 방식을 통해 메시지를 전달하는 형태이며, ‘치언’은 마치 내용물이 일정 기준 이상 차오르면 저절로 기울어져 쏟아지도록 고안된 술잔처럼 사용하는 언어의 의미가 고착되는 것을 시종일관 거부하는 표현법이다. 이와 같은 언어구사 방식은 언어의 본성에 대한 특유의 통찰로부터 비롯된 것인데, 이런 까닭에 ‘장자’를 읽을 때는 언제나 이른바 ‘행간’을 읽어내도록 노력해야 한다.

둘째, ‘장자’는 연대기를 달리하는 복수(複數)의 저자들이 만들어낸 집단 저작물이라는 점을 숙지해야 한다. 현재까지 가장 일반화된 견해에 따르면, ‘장자’에는 적어도 너댓 가지의 사상적 성향들이 혼재되어 있다. 장자 본인의 사상에서부터 그를 비교적 충실히 계승한 것으로 평가받는 장자후학들의 사상, 한비자류의 법가적인 경향성이 강한 사유와 그 반대편에 서 있는 아나키즘적 색채가 농후한 사유 그리고 이런 정치적인 관심들과 일정한 거리를 두려는 탈속적인 개인주의적인 성향 등이 그것이다. 따라서 ‘장자’를 읽을 때는 이런 혼재된 생각의 갈래를 개략적으로라도 묶어낼 수 있어야 한다. 만약 그렇지 못하면 ‘장자’는 고작해야 잡다한 이야기들을 두서없이 끌어 모아 놓은 단편들의 모음집에 지나지 않게 된다.

셋째, ‘장자’에 스며들어 있는 다양한 철학적 주제들의 성격을 간파해낼 수 있어야 한다. 이와 관련해 우리는 ‘장자’에 담겨 있는 사유의 폭과 깊이는 ‘전국’이라는 시대가 제기한 다양한 철학적 문제들을 나름의 관점에서 치열하게 고뇌하고 소화해낸 결과라는 사실을 명확히 인식해야 한다. ‘백가쟁명(百家爭鳴)’이라는 말에서도 잘 드러나듯이, 중국의 전국시대는 그리스의 아테네와 함께 이후의 동서양 철학사에 등장하는 모든 철학적 주제들의 원형이 제시된 시기이다. ‘장자’는 바로 이와 같은 지적 분위기의 중심을 관통하며 형성된 고전이다. 장자 본인의 사상 담겨 있다고 평가받는 내편에서 다뤄지고 있는 문제만 보더라도, ‘자연’과 ‘인간’을 비롯해 ‘주체’, ‘타자’, ‘언어’, ‘소통’, ‘실재’, ‘몸’ 등 그야말로 현대 철학에서 거론되는 거의 모든 주제를 아우를 정도로 다양하다. ‘장자’는 이런 주제들이 특유의 탈중심주의적 가치관과 심미적 세계관 속으로 수렴된 결과다. 이점이 또한 현대의 포스트모던적인 지적 상황에서 ‘장자’가 새롭게 주목받는 이유이기도 하다. 따라서 ‘장자’를 읽을 때는 이런 철학적 주제들에 대한 기초적인 소양을 먼저 갖추는 것이 무엇보다 필요하다.

‘장자’를 읽는다는 것은 이와 같은 요소들이 중층적으로 얽히며 구축해내는 철학적 사유의 정수와 대면하는 작업이다. 몇 번의 두레박질로 모두 길어 올리기에는 그 사유의 깊이가 너무 깊은 책, 그것이 ‘장자’이기 때문이다.(박원재/ 한국국학진흥원 중국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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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런 2007-01-26 16: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 덕에 또 좋은 정보 얻어갑니다. 늘 신세만 지네요. 그래도 로쟈님이 계속해서 좋은 정보 퍼뜨릴 거라 믿으며 자주 들르겠습니다.^^

로쟈 2007-01-26 16: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터넷에 다 떠 있는 정보들입니다.^^;

승주나무 2007-01-26 16: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고 보니 저도 장자가 4종이나 있었군요. 안동림본, 오강남본, 김학주본, 서광사본.. 장자는 편린만 취해서 그 전체의 그림이 그려지지 않아 코멘트하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요즘 안동림본을 읽고 있는데(비싸고 두꺼운 것을 신뢰하는 편벽 때매) 옛날처럼 원문과 대조해가며 볼 수준이나 여건은 아니구요~~
장자의 정역본이 무엇인지 스스로 판단하려면 시간이 오래 걸리겠지만, 모두 잡고 읽어보려구요. 근데 김학주본은 이제 애정이 식게 되더군요^^ 좋은 펌정보 감사합니다.

로쟈 2007-01-26 17: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몇 종을 갖고 있는데, 이게 문헌고증도 필요하지만 문학성도 옮겨줘야 하기 때문에 '난감한' 번역의 대표적인 사례로 꼽히는 거 같습니다. 거기에 '내편'과 '외편', '잡편' 간의 차이(저자의 복수성)도 고려해야 하겠고. 연구서들이 많이 나와 있지만 가장 읽을 만한 번역(가장 정확하고 아름다운 번역?)이 먼저 확정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네요.

biosculp 2007-01-26 17: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물가물한데 동심론은 이탁오 애기하는것 같은데 김용옥교수가 그런식으로 해석을 한 기억은 없는데 다시 책을 뒤져봐야 겠군요.
그리고 김용옥 교수 책을 기준은로 노자철학이것이다에서 왕필의 필터로 본 노자이기에 그 왕필이 살던 시대 위나라지만 한나라가 붕괴된후라 한제국의 논리를 먼저 해부하고 노자로 가자 뭐 이런식의 논리였던것 같은데. 좀 심하게 애기하면 김용옥도 다 한애기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고요. 쩝

로쟈 2007-01-26 17: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존 학계와 '불편한 관계'이면서 도올과도 생각이 다르다고 하니까 저도 뭐라고 덧붙이진 못하겠습니다. 전공자들끼리도 의견조율이 안되는 게 고전번역인지라...

기인 2007-01-26 18: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장자는 아예 다른 텍스트도 있지 않습니까? 왕필 이전 텍스트도 있고, 그 해석에 대해서 김시천 선생님께서 숭실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으셨는데요. 벌써 그 텍스트 이름도 가물거립니다;; 저도 장자 가장 좋아하는 고전 텍스트였었거든요. 매우 법가적으로 해석하셨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로쟈 2007-01-26 18: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가요? <철학에서 이야기로>를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마늘빵 2007-01-26 22: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박원재씨 저 분한테 학부시절 장자를 배웠더랬는데;;;

기인 2007-01-27 08: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출국하기 직전 떠오른 것.. 김시천 선생님은 장자가 아니라 노자 도덕경 새로운 텍스트였어요. ㅋㅋ 죄송합니다; 음. 집에와서 책장에 보니 '노자'아저씨의 책을 보고 두둥;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위지본 도덕경이었던가. 새로운 텍스트는요. 아니 근데 왕필 아저씨는 장자도 재해석 한 건가요? 스물몇살때 도덕경 주 달고 요절하신 천재로 기억하는데.. 돌이켜보면 6년 전쯤 기억이라 막막합니다.. 도는 말할 수 없고, 말할 수 없는 것은 기억할 수 업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