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틀 전 월요일에 카페 스몰토크에서 상영된 <위로 공단> 공식 후기입니다. 후기 작성자는 바로 접니다. 상영회에 오신 분들이 많지 않아서 그분들 각각 말씀했던 내용을 기록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쓰다 보니 내용이 많군요. 또 후기 대부분이 영화를 비판한 내용입니다. 영화를 먼저 본 후에 이 후기를 참고하시기를 권합니다.

 

멤버들의 의견에 반박하고 싶으면 댓글로 남겨주셔도 좋습니다. 하지만 멤버들은 이 조용한 블로그에 찾아오지 않아요. 그렇다고 블로그 주인장인 제가 그분들의 의견을 대신해서 말할 수 없어요.

 

정말로 이 후기 속 내용에 대해서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매주 월요일 저녁에 레드스타킹 독서 모임이 진행되는 카페 스몰토크를 방문해주십시오. 해치지 않아요!

 

 

 

 

 

 

 

 

새로운 한주가 시작되면 불청객처럼 ‘월요병’이 찾아옵니다. 월요일만 되면 무기력하고 피곤해집니다. 레드스타킹도 월요병의 습격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몸이 아파서 월요일 모임에 오지 못한 분들이 많았어요. 어제는 모임에 자주 오시는 분들과 함께 임흥순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위로 공단>을 봤습니다. 영화 보기 전에 멤버들은 ‘꽃보다 페미니즘’ 강연 준비 및 홍보 방식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었어요.

 

 < 위로 공단 >은 저마다의 꿈을 위해 열심히 묵묵히 일해 온 여성 노동자들의 삶을 조명한 다큐멘터리 영화입니다. 이 영화는 한국 산업화의 빛과 그림자가 집약된 1970년대 공장을 배경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기 시작합니다.

 

 

 

 

 

 

 

 

 

 

 

 

 

 

 

 

 

* 김진숙 《소금꽃나무》 (후마니타스, 2007)

 

 

 

영화는 평화시장 여공, 1979년 YH무역 사건, 1985년 구로공단 동맹 파업, 2005년 기륭전사 사태 등 우리가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될 노동 운동의 역사를 언급합니다. 이 과정에서 실제 노동 현장에서 악전고투하면서 싸웠던 수십여 명의 여성 노동자들의 인터뷰 장면이 나옵니다. 영화 중반부에 2011년 한진중공업 크레인에서 309일간 고공농성을 했던 김진숙 님의 인터뷰 장면도 나옵니다.

 

 

 

 

 

 

 

 

 

 

 

 

 

 

 

 

 

 

 

 

 

 

 

 

 

 

 

 

 

 

 

 

 

* [절판] 전순옥 《끝나지 않은 시다의 노래》 (한겨레출판, 2004)

* 김원 《여공 1970, 그녀들의 反역사》 (이매진, 2006)

* 조영래 《전태일 평전》 (아름다운전태일, 2009)

* 신순애 《열세살 여공의 삶》 (한겨레출판, 2014)

 

 

 

 

여성 노동자들은 한국 노동운동 역사의 큰 축이었습니다. <위로 공단>은 노동에 관한 영화로 볼 수 있어요. 하지만 그동안 ‘노동’은 남성 노동자 중심의 일터에 어울릴만한 단어로 쓰였어요. 하지만 일터에는 여성 노동자들도 있었습니다.

 

 

 

 

 

 

 

평화시장 방직공장에서 일하는 어린 여공들은 ‘공순이’라고 불렸습니다. 중학교도 제대로 마치지 못하고 상경한 어린 여공들은 대부분 ‘시다(수습생)’로 취직했습니다. 사실 ‘공순이’는 좋은 의미의 말은 아닙니다. 그녀들은 ‘공순이’ 소리를 들으면서 아침부터 밤 10시까지 일을 했습니다. 여성 노동자들은 한국의 경제발전을 이루는 데 중심축이 돼왔지만, 그로 인해 억압과 희생을 강요당하기도 했습니다. 1970년대 중반 구로단지 근로자의 60%가 여성 근로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은 대부분 오빠나 남동생의 학비를 벌기 위해 가난을 피해 전국 각지에서 상경한 15~16세 전후의 미혼여성들이었습니다. <위로 공단>은 묵묵히 일해 온 여성 노동자들의 눈물과 땀방울을 보여줍니다. 따라서 정확히 말하자면, <위로 공단>은 여성 노동자들을 위한 영화로 볼 수 있어요.

 

여성 노동자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라 너무 기대를 많이 한 탓일까요? <위로 공단>은 여성 노동자 이야기를 생생한 인터뷰와 감각적인 영상으로 풀어낸 뛰어난 작품인데도 불구하고, ‘여성 영화’라는 기대에 크게 미치지 못한 한계가 보였습니다. 레드스타킹은 <위로 공단>을 비판적으로 분석하는 방향으로 토론을 시작했습니다. 소재는 좋았으나 전체적으로 영화가 실망스럽다는 반응이 많았습니다.

 

이 영화 중간중간마다 얼굴에 하얀 천 또는 눈가리개를 쓴 두 명의 여성(여공 또는 자매)이 등장합니다. 그녀들은 말없이 녹색이 우거진 숲을 걷거나 황량한 장소(공장 옥상, 여공들이 묵었던 오래된 여인숙) 한가운데서 우두커니 서 있기도 합니다. 이 두 명의 여성은 꿈과 행복에 눈이 멀어 일만 했던 여성 노동자들을 상징할 수 있습니다. 감독은 여성 노동자의 삶을 미술적 장치들과 결합하여 영화의 완성도를 높였습니다. 관객은 이 영화 속에 삽입된 감독의 의도적인 미술적 장치를 해석합니다. 하지만 환상(또는 공포감)을 불러일으키는 영화 속 미술적 장치에 거부감을 느낀 분들이 많았습니다. 진○ 님은 영화가 시작되는 장면이 무섭게 느껴졌다고 말했습니다. 마치 한 편의 ‘공포영화’를 본 듯한 느낌이었다는군요. 히피 님은 미술적 연출에 치중한 감독의 연출 방식을 비판했습니다. 그리고 예술적 감수성이 엿보인 연출 방식에서 ‘감독의 자아도취’가 느껴졌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얼굴에 하얀 천이 덮인 두 여성의 모습을 보고, 감독이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에 영감을 받았다고 생각했습니다. 영화 속 여성의 모습과 마그리트의 그림을 비교해보시죠.

 

상○ 님은 노동운동 관련 사건들을 간략히 언급한 영화의 연출 방식이 아쉽다고 말했습니다. 기○ 님은 노동 운동가, 대중 모두가 불만족을 느낄 수 있는 영화라고 평했습니다. 관객이 한국노동운동사에 관한 배경지식 없이 영화를 본다면 영화를 이해하기 어려울 수도 있겠습니다. 히피 님은 이 영화가 여성노동자의 수난을 훑어 내리는 데 급급했다고 비판했습니다. 그리고 영화가 ‘여성 노동’이 어떤 구조적인 문제에 놓여 있는지 어떤 권력과 위계 관계 속에서 차별받고 있는지 짚어내는 것을 교묘하게 피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영화의 보여주기식 연출에서 감독이 생각하는 위로가 무엇인지 의문이 들었다고 말했습니다.

 

영화에 세상을 떠난 노동자들을 추모하기 위해 굿(무속의 종교 제의)을 치루는 장면이 나옵니다. 은○ 님은 이 장면도 비판했습니다. 아마도 감독은 무당 굿 장면을 통해 노동자들의 죽음을 애도하는 메시지를 보여주려고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은○ 님은 노동자들의 ‘한’을 풀어주는 무당 굿이 ‘한국적인 정서’에 잘 들어맞는 ‘한국적인 위로’에 그쳐서 아쉽다고 말했습니다.

 

혜○ 님은 여성 노동자들의 인터뷰가 여성 노동자들의 감정 표출에 치중되는 바람에 여성 노동자들의 투쟁 의식이 눈물에 의해 희석된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은○ 님은 이 영화에서 진취적이고 주도적으로 보여야 할 여성 노동자들이 ‘패배와 좌절’을 겪은 것만 보여준 것에 불만을 드러냈습니다. 또, 이 영화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두 명의 여성’이 ‘치마를 입은 여성’으로 묘사된 장면을 지적했습니다. 이는 남성의 시선에 의해 ‘박제화된 여성성’입니다. 젠더 인식이 부족한 남성 감독의 한계를 확인할 수 있는 문제의 장면이었습니다. ○정 님은 영화 엔딩 자막에 공개된 감독의 헌사를 비판했습니다.

 

 

“40년간 봉제공장에서 일한 어머니, 백화점 의류매장과 냉동식품 코너 판매원으로 일한 여동생에게 이 영화를 바친다.”

 

 

○정 님은 여성 노동자를 ‘어머니’, ‘여동생’으로 일반화한 감독의 표현이 거슬렸다고 말했습니다. 파업 시위 도중에 큰 부상을 입어 세상을 떠났거나 직업병으로 일찍 세상을 떠난 여성 노동자들이 있습니다. 이분들 모두 결혼을 했을까요? 개인의 건강권과 생명권에 달린 파업에 동참한 여성 노동자를 여성의 주체적인 목소리와 삶 자체를 희미하게 만드는 ‘어머니’와 ‘여동생’으로 한정해서 표현한 헌사에 젠더 고정관념(gender stereotypes)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레드스타킹은 여성 노동권 문제를 환기할 수 있는 여성 영화가 많이 만들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위로 공단>처럼 이런 식으로 영화를 만들면 안 됩니다! 여성 노동권 문제를 제대로 건드린 여성 영화를 만들려고 했다면 남녀 노동자 간의 경제적 불평등을 일으킨 구조적 문제를 보여줘야 했습니다. <위로 공단>은 여성 노동자들의 눈물 섞인 하소연을 보여주는 데 치중했습니다. 스크린을 구경한 관객들은 여성 노동자들이 처한 암울한 현실에 일시적으로 공감하고, ‘위로’를 합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잊히죠. 여성 노동권 보장은 (남성 중심) 노동 운동가나 좌파 정치 운동가들만이 다룰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페미니스트들이 여성 노동운동사와 여성 노동자 인권 문제에 관심을 가진다면 여성 노동에 대한 기존의 (남성 중심) 시각을 개선할 수 있는 중요한 전환점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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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애니비평 2018-04-11 12: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위로공단과 소금꽃나무를 보면서 참 마음이 아팠습니다.

cyrus 2018-04-12 12:22   좋아요 0 | URL
<위로공단>에 나온 김진숙 님 인터뷰가 슬펐습니다.

목나무 2018-04-12 09: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영화를 개봉했을때 감독과의 토크도 함께 했었는데요. 저역시 뭔가 찜찜했던 터라 감독의 의도가 궁금했었던 기억이 나네요. 근데 그 자리에서는 제대로 된 답을 듣지 못했던 기억도. . . ㅡ.ㅡ

cyrus 2018-04-12 12:23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이 영화가 뚜렷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의도로 만들어졌으면 작품성이 더 좋았을 것입니다. ^^;;
 
우리의 의지에 반하여 - 남성, 여성 그리고 강간의 역사
수전 브라운밀러 지음, 박소영 옮김 / 오월의봄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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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남자와 여자가 있다. 남자는 평소 사랑하는 여자와 데이트를 하던 중 진한 스킨십을 시도한다. 그는 너무 흥분한 나머지 강제로 삽입 섹스를 한다. 남녀 간의 삽입 성교는 상호 동의하에 이루어지지만, 남성이 강제로 여성의 몸속으로 들어왔다면 ‘데이트 강간’이다. 어떤 남성들은 ‘데이트 강간’이 페미니스트들이 남성을 혐오하기 위해 만든 것이라고 말하며 과민반응을 보이기도 한다. 이 용어는 데이트 중 생기는 강간의 개념으로 부부강간만큼이나 생소하게 느껴지게 된다. 하지만 단지 낯설다고 느끼며 외면하기엔 그 심각성이 만만치 않다. 상대방에 대한 믿음이 깨지는 것은 물론이고 자칫 이런 상황을 비관하면서도 벗어나지 못한 채 지속적인 피해자로 남게 되는 여성들이 적지 않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 강간 피해자는 죄인 취급을 받는다. 가해자에게 상처를 입은 강간 피해자는 두 번 세 번 운다. 검찰과 경찰 수사 과정에서 또 상처를 입고 재판 과정에서 또다시 모욕을 당한다. 수사와 재판 과정에서 자존심은 짓밟히고 인권은 파괴당한다. 심지어 가해자에게 협박까지 당한다. 강간 피해 여성은 보호받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이 계속 지속한다면 ‘강간 문화’라는 위험하고도 왜곡된 편견이 횡행하는 세상이 된다.

 

수잔 브라운밀러《우리의 의지에 반하여》(오월의봄, 2018)는 강간 피해 여성들의 참혹한 실상을 증언하기만 하는 책이 아니다. 이 책은 강간이 ‘성적 본능’ 때문에 발생하는 ‘우발적’ 사건이 아니라, 폭력성’과 ‘권력’에 의해 매개된 가해자의 고의적인 행동임을 입증한 책이다. ‘남성 연대(male bonding)는 물리적 폭력과 가부장제 이데올로기를 동시에 실행하는 장이다. 여성을 강간하고 학대함으로써 남성은 ‘남성성’을 확인하고, 가부장적 권위를 확고부동한 것으로 만든다. 그 폭력 행위가 여성을 유린하는 행위였던 만큼, 남성들은 그 행위를 실행하여 우월성을 가진다.

 

진화생물학인간의 행동을 진화의 관점에서 생각하는 학문이다. 진화생물학에서 특히 논쟁이 격렬한 주제는 남녀관계 또는 섹스다. 대부분 진화생물학자는 “남성의 강간 본능은 진화의 산물이다”, “남성이 여성을 겁탈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행동이다”라고 주장한다. 프로이트와 그의 정신분석학을 이어받은 심리학자들은 강간 피해 여성의 심리상태를 진지하게 연구하지 않았다. 그들의 관심사는 강간범이다. 프로이트주의자들은 강간범을 ‘성적 사이코패스’로 규정했고, 강간범이 심리치료를 받으면 과도한 성적 욕구가 제거된다고 믿었다. 마르크스와 남성 사회주의자들은 여성을 억압하는 사회구조를 지적하고 여성해방을 위한 전략을 모색했으나 여성을 불리하게 만드는 강간 문화를 문제 삼지 않았다.

 

《우리의 의지에 반하여》는 강간과 섹스를 구분하지 못하고 성폭력을 정당화하는 강간 문화를 폭로한다. 강간은 ‘누구’의 문제가 아니라 ‘권력과 폭력’의 문제임을 밝히는 것이 바로 이 책의 목표이다. 저자는 성경(2장), 전시 강간(3장), 19세기 미국에서 일어난 백인 남성의 흑인 여성 · 인디언 여성 강간(4장, 5장, 7장), 동성 간의 감옥 강간(8장) 등 생생한 사례들을 해석하면서 이 문제들이 여성에 대한 폭력이 권력의 문제이며 국가 · 민족 · 인종 등과 결합된 예상보다 훨씬 복잡한 난제임을 드러낸다. 각종 강간 사건의 진행과정을 통해 가해자의 권위적 위치에 억눌려 피해와 비난을 감수하는 피해 여성들의 현실을 보여준다.

 

1970년대 미국에서 강간 반대 운동이 확산하기 전까지 강간은 당연한 일상 문화(!)이거나, ‘남녀상열지사’로 미화되었다. 성경에서 묘사한 강간은 피해 여성을 소유한 가족, 국가에 대한 공격으로서, 남성 가부장의 재산권 침해를 의미했다. 여성의 몸이 남성의 소유라는 인식 때문에 강간은 범죄로 인식되기 어려운 것이다. 강간은 대개 가해자와 피해자 두 사람만이 있을 때 발생하는 사건의 특수성(강간 사건의 증거는 대부분 형태가 없다)과 재판부의 남성(가해자) 중심적인 태도로 인해 강간 사건을 법에 호소하는 경우 승소율이 매우 낮다. 경찰과 법원은 강간 피해 여성을 ‘방탕한 자’로 간주하여 이들을 의심하고 추궁한다. 심지어 피해 여성의 취약점을 노려 강간을 시도한 경찰들도 있다. 경찰은 ‘법의 권위를 대행하도록 사회가 인정한 직업’이다. 그런데 인권의식이 낮은 경찰은 가해자를 엄벌하기는커녕 피해자에게 진술을 강요하고 수치심을 들게 하는 질문을 한다. 이 과정에서 피해자들을 절망에 빠뜨리는 ‘2차 가해’가 벌어진다.

 

《우리의 의지에 반하여》가 나온 지 삼십여 년이나 지났으나 강간 범죄는 제대로 처벌되지 않고 피해자들은 ‘가해자’로 몰린다. 최근 미투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면서 우리 사회에 남아있는 강간 문화에 대해 질타하는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다. 그런데도 페미니스트들이 지지하는 미투 운동을 깎아내리는 남성들이 있다. 그들이 페미니스트와 미투 운동에 예민하고 유난스럽게 구는 이유는 다양할 것이다. 따라서 그들의 입장을 단순히 페미니즘에 반기를 드는 일탈 문제로만 접근할 것이 아니라 그들을 그렇게 만든 사회구조도 살펴봐야 한다. 한국은 강간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이 사실을 알리겠다’고 협박할 수 있는 아주 부조리한 사회 구조가 형성된 곳이다. 가해자가 피해자를 협박하거나 고소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지금도 일어나고 있다. 이 부조리리한 상황이 발생하는 이유는 성폭력 피해자를 모욕하는 강간 문화와 왜곡된 남성 우월주의 때문이다. 가해자의 죄의식을 무뎌지게 하는 이 몰상식한 강간 문화는 ‘성폭력 피해자에게 아무런 책임이 없다’는 아주 기초적인 상식이 받아들여지지 않는 한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의지에 반하여》는 1975년에 나온 책이다. 그렇다 보니 시대적으로 맞지 않거나 잘못 알려진 내용이 여럿 등장한다. 저자는 1장에서 ‘야생 상태에서 강간하는 동물’이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우리의 의지에 반하여》가 출간된 이후부터 동물도 강간한다는 사실이 밝혀졌고, 이에 비판받은 저자는 서문에 진화생물학을 비판하는 내용을 추가했다. 저자는 아우구스트 베벨《여성론》(까치, 1990)을 참고하면서 중세 시대의 초야권(신부의 결혼 첫날밤을 소유하는 영주의 권리)을 언급한다. 그러면서 저자는 초야권은 ‘일종의 강간’이며 유럽 일부 지역에서는 비정기적으로 초야권이 이루어졌다고 주장한다. 그동안 초야권은 ‘중세 유럽의 악습’으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지금은 초야권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반박 입장에 더 힘이 실리고 있다.

 

책 304쪽에 ‘방관자 효과’를 설명할 때 가장 많이 언급되는 ‘키티 제노비스 사건’ 이야기가 나온다. ‘38명의 사람’이 끔찍한 사건을 목격하고도 아무도 신고를 하지 않았다고 알려졌다. 하지만 사건이 벌어진 50년 후, 이 사건이 모두 ‘언론의 왜곡 보도’로 조작됐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실제로 제노비스가 살해당하던 당시의 목격자 수는 6명이었으며 그중 2명이 신고를 했다.

 

책 306쪽에 잠깐 언급된 ‘로젠버그 사건’에 대한 역자의 설명이 빈약하다. 1953년 미국의 로젠버그 부부는 소련에 미국의 원자폭탄 제조관련 비밀을 넘긴 혐의로 체포되었다. 부당한 재판으로 부부는 사형선고를 받았고 전기의자에 앉아 숨을 거두었다. 아인슈타인, 사르트르 등 진보적인 지식인들과 교황까지 나서 구명운동을 벌였으나 부부의 정해진 운명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이게 지금까지 그렇게 알고 있었던 로젠버그 사건에 대한 설명이다. 역자는 주석에 ‘죄를 입증하는 명확한 증거 없이 부부는 간첩죄로 사형당했다’라고 썼다. 후일 전직 KGB 요원의 증언에 따르면 남편은 산업정보를 제공한 간첩이었음이 확인되었다. 하지만 그가 넘긴 정보가 원자폭탄을 만들 만큼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아내는 이 사건과 전혀 관련이 없었다. 2016년에 로젠버그 부부의 자녀들은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에게 모친이 무죄임을 증명해달라고 청원하는 서한을 전달했다.

 

저자는 동성애자들이 동성애를 ‘마조히즘’으로 연관시키는 것에 반대하는 입장을 드러낸다(406쪽). 그녀는 동성애자들이 강조하는 ‘마조히즘’이 동성 간 강간 문제의 본질을 회피할 수 있다고 봤다.

 

 

마조히즘적 요소 자체가 문제라는 것이 아니라, 모든 남성 동성애자들은 강제로 당하기를 원한다는 식의 믿음이 그렇듯, 경우를 가리지 않고 마조히즘을 가정한다는 것이 문제이다. (406쪽)

 

 

‘모든’ 남성 동성애자들이 강제적 성행위를 선호한다고 볼 수 없다. 저자의 주장을 곧이곧대로 해석하면 동성애자는 ‘상대방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일방적인 성행위를 강요하는 성적 취향을 가진 사람’이다. 그렇게 동성애자를 바라보는 인식은 반동성애를 주장하는 일부 근본주의적 기독교의 입장과 유사하다.

 

282쪽에 오식이 있다. “범행 시간대는 보통 낮보다 밤히 선호된다.” ‘밤히’는 ‘밤이’의 오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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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4-10 17: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8-04-11 10:05   좋아요 1 | URL
네, 성폭력은 피해자의 몸뿐만 아니라 피해자의 삶, 그리고 피해자 가족들의 삶까지 송두리째 파괴하는 잔인한 범죄입니다.

서니데이 2018-04-10 17: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키티 제노비스 사건‘은 많이 알려진 내용이어서 간략하게는 알고 있지만, 그것이 언론의 왜곡보도에 의해 실제와 다르게 잘못 알려졌다는 것은 잘 몰랐습니다. 리뷰를 읽고 검색을 통해 찾아보니 그러한 새로운 사실이 알려진 것은 최근의 일이네요.
cyrus님, 리뷰 잘 읽었습니다.
편안한 저녁시간 보내세요.^^

cyrus 2018-04-11 10:07   좋아요 1 | URL
저도 최근에 ‘제노비스 사건의 진실’을 알았어요. 로젠버그 부부 사건도 그렇고요. 두 사건 모두 책에서 본 내용입니다. 독자가 책에 적힌 내용을 의심하지 않으면 알려지지 않은 진실을 알 수 없게 됩니다. ^^

붕붕툐툐 2018-04-10 20: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cyrus님의 리뷰는 정성과 지식이 넘치네요. 존경스럽습니다.

cyrus 2018-04-11 10:10   좋아요 0 | URL
제 글에 쓸데없이 넘치는 게 너무 많아서 글 내용이 길어져요. 그래서 글을 읽기가 힘들어요. 솔직히 저도 제가 쓴 글을 읽지 않아요.. ㅎㅎㅎ

이하라 2018-04-11 09: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강간에 문화라는 단어가 더해지니 말도 아니게 섬찟해지는군요. 게다가 역사가 증거하기까지 하니... 데이트강간이라는 것도 인식을 못해왔었는데 심각한 문제임을 다시 생각하게 됐습니다.

cyrus 2018-04-11 10:11   좋아요 0 | URL
<우리의 의지에 반하여>에 각종 강간 피해 사례들이 많이 나옵니다. 차마 읽기 힘든 내용들도 있습니다. 책을 보는 내내 마음이 무거웠어요.
 

 

 

 

책 읽는 레드스타킹은 내일 쉽니다. 하지만! 내일은 여성 영화를 보는 날입니다. 내일 상영작은 임흥순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위로공단>(2015)입니다.

 

 

 

 

 

 

 

<위로공단>은 2015년 제56회 베니스 비엔날레 미술전 은사자상 수상작입니다. 40년 넘게 봉제공장에서 일한 여성들의 삶이라는 이야기에서 착안해 아시아 여성노동이라는 역사의 한 장을 다룬 영화입니다. 이 영화는 국내뿐 아니라 베트남, 캄보디아 등 국외 노동자들의 삶을 다루어 신자유주의 세계의 노동 변화에 따른 여성 노동자들의 현실적 불안을 포착했습니다. 레드스타킹과 함께 <위로공단>을 보면서 오랜 시간 동안 ‘보이지 않은’ 여성 노동에 대해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져봅시다.

 

상영회 장소는 카페 스몰토크입니다. 저녁 7시부터 영화가 시작됩니다. 편안한 마음으로 카페에 오시면 됩니다. 영화 시작 전에 일찍 카페에 오셔서 음료를 주문하는 것이 좋습니다. 영화가 시작된 후에 음료를 주문하면 커피 머신에서 생기는 소음이 생깁니다. 영화 보는 데 방해가 되겠죠?

 

 

 

 

 

 

4월 16일 월요일, 4월 28일 토요일에 열릴 페미니즘 강좌도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강연 신청은 여기로! → https://www.instagram.com/feminism_talk/ (레드스타킹 공식 인스타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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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8-04-10 00: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지난번엔 늦은 밤이어서 페미니즘 강좌에 못 간 대구 친구가 있었는데
이번엔 7시, 3시라서 그 친구가 갈 수 있겠네요. 좋은 정보 꼭 전하겠습니다.

cyrus 2018-04-10 12:05   좋아요 0 | URL
그분께 말씀이라도 전해주시는 것만으로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이번에 레드스타킹이 처음으로 강연회를 준비하는 거지만, 이 두 날을 위해 정말로 열심히 준비했어요. 강연자 두 분은 대구에 모시기 힘든 분이라서 대구에서 이런 강연을 접하기가 쉽지 않아요. 페크님 친구 분이 강연에 꼭 오셨으면 좋겠어요. ^^
 
강간은 강간이다
조디 래피얼 지음, 최다인 옮김 / 글항아리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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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초, 프랑스의 배우 카트린 드뇌브와 미술평론가 카트린 미예 등 100명은 전 세계에 확산된 ‘미투 운동’을 비판하는 공개서한을 「르 몽드」에 발표했다. 이들은 성폭행은 범죄지만, ‘남성이 여성을 유혹하는 것’은 범죄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미투 운동이 남성들을 유혹할 수 있는 여성의 자유를 제한할 수 있다고 우려를 표했다. 그러나 공개서한은 비판에 직면했고, 카트린 드뇌브는 엄청난 비난 여론을 견디지 못하고 5일 만에 사과했다. 그녀는 사과문을 통해 자신도 ‘페미니스트’이며 1971년 낙태 처벌 반대 운동에 동참한 적이 있다고 밝혔다. 지극히 주관적인 편견, 잘못된 생각에 근거한 엉뚱한 주장은 오히려 성폭행 피해자에게 악영향을 준다. 놀랍게도 성적 자유를 옹호하는 일부 페미니스트는 성폭행의 심각성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성폭행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과는 달리 모르는 사람보다 아는 사람에게 당하는 경우(면식 강간)가 많다. 성폭행 피해 여성은 남성이나 성에 대해 공포증을 느끼면서 불안이나 우울증세, 죄의식, 자살 충동, 결혼생활에 대한 불안, 생활 부적응 등 심각한 후유증을 앓는다. 성폭행 피해 여성의 후유증이 이처럼 심각한데도 성폭행에 대한 사회적 편견이 심하다.

 

 

* 많게는 전체 강간 신고의 50%가 의도적 허위 신고라고 단언한다. [1]

* 강간 피해 여성은 멍청하고 헤프다. 그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조심하지 않아서 강간당한 것이다. [2]

* 면식 강간은 문제가 아니라 성적 자유에 따르는 허용 가능한 위험이다. [3]

 

 

성폭력은 가해자가 저지른 잘못임에도 불구하고 피해자에게 문제가 있는 것처럼 취급되기 때문에 더욱 심각한 범죄이다. 성폭행 기억을 떠올리는 것조차 괴로운 피해자에게 책망하는 것은 피해자뿐만 아니라 피해자 가족들에게까지 정신적 상처를 준다.

 

여성 성범죄 전담 변호사인 조디 래피얼《강간은 강간이다》(글항아리, 2016)라는 책에서 성폭력 피해자에게 고통을 주는 사회적 편견들을 정면으로 비판한다. 강간 부정론자들은 강간의 심각성을 보여주는 통계를 의심한다. 저자는 2∼8%에 불과한 허위 신고를 근거로 강간 통계의 신뢰성에 꼬투리 잡는 강간 부정론자의 주장이 강간의 위험성을 축소한다고 비판한다. 앞서 언급했듯이 성적 해방을 페미니즘 운동의 우선순위로 두는 페미니스트(성 해방론자)도 강간 부정론자들의 주장에 동조하는 모습을 보인다. 성 해방론자들의 논리에 따르면 남성을 유혹하는 여성은 주체적인 존재이다. 남성을 유혹하는 과정에서 여성이 강간을 당하면 남성이 아닌 여성에게 책임을 묻어야 한다. 성 해방론자들은 강간을 단순하게 ‘나쁜 섹스’로 치부한다. 이들의 주장은 ‘성적으로 개방적이고 자유로운 사회’에 부합하는 ‘여성의 목소리’를 대변한다. 그러나 성폭력 앞에 침묵을 강요받거나 숨죽여야 했던 ‘피해 여성의 목소리’를 지우는 데 일조하는 역효과가 생긴다.

 

저자가 인터뷰한 다섯 명의 피해자 모두 추악한 진실을 말할 기회를 박탈당했다. 강간 사건을 다루는 법정에서조차 강간을 당한 피해 여성에게 오히려 성적으로 능동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았냐, 옷을 야하게 입고 있지 않았냐, 위험한 곳에 일부러 혼자 있지 않았느냐 등을 따지며 강간 가해자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재판을 끌고 가려는 경향을 보이기도 한다. 강간 가해자 편을 드는 사회적 편견과 가해자의 형량을 낮추려는 협잡꾼들 속에 피해 여성은 어느새 가해자로 몰린다. 이러한 ‘2차 가해’를 받는 피해 여성은 정상적인 일상생활을 영위하기 어렵다.

 

잘못한 사람은 가해자인데 피해자가 왜 협잡과 편견으로 수치심을 느끼고 고통을 스스로 감당해야 하는가. 《강간은 강간이다》는 성폭행에 대한 편견이 어떻게 확대 재생산되고, 그것이 피해자를 어떻게 괴롭히는지를 보여준다. 《강간은 강간이다》는 성폭행 피해 여성의 행실에 책임을 전가하고, 그녀들의 힘 있는 목소리를 조롱하는 우리 사회를 그대로 비춰주는 거울과 같은 책이다. 이 ‘거울 같은 책’을 무시하고, 책의 내용 자체를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내가 그들을 설득해봤자 소용없다. 그들은 날 ‘페미나치 부역자’, ‘여자들에게 인정받으려고 남자를 배신한 놈’이라고 험악한 말을 하면서 조롱할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약점이 부끄러워서 거울을 보지 않는다. 오로지 상대방를 대할 때 상대방의 약점만 보고 조롱한다. 성폭행의 심각성을 축소하는 사회는 인간의 존엄성이 짓밟히고, 사회적 편견과 질시와 힘의 논리로 약자를 굴복시키는 미개한 사회이다.

 

 

 

 

[1] 조디 래피얼 《강간은 강간이다》, 12쪽

[2] 같은 책, 65쪽

[3] 같은 책, 7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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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장소] 2018-04-05 20: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끄러움이 뭔지 가르쳐야 하는지 모르겠네요 .

cyrus 2018-04-06 15:18   좋아요 1 | URL
사실을 설명해줘도 귀를 닫고 무시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답답해요.. ^^;;

sprenown 2018-04-06 19: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포르노에 대해 문화적 표상으로 보면서 포르노 규제에 반대하는 입장의 페미니즘도 있다는 글을보고 놀랐어요. 페미니즘... 참 복잡하군요.

cyrus 2018-04-07 16:28   좋아요 2 | URL
저도 페미니즘을 공부하다보면 난감한 상황에 직면하게 되요. 포르노 규제 문제뿐만 아니라 성소수자 문제도 페미니즘에서 가장 논쟁적인 문제입니다. 그래서 저는 페미니즘을 죽을 때까지 공부해야 하는 학문이라고 생각해요. 시대가 달라지면 여성 운동의 방향도 달라질 것입니다. 지금의 페미니즘이 ‘진정한 페미니즘’이라 할 수 없어요. 언젠가는 구시대에 유행했던 페미니즘 사상이 재조명받을 수도 있어요.
 

 

 

백남준은 상식에 벗어난 기행을 펼치는 전위예술가로 명성을 날렸다. 1960년 독일, 무대에서 피아노를 연주하던 백남준은 갑자기 벌떡 일어나 울면서 뛰어다니다 도끼로 피아노를 부쉈다. 그리고 가위를 든 채(!) 객석 맨 앞줄에 앉은 전위음악가 존 케이지에게 달려갔다. 백남준은 케이지의 넥타이를 가위로 싹둑 잘라버렸다. 관객들이 어리둥절해 있는 사이 그는 유유히 무대를 빠져나와 방송으로 알렸다. “여러분, 공연은 끝났습니다”

 

 

 

 

 

 

그의 공연은 ‘피아노포르테를 위한 연습곡’이라는 제목으로 알려지게 됐다. ‘피아노포르테를 위한 연습곡’은 기존의 권위와 관습을 타파하는 백남준 특유의 예술관을 잘 드러난 공연으로 평가받는다. 이 공연에서 눈여겨 볼 부분은 가위로 넥타이를 자른 백남준의 행동이다. 넥타이는 서구문화권에선 남성 권위를 상징하는 장식물이다. 백남준은 늘 넥타이를 매는 남자들의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서 넥타이를 잘랐다고 설명했다. 따라서 넥타이 자르기는 남성에 대한 공격, 권위에 대한 공격이며, 서구 문화에 대한 공격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만약에 백남준이 ‘여성’이라면, 아니 여성 전위예술가가 넥타이를 자르는 행위를 했다면 관객과 평론가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백남준의 공연과 다른 상반된 반응을 보였을 것이다. 이 여성은 예술가로 인정받지 못하고, ‘남성 혐오주의자’로 비난받았을 것이다. 프로이트라면 넥타이를 자르는 여성이 남성의 거세 공포를 환기하는 상징이라고 해석했을 것이다.

 

 

 

 

 

 

 

 

 

 

 

 

 

 

 

 

 

 

 

* 마리아 미즈 《가부장제와 자본주의》(갈무리, 2014)

* 찰스 버그먼 《오리온의 후예》(문학과지성사, 2010)

 

 

 

가위는 ‘무기’가 될 수 있다. 인류사는 무기와 함께 발전했다. 금속을 제조하고 가공하는 기술이 향상되면서 무기가 발달하였고, 군주는 영토 확장에 더욱 치열하게 몰두했다. 이른바 ‘제국’이 탄생하는 것이다. 무기를 만들 줄 알고, 무기를 능숙하게 다룰 줄 아는 남성은 권력을 쥔 세력으로 급부상했다. 수렵 채집 사회의 남성과 여성은 비교적 평등했다. 원래는 남성과 여성 모두 사냥을 했지만, 농경사회 이후에 남성은 사냥을, 여성은 양육을 담당했다. 역사적으로 남성과 여성의 ‘성별 분업 노동’이 시작된 것은 ‘무기’와 관련이 있다. 이런 분업의 형태가 수만 년 동안 유지되면서 집 안에 머무는 여성은 남성으로부터 통제받고, 착취당하는 ‘남성의 전유물’로 전락한다.

 

마리아 미즈《가부장제와 자본주의》(갈무리, 2014)에서 ‘사냥꾼-남성’ 모델 중심으로 형성된 젠더 이분법 및 성별 노동 분업이 남성들은 수혜자로 등극하고, 여성들은 극단적으로는 ‘노예’로 전락시켰다고 말한다. 찰스 버그먼《오리온의 후예》(문학과지성사, 2010)는 사냥이 ‘남성 대 여성’, ‘인간 대 자연’, 그리고 ‘문명 대 식민지’로 이분법으로 구분하는 기준이 되는 '남성성'의 역사를 들려준다. 오리온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사냥꾼이다. 그는 아르테미스 여신이 쏜 화살에 맞아 죽고 별자리가 된다. 오리온은 ‘사냥꾼-남성’ 모델에 근접하는 남성성의 원형이다. 이 영웅적인 사냥꾼의 신화에 매료된 남성은 권력에 대한 욕망을 남성만이 가지고 있는 원초적 욕구로 인식했고, 사냥 행위를 통해 ‘자연’ 또는 ‘여성’을 지배하려는 욕구를 분출했다.

 

 

 

 

 

 

 

 

 

 

 

 

 

 

 

 

 

 

 

* [절판] 조지 L. 모스 《남자의 이미지》(문예출판사, 2004)

* 에드워드 루시-스미스 《남자를 보는 시선의 역사》(개마고원, 2005)

* [품절] 플로랑스 타마뉴 《동성애의 역사》(이마고, 2007)

 

 

 

 

《남자의 이미지》(문예출판사, 2004), 《남자를 보는 시선의 역사》(개마고원, 2005), 《동성애의 역사》(이마고, 2007) 등은 폭력, 권위주의, 남성 우월주의를 표면화한 남성성이 어떻게 형성되는지를 설명한다. 이 세 권의 책을 쓴 저자들의 설명은 크게 차이가 없다. 18세기 독일의 미술사가 빙켈만은 고대 그리스 조각에서 ‘고귀한 단순함과 고요한 위대함’을 발견했다. 그는 그리스 조각에 나타난 남성성을 ‘이상적인 아름다움’이라고 추켜세웠다. 고대 그리스의 미술은 주로 신과 영웅에 속하는 남성을 누드로 표현했다. 빙켈만은 고대 그리스 조각으로 재탄생한 남성의 신체가 ‘용기’와 ‘명예’와 같은 도덕성을 상징한다고 봤다. 고대 그리스인들과 빙켈만은 벌거벗은 남성의 몸을 조형의 백미로 추구했다. 그런데 문제는 고대 그리스인과 빙켈만 같은 신고전주의자들은 남성만을 ‘인간’으로 인식했다는 것이다. ‘사냥꾼-남성’의 아름다움을 찬양하는 시대 속에서 여성은 ‘인간’이 될 수 있는 기본 자격조차 갖추지 못한 존재였다.

 

 

 

 

 

 

 

 

 

 

 

 

 

 

 

 

 

 

* 티투스 리비우스 《리비우스 로마사 1》(현대지성, 2018)

* [품절] 조이한 《그림에 갇힌 남자》(웅진지식하우스, 2006)

 

 

 

 

신고전주의 화가 자크 루이 다비드『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는 ‘사냥꾼-남성’에 부합하는 아름다움을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이다. 다비드는 이 작품에서 고대 로마 역사가 티투스 리비우스《로마사》에 나오는 호라티우스 삼형제 이야기 중 한 장면을 그렸다.

 

 

 

 

 

 

전투에 나가기 전 삼형제는 조국을 위해 승리를 맹세한다. 형제들의 비장한 표정에 죽음을 불사하겠다는 각오가 드러난다. 이들의 결의는 칼을 건네는 아버지 앞에서 맹세하는 모습에서 두드러진다. 이처럼 호라티우스 형제의 모습에서 ‘조국 수호’라는 대의를 위해 무기를 드는 강인한 남성성이 느껴진다.

 

 

 

 

 

 

 

 

 

 

 

 

 

 

 

 

 

 

* 허버트 스펜서 《진보의 법칙과 원인》(지만지, 2004)

 

 

 

 

제국주의 시대에도 ‘사냥꾼-남성’ 남성성은 건재했다. 근대 이후 남성은 가부장적 권력과 경제력을 내세워 가족 및 사회의 ‘지배자’ 지위를 유지했다. 그리고 남성은 세계로 눈을 돌려 식민지를 통치하는 ‘지배자’로 군림했다. 허버트 스펜서가 주장한 사회진화론은 남성성과 결합해 여성 차별, 식민지(피식민지 여성) 정복 등을 정당화하는 이념이 되기도 했다. 사회진화론자들은 찰스 다윈이 제시한 ‘진화’를 ‘진보’와 동일하게 보는 오류를 범했다. 백인 남성 지식인들은 ‘이성’, ‘문명’, ‘진보’는 남성의 세계에 속하고, ‘자연’은 여성의 영역에 속한다고 생각했다. 심지어 ‘반제국주의’, ‘반자본주의’를 앞세운 마르크스와 그의 사상을 이어받은 독일 사회민주당은 유럽의 식민지 지배를 옹호하기도 했다.

 

마리아 미즈는 남성과 여성을 이분법으로 구분하여 남성의 ‘자연’과 ‘여성’ 지배를 용인하는 구분을 ‘식민주의적 구분’이라고 했다. 그리고 ‘식민주의적 구분’에 익숙한 백인 남성을 자본주의적 가부장제의 화신’이라고 표현하면서 비판했다.

 

 

  세계는, 최소한 우리 모두가 사는 세계는 유한하기 때문에, 다른 것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자본주의적 가부장제의 화신인 백인남성은 현실의 유한성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는 신처럼, 강하고 영원하며 전지전능하기를 원한다. 그래서 그는 낮은 곳에서, 좀 더 원시적인 것에서부터 좀 더 높고 복잡한 수준의 존재로 영원히 진보하고 진화한다는 발상을 발명해 왔다. 이런 발상은 주로 유대인이나 아리아인과 같은 가부장적 유목민의 정복이라는 역사적 경험에 그 물질적 뿌리를 두고 있다. 유대교나 기독교의 신학자는 자연을 정복하고 복속시키면서 영원히 팽창할 권리라는 발상에 필요한 종교적 정당성을 부여해 왔다.

  진화적 변화라는 발상은 서구의 ‘선진’ 국민이 진보에 대해 가진 생각의 중심이 되었다. 그들은 모든 ‘뒤처진’ 국민에게 진보의 상징이 되었다. 같은 방식으로 남성은 여성에게 진보의 상징이 되었다. 

 

 (마리아 미즈 《가부장제와 자본주의》 430쪽)

 

 

 

식민지라는 용어 자체가 옛말이 된 지금도 ‘남성-사냥꾼’ 남성성, ‘식민주의적 구분’에서 비롯된 여성차별 등은 여전히 남아 있다. 과학 기술 발전의 덕을 보면서 ‘진보’의 정점에 도달한 인류는 ‘낙관적인 진보’에 도취했던 과거 인류의 행동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 유발 하라리 《호모 데우스》(김영사, 2017)

* 유발 하라리 《사피엔스》(김영사, 2015)

 

 

 

이제 인류는 지적 능력을 바탕으로 신의 영역을 넘보는 존재(호모 데우스, Homo Deus)가 되려고 한다. 유발 하라리는 과학 기술을 현명하게 사용하지 못할 경우 ‘파멸’이라는 불행한 대가를 얻게 될 것이라고 경고한다. 여성은 과학기술에 대한 진입장벽에 마주친다. 여성이 과학기술계에 진입했다 할지라도 결혼과 출산으로 과학기술 활동을 계속하기가 어려워진다. ‘신이 된 인간’에 속하게 될 인류 대부분은 남성이다. 그들이 선호하는 생명공학, 인공지능 등 과학기술은 인류 전체를 위협하는 ‘무기’가 될 수 있다.

 

국가주의, 영웅 신화, 가부장제가 강화된 사회일수록 위계질서와 폭력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 남성 중심의 위계질서가 공고화된 사회일수록 성폭력이 발생할 가능성이 높다. 권력 관계에서 소외된 남성일수록 과도한 남성성의 발현을 통해 남자다움을 인정받으려고 한다. 아직도 일부 남성들은 ‘남성-사냥꾼’ 남성성이 찬양받던 시절을 그리워한다. 그 시절 남성들은 ‘가부장적 권력’, ‘경제력’으로 표상되는 남성성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당당히 드러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남성이 ‘강인한 남성성’을 연기하면서 수행하던 시대는 끝났다. 이제는 남성 스스로 넥타이를 잘라내야 한다. 그리고 호모소셜(homosocial, 남자들의 연대)을 유유히 빠져나와 자신 있게 말해야 한다.

 

 

“남성 여러분, 이제 세상은 달라졌습니다. 권위를 내세운 우리의 공연은 끝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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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아 2018-04-05 15: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위계질서에 의한 폭력과 권위에서 소외된 남성의 남성성 발현은 왠지 서로 충돌하는 것 같아요.
그리고 강자, 기득권자에게 스스로 변화할 것을 주문하는 것은 역사이래 실천된 적이 없는것 같아요. 그래서 미투 운동 처럼 사회적 약자가 세력화되는 움직임이 필요한 것 같구요.
세상이 변화할 수 있도록 모두가 인식의 틀을 깨는 노력이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좋은 리뷰 잘 보고 갑니다.~~

cyrus 2018-04-05 18:21   좋아요 0 | URL
이번 국내 미투 운동을 계기로 조금씩 성 범죄에 대한 인식이 달라질 거로 예상해보지만, 여전히 미투 운동을 무시하고 성 범죄의 심각성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래도 세상에 변화를 주는 노력이 계속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지금행복하자 2018-04-08 09: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콜바이네임 속에 그리스 동상과 향연등 그리스 미소년에 대한 이야기들이 나오는데.. 남주인공 엘리오의 모습을 보면서 저런 소년의 모습이 서양인들에게는 가장 아름다운 모습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소년에서 벗어나려는 나이대의 묘한 느낌의 남자몸.. 일부러 그렇게 찍었겠지만 섹시하다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cyrus 2018-04-10 13:47   좋아요 0 | URL
토머스 만의 소설을 영화화한 <베니스에서의 죽음>에 나오는 음악가 아센바흐가 좋아하는 소년이 꽃미남이에요. 그 영화에도 미소년에 바라보는 서양인의 시선을 확인할 수 있어요.

지금행복하자 2018-04-10 14:47   좋아요 0 | URL
그 배우저도 알아요 베르샤이유장미의 오스칼이 부활하면 그런 모습이 아닐까생각했어요
정말 예뻤어요